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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새로 보는 교회사16: 새로운 영성과 전통적인 수도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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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05 ㅣ No.170

[새로 보는 교회사 16] 새로운 영성과 전통적인 수도생활

 

 

유럽 팽창기의 십자군 운동

 

그레고리오 개혁기(1059~1123년)는 바로 중세 유럽이 팽창하는 시기와 같은 때이다. 유럽의 팽창은 사회조직 확대, 경제성장, 인구가 증가한 것뿐 아니라, 농업기술이 발달하는 등 사회전반에 걸쳐 커다란 발전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동시에 서쪽으로는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고, 동쪽으로도 영토를 넓혀가며 나아가 북쪽 지방으로도 널리 유럽화가 퍼져나가게 된 시대이다. 이러한 유럽 팽창을 쉽게 드러내는 예가 다름아닌 ‘십자군 운동’이다.

 

원래 십자군 운동은 이슬람을 물리치기 위한 성전(聖戰)의 형태로 스페인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11세기에 이르러 터키인들이 성지를 점령하면서는, 오래 전부터 있어온 것이기도 하지만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순례자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일어났다. 이렇듯 초기 십자군의 목적은 분명 종교적인 이유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내면에는 다른 요인들이 존재하였으니, 앞서 말한 대로 온 유럽에 활력이 넘치면서 생기는 정치경제적인 요인과 영토확장을 바라는 염원이 합쳐진 현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십자군 운동을 역사적으로 판단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십자군 시대 이후 유럽이 동방, 또 새로운 문화와 교류하면서 커다란 변화가 일게 되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상업적인 약진과 동방문화의 유럽 유입은 르네상스기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십자군 운동이 결성되고 추진될 수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유럽 사회에 내재하고 있는 종교심의 발로라고 하겠다. 그중에서도 여러 수도생활이 발생하여 생활하여 온 것이 그의 원천적인 힘이라고 할 수 있다.

 

 

1. 수도생활 확장으로 본 사회적 영성적인 윤곽

 

개혁시대에 오면서 여러 방면에서 종교심을 향상시키는 운동이 일어났다. 수도자들과 순회 강론자들, 재속사제들의 신앙심이 향상되고 더욱이 이들이 서로 보완되면서, 이런 분위기는 결국 그레고리오 개혁과 그 개혁을 유럽에 확장하는 데 한몫을 단단히 하였다.

 

1) 수도생활 확장의 사회적 관점

 

성직자와 평신도 그리고 수도자들은 모두 여러 방면의 쇄신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수도생활을 쇄신하고 확장시키는 데 이처럼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참여하지 않았다면 새로운 분위기를 창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범적으로 살면서 대중한테 설교를 하는 전통이 대중적인 분위기로 있었기 때문에, 전유럽의 모든 사람이 참여하는 십자군 운동이 가능했던 것이다.

 

십자군을 가능하게 했던 그 결집력은 바로 회개를 위한 순례운동이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십자군 이전에 이미 여러 지역의 성지를 많은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어 순례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거룩한 도읍을 향한 참회의 거지순례가 성행하였다. 이 정화운동은 개인적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집단을 이루었다. 그들의 이상은 바로 초대교회 신자들의 삶이었다. 이런 움직임에 사회 전체가 동요되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가난을 따라서 살려는 삶을 지향하면서 수도생활의 이상도 변화하였고 이에 따라 수도원의 형태가 서서히 바뀌었다. 이제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봉쇄수도원의 생활을 표본으로 삼지 않고, 사회 속에 살면서 복음을 실천하는 길을 찾게 되었다. 따라서 이제 규율이나 조직이 아니라 사는 형태를 중요하게 여겼다(Non Ordo, Sed Modus Vivendi).

 

1080년경에 일련의 재속사제들이 “완전히 벗은 그리스도를 따르자”는 모토를 건 영성운동을 주장했는데, 이는 바로 개인이, 또 사회 전체가 가난한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하는 분위기를 말해준다고 하겠다.

 

2) 은수생활의 두 번째 파도

 

이 시대에 유럽에는 두 번째 은둔생활이 크게 확산된다. 이 파도는 가난과 고행의 확산이며 대중 영성의 발로로,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이상형으로 등장하였다. 자연스레 우거진 숲길이나 성지를 향하는 순례의 길목들이 바로 은둔처를 제공했다. 사막이든, 고정된 곳이든, 임시적이든, 그 어디건 사람들이 들끓었다.

 

회개의 방법과 은둔생활의 양상도 여러 형태를 띄었다. 자기 집에서 회개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 순례하면서 회개의 삶을 사는 사람들, 그리고 수도원 가까운 곳에서 전통적인 은수생활의 독립적인 방식을 택하거나, 성당에 예속된 생활도 있었다. 수도원의 수도자들도 더 조용한 곳을 찾게 되고 재속 성직자들도 사람들한테서 떨어져 살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 파도의 힘은 큰 인물들이 모아 그 영향이 커지다가 12세가 중반부터는 아주 약해졌다.

 

3) 초대교회의 이상적인 삶

 

은둔생활이 성행하자 모든 사람들은 초대교회를 이상으로 삼았다. 사도행전 4장 32절에 “그 많은 신도들이 다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는 말씀을 이상으로 생각하면서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렇게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모이기도 하였다. 이 이상은 다시 한번 수도원의 수도생활의 최고 위치를 흔들었다. 예루살렘에 공동체를 재현시키는 일은 수도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고 모든 성직자들, 교회 종사자 그리고 교회가 쇄신되기를 바라는 모든 신자들의 의무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 실제로 재속사제들과 참사회원들 그리고 평신자들이 문자 그대로 살려는 운동을 실천하였다. 사도들의 삶을 추구하는 재속사제들이 이 삶을 가르치고 설교함으로써 성직자, 평신자, 남자, 여자, 혼인한 사람, 독신자들이 모여서 초대교회처럼 사는 공동체가 탄생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초대 공동체의 이상은 개혁가들이 보호하였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이 이상과 이러한 삶이 교회를 성직매매와 사제들의 문란한 삶에서 쇄신시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재속사제와 평신자들이 능동적으로 교회에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하기 때문이었다. 이 초대 공동체의 이상은 수도생활을 더욱더 확장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고 할 수 있다.

 

4) 수도생활의 성장과 과거 형태의 수도원

 

역사가 발전해 가고,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과거 형태는 쇠퇴하기 마련이지만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회와 교회의 상황이 바뀌고 또 영성이 바뀌었다 하더라도, 옛 형태의 수도생활과 그 역할이 끊어지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운동이 활발해지자 옛 수도원들도 자극을 받아서 그레고리오 개혁 시대에 교회의 쇄신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 종사자들의 윤리관 확립과 교회조직을 재정비하는 것과 함께 옛 수도원들도 새로운 운동을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드러내는 게 바로 그리스도의 가난을 온전히 따르는 수도회들의 창설이다. 따라서 옛 모양과 새로운 형태의 수도원이 동시에 활발히 활동하게 된다. 규칙에 충실하려는 사람, 근본적인 규칙대로 살려는 사람, 복음을 유일한 규칙으로 삼는 사람들이 섞인 사회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가난이라는 영성을 재발견한 것은 사막생활이든, 사목생활이든, 고독한 생활이든, 대중 속이든 서로 통할 수 있는 길목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다양성은 유럽의 팽창과 그레고리오 개혁으로 속속들이 수용되었고, 그러한 바탕에서 새로운 수도회가 나타나고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2. 재속사제들의 운동

 

초대교회를 본받아 교회쇄신을 위하여서 노력하는 사람들, 주교나 은수자, 수도자와 평신자들의 영향을 받아 재속사제들의 삶의 형태도 변화를 추구하게 되었다.

 

‘재속사제들의 운동’은 특별한 창시자는 없지만 어디에서나 살아있는 운동이 되었는데, 그 힘은 바로 초대교회 생활을 따르는 실천력이었다. ‘재속사제들의 운동’은 공동생활을 하면서 가난하게 그리고 사도들과 그 제자들의 모범을 따르려는 운동이다. 앞서 말한 대로 이 같은 운동이 재속사제한테까지 미치게 된 것은 당시 유행하던 은둔생활의 파고(波高)가 미친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같은 줄기의 운동이면서도 나중에 둘로 나뉘어 구별되었는데, 그것은 조금 덜 엄한 옛 방식을 따르는 것과 아주 엄한 새로운 방식을 따르는 것이다.

 

이 같은 운동이 일어나면서 재속사제들의 활동은 바로 그레고리오 개혁에 접목되었다. 교회 안에서 사도들의 영성이 드러나고 초대교회를 지향해 나갈 때, 쇄신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성직매매와 성직자들의 윤리생활에 안정을 기하고, 주교 중심의 교회 행정조직이 정비된 것이다. 유럽의 팽창이라는 측면에서도 재속사제들의 움직임은 평신자들한테 강한 자극이 되어 그들의 적극적인 활동을 이끌어내는 원동력을 제공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사회에서 교육과 자선 그리고 병원과 군사적 의무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분위기를 만들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과거의 수도원 중심의 영성은 새로운 사제들의 영성 앞에서는 한물간 형태가 되어버렸다.

 

이 운동의 선구자들은 재속사제들 속에서 나타났는데, 가난에 대한 서원과 공동생활은 그때까지 재속사제들의 규칙이었던 ‘아퀴스그라나(Aquisgrana) 규칙’을 따르는 사제들을 뒷전으로 물러서게 했다. 따라서 1070년경에는 재속사제들 속에서 구별이 생겨나게 되었다. 즉 재산을 소유하는 아퀴스그라나의 규율을 따르는 사제와 가난하게 살겠다고 서원하는 사제로 구분되었다. 그러자 새로 참사회원이 되는 사람들이 어디에 속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부류의 사제들 외에도 공동생활이나 가난에 대한 서원 없이도 사제의 정신을 찾으려는 단순한 사제들도 나타났다.

 

이 같은 운동이 일고 있을 때, 특히 규율에 엄격한 사제들이 교회의 다른 종사자들과 평신자들과 더불어 그레고리오 개혁의 선두에 나섰다. 실제로 그레고리오 7세 교황(1073~1085년) 시대에는 그들의 노력이 눈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교황 우르바노 2세(1088~1099년)는 바로 그들을 통해서 사목활동을 더욱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새로운 형태의 교회조직을 만들고 또 옛조직을 쇄신하였다. 이들은 교회의 모습을 아름답게 만들었다. 전례를 거행함에 장중하고 엄격했으며, 성직매매와 재산증식을 추방하고, 가난하게 살겠다고 서원하고 공동생활을 하며 정결한 생활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자신의 삶을 수도생활의 근본정신과 잘 조화시켰다. 그들은 공동생활과 가난과 정결 그리고 주교에게 순명하였으니, 수도자들의 면책특권 문제도 없고 교회의 주인들에게 굽신거릴 이유도 없었다.

 

이런 공동체 생활을 하는 재속사제들의 지역은 대개 교황청과 연관이 있는 지역이거나 쇄신된 곳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공동체 생활을 하는 터전은 주교좌 성당의 부속이거나 본당의 부속이었다. 아울러 유럽의 병원역사를 보면, 이러한 규칙 속에 산 재속사제들이 병원을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그네나 순례객들이 머물 수 있도록 교통의 요지나 사제관 곁에 구호소를 세웠고, 이곳에서 사제와 평신자들이 환자들에게 봉사하였다. 따라서 병원들, 수도원이나 기사수도회나 십자군으로 생긴 성전 기사수도회들도 그 원천에서는 바로 이런 공동생활을 영위한 사제들에게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시대에 발생한 새로운 수도원이나 은수자들 그리고 재속사제 단체와 순회 설교가들이나 모두 실질적인 보호가 필요했고, 또 그들에게는 법적인 형식과 성숙이 필요하기도 했다.

 

[경향잡지, 1995년 4월호, 구본식 신부(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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