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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새로 보는 교회사17: 시토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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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05 ㅣ No.171

[새로 보는 교회사 17] 시토 수도원

 

 

그레고리오 개혁과 아울러 유럽의 팽창은 수도생활에 놀랄 만한 확장을 가져왔다. 클뤼니 수도원도 대 우고 원장(1049-1109년)의 지도로 그 정점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몬테카시노 등의 옛 수도원들도 대단한 발전을 이룩했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수도원이 발전하는 것은 물론, 이 무렵에는 새로운 수도원들도 엄청나게 많이 창설되어 발전해 나갔다. 이때 새로 생긴 수도원은 대부분 교회사에 작은 흔적을 남겼으나, 체르토시니(Certosini), 시토(Citeaux) 등 몇몇 수도원은 역사 속에 뚜렷하게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교회개혁과 수도생활의 이상을 세우고 제2차 십자군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베르나르도 성인의 치스테르첸시 수도원 또 오늘의 이 수도원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시토 수도원 창설

 

시토는 보르고뉴 지방의 랑그르에서 사롱 지방에 이르는 옛 로마로 이르는 길 중간에 자리하고 있다. 새로운 시토 수도원의 창설도 수월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 기원은 1075년경 로베르토 성인한테서 출발한다. 성인은 1075년에 일단의 은수자들과 함께 랑그르 교구의 몰레슴(Molesme)에 도착하여 공동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수도생활의 형태에 대해 논란이 일자 로베르토는 스테파노 하딩 등 스무 명 남짓한 수사들과 함께 몰레슴을 떠나도 좋다는 허락을 얻어 다른 곳으로 옮겨가 시토에 새로운 수도원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열망하던 완전한 수도 분위기를 찾지 못해 애태우던 로베르토는 마침 몰레슴 사람들의 요청이 있자 다시 돌아가게 된다. 이로 인해 시토회 첫 원장들 명단에서 로베르토는 빠져있다.

 

로베르토가 돌아가고 난 뒤 알베리코가 원장이 되면서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정착을 한다. 이렇게 정착하는 데는 클뤼니의 우고 원장의 도움이 컸다. 창설일은 1098년 3월 21일로 베네딕토 성인의 축일과 성지주일이 겹치는 날짜였다고 하는데, 1100년 10월 19일에 파스칼 2세 교황으로부터 법적 인정을 받았다.

 

이 수도회 수사들은 흰 옷을 입기 때문에 ‘하얀 수도자’란 별명으로 불렸다. 알베리코 이후 앵글로 색슨족의 귀족 출신인 스테파노 하딩이 원장이 되면서 더욱 큰 발전을 이루는데, 1113년 라페르테에, 1113년 폰티니에, 1119년 폰테나 등에 예하 수도원을 세웠다. 그러나 시토회가 진정한 명성을 이루고 교회에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은 성 베르나르도가 입회하고서부터이다.

 

 

성 베르나르도

 

보르고뉴 지방의 오랜 귀족가문 출신인 베르나르도 성인은, 세상의 쾌락에 대한 혐오 때문에 수도자의 길에 들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미 대수도원이 되어있고 또 규칙이 어느 정도 느슨해진 클뤼니보다, 규칙을 문자 그대로 지키기 위해 고행생활을 하는 시토회를 택했다. 수도원에서 그는 다른 수도자들과 똑같이 행동하고 생각하고 고행을 했다. 그는 자신의 노력으로 하느님께 이르게 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규칙에 충실함으로써 그 규칙이 자신을 어떤 경지에 이르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고행은 하느님 사랑에서 비롯한다. 하느님의 사랑에 도달하기 위해서 자신만을 생각하게 하는 인간적인 사랑을 멀리해야 하고, 인간적인 사랑을 멀리하기 위해서는 고행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배부르게 먹는 것은 목구멍의 죄에 해당되었고, 잠자는 것도 시간낭비로 여겼다. 15년 동안 고행과 묵상생활을 한 뒤에 25년 동안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영국 등 두루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이단과 싸우고, 주교와 영주, 왕들을 훈계하였으며, 교황들한테 조언을 하면서 제2차 십자군 운동을 독려하였다.

 

그가 이러한 여행을 한 이유는 이웃 사랑 때문이었다. 이웃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가 하느님의 사랑을 구하고 또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을 자신 안에 가두어 널리 전하지 않으면 그것은 이기적인 것이다. 자신이 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입고 그것을 또한 널리 분산시켜야 했던 것이다.

 

 

클레르보 수도원 창설

 

베르나르도 성인이 시토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하딩 원장은 그에게 새로운 자(子) 수도원 창설의 임무를 맡겼다. 그는 열두 명의 수도자들과 같이 클레르보에 있는 ‘고뇌의 원인인 계곡’이라는 곳에 수도원을 세우기로 하였다. 그는 규칙에 따라 전례에 필요한 몇 가지 소지품만 가져왔을 뿐 다른 필요한 것은 모두 현지에서 찾아 충당해야만 했다. 초막을 지어 수도원으로 삼았다. 이 출발은 앞으로 시토회 생활양식에 아주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수도자들의 완전한 관상생활을 위하여 많은 고행을 하였는데 수도자들이 너무 힘들다고 호소하자, 어려운 고행은 자신한테만 적용하고 다른 수도자들한테는 할 수 있는 만큼의 고행만 요구하였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베네딕토 성인의 규칙을 글자 그대로 살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수도자의 적이라고 간주된 두 가지 위험을 피하는 데 아주 엄격하였으니, 이는 바로 여자와 속세의 학문이었다. 성인은 여자를 멸시해서 그런 것은 아니나 여자를 마귀의 화신으로 여겼다. 그것은 그가 여자 수도원을 세우는 것으로 드러난다. 오로지 수도자들을 걱정해서 나온 생각이었다. 필요한 물건을 가져다주는 부인들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묻는 은둔자한테, 여자와는 이야기를 나누어서도 안되고 방문을 허용해서도 안된다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이것은 여자는 수도원의 어떤 곳 즉 작업장이나 수도원 경내에 발도 들여놓아서는 안된다는 시토회 규칙을 지키기 위함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정절을 지키는 데 범죄의 기회조차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또한 속세의 학문을 수도자의 다른 적으로 여겼다. 학문은 위험한 영광이며 수도자들한테 자만심과 이기심을 일으키고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학문은 정신적인 유혹을, 여자는 육체적 유혹을 느끼게 하여 두 가지 다 수도자의 기본적인 덕행인 정절과 겸손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수도자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으로 바쳐야 하고 자신의 가족과도 이별해야 했다. “누구든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면 나에게는 합당하지 않은 사람이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수도자의 생활은 포기의 연속이었다. 이를 위해서 성인은 규칙을 철저히 지켰으며, 두 마디 말에 이 모든 것을 집약하였으니 바로 회개와 순명이었다. 또한 모범으로 가르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수도자들이 철저하게 규칙을 지키도록 엄격하게 감시하였다. 단적으로 클레르보의 식사는 너무 형편이 없어 우유로 만든 것이라든지 물고기나 달걀 같은 것은 절대로 수도원에 들여오지 못했다.

 

성인은 또한 정신의 고행을 수행했다. 수도자들한테 각자 ‘자기의 뜻’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순전히 우리들의 뜻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뜻과 일치되지도 않고 사람들의 뜻과도 일치되지 않는 것이다.” 이 목적에 이르기 위해서 전적인 순명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렇게 철저한 고행을 요구했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융통성을 보였다. 잘못을 뉘우친 이는 위로하고, 약한 사람을 이해하고, 고행을 스스로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따라서 그는 엄격함과 부드러움을 지닌 아버지와 같았다.

 

 

클레르보 수도원의 성공

 

클레르보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귀족과 학자 성직자 할 것 없이 하느님의 사랑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몰려와 시토회의 생활을 받아들이고 성인의 지도를 받고 싶어 했다. 그가 강론을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이삼십 명 되는 사람들이 그를 따르려고 몰려왔다. 1116년에는 한 학교의 선생과 학생 전체가 수도원에 입회한 일도 있다. 따라서 이제 시토회의 예하 수도원으로 출발한 클레르보는 자신의 예하 수도원을 창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인의 외적 활동이 커져가고, 그에 따라 수도자들이 계속 불어나 이탈리아나 독일에서도 몰려왔다. 그 때문에 유럽 전역으로 시토회의 예하 수도원이 퍼져나가게 되었다. 성인이 죽은 1153년쯤에는 삼백오십 개의 시토회 수도원 가운데 백육십 개 이상이 클레르보의 예하 수도원이었다. 이런 현상은 성인의 영향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당시의 종교적인 열망을 드러내고 있는 현상이라 하겠다.

 

 

시토회의 생활

 

시토회가 사는 형태를 보는 것은, 당시 다른 수도원들의 삶을 간접으로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그들의 규정에 따른 생활을 알아보고자 한다. 시토회는 베네딕토 성인의 규칙을 글자 그대로 지키려는 이상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그 적용에는 1119년에 만든 ‘사랑의 헌장(carta caritatis)’과 그 뒤 1134년에 만든 규정대로 수도자들의 생활을 정하고 있다. 음식에 관해서는 기름을 묻힌 채소를 금한다는 내용까지 규정하고 있고, 수도자들의 의복은 처음엔 추위를 전연 막을 수 없었고, 잘 때에는 옷을 입고 신발을 신은 채 짚이불에서 자야 했으며, 환자도 요를 쓸 수 없었다. 정신적인 회개는 육체적인 회개가 따라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수도원장의 뜻에 완전히 따르는 순명이 절대라 여겨 불복종에는 매로써 벌을 내렸다. 시토회는 주변의 클뤼니 수도원이 적용하고 있는 완화된 베네딕토 성인의 규칙을 거부하고, 고행생활 그 자체로만 일관했다. 그것이 잘 나타나는 것이 바로 가난과 노동이었다.

 

가난은 수도자들한테 절대적인 요구사항이었다. 수도자가 개인물건을 가지고 있을 경우에는 일년 동안 모든 금요일에 빵과 물만으로 금식할 것이며 사십일 동안 속죄기간을 가져야 하는 벌을 내렸고, 작은 도적질이라도 있으면 공동체에서 추방하는 벌을 내렸다. 공동체의 가난에 대해서도 규정을 해놓았는데, 성당이나 마을, 하인과 방앗간 같은 것을 소유하는 것을 금했다. 다만 경작할 땅이나 포도원, 목초지, 숲이나 낚시를 할 수 있는 시냇물 등은 소유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자신들이 경작하거나 쓰기 위해서일 뿐이고, 남에게 빌려주어 소작료를 받기 위해서는 소유할 수 없다고 규정하였다. 물론 이와 같은 재산소유도 매매 등의 방법은 엄격하게 금했고 희사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따라서 돈을 소유한다는 것은 절대로 허용되지 않았다. 구걸이나 모금은 성당 짓는 일을 위해서조차 금하였다. 다만 스스로 희사하는 것은 허락되었다. 이때 지은 성당도 아무런 장식이 없고 성물도 화려한 것을 피하는 등 가난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세월이 차츰 흐르면서 이 공동체의 가난한 모습도 서서히 변질되기 시작한다. 이렇듯 엄격한 가난과 동시에 수도자들은 노동을 하였다. 공부는 성서와 교부들의 저서로 국한되었으며, 손으로 하는 노동을 강조하였다. 보조수사는 특별한 공작이나 농사의 조언자였고 수도자들이 직접 땅을 경작하고 베고 그리고 도랑을 파는 일 등 끝까지 모든 일을 다했다. 이런 사실은 보조수사의 역할이 많은 클뤼니 수도원과는 좀 달랐다.

 

그들은 자기네가 경작한 것만으로 살았다. 그러나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이 뒤따르고 그들이 경작한 땅이 너무 척박하여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을 때, 영국이나 독일 등에 농사지을 땅을 얻어 예하 수도원을 지었으며, 당시 행하던 가축사육이나 모직공업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수도생활이 확장되고 새로운 수도원 공동체가 많이 생겨나던 시대에 베르나르도 성인을 중심으로 시토회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이것으로 당대 수도자들의 삶을 얼마간 엿볼 수 있지 않았는가 싶다.

 

[경향잡지, 1995년 5월호, 구본식 신부(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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