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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새로 보는 교회사18: 수도생활의 다양성과 고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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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06 ㅣ No.172

[새로 보는 교회사 18] 수도생활의 다양성과 고유성

 

 

수도생활의 법적 형성기(1059-1123년)

 

교회론이 아직 정립되지 않았을 때, 교회 안에서는 교회를 구성하는 역할 논쟁이 활발하였다. 즉 수도자, 성직자, 평신자 세 신분의 교회 안 역할 논쟁이었다. 수도자들이 자신들이 교회의 중심이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성직자들은 사제직의 고귀함을 들어 이에 맞섰고, 평신자들은 신분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이들의 논쟁은 교회론의 주된 주제에 관한 근본적인 것들로, 사도적 생활의 개념과 사제직의 가치 그리고 교회 안에서 수도자의 존재와 평신자의 성화 문제들이었다. 동시에 이런 논쟁의 뒷면에는 당시까지 안정되지 않은 여러 가지 요소가 존재하였으니, 십일조와 헌금 관리 그리고 설교의 책임은 누구한테 있는지, 또 사목의 주체는 어느 신분에 있는지 하는 것들이었다.

 

이 논쟁은 주로 성직자들과 수도자들 사이에 일어났다. 새로 형성되고 있는 그리스도교 사회의 경제와 권위, 삶의 주도자가 누구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양쪽에서 모두 성서와 역사적인 사실 그리고 교부의 말씀에서 철저히 기초를 찾아 논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각 신분이 자신의 자리를 찾게 되고 교회 안의 한 부분씩을 맡게 된다. 이런 논쟁이 발생하게 된 배경은 11세기 중엽에서부터 12세기 중엽에 일어난 여러 수도 형태의 활발한 활동과 단체로서의 법적 제도에 기인한다.

 

 

역할논쟁 발생 배경 1 - 그레고리오 개혁

 

당시의 법적인 환경과 사회경제적인 환경의 필요성에 따라서 각 수도단체들을 창설자의 정신에 따라 차별화하거나 법적으로 제도화해야 하였다. 이 시대는 교회가 자유를 추구하기 위해 세속권력과 투쟁하는 그레고리오 개혁시대로서 법적인 기초를 마련하고 있었으나, 안으로는 교황파와 황제파로 갈라져 있었다. 말하자면 수도원의 보호자가 황제인 경우와 교황인 경우가 있는데, 수도원의 특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한 쪽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수도원을 장악하려는 지방주교들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또 자신들의 특권을 보호하려고 노력해야 하였다.

 

수도원의 관할권은 예로부터 지방주교한테 있었다. 그러나 교회가 쇄신됨에 따라 차츰 교황과 로마 교황청에서 허용하는 특권이 많아졌다. 교황사절들한테도 수도생활을 보호하기 위하여 특권을 부여하였다. 이에 로마 교황청은 점차 특권의 내용을 구체화하고 새로운 수도원의 수도정신과 철저한 삶을 요구하게 되었다. 따라서 수도자들은 완덕을 추구하는 삶을 위해 베네딕토와 아우구스티노와 바실리오 성인의 규칙을 지도지침으로 삼았다. 그리고 제1차 라테란 공의회(1123년)와 제2차 라테란 공의회(1139년)에서 수도자들의 수도형태와 성직자들의 수도생활 형태를 모두 보호하기로 결정하였다.

 

제2차 라테란 공의회에서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분쟁을 막기 위해 수도자들한테는 성 베네딕토의 규칙을, 성직자들한테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규칙을 적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개혁시대의 윤리적이며 교회적인 요구에 따라서 교회 내 폐단을 쇄신하기 위해서 수도자들도 사목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수도원장들은 주교의 위치에서 주교가 가진 관할권을 그대로 쓰고 성당을 거느렸다. 그레고리오 개혁시대에는 교회 쇄신을 위해서 수도자 성직자들이 엄격하게 살면서 사람들을 가르치도록 격려하였다. 개혁 바람이 강하게 불던 시대였기 때문에 재속사제나 수도자들이나 그 보조자들 모두가 힘을 합쳐서 노력했고, 교회는 그들한테 법적 특권을 허용했다. 이렇듯 사회가 그리스도교화하고 안정이 되면서 서로의 역할에 대한 논쟁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역할 논쟁 발생 배경 2 - 중세 유럽의 팽창

 

그리스도를 따르는 여러 형태의 수도생활은 유럽의 팽창과 발전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제1, 2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등치고 사회를 혼란하게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화폐 위조자, 고리대금업자, 십일조를 횡령한 사람과 사회 선동자 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순례자들과 상인들, 농촌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안도 꾀하고 있다. 다시 말해 농업이 발전하고 사람들이 화폐를 사용하고 상업이 획기적으로 발전하였음을 나타내는 현상들이다. 물론 이런 발전을 뒷받침한 것은 급격한 인구증가였다. 이러한 발전의 뒷면에는 사생아가 증가하고 타락한 여자들이 많다는 문제도 지적되고 있다. 그리고 성직자, 수도자, 상인들 그리고 순례객들이 유럽 전체에 퍼져있는 통로를 같이 오가게 되면서 모든 수도생활 형태들이 서로 만나게 되었다.

 

인구 증가와 이동, 화폐의 영향과 상업정신의 영향으로 수도원의 형태도 많이 바뀌게 된다. 십일조에 의거해서 살던 수도원과 새로운 수도원은 이제 노동의 고행을 강조하고 농장을 경영하게 된다. 따라서 수도자 자신은 가난하지만 그 공동체는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되었다. 성직자들은 이러한 상황의 변화에 신속히 대처한다. 신자들과 함께 재산을 관리하고 병원과 자선기관을 세우고 재산에서 생기는 소득과 노동의 수입으로 사목활동을 하게 된다.

 

이렇듯 유럽이 팽창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사람들 가운데 특징적인 사람들이 순회 설교가들이다. 이들 순회 연설가들의 등장은 유럽 팽창의 좋은 점과 어두운 면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들 주변에는 남자, 여자, 건강한 사람,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 부자 등, 평화와 자비와 영적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팽창하는 유럽 사회에 적응하면서 각기 그 수가 불어나고 그러면서 또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갔다.

 

 

수도생활의 제도화

 

한번 일어난 영적인 정신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법적인 형태를 가질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수도원을 제도화하는 것인데, 이 제도화는 창설자의 이상이 그의 죽음과 동시에 무덤에 묻히지 않고 법적인 형식으로 유지되어서 후계자들한테 전해지고, 교회를 위해 계속 활동을 하게 하는 것이다.

 

수도원의 제도화 과정은 일정한 기간 동안 진행되었다. 많은 형태의 수도생활이 이 기간에 기원을 갖는다. 이때에 재속사제회나 은수자들, 시토회, 사도적 설교가들의 삶의 형태가 법적 형식을 갖게 되고, 오래된 수도원들도 새롭게 수도형식을 제도화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제도화는 수도생활 형태의 각각 회(會)나 단(團)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음을 이른다.

 

이렇게 다양한 수도생활에 법적인 형식을 취하는 일에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하였다. 규칙에 명시되어 있는 내용과 이미 형성된 관습이 서로 마찰을 빚거나, 창설자들의 역할과 당시 수도생활을 제도화하는 후계자들의 뜻이 부딪치면서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이 문제는 해결하기도, 결론을 기다리기도 무척 어려웠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였는지 간단하게 알아보자.

 

은수자들은 대체로 사막의 교부들의 규범이나 그들의 모범을 따르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규칙과는 다르지만 후계자들이 만든 관습에 관한 저술을 참조했다. 이때 후계자가 언제까지 창설자를 알고 있었느냐와 창설자의 가르침에 얼마나 충실했는가를 따져보았다.

 

성직자들은 아퀴스그라나의 규칙을 거부하고 난 뒤에 일차로 성 아우구스티노의 규칙을 적용했다. 아우구스티노의 규칙은 모든 사제 공동체의 형태나 관습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제도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규칙은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따르지만 각 공동체는 창설자가 없는 형태를 지니게 되었다.

 

성 베네딕토의 규칙을 따르는 새로운 수도원은 좀더 복잡했다. 규칙과 창설자의 역할이 마묘했던 것이다. 수도생활을 쇄신하기 위해서 새로운 수도원들은 규칙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개혁 창설자들은 현실을 감안하여 기존의 관습을 각자 고유의 관습으로 대체시켰다.

 

이렇듯 각 수도원이 법적 제도화를 통해 차별성을 가지고 각자의 회(會, Ordo)를 구성했을 때, 그 고유성도 지키기 위해 노력하게 된 것이다.

 

[경향잡지, 1995년 6월호, 구본식 신부(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관장, 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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