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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ㅣ기타

추기경 정진석 회고록1: 추기경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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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5-15 ㅣ No.361

[추기경 정진석] (1) 추기경의 눈물


무거운 책임감 내려놓던 날 눈시울 붉어져

 

 

- 2012년 5월 10일 오후 7시(로마 시각 낮 12시) 교황청이 염수정 주교를 신임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직후 서울대교구청 주교관 마당에서는 이를 공식 발표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정진석 추기경(왼편)이 신임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와 손을 맞잡고 새 교구장 탄생을 축하하고 있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이제 교구장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시는 정진석 추기경님께 한 말씀 청합니다.”

 

2012년 5월 11일, 서울대교구 사제평의회가 긴급 소집됐다. 전날 저녁 7시(로마 시각 낮 12시)에 교황청으로부터 새로운 서울대교구장으로 교구 총대리 염수정 주교를 임명한다는 공식 발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진석 추기경은 이 임명으로 1998년부터 14년 동안 이끌어온 서울대교구장직을 이을 새 교구장을 맞아들이게 됐다. 

 

5월 10일 염수정 총대리 주교는 서울대교구장으로의 임명 발표 직후 대주교로 승품됐고, 이날 교구청 주교관 앞마당에서는 이를 공식 발표하는 행사가 열렸다. 수많은 취재진이 몰린 가운데, 염수정 추기경이 입을 뗐다.

 

“정진석 추기경님의 사목 방향인 생명과 선교에 더 많은 사목적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또한, 모든 이들이 친교를 이루며 분열을 극복하고 발전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곁에는 정진석 추기경이 있었다. 웃음을 띤 얼굴로 후임자를 바라보던 정 추기경이 연단 앞에 섰다. 

 

“염수정 대주교님은 교구 모든 일을 처리하시는 데 신명을 다 바치시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수행하셨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막중한 사명에 부응할 수 있는 능력과 성덕을 지닌 아주 훌륭한 분이십니다.”

 

이날 언론은 “2002년 주교품을 받고 교구 총대리를 맡아 일해 온 염수정 주교가 교구장에 임명됨에 따라 교구 사목 방향과 현재 추진 중인 사업들에 큰 변화는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는 기사로 새 교구장 임명 소식을 알렸다.

 

교구의 큰 경사를 맞은 다음 날 오전 10시, 교구청 별관 1층 대회의실에는 평의회 소속 사제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신임 교구장 착좌식과 관련한 제반 사항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5월의 아침 날씨는 쾌적했다. 햇볕에 오래 있으면 금세 더워졌지만 실내는 시원했다. 높은 하늘과 맑은 공기가 교구의 앞날을 축복하는 듯했다. 미리 참석한 사제들은 삼삼오오 모여 인사를 나누고 새로운 소식에 기대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교구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도 오갔다. 회의가 시작되자 몇 가지 중요한 사안들이 일사천리로 결정됐다.

 

가장 먼저 결정된 사안은 서울대교구장직을 내려놓는 정진석 추기경의 이임 미사였다. ‘사제 성화의 날’인 6월 15일 교구 사제 전체가 모인 가운데 명동대성당에서 열기로 하고, 지역별 혹은 직능별로 개최하려던 ‘사제 성화의 날’에 대한 계획을 변경하여 모든 사제가 명동대성당에 모여 함께 기도하고 강의를 들으며 미사를 봉헌하기로 했다. 

 

이어 신임 교구장의 착좌식을 준비할 준비위원회를 발족하고 조규만(바실리오) 주교를 필두로 교구 사무처장 안병철(베드로) 신부와 37명의 사제평의회 위원 전원, 명동본당 주임 여형구(미카엘) 신부, 남녀수도회 장상연합회 대표들, 교구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회장 등 교회 구성원을 총망라해 준비에 참여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정진석 추기경의 거처를 전임 교구장이었던 김수환 추기경이 살았던 혜화동 주교관으로 옮기는 계획까지 발표됐다.

 

 

마지막 한 말씀과 함께 

 

“정진석 추기경님께 한 말씀 청합니다.”

 

회의가 마무리될 무렵 마이크는 사회를 보던 사무처장 안병철 신부의 손에서 정진석 추기경에게로 전해졌다. 정 추기경은 평소처럼 담담했지만 천천히 입을 떼며 자신의 소회를 밝혔다. 

 

“고향인 서울을 떠나 수십 년 동안 청주교구의 교구장으로 살고 있던 제가 갑작스럽게 서울대교구장으로 부름을 받았을 땐 송구한 마음이었습니다.”

 

이내 정 추기경의 목이 잠기고 가늘게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 본래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는 마음으로 새로운 부르심에 응답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인간적으로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초기부터 많은 신부님들과 신자분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신 덕분에 대과(大過) 없이 하루하루 잘 지냈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하느님의 큰 은총입니다.”

 

정 추기경의 두 뺨에 가늘게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저는 어려운 일이 닥치면 창세기에 나오는 ‘야훼이레’를 믿습니다. 정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부족한 저를 위해 그 어려움을 처리해 줄 신부님이나 신자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야기하는 동안 정 추기경의 양 볼을 타고 흐르던 눈물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터져 나왔고, 더 이상 이야기를 이어갈 수 없을 지경이 됐다.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공개석상에서는 좀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없던 정 추기경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39세에 주교로 임명 

 

정 추기경은 39세의 젊은 나이에 주교로 임명되고 교구장으로 일해왔다. 젊은 지도자인 그의 어깨 위에는 희로애락의 감정보다는 무거운 책임감이 늘 자리했다. “삶을 스스로 자폐시켰다”고 정 추기경 스스로 표현할 정도였다. 슬플 때 마음껏 슬퍼하거나 기쁠 때 그 기쁨을 다 표현하지 못하며 살아왔고, 그것이 이내 익숙해졌던 그였다.

 

교구장의 자리에서 떠난다고 해 종신직인 추기경으로서, 지도자로서의 책임감마저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팽팽히 잡고 있던 긴장의 끈이 슬그머니 풀렸을 터였다. 그날 정 추기경의 흐느끼는 울음소리를 들으며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은 숙연해졌다. 그동안 정 추기경이 가졌던 마음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송구하고 감사합니다.”

 

정진석 추기경은 곁에 있던 안병철 신부가 건네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심호흡을 한 뒤 이 말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평의회에 참석한 신부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눈 뒤 홀로 별관을 나섰다.

 

“긴장이 풀리셔서 그러셨나 봐요?”

 

명동대성당 마당을 가로질러 주교관을 향하는 추기경을 뒤따라가다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게. 이런 일이 없었는데…. 신부님들이 많이 당황하셨겠어.”

 

여전히 정 추기경의 눈가는 촉촉이 젖어 있었다.

 

 

진석 추기경 회고록 집필을 시작하며

 

 

정진석 추기경과 함께한 허영엽 신부(오른쪽). 서울대교구 홍보국 제공

 

 

새해 첫날 염수정 추기경님을 비롯한 명동 주교관 식구들과 함께 혜화동을 찾았습니다. 교구장 이임 이후 혜화동 신학대학에 머물고 계신 정진석 추기경님을 뵙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랜만에 찾아가 세배도 드리고 함께 식사를 나눴는데, 문득 정 추기경님 이야기를 기록해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추기경님, 조심스럽지만 추기경님께서 그동안 걸어오신 길을 글이나 방송 인터뷰 같은 것으로 남겨둬야 하지 않을까요?”

 

“송구스러워서….”

 

“그래도 추기경님의 인생이 또 교구와 교회의 역사이기도 하니까요.”

 

“교회에 도움이 된다면 해야 하겠지? 그럼, 그걸 허 신부가 해줬으면 좋겠어.”

 

추기경님의 회고록은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제 개인으로서는 매우 영광스럽지만, 한편으로는 무척 무겁고 버거운 임무입니다. 하지만 교회의 역사를 기록한다는 마음으로 기쁘게 집필을 시작합니다. 그동안의 교회 기록과 정 추기경님의 구술을 토대로 매주 한 회씩 평화신문에 정 추기경의 이야기를 정리해 전하려 합니다. 

 

한국 현대사와 교회 역사의 한복판을 걸어온 한 사람, ‘추기경 정진석’의 이야기에  많은 분이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면을 할애해 주신 평화신문에 정 추기경님을 대신하여 감사 인사를 전하며, 아무쪼록 교회에 의미 있는 기록이 되길 바랍니다. 신자 여러분의 많은 기도와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평화신문, 2016년 5월 15일, 글=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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