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1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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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새로 보는 교회사19: 탁발 수도회가 태어난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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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06 ㅣ No.173

[새로 보는 교회사 19] 탁발 수도회가 태어난 배경

 

 

교회는 사회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으니, 수도생활이나 수도영성은 사회 정치 경제 상황이 변동함에 따라서 변화해 온 것이 사실이다. 복음정신을 사회에 실현하기 위해서, 수도자들이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서 수도생활 형태도 상황에 따라 변천을 거듭해 왔다. 어떤 사람들은 사회의 필요성에 따라 새로운 영성이나 공동체가 생성되는 것을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작용이라고 한다. 13세기에 이르러 생겨난 탁발 수도회가 급속한 발전을 이루어서 당시 교회에 크나큰 기여를 하는데, 탁발 수도회의 발생과 발전은 물론 당시의 역사 정치 사회 상황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경제상황

 

유럽이 형성되고 봉건제로 정치적인 안정이 이루어지면서, 10세기부터 인구증가와 함께 자유로운 사람이 많아지면서, 또 이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면서 도시가 발달하게 되었다. 도시가 발달한다는 것은 상업이 발달함을 뜻한다.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십자군 원정 이후부터 비잔틴 제국과 교역하게 되었다. 유럽 안에서도 이탈리아나 유럽 북부와 같은 원거리 무역이 활발해지자 그 교역과정에서 교통요지가 되는 장소가 상업적인 거점인 동시에 도시가 되었다. 도시에는 상공인들이 활동하고 있어서 재화를 축적하는 일을 하게 되고 이것은 자유시민을 탄생시킨다.

 

이러한 경제팽창은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커다란 변화를 만들어냈다. 토지에 얽매이고 현물로 세금을 내던 봉건제에서 화폐로 세금을 낼 수 있게 되면서 도시로 인구가 집중되고, 교회 성직자 역시 재화가 많은 도시로 모이게 되었다. 그런데 도시는 세속정신이 싹트고 세속정신에 물든 사람들이 활동하는 무대가 아닌가.

 

 

교회상황

 

그레고리오 개혁은 교회에 자유를 추구하고 동시에 교회에 간섭하는 평신도의 영향력을 줄이는 일에 기여하였다. 12세기 말에 이르러 교회는 모든 면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으며, 사회 관습과 축제 그리고 전례가 가톨릭 교회적으로 변모되었다. 게르만의 관습이나 미신들이 거의 사라지고 복음정신을 사회 곳곳에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교회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다시 성직자들이 부르주아화하는 현상을 낳았다. 영적인 생활이나 성경연구 같은 일로써 성직자의 자질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관심이나 물질에 대한 관심의 척도가 성소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교회 역시 서임권 투쟁 때에 받은 봉건적 특전을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교회나 수도원은 큰 재산을 소유한 부자가 되었다. 따라서 그레고리오 개혁이 추구하던 성직매매 추방이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결과를 초래하여, 고위 성직자들이 재물을 축적하는 일에 더 큰 열성을 보이게 되었다.

 

성직자들은 재산을 축적하면서 생활 자체가 상당히 느슨해졌다. 교회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성직자들이 이렇게 부귀영화를 뒤쫓는 일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사정으로는 성직자가 되는 일은 동시에 출세하는 방편이기도 하였다. 또한 십자군운동으로 들어온 사치와 천상적인 가치보다는 지상생활에 관심을 가지는 일반사람들의 경향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교회는 이러한 사회현상에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에 문화 예술적인 면이 발전함과 동시에 대학들이 등장했다. 중세를 무지와 정체의 시대라고 하는 것은 11세기 이전의 시대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12세기에 와서는 여러 지역에 대학이 생기면서 속세문학이 유행하게 되었는데, 교회일치를 저해하는 이단들도 여기저기서 생겨났다. 특히 이탈리아 중부와 프랑스 남부지방에서는 이러한 이단들이 영주들의 비호를 받으며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인노첸스 3세 교황은 이단자들을 제거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지만 아주 힘든 일이었다. 드디어 이단자들을 퇴치하기 위한 십자군이 형성되고, 1209년에는 큰 전쟁이 벌어져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사회문제

 

탁발 수도회는 이 같은 부귀영화를 쫓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복음정신을 열망하는 상황에서 생겨났다. 탁발 수도회는 이러한 여건에서 생긴 세 가지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되었던 것이다. 즉 부르주아적인 생활과 가난 그리고 반성직주의 문제였다.

 

새로 태어난 탁발 수도회의 수도자들은 교회를 새롭게 일으키는 데에 모든 힘을 쏟고 교회를 위해서 앞장서서 싸웠다. 당시 교회가 필요로 한 요인들을 좀더 자세히 말한다면, 첫째는, 일반신자들을 사랑하는 일이었다. 그들과 함께 살며 그들의 기쁨과 슬픔에 동참하는 일이었다. 이는 그때까지도 교회가 사람들과 함께 있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둘째는 가난을 사랑하는 일이었다. 가난을 실천하는 일은 진정한 그리스도 정신의 증거이며 종말론적 삶의 증거인 것이다. 셋째는 대중을 교회로 이끌고 설교를 통해서 진리를 전파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구체적으로 해결하는 데에는 이전에 있던 수도형태나 숫자로는 불가능하였다. 탁발 수도회 이전의 수도자들의 가난한 생활과 수도원 안에서 영웅적인 삶의 방식으로는 당시에 생성된 사회 경제 정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었고 직접 대면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복음정신이 근본으로 사회에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절대 필요한 시대였다. 이 시대요구에 부응하여 13세기 초에 초대교회로 돌아가서 생활하자는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났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은 이상적이고 순수하게 복음을 실천하고 복음에 따라 사는 움직임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스도의 가난을 따르려는 사람들이 맨발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차림으로 순회하며 설교했다. 사람들한테 그레고리오 개혁에 동참하기를 권하며 길거리에서 복음적인 삶을 설교하자 이를 따르는 무리가 매우 많아졌다.

 

이들은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성직자들과 수도자들 그리고 평신도 그룹이었다. 이들의 사도적 설교는 바로 개혁 교황들의 후원을 받았다. 티론의 베르나르도는 피스콸레 교황으로부터, 아르비리셀의 로베르토는 우르바노 2세 교황으로부터 순회설교의 허락을 받았다. 이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신분을 무시하였는데, 귀족과 거리의 여자들이 한 무리가 되었고 남자와 여자 그리고 건강한 사람과 환자들이 같은 무리가 되어 따랐다. 당시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광경이었다. 이들은 예루살렘의 공동체를 재현하고 가난한 생활을 실천했으며, 육체적 욕망을 잠재우기 위한 특별한 고행생활을 하였다. 그리스도의 가난을 따르는 사도적 설교가들 가운데 로베르토 추종자들의 공동생활을 예로 들어보자.

 

로베르토를 따르는 사람들은 폰테브로드에 모여 마치 거대한 수도원과 같은 생활을 하였다. 처녀와 과부 등 여자들의 수호자는 동정 성모 마리아였고, 환자는 베네딕토 성인, 나환자는 라자로가 수호자였다. 거리의 여자들의 수호성인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였으며, 남자들의 수호자는 세례자 요한이었다. 이곳에서 사제들은 전례를 거행하였고, 각 그룹은 고유한 성당과 식당 그리고 침실이 있었다. 여기서 여자들의 숫자가 훨씬 많았는데 베네딕토 성인의 규칙으로 수도원으로 발전하였다.

 

탁발 수도회가 생기기 전부터 사회에는 이렇게 가난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설교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거주가 일정하지 않고 생활이 불규칙하여 교회와 가까운 연관을 갖기도 하였지만 중세에 많이 생겨난 이단에 빠져드는 일도 허다하였다. 따라서 경제성장과 도시의 발달, 대학으로 인해 사람들의 지성이 발달한 상황에서 옛 수도회가 영향을 끼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당시 대면해야 하는 사회문제는 부자가 된 고위 성직자들이나 부자가 되어있는 수도원의 모습을 바로잡는 것, 사회의 여러 가지 폐단에 적절히 대항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적절한 완덕의 개념을 만들고 영성을 가져야만 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세속의 과학적인 학문에 직접 대응해야 하였다.

 

 

인노첸시오 교황의 정책

 

인노첸시오 3세 교황(1198-1216년)은, 교황직과 세속권력의 투쟁에서 교황직의 위상을 높여 교황의 권위를 신장시켰으며, 지도자로서 지닌 뛰어난 능력과 교회정신으로 교회를 더욱 조직적으로 체계화한 분이다. 중세의 가장 위대한 교황이라고 일컬어지는 그는 교회의 모든 부분에 개혁의 손길을 뻗쳤다. 많은 칙서를 내어 당시 사회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방향제시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1215년에는 중세의 가장 많은 고위 성직자들이 참석한 제12회 세계 공의회인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열어 개혁훈령을 발표하였다.

 

개혁내용을 보면, 먼저 교황청의 행정을 개혁하여 중앙집권식의 조직을 만들고, 주교들의 지적 능력과 윤리적인 쇄신이 교회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주교를 바르게 선출하고 주교직의 본분을 제대로 수행하도록 격려하고 감시하였다. 모든 문제에 특히 당시 사회문제와 윤리문제를 개혁하기 위해 수도자들이 자신이 계획하고 있는 광범위한 개혁에 동참하기를 바랐다. 따라서 수도원이 먼저 자신들의 수도규칙을 엄격히 지키도록 강경하게 요구하였으며, 모든 수도원들이 창립정신으로 되돌아가도록 요구하였다. 그가 낸 칙서에는 수도원장들이 해야 할 지침을 상세히 적어놓았다. 또한 수도자들의 생활지침도 있는데 수도자들이 여행할 때도 절대로 수도복을 벗지 말 것을 명령하는 내용도 있다.

 

교황은 교회와 사회뿐만 아니라 이단과도 싸울 것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수도원의 쇄신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수도원 창설을 후원했다. 예를 들면 몽 펠리에의 구이도가 창설한 성신병원 수도회의 회칙을 1213년에 인가하고 로마에도 병원을 설립하도록 도와주었고, 말타에 십자군을 후원하기 위한 삼위일체 수도원 창설을 지원했다. 기존의 수도원 수도자들한테도 사회쇄신과 이단을 퇴치하기 위해서는 수도원 밖을 나서도 좋으며, 사회에 나가 설교하기를 바랐으므로, 가난하게 살며 교회 안의 부귀영화 추구에 경종을 울리고 설교와 사목으로 개혁에 앞장을 선 탁발 수도회는 교황의 정책에 확실한 후원자였다고 할 수 있다.

 

 

탁발 수도회 탄생의 의의

 

프란치스코 성인이나 도미니코 성인은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에 아주 중요한 근본적인 해답을 준 분들이다. 그들은 바로 교회가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탁발 수도자들과 함께 당대에 적절한 영성 생활과 인간적인 삶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성령의 감도하심이라고 해야 하는 진로를 개척하여 복음의 내면성과 본질성과 근본적인 요구를 부각시켰다. 내적 쇄신을 강조하고 하느님과 관계를 새롭게 하며 초자연 세계의 가치를 사회에 심어주었다. 또한 다양한 수도생활의 선택이나 형태에도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수도생활의 가치와 인간성의 가치를 동시에 드러냈다. 따라서 수도생활 쇄신에도, 성직자들의 삶의 개선에도, 평신도들의 영적인 삶의 쇄신에도 다 같이 영향을 미쳤다. 내적 개혁과 복음적인 회개를 강조한 이들 두 사람은 조직적인 해결이나 근본적인 생각은 서로 달랐지만, 탁발이라는 새로운 형태는 같았다. 그들 자신은 당시 사회에 아주 새로운 충격이었다. 개인적이기도 하지만, 교회가 가야 할 내적 쇄신을 생활로써 새롭게 보여준 것이다.

 

두 성인들은 교회의 수도생활을 재정립하려는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의 뜻과 맞아떨어졌다. 12세기까지 개혁에 앞장서던 시토회도 이제는 쇄신의 방향을 잃고 있었다. 따라서 교황은 주교들한테 사목방문을 권하고, 어떤 때는 자신의 사람을 보내서 급한 문제를 해결하려고까지 하였다. 가난을 강조하며 순회설교하는 사람들은 대개 이단으로 기울어져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에 프란치스코 성인과 도미니코 성인은 탁발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수도생활로써 문제의 해결점을 찾아낸 것이다. 두 성인이 활동한 지역은 당시 가장 혼란스럽고 위험한 지역인 프랑스 남부와 중부 이탈리아였다.

 

[경향잡지, 1995년 7월호, 구본식 신부(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관장, 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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