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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사목] 가정 폭력은 범죄다: 더 이상 숨기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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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5-16 ㅣ No.929

[경향 돋보기 - 가정 폭력은 범죄다!] 더 이상 숨기지 마세요

 

 

한밤중 은영 씨(가명)는 여느 때처럼 귀를 쫑긋 세운 채 아파트 복도 발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초인종이 울린다. 이 순간부터 그녀의 심장은 숨 가쁘게 뛰기 시작한다. 술 냄새를 풍기며 들어온 남편은 어마어마한 욕설과 함께 지난날 교제했던 남자 이야기부터 자녀 교육과 시댁에 관한 일, 친정 험담 등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일들을 쏟아낸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듣고 있는 그녀가 못마땅한지 남편은 순식간에 주먹을 날린다. 그리고 머리채를 잡은 채 거실 이곳저곳으로 끌고 다니며 발길질을 한다. 아등바등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폭력의 수위는 더 높아간다. 이 상황은 남편이 잠들어야 비로소 끝난다.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주위를 둘러보면 잠에서 깬 아이들이 겁에 질린 채 엄마를 바라본다.

 

아침에 얼굴과 몸이 부은 채 겨우 일어나면 남편은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출근 준비를 하고 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아침밥을 간단하게 먹이고 전날 어지럽혀진 집안을 대충 정리한 뒤 화장대에 앉는다.

 

얼굴만은 맞지 않으려고 반사적으로 가린 덕분에 다행히 붓기만 있다. 하지만 머리, 어깨, 허리 할 것 없이 온몸이 멍투성이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아이들과 함께 출근길에 나서면서 그녀의 하루는 시작된다.

 

 

평범한 그녀는 가정 폭력의 희생자였다

 

연애할 땐 몰랐다. 집에 잘 들어갔는지 날마다 확인하던 친절한 사람, 간혹 짧은 치마를 입으면 불편해하던 다정다감한 사람, 그 모든 게 사랑해서라고 믿었다. 믿음직하고 든든해서 좋았다.

 

하지만 결혼하면서 그건 사랑도, 관심도 아닌 지나친 집착이며 의처증(‘질투형 망상장애’)이란 걸 알게 되었다. 남편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지배했다. 귀가가 조금만 늦으면 “누구랑 있었느냐? 뭘 했느냐?”고 캐물었고, 목욕탕이나 시장가는 시간까지 확인했다.

 

남편 친구 모임에 따라가 남편 친구의 농담에 한마디 대꾸했다가 “언제부터 그런 사이냐?”로 시작한 남편의 심문(?)에 뜬눈으로 밤을 새운 적도 있다. 그날부터 남편이 두려웠다. 그녀의 두 눈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고, 말수가 적어지며 우울증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남편과 만나기 전 잠깐 사귄 남자가 있었다. 남편도 아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짧은 만남이 자기의 인생을 망가지게 할 줄은 몰랐다.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남편은 다짜고짜 “내 아이가 맞느냐?”고 다그쳤고, 참기 힘든 모욕적인 말을 했다. 때리는 데 이유가 없었고, 상식적인 일은 통하지 않았다. 모든 게 남편에게는 트집거리였으며 사소한 것조차 의심했다. 그녀의 생활은 한마디로 지옥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적과의 동침’이란 영화에 나오는 미모의 여인 로라의 남편 마틴처럼 폭력 뒤에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선물을 하거나 ‘미안하다.’는 몸짓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그때까지 귀가하지 않은 남편이 할 말이 있다며 나오라고 했다. 전화를 받고 나간 그녀는 남편의 승용차 안에서 죽을 것 같은 공포를 겪었다. 온갖 언어폭력과 성폭력, 구타를 당했다. 겨우 탈출해 무작정 문이 열린 건물에 들어가 살려달라고 외쳤다. 그녀가 피신한 곳은 성당 사제관이었고, 사제의 도움을 받아 보호시설로 오게 되었다.

 

그 뒤로 은영씨는 이른바 쉼터라는 시설에서 살았다. 이곳에 올 당시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어있었으며, 복장뼈는 금이 가고 코뼈는 부러진 상태였다. 시간이 지나 얼굴과 몸에 붓기와 멍이 사라지면서 그녀의 미모가 드러났다.

 

선남선녀로 주위의 축복 속에 결혼한 뒤 남매를 둔 부부였다. 그녀 나이 서른셋,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 연구원이고, 남편도 대기업 직원이다. 미모와 학력, 전문 직업을 가진 두 아이의 엄마인 그녀가 가정 폭력의 희생자라는 사실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가족 모두 피해자가 되지 않으려면

 

가정 폭력을 예방하고 피해자의 보호와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가정 폭력 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1998년부터 시행되었다. 하지만 대부분 가정 폭력 범죄는 가정 문제라는 인식 아래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그러다가 현 정부가 가정 폭력을 4대악이라 규정하면서, 3년 동안 2회 이상 가정 폭력을 저지른 사람은 구속수사가 가능해졌다.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면 상담과 교육을 통한 조건부 기소유예 처분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도 가정 폭력은 여전히 다양한 형태를 보이며 심각해지고 있다. ‘한국 여성의 전화’에 따르면, 2014년 언론에 보도된 살인사건에서 배우자에게 살해된 여성은 69명이고, 살인미수로 살아 남은 여성도 57명이나 되었다. 피해 여성의 자녀나 부모는 물론 친구 57명도 중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었다.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사건까지 포함하면 피해 여성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가정 폭력은 가족이나 부부 사이에 발생하기 때문에 범죄라기보다 가정 문제로 치부하는 것이 대부분의 인식이다. 그래서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는다. 여성가족부에서 2013년 실시한 ‘가정 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부부 폭력을 경험한 응답자 가운데 0.8%만이 주위에 도움을 요청했으며, 68%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57.4%가 ‘가족이란 이유’로 신고를 하지 않았고, 이웃에서 가정 폭력을 신고하지 않은 이유 또한 55.8%가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만일 피해자나 이웃이 적극적으로 대처했다면 비극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가정 폭력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는다. 피해자의 소극적인 대처는 가해자가 앞으로도 계속 폭력을 행사할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더 심각하기에 초기 대응이 무척 중요하다. 가정 폭력은 가해자나 피해자나 가족 모두가 피해자가 된다. 그래서 먼저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눈 뒤 상담과 교육을 진행해야 한다.

 

여성가족부의 2014년 통계 자료에 따르면, 전국 가정 폭력 상담소와 여성 긴급전화에서 모은 가정 폭력 상담 건수는 40만 8,982건으로, 2013년 37만 9,310건에 비해 7.8%가량 증가하였다. 경찰청에 따르면, 가정 폭력에 대한 신고 건수가 16만 272건(2013년)에서 22만 7,608건(2014년)으로 42% 증가했다. 최근 3년에는 하루 평균 562건의 신고가 이루어지는 등 신고와 상담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대물림하는 가정 폭력

 

가정 폭력 시설 이용자 수도 아동을 포함해 4,140명(2014년)에 이르며, 피해자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피해 여성이 남편과 헤어지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자녀를 위해서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가정 폭력 관련 논문과 전문가의 의견에 따르면, 부부 불화가 있는 가정에서 결혼생활을 지속하기보다 한 부모로서 아이를 양육하는 게 아동의 정서 발달에 훨씬 도움이 된다.

 

보호시설에 오는 아이들의 심리검사를 해보면 대부분 아버지의 폭력적인 행동을 두려워하며, 불안증과 소아 우울증, 반사회적 행동을 보였다. 아버지의 목소리만 들어도 오줌을 지리는 아이도 있었다. 욕설이 일상화된 아버지와 함께 자란 아이는 학교에서도 똑같이 해 왕따를 당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정작 그 아이는 그것이 잘못인지를 알지 못했다.

 

어릴 때 가정 폭력에 노출된 아동은 사소한 일에도 화를 잘 내고, 또래 관계가 힘들며, 일을 해결할 때 욕설이나 폭력이 앞선다. 또 성인이 되면서 분노조절 장애를 갖게 되고, 함묵증, 소아 우울증, 불안 등 심리적으로 여러 장애를 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가정 폭력에 노출된 아동은 성인이 되어 자기 자식에게 폭력을 대물림한다는 것이다. 열한 살 딸을 2년 동안 집에 가두고 밥도 제대로 주지 않은 채 상습적으로 학대한 아버지가 자기도 가정 폭력의 피해자라고 했다.

 

대부분의 피해 여성이 폭력을 행사하는 배우자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로 경제적인 문제와 한 부모라는 사회적 편견을 든다. 하지만 학습된 무기력증도 큰 이유 가운데 하나다.

 

남편한테서 “너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너는 가치 없는 인간이야. 친정 식구들을 가만두지 않겠어.”라는 협박과 언어폭력, 활동 제한 등을 지속해서 당하면 심리적 압박감과 함께 인지적 왜곡 증상이 나타나며, 폭력에 수용적으로 길들어져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아무리 똑똑한 여성이라도 몇 년 동안 폭력에 노출되면 무력감이 깊어져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그 긴 터널을 벗어나기 힘들다.

 

 

가정 폭력 관련 시설 현황

 

2014년 현재 가정 폭력 상담소는 전국에 200여 개가 있다. 가해자 · 피해자 상담과 교육, 가정 폭력 예방교육 등을 주로 하며 보호시설에 가기를 원하는 여성에게 연결해 준다. 가정 폭력 피해 여성이 머무는 보호시설도 80여 개가 운영된다. 6개월에서 1년간 생활할 수 있는데 상담을 비롯하여 취업 훈련과 무료 법률, 의료, 아동 취학, 더 나아가 주거 지원을 받을 수 있다.

 

또한 24시간 운영되는 ‘여성 긴급전화 1366’도 전국에 18군데가 있다. 이곳에서 단기간 머물며 보호시설이나 집으로 갈 것인지 결정할 수 있다. 그밖에 성폭력과 가정 폭력, 성매매 피해 여성에게 의료, 상담, 심리치료, 수사, 법률 지원을 제공하는 ‘해바라기 센터’가 24시간 운영되고 있다.

 

경찰청도 가정 폭력이 더는 가정 내 문제가 아닌 범죄라는 인식 아래 2014년 3월부터 ‘가정 폭력전담 경찰관’을 두고 가정 폭력 피해자를 위한 지원업무를 하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피해 여성들을 위한 쉼터와 상담소 등을 가장 활발하게 운영, 지원하고 있으며, 가정 폭력 방지법이 생긴 뒤에는 전국 가톨릭 상담소와 쉼터 협의회가 창립되어 피해 여성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있다.

 

다시 은영 씨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보호시설에 들어온 그녀는 이곳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누군가 한 사람이 죽지 않으면 이런 상황이 끝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상담을 받은 그녀는 긴 과정을 거쳐 우여곡절 끝에 이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남편이 그녀의 회사와 지인에게 전화로 온갖 험담을 해 그녀는 결국 직장을 옮겼으며, 지금은 딸과 함께 살고 있다. 아들은 장손이라고 남편이 데려갔다. 벌써 7년 전의 일이다.

 

은영 씨는 1년에 한 차례 보호시설에 들러 사는 이야기를 전해준다. 몇 년 전에는 재혼한 전 남편이 자녀가 태어나자 아들을 데려가라며 전화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지난 날의 악몽이 떠올라 두려움에 더 이상 전화를 받지 않는다.

 

가정 폭력의 후유증은 시간이 흘러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남아 지금까지도 그녀를 괴롭히고 있다.

 

* 조경희 아가페 - 사회복지사 · 상담심리사로 수원교구에서 운영하는 한 부모 가족 복지시설에서 일한다. 19년째 여성 복지시설에서만 일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6년 5월호, 조경희 아가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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