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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교회 그때 그 순간 40선 (1) 한국 천주교회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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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1-02 ㅣ No.1628

[가톨릭평화신문 - 한국교회사연구소 공동기획] 한국 교회 그때 그 순간 40선 (1) 한국 천주교회의 탄생


왜 1784년을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과 설립으로 보는가

 

 

탁희성(1915~1992) 화백이 그린 ‘이승훈, 북경에 가다’(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소장). 이승훈이 1783년 10월 동지사 편에 청나라 북경으로 가는 장면이다. 이승훈은 북당에서 그라몽 신부에게 교리를 배워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온다. 그는 한국 천주교회 첫 영세자였다.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다

 

한국 천주교회가 설립 240주년을 맞이했다.

 

2024년은 갑진(甲辰)년 ‘푸른 용띠’의 해다. ‘청룡(靑龍)’의 해, 청룡열차 타고 24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1784년도 갑진년이었다. 이승훈(李承薰, 베드로)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기도서와 교리서 및 천주교 예식과 관련된 여러 서적을 가지고 들어왔다. 이벽(李檗)은 이승훈이 북경에 가기도 전부터 천주교에 관심이 많았고 천주교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는데, 북경에 가는 이승훈에게 천주당에 가서 신경(信經)과 세례를 받아오도록 독려하였다. 이승훈은 북경에서 돌아오자 이벽과 함께 교리를 더욱 연구한 후, 세례를 받았던 기억을 되살려 한문예식서를 보면서 수표교 인근 이벽의 집에서 세례식을 거행하였다. 이벽은 「성년광익(聖年廣益)」에 나오는 여러 성인 가운데 자신이 본받고 싶은 요한 세례자를 자신의 주보(主保, patronus)로 선택하였다. 작은 평신도의 세례 공동체로 출발하는 한국 천주교회의 선구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비록 짧은 삶이었을지라도 그가 바라던 대로 이벽은 한국 천주교회의 시작에 있어서, 길을 닦아놓는 요한 세례자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

 

정약용은 「녹암 권철신 묘지명」에 이벽에 대한 기억을 남겼다. “(…) 지난 기해년(1779) 겨울 천진암 주어사에서 강학회를 열었을 때 눈 속에 이벽이 밤중에 찾아와 촛불을 켜놓고 경전에 대한 토론을 밤새우며 했었는데, 그 후 7년이 지나 서학(西學)에 대한 비방이 생겼으니 이 때문에 그처럼 멋지던 강학회가 다시는 열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 탁희성, ‘명례방 초기 종교집회도’(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후 이벽 등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 들이 서울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집회를 갖고 있는 모습이다. 이처럼 평신도 지식인들이 서학 연구 과정에서 자발적으로 신앙을 수용하고, 세례로 결속된 신앙공동체를 탄생시킨 것은 세계 교회 역사상 유례 없는 일이었다.

 

 

기도 공동체 길 닦은 이벽 요한 세례자

 

이벽은 강학회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나중에 김범우의 집, 명례방 공동체에서도 강론을 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렇게 이벽은 한국 천주교회가 기도 공동체로 출발할 수 있도록 길을 닦아 놓는 ‘요한 세례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다가 선종하였다.

 

다산은 정약전 묘지명에도 이벽에 대한 기억을 쓰고 있다. “갑진년 4월 보름날 큰 형수의 제사를 지내고 우리 형제와 이벽과 함께 같은 배를 타고 물결을 따라 천천히 내려오면서 배 속에서 천지조화의 시초, 사람과 신(神), 삶과 죽음의 이치 등을 듣고 황홀함과 놀람과 의아심을 이기지 못해 마치 「장자」에 나오는 하늘의 강이 멀고 멀어 끝이 없다는 것과 비슷했다.”

 

물론 이 묘지명은 정약용의 기억에 의존하여 쓰인 것이지만, 이벽은 세례를 받던 그 해, 갑진년에 벌써 창조론, 원죄론, 구원론 등의 교리를 충분히 이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깊은 이해 속에서 천주(天主)를 참된 주님으로, 자신의 ‘임자’로 모시고 천주교 신자가 된 것이다. 이벽과 권일신 등 양반과 중인들이 차례로 세례를 받고, 기도하는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고, 이 공동체는 한국 천주교회의 뿌리가 되었다.

 

 

성직자 없이 교회 모습 갖춘 공동체 자생

 

왜 1784년을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과 설립으로 보는가? 그것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 성령 강림 날 교회의 탄생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첫째 성령 강림 날, 예수님을 따르며 믿던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마찬가지로 이벽의 세례와 김범우의 명례방 공동체는 삼위일체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믿는 이들의 공동체’를 보여주고 있다. 둘째, 오순절 성령 강림의 교회 탄생 때는 말과 출신 지역이 다른 이들끼리 모였어도 서로의 말을 알아들었다. 이것은 일치를 이루는 성령의 힘이었고, 기도의 힘이었다. 양반과 중인이 중심이 되어 모인 기도공동체는 그렇게 ‘함께 기도’하는 공동체였고, 성령이 함께하는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셋째, 그들은 ‘빵의 나눔’ 곧 성체성사의 은혜까지는 얻을 수 없었을지라도 서학(西學)의 연구와 말씀의 나눔을 통해 교회 모습을 갖춘 공동체였다. 이처럼 교회란 믿음, 기도, 나눔이라는 요소에 공동체가 합쳐져야 이루어진다. 수표교 인근 이벽의 집에서의 세례식, 김범우의 명례방 집회에서의 기도 공동체, 이들 공동체에는 비록 성직자는 없었어도 천주께 대한 믿음과 기도, 말씀의 나눔이 있었던 참된 교회 공동체였다. 그래서 바로 1784년을 한국 천주교회의 설립으로 보는 것이다.

 

- 탁희성, ‘주어사 강학회’(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1779년 겨울 경기도 양근 주어사에 권철신·정약전·이벽 등 젊은 남인 학자들이 모였다. 이들은 열흘이 넘는 기간 권철신이 정한 엄격한 규칙을 따라 공동생활을 하며 윤리·철학적 토론을 하며 다양한 학설을 검토했다. 한역 서학서들과 「천주실의」, 「칠극」 등 천주교 교리와 서양의 상황을 설명한 책들도 연구했다. 이들은 유교 경전에서 찾지 못한 대답을 발견하면서 유학을 연구하던 강학이 천주교 교리연구회가 됐다.

 

 

1779년 주어사에서 강학회 열며 서학 연구

 

그렇다고 해서 그 이전의 역사가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한국 천주교회가 탄생하기 전까지 많은 준비가 있었다. 명말 청초 시기 예수회 선교사들이 체계적으로 간행해 온 「한문서학서(漢文西學書)」의 전래는 이른바 한국 교회가 문서로 천주교를 받아들이는 준비를 시켜주었다. 그리고 천진암-주어사 강학모임은 학문적인 관심과 연구를 넘어서 실천을 향해 나가려는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이기도 하다. 수천 년 기다려온 구약의 준비가 예수님의 탄생으로 새로운 약속의 성취시대로 이어지듯이 1784년 한국 천주교회의 탄생은 240년 후인 올해 2024년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올해는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맞이하여 103위 성인이 탄생한 지 40년이 지나고, 124위 시복식이 10년이 지난 해이기도 하다.

 

갑진(甲辰)년을 네 바퀴 돌아서 103위 순교성인과 124위 순교복자를 모시는 우리 교회의 주요 모습을 돌아보고자 한다. 이미 잘 알려진 우리 교회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서 세속화되는 우리 모습을 반성하는 계기로 삼고, 우리 교회의 역사와 선배들이 얼마나 용맹하고 뛰어난 신앙을 가졌는지 배워보도록 하자.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를 다루지만, 중요한 계기가 되는 사건을 중심으로 단편적으로 연재해보고자 한다.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1월 1일, 한국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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