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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44: 동방 대이교 - 1054년 동·서 교회 완전 결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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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1-04 ㅣ No.235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44) 동방 대이교 - 1054년 동·서 교회 완전 결별

 

 

- 성 소피아 대성당 : 훔베르토 추기경이 파문교서를 놓은 성 소피아 대성당 내부. 사진 뒤편 가운데가 파문교서를 놓았던 중앙 제대 자리다.

 

 

『하느님께서 보시고 판단하실지어다』(Videat Deus et judicet)

 

성직서임권 논쟁으로 교회 개혁이 시작될 즈음 교회는 또 하나의 아픈 상처를 입었다. 그리스계 중심으로 발전해 온 동방교회와 라틴계 중심으로 발전해 온 서방교회가 1054년 완전히 결별하게 된 것이다.

 

위의 말은 양교회의 화해를 위해 레오 9세 교황의 특사로 파견된 훔베르트 추기경이 1054년 7월 16일 콘스탄티노플 소피아 대성당 제대위에 콘스탄티노플의 첼룰라리우스 총대주교 등의 파문교서를 올려놓고 난 후 외친 말이다. 나흘 후 첼룰라리우스 총대주교도 교황사절을 파문함으로써 동서방교회의 대분열이 시작됐다.

 

 

갈등의 시작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선종이후 동로마(비잔틴)와 서로마(라틴) 제국으로 갈라져 성장해 온 두 교회의 골은 5세기부터 깊어졌다. 이는 정치적인 동시에 문화적이고 교의적인 문제로 인한 것이었다.

 

정치적으로 동방에서는 황제교황주의 사상에 입각해 황제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를 직접 임명하고 파면시키기도 할 만큼 교회정책에 관여하는 것을 황권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서방에서는 476년 게르만 민족으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제국 복구 과정에서 교황권이 황제권에 비견될 만큼 성장해 비잔틴 황제와 맞섰다. 교황권의 성장 과정에서 로마와 프랑크 왕국의 동맹, 800년 카알대제의 황제 대관은 로마제국의 합법적 계승자를 자처하는 동로마인들의 격분을 샀고 교황령의 성립으로 인한 동로마 제국 영토의 상실은 두 교회간의 갈등을 감정적으로 몰고갔다.

 

문화적 차이는 더욱 더 심각했다. 우선 두 교회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스의 찬란한 문화를 계승한 동방교회에 있어 서방인들은 거칠고 감정적인 야만인들이었고 라틴세계에 있어 동방은 타락하고 나약한 분열주의자였다. 서방에서는 「비잔틴」이란 말이 경멸의 대명사가 될 정도였다.

 

전례와 교의에서도 두 교회는 서로 갈등을 빚고 있었다. 동방에서는 전례 자체가 강조된 반면 서방에서는 교의가 중시됐다. 또한 동방에서는 서방교회가 성찬례 때 누룩이 들지않은 빵을 사용하는 것과 토요일에 금식하는 것, 성직자가 수염을 기르지 않는 것, 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에 「와 성자에게서」(filioque)를 추가한 것 등을 비난했다. 서방에서는 동방교회 성직자들이 독신을 지키지 않는 것 등을 문제 삼았다. 또한 726년 레오 3세 황제의 성화상 공경 금지 조치로 일어난 논쟁은 두 교회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이어 「포시우스 분규」가 일어났다. 856년 쿠데타로 섭정을 하던 테오도라 황후가 물러가고 미카엘 3세가 친정을 시작했으나 황제의 큰아버지인 바르다스가 전권을 행사했다. 858년 주님공현 축일에 콘스탄티노플의 이냐시오 총대주교가 바르다스가 부도덕한 생활을 한다는 이유로 영성체를 거부하자 미카엘 3세는 이냐시오를 추방하고 평신도였던 포시우스를 총대주교로 임명했다. 이로인해 863년 로마 교회회의는 포시우스를 파면하고 이냐시오의 복귀를 명령했으나 황제는 이를 거부하고 867년 콘스탄티노플 교회회의에서 니콜라오 교황을 파문했다. 이로써 동서방 교회의 분열이 사실화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해 9월 미카엘 3세가 살해되고 바실리오 1세가 즉위해 로마와의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일단락됐다. 그러나 교회의 제도와 법률, 전례와 신학, 언어와 국민성의 차이로 인한 격차는 너무 커 완전한 일치를 이루지는 못했다.

 

동서방 교회에 있어 또 하나의 갈등 요소는 로마교회의 수위권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알렉산드리아나 안티오키아 교회는 로마교회의 으뜸으로 인정하면서 각 지역에서 재치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기고 난 후 수도교구의 위상이 문제가 됐고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는 예우상 로마 주교 다음가는 권리를 갖는다고 결정해 로마, 콘스탄티노플,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순으로 총대주교좌를 공인했다. 이로써 동방교회는 교황을 으뜸으로하는 총대주교구 체제로 운영되었으나 7세기에 이르러 이슬람 세력이 비잔틴 제국의 다른 총대주교의 관할지역을 정복하자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만 남아 로마 교회와 대등한 위치에 놓인 것처럼 보여졌다.

 

 

1054년 사건

 

이처럼 양교회의 오해와 반목이 깊어진 상황에서 일어난 1054년의 대이교도 사실은 신앙의 일치를 이루려는 화해의 손짓에서 시작됐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였던 첼룰라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을 로마교회와 같은 대접을 받기 위해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지 않고 각종 전례와 교의 상의 차이를 들어 서방교회를 비판했고 레오 9세는 이에 강력히 항의하며 로마교회의 절대적 우위를 강조했다. 이리하여 동서교회가 다시한번 분규에 휩싸일 즈음 노르만인들이 비잔틴 제국의 영토였던 남부 이탈리아를 침략했다. 노르만족들의 침입에 위협을 느낀 교황과 황제는 서로 동맹을 맺고 공동대처하려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앙상의 화해가 먼저 이루어져야 가능한 일이었다. 콘스탄티누스 9세 황제는 총대주교에게 화해를 종용하고 교황도 원만한 해결을 위해 훔베르트 추기경과 스테파노 9세 교황이 된 프리드리히 아말피의 베드로 대주교를 특사로 파견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양 교회의 두 사람은 이 임무에 적합한 인물들이 아니었다. 훔베르트 추기경은 성직매매 타파와 같은 교회 개혁의 열렬한 지지자로서 완고했고 무엇보다 그리스 문화를 잘 알지 못했다. 미카엘 첼룰라리우스 총대주교 또한 완고한 사람으로 자신의 동방교회에 대한 영향력을 염려하여 로마교회와의 관계를 경원시 하던 인물이었다.

 

사절이 파견된 사이 노르만인들이 비잔틴 군대에 의해 패퇴하고 정치적 안정을 되찾자 황제는 이제 이 문제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자 첼룰라리우스는 다시 강경한 태도로 회귀하여 교리와 전례문제 등을 비판했고 교황 사절은 이러한 태도에 격분했다.

 

이에 교황사절들은 1054년 7월 16일 파문교서를 성 소피아 대성당 제대위에 놓고 『하느님께서 보고 판단하실 지어다』라고 외친 후 로마로 가버렸고 7월 20일 총대주교는 교황과 사절들을 파문했다. 이 이후 양교회는 아직도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2년 3월 24일, 김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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