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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영성을 따라서1: 오틸리엔 수도원에 한국역사 살아 숨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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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2-10 ㅣ No.363

가톨릭 영성을 따라서 (1) 오틸리엔 수도원에 한국역사 살아 숨쉬다


성오틸리엔수도원 대성당 전경. 수도원에는 현재 약 1백 명의 수도자들이 생활하고 있다.


이천년을 흘러 이어오는 가톨릭교회 신앙의 본질은 무엇이며 그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영성의 근원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한국 주교회의가 중앙 일간 신문사 종교담당 기자단과 교계 주교회의 출입기자들을 대상으로 마련한 이번 유럽 성지순례는 그리스도교의 정수(精髓)를 알아보고자 하는데 초점이 두어졌다.

그 안에서도 중심점은 수도원이었다. 교회 역사 안에서 어려움의 고비 고비마다 쇄신과 개혁의 고삐가 되었던 수도원, ‘교회에 신선한 공기를 공급해 주는 허파 역할’ 로 비유되곤 하는 수도원을 찾아 수도자들의 수도생활을 살펴보는 시간들이 주된 테마로 이어졌다. 이외 가톨릭의 총 본산이라 할 수 있는 로마 바티칸을 찾는 시간과 함께 가톨릭의 대표적 성모발현 순례지, 프랑스 루르드 순례 및 파리외방전교회 탐방 등의 기회도 마련됐다. 그 순례의 여정을 4회에 걸쳐 소개한다.


독일 뮌헨서 순례 첫 걸음

- 뮌헨시청사 앞 마리엔광장. 왼쪽에 성마리아 성당의 돔이 보인다.


순례의 첫 걸음은 독일 뮌헨에서 시작됐다. 독일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바이에른주의 주도 뮌헨은 수도사를 뜻하는 ‘묀히’(monch) 라는 단어에서 비롯될 만큼 가톨릭과 깊은 연관이 있다.

도시가 형성되기전 베네딕도회 수도사 몇 명이 공동체를 이뤄 살기 시작했고 이후 그 곁에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면서 마을과 도시가 형성됐다고 한다. 검정색 수도복을 입은 아이의 형상이 뮌헨의 아이콘으로 설정된 것도 바로 그러한 배경이다.

역사적으로 바이에른 주 자체가 17세기 바이에른 공화국 시절부터 신성 로마제국내에서 가톨릭의 보루 역할을 했고 막시밀리안 1세의 치세에는 30년전쟁을 맞아 신교 세력에 대항하며 종교개혁 바람을 막는 중심지가 됐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기자단은 수도사들이 처음 공동체를 세웠던 곳에 지어졌다는 미카엘성당을 비롯 성모마리아성당 등 유서깊은 성당들과 마리엔 광장 등을 둘러보며 뮌헨의 역사 안에 깃들어져 있는 가톨릭 신앙의 흔적을 찾아 보았다.

마리엔 광장은 뮌헨시의 가장 중심지라 할 수 있는데, 광장 중심에 우뚝 솟은 성모님 기둥이 인상적이다. 30년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것과 함께 1634~35년경 유럽 전역을 강타했던 페스트에서 무사할 수 있게 해준 데 대한 감사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라 한다.


오틸리엔 수도원 방문

뮌헨에 이어 기자단은 본격적인 수도원 순례 일정에 돌입했다. 뮌헨에서 서쪽 방향으로 한 시간가량 버스를 타고 간 곳은 베네딕도회 오딜리아연합회의 본부, 한국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모원이라 할 수 있는 성 오틸리엔(St.Ottilien) 수도원이었다. 선교활동을 표방하고 해외로 진출한 첫 베네딕도회 수도공동체다.

수도원 인근에서는 민가를 찾기가 어려웠다. 옥수수밭 호밀밭 목초지뿐이라고 했다. 전형적인 농촌 마을 속 수도원 풍경이었다.

수도원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100여년 전의 한 역사적 장면이 떠올랐다. 기록에 따르면 1908년 9월 15일 당시 조선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는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고등 교육기관 설립에 적합한 수도회 물색을 위해 프랑스로 건너왔던 뮈텔 주교는 이를 위해 수많은 수도회를 방문했으나 인력부족 등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했다.

- 수도자들의 저녁기도 모습.


로마에서도 역시 좋은 결과를 얻어내지 못했던 뮈텔 주교는 포교성성 장관 고티 추기경을 만난 자리에서 오틸리엔 수도원을 소개 받았다. 귀국일정까지 늦춰 수도원을 찾았던 뮈텔 주교는 놀벨도 웨베 아빠스를 만나 한국 사정을 전하며 선교사 파견을 청했다.

상트 오틸리엔도 사정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1884년 안드레아스 암라인 신부에 의해 시작, 선교의 틀을 막 잡아나가던 상황에서 1887년 아프리카에 첫 선교사를 파견한 이후 여러 가지 면에서 여력이 부족하던 때였다.

그러나 뮈텔 주교의 설득으로 웨버 아빠스는 이듬해 1월 11일 모원 경리책임자 도미니쿠스 엔쇼프 신부와 딜링엔 수도원 보니파시오 사우어 원장신부를 한국에 파견했다. 한국에서 베네딕도회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고 남자수도회가 처음으로 한국 땅에 공동체를 마련하는 서막이기도 했다.

오틸리엔이라는 이름은 이곳에 성녀 오딜리아에게 봉헌된 조그만 경당이 있었던 데서 비롯된다고 한다. 정문을 지나 순례자 숙소에 짐을 풀었다. 숙소 입구에는 잃은 양 한 마리를 품에 안고 있는 현대적 느낌의 예수상이 있었다. 속세의 번잡함에서 깊은 영혼의 울림을 갈구하며 방황하는 현대인들을 보듬어 주시는 예수님을 보는 느낌이다.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 안에서 무거운 무언가가 내려놓아지는 듯 했다.


수도원 내 선교박물관 관람

- 수도원내 역사박물관의 한국관. 한국의 전통의상들이 전시돼 있다.


출판사 책임자 치릴 신부의 안내로 수도원 내부를 둘러본 기자단은 이어서 수도원 역사관 담당자인 마우루스 수사를 만나 수도원 내 선교박물관을 소개받았다. 한때 겸재 정선의 그림이 있었다고 하는 이곳에는 전 세계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수집한 자료들이 전시돼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온 동물박제와 표본들 그리고 생활용품과 사냥도구들, 그리고 한국에서 온 화투까지. 선교사들이 선교지역을 알리는 일환으로 수집한 것들이라고 하는데, 그 정성들이 놀라웠다. 박제부터 전시까지 모두 수도자들의 손으로 이뤄진 것이라 했다.

역사관내 한국관련 내용을 모아놓은 곳에 다다랐다. 6·25 전쟁으로 고초를 겪었던 수도원과 수도자들 모습에서부터 한국의 전통복장들과 다양한 생활 도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수도원이 한국교회와 함께한 100여년의 한국 속 역사가 그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6시 저녁기도 시간이 되었다. 대성당에 들어서 기도에 참여하려는 지역 신자들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종소리와 함께 수도복 차림의 수도자들이 행렬을 지어 입장했다. 장중한 파이프 오르간 소리 속에 차례로 제대에 고개를 숙이며 오르는 수도자들 모습에 장엄함과 엄숙함이 서려있다.

성당 제대 모서리를 받치고 있는 한 기둥의 조각이 낯익다. 갓을 쓴 한국의 선비 형상인데, 김대건 신부를 드러낸 것이다. 제대 밑에는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 수도원의 두 번째 선교사 파견국인 한국과의 진한 인연을 시사하는 표시로 여겨졌다.

백발의 수도자들과 젊은 수도자들이 제대 좌우에 나뉘어 그레고리안 성가 음률에 맞춰 드리는 시편 기도들이 깊은 숨을 토하게 한다. 때로 깊이 허리를 굽혀 기도를 올리는 그들. 말씀의 한 구절 한 구절 안으로 자신을 낮춰 들어가고자 하는 원의가 보여졌다. 그들의 기도 속에 우리의 기도를 얹고 싶은 마음이었다.



[가톨릭신문, 2011년 12월 4일, 뮌헨 · 샹트 오틸리엔 이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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