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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조선시대 한양과 중국 잇던 의주길과 가톨릭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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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2-22 ㅣ No.1325

조선시대 한양과 중국 잇던 의주길과 가톨릭 신앙


성 김대건 신부가 목숨 걸고 걸었던 복음화의 길 ‘의주대로’

 

 

길은 인류의 문명과 문화가 교류했던 역사를 품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길이 인류 역사와 함께 생성 소멸했다. 이런 이유로 학자들은 길을 단순히 교통로의 의미를 넘어 ‘문화유산’으로 바라보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한국 가톨릭교회도 신앙유산으로 순교 길과 순례 길을 부단히 조성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길에 대해서만 유독 관심이 적다. 바로 ‘의주길’이다.

 

의주길은 가톨릭 신앙이 우리 민족에게 전해진 길이다. 교회의 문화와 문물이 한반도에 유입되던 길이며, 선교사들의 입국로였다. 또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신학생의 유학길이었고, 김대건 부제와 최양업 신부의 귀국로였다.

 

성 김대건 신부 희년을 맞아 조선 교회 성직자와 신자들이 목숨을 걸고 걸었던 의주길을 소개한다.

 

 

의주대로

 

조선에는 한양을 중심으로 전국을 잇는 9개의 큰길이 있었다. 그중 제1로는 한양에서 의주를 잇는 ‘의주대로’였다. 한반도의 중부와 북부를 관통하는 길이다. 1080리(425㎞) 길로 걸어서 보름 정도 걸리는 이 길은 중국과 연결되는 가장 중요한 도로로 중국을 오가는 사행들이 반드시 걸어야 했던 길이어서 ‘사행로’(使行路) 또는 ‘연행로’(燕行路)라 불렀다. 의주대로는 또한 중국과 서양의 문물이 유입되는 ‘동서 문물 교류의 길’일뿐 아니라 세계로 향하던 길이다. 아울러 의주대로는 가톨릭 신앙과 교회 문물이 유입된 ‘복음화의 길’이며, 조선 교회 성직자들의 입국로였다. 이처럼 의주대로는 정치ㆍ문화ㆍ경제ㆍ국방ㆍ교회사적으로 중요한 길이다.

 

의주대로는 한양-홍제원-고양-파주-장단-개성-평산-서흥-봉산-황주-평양-안주-가산-정주-철산-의주에 이르는 길이다. 의주대로는 5리(2㎞)마다 정자를, 25리(10㎞)마다 하나씩 45개의 참을 둘 만큼 잘 정비 유지됐고, 사행들을 비롯한 여행자들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관사와 주막이 잘 갖춰져 있었다.

 

의주대로는 일제 강점기 시대 조선총독부에 의해 훼손되기 시작해 지금은 대로의 기능을 상실했다. 또 남북의 분단으로 임진강 이북의 길은 밟을 수 없다. 그나마 경기문화재단과 의식 있는 역사학자와 역사지리학자들의 수고로 서울에서 임진강까지의 의주대로 옛길이 고증돼 다행이다.

 

 

조선 교회와 의주길

 

조선 교회 신자로서 처음으로 의주길을 밟은 이는 설명할 것도 없이 이승훈(베드로)이다. 그는 1784년 초 북경 북당에서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조선의 첫 번째 가톨릭 신자가 되어 의주대로를 통해 입국했다. 이후 조선의 신앙 공동체는 성직자 영입을 위해 윤유일(바오로), 지황(사바), 유진길(아우구스티노), 남이관(세바스티아노), 조신철(가롤로), 김프란치스코, 현석문(가롤로) 등이 의주길을 통해 중국을 드나들었다.

 

가톨릭 성직자로는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첫 번째로 의주대로로 조선에 들어왔다. 그는 1794년 12월 24일 중국 변문에서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입국해 의주대로로 한양에 도착했다. 그는 가장 까다롭고 어렵다는 의주 관문을 여느 성직자들보다 쉽게 통과했다. 경비병이 잠가야 할 관문을 깜박 잊고 잠그지 않아 열린 문으로 아무런 검문 없이 통과했다. 1833년 12월 압록강을 건넌 여항덕(유방제) 신부는 조선인 안내자의 실수로 의주 관문으로 들어갔다가 체포될 뻔했다. 그는 다 죽어가는 중환자인 척해서 겨우 의주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는 중국인 사제들보다 더 힘들게 의주길을 걸어야만 했다. 무엇보다 피부색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들은 얼굴 대부분을 가릴 수 있는 큰 겨울 모자를 쓰고, 의주 관문이 아닌 수구문을 통해 조선에 입국해야 했고, 의주부터는 상복을 입고 한양까지 한달음에 와야 했다.

 

 

선교사들의 편지에 나타난 의주길

 

뱃길을 통한 조선 입국로가 개척되기 전까지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 등 세 명의 서양인 선교사들은 한겨울인 12월 꽁꽁 언 압록강을 건너 의주길을 통해 한양으로 들어왔다. 조선 입국 경험이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만큼 극적이어서인지 이들은 하나같이 상세하게 입국 과정을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보고했다.

 

이들의 입국 과정은 치밀했다.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는 중국인 여항덕 신부에게 은전 500냥을 주고 조선에 서양 선교사들이 입국하면 곧바로 은신할 집 몇 채를 구하게 했다. 은신처이자 조선 교회 사목 중심지를 미리 확보해 둔 것이다. 조선 신자들은 서양인 선교사들이 야밤에 압록강을 건넌 후 안전하게 쉬면서 의주길 여행 채비를 챙길 수 있도록 의주에 거처를 마련해뒀다. ‘안전 가옥’인 셈이다. 이 집에서 서양인 선교사들은 국경을 넘은 긴장을 풀고, 잠을 자고 음식을 먹으며 체력을 유지한 후 상복을 입고 보름간의 의주길 여정을 시작했다. 또 성직자를 태우고 짐을 운반하도록 말도 1~2필 정도 항상 준비해 갔다.

 

성직자를 안내할 조선 신자들도 제각기 맡은 역할이 있었다. 이들은 보통 3명에서 5명으로 움직였다. 의주길을 오가는 보부상이나 여행자들이 많아야 5~6명으로 구성돼 있었기 때문이다. 안내인 중 우선 말을 끄는 이가 2명 있었다. 이들은 성직자를 안내하는 이들보다 먼저 앞장서며 누가 나타나면 신호를 보내 선교사가 숨거나 아픈 척을 해 위기를 면하게 했다. 이들은 먼저 의주 관문으로 들어가 동향을 살펴 성직자 안내조가 안전하게 입성할 수 있도록 ‘첨병’ 역할을 했다. 마부 출신인 조신철(가롤로)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다른 한 명은 성직자와 소통하는 중국어 통역사였다. 이들은 한자 필담이 가능한 양반이나 역관 출신들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정하상(바오로)이다. 또 경호원 노릇을 하는 건장한 장정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지친 모방 신부를 업고 압록강을 건넌 이손빈(섬베, 베드로)이다.

 

한편, 압록강을 건너 의주 안전가옥에 도착하면 그 집에서 음식과 여행 채비를 마련해 둔 신자들이 있었고, 평양에서 합류하는 신자들도 있었다. 이렇게 성직자를 포함해 10~12명의 신자 안내인들이 2개 조로 나뉘어 조금 떨어져 의주길을 걸어 한양까지 여행했다. 선교사들은 모두 중국 변문과 조선 의주 관문만 통과하면 한양까지는 어떤 위험도 없이 안전하게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김대건과 의주길

 

김대건은 최양업, 최방제(최과출)와 함께 서울 후동의 모방 신부집에서 신학생 서약을 하고 1836년 12월 3일 마카오 유학길에 오른다. 그의 나이 15세였다. 세 소년은 중국 교회로 복귀하는 여항덕 신부와 정하상, 조신철, 이광렬, 현석문과 함께 의주길을 통해 평양과 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중국땅 변문에서 조선 입국을 기다리는 샤스탕 신부와 그해 12월 28일 상봉했다. 이후 김대건은 1844년 12월 11일 중국 소팔가자에서 최양업과 함께 부제품을 받고 1845년 1월 1일 변문에서 조선 신자들과 만나 의주길을 통해 보름 뒤 한양에 도착했다.

 

김대건 신부의 증언대로라면 유학길 의주대로 노정은 26일, 청년기 조선 입국 의주대로 노정은 15일 걸렸다. 열흘 이상 차이가 난다. 그만큼 어린 세 소년의 유학길 노정이 힘들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혹한을 견디며 조선과 중국의 국경을 잇는 압록강 무인지대 120리(47㎞)를 걸어서 통과해야 한다는 것은 초인적인 힘과 용기가 필요하다. 특히 15세 어린 소년들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길이 분명했을 것이다. 이때 경험한 초인적인 용기와 힘이 아마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은 그의 순교자적 삶의 밑거름이 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2월 20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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