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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사목] 민족화해1: 현대사 속 남북관계와 가톨릭 - 해방, 전쟁, 냉전, 데탕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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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6-21 ㅣ No.576

[민족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기획] (상) 현대사 속 남북관계와 가톨릭 - 해방 · 전쟁 · 냉전 · 데탕트


예언자적 소명으로 민족 아픔 함께 나눠

 

 

1972년 8월 15일, 당시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이 남한 정부의 ‘7·4 남북공동성명’에 대한 한국교회 입장을 담은 ‘현 시국에 부치는 메시지’를 발표하고 있다.

 

 

남북 관계가 극도로 경색돼 있다.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래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천안함 사건에 이은 연평도 포격 사건으로 2000년 이후 유지돼 온 이른바 ‘6·15 체제’는 가동 불능의 상태로 무력화됐고 남북 관계는 지향점을 잃고 표류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가톨릭교회를 비롯한 종교계 내에서는 한반도에 평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위원장 김운회 주교)는 오는 17일 경기도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 공원에서 한반도 평화기원 미사를 8년 만에 재개한다. 인도적 차원의 대북 지원 물꼬를 터야 한다는 각 종단의 목소리도 모아지고 있다.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19일 ‘민족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을 맞아, 현대사 속 남북 관계와 가톨릭 역사에 대해 되돌아보고, 앞으로 나갈 방향에 대해 짚어본다.

 

 

해방공간 그리고 전쟁

 

사회주의는 유신론을 배척하는 유물론 주의다. 따라서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북한에서 원칙적으로 신은 존재할 수 없다. 때문에 해방 이후 소련군이 진주한 북한땅에서 교회는 모진 박해를 받아야 했다. 1945년 8월 연길교구 유 셀바시오 신부와 고(高) 보니파시오 신부가 총살당했고, 다음 해 6월 보테헤르 백 주교를 비롯한 사제 18명, 수사 17명, 수녀 3명이 체포됐다.

 

북한 정권은 1946년 토지개혁을 시행하면서 전 교회 차원의 박해를 시작한다. 그간 교회가 소유해오던 모든 토지를 몰수했고, 1948년 초부터는 성직자와 수도자에 대한 체포 작업을 본격화했으며 1949년 5월에는 성 베네딕도회 덕원수도원을 폐쇄하기에 이른다. 덕원수도원이 폐쇄된 이 때는 북한이 가톨릭교회를 공식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한 시점으로 해석된다.

 

북한은 종교를 자신들의 전선에 끌어들여 이용하기 위해 어용종교단체인 조선기독교연맹을 1946년 11월 조직했다. 연맹 가입을 거부했던 당시 제6대 평양교구장 홍용호 주교와 덕원수도원장 신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 등도 1949년 5월을 기점으로 피랍된다. 이 밖에도 평양본당의 박용옥·서운석·이재호·장두봉 신부와 강계본당의 석원섭 신부, 신의주본당의 홍건환 신부, 영유본당의 홍근도 신부 등 7명의 사제가 잡혀갔고, 많은 성당이 문을 닫아야만 했다. 3000명이 넘는 교우들이 살고 있던 평양에는 단 한사람의 신부도 남아있지 않게 됐고, 함흥교구 청진에 이재철 신부, 춘천교구 양양에 이광재 신부, 평강에 백응만 신부만이 어렵게 사목활동을 이어갔다. 신자뿐만 아니라 신학생들도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1950년 6월 25일 결국 전쟁이 발발했다. 핍박은 더욱 거세졌다. 이 시기 150여 명의 성직·수도자·신학생이 체포되거나 살해됐다.

 

 

냉전 그리고 데탕트

 

이런 배경 때문에 가톨릭교회는 확고한 반공태세를 견지했다. 이런 반공주의는 가톨릭을 포함한 모든 종교계와 전 사회에 팽배해 있었다. 그러나 전 세계를 얼어붙게 했던 반공주의는 1970년대에 들어서 미·소 간 데탕트(미국과 구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서 진영간의 긴장완화)가 형성되면서 완화의 조짐을 보인다. 1969년 닉슨독트린(당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밝힌, 베트남전쟁과 같은 군사적 개입을 피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대아시아 외교정책)을 선포한 이후, 1972년 닉슨 대통령이 모스크바와 베이징을 방문함으로써 냉전이 어느 정도 종식된 것이다.

 

이런 분위기 가운데 1972년 7월 4일 남한 정부는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다.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을 공식 천명한 이 남북공동성명은 당시 남북한 당국이 국토분단 이후 최초로 통일과 관련해 합의 발표했으며, 남북이 서로를 바라보는 인식을 획기적으로 전환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보도된다. 그러나 이 공동성명이 남북한 정권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1960년대 후반 이후 동북아 국제정세에 떠밀린 타의적 결과이며, 오히려 한반도에 분단체제를 고착화했다는 해석이 강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

 

당시 교회는 이런 남북한의 행보를 의심스런 눈으로 쳐다봤다. 사상과 이념을 초월한다는 성명 조항에 이의를 제기하며 북과의 접촉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들도 여기저기서 나왔다.

 

성명서가 발표된 직후인 1972년 8월 15일 당시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은 ‘현 시국에 부치는 메시지’에서 “7·4 성명의 진의는 무엇인가. 참으로 사상과 이념과 제도를 초월하여 한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고 조국의 자유, 평화, 통일을 모색하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그것은 허울 좋은 간판이요, 그 저의는 민족의 양단을 영구적으로 동결하는 것인가. 진정 5000만 민족의 염원에 보답하기 위한 진지한 남북대화가 7·4성명으로 시작될 것인가. 아니면 이 성명은 남북한 집권자들이 정권 연장을 위한 권력 정치의 술수인가. 이산가족 찾기 남북적십자회담은 진정 분단 민족의 슬픔을 덜기 위한 인도주의적 회담인가, 아니면 정치 복선이 깔려 있는 책략에 불과한 것인가”라고 통렬한 물음을 던졌다. 교회를 이끄는 목자의 혜안과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교회의 이러한 우려는 얼마 후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1972년 10월 남한에선 유신체제가 시작됐고, 같은 해 12월 북한은 사회주의 헌법을 채택해 분단을 고착화했으며, 1973년 8월 김대중납치사건으로 인해 7·4 남북공동성명의 실현은 물거품이 된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한국교회는 역사의 진실을 보기 위해 애 썼으며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대북 선교를 위한 활동을 차츰 구체화하기 시작했다(도움말 : 변진흥 교수·가톨릭대).

 

[가톨릭신문, 2011년 6월 12일, 임양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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