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 (일)
(백)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세계교회ㅣ기타

[희년] 자비의 희년, 무엇을 할 것인가 (6) 희년의 사회적 차원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1-25 ㅣ No.345

자비의 희년, 무엇을 할 것인가 (6 · 끝) 희년의 사회적 차원


지금, 가난한 이들 외침에 귀 기울일 때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진심 어린 회심과 고해, 그리고 교회의 구조와 활동에서 자비의 정신에 부합하지 않은지를 가려 성찰함으로써 쇄신을 이룬 교회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향하는 곳은 사회와 세상이다.


자비의 희년, 선교적 교회를 지향

세상 안에서 하느님 자비의 표지가 됨으로써 교회는 비로소 무한한 자비이신 하느님, 그러한 하느님의 얼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세상에 드러낸다. 자비의 희년이 지닌 개인적, 교회 내적 차원과 함께 희년의 사회적 차원은, 1년여의 희년 기간 동안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기 자신에, 자기만의 공동체에 매몰되지 않고 선교적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복음적 소명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것이다.

자비의 희년의 정신을 가장 집약적으로 담고 있는 것은, 교황의 자비의 희년 선포 칙서 「자비의 얼굴」과 함께, 교황의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이다. 「복음의 기쁨」은 ‘오늘날 세상에서 복음 선포’를 주제로, 교회의 모습이 앞으로 어떠해야 하는지를 제시한다.

여기에서 교황은 “선교적 선택, 즉 교회의 관습, 관행, 시간과 계획, 언어와 구조 등 모든 것을, 교회의 자기 보존이 아니라 현대 세계의 복음화에 적절하도록 변화시킬 수 있는 선교적 열정”을 꿈꾸며 그런 열정으로 가득 찬 교회를 꿈꾼다고 말한다.

교회는 개혁과 쇄신을 요구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교회 개혁과 쇄신의 요청은 곧 교회의 사회적 측면으로 직결된다. 교황은 교회 공동체와 제도적 교회를 감염시키고 있는 세속적 조류를 단호하게 경계하면서 교회 내적 성찰에 집중하는 동시에, 신앙이 갖고 있는 사회적 측면을 강조한다. 실제로 「복음의 기쁨」 전체가 복음화의 사회적 측면에 대한 성찰과 요청이라고 할 수 있다. 교황에 의하면, 복음화의 사회적 측면이 시대에 맞는 방법과 시각으로 적절하게 구현되지 않으면, “복음화 사명의 참되고 총체적인 의미가 왜곡될 지속적인 위험성이 있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사명은 아주 직접적이고 총체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로 집중된다.


자비가 모든 이에게 전해지도록

“하느님 자비는 결코 정의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에게 다가가시는 하느님의 활동을 나타내는 것입니다.”(자비의 얼굴, 21항)

교황은 “용서의 말씀이 모든 이에게 전해지고 자비를 경험하라는 부르심에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도록 하기 바란다”(19항)고 말한다. 그래서 교황은 “하느님의 은총과는 멀리 떨어진 생활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회개하라고 더욱 간곡히 권유”(19항)한다. 희년의 시기, 바로 “지금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적절한 때”이고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야 할 때”이다. “재산을 박탈 당하고 존엄과 감정이 짓밟히며 생명마저도 빼앗긴 무고한 이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때”이다. “교회가 마련한 자비의 특별한 시기에 모두 회개하라는 초대”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사회를 향해 외쳐야 한다.

세상 안에서 하느님 자비의 표지가 되라는 요청은 구체적으로 매우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나아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선포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그 바탕에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관심이라는 복음적 소명이 놓여 있다. 하느님 자비의 얼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시도 강조하지 않은 적이 없었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오늘날 교회가 확고하게 간직해야 할 지상 과제이다.

더욱이 그러한 과제는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실천돼야 한다.

“사실 사랑은 결코 추상적인 단어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랑의 본질은 구체적인 삶입니다. 일상의 행동에서 사랑은 생각과 태도와 습관으로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듯이, 자녀들도 그렇게 사랑합니다.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서로서로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자비의 얼굴, 9항)


자비의 사회적 실천

교회 공동체의 구체적인 삶으로 드러나는 자비는 우선 자선 활동의 확대로 나타날 수 있다. 이미 교회는 다양한 복지활동, 자선활동을 통해서 사회의 그늘진 곳에 있는 이들에 대한 관심을 표시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지금의 모습과 실천으로 충분할까? 먹고 남는 것으로 생색만 내는 것은 아닐까? 진정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헌신하고 있는 것일까? 여전히 우리에게는 반성과 성찰을 할 것이 많아 보인다.

중산층화된 교회의 모습으로는, 자칫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과 활동을 신앙생활의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기 십상이다. 교회가 이미 지니고 있는 사회적 위상과 기득권에 연연함으로써, 물질과 사회적 영향력으로 나타나는 종교적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심사는 혹시 없는지를 엄정하게 성찰해야 한다. 자선 활동의 확대는 그저 양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향한 동정과 우월감이 섞인 마음으로 물질적 재화의 양을 늘리는 것은 아니다.

사회정의의 실현과,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회적인 문제로 남아있는 인권 회복 문제는 희년의 사회적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극도의 사회 양극화는 그 대표적인 문제로서,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점점 심화되어가고 있는 사목적 과제이다. 관료 사회의 부패나 무분별한 국책 사업으로 인한 가난한 이들의 고통은 오늘날 한국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주요한 사회 문제이다. 비정규직 문제나 인간의 품위를 지킬 수 없는 저임금 노동자들은 사회 양극화 문제와 관련한 우리 사회의 핵심적인 영역이다. 이주민과 난민 문제 역시 이제 남의 일이 아니다. 지난해 남북 분단 70주년을 지낸 우리 민족에게, 민족화해와 통일을 위한 노력은 한국교회가 집중해야 할 가장 큰 사회적 차원의 사목 과제이다.

거대한 국책 사업으로 심화된 자연 생태 환경의 보존 역시 사회적 차원에 속한 교회의 신앙적 소명 중 하나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통해서 자연 생태와 인간 및 사회 생태가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같은 문제의 다른 측면임을 일러주었다. 그리고 생태계의 파괴는 결국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큰 고통을 준다는 점을 강조했다. ‘대지의 울부짖음과 사회적 약자의 울부짖음’(찬미받으소서, 49항)을 우리는 모두 들어야 하고, 신앙 실천의 본질적인 부분으로서 생태 환경 보존에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희년 정신의 한 부분이다.

[가톨릭신문, 2016년 1월 24일, 
박영호 기자]



2,711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