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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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교회사 속 여성: 글 쓰는 여인들 - 박희순 루치아와 현경련 베네딕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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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0-30 ㅣ No.1310

[한국 교회사 속 여성] 글 쓰는 여인들


박희순 루치아와 현경련 베네딕타

 

 

1443년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다. 그럼에도 조선왕조의 공식 문서는 한자로 쓰였다. 국가시험은 한문으로 치렀고, 정부의 포고문, 재판소의 판결, 상인의 회계장부, 상점의 간판 등 모두 한자였다. 조선어 사전이 없어서 뜻을 모르는 조선말은 그것에 해당하는 한자를 알아야 했다. 이때 조선의 천주교회는 한글을 공식어로 사용했으며, 한글 문화의 형성에 기여했다.

 

 

한글, 하느님 말씀을 여는 열쇠가 되고

 

한글은 조선의 글자였고, 배우기 쉬웠다. 천주교는 한문에 익숙했던 양반들이 책을 통해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바로 한문 교리서를 번역하고 한글로 교리서를 썼다. 자신과 다른 계층을 염두에 둔 것으로 일반 민중을 위한 복음의 선포였다. 천주교의 한국화와 대중화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신자들은 박해 시대 가운데 약 60년 동안 신부 없이 지냈다. 물론 교회, 수도원, 수도자들도 없었다. 신자들은 박해를 견뎌야 할 뿐만 아니라 성사도 받지 못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스스로 키워 가야 했다. 이때 교리서는 움직이는 성당과 같았다. 책은 박해로 흩어진 신자들을 모으는 데도 중요했다. 박해가 휩쓸고 간 뒤의 교회 재건도 책 간행에 의지해야 했다.

 

교구가 설정되고 프랑스 선교사가 들어온 이후에도 다를 바 없었다. 선교사의 수가 너무 적고 신자들은 전국 산골에 흩어져 있었기에, 선교사들은 각 신자에게 일 년에 15분 이상 할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교회는 서적을 발간하는 데 힘썼고, 그것도 대중이 읽을 수 있는 한글로 출간했다. 교리 교육이 행해지는 곳에는 한글 교육이 이루어졌다.

 

여성 중 문서 작업과 번역 작업자로는 먼저 문영인과 강완숙을 생각할 수 있다. 문영인은 궁에서 읽기와 쓰기를 훈련한 궁녀이며, 강완숙은 주문모 신부가 신자들과 만날 때 옆에서 소통을 도왔다. 그러므로 주문모 신부가 강완숙 공동체에서 교리서를 정리하고 저술할 때, 문영인과 강완숙이 곁에서 도왔을 것이다.

 

 

옥에서 부른 ‘백조의 노래’

 

책이 귀하던 당시 신자들은 교리서를 필사하여 돌려 보았다. 특히 그들은 신앙에 관한 편지를 쓰고, 이를 돌려 보며 묵상서로 삼았다. 그중에서도 옥중에서 순교를 기다리던 신자들의 편지는 ‘백조의 노래’라 할 수 있는 신앙고백이었다. 그들은 마치 10대의 시골 처녀 마리아가 주님의 뜻을 온전히 담아내는 ‘성모의 노래’를 지은 것처럼, 천주교 신앙을 꿰뚫는 글들을 남겼다. 그중에서 여성의 글로는 이순이의 편지가 남아 있다.

 

한편, 기해박해 당시 증거자 40명은 신자들에게 유익한 편지를 보냈다. 특히 박희순(1801-1839년)의 편지는 교우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는데, 그것은 천주의 은혜를 찬미하는 노래였다. 박희순은 어렸을 때 뛰어난 미모와 재주로 궁녀로 뽑혔다. 열다섯 살 때 어린 순조 임금의 유혹을 받았으나 아직 신자가 아니었는데도 그의 용기와 덕은 이를 물리쳤다. 그는 서른 살 즈음 천주교에 입교했다. 그때 그는 김 대비의 깊은 총애를 받는 상궁이었으며, 선왕의 위패를 모시고 있었다. 박희순은 궁에서 신앙생활을 하기 어려워 병을 칭탁하고 궁을 나왔다. 그는 조카의 집에 머무르면서 신앙생활에 전념했다. 그를 보고 언니 박 큰아기와 조카의 식구들이 입교했다.

 

박희순은 기해박해 때, 자신처럼 신앙생활을 하고자 궁에서 나온 전경협의 집에 머무르다 함께 체포되었다. 그들은 궁인으로 다른 여자들보다 높은 교육을 받았음에도 사학을 믿었다는 죄로 포청과 형조에서 혹형과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박희순은 오히려 예수님의 수난하심을 묵상하며 교우들에게 감동적인 권면의 편지를 써 보냈다.

 

 

사실(史實)을 기록하는 여인

 

초기 교회에서의 큰 작업은 신앙 증거자들에 대한 사기(史記) 편찬이었다. 물론 이 작업은 다블뤼 주교가 주로 맡았고, 또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여성 중에서도 이런 작업을 한 사람이 있었다. 강완숙은 옥에서 주문모 신부가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속치마에 신부의 업적을 기록했다.

 

한편, 현경련(1794-1839년)은 직접 「기해일기」를 정리하는 데 관여했다. 앵베르 주교는 기해년에 박해가 일어나자 곧 순교자의 사적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자신이 체포될 것을 우려하여 정하상과 현경련에게 이 일을 맡겼다. 또 이경천과 최영수, 현석문도 같은 사명을 위임받았다. 이 책은 참여자들이 차례로 순교하면서, 현석문이 완성하였다.

 

현경련은 서울 장흥동에서 약방을 경영하던 역관 현계흠의 딸이었다. 그는 1801년 부친이 순교한 뒤 모친, 남동생 현석문과 어렵게 살았다. 열일곱 살 때 최창현의 아들과 결혼했으나 3년 만에 남편을 여의고 친정에 돌아와 삯바느질로 가족의 생계를 도왔다. 이 집안은 자신들의 처지를 천주께 찬양할 환경으로 여기고 감사하며, 늘 기도와 묵상, 독서를 정한 시간에 바쳤다. 현경련은 회장직을 맡아 천주를 섬기는데 솔선하였으며, 뛰어난 교리 지식으로 교우는 물론 외교인까지 가르쳤다.

 

현경련은 1839년 6월에 체포되었다. 선교사들에게 걸린 현상금을 탐내어, 주교와 샤스탕 신부의 복사인 동생의 피신처를 알아내려는 형리들에게 혹형을 당했다. 8월 형조로 옮겨졌을 때는 염병에 걸려 괴로움은 한층 더했다. 그러나 이러한 옥살이 중에 그가 방생 현석문에게 보낸 편지는 교우들에게 감동스러운 묵상서가 되었다.

 

 

한국과 프랑스의 만남은 국어 연구를 낳고

 

한국어와 프랑스어 두 언어로 일하던 선교사들은 박해 시기에 이미 신앙 서적 외에도 조선어 연구에 몰두했다. 국어의 문법도 이때 검토되고 연구되었다. 당시 한국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썼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오늘날처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기입하기 시작했다. 또 선교사들과 천주교인들은 안전한 통신을 위해 주고받는 편지를 가로로 썼다. 뒷날, 한글학자 주시경이 뮈텔 주교에게 한국어의 문법 관계를 질문하곤 했다. 물론 이 작업에는 황석두, 최양업 신부 등 한국인들의 도움이 컸다. 최초의 한국어 사전은 프랑스 신부들과 신자들이 만들었다. 그럼에도 남성과 똑같이 교리를 익히고 일했던 여성의 글은 전해서 내려오는 것이 거의 없다.

 

*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 영남대학교 역사학과 명예 교수. 대구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 위원, 대구가톨릭학술원 회원, 대구대교구와 수원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 위원이며, 안동교회사연구소 객원 연구원이다.

 

[경향잡지, 2020년 10월호,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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