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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다산의 상제관과 서학의 상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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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11 ㅣ No.833

다산의 상제관과 서학의 상제관*

 

김치완(제주대학교 교수)

 

1. 서론

 

그리스도교 신학에서는 自然宗敎와 啓示宗敎를 구분한다. 자연종교는 性敎라고도 하는데, 인간이 본성적으로 하느님을 깨달을 수 있다는 전제에서부터 출발하여, 인간의 힘으로 하느님을 깨닫고 하느님이 주신 양심의 법도에 따라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을 말한다.1) 이에 비해 유학은 “中國思想의 大宗인 孔子의 學說을 祖述하는 敎學으로서 仁의 諸德을 一貫하고 修身齊家로부터 治國平天下를 이룩함을 本旨로 하는 것”으로서 공자 학설의 “一貫之道”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天道에 입각하여 人道를 지키는 데” 그 특징이 있다.2) 이렇게 본다면 유학은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말하는 종교[Religion]라고 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실제 유학에서는 그것이 본성적이건 계시적이건 ‘하느님’을 깨닫고 섬기는 것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것은 孔孟學으로부터 程朱學을 거쳐 陸王學과 실학에 이르기까지 유학에 등장하는 天이 인간의 도덕적 가치 판단과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라는 제한적 의미를 가진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3)

 

이 점을 전제로 할 때 明末淸初의 전환기에 중국에 들어온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만들어진 補儒論的 西學의 문화적응주의적 선교방침은 상당히 유효적절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유학의 경전에 나오는 天 또는 上帝를 자연종교 단계의 하느님 관념이라고 인식하였고, 바로 이 지점이야말로 문화적응주의적 선교가 가능한 중간지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점에서 본다면, 오늘날까지도 중국과 조선의 실학자들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숱한 논쟁이 해결되고 있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돌이켜보면 중국 선교사들은 그들이 종교로 보았던 불교를 배척하는 대신, 자연종교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았던 유교와의 공통지대를 마련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것이 ‘보유론’, 곧 ‘闢佛補儒’의 문화적응주의적 선교방식이다. 그런데 그들이 이렇게 ‘보유론’을 내세운 것은 이른바 유학을 자연종교 단계로 전제할 때, 서양과학기술문물을 이른바 ‘로스리더’(loss leader)로 내세우면서 중세 그리스도교를 선교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화적응주의적 선교방식은 결과적으로 두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는 중국 선교사들이 유교를 제대로 이해했느냐 하는 문제로서, 그들이 비록 중국 고전을 깊이 연구했다고 하더라도 사실상 번역 또는 저술 과정에서 유학의 주요 개념을 자의적으로 이해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중국과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서학을 제대로 이해했느냐 하는 문제로서, 사실상 信西와 闢西 어느 쪽도 보유론적 서학이 결과적으로는 중세 그리스도교의 전교를 목표로 한다는 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4)

 

중국 선교사들에 의해 의도된 것으로 볼 수 있는 이 혼란은 보유론적 서학 전래 유학자들에게는 물론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 내부에서도 ‘布敎管轄權’(Padroado)을 둘러싸고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5) 곧 문화적응주의적 선교방식을 선택한 예수회 선교사들의 보유론적 서학에 대해 엄격주의적 선교방식을 고수한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 그리고 파리 외방전교회의 반발이 있었던 것이다. 이 문제는 초기의 天 · 上帝 관념의 논란에서부터 폐제사문제로 전개되어, 결과적으로는 중국과 조선 정부의 반발을 낳았다. 여기에 훗날 조선 실학이 근대적이었다는 평가의 근거로 삼는 서양 과학 기술 문물의 적극적 수용은 물론 그리스도교회의 자생적 수립이 강조되면서 이런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사실 茶山 丁若鏞(1762~1836)의 信西 여부가 문제 되는 것도 이런 혼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6)

 

유학을 ‘자연종교 상태에 머물러 있는 인간학’으로 제한하면, 다산의 洙泗學的 儒學으로의 회귀는 보유론적 서학이라는 계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다산의 천 · 상제 관념은 그것이 중세 그리스도교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서양 중세 신학에서 말하는 Deus와 중첩되는 부분이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그렇다면 다산은 왜 보유론적 서학의 천주 관념을 그대로 인용하거나 전개 발전시키지 않았는지?’라는 의문이 든다. 물론 당시 자신이 그리스도교적 신관과 세계관, 그리고 인간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그대로 드러낼 수 없었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야 하겠지만, 그 다음 순간에는 ‘그것을 그대로 드러내기를 포기했다면 그는 더 이상 신앙인이 아닌 것이 아니냐?’는 반문과 ‘중세 그리스도교를 수용한 그를 서양에서 말하는 근대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냐?’는 반문에 부딪히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유학을 ‘자연종교를 벗어난 인간학’으로 본다면 다산의 反朱子 또는 脫朱子 시도는 道學的 자기수양의 진면목을 잃어버리고 주자의 권위를 빌어 오히려 현실과 유리된 空疎無用으로 내닫는 현실에 대한 반동으로 볼 수 있다. 이 경우 다산의 천 · 상제 관념은 중세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관념과는 일치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洙泗學의 內聖外王 관념이 확장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오늘날 다산은 인성론 등의 면에서는 근대적이라고 평가되지만, 정치철학적인 면에서는 여전히 중세적 봉건질서를 유지 · 존속하려 하였다고 평가됨으로써 중세와 근대가 논점별로 그 평가가 엇갈린다. 그런데 다산이 자연종교를 벗어난 인간학으로서의 유학을 전제로 하여 새로운 방향성을 모색하려고 한 것으로 보면, 이렇게 초점 불일치가 되는 것들을 어느 정도는 해소할 수 있다.

 

한편 오늘날 유학 내에서는 退溪와 다산에서 목격되는 도학적 요소들이 서양 신학에 뒤지지 않는 것으로서 그들이 말하는 理 또는 上帝가 ‘계시 없는 하느님’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될 경우 예수회 선교사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유학은 ‘자연종교 상태에 머물러 있는 인간학’ 내지는 ‘표면적으로는 인간학을 지향하지만 새로운 형태의 신학’이 된다. 그리고 이 두 가지의 경우 어느 쪽이든 유가의 천 · 상제 관념은 서양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자연종교의 하느님 관념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공맹학의 천 · 상제 관념은 물론 이후 유학의 전통에서 논의되던 천 · 상제 관념을 보유론적 서학을 만나기 이전의 상태로 일단 접근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尹?와 朴世堂의 경우에서도 확인되듯이 주자학과 거리두기가 꼭 보유론적 서학으로 연결될 이유도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이 꼭 근대성으로 귀결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연구에서는 다산의 천 · 상제 관념을 보유론적 서학의 그것과 각각 비교하되, 유가 전통의 人性論과의 관계 속에서 분석함으로써 다산이 본래 의도했던 바를 파악하려고 한다.

 

 

2. 茶山의 天 관념과 補儒論的 西學의 天 관념

 

한자 문화권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창조주나 유일신이라고 하는 존재를 가리키는 말로 오래전부터 ‘天’이라는 글자를 사용해왔다. 이 글자의 용례를 살펴보면, 形體之天 · 意志之天 · 自然之天 · 主宰之天 · 義理之天 등으로 범주화할 수 있다.7) 우선 《說文》에서 ‘顚’으로 풀이한 天은 형체지천으로서 천체인 하늘을 가리킨다.8) 다음으로 고대인들이 자신들의 생존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해서 신성을 부여했던 자연현상의 총합으로서의 天은 인간처럼 의지를 가진 인격천으로서 의지지천에 해당한다. 원시신앙의 대상에 天神 · 地祇 · 物魅 · 人鬼 등이 있다고 할 때, 의지지천은 천신을 가리킨다. 이에 비해 자연지천은 형체지천의 관념이 발달한 것으로서 일종의 자연환경을 가리키는데, 朱子(1130~1200)가 “天은 저절로 그러한 것(自然)에 나아가 말한 것이다”9)라고 할 때의 天이 여기에 포함된다. 그리고 주재지천은 인지가 발달하면서 등장한 유일신 개념을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의리지천은 자연지천과 주재지천에서 종교적인 면을 약화시키는 대신, 人心의 가치 근원이라는 면을 강화한 것으로서 흔히 天命이라고 할 때의 그 天을 가리킨다.10)

 

이러한 天 관념 가운데서 중국사상의 주류를 이룬 天 관념은 자연지천과 의리지천 두 가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왜냐하면 중국에서는 殷代 이후부터 늦어도 西周시대 초기에 유일신 관념인 주재지천의 관념이 완성되었다가11), 東周 초에 이르러서는 정치이데올로기 상의 제한된 상징으로 약화되고 소멸되어12) 민간신앙에서 외에는 남아있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자 이후로 언급되는 天은 인간의 가치 자각주재 원천이라는 점에서 대개는 의리지천으로 이해된다. 공자가 자신에게 덕을 주었다고 한 天13)은 물론,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고 할 때의 天14)도 숭배와 敬畏의 대상인 ‘주재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自覺主宰의 근거와 客觀制限의 법칙으로서의 의리지천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렇게 공자와 맹자 이후로 의리지천이 유학의 주요 대상이 되었지만, 동시에 자연지천이 계속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연구자에 따라서는 종종 공자와 맹자에게 자연종교의 神 관념이 남아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문제는 유학의 天 관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되므로, 중국철학사가인 勞思光의 말을 빌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이 단락은 공자의 應然과 必然(또는 自覺主宰와 客觀制限)의 구별에 대하여 가장 잘 표현된 곳이다. 義에 대하여 말하면 道의 實行은 자연히 義에 합치되고, 道의 廢止는 義에 합치되지 않는다. 그러나 道가 실행되어야 함[應行]은 별개의 일이요, 道가 실행되느냐 되지 않느냐 하는 것은 바로 사실 문제이다. 이것은 객관적인 제한을 받아서 결정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 道의 行과 不行은 성공, 실패[成敗]의 문제이고, 道의 應行[마땅히 실행되어야 함]은 가치시비의 문제이다. 인간이 책임질 수 있는 것은 단지 옳고 그름[是非]의 문제에 있을 뿐 성공, 실패의 문제가 아니다.15)

 

노사광은 《論語》 <憲問>의 “道之將行也與 命也 道之將廢也與 命也”를 풀이하면서 위와 같이 말한 바 있다. 勞思光이 공자의 학설을 제대로 분석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異論의 여지가 있겠지만16), 인용문에 따르면 공자는 가치와 사실의 영역을 분리하면서 두 가지 영역에서 동시에 그 근거로서 天을 요청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분석하면 ‘마땅히 해야 한다’는 것은 義의 영역으로서 그것은 온전히 인간의 가치판단과 그에 따른 실천이 논의되는 곳이다. 그런데 철학적 인간학에서 인간은 분명히 ‘자기 충족적 존재’로 선언되지만, 고대인에게 있어서 그러한 가치영역의 준거는 인간을 넘어선 구체적인 존재로 요청될 수밖에 없다. 이때 요청된 것이 바로 의리지천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成敗가 드러난다는 것은 命의 영역으로서 그것은 어떤 현상의 사실 관계가 논의되는 곳이다. 오늘날에는 이 영역이 자연과학을 통해 상당 부분 해결되고 있지만, 근대 이전에는 의리지천과는 다른 차원에서 이를 관장하는 존재가 요청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요청된 것이 바로 자연지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유학에서는 인간 가치 자각, 곧 자각주재의 근거로서 요청되는 純善한 天命과 세계 내에서 일어나는 잡다한 현상의 어떤 정형화된 패턴으로서의 천명 두 가지가 동시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오늘날에는 《中庸》이 漢代의 저작물로서 공맹학의 전통적인 인성론을 벗어난 본체론적 관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지만, 주자에 의해 四書 가운데 하나로 수용되고 인성론의 한 축을 차지하게 된 것은 바로 이렇게 유학에서 두 가지 天을 동시에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17) 곧, 중국철학사의 핵심 주제를 ‘인간의 도덕적 실천 가능성 여부’라고 할 때, 이 두 가지 천명의 문제를 좀 더 근대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한 것이 朱子의 性卽理 구상이라고 할 수 있다.18)

 

다산의 天관념이 그리스도교적이냐 아니냐 하는 논란은 이 점에 주목할 때 그 실마리가 풀린다. 다산은 《天主實義》에서 언급된 바 있는 蒼蒼有形之天과 靈明主宰之天으로 天을 구분했다. 다산의 표현을 그대로 보면 ‘푸르고 푸르른, 형체 있는 하늘’은 형체지천이고, 영명하고 주재하는 하늘은 주재지천이 된다. 그래서 다산의 영명주재지천은 신앙의 대상인 하느님으로서 마치 중세 그리스도교나 원시 종교의 하느님과 같고, 창창유형지천은 형체지천으로서 자연과학적 탐구의 대상과 같은 것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주자의 性理論을 극복하려고 洙泗學的 전통으로 돌아갔다고 평가받는 다산이 공맹 이전의 주재지천과 형체지천의 개념을 강조한 것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다산이 자연종교상태의 神 관념으로 회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다음의 인용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天地를 함께 말하고서 홀로 天命이라고만 한 것은 臣의 생각으로는 ‘높고 밝음이 하늘과 짝한다’할 때는 푸른 형체를 갖춘 하늘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늘만이 깊고 깊구나’라고 할 때는 영명한 主宰者로서의 하늘입니다. 그러므로 줄줄이 차례대로 늘어선 천지와 산천은 넓고도 큰데도 主宰하는 天이 조화하는 공적에 감탄하는 것입니다.19)

 

인용문에서 다산이 말하는 창창유형지천은 일차적으로는 형체지천으로 볼 수 있다. 본래 蒼天은 보유론적 서학자들의 독창적인 용어가 아니라, 《周禮》와 《爾雅》에서 각각 푸른 형체에 착안하여 창공을 가리켜 부르는 이름으로 사용된 용어이다.20) 고대인들의 소박한 자연신관에 따르면 이 ‘높고 밝은’ 창천은 분명히 창공신이다. 그런데 다산은 창천에서 영명주재적 성격을 분리해냄으로써 일차적으로는 형체지천만을 가리킨다.

 

내 생각에, 하늘을 주재하여 上帝가 되는 그를 일러 ‘天’이라고 부르는 것은 마치 나라의 국왕을 다만 ‘國’이라 칭하는 것과 같으니, 감히 남을 물리치는 말을 할 수 없다는 뜻에서이다. 저렇듯 푸른 형체를 갖춘 하늘도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겨우 지붕이 장막처럼 덮여 있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그의 등급은 토지와 물과 불과 함께 평등하게 동일한 등급인데, 어찌 우리들의 性 · 道의 근본일 수 있겠는가.21)

 

다산은 세계를 주재하는 존재를 ‘天’이라고 부르는 것이 임금을 가리켜 ‘國’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자연종교 단계에서 하늘은 자연물인 창공을 넘어선 무한과 초월을 상징한다. 이 상징은 창공이라는 공간이 아득히 멀고 위에 있다는 이미지를 통해서 무한과 초월의 하느님이라는 관념을 함축한다. 따라서 ‘주재자=하늘=하느님’이라는 관념이 통용된 것이다. 그러나 자연종교를 넘어서게 되면 창공이란 존재의 위계 가운데 가장 하위에 속하는 자연물에 불과하다. 그래서 다산은 창천이 ‘지붕이 장막처럼 덮여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물론 이런 시각은 보유론적 서학의 기본 텍스트라고 할 수 있는 《천주실의》에서도 다음과 같이 드러나 있다.

 

중국 선비가 말한다. “진실로 그와 같다면 우리[중국인]들은 아마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하여] 마음이 아직도 혼란스럽다고 하겠습니다. 대저 머리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고는 이윽고 오직 하늘에 절할 줄만 알 뿐입니다” 서양 선비가 대답한다. “… [예를 들어] 먼 변방에서 온 사람이 갑자기 長安의 길 한 복판에 이르러, 웅장하고 호화찬란한 궁전을 보고 깜짝 놀라 예를 갖추어 절하고 나서 ‘나는 임금님을 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하늘과 땅[天地]을 받들고 공경하는 것은 대부분 궁궐을 보고 절하는 부류와 같습니다. … ‘올바른 선비’[君子]가 만약 [천주를 말하지 않고] 혹시 ‘천지’를 일컬었다면 그건 말투일 뿐입니다. 비유하자면, ‘知府’나 ‘縣監’이 소속된 ‘부’나 ‘현’의 이름을 가지고 자기의 호칭을 삼는 것과 같습니다. 南昌의 太守는 ‘南昌府’라 부르고, 南昌縣의 大尹은 ‘남창현’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경우에 대비되어, 천지의 주인을 혹시 ‘천지’라고 불렀다면, 그것은 천지를 [천주의] 실체로 본 것이 아닙니다. [천지 만물의] 原主가 존재하고 있습니다.”22)

 

그런데 인용문에서는 중국 선비가 형체지천과 주재지천조차도 구분하지 못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서양 선비는 중국 선비가 경외의 대상으로 삼는 ‘하늘’이 사실상 형체지천에 불과할 뿐이요, 그 형체지천 이면에는 주재하는 하느님, 곧 하늘의 주인이 있다는 사실을 다산과 같은 논리로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 대화는 공맹 이후로 자연종교 상태의 天 관념이 이미 소멸되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 서양 선비가 당시 유학자들의 天 관념을 일방적으로 재구성한 것이거나, 그러한 점을 알고서도 유학에서는 이미 소멸된 주재지천을 통해서 의리지천이 가지는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논점을 비튼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유학에서는 천명, 生機之天, 天道로서의 자연지천과 가치시비의 판단 준거로서의 의리지천의 문제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이 둘이 서로 관여하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 이 문제는 중국철학사 내내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렇게 가치판단의 준거로서의 하느님과 자연 사물의 운행법칙으로서의 하늘을 구분하는 것이 어쩌면 효과적인 해결방안일 수도 있다. 그래서 다산도 고대의 종교적 天 관념으로부터 水火와 같은 位階인 창천을 구분해 내는 것으로부터 출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시도는 보유론적 서학을 구상한 선교사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자연물로서의 天을 말하는 것은 다산이 수사학적 전통으로 돌아가서 더 이상 자연을 인간의 가치 연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다산은 존재사물의 사실법칙을 관념화한 天과 인간이 靈明主宰하다는 근거로 요청된 天을 구분함으로써 자연의 법칙과 인간의 가치를 전혀 다른 영역으로 구분해 내었다.23) 이에 비해서 보유론적 서학에서의 천주는 오히려 주재지천을 형체지천에서 분리한 것일 뿐, 여전히 사물을 主宰安養하는 법칙과 인간의 가치판단의 준거라는 점에서는 동일한 존재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서양 선비가 재구성해낸 중국 선비의 질문에서도 드러나듯이 유학의 전통이 사실과 가치 영역에서 중복되는 하느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있다는 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유학의 전통에서 有形의 天은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법칙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이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법칙이 곧 도덕 원리의 근거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가 말했듯이 자연현상은 成敗의 현상에 불과하지만, 그 현상에서 어떤 원리와 법칙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오로지 인간에게만 가능한 영역이다.24) 왜냐하면 이 문제는 인간에 대한 질문이 자기의 先이해에서부터 출발하므로, 결과적으로 자기가 아는 것을 되묻는 것이라는 인간학적 질문의 순환성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산이 소박한 자연신관에서 벗어난 유학적 전통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전제할 때, 그가 창천과 主宰天을 구분한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理神論 · 物神論化 되어버릴 수 있는 자연법칙에서 인간의 가치영역을 온전히 확보해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다산은 ‘주재’하는 天과 함께 ‘인격적인’ 상제라는 말을 함께 쓰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보면 다산의 天은 엘리아데(M. Eliade)가 말한 바 있듯이25), 蒼空神으로서의 天이 자기의 存在示顯인 창공에서 빠져 나오자마자 ‘상제’ · ‘천주’라는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도록 요청된 하느님과 유사하다.26)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산이 말한 주재하는 天을 고대 중국인이 믿었던 자연종교의 天이나 주재지천으로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고대부터 중국인들은 복고적 이상주의를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구세주 관념 및 그것에 바탕을 둔 종말론(eschatology)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자연종교적 신관을 가지고 있었던 고대 중국인들이 믿었던 주재하는 하느님도 현실에 대한 불평 · 불만 · 애원 · 호소의 대상일 뿐, ‘인간과 자연의 마지막 때에 다시 찾아와’ 자비와 축복, 혹은 상벌을 주는 존재가 아니었다.27) 더구나 이 ‘주재하는 종교적 天’마저도 공맹 이후로는 천명의 형태로 인간의 본성에 자리 잡으면서 의리지천으로 그 종교성이 약화되거나 소멸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다산이 수사학적 전통으로 돌아가려고 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의 ‘영명주재’는 원시종교적 개념이 아니라 공자가 말한 應然, 곧 자각주재를 주의환기하려는 의도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다음과 같은 다산의 말에서도 확인된다.

 

대개 천하에 無形한 것은 주재자가 될 수 없다. 예컨대 한 집 안의 어른이 우매하여 답답하게도 슬기롭게 트이지 않으면 집안 만사가 다스려지지 않을 것이다. 한 고을 어른이 우매하여 답답하게도 슬기롭게 트이지 않으면 그 고을 또한 만사가 다스려지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아득하게 텅 비어있는 太虛한 한 理를 가지고 천지만물을 주재하는 근본으로 삼는다면 천지간의 일들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28)

 

인용문은 다산의 인격적 하느님 관념을 드러내놓은 것으로 곧잘 이해된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다산은 보유론적 서학에서 시도되었던 神 존재 증명을 되풀이한 것이 아니라, 당시 성리학에서 자연법칙으로서 天을 대체하게 된 理 개념이 인간의 영명주재함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밝힌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그동안 상당한 논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산의 영명주재지천은 인격적 유일신이라기보다는 인간의 도덕가치 판단 근거로 요청된 존재일 수밖에 없다.29) 이 점은 인격적 하느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종종 오해를 받는 다산의 상제 개념에 대한 논의에서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3. 茶山의 昭事上帝 관념과 補儒論的 西學의 上帝 관념

 

본래 上帝란 말은 《書經》 <堯典>의, “드디어 상제에게 類祭하였다”[肆類于上帝]라고 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帝란 본래 殷墟 甲骨卜辭에서, “甲辰에 帝가 비를 내리게 했다”[甲辰帝其令雨]라고 하였던 殷민족 최고신이다. 이 帝는 은나라의 조상신으로서, 主宰하고 安養하는 면에 주목하여 말한 것이다.30) 그리고 周代의 보편적인 天 관념과 만나게 되면서 至高의 의미인 ‘上’을 더하여 ‘상제’라고 붙여 부르게 된 것으로 본다. 그래서 상제라고 하면 특정 민족신으로서 인격신이라는 의미가 강하기 때문에 유학에서 상제를 말하는 경우는 드물다.31)

 

물론 鬼神 관념과 함께 공맹 이후에도 정치철학이나 민간신앙의 면에서 상제, 귀신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바 있다. 하지만 공자 이전에도 상제라는 용어는 최고의 주재자이기는 하지만 정치적인 성공과 실재의 면에서만 사용되었고, 이렇게 제한적인 의미에서의 ‘주재’도 모든 일에 간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힘이 어쩔 수 없는 문제들에 제한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귀신’이라는 용어도 각종의 초자연적 성질의 숭배대상일 뿐이어서,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관념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영혼이라는 관념과 유사하다. 그뿐만 아니라 같은 맥락에서 도교의 神 관념도 이해하여야 한다.32)

 

보유론적 서학을 구상했던 예수회 선교사들이 초기에는 ‘상제’와 ‘天主’라는 용어를 섞어 쓰다가 중국 상황에 익숙해진 다음부터는 본격적으로 천주라는 용어를 쓰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33)

 

서양 선비가 대답한다. “…사람 중에 누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지 않으며, 하늘을 바로 볼 때에 ‘여기 이 한가운데 반드시 주재하는 분이 계신다’하고 가만히 스스로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 분이 곧 천주이시니, 우리 서양 나라에서 말하는 ‘데우스(Deus)’입니다.…”34) 서양 선비가 대답한다. “…우리나라[서양]의 천주는 곧 중국말로 ‘하느님[上帝]’입니다. 道敎에서 만들어 놓은 玄帝玉皇의 彫像과는 같지 않습니다. …우리[서양]의 천주는 바로 [중국의] 옛 경전에서 말하는 ‘하느님[上帝]’입니다. …<大雅>에서 말했습니다. ‘아, 이 文王께서는 오직 마음을 조심하고 행동을 삼가며, 밝은 덕으로 하느님[上帝]을 섬기셨네”35)

 

《天主實義》 <서문>에서는 ‘나라에 주인이 있는 것처럼 天地에도 주인이 있다’라는 말에 이어 천주라는 용어를 아무런 설명 없이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인용문에서 나타나듯이 내내 이 천주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그것이 라틴어로는 ‘Deus’로서 유가 경전에 자주 등장하는 ‘상제’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고 설명한다. 선교사들을 도왔던 중국인이 ‘천주’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위의 인용문으로 추론하건대 선교사들도 자연종교 단계의 상제라는 관념을 그대로 사용하면 개념상 혼란이 생길 수도 있다는 점에서 ‘천주’라는 용어를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인 Deus의 번역어로 하는 데 동의한 것으로 짐작된다.36) 이러한 추정은 아래 인용문에서도 확인된다.

 

우리(그리스도교)의 천주는 옛 경전에서 말하는 상제이다[吾天主乃古經所稱上帝也]. 이는 리치의 단언이다. 후에 예수회 내에서 논의를 거쳐 上帝를 버리고 天主를 택한 것은 그리스도교의 색채를 강조하고 중국적 전통의 영향을 덜어내기 위한 조치였다. 그렇다면 리치가 주장하듯이 상제와 천주는 단지 이름만 다를 뿐인가? 눈여겨 읽어보면, 리치가 인용하는 구절들은 상제를 창조주로 해설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도 상제는 人倫之德을 베푸는 존재로 나타난다(II-14). … 어찌 보면 중국은 서양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공자시대 이후) 점진적으로 이 과정을 진행시켜 왔다고 말할 수 있다. 공자 이후 천여 년이 지난 뒤, 원시유가에서 출발한 성리학은 리치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탈종교적 철학화 과정을 겪었던 것이다. …하늘과 땅 혹은 하늘과 인간의 일치를 중하게 여기는 동양사상에서 修身 혹은 修行은 인간이 궁극적 가치를 획득하기 위해 취해야 할 근본적 실천태도였기 때문이다. … 동양에서는 인간의 경험으로 증명할 수 없는 존재나 현상을 정의가 불가능한 天과 같은 용어로 은유적 혹은 상징적으로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다.37)

 

다산을 조선후기 國家再造의 중요한 시점에 신문물인 서양학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던 선각자로서 조명하던 일제 강점기에, 그리스도교계에서는 다산의 상제 관념이야말로 天 관념과는 달리 그가 그리스도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했음을 나타내는 근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유학의 天 관념이 비인격적, 비종교적 개념인 데 비해, 상제 관념은 인격적 하느님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昭事上帝’ 또는 ‘昭事之學’은 말 그대로 인격적 하느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의 중대한 근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위의 인용문처럼 마테오 리치가 인용한 상제 관념조차도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관념과는 다르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 인정되고 있다.

 

물론 다산은 주재하는 하느님인 상제를 징벌과 두려움의 실제적인 대상으로 묘사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인격적 하느님을 연상시킨다.

 

(이전의 설에) 보충하여 말한다. 皇天께서 殷나라 인민들을 내리 굽어보시며 지나치게 거두어들인 죄를 다스리되 원수들을 불러 놓고 느릿느릿하여 게으름을 부린 자는 용서하지 않았다. 그 중에는 비록 파리하게 야위고 병든 불쌍한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의 죄는 이미 서로 통하여 하나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호소할 곳조차 없었던 것이다.38)

 

《周禮》에서 말하는 皇天은 높여서 임금[尊而君之]으로 부르는 하느님이다.39) 이 하느님은 본인이 역사에 직접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들을 불러’ 자신의 벌을 대신하게끔 한다. 그런데 다산은 “春官 · 大祝은 이 일을 장악하고 있거니와 어찌 이 책(《주례》)의 본문을 버리고 따로 새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40)라고 하였다. 본래 《주례》는 고대 국가의 통치시스템을 밝힌 經典이다. 이 책에 따르면 이른바 六卿이 있어 天子의 命을 받아 조정의 國政을 분담하였는데, 춘관 宗伯은 제사와 典禮를 담당하였다.41) 그러므로 다산이 춘관 ? 대축을 거론한 까닭은 제사와 전례의 대상으로서 상제가 있음을 말하고, 특별히 상제로서 황천만을 말함으로써 ‘주재’적 측면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상제의 주재함이 다산에게서는 愼獨의 이유가 된다.

 

밤중에 산 속을 더듬어 가는 사람이 두려워하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무서워하는 것은 거기에는 호랑이 같은 짐승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군자는 어두운 방 속에 있을 때에도 두려움에 떨면서 감히 나쁜 짓을 못하는데, 그것은 상제가 그대 곁에 계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命 · 性 · 道 · 敎를 모조리 한 理로 돌려버리니 理란 본래 知覺도 없고 위엄 있는 능력도 없는지라 무엇을 삼가 조심할 것이 있으며 무엇을 삼가 두려워할 것이 있겠는가.42)

 

삼가 조심하고 두려워할 계기가 없으면 인간은 오만해진다. 지식인의 도덕적 해이가 문제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다산이 처했던 상황을 고려하면 다산의 ‘주재하는 상제의 요청’이 신독과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합리와 대의명분에 기초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러한 것들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그 생명력을 상실 당하는 조선 후기를 다산은 비주류로서 치열하게 살았다. 당시 주류들은 주자학을 근거로 왕권을 위협할 정도에 이르렀으나, 그것은 실천력을 상실한 공허한 명분에 불과했다. 이 점은 太極에 관한 리치의 비판에도 드러난다.

 

중국 선비가 말한다. “그것의 ‘理’가 없으면 그런 사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의 주자[周敦?]는 ‘理’가 만물의 근원이라고 믿었습니다.” 서양 선비가 대답한다. “… [경험 세계에] 사물이 실재하면 그 사물의 ‘理’가 있게[實理] 되고, [경험 세계에] 실재[實]하지 않으면 바로 그 ‘理’도 [경험 세계에] 실재함이 없게[虛理] 됩니다. 만약 [경험 세계에 없는] ‘관념적인 理[虛理]’를 만물의 근원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붓다나 노자의 말과 다름이 없습니다. … 지혜로운 사람은 [전혀 눈에 보이지 않는] 지극히 은밀한 것도 추리하여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 천지의 높고 넓은 모양을 보고 마침내 천주께서 계시어 그 사이에 있는 것들을 주재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엄숙한 마음과 굳은 뜻으로 형체는 없으나 ‘하늘보다 앞서 있는 존재[先天, 하느님]’를 받듭니다.43)

 

宋代 유학이 漢代 유학의 문제점을 해결하려고 하는 한편, 도교와 불교의 우주본체론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태극과 理氣의 관념을 찾아냈다는 것은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시기의 유학을 가리켜 “우주론 중심의 철학은 본래 … 불교의 심성론과 맞설 수가 없”고, “비록 한대 유학의 설을 훨씬 능가하지만 … 여전히 참으로 유학을 다시 진작시키는 임무를 완성시킬 수는 없었다”라고 하는 것이 또한 일반적인 평가이다.44)

 

특히 중국에 비해서 조선에서는 주자학이 오래도록 정치지배이데올로기로서 심화되는 한편, 명말청초의 실학자들이 양명학을 두고 空疏無用하다고 평가한 것보다 더 형이상화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다산이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부터 출발하여 좀 더 구체화된 신독의 근거를 요청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산의 상제를 종교적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창조주로서 위격을 가진 존재라기보다는 윤리적 당위성을 부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靈明은 人心과 통하여 숨겨 있으되 나타나지 않는 게 없고 微細하되 밝혀지지 않는 게 없어, 거처하는 그 집을 굽어보며 나날이 감시함[照臨此室日監]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진실로 아는 사람이 있다면 아무리 대담한 사람일지라도 戒愼恐懼하지 않을 수 없다.45)

 

다산이 말하는 상제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분명히 위엄을 갖추고 실재하는 존재이다. 이 상제는 인간을 두렵게 하는 존재로서, 인간은 그래서 감히 나쁜 짓을 못 한다. 바꾸어 말하면 진실로 상제의 존재를 안다면 아무리 대담하더라도 감히 나쁜 짓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고,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은 진실로 상제를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다산의 상제는 도학적 至治主義가 內聖外王의 실천이 아니라 공소무용하게 된 시대상황 속에서 요청된 존재로 볼 수 있다. 이 점은 다산의 상제가 특별한 존재 양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上帝를 對하되 오직 마음속에 있을 뿐이라고 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天命을 圖?에서 구하는 것은 허황한 異端 邪術이요, 천명을 本心에서 구하는 것은 聖人이 상제를 밝게 섬기는 학문[昭事之學]이다.46)

 

다산에게 있어서 상제는 우선은 天命으로, 그리고 천명은 목구멍과 혓바닥으로 다시 道心의 警告에 깃든 것으로 설명된다.47) 이것은 《중용》에서 誠이 우주적 원리이면서도 ‘成言’으로서 成己成物의 終始가 된다고 선언한 것을 연상시킨다. 천명인 誠은 우주적 원리이지만, 그것을 이루는 것은 창조주이면서 주재자인 天이 아니라 ‘성언’하고 ‘誠之’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상제는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처럼 실제적인 주재성을 專有하지 않고, 인간의 도심으로 주재성을 이양한다. 이렇게 볼 때 다산의 昭事學的 상제란 인간의 윤리적 행위를 가능케 하는 전거로 요청되는 존재이다.

 

인간의 윤리적 행위가 나의 도심으로 구체화된 존재 양식을 가지고 있는 상제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이라면, 신독은 혼자 있을 때조차도 남의 눈을 의식하여 몸가짐을 바로 한다는 소극적인 단계를 넘어선다. 오히려 유가적 인륜질서 속에서 현존하는 자신의 실존을 탐구해 들어가서 그것을 실현하는 단계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원래 신독이라는 말은 자기만이 혼자 아는 일에 삼가기를 극진히 한다는 것이지 자기만이 혼자 거처하는 곳에서 삼가는 것을 극진하게 한다는 말이 아니다. 언제나 사람이 방에서 고요히 앉아 자신이 한 일을 묵묵히 생각해보면 선악의 良心이 나타나게 된다. 이는 屋漏만 보아도 부끄러운 마음이 난다는 것이지, 옥루가 임한 곳에서 감히 악을 행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사람이 악을 행하는 것은 항상 사람과 접촉된 곳에 있다. 혹시 暗室에서 행한다고 하는 것은 누워있다거나 혼자 짓는 음란한 행위의 허물일 뿐이다. 이른바 신독이 어찌 이런 허물을 삼가는 데 있겠는가? 요즘 사람들은 신독 두 글자의 인식이 원래 분명하지 못하였던 까닭에 암실에서도 혹 옷깃을 여미고 반듯하게 앉아 조심을 하지만, 사람과 접촉하는 데에서는 속임수와 험악한 행위를 하고서 남들이 알지 못한다 생각하며 하늘이 듣지 못한다 생각하니 이른바 신독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48)

 

다산은 인간이 관계 속에서 규정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선악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 이후에 판단될 수 있는 것임을 전제한다. 사실 우리가 경험하는 죄악이란 인륜 질서 속에서 구체화된다. 그러므로 신독의 功效는 나 아닌 타자와 접촉하고 관계 맺는 가운데 자신을 삼가고 성지하는 데서 성취되는 것이다. 이렇게 다산의 昭事上帝는 事天의 대상인 하느님이 아니라, 사천하는 주체인 인간에게로 옮겨간다. 그래서 사천 행위인 제사의 핵심도 齊明盛服, 곧 마음을 가다듬고 의복을 깨끗이 갖춰 입고서 항상 神明이 굽어보듯이 여기는 데 있는 것이다.

 

齊明盛服은 … 마음을 가다듬고 의복을 깨끗이 갖춰 입고서 항상 神明이 굽어보는 듯이 여긴다는 말이다. 朱子 敬齋箴에 ‘衣冠을 바르게 하고 膽視를 높이며 마음을 잠잠히 하여 居하면서 上帝를 마주 대한다’ 하니 이것도 그런 뜻이다. ‘非禮不動’은 곧 몸을 극복하여 仁을 함으로써 몸을 닦을 수 있다는 것이다. 朱子의 ‘밖과 안을 서로 涵養하고 動靜에 어긋남이 없게함은 修身의 요점이다’는 말은 진실한 말씀이다.49)

 

인용문의 ‘若神明照臨’은 《논어》 <八佾>의 ‘祭如在 祭神如神在’를 연상시킨다. 왜냐하면 사천행위로 구체화할 수 있는 제사에서조차도 상제 또는 신명은 다만 ‘와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요청되는 까닭은 제사의 주체인 인간이 ‘그렇게 여겨서 삼가는’ 데 있다. 그러므로 다산의 상제는 은미하여 깨닫기 어려운 자신의 도심에 귀를 기울이고, 間斷없이 盡其性을 통하여 진기성하고, 이것의 생명력을 찾는 成己를 위해 요청된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다.

 

 

4. 결론

 

보유론적 서학을 기획한 예수회 선교사 가운데 한 사람인 마테오 리치는 중국의 인성논변에 대해서 “논쟁이 그치지 않는 하나의 문제”라고 하면서, 그 이유를 “논리학을 결여하고 도덕의 善과 본성의 善, 후천적인 善과 본성적인 善을 구별하지 못하여, 원죄에 부패된 本性과 神의 가호와 총애를 알지 못하였다”라고 분석한 바 있다.50) 이러한 분석은 리치가 人性의 문제가 중국철학사상의 중요 주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공맹 이후의 유학이 “神의 가호와 총애”를 회피한 까닭에 대해서는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는 근거이다. 왜냐하면 리치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공맹 이후의 유학에서 종말론을 다루지 않았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한 인간 구원의 역사를 몰라서가 아니라, ‘인간의 자각심 또는 가치의식’을 더 강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공맹 이후의 유학이 보유론적 서학이나 그것에 영향을 받았다는 실학보다는 서양 근대주의(modernism)와 오히려 더 가깝다고 할 수도 있다.

 

사실 ‘인간이 본래적으로 선한 존재’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와 유학은 대동소이하다. 물론 중세 그리스도교에서는 세속과 육체, 악마를 원수로 여기는 이유를 인간이 原罪를 범한 결과로 해명하였고, 맹자는 선한 본성이 오염된 탓에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를 겪게 된 것으로 해명하였다. 하지만 그리스도교는 ‘선한 하느님이 창조한 피조물로서 인간이 바로 하느님의 模像(Dei imago)’이므로, 그 본성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하느님의 선성을 나누어 가진 선한 존재라고 보았다. 이에 비해 유학에서는 심성론의 관점에서 ‘요청된 天命’에서 그 근거를 찾는다. 하지만 인간의 본질이 善性에 있고, 그것에 선행하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와 유학은 같은 전제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수회 선교사들의 문화적응주의적 선교방침도 이러한 공통지점에서 출발한 것으로서, ‘불교와 도교를 비판하면서 유학을 보충한다’51)는 이 시도는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중세 그리스도교의 절대적이면서 초월적인 하느님 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공맹학의 전통이 脫자연종교적이라는 사실은 물론 주자의 신유학이 서구 신학 체계의 기초가 되는 스콜라 철학과 유사점이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외면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목적은 문화적응주의적 선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이 ‘第一原理(primum principium)’, ‘必然者(ens necessarium)’, ‘純粹現實有(actus purus)’로 이해된다는 점에서 성리학의 太極이나 理 개념과 공통지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점을 부각하는 대신, 그러한 하느님을 몰랐기 때문에 至難한 논쟁의 역사를 이어올 수밖에 없었다고 비판한 것이다.52)

 

중국철학사상에서 인성논변이 오랜 시간을 끌면서 풍부한 담론을 이끌어낸 출발점은 바로 공맹의 義命分立이지만, 그것은 絶地天通의 고사를 낳은 周문화의 승인에서 비롯된 것이다. 절지천통, 곧 땅과 하늘의 통교를 끊는다는 것은 물론 정치적인 면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래서 周문화는 ‘신에 제사 드리는 일’[祀神]과 ‘백성을 다스리는 일’[理民]을 나눔으로써 성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殷나라의 조상신으로 숭배 받았던 上帝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데 있어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최고의 형이상학적 원리로서 사람들의 객관적인 행위규범으로써 등장한 天이었다.53) 따라서 天, 또는 天主를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에 해당하는 용어로 제시한 것 자체가 이미 중국사상의 흐름에 정통하지 못하였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茶山은 性卽理의 체계를 비판하면서 靈明主宰之天은 물론, 昭事上帝를 논함으로써 보유론적 서학의 天 · 上帝 관념에 동의한 듯이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 근거해서 다산이 보유론적 서학 가운데 특히 천주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고, 비록 공식문헌을 통해서는 배교의 뜻을 완곡하게 드러내었으나, 만년에 이르러서는 종부성사를 받고 조선천주교회의 품에서 선종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와는 반대로 다산이 탈주자학적인 태도를 지니기는 하였으되, 천 ? 상제 관념은 물론 그것들에 기초한 인성논변의 일관된 논지가 공맹학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도 있다.

 

이런 논란은 일제 강점기를 살면서 朝鮮學, 곧 國學의 체계를 정립하고자 한 爲堂 鄭寅普(1893~?)가 다산을 가리켜 ‘朝鮮心魂의 後曙期’에 민족 주체의 운동을 집성한 대인물이라고 하면서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54) 그리고 개인의 신앙 문제는 사실상 당사자인 다산 외에는 그 누구도 명확하게 밝힐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남긴 저작들에 나타난 바를 근거로 해서 말한다면 오늘날 다산과 보유론적 서학과의 관련성에 관한 논의는 과장된 바가 없지 않다. 그러므로 이 연구에서도 그러하였듯이 일차적으로는 그의 저작에서 언급된 天 ? 상제 관념을 유학사상사의 전통에서 해석하고, 만일 상이한 점이 나타난다면 그것과 보유론적 서학과의 관련성 여부를 검토하는 것이 논리적인 연구방법일 것이다.

 

본문에서는 본격적인 비교를 하지 못하였지만, 다산의 天 관념은 유학 전통의 인성논변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義命分立의 洙泗學的 전통을 주의 환기시킨 것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가 主宰라는 용어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 양식이 ‘道心에 깃들어 있다’고 하는 점을 그 근거로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서 그가 가령 그리스도교를 신앙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상제는 결코 그리스도교의 천주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주장과 같은 맥락에서, 그의 상제가 존재론적 실재라는 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 오늘날의 공통된 시각이다.55)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다산의 상제는 오히려 서양 근대의 理神論과 가까운 존재로 볼 수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교회일치운동(Ecumenism) 및 해방신학 등과 같은 안팎의 시대적 요청에 적절히 응답하기 위하여 많은 것들을 시도했다. 그리고 이런 시도들을 가능하게 한 여러 요소들 가운데 하나가 西勢東漸 시기 문화적응주의적 선교 경험과 그에 따른 여러 가지 논란들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다시 말하자면 다산이 만났던 보유론적 서학의 기저에 깔려 있던 중세 그리스도교와 오늘날의 그리스도교는 같으면서도 분명히 다르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교 신학과 다산의 천 · 상제 관념에서 겹쳐지는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다산이 보유론적 서학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사실 그보다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유학을 어떻게 이해하였기에 보유론적 서학을 구상하였는지를 연구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일제 강점기를 비롯한 한국근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한국 천주교회가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데는 ‘자생적 신앙의 聖祖들’에 대한 기억과 자부심이 많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탈신학화 · 탈종교화의 추세와 함께 급격히 변화하는 현대사회의 요청에 적절히 응답하려면, 이들 ‘믿음의 성조들’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과거를 회상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와 그 이후, 곧 현실과 미래로 그 초점을 옮겨야 할 것이다. 다산이 예수회 선교사들이 전한 중세 그리스도교를 신앙했다고 해서 중세 그리스도교 신학이 유학보다 우월한 것은 아닐뿐더러, 보유론적 서학이 봉건적 유학을 근대화시킨 계기를 제공한 것으로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를 근거로 앞으로 다산과 보유론적 서학의 天 ? 상제 관념의 연구가 기존의 소모적인 護敎論的 관점이 아닌 철학적 관점에서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조심스레 제언한다.

 

* 이 논문은 2012.11.23.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주최한 다산 정약용 탄신 250주년 기념 심포지엄 “다산 정약용과 서학 및 천주교와의 관계”에서 발표된 발표문을 깁고 보탠 것이다. 부족한 발표에 토론을 맡아주신 한국고전번역원 이동환 원장님과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최기섭 학장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아울러 자유토론 시간에 불초후학의 아둔함을 깨우쳐주신 참석자 여러분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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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는 해당 부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자연적 이성을 통하여, 인간은 하느님의 업적으로부터 확실하게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힘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또 다른 인식의 질서, 곧 신적 계시의 질서가 존재한다. 하느님께서는 완전히 자유로운 결정으로, 당신을 계시하고 내어 주신다. 이것은 온 인류를 위하여 영원으로부터 그리스도 안에 마련하신 당신의 자비로운 계획과 당신의 신비를 드러내심으로써 이루어진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파견하시어 당신의 계획을 충만히 계시하신다”(한국천주교주교회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개정판)》, 2011, 59쪽). 계시종교의 시대를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 구약시대를 古敎 또는 書敎의 시기로 보고, 신약시대를 新敎의 시기로 세분하기도 한다.

 

2) 성균관대학교유학과 교재편찬위원회, 《유학원론》, 1994, 25~26쪽.

 

3) 勞思光은 “人格天, 鬼神, 命, 이 세 개념은 그 자체가 본래 선조들의 습속의 일부여서, 心理情緖의 뜻을 비교적 많이 포함하고 있어 단지 원시습속의 대표로 볼 수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면서, “중국철학의 발전 과정에서 말하면, 공자 이후 중국유학이 일어날 때, 前代의 습속을 비록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였으나 자각적인 방향에 있어서 결코 고대원시사상과 서로 같지는 않다”고 단언한 바 있다(勞思光, 《中國哲學史(古代篇)》, 探求堂, 1991, 51쪽). 이 점에 대해서는 중국철학사가들의 입장이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어서 공맹에게서도 원시종교의 天 관념을 찾아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노사광이 서양 근대의 인간 중심주의에 입각하여 중국철학사를 서술했다는 비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漢代 이후의 도교나 불교는 종교성이 강한 데 비해 유교는 인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고 보는 것이 보유론적 서학을 구상한 서양 선교사들의 인식이었고, 동시에 오늘날에도 보편적으로는 이런 견해가 통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4) 崔基福은 이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그들은 入華하여 직접 중국 문물을 대하고서는 유럽인들의 중국 이해가 겨우 지명을 아는 정도에 지나지 않고 그 역사와 문명에 대해서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 그래서 선교사들은 처음서부터 이질적인 그리스도교를 선교함으로써 반감과 거부를 유발하려 하지 않고, 서양의 발달된 과학지식과 기술을 소개함으로써 호기심 많고 탐구적인 중국인들의 관심과 호감을 얻어 영구적인 거주 허락을 받고 점차 선교의 발판을 마련하려고 하였다. ··· 유교가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며 儒者들이 지도계층임을 간파하고 僧服 대신 儒服으로 갈아입고 儒者로서 처신하였으며 자신들을 ‘西儒’ 또는 ‘西士’라고 일컬었다. 그리고 한문을 열심히 익혀 유자들도 놀랄 정도로 실력을 쌓았으며, 儒家經典을 깊이 연구하고 천주교 사상과 조화를 이루려고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월의식이 강하고 尙古的인 중국인들에게 천주교가 이질적인 서양종교가 아니라 先儒의 사상과 상통하는 종교이며 더 나아가 유교의 부족을 보완시킬 수 있는 사상임을 설득시키려 하였다”(최기복, <儒敎와 西學의 思想的 葛藤과 相和的 理解에 關한 硏究 - 近世의 祭禮問題와 茶山의 宗敎思想에 관련하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과 박사학위논문, 1989, 11~13쪽).

 

5) 포교관할권은 保護權(ius patronatus; patronatum), 또는 宣敎權이라고도 한다. 17세기 아시아에서 포르투갈이 교황청으로부터 선교보호권을 위임받아 중국 南京과 北京, 필리핀 마닐라, 마카오, 인도 고아를 중심으로 아시아 일대 선교를 주도했기 때문에 포르투갈어인 ‘Padroado’가 널리 알려져 있다.

 

6) 한국천주교회 측 연구자들은 茶山의 배교가 정치적 탄압에 기인한 일시적인 반응이었고, 실제로 만년에 이르도록 그리스도교인으로서의 신앙을 지켰다고 주장하면서, 따라서 다산의 天 · 上帝 관념은 그리스도교적으로 해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비해 다산을 조선 유학의 전통에서 보려고 하는 연구자들은 다산이 인간을 윤리적 주체로 규정하고, 그러한 인간의 도덕적 자율성을 논하는 과정에서 天 ? 上帝 관념을 요청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된 논의는 김치완, <茶山 丁若鏞의 昭事上帝 관념 연구 - 天譴意識과 修己의 관점을 중심으로>, 《韓國人物史硏究》 17, 한국인물사연구회, 2012, 249~251쪽을 참고할 것.

 

7) 金忠烈은 天이라고 하는 한 字가 가리키는 바와 함의가 몹시 복잡하기 때문에 확정하기에 어렵지만, 形體之天 · 意志之天 · 自然之天 · 主宰之天 · 義理之天의 용례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자신은 자연지천 · 生機之天 · 의리지천 · 能生之天으로 이를 새롭게 구분해내고 있다. 자연지천이란 형체인 自然界와 현상인 變化界, 개체생명의 장인 生機界로 나눠볼 수 있는 말 그대로의 우주자연이다. 생기지천이란 자연계와 정신계의 사이인 생기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가리켜 말한 것으로, 天道에 해당한다. 의리지천이란 도덕세계 곧 우주정신을 가리켜 말한 것으로, 도가와 유가에서 말하는 도덕관념의 원천이 여기에 해당한다. 마지막으로 능생지천은 통합적 관점에서 말하는 天이다. 이것은 마치 ‘一切’라는 말이 ‘일체가 공유하는 바’가 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김충렬, <論天>, 《人文論集》 19,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1974).

 

8) 天顚也 至高無上 從一大(《說文》).

 

9) 天則就其自然者言之(朱熹, 《朱子語類》).

 

10) 金忠烈, 앞의 책, 3~6쪽. 主宰之天이 민간신앙의 주요한 대상이 되었지만, 철학사상 면에서는 크게 부각되지 못했다.

 

11) 馮禹, 김갑수 譯, 《천인관계론》, 신지서원, 1993, 14~16쪽.

 

12) 浩浩昊天 下駿其德 降喪饑饉 斬伐四國 旻天疾威 弗慮弗圖 舍彼有罪 旣伏其辜 若此無罪 淪胥以鋪(《詩》<小雅> 雨無正)은 幽王의 혼탁한 정치를 天에 원망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원망이야말로 天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요청하는 동시에,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을 심화시킨 계기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공자의 합리적 회의론에 이르면 자연종교의 하느님 관념은 완전히 소멸되고 의리지천의 관념으로 대체된다는 것이 오늘날 일반적인 견해이다.

 

13) 天生德於予(《論語》<述而>).

 

14) 獲罪於天 無所禱也(《論語》<八佾>).

 

15) 노사광, 앞의 책, 93쪽.

 

16) 서론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노사광을 비롯한 현대 중국철학사가들은 보유론적 서학을 구상한 예수회 선교사들과 같은 관점에서 비판받을 수 있다. 곧 예수회 선교사들이나 노사광 등은 각각의 입장은 다르지만 서양의 용어와 방법론을 이용하여 동양의 사상을 이해하고 분석했기 때문에, 동양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한 것으로 비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의 天 · 上帝 관념을 자연종교적 관점에서 이해했다면, 노사광 등은 공맹의 인성론을 서양의 근대주의적 관점에서 이해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각자의 입장에서 상대를 견강부회한 것으로 비판할 수 있다.

 

17) 《中庸》 머릿장의 “天命之謂性”이라고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인성론적 관점에서 보면 맹자의 性善이라고 할 때의 그 性과는 다른 것이다. 모든 개체사물에는 그것을 그것이라고 부를 수 있게끔 하는 어떤 성질이 있는데, 그것을 가리킨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의 국면으로 들어오면 물론 공맹이 말한 ‘自覺主宰’가 되겠지만, 인간을 제외한 존재의 국면에서는 인간이 어쩔 수 없는 ‘客觀制限’이 된다.

 

18) 한형조에 따르면, 주자는 세계 내 존재가 태극인 理와 음양인 氣의 만남으로 보았고, 이들 존재가 구현하는 의미가 사실상 윤리적이라고 파악해서 성즉리의 체계를 구상했다(한형조, <朱熹에서 정약용에로의 철학적 사유의 전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2, 5~6쪽). 주자의 이러한 구상은 서양철학적 관점에서는 전근대적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유학이 공자와 맹자에게서부터 이미 자연종교 상태를 벗어났다고 한다면, 공맹의 전통에서 《중용》의 본체론을 수용하려는 근대적 시도로 평가할 수 있다.

 

19) ?言天地而獨言天命者 臣以爲高明配天之天 是蒼蒼有形之天 維天於穆之天 是靈明主宰之天 是故列序天地山水之廣大 而贊歎功化於主宰之天(《中庸策》).

 

20) 天有五號 各用所宜稱之 尊而君之則曰皇天 元氣廣大則稱昊天 仁覆?下則曰旻天 自上監下則稱上天 據遠視之 蒼蒼然則稱蒼天(<春官宗伯>, 《周禮》) ; 穹蒼蒼天也 春爲蒼天 夏爲昊天 秋爲旻天 冬爲上天(<釋天>, 《爾雅》).

 

21) 鏞案天之主宰爲上帝 其謂之天者 猶國君之稱國 不敢斥言之意也 彼蒼蒼有形之天 在吾人不過爲屋宇?? 其品級不過與土地水火 平爲一等 豈吾人性道之本乎(《孟子要義》).

 

22) 마테오 리치, 송영배 외 옮김, 《천주실의》,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106~108쪽 ; 中士曰 誠若是則吾?其猶有蓬之心也 夫大抵擡頭見天 遂惟知拜天而已 西士曰···遠方之氓 忽至長安道中 驚見皇宮殿宇 巍??嶪 則施禮而拜 曰 吾拜吾君 今所爲奉敬天地 多是拜宮闕之類也···君子如或稱天地 是語法耳 譬若知府縣者 所以屬府縣之名爲已稱 南昌太守 稱爲南昌府 南昌峴大尹 稱爲南昌縣 比此 天地之主或稱謂天地焉 非其以天地爲體也 有原主在也(利瑪竇, 《天主實義》, 香港納?肋靜院印版, 1904).

 

23) 이을호는 다산의 천을 자연천 · 상제천 · 易理天으로 나누었다. 역리천이란 이을호가 만든 용어로, 다산이 《周易四箋》에서 “天一日一周 固亦行健之象”, “天者一氣也 氣升水降不相交濟 是違行也”, “風之行也 不止一處 此巡行省視之象也”라고 할 때의 天을 가리킨다(이을호, <다산의 경학과 역학>, 《李乙浩全書》 1, 예문서원, 2000, 60~62쪽). 그러나 이 역리천은 넓은 범주에서 자연천의 운행법칙이며, 다산은 이 운행법칙과 가치를 따로 떼어서 말하고 있으므로,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다.

 

24) 다산은 “臣對曰 中庸章句曰性卽理也 此云命天理也 朱子之意 理一字兼包性命然天命有賦性之命有得位之命 是永配得位之命也 恐與性理有間”(《詩經講義》)이라고 하여서 주자가 理 한 자로 性命을 포함하여 말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다산에 따르면 인간의 가치영역이 사물의 사실영역에 기대어 있다고 하는 것은 義命을 분리해낸 공맹의 수고를 무위로 돌아가게 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25) M. Eliade, 이은봉 역, 《종교형태론》, 한길사, 1996, 95~98쪽.

 

26) ?先儒言天原有二種 其一以自地以上謂之天 其一以蒼蒼大?謂之天 若論蒼蒼之天 其質雖皆淸明亦具陰陽二氣 故日曰 太陽 月曰 太陰(《中庸講義補》).

 

27) 金能根에 따르면 漢人은 天의 정의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天의 자비와 축복을 찬양한 일도 있었다. 《詩經》의 雅 · 頌 등에는 다시 제왕의 선조를 제사하는 종묘의 제례에나 군신 간의 향연에 있어서 많은 찬사를 서술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귀족과 신하들이 제왕의 권위와 영광을 추켜올리는 데 사용한 의례적인 서술이므로 부자연스럽고 아첨하는 경향을 볼 수 있고, 충정에서 우러나오는 天에 대한 축송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시경》의 풍 · 아 · 송의 天에 대한 대부분의 시는 불평 · 불만 · 애원 · 호소의 대상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저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金能根, 《儒敎의 天思想》, 숭실대학교 출판부, 1988, 220쪽).

 

28) 凡天下無形之物 不能爲主宰 故一家之長 昏愚不慧 則家中萬事不理 一縣之長 昏愚不慧 則縣中萬事不理 況以空蕩蕩之太虛一理 爲天下萬物主宰根本 天地間事 其有濟乎(《孟子要義》).

 

29) 다산의 天 관념이 종교적 요청이냐 윤리적 요청이냐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유초하가 <정약용철학의 上帝 개념에 관한 이견들과 그에 담긴 오해들>(《한국철학논집》 20, 한국철학사연구회, 189~219쪽)에서 심도 깊은 분석과 논의를 하였다. 하지만 이 연구에서는 유학이 서양의 종교개념에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무엇보다도 인간의 실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자신과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보다는 자신과 인류가 “道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道를 이루려고 노력해야 하는” 근거로서 天命을 요청한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그래서 다산의 천 관념을 이러한 유학의 전통에 입각하여 理神論的 관점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관점에서 위와 같이 서술하였다.

 

30) ‘帝’의 어원과 관련해서는 생식과 관련하여 꽃술과 꽃받침 모양에서 따왔다는 설과 하늘에 제사지낼 때 불을 태워 연기를 하늘에 올려 보낼 때 架構한 설치물이라는 설이 있다. 생식과 관련되었다는 설은 殷나라 시대의 神이 은 왕실의 조상신이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 것이고, 제사와 관련되었다는 설은 殷나라가 祭政一致의 시기였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볼 수 있다.

 

31) 노사광, 앞의 책, 41~44쪽 참조. 노사광에 따르면, 《書經》에서는 ‘天’이, 《詩經》에서는 ‘帝’가 주로 사용되었는데 그 이유는 《시경》이 周代의 작품으로서 周나라 때의 통치자가 자신을 王이라고 칭하였기 때문에 최고 주재자 또는 인격천을 가리키는 말로 전왕조 때 최고통치자를 가리키던 帝라는 용어를 쓴 것이라고 한다.

 

32) 노사광, 앞의 책, 44~48쪽 참조.

 

33) 최기복에 따르면, 보유론적 서학은 그리스도교 내에서 (1) 天主 및 上帝의 호칭문제, (2) 조상제사 허용문제, (3) 공자 공경의례 허용문제 등에서 논쟁점을 낳았다. 이 가운데서 예수회원들은 ‘천주’가 가장 적절한 호칭이지만 중국인에게 친숙한 ‘상제’나 ‘天’도 만물의 위격적 주재자를 가리키므로 병칭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했지만, 프란치스코회 회원과 도미니코회 회원들은 ‘天’, ‘太極’ 등과 같은 물질적 개념은 물론, ‘상제’도 태극의 하위 개념이므로 ‘천주’만 쓸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최기복, 앞의 책, 22~27쪽 참조).

 

34) 마테오 리치, 송영배 외 옮김, 앞의 책, 45쪽 ; 西士曰···人誰不仰目觀天 觀天之際 誰不默自嘆曰 斯其中必有主之者哉 夫卽天主 吾西國所稱 ?斯是也···(이마두, 앞의 책, 3쪽).

 

35) 마테오 리치, 송영배 외 옮김, 앞의 책, 99~101쪽; 西士曰···吾國天主卽華言上帝 與道家所塑玄帝玉皇之像不同···吾天主 乃古經書所稱上帝也···雅云 維此文王 小心翼翼 昭事上帝(이마두, 앞의 책, 22쪽).

 

36) 마테오 리치, 송영배 외 옮김, 앞의 책, 30쪽. 해당 쪽의 각주 4에는 ‘천주’라는 용어를 1583년에 루지에리를 도와서 최초로 천주교 주요 기도문을 漢譯한 중국인들이 만들어낸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 밖에도 마테오 리치가 데리고 있던 젊은이가 ‘Deus’라고 하는 말을 ‘天主’로 잘못 알아들었다고 하는 말도 전한다.

 

37) <다시 보는 천주실의>(《가톨릭신문》 2717호, 2010. 10. 17)에서 박종구 신부는 인용문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물론 기사 중의 “천(天)을 제(帝)와 동일시하고, 천을 이(理)와 동일시한 성리학자들의 주석은··· 종교적 특성을 완전하게 배제할 수는 없었다”는 말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지만, 인용문에 나타난 것처럼 마테오 리치조차도 상제를 창조주가 아닌 인륜지덕을 베푸는 존재로 보았다는 점은 이후 이 연구의 기조와 그 인식을 같이 하는 것이다.

 

38) 補云 皇天降監殷民 用治其稠斂之罪 召敵讐不容徐怠 其中雖有?困??之人 罪旣相通而合一 無所告訴也(《尙書古訓》).

 

39) 《周禮》에 따르면 天에는 다섯 가지 이름이 있어 각각 그 쓰임에 따라 다른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높여서 임금이라고 할 때는 皇天, 원기가 광대하고 할 때는 昊天, 사랑으로 덮어 백성을 긍휼히 여긴다 할 때는 旻天, 위로부터 아래를 감시한다 할 때는 上天, 멀리서 볼 때 푸르다할 때는 蒼天이라고 한다(《周禮注疏》). 한편 《爾雅》 <釋天>에서는 봄 하늘을 蒼天, 여름 하늘을 昊天, 가을 하늘을 旻天, 겨울 하늘을 上天이라고 하였는데, 이로 볼 때 하늘의 호칭은 각 계절의 이미지와 관련하여 부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중국 전통의 하늘 관념은 중국 전통신앙을 낳았는데, 그 가운데 하늘의 신으로서, 팔대 자연신 가운데 으뜸을 차지하는 신을 天主라고 한다.

 

40) 春官大祝 實掌是事 安得舍此經文 別立新義(《中庸講義輔》).

 

41) 天官 總宰는 국정을 전반적으로 아우르는 직책이며, 地官 司徒는 교육과 농상, 夏官 司馬는 군대와 병마, 秋官 司寇는 獄訟과 刑罰, 冬官 司空은 治山治水를 각기 맡았다고 한다.

 

42) 夜行山林者 不期懼而自懼 知其有虎豹也 君子處暗室之中 戰戰栗栗 不敢爲惡 知其有上帝臨女也今以命性道敎 悉歸之於一理 則理本無知 亦無威能 何所戒而愼之 何所恐而懼之乎(《中庸自箴》).

 

43) 마테오 리치, 송영배 외 옮김, 앞의 책, 89~107쪽 ; 中士曰 無其理則無其物 是故我周子信理爲物之原也 西士曰···有物則有物之理 無此物之實 卽無此理之實 若以虛理爲物之原 是無異乎佛老之說···智者乃能推見至隱 視此天地高廣之形 而遂知有天主主宰其間 故肅心特志 以尊無形之先天(이마두, 앞의 책, 18~24쪽).

 

44) 노사광, 앞의 책, 1~16쪽.

 

45) 天之靈明 直通人心 無隱不察 無微不燭 照臨此室 日監在玆 人苟知此 雖有大膽者 不能不戒愼恐懼矣(《中庸自箴》).

 

46) 對越上帝之只在方寸 正亦以是 求天命於圖?者 異端荒誕之術也 求天命於本心者 聖人昭事之學也(《中庸自箴》).

 

47) 君子處暗室之中 戰戰栗栗不敢爲惡 知其有上帝臨女也···天之儆告我者 不以雷不以風 密密從自己心上丁寧告戒(《中庸自箴》).

 

48) 原來愼獨云者 謂致愼乎己所獨知之事 非謂致愼乎己所獨處之地也 人每靜坐其室 ?念自己所爲油然良心發見 此所以瞻其屋漏而發其愧悔 非謂屋漏所臨之地 毋敢行惡也 人之行惡 每在於與人相接之處 其或行之於暗室者 唯有偃臥淫褻之咎而已 所謂愼獨 豈唯此咎是愼哉 今人認愼獨二字原不淸楚 故其在暗室 或能整襟危坐 而每到與人相接之處 施之以鄙詐險? 謂人罔覺 謂天罔聞所謂愼獨 豈如是乎(《心經密驗》).

 

49) 箴曰齊明盛服···同謂齊邀整衣 常若神明照臨也 朱子敬齋箴曰正其衣冠 尊其膽視 潛心以居 對越上帝 亦此義也 非禮不動則克己爲仁 身斯修矣 朱子曰外內交養而動靜不違 所以爲修身之要也 誠哉言也(《中庸自箴》).

 

50) 文儒們開始討論一個在中國學校中經常爭討不休的問題···由于他們沒有羅輯和不得區分道德的善與性善 後天獲得的善與由本性産生的善 由于他們更不太了解被原罪腐蝕的本性 上帝的保佑與聖寵 這一問題至今仍懸而未決和未能形成定論(利瑪竇, 羅漁 譯, 《利瑪竇全集》1-下, 臺灣 ; 光啓 · 輔仁聯合出版, 1986, 361쪽 ; 楊宇紅, <孟 · 荀의 인성론과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독교적 인간관 비교>, 경희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8, 1쪽에서 재인용).

 

51) 예컨대 《천주실의》 2편에서는 “西士曰 上達以下學爲基 天下以實有爲貴 以虛無爲賤 若所爲萬物之源 貴莫尙焉 奚可以 虛無之賤 當之乎 況己之所無 不得施之於物以爲有 此理明也···則彼無者 空者 亦安能以其空 無爲萬物有 爲萬物實哉”라고 하여, 도교와 불교의 空이나 虛, 그리고 無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다(마테오 리치, 송영배 외 옮김, 앞의 책, 76~77쪽 ; 이마두, 앞의 책, 14~15쪽).

 

52) 최기복은 “선교사들이 太極이나 理를 사물에 내재하는 이치나 원초적 質料 정도로 밖에 인정하지 않고 태극의 所以然[所從來]으로서의 天主가 있어야 함을 역설한 것은 그들 사상의 바탕인 중세 그리스도교의 絶對的 · 超越的 神觀에서 연유한다고 하겠다”고 하면서, “선교사들이 스콜라 철학적 형이상학의 입장에서 성리학의 태극 이기론을 비교 · 고찰하였더라면 성리학의 窮極者觀뿐만 아니라 전체 사상체계에 대해 보다 깊이 이해하였으리라 생각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崔基福, 앞의 책, 105~110쪽).

 

53) 노사광은 《國語》 <楚語>의 “少?氏之衰 九黎亂德 民神雜? 不可方物 夫人作享 家爲巫史 無有要質···顔頊受之 乃命南正重司天 以屬神 命大正黎司地 以屬民 使復舊常 無相侵瀆 是謂絶地天通”를 인용하여, 周나라 사람들이 비교적 귀신의 숭배를 중시하지 않았다는 점을 주장한 바 있다(노사광, 앞의 책, 46~47쪽).

 

54) 정인보, <唯一한 政法家 丁茶山先生 ?論>, 《陽明學演論(外)》, 三星文化財團, 1975, 213~215쪽.

 

55) 유초하, 앞의 책, 189~219쪽.

 

 

토론문 1 - 이동환(한국고전번역원 원장)

 

다산과 서학에 대한 사색을 중단한 지 꽤 오랜 年月 뒤에 다산의 상제관에 대한 학술 모임의 참여 제의를 사양하지 않는 것은 그 동안 이 방면의 연구가 얼마나 진척되었는지를 알기 위함이 그 동기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따라서 오늘 김치완 교수의 다산의 상제관과 서학의 상제관을 접해서 사실과 논리에 걸쳐 꽤 유익함이 있었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김 교수에게 감사드립니다. 여기에서 궁금하거나 내가 모르는 문제 몇 가지를 질의하고자 합니다.

 

1. 김 교수는 勞思光 교수의 논리에 많이 기대면서도 “중국철학사상사를 정리하면서 부지불식중에 서양근대철학의 ‘인간중심주의’가 중국철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공자에게서부터 발견된다는 점을 강조해왔다”고 노사광 교수와 동양철학사상가들을 비판하고, 이들을 “동양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서양을 염두에 두었다는 점에서 그 한계가 드러난다”라고 했습니다. 아울러 “동양의 전통 사상이 근대 서구와는 달리 유기체적, 생태론적, 자연주의적 요소들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다”고 한 김세정 교수의 논문에 대해서도 노사광 교수에게와 같은 논평을 내어 놓았습니다. 그렇다면 김 교수가 생각하고 있는 동양의 ‘있는 그대로’의 철학 · 사상사像은 어떠한 것인지 그 모델을 구체적인 典據 위에서 제시해 주기 바랍니다.

 

2. 김 교수가 가진 다산의 천 관념이 유초하 교수의 ‘理神論的’이라는 견해에 동조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근본적으로 합리적인 공자의 유학의 입장에서 神的인 존재는 대개 이신론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공자-주자-다산 사이에 각기 편차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편차가 무엇인지를 밝혀 주실 수 있는지요. 내가 생각하기에는 다 같이 이신론적인 바탕 위에 공자에게서는 자연종교적 면모가 아직 남아 있고, 주자의 心學을 제외한 理氣論 중심의 철학은 가장 이신론에 가깝고, 그리고 다산의 상제관은 이신론적인 면모가 상대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한데다 殷 · 周 시대의 자연종교적인 요소, 그리고 마테오 리치의 천주적인 요소가 內涵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곧 거칠게 말하면 다산의 상제관에서 출발하여 도학의 강력한 義理之天의 세례로 이신적인 면모를 강화한 위에 리치의 상제관적인 요소가 攝入되었다고 생각합니다.

 

3. 김 교수는 ‘상제’ · ‘천’을 ‘唯一神’이라 했는데, 그것을 ‘最高神’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요. 다산도 뭇 귀신 중에 으뜸가는 귀신이 바로 ‘상제’라고 한 것을 본 기억이 있는데….

 

4. 본문에서 주자가 “天은 그 스스로 있다는 것(자연)을 취하여 말한 것이다”라는 원문을 보건대 ‘天은 저절로 그러한 것에 나아가 말한 것이다(天則就基自然者言之)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5. 본문에서 “오늘날 우리가 《중용》이 공맹학의 전통적인 인성론을 벗어난 본체론적 관점을 드러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유학에서 두 가지 天이 동시에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天 개념의 역사적인 변화(《중용》의 성서는 대체로 漢代로 봄)로 설명해야 하지 않을까요.

 

6. 직접 여기의 논지와는 관계가 먼 얘기지만 본문에서의 ‘帝’자의 어원에 관해서인데, ‘꽃술’과 ‘꽃받침’의 모양에서 따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 제사지낼 때 불을 태워 연기를 하늘에 올려 보내기 위해 架構한 설치물이란 설이 있어 이것이 아마 더 타당해 보일 듯합니다.

 

7. 본문에서 “다산이 조선후기 國家再造의 중요한 시점에 신문물인 서양학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던 선각자로 조명되던 초기에”에서 ‘國家再造’라든가 ‘선각자’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다산은 그 뒷시대에 와서 선각자로 인식되었지요.

 

8. 본문에서 “왜냐하면 유학의 천 관념이 비인격적, 비종교적 개념인데 비해, 상제 관념은 인격적인 하느님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는데, 이렇게 획일적으로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가령 尹?의 畏天이라 題한 글의 내용에서는 ‘一則曰上帝, 二則曰上帝’라고 하고 있습니다. ‘天’과 ‘上帝’의 개념이 互用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으로 알고 있습니다.

 

9. 본문에서 “이처럼 다산의 상제는 지식 중심의 사회에서 윤리적으로 요청된 존재로 볼 수 있다”라고 했는데, 조선후기를 과연 ‘지식 중심의 사회’로 볼 수 있을지. 조선후기도 여전히 도학세력이 압도적으로 많은 사회고, 도학이란 본래 지식보다는 내면 수양에 중점을 둔 학문임은 상식입니다. 조선후기가 ‘지식중심의 사회’이기 때문에가 아니라 오히려 내면수양을 표방한 도학자들에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假道學 · 僞道學者’가 많기 때문에가 맞을 것 같습니다. 다산 자신의 《중용》 관계 저술에 그렇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10. 본문 186쪽에서 “이것은 《중용》에서 誠…주재성을 이양한다”라는 부분을 좀 더 분명하게 설명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189쪽에서 “왜냐하면 마테오 리치가…더 강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라는 부분은 좀 더 설명을 요합니다.

 

11. 189쪽에서 그리스도교와 유학은 ‘인간이 본래적으로 선한존재’라는 전제에서 대동소이하다 했는데, 나로서 금시초문이라 설명을 요합니다. 그리스도교의 ‘原罪’는 어떻게 설명되는지요.

 

12. 본문 190쪽에서 “중국철학사상에서…성립이라고 할 수 있다”라는 부분도 설명을 요합니다. ‘義命分立’ · ‘絶地天通’의 정확한 개념은 무엇인지요?

 

13. 끝으로 서술전략이 좀 노략한 곳이 여러 곳 보이는데, 가령 183쪽에서 “주재하는 상제의 요청, 愼獨과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에 이어지는 내용은 앞 문장과 별로 상관없는 듯이 서술되다가 185쪽에 와서는 “좀 더 구체화된 신독의 근거를 요청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했는데, 이 부분에 대해 분명한 설명을 요합니다.

 

 

토론문 2 - 최기섭(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학장)

 

다산과 서학의 상제관은 오래된 논의이다. 기존 연구도 상당할뿐더러 그렇다고 서로 다른 입장의 사람들이 서로 고함치며 싸우는 상황이 아님에도 이렇게 논의가 계속되는 것은 아마 그간의 연구 결과들을 바탕으로 새롭게 드러난 다산 선생님의 사상과 면모를 만나기 위함일 것이다.

 

이에 부응하듯 김치완 교수님의 다산의 상제관과 서학의 상제관이라는 논문은 기존의 연구방식과는 다른 방법으로 깔끔하게 정리된 논문이다. 김 교수의 주장은 비교적 명확하다. 먼저 다산의 상제관과 서학의 상제관을 비교하기 전에, 중국철학사의 흐름 안에서 정리된 상제 · 천의 개념을 바탕으로 제시한다. 즉 “중국 고대의 자연신앙이나 습속으로서의 천 ? 상제의 개념은 주재적이고 인격적인 개념이었으나, 그리스도교처럼 완전한 개념이 아니며 제한된 상황에서 발전된 민간신앙이었다. 그러다가 점차 영향력을 잃어가고 급기야 공맹에 이르러 자연신앙적인 요소는 완전히 소멸되었다”라는 것이다. 또한 유학은 공자 때에 인간에 대한 주체적인 자각을 강조하며 天道보다는 人道를 중심으로 발전된 학문이며, 가치와 사실의 영역이 구분되어 각각 필요한 天을 상정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전제로 김 교수는 다산의 저작과 서학의 《천주실의》에서 몇 구절씩을 인용하며 같은 형식으로 그 성격을 분석해 나갔다. 늘 위의 전제를 대입하며 다산의 상제관에 대해 내리게 되는 결론은 ‘요청된 天 · 上帝’, ‘理神論的 천 · 상제’, ‘義理之天’이었다.

 

이제 지면상 더 자세하게 소개하는 것보다, 배우는 마음으로 교수님께 몇 가지 질문을 제시하면서 함께 논의할 주제로 나누고자 한다.

 

1-1. 요청된 천 · 상제 : 김 교수님은 서론에서부터 유학의 天을 ‘요청된 天’으로 전제하고 있다. 평자가 알기에 ‘요청된 天 또는 神’이라는 개념은 서양철학의 개념이다. 그리고 그 개념을 사용하기까지 데카르트나 칸트는 많은 사유과정을 거쳐 제출한 개념이다. 각각에 따른 상황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수님께서 다산의 천이나 상제를 요청된 것으로 이해할 때, 그것은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인지? 또한 다산의 천이나 상제가 요청된 것이라면 다산이 요청할 수밖에 없는 그의 사유과정이나 상황을 설명해 주실 수 있는지? 동양철학에서는 천을 분류하거나 설명하면서 ‘요청된 천’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교수님께서 본문에서 노사광 선생이나 김세정 선생 그리고 중국에서 선교했던 서학 학자들까지 비판했던 것처럼 교수님도 서양의 개념으로 동양사상을 해석하고 이해하여 다산을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마지막으로 교수님이 서론에서 밝히신 것처럼, [유학원론]의 “儒學은 天道에 입각하여 人道를 지키는 데 그 특징이 있다”라는 명제에서 어떻게 ‘요청된 천’의 개념을 이끌어낼 수 있었는지?

 

1-2. 理神論的 上帝 : 이것 또한 서양철학의 개념으로, 창조적인 주재자는 인정하되, 세상이나 인간에게 간섭하지 않고 자연적인 理法에 따라 운행하게 한다는 이론이다. 교수님은 다산의 상제관이 이신론에 가깝다고 하였는데, 다산의 상제관에는 창조성이 없다고 교수님은 주장하셨다. 모순적이지 않은가? 주자의 태극이나 理는 이신론적인 것은 아닌가?

 

1-3. 義理之天 : 교수님 말씀대로 여러 개념이 혼잡한 개념이다. 많은 이들이 주자의 天으로 오해할 것 같은데, 주자의 천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2. 노사광 선생의 관점과 다산 : 교수님은 일관되게 노사광 선생의 견해를 논문 내용의 논거로 삼았다. 중국 고대사상, 특히 인격천, 귀신, 천명에 대한 해석과 공자사상에 대한 해석으로 이끌어 낸 ‘義命分立’(應然과 必然 ; 自覺主宰와 客觀際限 ; 價値領域과 事實領域)의 개념이 대표적인 것이다. 중국철학사 기술의 방법론과 관점의 논란은 차치하고라도, 이 부분에 대해 다른 입장을 가진 중국철학자가 적지 않다. 특히 공맹사상에 아직도 고대 종교사상이 잔존하고 있다고 보는 학자들도 여럿이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노사광 선생의 관점으로 다산의 상제관을 해석하고 재단한다는 사실이다. 가능할까? “중국 고대의 상제관은 창조론도 구원론도 종말론도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이 될 수 없다.” BC 10세기의 상황을 기원 후 10세기의 이론과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 후 종교성이 약화되었는데, 따라서 “다산의 ‘靈明主宰의 天’도 自覺主宰를 주위환기하려는 의도적인 표현으로 볼 수밖에 없다”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미 종교성이 약화된 義理之天이 되었기 때문에 다산의 천도 그에 따라 상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여쭙고 싶은 것은, 교수님은 다산 선생이 상제나 천을 해석하는 데 있어 서학의 영향을 받기는 받으셨다고 생각하시는지? 받았다면 그분의 저작에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3. 교수님의 표현대로 많은 문제들이 당사자인 다산 이외에는 그 누구도 명확하게 밝힐 수 없는 일이어서, 그의 저작에서 언급된 천 · 상제의 관념을 깊이 고구해야 하는데, 같은 구절을 두고 그 해석이 상반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요?

 

4. 교수님이 가톨릭도 호교론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철학적 관점에서 다산을 연구해야 한다고 제안하신 것에는 깊이 동감합니다. 좀 더 개방적이고 창의적이며 발전적인 방향에서 다산을 연구하고 나누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교회사 연구 제39집, 2012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 본문 중에 ? 표시가 된 곳은 현 편집기에서 지원하지 않는 한자 등이 있는 자리입니다. 정확한 내용은 첨부 파일에서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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