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3일 (월)
(백)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세계] 유럽의 도시와 교회사 이야기: 아비뇽(Avignon), 콘스탄츠(Konstanz)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0-29 ㅣ No.1309

[유럽의 도시와 교회사 이야기] 걸어서 세계 교회사 속으로

 

 

8. 아비뇽(Avignon), 콘스탄츠(Konstanz)

 

이번엔 프랑스로 갔다가 다시 독일로 가보자. 지금 우리는 두 명의 교황님을 모시고 있는데, 예전에는 세 명의 교황님을 모신 적이 있다. 그 시대로 가보자. 배경은 신성로마제국의 슈타우펜 왕가가 비극적 종말을 고하고, 교황 보니파시우스 9세(재위 1294-1303년)와 함께 교황직의 보편적이고 중세적인 우위성은 끝나면서, 프랑스가 유럽의 가장 강한 세력으로 대두되던 시기이다.

 

이때부터 교황직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이 눈에 띄게 강해졌다. 프랑스 왕권의 압력으로 프랑스인들이 추기경단에 많이 받아들여졌고, 따라서 다음 교황들도 프랑스인이 되었다. 보르도 출신의 대주교였고 프랑스 국왕의 친구였던 클레멘스 5세 교황은(1305-1314년) 리옹에서 교황 착좌식을 거행하고, 필립 왕의 압력으로 1309년 프랑스 남부 해안 가까운 아비뇽에 자신의 거처를 정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여섯 명의 교황(요한 22세, 니콜라오 5세, 베네딕토 12세, 클레멘스 6세, 인노첸시오 6세, 우르바노 5세) 모두 프랑스인이었으며 그들 모두 아비뇽에 머물렀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빌론에 끌려갔던 일을 빗대어 ‘교회의 유배’라고 불렀다. 60년 동안의 아비뇽 유배는 교황권의 명성에 한없는 손해를 입혔고, 서구 대이교(大離敎)와 공의회 우위설은 그 직접적인 결과가 되었다.

 

서구 대이교(大離敎)는 교황 그레고리오 11세(1370-1378년)의 선종 후 일어났다. 이미 교황 우르바노 5세에게 로마 귀환을 청원했던 스웨덴의 성녀 비르지타와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의 예언적 위협으로 그레고리오 11세는 프랑스 국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로마 귀환을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로마에 입성한 지 두 달여 만에 서거하였다. 이에 콘클라베(Conclave, 교황선출)가 오랜만에 영원한 도시 로마에서 이루어졌는데, 16명의 추기경 중 11명이 프랑스인이었으므로, 다시 프랑스인 교황을 선출할 것을 로마인들이 두려워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로마인들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추기경들을 무력으로 협박했으며, 추기경들은 콘클라베에서 무사히 빠져나오려면 그들의 요구에 따라야만 했다. 결국 추기경들은 1378년 4월 8일, 로마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탈리아인 대주교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새 교황의 이름은 우르바노 6세였다.

 

그러나 11명의 프랑스 추기경들과 한 명의 스페인 추기경이 그 교황선출은 무효라고 선언하며, 폰디(Fondi)에서 프랑스인을 새 교황으로 선출(클레멘스 7세)하였다. 이로써 가톨릭교회는 두 명의 교황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서구 대이교(大離敎)는 무려 4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로마계는 우르바누스 6세(1378-1389), 보니파시우스 9세(1389-1404), 인노첸시오 7세(1404-1406), 그레고리오 12세(1406-1415)였고, 아비뇽계는 클레멘스 7세, 베네딕토 13세였다. 교황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계 전체가 두 파로 갈라져 서로 싸웠으며, 이 분열은 모든 국가와 교구 그리고 본당까지 침투하였다.

 

1394년, 파리대학은 이러한 이교를 극복하기 위한 세 가지 길을 제안하는데, 그것은 양보 방안 (via cessionis, 자발적인 사임), 합의 방안(via compromissi, 중재 재판에 교황들의 복종), 공의회 방안 (via concilii, 공의회를 통한 결정)이었다. 결국 13명의 추기경들이 자신들 상관의 뜻을 거슬러 1409년 3월 25일에 피사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이 피사 공의회는 두 교황에 대한 소송을 진행하고 그들을 교회 일치의 적으로, 다시 말해 이단자로 선언하고 폐위를 선언하였다. 이후 공회의는 새 교황을 선출, 그는 알렉산데르 5세라는 이름을 택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듬해에 사망하고 평판이 나쁜 코사 추기경이 그의 후계자가 되는데, 그는 자신을 요한 23세라고 명명하였다. 그러나 로마계 교황 그레고리오 12세도, 아비뇽계 교황 베네딕토 13세도 내쫓기려 하지 않았다. 불행히도 가톨릭교회 내에 세 명의 교황이 있게 되었다. 그때와 상황은 다르지만, 현재 프란치스코 교황도 베네딕토 16세 교황처럼 사임을 하게 된다면, 세 명의 교황이 있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 신성로마제국 지그문트(1410-1437)왕이 셋으로 분열된 그리스도교계를 일치시키고자 계획한 것은 또 다른 새로운 공의회였으며, 공의회 장소는 바로 보덴 호(Bodensee) 근처의 콘스탄츠였다. 결국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년)는 세 명의 교황을 폐위시키고, 마침내 마르티노 5세 교황을 선출하였다.

 

어찌되었든 서구 대이교의 배경이 되는 아비뇽과 콘스탄츠를 찾아가 보자. 사실 아비뇽은 당시 프랑스 영토이긴 했지만 교황의 영지가 되었다. 클레멘스 6세 교황이 1348년, 프로방스의 잔 여왕으로부터 매입했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 때까지 교황령으로 존속한 것이다. 아비뇽 교황들 이후로는 로마에서 교황 특사가 파견되었다고 한다. 아비뇽 교황청은 1822-1906년까지 병영으로 이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1947년부터 이곳은 전시회장으로 이용되었고, 현재는 박물관이다. 필자도 가본 적이 있지만 바티칸과 베드로 성당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오래되고 투박했던 기억이 난다.

 

교황청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끊어진 채로 있는 론 강변의 생 베네제 다리도 볼만하다. 1177년 베네제(Benezet)라는 12살 목동이 론 강에 다리를 지으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지어진 다리이다. 원래는 목조 다리였는데 석조 다리로 다시 지어졌으며, 17세기에 론 강이 범람하면서 22개의 아치 중, 4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무너졌다. 지금까지도 보수하지 않고 4개의 아치만 남겨져 있다.

 

그리고, 콘스탄츠. 유럽에서 가장 큰 호수인 보덴 호 왼쪽에 위치한 독일의 도시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아버지인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 도시는 로마시대의 요새였다가 게르만 족인 알레만니 족에게 점령당했고, 나중에는 프랑크 족의 영토가 되었다가 신성로마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한때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은 적도 있다. 다른 유럽의 도시들처럼 콘스탄츠에 가면, 먼저 대성당(Münster)을 찾아가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성당은 600년에 지어졌는데, 원래의 성당이 지진 혹은 단순 붕괴로 무너지면서 1052~1089년에 다시 세워졌고, 여러 번의 증·개축을 통해 다양한 시대의 양식이 뒤섞여 있다. 이곳은 공의회가 개최되고, 얀 후스의 유죄판결이 내려진 곳이기도 한다. 후스가 화형되기 전 감금된 곳은 도미니코 수도원이었으나 이후 호텔로 바뀌었고(Steigenberger Inselhotel), 후스가 갇혀있던 방과 후스가 그려져있는 벽화를 볼 수 있다. 후스 박물관도 구시가지 안에 있다. 그가 화형 당한 곳도 작은 길 옆에 큰 돌(Hussenstein)과 화단으로 꾸며져 있다고 한다.

 

또한 콘스탄츠 공의회의 콘클라베가 있었던 공의회장(Konzilsgebäude)도 둘러봐야 할 것이다. ‘Habemus Papam’이라는 라틴어 문장이 있다. 새로운 교황이 선출된 직후 선포되는 라틴어 선언문인데, 한국어로 번역하면, ‘새 교황이 선출되었습니다!’라는 뜻이다. 사실 이 말은 콘스탄츠 공의회의 콘클라베에서 유래되었다. 마르티노 5세 교황을 선출하면서 콘스탄츠 공의회는 ‘이제 우리는 세 명의 교황이 아니라 한 명의 교황을 모시게 되었습니다!’라고 선언한 것이다. 그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보덴 호는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이렇게 세 국가가 공유하고 있는 호수로, 주위의 알프스 산들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경관으로 이름이 나 있다. 그래서 콘스탄츠를 가서 마이나우(Mainau)와 오래된 베네딕토 수도원으로 유명한 라이헤나우 섬(Reichenau)을 가보지 않는다면 후회하거나 혹은 남들로부터 ‘바보’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외침, 2020년 8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황치헌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세계교회사, 라틴어 교수)]



1,456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