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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 자비의 특별희년이 왜 선포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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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1-23 ㅣ No.342

[경향 돋보기 - 자비의 특별희년] 자비의 특별희년이 왜 선포되었는가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교황직 수행이 3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그분이 보여준 사목적 전망과 행동은 교회와 세상에 많은 영감을 주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희년 선포와 사목적 전망

사도좌에 오른 지 2년이 조금 지난 시점인 2015년 4월 11일에 칙서 「자비의 얼굴」을 발표하면서 선포하신 ‘자비의 특별희년’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또 하나의 대담한 사목적 전망의 제시입니다.

성경의 전통(레위 25,8-22)에 근거한 희년 선포를 통해 교회는 자유와 해방과 구원의 은총을 되새깁니다. 전통적으로 가톨릭교회는 25년 또는 50년을 주기로 희년을 선포합니다. 물론 특별한 계기가 있을 때 특정주기와 관계없이 희년이 선포되기도 합니다. 교회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때 2000년을 대희년으로 선포하고 경축했습니다. 대희년을 경축한 지 15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이 ‘자비의 특별희년’을 선포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요?

교황님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폐막 50주년이 되는 2015년 12월 8일을 ‘자비의 특별희년’의 개막일로 정함으로써 이 특별희년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다시금 계승하려는 목적에서 제정되었음을 시사합니다. “교회는 이 공의회를 생생하게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로써 교회는 역사 안에서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하였습니다”(「자비의 얼굴」, 4항).

하지만 ‘자비의 특별희년’의 선포 배경과 원인에는 이러한 교회사의 맥락뿐만 아니라 현시대의 교회와 신앙인들의 모습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성찰과 반성이 담겨있습니다. 교황님은 이 희년의 선포를 통해 교회와 신앙인들이 새 복음화를 위한 새로운 노력을 기울이며 살아가게 하는 동기부여와 전환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안온한 도성처럼 감싸주던 성벽은 무너져 버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복음을 선포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복음화의 새로운 길이 열린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임무는 열정과 확신으로 신앙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생생하게 보여주어야 할 책임을 깨달았습니다”(4항).


칙서의 구조와 핵심 주제

‘자비의 특별희년’의 선포 칙서인 「자비의 얼굴」 안에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의도와 사목적 전망이 담겨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의 얼굴이십니다.”라는 선언으로 시작되는 칙서는 총 25개의 항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 칙서의 내용이 어떤 소주제나 특정 개념의 항목으로 분류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순서에 따라 특별희년 선포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1-5항), 하느님 자비에 대한 성서적 설명(6-9항), 교회 생활의 토대로서의 자비와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으로서의 자비에 대한 설명(10-25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칙서에 따르면,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 희년 선포의 정신과 목적입니다(13-14항). 조금 단순하게 말하면,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이 시대의 교회와 신앙인들 또한 자비로운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와 신앙인들의 자비로운 모습과 태도가 새 복음화를 위한 새로운 방식이라는 의미입니다. 자비가 교회와 신앙인들의 삶의 방식 그 자체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커다란 희망과 심각한 모순으로 가득 찬 이 시대에 교회의 첫째 직무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며 모든 이를 하느님 자비의 위대한 신비로 이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먼저 교회는 자비의 참된 증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계시의 핵심인 그 자비를 찬양하고 실천하라는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25항).

교회가 자비를 경축하고 실천하는 방식은 먼저 용서의 덕을 깨우치고자 회개의 순례를 행하는 일입니다(14항). 교회의 자비 실천은 전통적으로 자비의 육체적 활동과 자비의 영적 활동으로 표현됩니다(15항). 교회의 자비 실천은 성사의 거행을 통해, 특히 고해성사의 거행을 통해 수행되어야 합니다(17-18항). 또한 교회의 자비 실천은 대사를 통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22항).

한편으로 칙서는 자비와 용서에 대한 강조가 자칫 정의를 위한 교회의 노력과 상반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오해를 방지하고자 자비와 정의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설명도 담고 있습니다(20-21항).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하느님은 자비의 하느님

‘사랑’, ‘진리’, ‘정의’ 등의 개념은 신학의 역사 속에서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교회라는 주제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신학의 역사에서 ‘자비’라는 개념이 두드러지게 부각되지는 않았습니다. 정직하게 말하면, ‘사랑의 하느님’, ‘정의의 하느님’, ‘진리의 하느님’이라는 표현은 익숙하지만, ‘자비의 하느님’이라는 표현은 자주 고백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자비의 특별희년의 선포는 하느님의 자비와 자비의 교회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요청합니다.

신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신론과 인간론과 교회론은 서로 밀접한 연관성을 갖습니다. 하느님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따라 하느님 모습(Imago Dei)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이해와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의 모습에 대한 이해가 좌우됩니다. 신관의 차이는 인간관의 차이와 교회관의 차이를 낳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눈에 비친 이 시대의 교회는 세상의 고통과 비참에 대해 조금 무관심한 모습으로 서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교회가 윤리적 문제와 교의적 문제에 대한 냉혹한 심판관의 모습으로 서있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희년 선포에는 어머니로서의 교회와 따뜻한 교회에 대한 갈망이 담겨있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해석은 이 시대 교회의 모습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의 부재와 인간의 잔혹함을 드러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지적 분쟁들은 있었지만 세상은 평화의 방향으로 움직여가는 것 같은 낙관주의가 팽배했습니다. 하지만 9·11 테러와 ‘이슬람 국가(IS)’가 보여주는 잔인한 테러 등은 인간의 잔인성에 대한 성찰을 거듭 불러일으켰습니다. 특히 신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하느님을 믿기에 그런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신관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요청합니다.

신학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 개념이 오랫동안 망각된 이유는 형이상학적(존재론적) 신관과 현대 무신론의 도전 때문입니다. 형이상학적 신관은 하느님을 초월적 존재, 존재 그 자체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형이상학적 속성(무한성, 영원성, 무소부재, 전지전능)이 강조됩니다. 또한 하느님의 완전성에 대한 강조는 하느님을 고통 받지 않는 분으로, 피조물들의 고통에도 무감각한 분으로 묘사하는 경향을 드러냅니다.

한편으로 현대 무신론의 끈질긴 도전은 그리스도교의 신학이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성찰할 여유를 갖지 못하게 했습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에 대응하려고 하느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데만 매달렸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존재에만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에 그분의 속성에 대해 성찰할 여유가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자비의 강조는 성경의 하느님에 대한 복원입니다. 자비의 하느님에 대한 강조는 철학자들의 신이 아닌 성경의 하느님, 역사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성찰입니다. 인격신으로서의 하느님이 강조될 때 인격적 특성인 자비의 개념이 부각될 수 있습니다.

“자비라는 말은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를 보여줍니다”(2항). 결국,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자비의 특별희년 선포를 통해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 정의의 하느님, 진리의 하느님이시지만, 무엇보다 자비의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자비의 하느님을 믿고 고백하는 교회는 자비의 교회여야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취임 초부터 자비를 강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 우리의 삶을 위한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의 진리입니다”(2013년 4월 17일 로마 주교좌 착좌 미사 강론).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와 자비의 교회, 이 두 개념은 교황님의 핵심 교회관입니다.

교황님에게 중요한 복음적 태도는 겸손과 온유입니다. 가난과 연결되는 겸손의 덕, 자비와 결부된 온유의 덕이 강조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설명에 따르면, 예수님과 성모님과 요셉 성인, 이 세 분 모두 겸손과 온유의 덕을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다정함이시고 사랑, 온유이신데 모든 의미의 이데올로기는 항상 딱딱합니다”(「나의 문은 항상 열려있습니다」, 129면).

“교회의 복음화 활동에는 마리아 ‘방식’이 있습니다. 마리아를 바라볼 때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온유한 사랑의 혁명이 지닌 힘을 믿게 됩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겸손과 온유가 나약한 이들의 덕이 아니라 강한 이들의 덕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복음의 기쁨」, 288항). “여기에서 저는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돌보고 보호하는 데에는 선함이 필요합니다. 여기에는 어떤 부드러움이 요구됩니다. 복음에서 요셉 성인은 강인하고 용감한 사람, 노동자로 나오지만, 우리는 그의 마음에서 커다란 부드러움을 봅니다. 이는 약자의 덕이 아니라 강한 영의 표징이며, 관심과 연민, 타인에 대한 참다운 개방, 사랑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선함과 부드러움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2013년 3월 19일, 교황 즉위 미사 강론)

자비의 교회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강조는 현실 교회에 대한 성찰과 비판이 담겨있습니다. “자비는 교회생활의 토대입니다. 교회의 모든 사목활동은 온유함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그 온유함을 신자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자비의 얼굴」, 10항).

“교회는 복음의 뛰는 심장인 하느님의 자비를 알려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교회를 통하여 자비가 모든 이의 마음과 정신에 가 닿아야 합니다”(12항). 그런데 “어쩌면 우리는 오랫동안 자비의 길을 가리키고 그 길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잊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10항). 또한 “슬프게도 우리의 문화에서 용서에 대한 경험이 점점 드물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때로는 용서라는 말조차도 사라져가는 것 같습니다”(10항).


자비의 하느님, 자비의 교회, 자비의 그리스도인

자비의 특별희년 선포를 통해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오늘의 교회 안에 자비의 개념을 다시 회복하는 가운데 새롭게 조망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교황님이 자비의 하느님, 자비의 교회, 자비의 그리스도인을 강조하는 이유는 아마도 자비가(그 태도와 방식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계승하고, 새 복음화를 위한 새로운 방식의 핵심이며, 선교와 사목의 본질적 태도라고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회가 스스로 자비를 실천하고 증언하는 것이 교회와 그 메시지의 신뢰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칩니다. 교회는 말과 행동으로 자비를 전하여 사람들의 마음속에 파고들어가 그들이 다시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나서게 하여야 합니다”(12항).

교황님은 자비의 특별희년 선포를 통해 이 시대의 교회와 신앙인들이 올바른 신관과 교회관과 신앙관을 갖기를 희망하시는 것 같습니다. 곧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하느님은 무엇보다 자비의 하느님이시고, 자비의 하느님을 고백하는 교회와 신앙인들은 그 자신이 자비의 태도와 모습으로 서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와 신앙인들이 증언하는 그 자비의 태도와 모습만이 새 복음화를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 정희완 요한 - 안동교구 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버클리 예수회 신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6년 1월호, 정희완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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