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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유럽의 도시와 교회사 이야기: 코르도바(Cordo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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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0-29 ㅣ No.1308

[유럽의 도시와 교회사 이야기] 걸어서 세계 교회사 속으로

 

 

7. 코르도바(Cordoba)

 

지난달에 이어서 이번 달에도 스페인으로 떠나보자. 바로 코르도바이다. 아르헨티나에도 같은 이름의 도시가 있는데, 스페인의 코르도바는 안달루시아 지방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세비아와 그라나다 사이에 있는 도시이다.

 

기원전 206년 로마인들의 점령으로 인해 도시가 세워졌고, 이후 로마의 귀족 가문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옛날 히스파니아’(Hispania Ulterior)의 수도가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배티카’(Baetica) 지방의 수도가 되었다가, 수도가 세비아로 옮겨지기 전인 3세기까지 스페인 지방의 패권을 잡았던 도시이기도 하다. 그 영향으로 코르도바에는 일찍이 복음화가 이루어졌는데, 코로도바 교구의 역사는 초대주교 오시우스(257-357) 때부터 시작된다. 니케아 공의회(325년)의 모든 교부들 중에 유독 탁월했던 사람이 바로 코르도바의 주교 오시우스였다.

 

그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신임을 받고 있던 조언자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교황 실베스테르가 앉아 있던 로마좌를 대표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 역시 304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박해시기 때 고문을 받았는데, 동방교회에서는 이미 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지만(8월 27일) 가톨릭교회에서는 그렇지 않고 있다. 로마제국 박해 시기의 코르도바 출신 순교 성인들은 아치스클로, 조일로, 파우스토, 예나로, 마르샬 등이 있다. 하지만 교구의 광대한 영토를 통한 복음 전파 활동은 5세기 초반부터 이루어진 게르만 민족들(반달족, 수에비족, 서고트족)의 침입으로 중단되었다. 툴르즈를 수도로 한 서고트 왕국은 프랑크족에게 멸망되었고(507년), 톨레도에 정착한 서고트 왕국은 587년경 국왕 레카레드의 개종으로 아리우스 이단에서 정통 그리스도교로 돌아왔으나, 711년에 아랍 민족의 침입으로 결국 붕괴되었다.

 

결국 이슬람인들은 코르도바를 알 안달루스의 수도로 만들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이슬람인들과의 사이에서 함께 공존할 수는 있었지만 차별을 많이 받았다고 전해진다. 압달 라만 2세 통치기간 동안 이슬람인과 그리스도교인 사이에 처음으로 종교적 이유(이슬람과 그의 예언자들을 공개적으로 모욕하고 선동적으로 그리스도교를 고백한다는 이유)로 박해가 일어났다. 825년, 아돌포와 후안의 순교를 시작으로 851년부터 859년 사이에 49명의 순교자가 생겼다. 성녀 레오크리시아(루크레치아)는 원래 스페인 사람이 아닌 부유한 어느 무어인의 딸이었는데, 부모 몰래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집에서 도망쳐 나왔다.

 

당시의 법으로는 이런 개종자는 즉시 사형에 처해졌기 때문에, 그녀는 코르도바의 주교 성 에울로기우스의 도움으로 여러 신자 집을 전전하면서 몸을 숨기던 중 성 에울로기우스와 나머지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891년, 코르도바 근처 폴레이에서 약 천 명의 순교자들이 있었으며, 902년 둘체, 925년 펠라지오, 937년 아르젠테아와 불푸라에도 순교자가 생겼다. 10세기 때, 코르도바는 인구 100만 명이 넘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의 하나가 되었고, 그리스도인과 유다인, 그리고 이슬람인들이 평화롭게 함께 살았던 적도 있었다.

 

이렇게 711년에서 1492년까지 약 7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도는 어느 누구의 국경선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경계를 마주하고는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인종 간에 서로 섞이면서 문화와 피와 정렬, 지혜와 언어를 교환했다. 그러나 무어족 왕국이 소왕국들로 분열되어 흔들리면서 그리스도교인들은 국토회복운동(reconquista)을 목표로 다시 한 번 남쪽을 향해 진격해 톨레도를 탈환했고, 카스티야 왕 페르디난드 3세는 1236년 코르도바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이러한 역사를 알고 코르도바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코르도바의 상징인 메스키타를 찾아가야 할 것이다. 이슬람교의 예배 및 집회장소인 일종의 모스크로서 메스키타가 있던 곳에는 이미 로마제국 시대에 종교행사를 위한 로마 성전이 있었고, 그 후에는 서고트족의 대성당이 있었다. 8세기 중반에 도시의 모든 교회들이 파괴되었고 단지 대성당만이 남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이슬람인과 그리스도인 구역으로 나뉘어졌다. 하지만 이슬람인들에게 장소로써 충분하지 않게 되자, 압달 라만 1세(재위 756-788)왕족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대성당을 포기하고 도시 밖에 성당을 짓도록 많은 돈을 지불하였다. 따라서 784년 대성당 건물 전체를 부수고 새로운 모스크를 짓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236년, 페르디난트 3세가 코르도바를 되찾았을 때, 메스키타는 성당으로 축성되었고, 첨탑은 십자가로 장식되었다. 이후 소성당들이 지어졌는데 1523년, 돈 알론소 만리케 주교가 코르도바 시의회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합스부르크 황제 카알 5세의 승인을 얻어 결정적인 보수공사를 하게 되었다. 교회 건물을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모스크 가운데의 기둥들은 모두 제거되었고, 첨탑은 종탑으로 대체되었다. 곧 이슬람사원 한가운데에 성당이 들어서 있는 모습이 되었다. 1526년, 카알 5세는 그 건물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저는 그것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몰랐습니다. 제가 그것을 알았더라면 오래된 건물에 손을 대지 못하게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능한 것을 하였는데, 어디에나 이미 있는 것을 지었고, 그러기 위해서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것을 파괴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메스키타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건축물이 되었다. 2006년, 후안 호세 아센조 코르도바 주교는 대성당을 종교 간 교회로 개조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그는 모스크가 서고트족 대성당의 기초 위에 지어졌다는 고고학적 증거를 그 근거로 내세웠다. 그러므로 현재의 대성당을 부분적으로나마 모스크로 재변형시키는 것도 거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메스키타 안에 들어가면 서고트족에서 유래한 특유의 양식인 적백 문양의 말발굽 형 아치로 된 850개의 기둥들이 참으로 독특한 매력을 주고 있다. 그밖에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코르도바의 구시가에는, 14세기 알폰소 11세가 개조한 무데하르 양식의 성(城), 알카사르, 미로 같은 좁은 골목길로 이루어진 하얀 색의 유다인 거리, 안달루시아를 대표하는 주거형태인 파티오도 볼만하다. 파티오는 안뜰이라고 하는데 예쁜 꽃이나 화분들로 정성스럽게 꾸며져 있다. 5월이면 어느 집 파티오가 가장 아름다운지 겨루는 콘테스트도 열린다고 한다. 코르도바 사이트(cordoba24.info)에 가면 Patio-Festival에 금년 후보자로 나온 파티오들을 볼 수 있다. 단독주택에 사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둘러보면 좋겠다.

 

그리고 과달키비르 강을 가로질러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지어진 로마 다리(Puente Romano)도 귀중한 유적 가운데 하나이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견직물, 고품질의 포도주, 정교한 브로케이드, 가죽제품, 보석들은 유럽과 아시아 전역에서 찬사를 받았다고 하며, 도시 곳곳에 기념품을 판매하는 가게들도 많이 있다.

 

마지막으로 트렌토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1545년) 코르도바에 가톨릭 신학교가 설립되었고(1583년),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가 묵었던 여관이 포르토 광장에 있다. 또한 로마 제국의 황제 네로의 가정교사이자 철학자로도 유명한 세네카가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도 알아두면 좋을 역사 상식이 되겠다.

 

[외침, 2020년 7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황치현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세계교회사, 라틴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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