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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유럽의 도시와 교회사 이야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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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0-28 ㅣ No.1307

[유럽의 도시와 교회사 이야기] 걸어서 세계 교회사 속으로

 

 

6.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이번에는 스페인으로 가보자. 먼저, 이번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사망자를 낸 스페인에 하느님의 사랑과 위로가 함께 하기를 바란다.

 

올해 산티아고(사도 대야고보의 스페인 이름)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순례를 계획했던 이들은 안타깝게도 계획을 취소해야 했을 것이다. 지난 3월 13일, 이 순례길이 폐쇄되었기 때문이다. 이곳뿐만 아니라, 루르드, 파티마 등 세계적인 성지도 마찬가지이다.

 

간단하게나마 스페인의 역사를 한번 살펴보면, 기원전 200년경부터 로마 제국의 식민지(Hispania)였다가 서고트족(게르만 민족 중 하나)이 침입함으로 507년경에는 서고트 왕국을 건국하였고, 579년에는 수도를 톨레도로 정했다. 711년, 이슬람교도의 침입에 의해 결국 서고트 왕국은 멸망하게 되고, 스페인은 약 781년간(~1492년) 그들의 통치를 받게 된다. 이렇듯 로마 제국의 문화, 게르만 민족의 문화, 이슬람의 문화가 한데 어울려 독특한 매력을 주고 있는 나라가 바로 스페인이다.

 

스페인 교회의 역사는 1세기로 소급될 정도로 꽤 오래 되었는데, 전승에 따르면,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에 의해 일리베레스(그라나다)의 체칠리우스가 여섯 명의 주교들과 함께 스페인으로 파견되었다. 그래서 3세기에 이미 레온, 아스토르가, 메리다, 사라고사 등지에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있었으며, 안달루시아 지방, 타라고나 지방, 루시타니아 지방에 교회들이 있었다. 303년에는 엘비라, 오늘날의 그라나다에서 교회 회의(Synode)가 열렸다고 하는데, 이 교회 회의에서 처음으로 성직자의 독신제를 의무조항처럼 권장했지만 서방 교회 전체로 확산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리우스주의가 고트인들에게 전파되면서 서고트 왕국도 아리우스적인 그리스도교를 믿게 되었는데, 다행히 587년경 국왕 레카레드(Reccared, 586-601)가 정통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고, 세비야의 대주교 성 레안데르(540-600년)의 영향으로 수많은 아리우스파 주교, 귀족, 주민들이 왕을 따라 정통 그리스도교로 돌아왔다. 톨레도 제3차 교회 회의(589년)는 서고트족의 개종을 확고하게 한 교회 회의였다.

 

8세기 초, 이슬람교도의 식민지 정책에 반기를 든 스페인은 약 7세기 반에 걸쳐 이베리아 반도의 국토를 회복하기 위한 운동, 즉 레콩키스타(Reconquista, 8세기부터 15세기에 걸쳐 이슬람교도에게 점령당한 이베리아반도 지역 탈환을 위해 일어난 국토회복운동)를 펼치게 된다. 이 레콩키스타의 중심이 바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였다. 812년에서 814년 무렵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알폰소 2세(재위 791-842년)가 스페인 서북부 지방 갈리시아를 점령하면서 사도 야고보의 유해가 발견된 곳에 대성당을 짓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사도 야고보는 열두 사도 중 한 사람으로, 제베데오의 아들이며, 요한의 형제이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그리스도 승천 이후 로마 제국의 히스파니아, 곧 오늘날의 스페인 지방에 선교하러 왔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유대아 지방 헤로데스 아그리파 1세 왕의 명령으로 44년 순교하였는데, 그의 유해가 한 보트에 실려 스페인 해변으로 밀려 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 가리비 껍데기들이 그의 유해를 둘러싸고 있었다는 데서 유래하여, 오늘날 가리비는 성 야고보 사도와 산티아고 순례길의 상징이 되었다. 또, 그의 제자 아타나시우스와 테오도루스가 그의 유해를 해로를 이용하여 스페인에 모셨고, 한 돌무덤에 묻었다는 전승도 있다. 또 다른 전승에는 동방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그의 유해를 이집트의 시나이산 카타리나 수도원에 선사했는데, 이슬람의 급습으로 수도자들이 안전하게 스페인으로 모셨다는 이야기이다. 이슬람이 스페인을 정복했을 때, 그의 유해를 오늘날의 장소에 묻었다고 한다.

 

그동안 묘지의 소재를 알 수 없었는데, 전승에 따르면 은수자 펠라요(Pelayo)가 무덤을 가리키는 별빛을 보았고, 그 지역의 주교 테오도미로(Theodomiro)에게 이를 알렸으며, 실제로 무덤을 찾았다고 한다. 그 무덤이 바로 성 야고보의 무덤으로 선언되었다. 알폰소 2세는 그곳에 성당을 짓도록 하였으며, 그때부터 그곳은 성지순례의 중심지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곳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을 몰아내기 위한, 종교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성지 수호를 위한, 정의로운 전쟁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물론 스페인의 수호성인은 사도 야고보이다.(축일 7월 25일)

 

특히 1000년경에는 그리스도 탄생 1천년이 되는 해로써 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이 이 순례길에 올랐다. 순례자들의 목적지는 로마와 예루살렘, 그리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였다.

 

1179년경,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성인 공경과 참회를 이유로 성지를 순례하는 자들에게 대사를 베푼다는 칙서(Regis aeterni)를 발표함으로 매년 50만 명이 넘게 순례했다고 전해진다. 교황 레오 13세는 1884년 성인의 유해에 대한 진정성을 재확인하였다. 21세기 들어 콤포스텔라 성년은 2004년과 2010년에 있었고, 2021, 2027, 2032, 2038, 2049년에 있을 것이라고 한다. 올해 순례를 못 간 순례자들은 내년 7월 25일, 야고보 사도 축일을 겨냥해 계획을 짜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p. 55, 사진 참조)은 성 야고보의 묘지 위에 지어졌으며, 이후 여러 차례의 증·개축을 통해 재탄생되었다. 두 개의 종탑을 특징으로 하는 로마네스크 건축의 걸작으로도 불리던 이 대성당의 외관은 16세기부터 17세기에 걸쳐 바로크 양식으로 개조되었다. 제단 위에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성 야고보상이 놓여 있으며, 제단 뒤 계단을 이용하여 성인상을 만져볼 수 있다. 물론 지하에는 야고보 성인의 무덤이 있으며, 그의 제자 아타나시우스와 테오도루스의 무덤도 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의 명물은 아마도 보타푸메이로(Botafumeiro, 향 피우기)일 것이다. 11세기경부터 행해진 것으로, 대축일과 장엄한 행렬 때 순례객들을 위한 영성체 이후, 파이프 오르간 연주와 함께 성당 천정에 매달려 있는 거대한 향로에 향을 넣고 피우는 행사인데, 그 향로는 길이 160센티미터에 무게는 80kg정도이며, 성당 익랑(翼廊)을 가로질러 왔다 갔다 하는 거리는 무려 65미터 정도라고 한다. 이 향로의 줄을 당기는 사람은 모두 여덟 명이며, 티라볼레이로(Tiraboloeiro), 곧 ‘향로를 흔들어 향을 피우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무한한 감동을 주는 이 예식은 많은 양의 향이 어리석은 생각들을 쫓아낸다는 종교적 믿음에 따라 행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수천 킬로미터를 걸어 온 순례객들의 악취를 없애기 위해 시작된 것이라는 다른 말도 있다. 사실 후자 쪽이 더 수긍이 간다.

 

2008년 동창 신부와 함께 이곳 성지를 순례한 적이 있었는데, 마드리드에서 곧바로 자동차로 갔기 때문에, 수백 킬로미터를 걸어와 대성당 앞에서 환호를 지르는 도보 순례객들을 보면서 부러워했던 적이 있다. 언젠가 나도 건강과 시간이 허락된다면, 꼭 한번 걸어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가보고 싶다. 그리고 ‘그 길에서 길을’ 한번 묻고 싶다.

 

[외침, 2020년 6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황치현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세계교회사, 라틴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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