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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영성의 길 수도의 길: 마리아의 딸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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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6-21 ㅣ No.344

[영성의 길 수도의 길] (40) 마리아의 딸 수도회


"무엇이든지 시키는 대로" 하는 마리아의 딸들

 

 

유치원 교육도 마리아의 딸 수도회의 중점 사도직이다. 사진은 인천 마리아 유치원.

 

 

인천시 계양구에는 수녀회가 운영하는 유치원이 두 곳 있다. 노틀담유치원과 마리아유치원이다.

 

두 곳 모두 수녀들의 확고한 교육철학과 헌신적 사랑에 힘입어 엄마들이 '강추'하는 명문 유치원으로 통한다. 매년 원아모집 때면 자녀를 두 곳 중 한 곳에 보내려는 엄마들 때문에 수십 대 일의 경쟁률을 기록할 정도다.

 

마리아유치원을 운영하는 마리아의 딸 수도회(마리아니스트)를 찾았다. 본원은 서울 양천구 목2동에 있다. 자동차 경적소리로 시끄러운 도심을 뒤로하고 주택가 안쪽에 자리잡은 수녀원에 들어섰다. 도심 속에 열려 있으나 세속의 흐름에서 살짝 비껴있는 조금은 특이한 수도원이다.

 

본원 담장 안에 있는 마리아니스트 영성센터(피정의 집)에서는 다양한 피정 프로그램이 수시로 열린다. 그러고 보니 형제 수도회인 '마리아회' 초청으로 1979년 5월 한국에 진출한 마리아의 딸 수녀회가 처음 시작한 일도 피정 사도직이다.

 

마리아의 딸 수도회가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하고 있는 사도직은 유치원부터 고등학교에 이르는 교육사업이다. 젊은이들이 인격적으로 보다 성숙해지고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다운 교육'을 목표로 한다. 그래서일까? 흔히 교육수도회로 알려져 있다.

 

"교육사도직이라고 못 박아 둔 것은 아니에요. 신자들을 배가시키고 그들의 믿음을 일깨우는 일이라면 어떤 사도직이든 가리지 않아요. 특별히 젊은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활동을 최우선 순위로 꼽고 있지요."

 

전주교구 복흥본당 다문화의 집에서 이주민 여성들에게 컴퓨터 교육을 하고 있다.

 

 

지구장 문기자(데레사) 수녀는 "교회의 보편적 사명에 따라 원칙적으로 모든 형태의 사도직에 문을 열어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면 전주교구 순창 복흥본당에서 성가정 어린이집을 운영하는데, 원아들 중에 이주민 자녀가 많아 자연스럽게 다문화가정 사도직을 병행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리아의 딸들은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하신 성모님 말씀을 모토로 삼고 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의 첫 기적을 이끌어 내신 이 말씀이야말로 마리아니스트 정신과 사명을 가장 잘 함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는 학교를 운영하지는 않지만 몬테소리 유치원, 어린이집, 피정의 집 등을 운영하면서 교육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특히 마리아니스트 영성을 통한 하느님 현존체험과 침묵피정 등 젊은이들을 위한 영성교육에 많은 관심을 쏟는다. 또 신자들의 영적 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설립자 영성을 교육ㆍ피정 프로그램으로 계발하고 있다.

 

"마리아에 대한 올바른 신심을 한국교회 안에 뿌리내리게 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길잡이가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뒤를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가장 빠르고 쉬운 길이라 할 수 있지요."

 

영성부장 강연숙(마리안나) 수녀는 "본당사도직이라고 해도 교육과 무관하지 않다"며 "본당에서는 주일학교 교육을 통해 학생들을 신앙의 사도로 양성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이밖에 인천 만월종합사회복지관, 원자력병원 원목실, 샤미나드 노인전문요양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다. 또 2006년부터 다른 관구와 국제공동체를 이뤄 인도 선교에 나서고 있다.

 

현재 회원 수는 44명. 한국 진출 32년이라는 세월에 비하면 그리 많지 않은 숫자다. 강 수녀는 "마리아회, 마리아의 딸 수도회, 평신도회, 재속회가 '마리아니스트 가족'으로 긴밀한 유대를 맺고 있다"며 "마리아니스트의 정신과 사도적 소명을 이어가는 많은 평신도 공동체 회원들이 있어 성소 부족을 크게 염려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한국에 진출한 마리아의 딸 수도회는 처음에는 프랑스어 원어명칭을 그대로 번역한 '티없으신 마리아의 딸 수녀회'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그러나 명칭이 비슷한 수도회와 혼동하는 경우가 빈번해 1997년부터 '마리아의 딸 수도회'로 변경했다.

 

 

수도회 영성과 역사 - 가난한 이, 젊은이 교육에 헌신

 

 

샤미나드 신부.

 

어릴 때부터 유난히 신심이 깊었던 아델 드 바츠 드 트랑레옹(Adele de Batz de Tranquelleon)은 12살이 되던 해에 하느님의 특별한 부르심과 소명을 느낀다. 이미 만 4살 때 가르멜회 수녀가 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을 만큼 믿음 깊은 소녀였다.

 

8살 때 프랑스혁명(1789~1799)의 소용돌이를 피해 부모를 따라 스페인으로 피신했다. 1801년 귀국하면서 바라본 고국 프랑스는 황폐 그 자체였다. 아델은 젊은이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성장하고 믿음을 회복하기를 희망했다.

 

아델은 14살 때 함께 견진성사를 받은 친구와 '작은회'라는 신심단체를 만들게 된다. 아델은 이를 통해 혁명의 여파로 절망과 좌절, 가치관의 혼란에 빠져 그리스도교 신앙을 저버린 젊은이들이 도덕성과 믿음을 회복하도록 이끌었다.

 

1808년 복자 윌리암 요셉 샤미나드 신부와 가경자 아델 수녀의 만남은 하느님 섭리였다. 당시 샤미나드 신부 역시 스페인 망명에서 귀국한 후 프랑스 남부 보르도에서 '원죄 없으신 마리아 신심회'라는 평신도 단체를 만들어 지도하고 있었다. 혁명 후 종교적 무관심과 신앙의 무지에 빠져있던 이들을 일깨우고, 복음이 구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그 본래의 정신대로 '오늘, 이 자리'에서 살아갈 수 있는 진리임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아델 수녀.

 

샤미나드 신부는 두 단체 사이에 닮은 점을 발견하고 아델과 작은회 회원들에게 신심회에 합류할 것을 제안했다. 양쪽 회원 모두 샤미나드 신부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여 같은 이름으로 기도활동을 펼쳐나갔다. 모임이 성숙될수록 회원들은 점차 하느님과 마리아께 자신을 완전하게 봉헌하길 원했다. 그리하여 아델 수녀와 샤미나드 신부는 1816년 5월 25일 '티없으신 마리아의 딸 수녀회'를 설립했다. 샤미나드 신부는 이듬해 남자 수도회인 '마리아회'를 설립했다.

 

마리아의 딸 수녀들은 무료 학교를 열어 가난한 이와 젊은이들에게 읽기ㆍ쓰기ㆍ재봉ㆍ요리ㆍ교리 등을 가르쳤다. 특히 피정 지도를 통해 그리스도교적 신앙생활의 열성을 되살리고자 애썼다.

 

아델 수녀는 또 "단 하나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이 세상 끝까지 달려갈 각오를 지닌 사람이 돼야 한다"는 말로 회원들 마음에 선교 열정을 심어줬다. 오랫동안 프랑스 국내에서만 활동하던 수도회는 마침내 1901년 스페인에 진출했다. 이어 1949년 이탈리아ㆍ미국ㆍ일본에 진출해 신앙교육에 중점을 둔 교육사도직 활동을 펼치고 있다. 현재 전 세계 13개국에서 300여 명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샤미나드 신부의 영성과 가족적 유대로 결속된 두 남녀 수도회와 마리아니스트 평신도 공동체(MLC), 평신도 재속회인 알리앙스 마리알(AM)을 '마리아니스트 가족'이라고 부른다.

 

특이한 점은 마리아니스트 회원들은 정결ㆍ청빈ㆍ순명 세 가지 서원 외에 '견인서원'(Stability)을 한다. 이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마리아를 알리고, 마리아를 사랑하고, 마리아께 봉사겠다고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다.

 

[평화신문, 2011년 6월 19일, 서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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