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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파주 지역의 천주교 요람 - 갈곡리 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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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2-29 ㅣ No.480

[한국 교회 사적지 순례] 파주 지역의 천주교 요람 - 갈곡리 공소


1. 칡의 마을에 신앙이 전파되다

갈곡리 공소는 파주 지역의 천주교 요람이라 할 수 있는, 오랜 역사를 가진 공소다. 위치는 의정부에서 서북쪽으로 20km, 문산에서 동쪽으로 12km 지점에 있다. 공소가 자리 잡은 갈곡리는 산간 지역으로, 높이 249m의 자웅산, 높이 400m의 노고산 등이 있다. 원래는 칡이 많은 골짜기에서 유래하여 우리말 ‘칡울’이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갈동리, 은곡리 전부와 천현내패면의 오리동 일부 지역을 합쳐 갈동리(葛洞里)의 ‘갈’자와 은곡리(隱谷里)의 ‘곡’자를 따서 ‘갈곡리’(葛谷里)라고 하였다.1) 그래서 교세 통계표를 비롯한 각종 자료에는 공소의 이름이 ‘칠울’, ‘치울’ 또는 ‘갈곡리’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면 갈곡리에 언제 천주교가 전파되었을까? 이를 알려 주는 기록은 현재 확인되지 않고, 다만 신자들의 증언이 전해진다. 그에 따르면, 강원도 풍수원 등지에서 살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우골이라는 곳에 정착하였고, 1896년 김근배, 김연배, 박 베드로 가족이 우골을 떠나 갈곡리로 이주하였다고 한다.2) 우골은 현재의 양주시 광적면 우고리로, 흔히 ‘가라비’라고 불렸는데, 갈곡리의 남동쪽에 위치해 있다. 그곳에 있는 가라비 공소는 1882-1883년도 교세 통계표에 기록되었을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진 공소다. 그리고 김근배 등이 이주하였다는 1896년에는 신자수가 220명에 이를 정도로 큰 공소이기도 했다.3) 증언과 같이 김근배 등이 가라비에서 왔다면, 그들은 가라비 공소의 신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의 일이지만, 약현 본당 주임 두세(C.-E. Doucet, 丁加彌) 신부가 작성한 1899년 8월 1일자 보고서에 따르면, 가라비 공소의 신자 가운데 일부가 파주 지역에 정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4) 따라서 1896년 김근배 등이 가라비를 떠나 갈곡리에 정착하였다는 신자들의 증언은 개연성이 충분하다고 할 수 있겠다.


2. 공소의 설립과 신자들의 생활

갈곡리 공소와 관련된 기록이 처음 확인되는 것은 약현 본당의 1898-1899년도 교세 통계표다. 1891년 11월 9일에 설립된 약현 본당은 서울 도성의 경계였던 사대문(四大門)을 기준으로 사대문 밖의 전 지역, 즉 도성 밖 인근 지역과 양주 · 과천 · 광주 · 개성 등 경기도 일대, 황해도 배천까지를 관할하고 있었다.5) 교세 통계표에는 ‘치울’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신자수는 65명이었다. 이것을 근거로 하면, 갈곡리 공소는 늦어도 1899년 이전에 설립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899-1900년도 교세 통계표를 보면 신자수가 전년도에 비해 크게 늘어난 145명이었다. 이는 개종의 원인과 함께 앞에서 본 것처럼 가라비를 비롯한 타지역의 신자들이 이주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로부터 몇 개월 후,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줄리앙 공베르(J. Gombert, 孔安世) 신부가 갈곡리 공소에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작은 공베르 신부6)는 가라비에서 멀지 않은 진울(Tchin oul)에 피정 때까지만 있기로 하였는데, 그 이유는 루블레 신부가 서울에서 160리나 떨어진 곳에 고립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입니다.7)

위 자료는 두세 신부가 작성한 1900년 12월 29일자 보고서의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자료에서의 ‘진울’은 칠울이다. 줄리앙 공베르 신부는 1900년 8월 1일에 사제 수품 후 그해 10월 9일에 한국에 입국하였다.8) 그렇다면 공베르 신부는 10월과 12월 사이에 갈곡리 공소로 간 셈이다. 그러다가 그는 1901년 4월 27일에 설립된 금사리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9) 이를 정리해 보면, 공베르 신부는 1900년 말부터 1901년 4월까지 갈곡리 공소에 머물렀음이 확인된다. 그가 갈곡리 공소에 머문 이유는 1900년에 설립된 개성 본당이 서울과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 개성 본당 주임 루블레(H. P. Rouvelet, 黃惠中) 신부가 고립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갈곡리 공소는 개성 본당이 설립된 이후에는 그 관할 공소가 되었다.

개성 본당의 관할 공소 가운데서도 갈곡리 공소는 든든한 신자 공동체였다. 개성 본당의 제2대 주임 르 장드르(L.-G. A. A. Le Gendre, 崔昌根) 신부가 작성한 서울 대목구장 뮈텔(G.-C.-M. Mutel, 民德孝) 주교에게 보고하기 위해 작성한 1910년 4월 17일자 보고서가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준다.

칠울, 이곳은 저(인용주 : 르 장드르 신부)의 가장 든든한 신자 공동체이자, 매우 훌륭한 공동체입니다. 불가피하게 몇 가지 개인적인 단점들도 있고, 몇몇 가정은 이웃들과 불목하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좋습니다. 칠울은 옹기 마을로서는 쇠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옹기 마을이 완전히 사라진다고 해도 전혀 놀랄 일은 아닙니다. 매우 탄탄한 농경 신앙 공동체로 유지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칠울 사람들은 옹기보다는 담배 경작을 더 많이 하고 있습니다.

1909-1910년도 교세 통계표에 따르면, 갈곡리 공소의 신자수는 246명으로, 같은 시기 고양 · 파주 · 양주 · 연천 등지에 산재해 있는 공소들 가운데 가장 많은 신자수를 자랑했다. 이러한 가운데 갈곡리 공소의 신자들 일부가 파주시 광탄면 기산리에 있었던 중산리 공소나 법원읍 웅담리에 있었던 노파 공소 등지에 이주하여 새로운 교우촌을 형성하기도 하였다.10)

갈곡리 공소는 신앙 공동체로서 나무랄 데가 없었지만, 현실에서의 신자들의 삶은 고단함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특히 경제적인 어려움은 신앙 공동체를 뒤흔들었다. 갈곡리 신자들의 주요한 생계 수단은 옹기를 제작하여 판매하는 일이었다. 잘 알려진 바대로, 옹기를 제작하는 것은 박해시대부터 산간에 정착한 신자들의 주요한 생계 수단이었다. 특별한 시설이나 도구,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았고, 좋은 점토와 기술이 있다면 옹기를 구울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11) 그런데 옹기업이 쇠퇴하게 되자, 신자들은 생계를 위해 소규모의 상업, 담배와 조 농사 등에 종사하였다.12) 르 장드르 신부는 옹기 마을이 사라진다고 해도 탄탄한 농경 신앙 공동체가 유지될 것이라고 단언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불과 5년 후인 1916년 르 장드르 신부는 갈곡리 신자들이 파산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13) 한때 246명이었던 신자수도 1917년에는 178명으로 감소하였다.14) 이후에도 이러한 상황은 개선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27년 4월 개성 본당의 제3대 주임 서병익(徐丙翼, 바오로) 신부는 갈곡리 공소 신자들이 철원 등지로 떠나가 다음해에 공소가 없어질 것이라고 하면서 그 이유를 옹기터인데도 점토와 장작이 없기 때문이라고 탄식하였다.15) 그러나 이러한 우려에도 갈곡리 공소는 여전히 신앙 공동체를 유지하였다. 1930년대에는 갈곡리 공소에서 약 90명 내외의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영위해 나갔다.16)

한편 1927년 5월 양주시 남면 신암리에 있었던 신암리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어 초대 주임으로 최문식(崔文植, 베드로) 신부가 부임하였다. 신암리 본당이 양주 북부와 파주 동북부 지역을 관할하게 됨에 따라 갈곡리 공소도 그 관할 공소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설립된 지 불과 5년 만인 1932년 9월 신암리 본당이 폐쇄되고 말았다. 그에 따라 갈곡리 공소는 잠시 행주 본당의 관할이 되었다가, 1934년 양주시 회천1동에 있었던 덕정리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됨에 따라 그 관할 공소로 편입되었다.17) 1936년에는 갈곡리 공소에 강당이 건립되었다. 이전에도 갈곡리 공소에는 강당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때 새로운 강당은 건립한 듯하다.18) “조선총독부 관보” 제2922호(1936. 10. 8)에 신고 날짜가 ‘8월 26일’로 되어 있음을 볼 때, 8월경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1945년에는 의정부 본당(지금의 의정부 2동 본당)이 설립되자 그 관할 공소로 편입되었다.19)


3. 전쟁의 상처와 공소의 재건

갈곡리 공소는 한국 전쟁의 혼란 속에서 고난의 시간을 겪어야 했다. 개전 3일 만인 1950년 6월 28일 북한군에 의해 파주 전역이 점령되었고, 이후에도 파주에서는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20) 이 와중에 1951년 갈곡리 공소 강당이 불타버리고 말았다. 이에 신자들은 1952년 7월에 작은 강당(지금의 칠울 강당)을 다시 짓기 시작하여 1953년 4월에 이를 완공하고 신앙의 터전으로 삼았다.21) 이처럼 어렵게 신앙생활을 유지해 나가던 갈곡리 공소에 도움의 손길이 전해진 것은 1955년의 일이었다.

경기도 의정부 지방 파주군 갈곡리는 전 논산 본당 공 신부가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와 부임하였던 촌락인 만큼 예전부터 교우들이 살고 있었는데, 6 · 25 동란 중 전에 있던 강당도 불타버리고 교우들은 더욱 빈한하게 되어 곤란 중이러니 이 참상을 목도한 미군 해병대 종군 마 신부는 미군 교우 장병들을 설득시켜 의연금을 거두어 80평의 새 성당을 지어 주었으므로 거 4월 15일 노 주교께서 강복식을 거행하시고 미군 국군 장병들이 참석한 중 성대한 낙성식이 거행되어 당지 교우들은 크게 기뻐하였다 한다.22)

갈곡리 공소의 어려움을 목격한 미군 해병대 군종 마 신부와 미군 장병들의 도움으로 1955년 1월 9일 새 공소 건물이 건립되었다. 미군 군종 마 신부는 에드워드 마티노(E. Martineau) 신부로, 공소 신자들은 ‘에드워드 마 신부’라고 불렀다. 이들과 함께 한국 해병대 군종 김창석(金昌錫, 타대오) 신부 등의 도움도 있었다.23) 공소 건물이 완공되자, 1956년 4월 15일 서울 교구장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의 주례로 축성식을 가졌다. 이를 크게 기뻐한 갈곡리 신자들은 1978년 3월 ‘에드워드 마’ 신부와 김창석 신부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은 사은비를 세웠는데, 현재도 남아 있다.

한국 전쟁은 갈곡리 공소에 또 하나의 상처를 남겼는데, 갈곡리 출신 김치호(金致鎬, 베네딕도) 신부의 순교가 그것이다. 1914년 3월 31일 갈곡리에서 태어난 김 신부는 1938년 성 베네딕도회 덕원 수도원에 입회하였고, 1942년 5월 1일 사우어(B. Sauer, 辛上院) 주교 아빠스로부터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덕원 본당의 보좌와 주임 신부로 사목하다가 1949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의 독일인 성직수사 등과 함께 체포되어 평양 인민 교화소로 압송되었다. 김 신부는 그곳에서 고초를 겪다가 1950년 10월 5일 유엔군의 북진으로 퇴각하게 된 북한군에 의해 순교하였다. 김치호 신부는 현재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에서 추진하고 있는 시복시성 대상자 36명 가운데 1명이다.24)


4. ‘현대의 교우촌’ 갈곡리 공소

전쟁의 상흔이 아물어 갈 무렵, 갈곡리 공소의 관할인 법원리에 공소가 설립되었다. 법원리 일대에서는 1955년부터 공소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그 결과 1958년에 의정부 본당의 관할인 법원리 공소가 설립되었다. 더 나아가 법원리 공소 신자들은 본당을 위한 계획을 세워 우선 성당 부지를 매입하는 한편, 성당 건립을 위한 기성회를 조직하였다. 신자들은 현지 주둔 미군부대의 군종 신부와 교섭하여 자재를 지원받아 성당 건립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러한 노력 끝에 성당이 완공되었고, 1963년 7월 4일에는 법원리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그에 따라 갈곡리 공소는 법원리 본당의 관할 공소가 되었다.25)

전형적인 농촌 마을인 갈곡리는 1960년대 경제 개발로 인한 농촌 인구의 감소라는 시대적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1976년 4월 25일에 발행된 “교회와 역사” 6호 <갈곡리 공소를 찾아서>에 따르면, ‘수 년 전만 하여도 60여 세대가 살았고, 주민수도 3백여 명’이었으나, ‘1976년 당시에는 불과 28세대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신자수는 170명으로, 전 주민 가운데 3가구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자였다고 하니, 갈곡리는 ‘현대의 교우촌’이라 할 만하였다. 그리고 갈곡리는 광주대교구장 최창무(崔昌武, 안드레아) 대주교를 비롯한 사제들과 수도자들을 배출한 성소의 온상이기도 하였다.26)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갈곡리 공소는 110년이 넘는 오랜 신앙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과거 신앙의 터전이었던 공소들이 상당수 사라져간 이때, 갈곡리 공소를 보존하려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다행히 의정부교구와 법원리 본당은 갈곡리 공소의 역사적 가치를 알고 보존하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칠울 강당을 보수하고 2008년 11월 20일 의정부 교구장 이한택(李漢澤, 요셉) 주교의 주례로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칠울 강당은 1955년 새 공소 건물이 건립된 후부터 공소 신자들의 모임방 등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건물이 낡고 난방 등이 미흡하여 신자들이 불편을 겪음에 따라 개보수가 시급하였다. 이 소식을 알게 된 의정부교구 신자들은 순교자 성월을 맞아 성금을 모금하여 공소에 전달하였고, 법원리 본당의 신자들은 직접 작업에 참여하였다. 여기에 교구 순교자공경위원회도 강당 보수에 힘을 보탰다. 보수 공사는 옛 모습을 보존하기 위해 대들보와 서까래는 그대로 두고 지붕과 바닥 공사 등을 새로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27) 이처럼 여러 도움을 받아 새롭게 탄생한 칠울 강당은 현재 피정의 집으로 이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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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주문화원 편, “파주시지 제1권 - 파주 이야기”, 파주시, 2009, 36쪽 : 파주문화원 편, “파주시지 제3권 - 파주 생활”, 파주시, 2009, 594쪽 : 오영환 · 박정자, <갈곡리 공소>, “순교의 맥을 찾아서”, 가톨릭출판사, 2009, 350-351쪽.
2) <우리 교구의 본당 소개 (5) - 법원리 성당>, “의정부 주보” 2005. 1. 30, 4-5쪽 : 오영환 · 박정자, 위의 글, 350-351쪽.
3) 양인성, <개화기 · 일제시대 경기 북부 지역의 천주교 - 본당 및 공소와 신자수 변화를 중심으로 ->, “교회사연구” 31,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 12, 50-52쪽.
4) 약현성당 백주년사 편찬위원회 편, , “약현성당 100주년사 기념자료집 제3집 - 성직자 사목 서한과 약현 관계 자료”, 천주교 중림동 교회, 1991, 109-114쪽.
5) 양인성, 앞의 논문, 50-51쪽.
6) 줄리앙 공베르 신부는 친형인 안트완느 공베르(Antoine Gombert, 孔安國) 신부와 구별하기 위해 ‘작은 공베르’라고도 불렸다.
7) 약현성당 백주년사 편찬위원회 편, , 앞의 책, 133-136쪽.
8) <공베르>, “한국가톨릭대사전” 1, 한국교회사연구소, 475-476쪽.
9) <금사리 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2, 한국교회사연구소, 1067-1069쪽.
10) 양인성, 앞의 논문, 61-66쪽.
11) 김혜숙, <19세기 ‘옹기 교우촌’의 신앙생활과 옹기 문양>, “교회사연구” 30, 한국교회사연구소, 78-89쪽.
12) 약현성당 백주년사 편찬위원회 편, , 앞의 책, 138-144쪽.
13) 르 장드르 신부 1916년 5월 1일자 보고서.
14) 양인성, 앞의 논문, 63쪽.
15) 서병익 신부 1927년 4월 5일자 보고서.
16) 양인성, 앞의 논문, 66-75쪽.
17) 양인성, 위의 논문, 66-75쪽.
18) 서병익 신부가 작성한 1927년 4월 5일 보고서에는 갈곡리 공소에 강당이 있다고 되어 있다.
19) <의정부2동 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9, 한국교회사연구소, 6907-6908쪽.
20) 파주문화원 편, “파주시지 제2권 - 파주 역사”, 파주시, 2009, 318-336쪽.
21) <법원리 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5, 한국교회사연구소, 3268-3270쪽.
22) <갈곡리에 새 성당>, “경향잡지” 1058(1956. 5. 1).
23) 사은비의 내용을 참고하였다.
24) 장정란, <한국 성 베네딕도 수도회 출신 순교자 연구 - 시복 · 시성 대상 인물 분석>, “교회사연구” 33, 한국교회사연구소, 2009, 396-398쪽.
25) <법원리 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5, 한국교회사연구소, 3268-3270쪽.
26) ‘우리 교구의 본당 소개 (5) - 법원리 성당’, <의정부 주보> 2005. 1. 30, 4-5쪽.
27) ‘의정부교구 칠울 강당’, <평화신문> 2008년 12월 7일자.

[교회와역사, 2010년 4월호, 양인성(대건 안드레아 ·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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