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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조선 첫 로마 유학 신학생의 자필 기도문, 100년 만에 세상 밖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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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10-26 ㅣ No.1304

조선 첫 로마 유학 신학생의 자필 기도문, 100년 만에 세상 밖으로


로마에서 발견된 조선 신학생의 기도… 사제직 향한 열망 고스란히

 

 

교황청립 우르바노대학교 서약서에 담긴 전아오 신학생의 자필 기도문.

 

 

이백만(요셉) 주교황청 한국대사가 일제 강점기 로마에 유학한 조선 신학생 전아오의 자필 기도문을 교황청립 우르바노대학교에서 찾았다는 소식을 14일 본지에 알려왔다.

 

이 대사가 교황청의 협조를 얻어 우르바노대학교 자료실에서 찾은 이 기도문에는 “전능하시고 인자하신 천주께서는 이 불쌍한 죄인 전아오스딩 조선서 처음으로 와서 공부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사 꾸준히 공부를 잘하여 외교 이방 조선을 로마와 같게 하여 주시고 영원한 당신 영광에 들어가게 하소서. 아멘”이라는 소망이 담겨 있다. 또 “추후에 이 글을 보는 자는 이 죄인을 생각하여 성모경 한 번 염하여 주심을 희망”이라고 적혀있다.

 

교황청 인류복음화성(당시 포교성성)이 운영하는 우르바노대학교의 모든 신입생은 “주님의 뜻에 따라 충실히 학업에 입하겠다”는 서약서를 작성했는데 이 기도문은 전아오 신학생이 서약서 작성 두 달 뒤 개인적으로 덧붙인 것이다.

 

이 대사와 함께 서약서에서 이 기도문을 발견한 우르바노대학교 신학원장 비첸초 비바 몬시뇰은 “전교생이 의무적으로 쓰는 자필 서약서 외에 본인이 모국어로 별도 기도문을 쓴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며 놀라워했다.

 

이 대사가 기도문을 찾기 전 대구대교구와 제주교구, 한국교회사연구소와 영남교회사연구소 등에서는 조선인 첫 로마 유학 신학생들에 관한 연구가 꾸준히 있어 왔다. 이들에 관한 기록은 「드망즈 주교 일기」 「경합잡지」 「교회와 역사」에 소개됐으며, 「천주교 대구대교구 100년사 1911-2011」 「성유스티노신학교 1914-1945」 등에도 일부 소개됐다. 또 최근 우르바노대학교에서 간행하는 잡지 「알마 마테르」(Alma Mater)에 전아오 신학생에 관한 자료를 확인할 수 있었다.  

 

최근 발표된 한국교회사연구소 송란희 역사문화부장의 「첫 로마 유학 신학생 연구-대구대목구 송경정과 전아오의 사료를 중심으로-」 논문을 정리해 잊힌 조선인 로마 첫 유학 신학생들을 소개한다. 송란희 역사문화부장은 논문에서 신학생들의 여권 신청 서류와 건강진단서, 1923년 제5회 「알마 마테르」표지와 내용 등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드망즈 주교는 1920년 1월 26일 두 신학생과 함께 로마로 가서 베네딕토 15세 교황을 알현한 후 기념 촬영을 했다. 주교 오른쪽이 전아오이고, 왼쪽이 송경정이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한국 교회 첫 로마 유학생

 

대구대목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의 송경정(안토니오, 1900~1923)ㆍ전아오(아우구스티노, 1894~1922) 두 신학생이 1919년 11월 로마 유학길에 올랐다. 이들은 한국 교회 로마 첫 유학생이자 1914년 설립한 성 유스티노 신학교의 첫 입학생들이었다. 대구대목구 최덕홍 주교와 이기수 몬시뇰, 석종관ㆍ김필곤 신부 등이 입학 동기다.

 

송경정은 경북 달성군 비산동 출신으로 1900년 4월 24일 태어났다. 그는 대구 해성학교 3학년을 수학하고 성 유스티노 신학교 중학과에 입학해 1919년 졸업했다. 전아오는 제주도 출신 첫 신학생으로 1894년 4월 24일 제주면 이도리에서 태어났다. 공교롭게도 둘은 생일이 같다. 그의 부친과 외조부, 외숙부는 제주교난 희생자였다. 전을생이라고도 불리는 그는 제주 공립보통학교 4학년을 수학하고 1914년 성 유스티노 신학교 중학과에 입학해 송경정과 같은 해 졸업했다.

 

 

로마 유학 배경

 

두 신학생이 로마로 유학한 배경은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의 일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19년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 반 로숨 추기경은 지역 교회의 발전을 위해 현지인 성직자를 양성할 목적으로 지역에서 잘 양성된 신학생 몇 명을 로마로 파견할 것을 한국 교회에 정식으로 요청했다.

 

하지만 서울대목구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선 보낼 학생이 없었다. 1914년 신입생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1914년 9월 학기 시작을 앞둔 뮈텔 주교는 프랑스 영사로부터 “프랑스에 총동원령이 선포됐다”는 통보를 받는다. 1914년 7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에 있던 프랑스 선교사 33명 가운데 11명이 징집 대상자였고 그중 9명이 본국으로 돌아갔다.

 

반면, 대구 신학교에는 라틴어 상급반 6학년이 셋 있었다. 그중 송경정, 전아오가 선발된 것이다.

 

전아오의 외국여권하부원. 언론에 처음으로 공개된 자료이다. 대구대교구 사료실 소장.

 

 

로마 유학

 

두 신학생은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와 함께 1919년 11월 유학길에 올라 1920년 1월 20일 로마에 도착했다. 둘은 드망즈 주교와 함께 포교성성 장관 반 로숨 추기경을 만난 후 교황청립 우르바노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둘은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교황을 공식 알현했다. 우르바노대학교는 ‘전 세계 선교사 양성의 못자리’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제3세계 선교 전문가 양성을 지원하기 위해 교황청이 1627년 8월 설립했다. 학교명은 설립자 우르바노 8세 교황의 이름을 딴 것이다.

 

우르바노대학교 잡지 「알마 마테르」 1923년 제5호는 두 조선인 신학생의 입학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두 명 모두 미소를 짓고 있으면서도 의젓했다. 콜레지오(신학생을 위한 기숙 신학원)에 소중한 신학생 두 명이 새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신학생 둘 다 확실히 그리스도인들로서의 자질을 갖추어 있었고, 외모상으로 그들의 건장한 체격은 장차 성직을 오랫동안 수행하면서 많은 결실을 볼 수 있는 보증과 같아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공부를 제대로 마치지 못했고, 사제품을 받지도 못했다. 한 명은 로마에서, 한 명은 한국에 돌아와 사망했기 때문이다.

 

 

송경정 안토니오

 

송경정은 로마 유학시절 2년째에 결핵에 걸렸다. 우르바노대학교 총장은 반대했으나 포교성성 장관 로숨 추기경의 최종 결정에 따라 그는 귀국길에 올랐다. 그는 병자성사를 받은 후 퇴교해 원산으로 가는 성 베네딕도회 선교사들과 함께 1922년 3월 15일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배를 타 4월 귀국했다. 그는 고향인 날뫼(비산동) 공소에서 20년간 공소 회장으로 활동하던 아버지 송기택(프란치스코, 1866~1926)을 도우며 신앙생활을 했다. 아버지는 아들과 전아오 신학생이 로마에서 떠나기 전 함께 찍은 사진을 공소에 걸어두며 아들의 회복을 빌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송경정은 1923년 5월 7일 집에서 사망했다.

 

 

전아오 아우구스티노

 

전아오는 송경정에 비해 로마 유학시절 자료가 많다. 아마도 그가 우르바노대학교 콜레지오에서 선종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모든 책과 노트에 자신의 좌우명인 ‘모든 이에게 모든 것’(omnia omnibus)라는 글을 써 놓았다. 그는 항상 미소 짓고 쾌활하고 생기와 기쁨이 가득해 동료 신학생들이게 인기가 많았다. 동료들은 그를 “베이비 전”(Baby Tiyen)이라고 불렀다.

 

전아오는 특별히 성모 신심이 돈독했다. 그는 마리아의 영광에 관해 즐겨 이야기했고, 로마의 많은 성당과 기관이 성모님께 봉헌된 것을 감탄했다. 그의 목에는 항상 가르멜의 성모 스카풀라와 프란치스코 제3회 스카풀라, 묵주가 함께 걸려 있었다.

 

그는 철학 논문으로 2등 상을 받을 만큼 우수했고, 사제직에 대한 열망도 남달랐다. 동료들은 전아오가 “자기 나라를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회두시키는 것 외에는 다른 목적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전아오는 1922년 5월 11일 밤 협심증으로 침대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그는 로마 근교 캄포 베라노에 조성된 공동묘지에 안정됐다. 드망즈 주교는 1925년 로마에서 열린 한국 순교 복자 79위 시복식에 참석하기 위해 로마를 방문했을 때 전아오의 무덤을 찾아 기도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0월 25일, 리길재 기자]

 

 

한국교회 최초 로마 유학생 - 대구대교구(당시 대구대목구) 전아오 · 송경정 신학생


100년 전 못다 핀 꽃, 후손들 마음 속 향기로 피어나

 

 

- 최초의 로마 유학 신학생 전아오의 자필 서약서와 기도문. 주교황청 한국대사관 제공.

 

 

낯선 땅 이탈리아 로마에 한국 최초로 유학 가 사제가 되기를 꿈꿨던 두 신학생이 있다. 대구대교구(당시 대구대목구) 성유스티노 신학교에 다니던 이들은 제주 출신 전아오(아우구스티노) 신학생과 대구 비산본당 출신 송경정(안토니오) 신학생이다.

 

최근 이백만(요셉) 주교황청 한국대사는 교황청 협조를 얻어 로마 교황청립 우르바노대학교 신학원 자료실에서 전아오 신학생이 자필로 새겨 넣은 한글 기도문을 찾아냈다. 100년 전 기도문을 중심으로 젊은 나이에 하느님 곁으로 떠난 이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베이비 전! 사랑스러운 천사

 

일제의 폭압적 식민 지배에 저항한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그해 11월 키 160㎝ 남짓한 신학생 전아오(건강 진단서 기준 19세)와 송경정(기록상 당시 18세)은 초대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와 함께 이탈리아로 향하는 여객선에 올랐다. 그들을 태운 배는 일본을 거쳐 중국, 홍콩, 싱가포르 등을 경유해 약 2달 만에 목적지에 닿았다. 프랑스까지는 배로 이동했고 프랑스에서 로마까지는 기차를 이용했다.

 

이들은 대구대목구 성 유스티노신학교 첫 입학생으로 드망즈 주교의 관심 속에 우르바노 신학교(현재 우르바노대학교 신학원)로 유학을 떠나 1920년 1월 로마에 도착했다. 한국교회 첫 로마 유학생이자, 당시 베네딕토 15세 교황을 공식적으로 직접 알현한 최초의 한국인 신학생이었다.

 

- 로마 우르바노 신학교에 유학 중이던 전아오 신학생(왼쪽)과 송경정 신학생.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우르바노대학교 신학원에서 발행하는 잡지 「알마 마테르」(Alma Mater)에서 전아오와 송경정에 대한 묘사를 찾아볼 수 있다.

 

“신학생 둘 다 확실히 초창기에 있는 교회 그리스도인들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고, 외모상으로 그들의 건장한 체격은 장차 성직을 오랫동안 수행하면서 많은 결실들을 맺을 수 있는 보증과도 같아 보였다.”

 

이 부분은 당시 동료 신학생들이나 교수 신부 평판을 취재해 엮은 기사로, 특히 기사에는 전아오 신학생에 대한 애정이 많이 담겨 있다. 동료들은 항상 미소 짓는 얼굴에 쾌활하고 사랑스러우며 생기가 넘치는 그를 ‘베이비 전’이라고 부르곤 했다.

 

더불어 그는 ‘사도직에 대한 열정’도 대단했다. 또 ‘한계를 모르는’ 애덕을 지니고 있었으며, 성덕(聖德)을 위해 늘 자신을 단련시키며 동료들의 모범이 됐다.

 

 

100년 만에 만난 기도

 

“차후에 이 글을 보는 자는 이 죄인을 생각해 성모경(성모송)을 한 번 암송해 주십시오.”

 

주교황청 한국대사관이 공개한 전아오가 우르바노 신학교 입학 직후 자필로 쓴 한글 기도문 맨 마지막 부분이다. 그는 무사히 공부를 마치게 해 달라는 내용과 함께 이 같은 내용을 적었다.

 

- 1919년 11월 당시 성유스티노신학교 총장 샤르즈뵈프 신부(가운데)와 로마로 유학 떠나는 두 신학생.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당시 우르바노 신학교 모든 입학생은 ‘주님의 뜻에 따라 충실히 학업에 임하겠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썼는데, 이 기도문은 그가 서약서 작성 약 2달 뒤 개인적으로 덧붙인 것이다. 통상적인 자필 서약서 외에 모국어로 별도 기도문을 쓴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이 기도문을 찾아낸 이백만 주교황청 대사는 “편지 내용을 본 현지에서도 다들 놀랐다”며 “처음 봤을 때 가슴이 먹먹해지고 울컥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자료실에 묻혀 있던 기도문이 햇빛을 볼 수 있게 돼 보람이 크다”며 “한국 신자들도 이 편지를 보면 성모송을 한 번씩 봉헌해 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이 대사도 이 편지를 본 날 저녁, 묵주기도와 성모송을 드렸다고 했다.

 

실제로 전아오의 성모신심은 남달랐다. 동료들이 “한 어린아이가 자신의 엄마에 대해 단순하고도 신뢰에 찬 사랑을 지니고 있는 것과도 같았다”고 회상할 정도였다.

 

최근 이 편지와 함께 신학생들 이야기가 인터넷으로 먼저 국내에 공개되면서, 이를 본 신자들이 댓글로 성모송을 달며 이들을 위해 함께 마음을 모았다. 100년 전 전아오 신학생이 쏘아올린 기도가 신자들 마음에 닿은 것이다.

 

지난해 위령성월을 맞아 로마 유학 중인 대구대교구 신부들이 로마 베라노 묘지에 있는 전아오 신학생 묘소를 찾아 추모미사를 봉헌한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죽음으로 승화된 사제의 꿈

 

안타깝게도 두 신학생의 꿈은 1922년 좌절되고 만다. 송경정은 결핵에 걸려 1922년 4월 귀국했다. 송경정이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같은 해 5월, 전아오는 협심증으로 로마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그가 항상 ‘자애로운 어머니’라고 부르던 성모 성월 5월에 그는 그렇게 하느님 곁으로 떠났다.

 

송경정은 다음해인 1923년 5월 7일 대구 집에서 숨을 거뒀다. 그가 죽기 얼마 전 그를 만난 드망즈 주교 일기에는 그의 마지막 모습이 담겨 있다.

 

“1923년 4월 9일 월요일 아침에 날미(날뫼)성당을 강복하러 갔다. 거기서 나는 죽어 가는 송 안당(안토니오)을 보았는데, 그는 말도 못 하고 단지 눈과 머리로 감사의 표시를 할 뿐이었다. 성당에는 송 안당과 전 아오스딩(아우구스티노)이 아주 건강한 모습으로 나와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 사진은 1920년에 찍은 것이었다.”

 

이들은 사제의 꿈을 못다 이루고 하늘나라로 갔지만, 이들이 품었던 하느님 나라를 향한 찬란한 포부는 아직도 우리 교회를 비추고 있다. 현재 로마에 유학 간 대구대교구 신부들은 해마다 위령 성월이면, 로마 시내 베라노 묘지에 있는 전아오 묘소 앞에서 그를 추모하며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전아오 신학생의 묘소에서 기도하고 온 이백만 주교황청 대사는 “그동안 로마를 거쳐 간 우리나라 신학생, 사제, 수도자들이 참 많다”며 “이분이 바로 ‘한국 가톨릭 성소자들의 수호자’가 아닌가 한다”고 밝혔다. [가톨릭신문, 2020년 10월 25일, 성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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