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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부활과 희망: 부활하신 그리스도, 우리의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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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4-23 ㅣ No.101

[경향 돋보기 - 부활과 희망] 부활하신 그리스도, 우리의 희망


부활절을 맞이하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대한 묵상을 해본다. 그리스도 부활의 진정한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참된 메시지는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분명한 사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객관적인 역사적 자료로도 확인이 가능한 사실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하나의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객관적으로 단정할 수 있는 확실한 물리적 근거는 과연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인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복음서들을 중심으로 신약성경에 나오는 신앙적 증언뿐이다.

그런데 위경서(僞經書)들과는 달리 정경(正經)으로 규정된 복음서들은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신앙고백과 증언을 소개할 뿐 부활 사건 자체의 문제를 세부적이거나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물론,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복음선포 정식들 가운데 하나인, 바오로 사도의 다음 신앙고백을 근거로 해서, 부활 사건 자체의 역사적 차원을 긍정할 수 있다고 보기도 한다.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3-8).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관한 신약성경의 내용을 해석하면서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보도하는 증언들이 서로 딱 일치하는 것도 아니고, 일목요연하게 부활의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 발현을 보도할 때도, 죽었던 라자로가 다시 살아나는 것(요한 11,38-44 참조)과 같이 그 과정과 경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대목은 전혀 없다.

아무튼, 부활 증언의 핵심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그것은 죽었던 라자로가 죽기 전의 생활상태로 복귀했다가 얼마 뒤 다시 죽어야만 하는 그런 한계적 삶에로의 소생이 아니라, 현세의 인간조건을 벗어난 영원한 생명에로의 부활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부활하신 당신의 육신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상태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다른 생명의 세계로 넘어가신다. 예수님의 몸은 부활을 통해서 성령의 권능으로 충만해진다. 예수님의 몸은 그 영광스러운 상태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한다.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하늘의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1코린 15,35-50 참조).

(…) 사실 부활 사건 자체를 눈으로 목격한 증인은 아무도 없었고, 어느 복음사가도 그것을 묘사하지 않았다. 누구도 부활이 물리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말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다른 생명으로 넘어간다고 하는 부활 사건의 핵심은 감각 기관으로 지각할 수 없는 것이다. 빈 무덤이라는 표징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사도들이 만났다는 사실로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확인되지만, 역사를 초월하고 넘어선다는 면에서 부활은 여전히 신앙의 신비의 핵심에 머물러있다”(646-647항).


희망을 암시하는 ‘빈 무덤’

「가톨릭교회 교리서」가 말하듯이, “다른 생명으로 넘어간다고 하는 부활 사건의 핵심은 감각기관으로 지각할 수 없는 것”이란 과연 무슨 의미인가? 이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보도하는 신약성경의 ‘부활 사화’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이 그분을 즉각적으로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 공통된 증언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사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단순히 시각적으로 그분을 목격한다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을 암시한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즉각적이고 감각적인 지각만을 통해서가 아니라, 어둠과 고통의 시간을 통해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의미 있는 초월적 체험으로써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나타나신다. 내가 그분을 만난다는 것은, 바로 나의 시련과 고통의 심연 속에서 그분께서 내 이름을 부르며 찾아와, 나를 위로하고 격려하시며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심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서의 증언을 단지 육신의 눈으로만 보려 해서는 안 된다. 곧,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물리적이고 감각적인 지각의 차원에만 초점을 맞추어 이해될 수 있는 성격의 사건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진정으로 체험하려면, 육신의 눈뿐만이 아니라 신앙의 눈과 맑은 영혼, 그리고 영적 예지(叡智)가 필요하다. 진정 중요한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제자들의 철저한 변화 체험이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신약성경의 ‘부활 사화’ 가운데 ‘빈 무덤 사화’(마태 28,1-8; 마르 16,1-8; 루카 24,1-12; 요한 20,1-13 참조)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직접적인 목격담은 아니지만, 매우 의미 있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무덤을 막은 돌은 곧 죽음이라는 인간 한계의 극치와 절대적 단절을 상징하는데, 그 막았던 돌이 치워진 채 발견되는 ‘빈 무덤’이란 이를 넘어서는 희망을 암시한다. 곧, ‘빈 무덤’의 표상은 죽음을 딛고 일어서는 전적으로 새로운 희망의 시작을 의미한다.

막았던 돌이 치워진 것, 예수님의 무덤 안에 있는 아마포와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는 얼굴을 쌌던 수건…. 이는 우리를 예수님의 부활 체험에로 이끄는 단서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보고 예수님은 정말 부활하신 게 아니라 누군가 돌을 치우고 무덤을 열어 그분의 시신을 꺼내간 것일 뿐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인들은 이러한 단서들만으로도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할 수 있다.

신학적 관점에서 ‘빈 무덤 사화’를 해석해 본다면, 옆으로 치워진 돌과 예수님의 무덤 안에 있는 아마포와 수건 등은 예수님의 부활을 암시하는 암호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은 작은 실마리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의 현존을 찾아내는 위대한 힘을 지니고 있다.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아마포만 무덤 안에 놓여있는 것을 보고서 갖게 되는 그분의 현존에 대한 믿음과 희망은, 오로지 그분에 대한 사랑에 기반을 둔 인식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암호들을 통해서 오늘의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세상의 어둠 속에서도 끝내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우리의 감각적 한계를 초월하는 전혀 새로운 실재와의 만남이다.


나 자신의 근본적인 변화

왜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크고 떠들썩한 사건으로 보도하지 않는가? 만인이 보는 앞에서 영광 속에 찬란하게 개선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에 관한 기록은 신약성경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사도들의 복음선포 내용과 함께 ‘빈 무덤’의 표상이다. 어쩌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발생하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 그분에 대한 체험 양식도 이러한 ‘빈 무덤’의 표상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진정 중요한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체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나 자신의 근본적인 변화이다. 제자들의 경우도 그러했다. 두려움에 떨며 숨어있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들은 송두리째 변화되어 만방에 나아가 죽기까지 복음을 선포하게 된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눈으로 보기는 더더욱 어렵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부활하신 그분의 현존에로 우리를 인도하는 수많은 암호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 세상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드러내는 상징들이 얼마든지 있다.

우리에게는 그 암호와 상징들을 찾아낼 수 있는 눈과 마음, 그리고 예지와 열망이 필요하다. 그렇게 발견된 암호와 상징들은 우리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에로 이끌어간다. 마치 부활절 새벽에 이루어지는 ‘빈 무덤’의 체험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만남의 체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송두리째 변화되어, 온 생명을 다해 땅 끝까지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고 증언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부활절을 맞으며 해야 할 일 가운데 필자가 가장 추천하고 싶은 것은 요한 복음 20장을 정독하고 묵상하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참으로 아름답고 감동적인 부활 발현 사화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좌절과 실의에 빠진 인간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어떻게 다가오시는가 하는 이야기가 바로 여기에 적혀있다.


요한 복음 20장의 아름답고 감동적인 부활 발현 사화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께서 묻혀계시던 무덤에 갔다가, 그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요한 20,1 참조). 마리아가 이른 새벽부터 무덤에 갔다는 것은 그만큼 예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했다는 친밀감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 마리아가 깊은 상실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빈 무덤에 관한 사실을 베드로 사도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알린다. 이 소식을 접한 두 제자는 급히 무덤으로 함께 달려가 이 사실을 직접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제자들이 돌아가고 난 다음에도 차마 무덤 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남아 슬픔 속에 울고 있던 마리아의 모습은(2-11절 참조), 소중한 무언가를 상실한 사람의 깊은 슬픔과 좌절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그리고 마리아는 무덤 속에 있던 두 천사와 대화한(12-13절 참조) 이후에, 뜻밖에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된다.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14절).

왜 마리아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토록 가까이에서 직접 마주 보고서도 그분이심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우리의 인간학적 체험과 통찰에 비추어본다면, 요한 복음 20장에 나오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체험에는 뭔가 이상한 점이 있다. 그토록 사랑하고 존경하던 예수님이 바로 앞에 서계시고 그분과 함께 대화까지 나누었음에도(15절 참조), 마리아 막달레나는 왜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알아차리지 못하는가?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은 바로 그분께서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실 때이다. 예수님과 대화를 마치고 돌아서 가려던 그녀에게, 그분께서는 “마리아야!” 하고 그 이름을 불러주신다. 그러자 마리아는 예수님이심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스승님!) 하고 대답한다(16절 참조). 이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내 이름을 불러주시는 참으로 아름답고 감격스러운 장면이다.

깊은 슬픔과 상실감에 젖어 좌절해 있던 나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가와 당신의 파스카 신비로 나를 초대하며 위로하시는 순간이다. 그래서 나 역시 스승님이라 부르며 응답하여, 그분을 내 삶의 결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이름을 불러주실 때

마리아 막달레나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련과 어둠의 시간을 암시한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에 앞서 겪어야 할 죽음의 시간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마주하게 될 온갖 어려움과 인간적 한계,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체험하게 될 슬픔과 좌절의 시간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나의 이름을 불러주실 때, 나는 내가 지고 가던 십자가의 삶이 결코 헛된 실패가 아니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내가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슬피 울고 있던 그 좌절과 상실의 시간 동안, 부활하신 주님께서 신비로운 현존으로 내 곁에 함께하셨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슬픔과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 좌절과 실의에 빠진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이 신비로운 부활의 증인이 되고자 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곧 그들의 이름을 친히 부르며 위로하실 것이라는, 그래서 그들을 살리는 유일한 참의미가 되어주실 것이라는 기쁜 소식을 만방에 전할 것이다.

* 박준양 세례자 요한 - 서울대교구 신부.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과 생명대학원 교수이며,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FABC) 신학위원회(OTC) 신학전문위원이다.

* 이 글은 필자가 자신의 저서인 「그리스도론, 하느님 아드님의 드라마!」를 참고하여 정리한 것이다.

[경향잡지, 2012년 4월호, 박준양 세례자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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