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볼리외 성인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하우현 성당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1-09 ㅣ No.619

[한국 교회 사적지 순례] 볼리외 성인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하우현 성당


성당 가는 길

화창한 10월 첫 번째 주일, 하우현 성당으로 가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혹 휴일이라 차가 막힐 것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 하우현 성당으로 가는 길은 막힘이 없었다. 표지판을 따라 성당 입구에 들어서니 예수상이 두 팔을 벌려 우리를 반겨주었다. 박해 시대 신자들의 은둔처이자, 본당 역사가 100여 년이 넘는 유서 깊은 곳 하우현 성당. 자, 이제 하우현 성당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박해 시대의 하우현

하우현 일대에 천주교 신자들이 언제부터 살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박해 시대 그 일대에 살던 신자들이 순교하였다는 기록을 뽈 때, 일찍부터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1800년, 한덕운(韓德運, 토마스, 1751-1801)은 충청도 홍주를 떠나 광주 의일리(현 의왕시 학의동)에 이주하여 살다가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그리고 1845년 9월에는 하우현에 살던 김준원(金俊遠, 아니체토)이 체포되어 12월에 남한산성에서 순교했다는 증언도 있다. 이러한 점들로 볼 때, 19세기 초 이래 신자들이 하우현 일대에 거주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1)

한편 하우현과 가까운 광주 묘론리(혹 산답리, 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와 둔토리(현 분당구 운중동)에 신자들이 거주했었음이 기록에 나타난다. 특히 1865년에 입국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볼리외(B.L. Beaulieu, 徐沒禮, 1840-1866) 신부가 5월 말 서울에서 광주 묘론리로 이주하여 조선말을 배우고 천주교 교리를 강습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산답리 일촌은 거의 신자 집이었다고 한다. 이것이 하우현 지역을 포함한 묘론리 일대가 이 지역의 신앙 중심지였음을 말해준다.2) 볼리외 신부는 병인박해 때 청계산 중턱 둔토리 굴아위 동굴에 숨어 지내다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3월 7일에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3)


공소의 설립

하우현 공소가 설립된 것은 1884년경으로 추정된다. 뮈텔(G.-C.-M. Mutel, 閔德孝, 1854-1933) 신부가 작성한 <1884-1885년 교세 통계표>에 ‘광주 하오개’(Ha o Kai)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의 신자 수는 16명이었다.4) 그로부터 얼마 뒤인 1888년 7월, 갓등이(왕림) 본당이 설립되자, 하우현 공소는 그 관할 공소가 되었다.5) 그런데 당시에는 신자들이 모일만한 마땅한 장소가 없어 교우 집에서 공소 예절을 행하였다. 이에 갓등이 본당의 알릭스(J.J.B. Alix, 韓若瑟, 1861-1948) 신부는 1893년 10월, 공소 순방 중에 하우현을 방문하고 그곳 신자들에게 공소 강당을 세우도록 권유하였다. 신자들은 강당을 세우기 위해 1,500냥을 모금했고, 알릭스 신부도 150냥을 보조했다. 그 결과 1894년 5월에 초가 목조 강당 10간을 완공하였다.6) 6월 2일경에는 샤르즈뵈프(J.M.E. Chargeboeuf, 宋德望, 1867-1920) 신부의 주례로 강당 축성식이 열렸던 것으로 보인다.7)

강당이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은 1895년 1월 28일경, 드비즈(E.P. Devise, 成一論, 1871-1933) 신부가 뮈텔 주교의 지시에 따라 하우현 공소에 왔다. 그는 1894년 10월 25일 한국에 입국한 ‘신참’ 선교사였다. 그럼에도 그가 뮈텔 주교에게 지방으로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자, 뮈텔 주교는 그에게 임시로 하우현에 가서 정착하도록 하였다. 드비즈 신부는 1895년 6월에 공세리 본당(충남 아산)에 부임할 때까지 하우현에 머물면서 한국어와 풍습을 배웠다.8) 그 이후에도 여러 선교사가 한국어를 배우거나 혹은 휴양을 하기 위해 하우현에 머물렀다. 그리고 용산의 예수성심신학교 학생들도 소풍을 겸해 이곳을 방문하기도 했다.9) 또한 “봉교자술”(奉敎自述)로 유명한 전교 회장 김기호(金起浩, 요한, 1824-1903)도 말년에 하우현에서 생활하기도 했다.10)


하우현 본당이 설립되다

1890년대 중반 이후, 하우현 공소의 신자 수는 크게 증가하였다. 1884-1885년에 16명이었던 신자 수가 불과 10년 만인 1894-1895년에 100명으로 늘었다. 한편 하우현 공소와 가까운 거리에 ‘학현’이라는 공소도 있었는데, 그 공소의 신자 수도 1894-1895년에 151명에 이르렀다.11) 당시 하우현 지역의 신앙 영ㄹ기는 뜨거웠던 것으로 보인다. 1895년 3월에 잠시 하우현에 머물렀던 라크루(M. Lacrouts, 具瑪瑟, 1871-1929) 신부는 “(그가) 본 모든 것에 열광하여 그 역시 지방에 파견되지 못한 것을 유감스러워” 할 장도였다.12) 하지만 하우현 지역의 신앙 열기가 이처럼 뜨거웠던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선교사들이 자주 하우현을 방문하여 성사를 주었던 것이 교세 성장의 한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처럼 신앙의 열기가 뜨거웠던 하우현 공소는 1900년 6월에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하우현과 경기 남부 지역의 교세 증가가 하우현 본당의 설립 이유였을 것이다. 이와 함께 하우현의 지리적인 여건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하우현 지역은 인천 - 제물포 - 이천 - 여주를 잇는 간선로가 통해 있어 과거에 동양원(東陽院)이라는 역원이 있던 곳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러한 조건은 선교를 위해 유리했다고 생각된다.13) 또한 1890년대 후반, 하우현 지역의 신자들은 뮈텔 주교에게 신부를 파견해 줄 것을 간청하고 있었다.14) 뮈텔 주교는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여 하우현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켰을 것으로 여겨진다.

하우현 본당의 초대 주임은 샤플랭(O. Chapelain, 蔡, 1869-1943) 신부였다. 설립 당시 관할 구역은 광주 · 용인 · 과천 등이었고, 공소는 16개, 신자는 1,105명이었다.15) 샤플랭 신부는 공소 강당을 성당으로 사용했고, 1903-1904년경 본당에 남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는 등 본당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16)

여기서 하우현 성당의 옛 모습을 잘 묘사한 자료를 소개할까 한다. 자료는 하우현 본당을 방문한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아 연합회의 노르베르트 베버(N. Weber, 1870-1956) 총아빠스의 기록이다. 베버 총아빠스는 1911년 2월 22일에 한국을 방문하여 6월 24일까지 약 4개월 동안 머물면서 서울을 비롯하여 수원, 안성, 공주 등 유서 깊은 교우촌과 명소를 두루 여행하였다.17) 베버 총아빠스는 3월 24일 하우현 본당을 방문하였는데, 성당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성당은 초가지붕에, 막돌과 진흙으로 궁색하게 벽을 쌓은 나지막한 토담집이었다. 우리는 몸을 굽혀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좁고 초라했다. 천장에는 생나무 들보가 튀어나와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였다. 울퉁불퉁한 기둥이 들보를 받치고 있었다. 장식이라곤 낡은 양탄자로 제대 네 면을 두른 것이 전부였다. 작고 소박한 갈색 십자가는 십자가의 길이 지닌 참된 의미를 깨우쳐 주는 듯했다. 문과 창문들은 가느다란 나무 격자로 되어 있었다. 문과 창문의 격자 위에 바른 창호지에 석양이 비치었다. 전면에 있는 제대 옆 창문 두 개는 붉은 색유리였다. 색유리를 통해 신비스러운 빛이 장엄한 어스름 속으로 들어왔다. 그 빛은 평화로운 얼굴로 기도하는 가난한 이들의 얼굴을 비추어 주었다. 견고한 후광을 띤 보석과도 같은 신앙의 열정이 그들에게서 뿜어져 나왔다.18)


하우현 본당의 신부들과 신자들

1906년 3월, 제2대 주임으로 르 각(C.J.A. Le Gac, 郭元良, 1876-1914) 신부가 부임하였다. 이 당시 신자들은 “견고한 후광을 띤 보석과도 같은 신앙의 열정을 내뿜고 있었다.” 1909년 르 각 신부의 보고에 따르면, 주일에는 성당에서 3-5km 떨어진 마을에서 2-3백 명의 신자들이 와서 작은 성당을 가득 채웠다.19) 르 각 신부는 사제관을 신자들에게 개방할 만큼 그들과 어울려 살고 있었다.20) 1911년 르 각 신부는 갓등이 본당의 알릭스 신부가 본국인 프랑스로 휴가를 떠나자, 수원으로 거처를 옮겨 하우현 본당을 함께 관리하였다.21)

1912년 4월 27일 페랭(P.F.L. Perrin, 白文弼, 1885-1950) 신부가 제3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그에 따라 르 각 신부는 갓등이 본당만을 전담하게 되었다. 1913년 5월, 페랭 신부는 르 각 신부와 함께 “소화”라는 잡지를 발간하였다. 이 잡지는 수원과 하우현 지역의 신자들을 위해 펴낸 것으로, 마리아의 약전, 그리스도인과 비신자의 대화, 신자용 매일 축일표, 서울 대목구와 대구 대목구의 연간 교무 통계표, 데레사 수녀의 약전 등을 실었다.22) 하지만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징집령이 내려지자, 페랭 신부는 본국인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이에 행주 본당의 김원영(金元永, 아우구스티노, 1869-1936) 신부가 하우현 본당의 사목도 맡았다.23)

그러다가 1920년 5월 23일, 제4대 주임으로 윤예원(尹禮源, 토마스, 1886-1969) 신부가 부임하였다. 윤 신부가 사목할 당시, 하우현 본당의 상황은 그리 좋지 못하였다. 성당은 낡아 무너질 위험에 처해 있었다. 또한 신자 수가 감소한 상태였는데, 그 주요한 이유는 1921년 조선 총독부가 공포한 연초 전매령(煙草專賣令) 때문이었다. 총독부는 개인의 담배 경작과 판매를 전면 금지하였고, 그로 인해 담배 경작을 생업으로 삼았던 신자들이 큰 타격을 입었다. 신자들은 생활 수단을 찾아 하우현을 떠났고, 그로 인해 신자 수가 감소한 것이었다.24)

이처럼 상황이 어려웠지만, 윤예원 신부와 신자들은 교육 사업에 매진하는 한편, 신자 단체를 조직하는 등 본당의 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윤예원 신부는 교육 기관인 ‘경애강습소’(성신강습소)를 설립하였다. 그에 따라 이전부터 있었던 본당 학교는 자연히 폐지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애강습소는 체계를 갖춘 4년제 초등 교육 기관으로, 선교 교육 · 봉사 교육 · 애국심 함양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윤 신부는 교장인 동시에 수신(修身)과 음악을 가르쳤다. 하지만 1927년 윤 신부가 옥천 본당으로 전임된 후, 경애강습소는 이전되어 ‘청계강습소’라 불리면서 명맥을 유지하였다. 이후 청계강습소는 학생의 감소 등으로 거의 폐소되다시피 하였다가 1929년경 정준모가 강습소를 재개하여 발전시켰다. ‘성현서당’이라 불린 이 학교는 1944년 무렵까지 운영되었다.25)

하우현 본당의 신자들은 1920년대 초에 ‘하우현 천주교 청년회’를 조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22년 6월 3일 명동 성당에서 ‘경성교구 천주교 청년회 연합회’가 창립되었을 때부터 하우현 청년회는 연합회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26) 하지만 아쉽게도 하우현 청년회의 회원 수나 구체적인 활동 등을 알 수 없다. 다만 당시 청년회의 목적이 교회 사업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하우현 청년회원들도 그러하였으리라 추정된다.

1928년 5월에 부이수(P.J. Bouyssou, 孫以燮, 1872-1949) 신부가 제5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1930년 4월까지 사목하였다. 그런데 부이수 신부가 대신학교 교수로 전임되었으나 후임 신부는 임명되지 않았다. 이에 하우현 본당은 수원 본당(현 북수동 본당)의 공소가 되었다. 그러다가 1937년 8월에 김경민(金景旻, 루도비코, 1902-?) 신부가 제6대 주임으로 부임함으로써 다시 본당으로 부활하였지만, 1943년 1월에 김 신부가 황해도 재령 본당으로 전임되면서 다시 공소가 되었다. 그해 12월, 황정수(黃貞秀, 요셉, 1890-1975) 신부가 제7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1951년 10월가지 사목하였다. 황 신부가 평택 본당으로 전임되자, 하우현은 영등포 본당(현 도림동 본당)의 관할 공소가 되었다.27)

1953년 12월, 구천우(具天祐, 요셉, 1897-1994) 신부가 제8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구 신부는 외진 곳에 있는 하우현보다 발전 가능성이 있는 안양 읍내로 본당을 이전할 계획을 세웠다. 결국 1954년 3월 7일에 안양에 성당을 세운 뒤 본당을 이전하였다. 이에 따라 하우현은 안양 본당(현 중앙 본당)의 관할 공소가 되었으며, 성당과 사제관은 보존되어 신부들의 휴양에 이용되었다. 1964년 용문 본당의 김영근(金永根, 베드로, 1894-1971) 신부가 은퇴하여 하우현 공소에서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성당이 매우 낡아 개수가 시급했다. 이에 김영근 신부는 1965년에 미군 부대의 지원을 받아 성당을 신축하였다. 1975년 12월에는 안양 본당으로부터 군포 본당(현 호계동 본당)이 분리 · 설정되자, 하우현 공소는 군포 본당의 관할 공소가 되었다.28)


본당의 부활

수원교구는 1978년 6월 25일자로 하우현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하고, 본당 주임에 살레시오회 소속 선교사 스피스(R. Spies, 巴賢雨) 신부를 임명하였다.29) 스피스 신부는 하우현 본당과 인연이 있었다. 그는 1965년 성당을 신축할 때, 김영근 신부와 미군 부대 사이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스피스 신부는 2000년 1월까지 약 22년 동안 하우현 본당의 주임으로 활동하면서 다시 본당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30)

103위 시성식이 열린 지 1년 후인 1985년 7월 15일 하우현 본당은 시성된 볼리외 신부를 주보성인으로 모셨다. 1986년 10월 10일에는 장내동 본당(전 안양 본당)에서 하우현 본당 사제관 앞뜰 화단에 <서 루도비꼬 볼리외 신부 기념비>를 세웠다. 그리고 1992년 7월 14일에는 김영근 신부 선종 21주년을 맞아 대원석재 김순태 대표의 기증으로 <김영근 베드로 신부 기념비>를 세웠다.31)

제10대 주임 한연흠(韓然欽, 다니엘) 신부 재임기인 2001년 1월 22일에는 옛 사제관이 경기도 기념물 제176호로 지정되었다. 20세기 초반에 지어진 한불 절충식의 보기 드문 건축 양식으로, 평면 및 구조, 의장 등이 갖는 건축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는 점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 후 2005년에는 사제관의 보수 작업이 이루어졌다.32)


하우현 성당의 현재

하우현 성당은 작고 소박했다. 성당 내부는 여느 성당과는 달랐다. 대부분의 성당에서는 신자들이 의자에 앉아 미사를 드린다. 그러나 하우현 성당에서는 신자들이 작은 책상을 앞에 두고 마룻바닥에 앉아 미사를 보게 되어 있다. 성당 뒤쪽에는 ‘출발’(Le Depart)이라는 대형 그림이 걸려 있다. 볼리외 신부를 비롯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한국으로 떠나기에 앞서 거행한 출발 예식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1868년 작품으로, 화가는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쿠베르탱의 아버지인 샤를 루이 드 프레디 쿠베르탱(Charles Louis de Fredy, Baron de Coubertin, 1822-1908)이다. 진본은 현재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에 있다고 한다.

성당에서 나와 왼쪽으로 가면 옛 사제관을 만날 수 있다. 사제관을 둘러복 있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밖으로 나왔다. 옛 사제관은 이제 신자들의 교육이나 회의 등을 위한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옛 사제관의 앞뜰 화단에는 주보성인인 볼리외 신부의 성인상과 김영근 신부 기념비가 있었다. 그런데 볼리외 신부의 성인상이 하우현에 오기 전에 봤던 사진에서의 그것과는 달랐다. 자초지종을 조사해 보니 이렇다. 2010년 여름, 태풍 콘파스가 한반도를 지나면서 기록적인 강풍이 불었다. 그로 인해 1986년에 세운 볼리외 신부 기념비가 떨어져 크게 파손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수원교구 가톨릭미술가회 엄종환(요셉)은 제11대 주임 정광해(鄭光海, 시몬) 신부와 논의하여 새 성인상을 만들었다. 그해 10월 31일, 새 성인상 축복식을 거행하였다.33) 그것이 현재의 ‘성인 서 루도비꼬 볼리외 신부’상이다.

하우현 본당은 매월 첫 주일 오후 2시에 볼리외 신부의 은신처였던 동굴 앞에서 순례 미사를 봉헌한다. 사순절이나 순교자 성월 등에는 매주 순례와 미사를 이어간다고 한다.34) 때마침 필자가 찾은 날도 10월의 첫 주일이어서 순례 미사가 있었다. 좋은 기회였지만 이미 늦어 아쉽게도 미사에는 참여할 수 없었고, 다음 기회를 기약하기로 했다.

---------------------------------
1) “의왕시사” 1 (자연과 역사), 의왕시 · 의왕문화원, 2007, 459쪽.
2) 위의 책, 459-460쪽.
3) 백병근, <하우현 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12, 9320-9321쪽.
4) “의왕시사” 1 (자연과 역사), 460쪽; <1884-1885년 교세 통계표>(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5) “의왕시사” 1 (자연과 역사), 457-459쪽.
6) 위의 책, 461쪽.
7) “뮈텔 주교 일기” 1, 한국교회사연구소, 2009, 287쪽.
8) 이유림, <드비즈>, “한국가톨릭대사전” 3, 1960-1961쪽; “뮈텔 주교 일기” 1, 356-358쪽.
9) “뮈텔 주교 일기” 1, 390쪽; “뮈텔 주교 일기” 3, 2008, 34-35쪽.
10) 이원순, <김기호>, “한국가톨릭대사전” 2, 1160-1161쪽.
11) “의왕시사” 1 (자연과 역사), 460쪽. 학현 공소는 1893-1894년 교세 통계표에 처음 나온다. 공소의 소재지는 현 의왕시 학의동으로 추정된다.
12) “뮈텔 주교 일기” 1, 369쪽.
13) “의왕시사” 1 (자연과 역사), 461-462쪽.
14) “뮈텔 주교 일기” 2, 2008, 364쪽.
15) <하우현 본당의 교세 통계표(1900-1901년)>(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16) “의왕시사” 1 (자연과 역사), 462-463쪽; 하우현 본당 사제관 안내판.
17) 이유림, <베버>, “한국가톨릭대사전” 5, 3360-3362쪽.
18) 노르베르트 베버 지음, 박일영 · 장정란 옮김, “고요한 아침의 나라”, 분도출판사, 2012, 193쪽.
19) 한국교회사연구소 역 · 편, <1909년도 보고서>, “서울교구 연보” II, 명동 천주교회, 1987, 76쪽.
20) 노르베르트 베버 지음, 앞의 책, 193-194쪽.
21) “의왕시사” 1 (자연과 역사), 559쪽.
22) 김정환 · 류귀선 편역, “착한 목자 백 필립보 신부”, 내포교회사연구소, 2010, 54쪽.
23) “의왕시사” 1 (자연과 역사), 559쪽.
24) <1922년도 보고서>, “서울교구 연보” II, 170-171쪽.
25) “의왕시사” 1 (자연과 역사), 563-564쪽; “의왕시사” 5 (마을 이야기), 105-108쪽.
26) 양인성, <경성교구 천주교 청년회 연합회 연구>, “교회사 연구” 28(2007. 6), 36-37쪽.
27) 백병근, <하우현 본당>, 9320-9321쪽.
28) 백병근, 위의 글, 9320-9321쪽; <김 베드로 신부 은퇴>, “경향잡지” 1157호(1964. 8); <하우현 공소 성당 신축 기공식>, “경향잡지” 1164호(1965. 3).
29) ‘수원교구, 하우현 본당 승격’, <가톨릭 시보> 1978년 7월 9일자.
30) 백병근, <하우현 본당>, 9320-9321쪽.
31) “의왕시사” 2 (인물과 문화유산), 177 및 293-295쪽.
32) “의왕시사” 4 (사회와 문화), 457쪽; 하우현 본당 사제관 안내판.
33) ‘엄종환씨, 태풍으로 손상된 수원교구 하우현본당 서루도비꼬 성인상 복원’, <가톨릭 신문>(수원교구 판), 2010년 11월 21일자.
34) ‘수원교구 하우현본당, 국사봉에서 봉헌하는 특별한 동굴 미사’, <가톨릭신문> 2009년 7월 26일자;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 수원교구 하우현본당’, <가톨릭신문> 2012년 3월 4일자.

[교회와 역사, 2012년 12월호,
양인성 대건 안드레아(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파일첨부

2,498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