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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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26-27: 시노달리타스의 과정과 자문 건의투표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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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10-31 ㅣ No.769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 (26) 시노달리타스의 과정과 자문 건의투표권 1

 

 

앞서 살펴본 시노달리타스의 구조인 ‘모든 사람-몇몇 사람-한 사람’을 실제적으로 연결시켜 주는 과정이자 방법론은 바로 ‘자문(諮問)’입니다. 국립 국어원에 따른 ‘자문’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일을 좀 더 효율적이고 바르게 처리하려고 그 방면의 전문가나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기구에 의견을 물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전문가나,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집단’이라는 대상과 ‘효율적인 처리’라는 목적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의 주체(또는 대상)와 그 목적은 사회와는 분명히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가톨릭교회가 지향하는 시노달리타스는 오늘날 일반적인 시민 사회의 민주적 절차에 따른 사회학적 합의의 원리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시노달리타스를 실현하고 그 원리를 설명하는 데에 있어, 사회적 논리와 시각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실제로 시노달리타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문’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도 “결국 누구에게 결정권이 있느냐? 성직자에게만 결정권이 있다면, 자문을 해봐야 소용없는 것 아닌가?” 하는 회의론이 뿌리 깊게 혼재한 현실도 마주합니다. 자문을 ‘결정권이 없는 조언’ 정도의 범위에만 단순히 국한해 놓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시노드적 교회를 위한 자문의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는 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의 언급을 살펴봅니다.

 

“의결 투표와 건의 투표를 구별한다고 해서, (...) 표현된 의견과 투표 결과를 폄하해서는 안 된다. 다만 건의 투표(votum tantum consultivum)라는 표현은, 만일 그것을 여러 형태로 표현되는 사회법의 정신에 따라서만 이해한다면, 위에 언급한 자리에서 제기된 평가와 제안들의 무게를 일컫기에는 부적절하게 된다.”(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합의성, 68항)

 

이처럼 교회에서의 자문은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그렇기에 시노드적이고 교회적인 시각 안에서 해석되어야만 합니다. 단순히 누구에게 결정권이 있느냐의 주도권 논쟁이 아니라, 주인이신 하느님의 뜻을 하느님 백성이 함께 식별한다는 것에 교회의 삶의 방식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시노달리타스의 실현을 위해 다양한 시노드적 기구와 제도의 가치를 회복하려는 시도를 하였음에도 이들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의결권을 가지고 있는 기구들과는 달리, 자문 권한에 ‘제한되었다’ 는 일종의 하급 기구로 한정 지어 버린 인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2023년 10월 29일(가해) 연중 제30주일 춘천주보 2면,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 (27) 시노달리타스의 과정과 자문 건의투표권 2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회의 시노드적 삶의 실현을 위해서, ‘자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했습니다. 단순히 ‘누가 결정하느냐’의 의결권 다툼과 이에 자연스레 귀결되는 ‘교회의 주인이 성직자인가 평신도인가’라는 주도권 논쟁에서 탈피하여, 공의회를 통해 회복한 ‘하느님 백성’의 교회론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삶의 방식으로서의 자문의 고유한 가치를 재성찰하도록 초대하였습니다.

 

“교회의 목자들은 신자들, 특히 평신도들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교회의 선익을 위하여 적절한 방식으로 자문을 구해야 한다”(교회생활에서의 신앙 감각, 120항).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 하느님 백성은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오로지 ‘하느님의 것’으로서 어느 누구도 - 성직자든 수도자든 평신도든 - 교회를 ‘자신의 것’인 양 여겨서는 안 되며, 모두가 함께 ‘백성’으로서 주인이신 ‘하느님’의 뜻을 함께 찾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 노력의 구체적인 방법인 자문의 고유한 의미에 대해 스위스 출신 에우제니오 코레꼬(E.Corecco) 주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에서의 자문은 과정을 통합시키는 부분이며, 여기에서 목자의 신앙을 구속시키는 판단이 흘러나온다. 그러므로 자문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그 어떤 권한에서 소외시키는 방편이 아니라, 오히려 특히 교회에서 공동체의 일치 구조를 이끌어내는 차원에서 강력한 구속력을 지니는 ‘시노드 정신의 참되고 효과적인 수행’이다.”

 

즉, 교회에서의 자문은 단순히 전문가적인 지식을 참고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기도하는 가운데에서 신자 개인의 신앙 감각이 발휘되는 데에서부터 시작하여, 성령의 목소리를 그리고 각 개인으로부터 발휘된 신앙 감각들을 서로 경청하며,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 분석하고 대화하며 나누는 가운데에 신자들의 신앙 감각으로 수렴될 수 있도록 공동으로 식별함으로써 직무적 결정권을 가진 이에게 조언하는 것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시노드의 방법 원리로서의 ‘자문’은 권위주의적 관행이나 민주주의적 관행 사이의 타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모든 신자들의 신앙 감각을 내포하고 있는 원의(vota)를 단순한 숫자들의 합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목자가 주의 깊게 신자들의 의견을 듣는 것은 단순히 과반수와 소수, 찬성과 반대로 양극화된 투표의 숫자, 곧 다수결의 원리에 의한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즉, 자문의 모든 과정들의 의미는 교회 공동체의 선익을 위해 결정을 내리도록 부름받은 사람이 대면한 도전에 대처할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생각과 제안, 의견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2023년 11월 5일(가해) 연중 제31주일 춘천주보 2면, 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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