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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문화 순례: 호남교회사연구소 문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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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10-27 ㅣ No.324

[박물관 문화 순례] 호남교회사연구소 문서고 (1)


천주가사 등 전라도 지방 신앙선조 유산 발굴 보존


 

한국교회 특히 전라도 지역 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는 호남교회사연구소 외부 전경.


전주교구 지역은 한국천주교회 초기부터 신앙선조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때문에 박해 때마다 여러 곳에서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했고, 순교자들과 신앙선조들이 살았던 삶의 자리가 많은 곳에 흩어져 있다. 그런 곳에는 어김없이 신앙선조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는 삶의 자취가 남아 있다. 이는 조상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소중한 신앙 보물들이며 후손들에게 전해줄 자랑스러운 유산이다. 이 유산들을 찾아내고 보존해 후손에게 전해주는 일이 현재 우리가 해야 할 어떤 일보다도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천주교회와 관련된 박물관 순례도 바로 그 마음에서 첫 걸음을 떼어야 할 것이다.

 

호남교회사연구소는 1983년 5월 14일에 설립됐다. 사실은 그보다 훨씬 이전인 1973년부터 천주가사 수집과 연구활동을 하며 교회사 사료 발굴과 정리에 힘쓴 김진소(대건안드레아, 전주교구 원로사제) 신부에 의해 시작된 연구소다. 이 연구소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지방 교회사 특히 전라도 지방의 교회사 정리와 토착화 연구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 목적 하에 교회사 자료 보존과 교구사 간행 및 연구활동, 의식교육 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호남교회사연구소의 산 증인 김진소 신부.

 

 

호남교회사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신앙유산들을 소개하기에 앞서 꼭 소개해야 할 분이 있다. 그분은 교회사 사료수집과 연구에 한평생을 바친 김진소 신부다. 김 신부의 삶과 열정은 신앙유산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과 자세를 일깨워 주며, 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유산의 가치와 의미를 더 빛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김 신부는 광주대건신학교 교수 시절 은사들에게서 두 가지 요청을 받았다. 신학교 도서관장인 정양모 신부는 명색이 김대건 신부의 이름을 따라 대건신학대학이라 했는데 교회사에 관한 자료가 하나도 없다며 한탄했다. 성경을 가르치는 서인석 신부는 외국 서적을 한국말로 번역해서 전달하는 성경 교육을 벗어나 한국인의 생각에 맞는 성경교육이 필요하다면서 김 신부에게 토착화에 대한 연구를 권고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 신부는 맨 먼저 사료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이것이 교회사와 인연을 맺은 시작이었다.

 

그는 자료수집과 옛 공소 답사를 위해 산길과 들길, 자갈길을 마다않고 하루 50여 리는 보통으로 알고 걸어 다녔다. 역사가 깊은 공소는 하나같이 오지에 있었기 때문에, 버스가 가지 않거나 차에서 내려서도 20~30리는 걸어야 하는 곳이 허다했다. 그러다가 놀라운 일을 만났다. 1973년 늦가을 어느 날, 산골 공소의 어떤 가정을 방문했는데, 마침 그 가정이 가을걷이를 끝내고 벽에 도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벽에 바른 초벌 벽지를 보니 붓글씨였다. 그것을 찬찬히 읽어보니 그토록 찾아다니며 얻고자 했던 신앙선조들의 신앙서적이었던 것이다. 그때 참 허전하고 맥이 풀렸다고 한다. “아뿔싸! 하루만 일찍 왔어도 이 책을 얻을 수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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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교회사연구소 내부 문서고 모습. 1973년부터 시작한 천주가사 수집과 연구활동을 통해 교회사 사료 발굴과 정리에 힘쓴 김진소 신부의 땀과 열정이 묻어 있다.

 

 

당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교회 분위기는 신앙조상들이 믿었던 신앙을 별 쓸모없게 여기기까지 했으며, 조상들이 보던 책을 케케묵은 것으로 여기던 풍조였으므로 집에 두어 무엇에 쓰겠느냐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느 집에서는 뒷간 휴지로 쓰거나, 엿장수나 고물장수가 오면 엿이나 강냉이와 바꿔 먹곤 했다. 그렇게 공의회 이후 한동안 구교우 중에는 조상들이 보던 책을 신앙에 도움이 안 되는 책이라고 여기는 풍조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김 신부는 불철주야 자료 수집하는 일에 열정을 다했다. 다행히 당시 교우들 중에는 존경의 대상인 신부가 하고 다니는 행색이 하도 초라하고, 땀에 절어 꾀죄죄하게 생긴 꼴에 끼니마저 굶어가며 산길을 걸어 다니는 것이 측은해서인지 신앙 조상의 유물로 남겨둔 책을 선뜻 내놓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 수확이 있는 날에는 뛸 듯이 기뻤고, 그것으로 피로가 풀렸다고 한다. ‘그래! 쉬지 말고 부지런히 구교우촌과 구교우들을 만나 자료를 수집하자!’, ‘자료를 수집해 놓으면 내가 연구하지 못하더라도 누군가 이 자료를 가지고 연구하는 사람이 나오겠지!’ 생각했고 후대 사람들에게 ‘조상들은 이렇게 살았다’는 사실을 전해 주겠다는 신념에서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돌아다녔다고 한다.

어느 공소에서는 “신부님 오셨어” 하는 소리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김 신부가 있는 곳으로 모여들었다. 교우들이 한 방 가득 옹기종기 모였을 때, 한 자매가 다른 여교우 세례명을 부르며 “신부님 오셨으니까 노래 한 자락 혀!” 하는데, 그 자매가 성호를 긋고 소리를 하는 게 바로 박해시대 교우들이 불렀던 ‘천주가사’였다. 그렇게 해서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던 천주가사를 찾았던 것이다.

신앙선조들의 유산을 수집, 보존하고 연구하는 일에 평생을 바친 김 신부의 공로는 전주교구를 넘어 한국천주교회사에 길이 남을 자랑이다. 그러나 이 일은 김 신부 한 사람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교회 구성원 모두의 의무이자 책임이기에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하는 과업이라 생각한다. 호남교회사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신앙유산을 둘러보며 김진소 신부의 마음과 열정을 읽을 수 있어야만 더 깊이 있는 순례가 될 것이다.

호남교회사연구소는 본래 전시를 목적으로 하는 기관은 아니지만, 교회사 연구자들이나 관심 있는 신자들이 원한다면 소정의 신청 절차를 거쳐 소장 유물을 열람할 수 있다.

※ 문의 010-6689-2070 호남교회사연구소장 이영춘 신부 [가톨릭신문, 2015년 10월 25일, 이영춘 신부(호남교회사연구소장), 사진 호남교회사연구소 제공]

 


[박물관 문화 순례] 호남교회사연구소 문서고 (2)

완덕 위해 동정생활 했던 ‘루갈다 남매’ 사연 절절

 

 

유중철, 이순이 부부가 끝까지 동정서약을 지키는 힘의 원천이었던 십자가와 이순이의 옥중편지. 이 옥중편지에는 지극한 효성과 형제간의 뜨거운 우애, 깊은 신앙이 절절하게 표현돼 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복음의 권고에 따라 완덕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삶이다. 신앙선조들, 특히 순교자들은 완덕으로 나아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 완덕을 이루기 위해 신앙선조들이 일찍부터 동경하던 생활이 있었으니 바로 동정생활이었다. 많은 이들이 동정생활을 선택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모범이 되는 분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동정부부 순교자 복자 유중철(요한)과 복녀 이순이(루갈다)일 것이다.

호남교회사연구소에는 유중철·이순이 부부와 관련된 소중한 유물들이 보존돼 있다.

이순이는 1782년 한양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부모로부터 신앙을 이어받았다. 1793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1795년에는 주문모 신부로부터 첫 영성체를 했는데, 이순이는 첫 영성체를 위해 나흘 동안이나 집 안에 들어앉아 영성체를 위해 준비했다고 한다. 첫 영성체 이후 이순이는 오로지 덕행을 쌓는 데만 마음을 쏟았다. 그리고 천상배필을 위해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15세가 되던 1797년 어느 날, 이순이는 어머니에게 동정을 지키기로 다짐해 왔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어머니는 이 말을 듣고 매우 놀랐지만 딸의 선택을 허락해 주었고, 주문모 신부와 이 문제에 대해 의논했다. 그때 주문모 신부의 기억에 동정생활을 결심한 바 있던 전주의 유중철이 떠올랐다. 1795년 5월, 전라도 전주에 사는 양반으로서 대부호이며 가성직제도 시절 전라도 선교 책임자였던 복자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의 집을 방문했을 때, 유항검의 큰아들 유중철이 아버지와 주문모 신부에게 동정생활에 대한 결심을 고백했던 것이다. 이에 주문모 신부는 하느님의 섭리라고 느껴 즉시 사람을 보내 둘의 혼인을 주선했다.

1798년 9월 이순이는 남편의 고향 전주 초남리로 가서 남편과 함께 시부모 앞에서 동정 서약을 하고 오누이처럼 일생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동정서원을 깨뜨릴 뻔한 유혹도 십여 차례 겪게 되는데, 1800년 12월에는 그 유혹이 너무 심해 모든 것이 끝장나는 듯한 고통을 겪었지만 예수님의 성혈공로(聖血功勞)에 힘입어 이겨낼 수 있었다. 호남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된 이순이의 십자가는 동정부부 서약을 끝까지 지킬 수 있도록 도운 힘의 원천이었다.

1800년 12월, 두 사람은 예수님이 겪으신 광야의 유혹에 부딪혔다. 본능 속에서 잠자던 음욕의 거센 불길이 미친 듯 일어나곤 했던 것이다. 그때마다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고, 가슴은 창에 찔려 열린 채 매달리신 예수님의 크신 은혜, 크신 사랑, 크신 아픔을 우러러보며, 주님을 저 지경에 이르게 한 죄를 뼈가 아프도록 통회하는 눈물을 흘리면서 유혹의 불길을 끌 수 있게 힘을 주시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이 두 사람의 마음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이순이가 평생 지니고 있던 십자가는 그 몸체가 다 닳아 문드러져 있다.

순교 신심과도 연결되는 이순이의 십자가는 1914년 초남리 근처 바우배기에 모셔져 있던 유항검 일가족 묘를 정리해 치명자산으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그런데 이 십자가는 작업하던 인부 중 한 사람이 자신의 주머니에 넣어 몰래 가져가 버리는 바람에 꽁꽁 숨겨졌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그 인부의 가족들이 이 십자가는 자기들 집에 모실 것이 아니라 생각해 호남교회사연구소 초대 소장 김진소 신부에게 기증하면서 교회공동체의 유산으로 소중히 모셔지게 된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동정서약을 지킨 복자 유중철(요한, 왼쪽)과 복녀 이순이(루갈다)의 유해를 모셨던 사발.

 

 

1801년 신유박해가 발생한 지 얼마 안 돼 이순이가 살던 초남리에도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이때 시아버지 유항검이 가장 먼저 체포돼 한양으로 압송돼 갔다. 이어 그녀의 남편 유중철도 체포되면서 전주로 잡혀갔다. 이후 연좌형에 의해 이순이와 나머지 가족들도 그 해 9월 중순 경에 전주로 끌려갔다. 전주로 끌려간 이순이와 가족들의 옥중 생활은 두려움·걱정·고통도 있었지만 순교에 대한 열망이 더 컸기에 모든 잡념이 사라지는 희망의 시간이었다. 이러한 내용이 「루갈다 남매 옥중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옥중편지는 현재도 보존상태가 뛰어나 순교자들의 옥중 생활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중요 유물로 평가된다.

이순이는 옥중에서 옥리들의 눈을 피해가며 완덕으로의 삶의 여정을 정리했다. 주문모 신부는 이순이에게 박해를 당하거든 그 상황을 소상히 기록해 두도록 일러뒀다. 그리하여 이순이는 박해의 자초지종을 적어 시동생 유문석 편에 친정으로 보냈다. 또 친정 어머니에게 유서인 옥중편지를 보냈다. 이순이는 가족들에게 “죽음을 앞둔 사람의 말은 참되다”며 간곡한 유언을 남겼다. 참으로 이 옥중편지 안에는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성과 형제간의 뜨거운 우애, 그리고 깊은 신앙이 절절하고 진솔하게 담겨 있다. 이 옥중편지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순교자들이 쓴 최초의 옥중편지이기도 하다.


1858년 다블뤼 주교는 「한국 주요 순교자 약전」을 쓰고, 1859년부터는 약전에 대한 「보유편」을 작성하던 중 이순이 삼남매의 옥중편지를 발견해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 보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지금은 어느 곳에도 원본이 남아 있지 않다. 다행스럽게도 1868년 울산 장대에서 순교한 김종륜의 필사본이 유일하게 남아 호남교회사연구소에 소장돼 있다. 이 필사본은 김종륜의 손자인 김병옥이 소중하게 보관해 오다가 교회사가인 지원 김구정 선생께 기증한 것인데, 후에 다시 호남교회사연구소에 전해졌다.

한국천주교회 순교역사 안에서 동정부부 순교자 유중철과 이순이 두 분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삶의 표본으로 남겨준 은총이며, 이순이가 몸에 지녔던 십자가와 옥중편지는 그 은총을 증언하고 있다.

※ 문의 010-6689-2070 호남교회사연구소장 이영춘 신부 [가톨릭신문, 2015년 11월 1일, 이영춘 신부(호남교회사연구소장), 사진 호남교회사연구소 제공] 



[박물관 문화 순례] 호남교회사연구소 문서고 (3)

‘구원’ 노래한 천주가사… 선조들 믿음살이 보여


 

천당을 그리워했던 신앙선조들의 삶을 보여주는 천당도. 천당은 후세가 아니라 현세에서 시작된다는 믿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스라엘에는 시편이 있고 한국 천주교회에는 천주가사가 있다. 천주가사는 조선 후기 사회에서 시작되고 성장한 한국교회가 신앙을 섭취하고 소화해 만든 노래다. 지식인 신자들과 성직자들이 일반 신자들, 특히 글을 모르는 신자들의 교리교육과 신앙의 활성화를 위해 만들었다. 그래서 천주가사의 주 교육 대상은 글을 모르는 여성들이었다. 이들이 쉽게 교리와 신앙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도록 내용을 구성했고, 당시의 가사형식(4·4조)을 빌려 작사했다.

노래의 내용이 하느님을 섬기고 영혼의 구원을 갈망하기에 ‘천당 노래’ 또는 ‘천당 강론’이라고도 했다. 어린이들은 5~6세가 되면 할머니나 어머니와 더불어 주요 기도문과 함께 천주가사를 배워 천당을 노래하고 꿈꾸었다. 여인들은 어디서나 천당 노래를 부르며 시련과 고통을 넘어 공포와 죽음을 극복했다.

호남교회사연구소 초대 소장 김진소 신부는 교회사 사료를 수집하면서 평소 신앙선조들이 ‘무엇으로,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이 늘 궁금했는데, 어떤 자료에서도 얻을 수 없었던 답을 바로 ‘천주가사’에서 발견했다고 한다. 신앙선조들은 자신들이 살았던 문화를 총동원해 교리를 이해하고 섭취했으며, 그것을 천주가사에 담았다. 그래서 사료 수집 가운데 특별히 천주가사에 관심을 집중한 것도 천주가사가 박해시대 신자 대중의 생각과 믿음살이를 가장 잘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천주가사는 이 땅에서 하느님의 얼 속을 더듬어 찾는 자들의 발소리요, 한국의 전통 안에서 하느님과 끈질기게 속삭이는 기도요, 이 겨레의 얼을 가지고 하느님의 사랑에 신들린 자들의 노래였던 것이다.

호남교회사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천주가사집에는 표에서 보듯 여러 종류의 필사본들이 있다.

이 중 대표적인 작품은 김지완본의 「사주구령가」일 것이다. 이 가사집은 1850~1860년대의 천주가사집으로서, 1866년 서울에서 순교한 이 암브로시오가 수집, 복사해 놓은 천주가사들을 1917년 그의 손녀사위인 김지완이 전사한 필사본으로, 크기는 21cm×16cm, 분량은 202면이며, 매 면은 16행으로 돼 있다. 「사향가」, 「삼세대의」, 「피악수선가」를 비롯해 총 21편이 수록돼 있는데, 이는 천주가사들 중 중요한 내용의 거의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중 14편은 하느님의 종 최양업 신부의 저작이고 나머지 7편은 저작자가 분명치 않다.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천주가사는 1850년대를 시작으로 1930년대까지 작사된 것이다. 1850년대 천주가사는 대부분 최양업 신부가 지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최양업 신부가 지은 가사로 확실히 인정되는 것은 「사향가」다. 이 노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영원한 본향인 천당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도록 호소하는 경세가(警世歌)의 일종이다. 사향가는 「피악수선가」와 함께 신자들에게 가장 많이 보급된 가사다. 그래서 마치 교과서처럼 다른 천주가사들이 이 가사의 내용을 모방하고 표절해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선종가」와 「7성사가」, 「삼세대의」, 「천당강론」, 「지옥강론」, 「십계강론」 등의 가사도 최양업 신부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천주가사들이 대부분 신앙교육과 교리교육에 그 내용이 집중돼 있지만, 개인의 신앙고백이나 공동체의 경사를 노래한 내용도 여러 편 있다. 그런 천주가사들 중에는 교회사의 중요한 내용들을 알려주는 자료도 있다.

「리별가」는 호남지방의 첫 사제 이내수(아우구스티노) 신부의 동생 이성수(프란치스코)가 쓴 천주가사다. 이내수 신부는 전북 완주에서 태어나 1897년 호남의 첫 사제로 서품을 받았지만 병으로 인해 1900년 전남 무안에서 선종했다. 동생 이성수는 형의 부음을 듣고 찾아갔지만 이미 형이 묘에 묻힌 다음이라 통탄을 하고 집에 돌아와 형이 19세에 신학공부를 위해 떠나는 장면부터 선종하기까지의 일을 199절 천주가사로 표현했다. 이 가사는 이내수 신부의 일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이다.

- 천주가사들 중 중요한 내용의 대부분을 수록하고 있는 김지완본 「사주구령가」.

 

 

복사로서 전라도에서 활동한 아홉 분의 선교사를 모신 박제원(요셉)은 무리한 활동이 원인이 돼 시력을 잃고 소경이 된 후 몇 편의 천주가사를 작사했다. 그 중 「소경탄식가」는 자신이 소경이 된 처지를 읊은 애가(哀歌)다. 그러나 이 가사의 내용은 연약한 애상의 푸념이 아니었고, 육신의 소경이 당하는 고통을 눈물로 부르짖으며 동시에 영혼의 소경 되는 비참함을 경계하는 다짐의 노래였다.

 

천주가사와 함께 천당을 그리워했던 신앙선조들의 삶을 잘 알 수 있는 그림이 있다. 「천당지옥도」다. 이 그림의 작가는 알 수 없다. 19세기 경 중국에서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인물과 복장 등에서 중국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대단히 토착화된 그림이다. 이 그림은 죽은 이들이 각각 천당과 지옥에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선조들은 위령성월이나 상을 당했을 때, 이 그림을 걸어놓고 연도를 드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을 통해 묵상할 수 있는 더 깊은 의미는 신앙선조들에게 있어 천당이란 복자 황일광(시몬)이 고백했던 것처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 문의 010-6689-2070 호남교회사연구소장 이영춘 신부 [가톨릭신문, 2015년 11월 8일, 이영춘 신부(호남교회사연구소장), 사진 호남교회사연구소 제공]

 

 

[박물관 문화 순례] 호남교회사연구소 문서고 (4)

「전라도전교약기」에 드러난 생생한 개항기 교회 실상

 


「젼라도전교약긔」의 구술자인 박제원(요셉, 1854~1935). 박제원은 복사로서 사제 바로 곁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전라도 지역 전교사와 개항기 한국천주교회의 실상을 증언했다.


박해기 이후 한국천주교회는 개항기를 거치면서 내·외부적인 변화를 맞게 됐다. 외부적으로는 청일전쟁 이후 한국을 둘러싼 국제 정세와 정부 정책이 변했고, 내부적으로는 한불수호조약 체결 이후 선교사들에게 전교의 자유가 주어졌다. 병인박해 이후 추진해 오던 교회 재건운동은 결실을 맺어가고 있었다. 이 같은 개항기 한국천주교회에 대한 상황을 잘 알 수 있는 유물로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기록해 놓은 자료들과 관변자료가 있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천주교 신자가 직접 기록한 자료는 드물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젼라도전교약긔」(이하 전교약기)는 신부를 모시고 활동하던 복사가 직접 쓴 최초의 글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이 글은 개항기 전라도 지방에서 복사로 활동한 박제원(朴齊元, 요셉, 1854~1935)이 구술한 전라도 전교사(傳敎史)다. 이 사료는 개항기 전라도 천주교회의 전교사를 다루고 있지만 개항기 한국천주교회의 실상을 알 수 있게 하며, 신부 곁에서 일했던 복사가 직접 구술했다는 점과 다른 기록과 비교해볼 때 연대적으로나 내용 면에서 오기된 사실이 거의 나타나지 않아 가치가 크다.

박제원은 1854년 경상도 거창군 적하면 개화동에서 출생했다. 1885년 박중현(안드레아)의 인도로 전라도 진안 방각리에 와서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죠스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사망하기까지 약 30여 년간 9명의 프랑스 선교사 신부들의 복사로서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했다. 또 수년간 대구에서 명도회 강사로도 선임돼 활동했다. 69세가 되던 해에 시력을 상실했는데, 그 후 주재용 신부의 권유로 전라도전교약기를 구술했고, 몇 편의 천주가사를 작사했다.

 

전교약기는 연구소에 두 권이 소장돼 있다. 모두 한글 고어체로 작성됐는데, 하나는 붓글씨 본이고 다른 하나는 펜글씨 본이다. 붓글씨 본 첫 페이지에는 박요셉(제원)이 저술자로 돼 있고, 필기인은 김베드루(만수)로 적혀 있으며, 필기 시작한 날을 1933년 2월로 적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는 용안 동지산리에서 1933년 3월 14일에 필기를 마친 것으로 돼 있다.

펜글씨 본 첫 페이지에는 박요셉(제원)이 저작자로, 필기자는 박비리버(비리버는 필립보의 옛 표기)로 돼 있으며, 필기 시작한 날을 붓글씨 본과 같이 1933년 2월로 표기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1933년 2월에 필기를 마친 것으로, 1934년 2월 5일에 김 미카엘이 부기(附記)를 한 것으로 돼 있다.


「젼라도전교약긔」 붓글씨 본(왼쪽)과 펜글씨 본. 연대적으로나 내용 면에서 오기된 사실이 거의 나타나지 않아 사료적 가치가 크다.



붓글씨 본은 나바위성당 인근에 살던 박제원 복사의 손자가 소장하고 있던 것을, 펜글씨 본은 전주교구 서정수 신부가 소장하고 있던 것을 호남교회사연구소 초대 소장 김진소 신부가 기증받은 것이다. 두 본의 차이는 붓글씨 본에는 나오지만 펜글씨 본에는 나오지 않는 부분이 몇 군데 있고, 펜글씨 본에 있는 부기가 붓글씨 본에는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내용에서는 거의 차이가 없다.

전교약기 두 본을 종합해 보면, 그 주제는 대략 네 가지다. 첫 번째 주제는, 박제원 자신의 생애에 관한 일이다. 즉 그의 출생과 성장에 대한 내용과 박중현을 만나 전라도로 이주하는 과정, 그리고 세례를 받고 프랑스 신부들의 복사로서 활동하게 된 계기를 밝히고 있다. 박중현은 순교자의 후손으로서 블랑 신부를 도와 교회의 중대사를 도맡았던 인물이었다.

두 번째 주제는, 1885년부터 약 10년간의 내용으로 박해로 인해 침체됐던 전라도 지역 천주교회의 재건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는 특히 당시의 전교활동 모습과 전라도 지역 교우촌의 현황 등을 알 수 있다.

세 번째 주제는, 동학농민운동과 전라도 교회에 관한 내용이다. 이 내용에서는 동학 농민군으로부터 전라도 교회가 어떤 침탈을 당했는지, 또 선교사들이 어떤 피해를 당했는지 알 수 있다.

네 번째 주제는, 전라도 각지의 성당 건립에 관계된 내용이다. 즉 되재성당, 전동성당, 수류 옛 성당, 나바위성당의 설립에 대한 기록들이다. 또 1899년 나바위성당에서 발생한 강경포 교안사건의 발단과 전개과정 그리고 결말에 대한 내용도 알 수 있다.

이 자료에 대해 더 필요한 연구는 한국사와 한국천주교회사의 전체적인 맥락 안에서 사건 하나하나에 대한 사료적 가치를 더 검증해야 하고, 다른 사료들과의 대비를 통해 빠진 부분과 고유한 부분을 분석 보완해 사건들에 대한 종합적인 윤곽이 드러나게 하는 일이다. 이 사료가 개항기 한국사와 한국천주교회사의 내용을 더 풍요롭게 하는 자료로 활용되기를 바란다.

앞서 소개한 자료 외에도 호남교회사연구소에는 중요한 가치를 지닌 자료들이 많이 소장돼 있다. 그중에서도 「성무일력」, 「매일 축일표」, 「첨례표」, 「자책」, 「목판본 주교요지」, 「천주성교공과」, 다수의 천주가사집 등은 다른 곳에서 소장하고 있는 자료들과 비교해 볼 때 특별한 가치가 있다.

※ 문의 010-6689-2070 호남교회사연구소장 이영춘 신부 [가톨릭신문, 2015년 11월 15일, 이영춘 신부(호남교회사연구소장), 사진 호남교회사연구소 제공]

 

 

[박물관 문화 순례] 호남교회사연구소 문서고 (5 · 끝)

中 공산당 박해 맞선 눈물겨운 선교사제의 기록

 

 

중국 지린성당에서 중국 리쉐쏭 주교와 함께한 임복만 신부(왼쪽).


100여 년 가까이 박해를 겪은 한국천주교회는 일제강점기와 분단의 아픔을 겪으면서 또 한 번의 시련을 겪었다. 「둥베이는 말한다」라는 책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중국으로 파견된 한국인 사제 세 분, 즉 김선영 요셉 신부, 임복만 바오로 신부, 양세환 비오 신부의 삶을 감동적으로 전하고 있다. 호남교회사연구소 문서고에는 임복만 신부와 관련된 유품이 다수 소장돼 있다.

임 신부는 1910년 전북 완주군 소양면 화심리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병인박해 때 순교한 일곱 성인이 살던 곳과 가까운 곳이다. 1935년 전주교구 사제로 서품된 후, 나바위본당, 군산본당을 거쳐 1940년 되재본당 주임으로 사목하다가 1942년 만주지역 선교사로 파견됐다. 먼저 길림성 장춘에 가서 교구장 고 주교(프랑스인)의 지도로 중국말을 배운 후, 흑룡강성 해륜현 해북진본당 관할 선목촌 조선인 성당에서 사목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다 1945년 8월 초, 해륜의 구류소로 끌려가게 됐다. 일본은 패망하기 전에 프랑스 신부들과 임 신부를 죽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 일본이 패망하자 풀려나게 돼 선목촌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중국에서 순교자적 삶을 실천한 임복만 신부가 직접 묵주를 만들던 열매들.


그 후 얼마간은 무정부 상태였는데, 비적들이 총을 쏘며 쳐들어오자, 선목촌 신자들이 피난하기 시작했다. 임 신부도 할 수 없이 피난길에 올랐다. 그리고 장춘에서 고 주교를 만났는데, 이 자리에서 고 주교가 임 신부에게 물었다. “지금 해북진과 기타 지방에 조선 교우들이 얼마나 남아 있습니까?”, “흑룡강성만해도 300~400명은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착한 목자로서 불쌍한 양떼를 버리고 갈 수 있습니까?” 임 신부는 이 말에 정신이 번쩍 났다. “예, 그렇습니다. 양들을 위해 남아 있겠습니다.” 그렇게 양들을 위해 남은 것이 길고 긴 고난의 시작이었다.

1946년 공산당이 들어왔고, 토지개혁이 시작됐다. 1947년에는 공산당에 협조할 것인지 아닌지를 가리는 시련의 시간이 닥쳐왔다. 이때 두려움에 떠는 교우들에게 임 신부는 “우리 교우들이여, 놀라지 말고 용감합시다. 천주께서 주시는 보속을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우리는 열심히 기도하며 예수님을 본받아 설혹 죽임을 당하더라도 예수님과 같이 잘 참을 수 있는 인내지덕을 구합시다”라고 격려했다. 얼마 후 임 신부는 교우가 하나도 없는 남쪽 몽고묘 근처로 보내지게 됐는데, 이때도 울며 애통해 하는 노인에게 “노인 어른, 울지 마세요. 눈물을 거두고 용감히 전진합시다. 천주께서 주시는 십자가를 어찌 우리가 피할 수 있겠습니까? 용감한 마음으로 지고 갑시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14처를 지나서야 영광을 누리셨는데, 우리는 작은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아직 1처도 지나지 못했습니다. 할아버지 용기를 내십시오”라며 격려했다고 한다.

- 임복만 신부가 중국에서 사목하며 노트에 필사한 기도문과 성가.


1951년부터는 종교혁신운동이 시작됐다. 혁신운동은 삼자(三自)운동인데, 한마디로 로마 교황청과의 단절을 의미했다. 임 신부는 이를 반대했고 그래서 1962년까지 약 8년간 감옥에서 고초를 겪어야 했다. 감옥에서 나온 뒤로는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져 강제노역에 시달려야 했고, 1963년 농장을 탈출해서는 동포신자 집에서 은신하며 비밀리에 사목해야 했다. 그러다가 1968년 문화혁명이 일어나자 다시 체포돼 갇혀 있다가 1969년에 석방돼 다시 개조농장으로 보내졌다. 이후 1980년 등소평이 집권한 후로 얼마간 종교활동의 자유가 주어졌지만,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 때문에 가톨릭에 대한 감시의 눈을 늦추지 않았던 공안당국은 1983년 73세의 임 신부를 다시 체포해 옥살이를 하게 했다.

전주교구에서는 연락이 끊긴 임 신부의 생사를 몰라 걱정하고 있던 차에,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과 103위 시성식에 참석한 조선족 신자들이 소식을 전해와 생존 사실을 알게 됐다. 이에 여러 차례 귀국할 것을 권유했지만, 임 신부는 양 떼를 두고 갈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러다 1991년 임 신부에게 병환이 생겨 이제는 양 떼를 보살필 수 없고 오히려 폐만 끼치게 됐다고 하며 귀국할 의사를 보였다. 결국 1992년 12월 그리운 고국 땅에 돌아왔고 고국에 돌아온 지 1년 만인 1994년 하느님 품에 안겼다. 향년 86세였다.

장례미사에서 이병호 주교는 “하느님은 임복만 신부님을 통해 한국교회와 전주교구를 위해 살아 있는 순교자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게 해주셨다”며 진복팔단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실천한 분이라고 말했다. 조선시대의 모든 순교자들이 그러했듯 임 신부 역시 순교자의 모범을 따라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는 권력에 반대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순교자의 삶을 산 것이다.

호남교회사연구소에는 임 신부의 소중한 삶의 기록들인 일기장과 편지, 유품 등이 보관되어 있다. 임 신부의 유품은 성베네딕도회 김상진 스테파노 신부를 통해 전해지기도 했다. 이 유품들 중에는 비밀리 사목하기 위해 필사한 기도문과 성가, 손수 만들어 나눠주던 묵주도 있다. 이 유품을 보고 있노라면 박해시대 신자들이 살았던 모습을 그대로 보는 듯하다.

※ 문의 010-6689-2070 호남교회사연구소장 이영춘 신부 [가톨릭신문, 2015년 11월 22일, 이영춘 신부(호남교회사연구소장), 사진 호남교회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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