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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등불이 된 재속 프란치스칸들 (3) 이광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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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4-23 ㅣ No.327

[시대의 등불이 된 재속 프란치스칸들] (3) 이광재 신부


사부 성 프란치스코 길 따라 애덕 실천한 착한 목자

 

 

일제 강점과 해방, 전쟁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대를 살다가 전쟁 중에 순교한 이광재 신부. 사진출처=「주님 제가 갈게요」(도서출판 대희 펴냄)

 

 

8, 15, 41. 세 숫자는 재속 프란치스코회 한국국가형제회 사상 두 번째 사제 회원으로 기록되는 이광재(티모테오, 1909~50) 신부의 삶을 압축해 드러낸다. '8품 신부'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열심했던 신학교 생활, 프란치스코 성인의 모범을 따라 산 착한 목자로서 15년, 41살을 일기로 죽기까지 그리스도를 증거한 순교자로서 삶이었다.

 

 

깊은 산골 소년, 신학생 되다

 

이 신부는 1909년생이다. 경술국치에 1년여 앞서 강원도 이천군 낙양면 내락리(북한 행정구역상 북강원도 판교군 지상리) 냉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만현(가브리엘)씨, 어머니 김 수산나씨 사이 2남 1녀 중 차남이다. 이천에서도 가장 깊은 산골 동네 교우촌에서 태어난 소년 이광재는 특히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신학교에 가기 전 그의 모습을 가장 잘 기억하는 이는 그의 형 이광익(필립보)과 당시 신학생이던 노기남 대주교다. 노 대주교는 방학 때면 고향에 돌아가 소년 이광재와 훗날 '예수 성심의 사도'로 불리게 되는 이재현(요셉, 1909~50?) 신부를 만나 신앙을 이끌었다. 이들이 신학교에 들어간 것도 노 대주교 영향이다.

 

용산 예수성심소신학교에 입학한 신학생 이광재는 소신학교 시절부터 열심을 보여 모범생이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하도 열심이어서 '8품 신부'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수문품과 강경품(독서직), 구마품, 시종품(시종직), 차부제품, 부제품, 사제품 등 7품(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독서직과 시종직, 부제품과 사제품만 남음)을 넘어서는 인격과 신앙적 열심을 갖췄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재미있는 별명이다.

 

그렇지만, 방학 때 고향으로 돌아가면 그는 이튿날부터 밭을 매느라 손과 발, 옷에 온통 풀물이 들 정도로 억척같이 일을 한 착한 아들이다. 부제품을 받을 당시엔 어렸을 적 낫에 다친 왼쪽 검지 탓에 사제가 될 자격이 있는지를 놓고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미사전례 집전에 지장이 없을 것이라는 교수신부들 판정을 받고 부제품을 받는다.

 

마침내 신학과정을 마친 이 부제는 1936년 3월 28일 종현(현 명동)성당에서 당시 서울대목구장 라리보(원형근)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고 '착한 목자'로서 그리스도께 충실한 삶을 시작한다.

 

 

새 신부, 착한 목자로 발을 내딛다

 

새 신부의 첫 부임지는 강원도 횡성 풍수원본당이다. 1936년 4월, 풍수원본당에 부임한 이 신부는 재속 프란치스코회 사제답게 애덕과 봉사, 가난한 이들에 대한 돌봄을 몸으로 실천하는 젊은 사제로 산다.

 

이광재(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신부가 1937년 3월 풍수원본당 회장 피정을 마친 뒤 본당 주임이던 정규하 신부, 본당 및 공소 회장단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출처=「주님 제가 갈게요」(도서출판 대희 펴냄)

 

 

1937년 9월 말 '안토니오'라는 수도명으로 재속 프란치스코회(프란치스코 3회)에 입회한 것은 사제로서 그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다만 지방에서 사목하며 살아야 했기에 그는 '단독회원'으로 활동했다. 회원이 된 이후 줄곧 수도복과 띠를 착용하고 홀로 규칙을 지키며 '작은 자'로서 산 이 신부는 고해성사 때문에 한 달에 한 번은 서울에 들렀는데 그때마다 같은 재속 프란치스코회 사제인 오기선 신부에게 「성화」지를 비롯해 여러 자료를 가져가 보곤 했다. 또 각종 일본어 자료를 번역해 재속 프란치스코회원들에게 제공함으로써 많은 영적 도움을 줬다.

 

3년간 풍수원본당에서 보좌로 산 이 신부의 애덕 실천은 사부 성 프란치스코가 걸어간 길을 따르는 삶이었다. 그래선지 지금까지도 이 신부의 사목 행적이 본당에서 전해져올 정도다.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아무도 모르게 학비를 대준 것은 물론 추위에 떠는 거지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신고 있던 버선을 벗어주는 건 예사였고, 얇은 셔츠만 입고 있는 걸 본 교우들이 정성껏 지어 선물한 명주 바지 저고리를 거지에게 입혀 보내기도 했다. 본당에서 운영하던 초등학교 교실 난로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성당 근처에서 장작을 패기도 했고, 남모르게 학교 화장실 청소도 했을 정도로 철저하게 낮은 자로 겸손하게 살았다. 신자들 사이에선 이 신부를 찾으려면 성당이나 학교 화장실, 병자들의 집으로 가면 된다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이같은 애덕 실천의 밑바탕에는 "예수님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실지 모른다"고 말하던 평소 이 신부의 신앙적 성찰이 깔려 있다.

 

전에도 기도생활, 특히 묵주 기도에 열심이었지만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한 이후로는 시간전례(성무일도)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생활에 힘을 쏟았고 신자들에게도 강력히 권했다. 반세기가 지나도 그를 기억하는 신자들의 회고는 미사 후 감사기도를 드릴 때의 경건했던 모습이다. 특히 날마다 오후 4시에 성체조배를 정례화시켜 신자들의 냉담을 줄였다.

 

 

착한 목자, 전쟁 와중에 끝내 순교하다

 

이 신부는 1939년 4월 춘천지목구가 설정되면서 춘천지목구 양양본당 주임으로 발령받는다. 부임하자마자 이 신부는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성내리 8 현 부지에 새 성전을 신축했으며, 본당뿐 아니라 특히 공소 신자들 사목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걸어서' 인제와 양구, 화천 등지 공소까지 순방하며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게을리하지 않도록 권면했다.

 

이광재(뒷줄) 신부가 1942년 자신이 보좌로 있던 풍수원본당에 찾아왔다가 본당 신자들과 함께했다. 사진출처=「주님 제가 갈게요」(도서출판 대희 펴냄)

 

 

그렇지만 1944년에는 일제에 성당 건물조차 빼앗기고 성당 곁 주택 조그만 방에서 미사 전례를 거행해야 했다. 8ㆍ15해방도 기쁨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3ㆍ8선 이북에 있던 양양본당은 해방되자마자 소련군 감시를 받아야 했다. 처음엔 성당 내 비밀 다락방에서 미사를 봉헌하다가 소련군이 들이닥치자 허물어진 일본인들 빈 집으로 이사를 해야 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이 신부는 자신을 기다리는 신자들을 찾아 공소 순방을 멈추지 않았다.

 

1948년 9월 북한 정권이 들어서면서 3ㆍ8선에서 가장 가까운 본당이던 양양본당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이 신부는 본당 사목 및 공소 순방과 함께 강릉이나 주문진 쪽으로 월남하는 함흥교구 및 덕원대신학교 사제와 수도자, 신학생, 평신도들을 도왔다. 매 순간 목숨을 걸어야 하는 모험이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기도하면서 본당 신자 김봉만(보니파시오)을 안내인으로 15차례에 걸쳐 월남을 성사시켰다.

 

이렇게 본당 사목과 공소 순방, 피란하는 이들을 돕던 이 신부는 1949년 4월에 체포된 백응만(1919~50, 당시 춘천지목구 평강본당 주임) 신부가 1950년 1월 고문과 굶주림으로 평양교화소에서 옥사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에 이 신부는 평강본당 신자들까지 돌보던 중 6ㆍ25전쟁 발발 전날 체포돼 원산교화소 특사감방에 수감된다.

 

이곳에서 김봉식(1913~50, 연길교구) 신부를 만난 이 신부는 김 신부와 서로 라틴어로 고해성사를 주거나 기도를 바치며 감옥생활을 견뎠다. 한 끼니에 겨우 100g, 반 공기 남짓한 조악한 밥과 소금물 국이 전부였던 식사에도 기도생활로 수감을 버티던 이 신부는 그해 10월 9일 원산교화소 뒤 방공호에서 김 신부와 함께 순교한다.

 

원산에 진주한 한국군에 발견된 이 신부 유해는 성 골롬반외방전교회원인 미 해병대 군종사제 머피 신부 주례로 장례미사를 봉헌한 뒤 원산본당 사제관 뒷산 성직자 묘역에 안장됐다. 춘천교구는 2008년 이 신부가 순교한 10월 9일을 '교구 성직자 추모의 날'로 정해 이 신부 등 사제 14명을 기리고 있다.

 

[평화신문, 2011년 2월 27일, 자료 제공=재속 프란치스코회 한국국가형제회, 정리=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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