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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영화 속 복음여행: 송해성 감독의 파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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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4-21 ㅣ No.612

[서석희 신부의 영화 속 복음여행] (6) 송해성 감독의 '파이란'

우리는 삼류라 부르지만 하느님은 사랑이라 하신다


1. 그리스도인들이 영화를 볼 때 갖게 되는 특별한 성향 중 하나가 윤리적 시선과 잣대로만 영화를 보려는 성향이다. 영화에서 욕설이나 폭력, 잔혹한 장면을 보면 심기가 불편해지면서 '저속한 영화'라고 판단하게 되고, 그런 것들이 관객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생각에 그 영화를 '회피'하거나 '경계'하는 태도를 취한다. 이런 태도가 때로는 '영화를 보는 것 자체'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갖게 한다. 이런 태도는 자칫 영화를 영화 자체로 대하지 못하게 하거나 영화가 정작 말하려는 메시지를 놓치게 한다. 나무만 보다가 숲을 못 보는 격이다.
 
그러나 귀에 거슬리게 욕을 하고 '사고'를 치는 장면들과 그렇지 않은 장면들이 모아져서 무슨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지 인내심을 가지고 보면 뜻하지 않은 감동을 얻기도 한다. 송해성 감독의 '파이란'(Failan, 白蘭, 2001)과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Breathless, 2008)가 바로 그런 영화들이다. 이들 영화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욕을 달고 다니며 아무렇게나 폭력을 행사하는 캐릭터들이 나올 뿐 아니라 이들의 행동거지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들 말대로 망가질 대로 망가진 삼류인생의 적나라한 모습이자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는 밑바닥 인생의 막 사는 모습이다. 관객이 보기엔 다소 불편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여느 영화들이 줄 수 없는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과 아픔, 사랑, 그리고 우리가 잊고 살고 외면하는 것들에 대한 진실을 깨우쳐준다. 나아가 영적 성찰까지 이끌어준다. 송해송 감독의 '파이란'의 예를 통해 이런 점을 살펴보자.

 
2. "세상은 날 삼류라 하고 이 여자는 날 사랑이라 한다"는 홍보문구를 내세우며 2001년에 개봉된 '파이란'은, 강백란이라는 중국 여인의 중국말 발음은 많은 관객을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관객 마음속에 잔잔한 여운을 남겨준 영화다. 세상 사람들이 무시하고 꺼려하는 삼류 건달인 '이강재'와 한국에 불법으로 체류하기 위해 이강재와 서류결혼을 하는 중국 여인 '파이란'의 비극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만남을 그리는 이 영화는 홍보를 위해 공개됐던 포스터와 달리 그 두 남녀가 살아 생전 한 번도 마주치지 않고 사랑의 교감을 이룬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너무 늦어버린 사랑에 통곡하는 이강재.
 

"이 편지를 강재씨가 보시리라 확신이 없어 부치지 않습니다. 이 편지를 보신다면 저를 봐주러 오셨군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나는…죽습니다.… 너무나 잠시였지만 강재씨의 친절 고맙습니다. 강재씨에 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보고 있는 사이에 강재씨 좋아하게 됐습니다. 좋아하게 되자, 힘들게 됐습니다. 혼자라는 게 너무나 힘들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당신은 항상 웃고 있습니다. 여기 사람들 모두 친절하지만 강재씨가 가장 친절합니다. 나와 결혼해 주셨으니까요. 강재씨, 내가 죽으면 만나러 와 주실래요? 만약 만난다면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당신의 아내로 죽는다는 것 괜찮습니까? 응석 부려서 죄송합니다. 제 부탁은 이것뿐입니다. 강재씨,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 아무것도 없어서 죄송합니다. 세상 어느 누구보다 사랑하는 강재씨…안녕….”

기억에도 없었던 '결혼''아내''파이란'이란 말을 혼란스럽게 떠올리다가 그제야 그는 몇 년 전 돈 몇 푼 때문에 얼굴도 보지 않고 자신의 사진을 브로커에게 주고 위장결혼을 해준 어느 중국 여인에게서 온 편지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분'이고, '유일하게 사랑하는 분'이라는 그 여인의 편지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쓴 편지였고, 그의 시신을 확인하라는 안내장과 동시에 온 것이었다. 결국 시신을 확인하러 떠난 길에서 이강재는 중국 여인 파이란의 맹목적이고도 순수한 사랑과 믿음을 뒤늦게 확인하고 자기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는 내용이다.

파이란의 영정사진.

 
세상 그 누구도 자기 존재가치를 인정해 준 적이 없었는데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여자가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아무 생각 없이 던져준 자신의 사진에서 희망과 위안을 얻고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런 파이란을 만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통곡하면서도 이강재는 한편으로 이제는 자신이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와 내일에 대한 희망을 보게 된다. 결국 그것 때문에 조직에서 죽음을 당하지만 한 사람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머금었기에 '이제 죽어도 아쉽지 않을' 그의 죽음이 평온하게 이어진다.
 
다른 한편,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피붙이 하나 없는 타국에서 갈 곳 없이 방황하는 파이란에게 강재의 존재는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었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책상 위에 놓인 붉은 목도리를 두르고 활짝 웃는 강재의 사진을 보며 하루의 피로를 풀어버리고 혹시 그가 오게 될지 몰라 칫솔을 두 개 준비하는 파이란. 보이지 않는 한 사람에 대한 맹목적 의지는 바보 같아 보이지만 파이란에겐 삶을 지탱해주는 사랑이었다.

"당신 덕분에 여기서 일할 수 있습니다. 결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 친절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가장 친절합니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보고 있는 사이, 당신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말하지만 파이란에겐 그리움과 사랑의 대상이 돼주었기에 이강재는 결코 쓸모없는 인간이 아님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아무리 사람 같아 보이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그에게도 사랑이 있고, 희망이 있고, 따스함이 있다는 것을 영화 '파이란'은 잔잔하게 그러나 진한 감동으로 전해주는 것이다.
 

3. 영화 '파이란'에서 서류상 부부인 이강재와 파이란은 생전에는 만나지 못한다. 이 영화는 파이란이 직업소개소를 전전하다 마지막으로 강원도 어느 바닷가 세탁소에서 일하다 죽자 이강재가 그곳을 찾아가 장례를 치르기까지 장소를 옮겨가면서 찍는 전형적 '로드무비(road movie)' 형식이다. 이 여행 중에 강재는 파이란과의 교감을 통해 점차적으로 변하게 되고, 돌아와서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파이란의 편지.
 

무엇보다도 너무 늦어버린 만남과 자신을 향한 파이란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두고 통곡하는 강재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파이란에게서, 자기 자신에게서 정작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순간, 그 소중한 것이 사라져 버렸다는 아쉬움은 이탈리아 영화감독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La Strada, 1954)의 마지막 장면을 생각하게 한다. 잠파소(안소니 퀸)가 자신에게 젤소미나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닫고 흐느끼는 그 장면 말이다.
 
또 파이란이 추운 겨울날에 옷들을 큰 통에 담고 맨발로 빨래하는 광경과 햇살이 눈부신 겨울날 깨끗해진 새하얀 옷들을 빨랫줄에 너는 파이란의 모습은 이국에서 온 이 여성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불행한 현실과 결코 친절하지 않은 사람들을 모두 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미학적 상징으로 보여준다. 마치 20세기 대표적 종교화가였던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의 판화집 제목 「의인은 향나무처럼 치는 도끼에 향기를 묻힌다」처럼, 파이란은 그가 만나는 친절하지 않는 현실과 무례한 사람들을 자신의 삶의 향기로 정화시키며 마침내 이강재까지도 새로운 삶으로 이끈 것이다.
 

4. "세상은 날 삼류라 하고 이 여자는 날 사랑이라 한다." '파이란'이란 영화의 주제를 함축하는 이 문구는 더 이상 변화 가능성을 인정하거나 개선 기회를 주지 않은 채 쉽게 판단하고 단정해 독선으로 끝을 내려버리는 우리 태도를 성찰하게 한다. 영화는 흔히 나와는 다른 존재로 여겨 저만치 마음 밖으로 밀어내 버린 존재들, '더 이상 가망 없는 한심하고도 지루한 인간들'이라고 사형선고를 내린 제외된 인간들, 그 어떤 개선의 여지도 허용하지 않고 밀쳐내 버리는 그런 이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도전적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삼류라고 하는 그들', 그들을 하느님은 사랑이라고 하신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시선이요,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도 변하지 않는 우리의 옹골지고도 모진 독선을 일깨우는 하느님 자비이다. 그런데 하느님 시선은 잔잔하면서도 강하게 우리의 가슴을 내리치면서 우리 마음을 따스하게 한다.

"우리는 자꾸 그들을 삼류라 하고, 하느님은 그들을 사랑이라고 하신다."

[평화신문, 2012년 4월 15일, 서석희 신부(전주교구, 서강대 영상대학원 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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