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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ㅣ기타

커피, 구마식을 거쳐 우리의 음료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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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8-10 ㅣ No.320

[세상 속의 교회읽기] 커피, 구마식을 거쳐 우리의 음료가 되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커피를 일상의 음료로 마신다. 더울 때는 더운 대로, 추울 때는 추운 대로 커피는 날씨에 맞춰 사람들의 입맛을 충족시켜 준다. 최근의 보도를 보면,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하루에 소비되는 커피가 자그마치 20억 잔이 넘는다고 한다. 한동안 차(茶)가 인류의 음료로서 절대 입지를 자랑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젠 아니다. 누군가가 1700년 이후 영어로 쓰인 책에서 ‘커피’와 ‘차’가 언급된 횟수를 비교하는 조사를 했다. 이 조사에 따르면, 차가 250년 넘게 우위를 지켜 왔으나 1960년대 후반부터는 커피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었다고 한다. 특히나 2000년대 이후로는 그 격차가 더욱 벌어진 상태다.

커피의 역사는 9세기에(혹은 6세기에) 양들이 커피콩을 먹는 것을 목부들이 눈여겨본 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들을 통해 이슬람교의 수도승들이 커피에 각성 효과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커피를 고통을 극복하고 졸음을 깨우며 정신을 맑게 해 주는 신비의 음료로, 수도생활에 유용한 약으로 널리 사용하게 되었다. 그들이 마침내 커피콩 재배법을 터득하게 되었고, 그 뒤로 커피는 이슬람 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이내 대중화되었다.

이슬람 제국은 1500년경까지 커피콩 재배를 철저히 독점하며, 커피콩 종자의 유출을 막기 위해 엄격히 관리했다. 외부인의 커피콩 농장 방문은 당연히 금지되었고, 커피콩을 불가피하게 유출해야 할 때는 종자가 싹을 틔우지 못하도록 찌거나 구워서 내보냈다. 그러나 수도승 한 사람이 커피콩 씨앗을 몰래 유출했고, 그로써 커피는 널리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악마의 음료’가 ‘그리스도교 음료’로

흔히들 커피가 유럽에 전해진 것은 17세기 초에 이탈리아 베니스의 상인들이 아랍의 무역상들에게서 전해 받은 데서 비롯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무렵에는 유럽의 여러 지역들이 이슬람 국가들의 침공을 받았다. 그러니 다른 지역에도 이슬람 군대를 통해 커피가 전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오스만 투르크의 군대와 전쟁을 하던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 비인에도 투르크인들을 통해 커피가 유입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어렵사리(?) 유럽에 소개된 커피는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이 시기는 유럽 역사에서 꽤나 혼란스럽던 때였다. 그 백 년쯤 전인 16세기 초부터 종교 혁명(개혁)이 일어나기 시작해서 개신교회들이 가톨릭교회에서 떨어져나가던 시절이었다. 또한 르네상스라는 문예사조가 막바지에 이른 시점이었다. 가톨릭교회로서는 밖으로는 이슬람교 세력의 도전에, 안으로는 교회 분열론자들과 인본주의자들의 도발에 대응하느라 벅차던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이른바 ‘아랍의 음료’인 커피가 유럽에 들어온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톨릭교회의 열성적인 성직자들과 교회 관리들은 이슬람교의 음료인 커피가 그리스도교 사회인 유럽에 들어와서 유행하는 세태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는 이미 수백 년에 걸쳐 서로 적대시해 오던 사이가 아닌가. 그러니 이러한 세태에 맞서 커피를 ‘신앙심 없는 자들의 음료’요 ‘악마의 음료’라고 비난하고 단죄하며 커피 음용이 금지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래서 당시 교황인 클레멘스 8세(1592-1605년 재위)에게 커피의 유통과 소비를 강력하게 제재해 줄 것을 탄원하였다.

그들의 주장은 이러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성찬례를 비롯한 거룩한 성사들과 의식들 그리고 행사들에서 술(포도주)가 그 핵심 요소 중 하나로 널리 쓰인다. 그런데 이슬람교에서는 술을 마실 수 없어서 그를 대체할 수 있는 음료로서 커피를 발달시켰다. 그러니 커피는 그리스도교적이지도 않고 교회적이지도 않으며 신성 모독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회 지역에서는 커피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교황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측근들의 요청대로 커피의 유통과 소비를 제재할 것인지 아니면 말 것인지를 결정하는 데에 신중을 기했다. 자신이 직접 커피를 마셔 보지 않고서 어떤 조치를 취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교황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이내 커피를 좋아하게 되었다. 정작 교황이 커피의 향기와 맛에 매료되고 만 것이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교황은 “이 악마의 음료라는 것은 감미롭기 그지없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이 커피를 마실 수 있게 하기 위해 이 음료에서 악마를 쫓아내기로 했다. 그리고 구마(驅魔) 의식을 거행하여 ‘악마의 음료’인 커피에서 악마를 쫓아낸 다음, 커피를 그리스도인이 마셔도 되는 훌륭한 ‘그리스도교 음료’로 선포했다.

이를 계기로 커피는 유럽에서 자유로이 유통되고 소비될 수 있게 허용되었다. 전해 오는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에 따르면, 교황의 허용 조치 덕분에 커피는 급속하게 유럽 전역으로, 그리고 마침내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서 대중의 음료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 120여 년 전쯤인 19세기 말에는 머나먼 극동의 작은 나라 조선의 황제(고종)도 그 맛을 좋아하여 ‘양탕국’(“서양에서 들어온 국물”이란 뜻)이라 이름 지어 부르며 즐겨 마시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 하나 더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의 수도 빈이 오스만 투르크의 군대에 포위되어 있던 어느 날, 한 제빵 기술자가 밀가루를 가지러 창고에 갔다가 우연히 투르크 군대의 공격 개시 계획을 들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오스트리아 군대에 알렸다. 그리하여 투르크 군대를 물리칠 수 있게 되었다(1683년). 그 후 빈의 제빵 기술자들은 승리를 기념하여 투르크 군대의 상징인 반달을 본떠서 초승달 모양의 빵인 크루아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흔히들 크루아상이 프랑스의 빵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를 거쳐서 프랑스까지 전해진 것이다.

또한 제빵 기술자들은 오스만 투르크 군대가 남기고 간 낯선 콩(커피콩)을 가지고 다른 실험을 했다. 그 콩을 잘게 간 다음에 그것에 뜨거운 물을 붓고 그 위에 우유를 첨가해 보았다. 그랬더니 콩의 갈색과 우유의 흰색의 조화가 뛰어날 뿐더러 풍미도 뛰어나서 훌륭한 음료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생긴 음료가 ‘카푸치노’다.

이 음료가 이런 이름을 갖게 된 데는 마르코 다비아노(1631?1699년)라는 카푸친 수도회의 수도승이 한 몫을 했다. 2003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된 다비아노 신부는 생전에 십자가를 들고 축복을 내리며 유럽 대륙을 누볐다. 당연히 투르크 군대의 격퇴와 빈의 해방을 위해서도 기도를 많이 바쳤다.

제빵 기술자들은 새로 개발한 음료의 갈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모습을 보며 갈색 수도복 차림에 흰색 수염이 멋들어졌던 한 수도승을 떠올렸다. 그 노고와 정성과 공로를 기억하며 참으로 고맙게 여기던 카푸친회의 수도승 다비아노 신부였다. 그리하여 이 커피에는 카푸치노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5년 8월호, 이석규 베드로(CBCK 교리교육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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