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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천주교와 정감록(鄭鑑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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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0-29 ㅣ No.464

한국교회사연구소 2011 하반기 공개대학 지상중계 - 천주교와 정감록 (상)


새 세상 갈망하는 민중들의 '희망'

 

 

- 이장우(아우구스티노,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박사.

 

 

18세기에서 19세기 말에 조선 후기 민간에선 예언서가 크게 성행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정감록(鄭鑑錄)」이다. 여러 비기(秘記)를 한데 모은 이 책은 참위설(讖緯說)과 풍수지리설, 도교사상 등이 섞였다.

 

보통 「감결(鑑訣)」을 비롯해 「동국역대기수본궁음양결(東國歷代氣數本宮陰陽訣」, 「역대왕도본궁수(歷代王都本宮數)」 등 역대 비기를 통칭해 「정감록」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감결」만 「정감록」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원본이나 저자도 알 수 없는데다 오랜 세월을 거쳐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동안 다양한 이본이 생겨 그 종류가 40~50종에 이른다. 또한 일각에선 책 이름이라기보다는 말세 예언을 추종하는 민간 신앙으로 보기도 한다.

 

「정감록」이라는 존재가 공식기록을 통해 최초로 확인되는 것은 1782년(정조 6년)에 역모사건에 연루된 문인방이 심문 과정에서 「정감록」을 언급한 게 최초다. 비록 비현실적 도참설이나 풍수술에서 비롯된 예언이긴 하지만, 당시 절망의 나락에 빠져들던 일부 지식인과 하층민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실제로 조선 말기 반체제 운동에서 거의 빠짐없이 정감록 예언이 거론되기도 했다. 또 이 책 예언에 따라 조선 후기는 물론 일제강점기 3ㆍ1운동 이후에도 가족들을 데리고 자연재해나 전쟁이 발생해도 안심하고 살 수 있다는 소위 '십승지지(十勝之地)'를 찾아나서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엄밀하게 보면 천주교와 정감록은 비교 대상이 아니다. 또 천주교와 정감록은 종교ㆍ철학적 기반이 서로 달랐다. 천주교가 서구에서 1000년이 넘게 계승 발전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신학적 기반 위에 서 있다면, 정감록은 풍수지리나 음양오행설을 비롯한 동양 고대의 다양한 철학적 요소를 혼합한 것이어서 그 토대가 단편적이고 산만했을 뿐 아니라 체계적이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정감록은 민간에서 널리 유행했고 종교적,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일부 계층에선 정감록의 예언을 근거로 비밀결사체를 조직해 반란을 꾀할 정도였다.

 

천주교가 일종의 종교적 이상세계를 추구했다면, 정감록은 조선왕조를 대체할 새로운 왕조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면서도 천주교와 정감록은 같은 시기, 즉 '조선 후기'에 전국으로 확산돼 나갔다. 따라서 이 과정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었다.

 

전주대 사학과 주명준 교수는 순교자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의 이복동생 유관검(세례명은 알려져 있지 않음)의 경우를 예로 들어 일부 천주교 신자들은 입교 뒤에도 계속해서 정감록을 신봉했을 뿐 아니라 선교에 이용한 흔적도 뚜렷하다고 주장했다. 그런가하면 호남교회사연구소장 김진소 신부는 정감록의 유행이 당시 유행한 미륵하생(彌勒下生)신앙과 직결돼 있었다고 추정하고, 미륵신앙이라고 하는 재래의 종교적 풍토에 힘입어 서구의 외래 종교인 천주교가 쉽게 정착할 수 있었다고 짐작했다.

 

실제로 천주교의 말세론이 정감록의 내용에 변화를 초래했다고 판단할 만한 요소가 발견된다. 그런가 하면 일부 천주교 신자들은 정감록을 모방해 「니벽젼」이라는 일종의 천주교 예언서를 만들었다고 추정해 볼만한 단서도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천주교의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정감록에 '청의(靑衣)'라는 표현이 등장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이 청의라는 표현은 푸른 옷을 입은 이방인이라는 개념으로, 정감록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만일 처음부터 서양인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와 조직적 전교활동을 펼쳤다면 정감록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수용했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 당시 천주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대부분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교리교육을 받지 못했고, 현실적 처지 또한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이 무렵 천주교 조직과 신앙생활도 체계적이지도, 조직적이지도 않았다.

 

그러했기에 신자들 중 일부는 자신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이라면, 정감록과 같은 것도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물론 천주교 교리에 명백하게 위배된다고 판단할 경우에는 그러하지 않았을 것은 자명하다. [평화신문, 2011년 10월 23일, 정리=오세택 기자]

 

 

한국교회사연구소 2011 하반기 공개대학 - 천주교와 정감록 (하)


정감록, 천주교 말세론 영향 받아

 

 

천주교는 왜 박해 속에서도 확산될 수 있었을까? 천주교는 우주 만물의 주재자인 하느님이 인간을 포함해 모든 것을 창조했다고 봤고, 그런 점에서 천주교 가르침이 유교와 불교, 도교 등 기존 가치와 충돌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러한 대립과 충돌은 '조상제사' 문제로 천주교에 대한 본격적 박해를 초래했고, 천주교도는 '임금도 몰라보고 아비도 몰라보는(無君無父)' 사악한 인간들로 간주됐다.

 

그럼에도 천주교는 계속해서 널리 퍼져나갔다. 그 이유는 아마도 당시 사람들이 천주교 교리에서 새로운 희망의 불씨를 봤기에 그러하지 않았나 여겨진다.

 

천주교 말세관과 구원관은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이 「주교요지」를 저술하면서 조선 사회에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천지창조설을 비롯해 부활한 예수가 세상을 구원한다는 내용, 말세에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 많은 관심을 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현실에 비판적이던 일부 지식인들과 절망의 나락에 빠져들던 하층민들은 천주교 교리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런데 「정감록」과 같은 조선 후기 예언서에도 천주교 말세관을 연상시키는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정감록」의 원본으로 간주되는 「감결」에도 "신년(申年) 봄 3월과 성세(聖歲) 가을 8월 한밤중에 인천과 부평 사이에 배 1000척이 정박하고, 안성과 죽산 사이에 시체가 산처럼 쌓일 것이다.…"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이런 예언은 유관검(세례명 미상)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 내용을 장차 서양 선박이 올 징조라고 하면서 만일 조선이 통상을 거부할 경우 '일장판결(一場判決)'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감결」에서 "시체가 산처럼 쌓일 것"이라거나 "피가 흘러 내를 이루리라"고 한 것은 천주교에서 말하는 말세와 비슷하다. 따라서 「정감록」에 묘사된 말세에 대한 참혹한 내용은 당시 조선 사회에서 확산되던 천주교 말세론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정감록」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증산교에선 천주교로부터 받은 영향이 훨씬 더 명백하게 나타난다. 교주 강일순은 조선에서 출생하기 전에 로마 교황청 꼭대기에 오랫동안 머물렀다고 했으며, 중국에 마테오 리치 신부를 보내 선교하게 한 장본인도 강일순 자신이라고 했다. 또 강일순이 장차 건설하게 될 '후천'은 인간들이 죗값을 치른 다음에 온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18세기 이후에 등장한 「정감록」과 이를 신봉한 사람들은 천주교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이는 「정감록」 가운데 전염병과 굶주림, 전란, 자연재해 등 말세를 알려주는 징조가 먼저 나타나고 뒤따라 새로운 이상세계가 열린다는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감록」이 천주교에 끼친 영향도 없지 않다. 「니벽전」은 1846년(헌종 12년) 정학술의 꿈에 천상선인 이벽(요한 세례자)이 나타나 그에게 우주창조의 원리와 인류 조상이 낙원에서 추방된 이유, 예수 구원과 같은 천주교 핵심 교리를 설명하면서 유교와 불교, 도교의 오류를 지적하고, 조상에 대한 제사와 우상숭배의 그릇됨을 비판했다고 한다.

 

이어 이벽은 정학술에게 「천주밀험기(天主密驗記)」라는 예언서를 주고 나서 하늘나라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이는 거듭된 박해를 겪으면서 천주교 신자들 가운데 미래 희망을 주는 예언서가 등장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반영하는 대목이다.

 

이 책 필사자는 '뎡 아오스딩'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흔히 정약종(아우구스티노)으로 간주되고 있다. 말하자면 이 책은 이벽과 정약종이라는 초기 천주교회를 대표하는 두 인물의 이름을 빌려 예언서로서 「니벽전」의 권위를 확보하고자 했던 것이다.

 

「니벽전」은 여러모로 「정감록」과 비슷하다. 두 책이 모두 정감과 이벽이라는 주인공을 제목에 내세웠고,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대화체 서술방식을 이용해 기술한다. 또 「니벽전」은 「정감록」과 마찬가지로 말세 환란을 겪고 나면 새 세상을 맞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비록 「정감록」은 새 왕조의 개창이라는 정치적 변화를 강조했던 데 견줘 「니벽전」은 지상천국이 실현될 것을 예언했지만, 두 책 모두 예언한 미래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니벽전」은 천주교의 「정감록」이라고 할 수 있다. [평화신문, 2011년 10월 30일, 정리=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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