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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문화 순례: 한국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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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7-18 ㅣ No.318

[박물관 문화 순례] 한국교회사연구소 (상)


한국 천주교회 역사 자료의 보고(寶庫)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사본.


한국교회사연구소(이하 연구소)는 1964년 8월 17일 한국교회의 발전에 대한 역사적인 고찰과 그 지식을 보급하며 교회사와 관련된 자료 수집과 정리를 위한 목적으로 설립됐다. 설립자는 고 최석우(안드레아) 몬시뇰이다. 최 몬시뇰과 함께 연구소 설립을 위해 큰 역할을 하신 분은 지금도 연구소 고문으로 있는 이원순(에우세비오) 교수다.

연구소는 교회사와 관련된 중요, 희귀 유물들을 다수 소장한 고문서고를 갖추고 있어 박물관 기능도 수행한다. 다만 일반적인 박물관과 달리 연구와 보존 기능에 초점이 맞춰진 만큼 유물의 열람과 관람에는 제한이 따른다.

본 연구소의 시작은 설립자인 최 몬시뇰이 1964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최 몬시뇰은 파리외방전교회 창설 300주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는 행사를 계획하게 됐다. 이는 파리외방전교회가 한국교회를 건설하고 복음 전파에 노력한 것에 감사하는 취지로 이뤄진 일이었다. 그는 교회사 자료 전시회를 개최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고, 이를 당시 한양대학교 사학과 교수였던 이원순 교수와 상의했다. 최 몬시뇰과 이 교수는 1950년대 소신학교에서 같이 교편을 잡은 것을 계기로 이미 친분을 갖고 있었다.

제6대 조선교구장 리델(F.C. Ridel, 李福明, 1830~1884) 주교가 지은 한불자전.


그런데 이 교수는 “전시회도 좋지만 이 기회에 교회사연구소를 창립하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이 교수는 연구자들의 연구 지원, 국내외의 자료수집 및 보관, 연구회 개최와 학술지 발간, 외국의 교회사 연구기관과의 교류 등을 위해 연구소 설립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최 몬시뇰도 이전부터 연구기관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므로 이 교수의 제안에 적극 공감하고, 연구소의 설립을 추진한 것이다.

설립 당시 본 연구소는 가톨릭대학교 구내에 있는 옛 가르멜 수녀원 건물(현 혜화동 주교관)을 사용했다. 1967년 절두산 성지로 이전했고 이 후 합정동과 명동 가톨릭회관을 거쳐 현재의 저동 평화빌딩에 자리를 잡았다.

본 연구소는 설립 이래 한국 교회사의 연구, 관련 자료의 수집과 정리, 교회사의 대중화와 순교자 현양, 가톨릭 문화 발전을 위한 출판활동을 전개해 왔다. 연구 분야에서는 매년 개최하는 연구 발표회와 심포지엄이 주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 성과들은 「교회사연구」라는 본 연구소 발행 연구 잡지를 통해 다양한 교회사 논문들이 발표되고 있다.

이러한 연구 활동과 함께 교회사 자료 수집과 정리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파리외방전교회, 로마 교황청,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 독일 베네딕도회 등으로부터 수집된 많은 문서들을 보관하고 있다. 특히 1만3000여 건에 이르는 ‘뮈텔문서’는 한국 교회사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사 연구에 있어서도 귀중한 자료다. 이러한 작업은 우선 설립자인 최 몬시뇰이 유럽에서 수집해 놓은 자료들을 본 연구소로 모으는 작업부터 시작됐다. 이 자료들은 최 몬시뇰이 유학 시절에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 파리 외방전교회 등을 수시로 방문해 수집한 것들이다. 그리고 가톨릭대학교 신관 건물 3층에 있었던 자료들도 연구소로 옮겼다.

이렇게 시작된 본 연구소의 자료 수집 과정에서 ‘조선 전도’ 발견(1978), 황사영 ‘백서’의 원본 확인(1983),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 사본 입수(1979·1998) 등과 같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수집된 자료들은 영인본과 역주본 형태로 간행됐는데 「벽위편」(闢衛編, 1977), 「벽위신편」(闢衛新編, 1990) 등과 같은 희귀 한문자료와 「신명초행」(1986)·「성경직해」(1986)·「경향신문」(1978)·「기해·병오박해 순교자 증언록」(2004)·「불한사전」(2004) 등과 같은 교리서·성서·잡지·신문·증언록·사전 등이 ‘교회사 연구 자료집’으로 영인됐다. 그리고 달레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상·중·하)(1979~1980)·「리델문서」Ⅰ(1994)·「뮈텔 주교 일기」(1986~2002) 등이 역주본으로 간행됐다.

이처럼 자료 수집에 힘쓴 결과, 연구소는 1966년 당시, 2000여 권의 한글 및 한문 서적, 1000여 권의 서양 서적, 5000여 페이지의 마이크로필름 등을 소장하게 됐다.

한편 연구소에서는 전문적인 연구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 교회사와 교회 문화를 알리고 교육하는 작업도 병행해 왔다. 1964년 8월 28일부터 창립 기념전으로 ‘한국 교회사 사료 전시회’를 개최한 것이 그 작업의 시작이다. 전시품은 총 204점이었는데 서적이 172점으로 가장 많았고 서화 17점, 유물 15점 등이었다. 1975년 8월에 시작된 ‘한국 교회사 강습회’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본당·학교·단체 등에 교회사 관련 사진, 형구, 고서 등을 대여하는 형태로 진행됐다. 또한 교육의 경우 ‘한국 가톨릭 문화 강좌’, ‘공개대학’, ‘교회사 초청 강연회’ 등 다양한 형태의 강좌들을 개설해 신자들의 교회사 지식을 높이는 역할을 해왔다. 특히 2000년대 들어 ‘한국 교회사 연구 동인회’의 활동이 더욱 활성화됨에 따라 ‘동인회 공개강좌’를 매년 실시하고 있으며, 정기적인 성지순례를 통해 신자들의 신심 함양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 2004년 4월 6일 황사영의 7대손인 황세환(요셉)씨가 한국교회사연구소에 기증한 황사영의 토시가 담긴 청화 백자합.

※ 문의 02-756-1691 한국교회사연구소 [가톨릭신문, 2015년 7월 19일, 심욱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 부소장), 사진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박물관 문화 순례] 한국교회사연구소 (중)

뮈텔 주교 문서에 담긴 초기 선교사들의 사목 애환

 

 

만주 봉천 프랑스 영사가 작성한 유해 통관확인서 봉투.


한국교회사연구소가 수집한 여러 자료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G.-C.-M. Mutel, 閔德孝) 주교의 문서다. 이는 본 연구소가 교회사 자료를 수집·정리해 나가던 중 입수한 자료로서, 뮈텔 주교의 문서들은 그가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1877년부터 사망하는 1933년까지 작성된 것들이었다. 문서들은 뮈텔 주교가 생전에 교회 내의 문서와 교회 밖의 문서로 구분해 연도별로 정리한 뒤, 한지로 포장해 100여 개의 종이 상자에 보관하고 있었다.

본래 이 문서 상자들은 주교 집무실에 있었으나, 뮈텔 주교의 사후에 유품들과 함께 주교관 지하실로 옮겨져 보관됐다. 지하실에 보관돼 관심을 받지 못하던 이 문서들은 본 연구소 설립자인 최석우 몬시뇰에 의해 빛을 보게 됐다. 1965년(혹은 1966년), 최 몬시뇰은 서울 명동 주교관 지하실에서 문서 상자를 발견했고, 서울대교구의 허락을 얻어 연구소로 이관했다.

이 문서는 총 1만3451건에 달했는데, 지방에서 사목하는 신부들이 뮈텔 주교에게 보낸 서한과 보고서가 가장 많았다. 그리고 초대장, 명함, 전보, 안내장 등과 같이 희귀한 자료들도 잘 보존돼 있었다.

최 몬시뇰은 이 문서가 교회사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사 연구의 주요 사료라고 판단했다. 그는 이 자료에 대해 이원순(에우세비오) 교수(현 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에게 알렸고, 이 교수는 학계에서도 이 문서를 이용할 수 있도록 일단 정리 작업부터 서둘러 진행할 것을 제안했다. 그래서 최 몬시뇰과 이 교수는 우선 이 문서에 ‘뮈텔 문서’라는 이름을 붙이고 1967년 3월부터 정리 작업을 시작했다. 최 몬시뇰과 이 교수는 ‘뮈텔 문서’를 크게 동양어(東文)와 서양어(歐文)로 분류했다.

동문은 1287건인데 반해 구문은 1만2164건으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동문은 이 교수가, 구문은 최 몬시뇰이 각각 담당했고, 이들 외에 소신학교 교사 이병영(李丙泳)·김명철(金明哲)과 가톨릭대학 교회사연구회(회장 조광) 신학생들이 도움을 주었다. 동문은 구문에 비해 적었기 때문에 정리 작업이 빠르게 진행돼 1968년 8월에 내용 파악을 마쳤고, 10월에 분석 카드 작성도 끝냈다. 이 교수는 일단 동문 문서의 분석 결과를 한국사연구회 학술지인 「한국사연구」 3집(1969. 4.)에 ‘미공개 사료 Mutel 문서’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이에 반해 구문 문서의 정리 작업은 더디게 진행됐다. 문서의 양이 너무 많았고, 프랑스어·라틴어·독일어·영어 등 사용 언어도 복잡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프랑스인 특유의 서체에, 굵직한 펜글씨로 작성됐기 때문에 판독조차도 어려웠다. 이렇게 곤란한 상황에서 다행히도 작은 자매회 프랑스인 수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1970년대 후반부터는 파리 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 펠리스(P.M. Pelisse, 裵世榮) 신부가 문서를 판독하고, 타이핑 작업도 해주는 등 정리 작업에 큰 도움을 주었다. 연구소는 이처럼 협조자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뮈텔 문서’의 정리 작업을 계속 진행했다.

이러한 ‘뮈텔 문서’ 중 소개하고자 하는 자료는 초대 조선대목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의 천묘(遷墓, 묘를 옮김)와 관련된 자료들이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5년 10월 조선입국을 위해 만주의 마가자(馬架子)에 도착했다가 병을 얻어 사망했다. 그 후 1931년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이 되는 해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서울대목구에서는 지역 공의회를 비롯한 행사들을 기획했다. 그중 하나가 지역 공의회를 전후해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를 조선으로 옮겨오기로 한 일이다.

이에 라리보 주교(서울대목구 부주교)는 몽골 동부대목구장 아벨 주교에게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를 서울대목구로 옮기기를 부탁하는 편지를 보냄으로써 그 작업이 시작됐다. 당시 유해 발굴 현장에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는 파견되지 않았지만, 아벨 주교의 지시에 따라 마가자 지역의 사목을 담당하고 있던 중국인 사제들이 1931년 9월 4일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를 발굴했다.

 

이렇게 발굴된 유해는 만주의 금주, 봉천 등지를 거쳐서 열차편으로 이송됐다. 그런데 같은 해 9월 18일에 일본이 만주에서 개시한 군사행동(만주사변)으로 인해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 이송 계획에 차질이 생겼고, 주교의 유해는 9월 24일 오전 10시 경에야 서울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10월 15일 종현성당(현 명동성당)에서 뮈텔 대주교와 라리보 주교는 대례 연미사를 올렸으며, 사도예절을 마친 후에 자동차 상여를 이용해 용산 삼호정의 성직자 묘역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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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봉천 프랑스 영사가 쓴 브뤼기에르 주교 유해 통관확인서(1931. 09. 18.).

 

 

이러한 과정에서 남겨진 기록들이 본 연구소에 소장돼 있다. 먼저 라리보 주교가 몽골 동부대목구장인 아벨 주교에게 보낸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를 조선으로 옮기는 것을 부탁하는 내용의 편지다. 그리고 만주에서부터 서울까지 이송하는 과정에서 받은 만주의 금주(金州) 천주당 신부가 작성한 유해 통관확인서와 봉천 프랑스 영사가 쓴 유해 통관확인서도 남아 있다. 이런 문서들에서 드러나는 노력을 통해 결국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는 유해로나마 꿈에 그리던 조선 땅에 도착할 수 있었다.

※ 문의 02-756-1691 한국교회사연구소 [가톨릭신문, 2015년 7월 26일, 심욱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 부소장), 사진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박물관 문화 순례] 한국교회사연구소 (하)

격동기 뮈텔 주교가 남긴 ‘선교’ 흔적들 생생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된 뮈텔 문서에는 서한 외에도 신문기사, 전보, 유인물, 안내장(초청장), 명함 등도 있다. 이와 같은 방대한 문서는 한 개인이 수집한 최대의 문서라는 의미를 지닌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국내외 정세 및 중요 인물들과 관계돼 있어 한국 천주교회사는 물론이고 개항기와 일제 강점기 한국사 연구에 유용한 자료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이중에서도 특별히 관심을 끄는 것은 명함이다. 한국교회사연구소에 2권의 파일로 보관 중이며 123종이 현재 연대순으로 정리돼 있다. 이 명함들은 뮈텔 주교가 한국에 체류하던 48년 중 주교가 되던 1890년 이후 1933년 사망하기까지 약 43년 동안 그가 직접, 간접으로 접촉하던 모든 국내외 인사들을 망라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공적, 사적으로 만났는지 알 수 있다.

뮈텔 주교가 명함을 주고받은 인물들은 주로 외국인들이다. 하지만 한국인들의 명함도 찾을 수 있다. 남아 있는 자료에 따르면 외국인들의 명함 수가 한국인들의 것보다 3배가 훨씬 넘는다. 교구장으로 부임한 초기부터 뮈텔 주교는 무엇보다도 조선 교회가 하루 빨리 완전한 선교의 자유를 획득하는 것을 최고의 당면 과제로 삼고 선교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따라서 그가 명함을 받았던, 다시 말해 교제했던 사람들은 선교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필요한 사람들이었고 그 중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외국인들을 제외하면 그 나머지는 조선의 양반, 관료들이었다. 이렇게 뮈텔 주교가 보관하다 현존하는 한국인의 명함 중 가장 초기의 것은 1895년 경의 것이며, 가장 나중의 것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대체로 뮈텔 주교가 대주교로 임명된 1926년을 전후한 시기까지 명함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한국인으로 궁내부대신 이재순, 덕원군수 팽한주, 한성판윤 이채연, 외국인으로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 벨기에 영사 뱅카르 등이었다.

명함을 주고받을수록 뮈텔 주교의 조선에서의 영향력이 점점 커져갔다. 1895년 이후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면서 조선에 대한 침략적 야심을 드러낸 일본과 러시아 두 제국 사이에서 자주독립을 위해 도움을 바라고 있던 고종과 측근 관료들은 프랑스 제국의 영향력 있는 인사로 뮈텔 주교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뮈텔 주교는 1898년 5월 종현성당(현 명동성당) 축성식을 맞이해 국내외의 많은 인사들을 초청했음을 초대장과 초대된 외국인 명단을 통해 알 수 있다. 특히 그는 축성식에서 조선 황제의 도움에 대해서 언급했다. 1898년 5월 29일 뮈텔 주교 일기에 이렇게 기술돼 있다.

“나는 또 이 대성당이 입증하듯이 조선에서의 우리의 상황이 근본적으로 변한 것이 황제 폐하의 호의에서 온 것임을 간단히 조선말로 말하고 황제 폐하를 위해 건배하고 ‘만셰 만셰 만만셰’를 불렀다. 한성 판윤 이채연은 한불조약으로 시작된 마음의 일치가 조선과 외국 사이에서 언제나 있은 우호 관계에 의해 지속되기를 기원한다고 간단한 답사를 하고, 우호 관계의 지속을 위해 축배를 들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조선 정부는 천주교 신앙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대신 선교사들의 존재와 그들의 포교활동을 알고도 묵인해 줬다. 하지만 조선을 위협하는 주변 국가들의 움직임을 느낀 조선 정부는 프랑스 세력의 도움을 받기 위한 생각으로 뮈텔 주교를 찾게 됐고, 이에 따라 프랑스 선교사들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종현성당 축성식에 초대된 인사들의 숫자는 뮈텔 일기에 의하면 모두 75명이다. 외국인이 30명, 조선인이 45명인데 외국인의 경우에는 콜랭 드 플랑시 주한 프랑스 공사를 비롯한 각국의 외교 사절들과 조선 정부에 고용된 기술자나 고문들이었고 조선인들은 대부분 조정의 대신들과 지방의 고급관리들이었다. 따라서 종현성당의 축성은 한국 천주교회사적으로 중요할 뿐 아니라 당시 조선의 정치·사회사적인 면에서도 상당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종교적, 사회적 행사였다.

종현성당 축성식 자료에서 알 수 있듯 뮈텔 주교를 통해 모여진 여러 자료들은 천주교회사에 한정되지 않고 당시 조선사회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그리고 이렇게 자료를 소개하면서 필자 역시 그동안 막연하게 역사책에 서술된 딱딱한 문장으로만 접했던 사건들이 조금은 생생하게 느껴진다.


뮈텔 문서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우리 조상들이 남긴 조각조각의 흔적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을 통해 과거의 사건들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도 찾아가는 명동성당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가 순례하는 신앙 선조들의 흔적들을 통해서 기억되고 체험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연구소 소장 유물 중 뮈텔 주교가 보관했던 자료들에 대해 살펴봤다. 이 자료들은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연구소 설립자 고 최석우 몬시뇰이 발견하고 정리한 것들로서 자료의 훼손을 막기 위해 일반 자료들과는 별도로 보관하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소의 귀중자료들은 반드시 소장의 허가를 얻은 후 열람할 수 있다.

 



 
서울 명동성당 주교관 난간에 기대 선 뮈텔 주교의 모습.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으로 추정된다.

※ 문의 02-756-1691 한국교회사연구소 [가톨릭신문, 2015년 8월 2일, 심욱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 부소장), 사진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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