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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문화 순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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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5-18 ㅣ No.315

[박물관 문화 순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역사박물관 (상)

 

한국교회 첫 수녀들의 선교활동 모습 선명

 

 

한국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제1대 원장 자카리아 수녀의 일기.

 

 

서울 명동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역사박물관(이하 샬트르 박물관)은 수녀회의 역사자료를 수집, 연구, 보존, 전시하기 위해 설립된 종교전문 박물관이다. 수도회의 기원과 역사를 배우고 바라보고 기억함을 통해 수도회의 영성과 사명을 새롭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한국의 첫 수녀회로 한국 사회 안에서 복음의 증거자로 살아온 수녀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역사적 유물과 사료는 신앙과 사랑의 숨결로 이 시대에 빛의 증거자가 돼 우리를 비추고 있다.

샬트르 박물관은 수녀원 본원 내 위치하고 있으며 신자 및 일반인에게 모두 개방하고 있다. 관람 전 전화 예약이 필요하고 개관 시간은 오전 10시~11시30분, 오후 1시30분~4시30분.(화요일과 성삼일 및 공휴일은 휴관)

샬트르 박물관 유물 중 가장 먼저 소개할 것은 「자카리아 수녀의 일기」다. 이 일기는 한국의 첫 선교 수녀로서 한국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제1대 원장이었던 자카리아 수녀(1843~1889)가 1888년 5월 31일 프랑스 샬트르를 떠나 상하이에 이르기까지 두 달 간의 여정을 기록한 수도회의 소중한 영적 자산이다.

 

-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입국한 선교 수녀들의 짐상자. ‘도쿄를 거쳐 한국 서울’이라고 적혀 있다.

 

 

자카리아 수녀는 1888년 5월 31일자 일기에서 “사랑하는 수녀원 문을 마지막 나오면서, 또한 어렸을 때부터 당신 보호의 망토로 나를 감싸주시고, 내 사랑하는 성소의 인도자이시고 수호자이신 성모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렸을 때 느꼈던, 마음 찢어지는 아픔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라고 기록했다. 이 같은 인간적인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일기의 곳곳에 적은 ‘A.M.D.G.’(Ad Majorem Dei Gloriam,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로 보아 하느님만을 신뢰하며 그분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제물포까지 모두 배로 이동하느라 극심한 멀미로 인한 고통과 성사생활을 하지 못하는 영적인 괴로움 속에서도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만으로 모든 것을 견뎌내는 선교사의 정신을 읽어낼 수 있다.

그는 이 땅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며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불타는 사랑을 증거하다 겨우 6개월 만에 과로와 병으로 46세에 선종해 한국교회 안에서 수도회의 초석이 됐다. 그의 이 여행일기는 2008년 「조선에 온 첫 선교 수녀 자카리아의 여행일기」라는 제목으로 간행됐다.

 

-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역사박물관에 소장된 1890년 경 풍금.

 

 

자카리아 수녀의 사진은 「조선에 온 첫 선교 수녀 자카리아의 여행일기」 간행을 준비하던 중, 프랑스 공사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의 사랑이야기가 담긴 신경숙 작가의 소설 「리진」(2007)을 통해 우연히 발견됐다. 작가 후기에 자료조사 도중 선교 수녀들의 사진을 보았다는 언급이 있었고, 그에 따라 프랑스국립도서관(BNF)과 동양어대학 도서관에 소장돼 있던 선교 수녀들과 관련된 사진을 찾을 수 있었다.

사진은 콜랭이 자카리아 원장 수녀와 에스텔 수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운영하던 종현보육원 보모 및 여아들을 1888년 11월 14일 찍어 개인 사진첩에 보관한 것이었다. 현존하는 종현보육원의 가장 오래된 사진으로 한국교회의 초창기 사회복지 사도직을 증거하며 한편으로 초대 원장 자카리아 수녀를 유일하게 만날 수 있는 사진이기도 하다. 선교 수녀들이 조선에 도착한 지 불과 3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시기에 찍은 것으로 말도 채 배우지 못한 아이들부터 열댓 살 아이들의 정돈된 머리 모양과 옷 가짐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조선말과 풍습에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부모를 잃은 설움에 가득 찬 아이들을 돌보려 애썼던 수녀들과 그에 발맞춰간 보모들의 노력을 보여준다.

샬트르 박물관의 또 하나의 대표적 유물로 수녀원 초대 지도신부였던 코스트 신부가 프랑스 신학교 교수로 있던 뮈텔 신부(후에 주교)에게 부탁해 1890년 경 받은 풍금이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풍금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합창단이라 볼 수 있는 종현보육원 원생들이 이 풍금으로 서양 전례음악을 익혔고 명동성당 미사와 성체강복식 등 주요 전례 때 그레고리안 성가를 아름답게 불렀다. 또한 교구의 주요 행사 때에도 중요한 몫을 해냈다. 수녀들은 고아원 내에서 소녀 성가대 혹은 소년 성가대를 별도 조직했고,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는 나이가 어린 소녀들로만 구성해 성가를 부르게 했다. 수녀들의 지도로 아이들은 어려운 성가들을 꽤 정확히 목청껏 부르며 하느님을 찬미했다. 듣는 이들로 하여금 더욱 큰 감동을 자아낸 이 성가대는 한편으로는 고아들의 영적인 성장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고 수녀들에게도 큰 보람이었다. 재미난 사실은 프랑스에서 보낸 풍금의 제작은 미국에서 이뤄졌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프랑스에서 풍금을 제작할 수 없어서 모두 수입했다고 한다.

 
- 박물관 전경.


※ 문의 02-3706-3255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역사 박물관 [가톨릭신문, 2015년 5월 17일, 유민영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역사 박물관 학예사), 사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역사박물관 제공]

 

 

[박물관 문화 순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역사박물관 (중)

닳고 닳은 서원 묵주에 배인 복음삼덕(福音三德) 자취

 

 

- 한국인 첫 수도자 김해겸 쌘뽈 수녀가 평생 사용한 재단용 가위.

 

 

조선에 처음으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선교 수녀들이 도착한 지 일주일만인 1888년 7월 29일 15~17세의 조선인 처녀 5명이 수녀회에 입회했다. 이들은 수도자에 대한 아무 지식도 없이 오직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며 일생을 바치고자 하는 열의만으로 수도생활을 결심하고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선교 수녀들의 입국 이전부터 블랑 주교가 열심한 교우 가정에서 바른 지향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처녀들을 눈여겨보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교회의 격려와 지지 속에서 수녀원을 찾은 첫 지원자들 중 3명은 안타깝게 첫 서원 전에 선종했다. 당시 전염병의 확산과 영양부족으로 인한 결과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김해겸 쌘뽈 수녀와 박황월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수녀만은 오랜 세월 수도회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남아 수도자로서의 삶을 감사히 봉헌할 수 있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까지 수녀들이 서원 후 수도복에 달고 다녔던 묵주. 평생 몸에 지니고 다니며 매만져 예수의 형체가 매우 닳아있다.

 

 

김 수녀는 1963년 4월 14일, 75년간의 수도생활을 마치고 92세로 선종했는데 그는 1931년 연길지방에서 성 베네딕도 수녀회 수녀들을 지도하러 가 있던 6개월을 제외하고는 일생 본원에서 제의 만드는 일을 했다. 김 수녀가 사용하던 가위는 김 수녀의 수도 여정에 늘 함께했던 재단용 가위다. 항상 몸에도 작은 가위를 지니고 다니며 일거리가 있는 곳 어디에서든 익숙한 손동작에 하느님을 향한 마음을 담았던 그는 평상시 조용하고 차분한 모습으로 내적 생활을 깊이 해 가며 후배들의 좋은 표양이 됐다.

 

무남독녀였던 그가 입회할 때 어여쁜 꽃가마를 타고 왔는데, 수도생활을 하면서 때로 집에 가고 싶었지만 집에 가는 길을 몰라 나갈 수 없었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다고 한다. 그가 평생 사용한 가위는 이제 세월이 지나 빛이 바랬지만 사는 장소나 하는 일에 얽매이지 않고 단순하게 꾸준히 하느님을 섬겼던 그의 일생은 하느님 안에서 여전히 빛나고 있다.

 

한국인 첫 수도자인 박황월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수녀가 임종 직전까지 사용했던 대나무 지팡이.

 

 

박 수녀는 1966년 3월 18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고통받는 것은 이 세상뿐입니다. 모든 고통을 받아들여 잘 참고, 이 세상 사람들을 위해 사랑의 기도를 바칩시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96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그는 입회한 지 1년 만에 프랑스어를 익혔으므로 선교 수녀들과 수련자들 사이의 통역자로서 수도원 내 의사소통과 교육에 있어 훌륭한 역할을 해냈다. 그리고 몇 년간 제물포 수녀원에 파견됐고 본원에서는 주방일, 프랑스어 통번역 일을 하며 수도회와 동행했다.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집안의 딸로서 강직한 성품을 지닌 그는 어렸을 때 여러 신자들의 순교 행적을 증언한 아버지 박순집 베드로의 등에 업혀 박해자들로부터 피난 다니다가 발을 다쳐 평생 고생했다. 그가 임종 직전까지 사용했던 대나무 지팡이는 올곧게 하느님만을 향해 나아갔던 그의 생애를 대변한다. 다른 좋은 지팡이를 가져다줘도 한사코 거절하며 이 지팡이만을 사용하길 고집했다는 이야기 역시 그가 꼿꼿하게 지켜간 수도 정신을 보여준다.

조선인 첫 수녀들에 이어 많은 수도자들이 양성됐고, 그들은 한국 땅 곳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신비를 증거했는데 그들이 입었던 수도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배라는 신원을 확실히 드러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까지 수녀들은 간소화된 현재의 수도복 대신 ‘고복’(苦服, 고통의 옷)이라 불렸던 수도복을 입고 지금의 베일과는 사뭇 다른 코르넷을 착용했다. 박 수녀와 김 수녀의 사진에서 초창기 수도복을 관찰할 수 있다. 어깨를 감싸는 흰 천의 세 주름은 정결, 가난, 순명의 복음 삼덕을 상징한다. 이러한 의미를 담은 수도복은 착용하기에는 불편해 활동에 많은 제약을 주었지만 봉헌 생활에 수반되는 희생을 아낌없이 바치도록 도왔다.

한편 당시 수도복에는 수녀들이 직접 만든 묵주를 달았다. 첫 서원 때 묵주 한 줄을 달고 종신 서원 때는 약혼반지를 상징하는 둥근 고리에 묵주 한 줄을 더했다. 기숙학교에서는 묵주 두 줄이 서로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학생들에게 사감 수녀의 존재를 알렸기 때문에, 수녀들은 시찰 때 묵주를 치마폭에 감싸고 살그머니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도 아직 종신 서원을 하지 않은 수녀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현재 수녀들의 유품으로 전해지는 서원 묵주를 자세히 보면 묵주에 달린 십자가의 예수님이 매우 닳아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눈, 코, 입 그리고 몸 전체의 윤곽이 모두 지워져 있다. 이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지하는 마음으로 평생 몸에 지니고 매만지며 기도한 흔적이다. 비록 세상에 이름을 남기지 않은 수도자로 생을 마감했어도, 그들이 남긴 낡은 묵주와 십자가는 때론 고통의 눈물과 기쁨의 미소를 나누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했던 삶의 향기를 전해준다.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수도생활을 한 박황월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수녀(왼쪽)와 김해겸 쌘뽈 수녀.


※ 문의 02-3706-3255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역사박물관 [가톨릭신문, 2015년 5월 24일, 유민영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역사박물관 학예사), 사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역사박물관 제공]

 

 

[박물관 문화 순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역사박물관 (하)

‘죽음의 행진(6·25 전쟁 중 포로들의 강제 행진)’까지 지녔던 수도원 열쇠 꾸러미

 

 

베아트릭스 수녀의 유품인 수녀원 열쇠 7개 꾸러미.

 

 

1888년 조선 진출 이후 일본관구에 소속돼 있던 한국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1948년 정식으로 한국관구로 승격됐다. 한국관구의 첫 관구장 베아트릭스 수녀(Beatrix de Marie Odouard, 1874~1950)는 자애롭고 슬기로운 모습으로 많은 수녀들의 존경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기 위해 늘 고군분투하면서 수녀들의 모범이 됐는데 신발 안에 콩 세알을 넣고 다니며 십자가의 길을 걸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일치하기를 원했다.

 

1950년 7월 17일에 으제니 수녀와 함께 피랍돼 11월 3일 ‘죽음의 행진’(6·25 전쟁 중인 1950년 10월 31일~11월 17일 사이에 700여 명의 미국인 포로들과 외교관들 그리고 성직자, 수도자를 포함한 민간인 포로들이 만포와 고산을 지나 중강진까지 이르는 길, 한국에서 가장 험악한 지역인 압록강변의 산길을 가로질러 추위와 눈보라 속을 걸었던 280㎞의 강제 행진) 중에 순교하기까지 주님에 대한 열정과 수도회에 대한 애정을 아끼지 않았던 그의 삶의 단편을 1944년 성 바오로 회심 축일에 발표한 글 ‘열심자들이 천상모후께 한 달 동안 바치는 덕행’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본문에서 그는 하루 온종일 각 행실마다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고 사랑하는 뜻으로 열심히 행하는 신심의 덕에서 시작해 애덕과 기쁨, 진심의 덕행을 매일 실천하도록 권고했다. 매일 행해야 할 덕행 한 가지와 그에 대한 설명이 본문을 이루고 전체 글에 덧붙여진 서한도 남겨져 있다.

황해도 수녀 학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강 마리 레지스 수녀가 쓴 5년간의 공산 치하 체험 수기.


서한에서 베아트릭스 수녀는 성녀가 되기 위한 방법은 수도회 규칙을 잘 지키는 것이며 규칙은 집의 담벼락처럼 수녀들을 보호하는 장벽이라고 표현했다. 또한 “한국의 수녀들에게 그들의 규칙을 잘 지키라고,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규칙을 잘 지키라고 말해 주세요”라고 유언했다. 이는 ‘규칙’의 특별한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예수를 진정 사랑한다면 삶의 실천이 따라야 하므로 매일 수도회의 규칙을 잘 지키며 덕행을 실천하는 것이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성덕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었다.

후배 수녀들의 증언을 통해 ‘열심자들이 천상모후께 한 달 동안 바치는 덕행’에 담긴 내용은 실제로 그가 온전히 살아낸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항상 미소를 짓고 따뜻한 사랑으로 환자와 고아, 동생 수녀들을 돌보고 늘 기도하면서 모든 덕행의 모범을 보였다. 어느 날 관구장으로서 수련원에 방문했을 때 수련장이 앉던 의자를 양보하자 손사래 치며 발판을 끌어다 앉는 겸손함을 드러냈다. 매일 그렇게 일상의 자리에서 성덕을 닦아 예수님을 닮아갔던 그는 마침내 전쟁 중 순교로 자기 봉헌의 절정의 순간을 맞았다. 그가 죽음의 행진 때까지 지녔던 유품으로 열쇠 꾸러미가 있다. 수녀원 곳곳의 열쇠 7개에는 관구장으로서 전 회원을 보살피며 살림을 도맡았던 손때가 묻어 있고 또 최선의 복음삼덕을 살았던 수도 정신이 배어있다.

한국에서 선교사로 일하다 1950년 11월 3일 ‘죽음의 행진’ 도중 순교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한국관구의 첫 관구장 베아트릭스 수녀.


6·25 전쟁 당시 순교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원들은 프랑스인 베아트릭스 수녀 외에 한국인으로 김정자 안젤라 수녀(1888~1950)와 김정숙 마리안나 수녀(1903~1950)가 있다. 해방 이후 공산군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김 안젤라, 김 마리안나, 강양자 마리 레지스 수녀는 황해도 매화동본당에 남아 있었다. 종교인에 대한 탄압이 심했던 공산 치하에서 그들은 인민들에게 끌려 나와 잔인한 죽음을 맞이하는데, 강 마리 레지스 수녀(1913~1989)만이 기적적으로 생존해 공산 치하 5년간의 체험 수기를 남겨 두 수녀의 순교 사실을 증언해주었다.

공산화 과정에서 수도자로 남는다는 것이 어떤 고통과 죽음의 순간을 가져왔는지 아주 자세하고 생생한 문체로 기록하고 있고, 북한 교우촌의 한 곳인 매화(?花, ‘로사리오’의 한자식 표기)동 지역의 생활상과 신앙 공동체의 삶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중요한 가치가 있다.

이 수기를 통해 당시 신자들이 신부, 수녀들과 협심해 인민군이 납품하라고 제시한 물량을 채우기 위해 새벽 3시에 주일미사를 봉헌하고 일한 사실, 본당 주임 이여구 마티아(1897~1950?) 신부가 납치돼 갈 때의 상황과 목자를 잃고 두려움에 떨며 성체 모독을 막기 위해 감실의 성체를 수녀들이 나누어 영했던 사실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결국은 수도복을 벗고 사복으로 갈아입어야 했던 수녀들의 참담함과 매일 수녀를 죽이겠다는 소식에도 하느님만을 믿고 의지하며 생사의 갈림길에서 지내야 했던 심정 그러나 그리스도께 봉헌된 이로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수녀들을 죽이려 찾아온 이들 앞에서도 결코 물러나지 않았던 그들의 신앙과 형제적 사랑의 위대함을 느끼게 된다.

현재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근·현대 신앙의 증인으로 6·25 전쟁 때 순교한 ‘하느님의 종’ 베아트릭스 수녀, 김정자 안젤라 수녀, 김정숙 마리안나 수녀의 시복을 추진하고 있다.

 
황해도 매화동본당의 첫 영성체 사진. 왼쪽부터 강양자 마리 레지스 수녀, 김정자 안젤라 수녀, 김정숙 마리안나 수녀.

 

※ 문의 02-3706-3255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역사박물관 [가톨릭신문, 2015년 5월 31일, 유민영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역사박물관 학예사), 사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역사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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