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4일 (토)
(백) 부활 제5주간 토요일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하느님의 직무태만? 하느님의 속수무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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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규 [mugeoul] 쪽지 캡슐

2001-03-07 ㅣ No.215

  이 세상에 가득한 고통과 불행 그리고 죄악들을 보며 누가 탄식하듯 "하느님의 직무태만이다"라고 했다. 즉 전능하신 그분께서 마음만 먹으면 온갖 좋지 못한 것쯤이야 순식간에 깡그리 없애실 수도 있을 텐데 이렇게 내버려두심은 결국 그분의 게으름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하느님께선 에덴 동산에서 아담으로 하여금 모든 생물들에게 이름을 짓도록 하셨던 그날 이후 그 모든 걸 사람의 몫으로 남겨 놓으셨다는 것이다. 그것의 극적인 표현은 구세주로 오신 하느님의 외아들마저도 사람의 모습을 취하셨다는 사실이다. 이 땅에 오신 그분께선 철저히 사람의 길을 걸으셨고 또한 그 길을 통해서만 구원사업을 펼쳐 나가셨다. 그로부터 구원의 길은 오직 사람이다. 아무리 고통스럽고 피하고만 싶어져도 오직 구원은 ’사람의 길’로서만 가능하니, 누구일지라도 ’세상에 빛을’ 가져다주려면 우선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간존엄성의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그날 아담이 각 생물에게 사랑의 관심을 보이며 이름을 지어 주자 비로소 모든 생물들이 고유의 특성을 드러낸 것처럼 그렇게 모두의 구원 역시도 인간의 그러한 사랑의 눈길 곧 생명의 봉인을 떼는 일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그럼 ’생명의 봉인(封印)’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인간이 하느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자기완성의 길(구원)을 가로막는 모든 것이다. 그런데 모두는 각자가 지니고 있는 그 봉인의 굴레에 짓눌린 채 해방을 고대하며 신음하고 있으니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봉인을 떼어 주는 해방자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고유의 ’이름’이 온전히 그대로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진실로 모두가 ’자기 이름’을 깨달아 알고 ’자기 이름’대로 살며 ’자기 이름’으로 참 길을 발견함으로써 구원받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참된 의미요 유일한 내용은 바로 이것이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 어린 사랑의 눈길을 보낼 때 비로소 인간은 구원의 길로 들어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달리 말해 다른 아무로부터도 그러한 눈길이 닿지 않는 한 하느님도 속수무책일 따름이다. 아담이 그날 지녔던 눈길과 손길 그런 지극한 사랑의 관심이 일단 닿아 생명의 봉인이 떼어진 다음에야 비로소 하느님의 권능도 활성화되면서 한 인간 안에서 구원의 역사가 펼쳐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네가 불러 주기 전에 나는 너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는 시인 김춘수씨의 ’꽃’이라는 시의 내용 그대로이다.

  그럴진대 하물며 그 봉인이 떼어지지 못하도록 막거나 훼방 놓는 짓이란 더 말할 나위도 없는 큰 죄악이라 아니할 수 없다. 죄란 궁극적으로 생명을 거스르는 짓으로서 그것은 결국 모든 생명을 키우고 살리는 성령에 반하는 것이 되니 따라서 ’성령을 거슬러 범한 죄만큼은 용서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만큼 악성을 품고 있는 까닭이다. 사실 성령은 너무나도 깊게 생명과 결합되어져 있는 까닭에 생명을 죽이는 모든 것은 성령을 죽이는 것이 되고 동시에 생명을 살리는 모든 것은 성령을 살리는 것이 된다. 죽은 아벨의 피 속에서 전율하시면서 마치 갇힌 자처럼 울부짖으셨던 하느님은 지금도 ’해방을 고대하며 신음하고 있는’ 모든 생명들 속에 함께 하시며 그들의 음색(音色)으로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탄식하시며’ 신음하고 계신다. 그 하느님께서 모든 피조물과 함께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시니, 하느님의 자녀란 에덴의 인간 곧 아담이다. 만물의 영장으로서 각 생물마다에 이름까지 지어 주며 모두를 살리는 하느님의 창조사업의 훌륭한 일꾼이었던 인간, 온누리에다 하느님의 뜻을 등불처럼 환하게 밝혀 주었던 인간, 그 인간이 교만과 탐욕으로 눈이 멀면서 냉담해지자 기어인 서로 서로를 죽이는 존재로까지 타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럼 서로가 서로의 완성을 위한 거들짝으로 창조된 인간이 오히려 서로가 서로를 죄짓게 하는 존재로 타락된 이 고통스런 상황을 타파하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오직 서로가 서로의 고통을, 십자가를 지는 사랑의 마음으로 안으며 ’구원의 거들짝’이 되어 주는 것이다. 그럴 때 십자가의 처절한 고통에서 향그런 부활의 빛을 보게 될 것이다. 참으로 부활은 십자가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한 마리 나비를 탄생시키기 위해 번데기가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죽어 가듯 그분은 우리 모두를 위해 십자가 위에 매달려 돌아가셨다. 하지만 거기 새로운 존재로의 변형이 일어나고 있었으니, 십자가상의 그분의 격심한 몸부림이야말로 부활을 향한 해산의 고통이었다. 그분이 "다 끝났다!"하며 고개를 떨구셨을 때 십자가는 이미 빈무덤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그리고 세상은 곧 "내가 세상을 이겼다!"는 외침을 하늘로부터 들어야 했다.

  하여 살았어도 죽은 자가 있는가 하면 죽었어도 살은 자가 있다. 진실로 죽음은 몸의 것이 아니라 마음의 것, 영혼의 것이다. 삶의 반대말은 죽음이 아니라 거짓과 불성실, 궁극적으론 죄악 그런 것. 오히려 죽음의 빛깔은 삶의 빛깔, 삶의 영원한 반향(反響)으로 삶의 충실성 그 만큼이다. 진실로 죽음이 나를 부르기 전에 내가 먼저 스스로를 죽이고, 죽음이 나를 홀로 만들기 전에 내가 먼저 온갖 것을 끊고서 홀로 서고, 죽음이 나를 꼼짝 못하게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자기 십자가에 못박고, 죽음이 나를 분해하기 전에 내가 먼저 내 모든 걸 나눠주고, 죽음이 나를 부패시키기 전에 내가 먼저 참된 밀 알이 되어 온전히 썩어지고, 죽음이 나를 허무케 하기 전에 내가 먼저 헛된 욕망과 꿈에서 깨어나고, 죽음이 나를 그분 앞에 세우기 전에 내가 먼저 그분께로 달려나가 안기며 그분 안에 새로 태어날 때, 죽음은 불청객이 아닌 친근한 ’길벗’이 되어 부활로 나를 이끌 것이다. 그렇게 부활은 지금의 삶을 넘어서서 참된 삶이 되는 것, 모든 것을 잃어 모든 것을 찾는 것, 궁극적으로 존재 그 자체만이 남았을 때 근원에서 발하는 존재의 빛! 따라서 부활이란 나의 부활이 아니라 너의 부활이요 너를 통한 우리의 부활이니, 즉 너에 대한 사랑 때문에 ’나’를 ’너’ 속에서 ’너’를 위해 온전히 죽일 때 ’너’는 구원되고 거기 결국 ’우리’의 부활이 이뤄지는 것이니, 궁극적으로 부활은 ’나’의 사건이 아니고 ’너’의 사건이요, ’우리’의 사건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하여 말이다. 우리가 남을 향해 온전한 사랑의 관심을 드러낼 때 그를 구원의 길로 나아가게 할뿐 아니라 우리 자신 역시도 에덴의 아담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까지 모두를 사랑하셨던 그리스도 예수께서 새 아담이 되셨듯 그렇게 우리가 해방의 봉인을 떼어 줄 사랑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이웃에게로 다가가 온전한 사랑의 열기로 그 납인을 녹이며 그를 해방시켜 줄 때 우리 역시 그분처럼 새 아담이 될 것이다. 그렇게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사랑의 가슴은 비록 무한하지 않을 진 모르지만 이 세상 어느 것도 껴안을 수 있으며 결국 그 모든 것보다 한 치 더 크기에 무한과 영원에 이를 수 있다. 그렇게 사랑의 눈이 밝아져 새롭게 된 인간 안에서 이 세상이 사랑으로 다시 태어날 때 모든 피조물까지도 멸망의 사슬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노래할 그날이 온다. 이리와 양 떼가 함께 풀을 먹으며 표범과 송아지가 함께 누워 있는 평화의 그날이 온다. 그날엔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는 다시 에덴을 밝혀 주는 등불이 되고 모두는 생명의 나무 아래 모여 함께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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