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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도로 보는 교회이야기1: 마태오 리치 신부 중국에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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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4-24 ㅣ No.426

[지도로 보는 교회이야기] (1) 마태오 리치 신부 중국에 오다


동아시아 대륙 복음화의 첫발 내딛다

 

 

최선웅(안드레아·매핑코리아 대표)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유럽인들의 신항로 개척과 신대륙 발견이 활발해지면서 유럽에서는 항해술과 더불어 과학기술이 크게 발전했다. 이로써 아시아 동쪽의 중국이나 조선, 일본 등은 세계의 변방에 치우쳐 유럽인들의 탐험 대상이 됐다. 이 시기에 설립된 예수회는 선교사들을 신항로 개척과 선교를 위해 동양으로 진출시켰다. 당시 선교사들은 적응주의 차원에서 유럽의 문화와 과학을 동양에 소개했는데, 이 가운데 마태오 리치 신부는 유럽의 과학기술을 전함은 물론 중국의 문화를 유럽에 소개하므로써 동서 문화 교류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리치 신부가 제작한 한문판 세계지도인 곤여만국전도는 조선과 일본에도 전해져 문화적 충격을 안겨 줬다.

 

선교사들에 의해 제작된 지도와 그들이 전한 지도제작술의 의미, 영향 등을 되새겨 봄으로써 신앙 선조들의 삶 속에 늘 함께하셨던 하느님의 숨결과 섭리를 돌아볼 수 있는 장을 마련한다.

 

 

예수회 설립과 해외 선교

 

역사적으로 볼 때 16세기 유럽은 가장 흥미로운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도시 국가의 규모에서 절대주의 국가가 등장하고, 르네상스 시대의 막이 올랐으며, 대항해 시대를 맞아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개척하는 등 과도기적인 때였다. 교황 바오로 3세가 재위하던 가톨릭교회도 개신교 세력에 의해 거센 저항에 부닥치고 있었다.

 

- 마태오 리치 신부가 태어나 생을 마칠 때까지 오직 하느님을 향한 일생을 나타낸 여정도이다.

 

 

종교개혁이 한창이던 시기에도 스페인에서는 오히려 개혁을 반대하는 반종교개혁운동이 확산되고 있었는데 이때 등장한 인물이 예수회를 세운 이냐시오 로욜라(Ignatius de Loyola)였다. 그는 스페인 로욜라 가문 출신으로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다리에 부상을 입은 후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삶에 관한 책을 읽고 그리스도를 위해 내적으로 싸우는 병사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지난날의 모든 것을 떨쳐낸 이냐시오는 고행을 자초하고 오직 기도와 명상에 몰입하면서 예루살렘을 순례하고 파리에서 면학에 정진했다. 이때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하비에르(Francisco Xavier) 등 여섯 명의 동료들을 만났고, 이들과 함께 1534년 8월 15일 예수회의 단초를 마련했다. 이후 수도회 설립을 청원하여 1540년 9월 27일 교황 바오로 3세의 교서에 의해 정식으로 인가를 받았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라는 모토를 내세운 예수회는 교육과 학문을 통한 봉사와 선교가 주요 사도직으로 ‘영원을 구원할 희망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고, 어디에서든지 살 용의가 있다’는 성소에 의해 대항해 시대와 더불어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로 뻗어가는 해외 선교의 길을 열어가기 시작했다.

 

 

예수회 입회 후 선교사 수업

 

마태오 리치(Matteo Ricci)는 하비에르가 중국 선교의 문턱에서 생을 마감한 해인 1552년 10월 6일 교황령에 속한 이탈리아 마체라타(Macerata)에서 태어났다. 16세 때인 1568년 아버지의 권유로 로마에 가서 법학을 공부하던 리치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수회에 수련자로 입회했다.

 

이후 그는 1571년까지 예수회의 피렌체와 로마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고, 이곳에서 독일 출신 수학자인 클라비우스(Chritopher Clavius) 신부로부터 기하학·천문학·역산학·지리학 등을 배웠다. 또한 해시계와 자명종, 지구의, 지도제작법 등을 익혔는데 이것이 훗날 중국 선교에 긴요한 밑거름이 됐다.

 

1577년 리치는 인도에 파견될 선교사로 지명되자 제노바를 떠나 포르투갈 코임부라(Coimbra)에서 신학을 공부하다가 이듬해 3월 동료 선교사 루지에리(Michele Ruggieri), 파시오(Fracesco Pasio) 등 13명과 함께 리스본을 출발하여 6개월 뒤인 9월 13일 인도 고아에 도착했다.

 

고아에서 신학 수업을 마친 리치는 요양 차 인도 남부의 코친(Cochin)에서 지내다가 그곳에서 1580년 7월 26일 사제품을 받았다. 고아로 되돌아온 리치는 예수회의 동양 순찰사인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 주교로부터 중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1582년 4월 26일 동료 파시오와 함께 고아를 출발, 8월 7일 마카오에 도착했다.

 

 

중국 선교와 지도제작

 

마태오 리치의 초상화는 1910년 중국인 예수회 수사인 유문휘(游文輝)가 그린 것으로 현재 로마 예수회 본부에 보존되어 있다.

 

 

양광(兩廣, 광동과 광서지역을 이름) 총독부 소재지인 자오칭(肇慶)의 지부(知府) 왕반(王泮)의 호의로 리치와 루지에리는 1583년 2월 5일 자오칭에 들어가 정착하게 되었다. 리치는 우선 중국어 학습과 관습을 익히는 한편 불교식 승복을 입고 서방의 승려로 행동했다. 1584년에는 지도에 관심이 많았던 왕반의 요청에 따라 리치는 한문판 세계지도인 산해여지도(山海輿地圖)를 제작했다.

 

1589년 여름 샤오저우(韶州)에 정착하게 된 리치는 연금술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구태소(瞿太素)에게 수학·기하학·역학과 천주교 교리를 가르쳤고, 그에게서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배우며 친분을 두터이 했다. 구태소의 제의로 1594년부터는 지금까지 행세했던 승복을 벗고 유학자의 복장으로 바꿔 입고, 이름도 유교식으로 이마두(利瑪竇)라 지었다.

 

1597년 마카오에 온 발리냐노에 의해 리치는 중국 선교 단장에 임명되고, 이듬해인 1598년 난징(南京)의 예부시랑(禮部侍郞)인 왕충명(王忠銘)과 함께 난징에 도착한 후 9월초 처음으로 베이징에 도착했으나 거주 허가를 얻지 못하고 난징으로 되돌아왔다. 1600년 리치는 산해여지도 제2판을 제작했고, 이때 베이징에 들어갈 수 있는 소개장을 얻게 된다.

 

난징을 출발한 리치는 1601년 1월 24일 그렇게 기다리던 베이징에 도착하게 됐다. 이는 실로 중국 땅을 밟은 지 19년만의 일이고 그의 나이 49세가 되는 해였다. 사이관(四夷館)에 머물던 리치는 황제를 알현할 기회가 오자 선물로 자명종·프리즘·양금·천주상과 성모상 등 서양의 진귀품과 성상을 황제에게 진상했고, 자명종 수리와 천문 역학에 관한 일로 베이징에 거주할 수 있는 허가를 얻었다. 이때 리치는 풍응경(馮應京), 서광계(徐光啓), 이지조(李之藻) 등 명왕조의 이름난 인사들과 가까이 하며 교류를 모색해 나갔다.

 

1602년 리치는 이지조의 도움을 받아 한문판 세계지도인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 6폭을 제작하고, 이듬해에는 이응시(李應試) 판 8폭 지도인 양의현람도(兩儀玄覽圖)를 제작했으며, 천주교 교리서인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인쇄해 펴냈다. 1606년에는 서광계와 함께 유클리드 기하학을 한문으로 번역하여 이듬해 기하원본(幾何原本) 6권을 간행했다.

 

일생을 이역만리에서 오직 선교를 위한 일에만 매달려 편안한 생활이라곤없었던 리치는 1609년에 이르러 몸이 쇠약해지자 그동안의 활동을 정리한 「전교 보고서」를 작성했다. 1610년 5월초 병상에 누운 뒤 우르시스(Sabbathinus de Ursis)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고 5월 11일 오후 6시경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나이 향년 57세였고, 그가 중국에 들어온 지 28년만이다.

 

[가톨릭신문, 2011년 4월 3일, 최선웅(안드레아 · 매핑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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