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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프랑크푸르트: 40년간 광야의 유랑을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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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4-29 ㅣ No.173

[해외 한인 공동체 소식] 독일 프랑크푸르트 : 40년간 광야의 유랑을 마치며

 

 

독일 프랑크푸르트 한인본당(주임 김광태 신부)은 1970년 3월, 29명이 세례를 받으면서 출발하여 이제 겨우 40년을 넘긴 젊은 가톨릭 공동체다. 그러나 천 년도 훨씬 넘는 독일 가톨릭교회 역사에 비해 젊다는 것일 뿐, 초창기 신자들의 연령이 어느덧 70세를 훌쩍 넘기고 있으니 그저 젊은 공동체라고 가볍게 볼 수 없는 본당이다.

 

 

간호사와 광산 근로자들이 시작한 공동체

 

설립의 주역이었던 당시의 신자들은 대부분 독일의 병원에 취업했던 간호사였고 탄광에서 채탄 근로를 경험한 이주 노동자들이었다. 지금이야 조국으로부터 국가 선진화의 초석을 놓은 산업역군이었다거나 나이팅게일의 숭고한 정신을 그대로 간직한 채 대한민국을 독일에 알리는 민간 외교관으로 큰 역할을 수행했다고 칭찬을 듣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너나없이 조국의 빈곤에 쫓겨 선진 독일로 외화벌이에 나선 경제난민에 불과했다.

 

그랬던 그들이 버려졌다는 상실감에서 벗어나고자 신앙에 귀의하여 공동체를 이루었다. 이때 한 수녀님의 도움이 있긴 했지만, 지도해 줄 사제 한 분 없이 스스로 공동체를 만든 것이다. 당시는 미사에 참례하더라도 서툰 언어 탓에 독일어 강론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고, 몇 권 되지 않는 한국어 성경을 돌려가며 읽어야 하는 가난한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던 즈음 신자들이 급속히 늘어나는 계기가 있었으니, 루르 탄광지역에서 3년 계약을 마친 광산 근로자들이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대거 마인츠나 프랑크푸르트 지역으로 이주하면서였다. 하나같이 결혼 적령기를 지난 노총각들이 한국 아가씨들이 많이 온다는 가톨릭교회를 그냥 지나칠 리 없었던 것이다.

 

하나둘 기웃거리다가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짝들을 찾아 가정을 이루면서 점차 활기를 띄는 공동체로 변모해 갔다. 아직도 모여 앉는 자리가 있을 때마다 그때의 연애시절을 무슨 무용담이나 되는 양 되뇌며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가난했던 공동체의 신앙생활

 

이후 신앙에 매달리려는 신자들의 모습에 관심을 가지고 돌보던 독일 마인츠 교구의 배려와 마침 방문하신 김수환 추기경님의 관심으로, 공동체가 구성된 지 일 년 뒤인 1971년 4월에, 독일에서 유학 중이던 수원교구 김춘호 베드로 신부가 주임신부로 부임하였다. 그때부터 비로소 명실공히 공동체다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제 한 분이 남부 독일 여섯 개 교구에 흩어져 거주하는 신자들을 방문하면서 돌보다 보니, 한 달에 한 번 정도에 불과한 한국어 미사 참례로 신앙의 목마름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독일에서 공부를 마친 초대 신부님은 귀국을 하게 되고 우리는 또 다시 목자 없는 양떼가 되고 말았다.

 

이렇듯 이천년 전 초대교회와 다를 바 없는 가난한 공동체의 모습으로 살다가 여기서 탈피하는 계기가 1980년에 다시 찾아왔다. 독일 마인츠 교구와 전주교구가 자매결연을 맺음으로써, 고국에서 정식으로 파견한 제2대 주임 리수현 신부가 부임한 것이다. 또한 1992년 제4대 본당신부로 부임한 안철문 이냐시오 신부는 마인츠로부터 반경 120여 킬로미터에 소재한 세 교구 관할의 공동체 신자들을 하나로 모아 비로소 하나의 본당 체제로 독일 교회 안에 자리 잡았다. 이 사건이야말로 본당 신자들을 하나로 묶어 신앙심을 한층 더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독일에서 주목받는 공동체로

 

우리 본당은 지난 40년 동안 1,500여 명 이상의 성인을 교회로 이끌었다. 독일은 전통적인 종교국가로 대부분 유아세례를 받기 때문에 그토록 많은 세례자를 배출한 일은 큰 주목을 받았다.

 

또한 유럽 한인 가톨릭교회로는 최초로 레지오 마리애(현재 1개 꾸리아, 13개 쁘레시디움)를 도입하였고, 유럽 성령쇄신봉사회를 구성하여 20년이 넘게 해마다 3박 4일의 유럽 성령쇄신 묵상회를 개최해 오고 있으며, 30개가 넘는 소공동체 모임을 통해 지역 복음화의 주체로서 살아가고 있다. 이런 노력으로 우리 본당이 소속된 림부르크 교구청(6개 교구청을 아우르는 간사 역할을 함) 산하 29개 외국인 공동체 중 가장 모범적인 공동체로 인정받고 있다.

 

그렇게 많은 신자들을 배출하고서도 아직도 1980년대 중엽의 숫자인 1,000여 명을 넘지 않는 것은 세례 받은 신자들이 3-5년 뒤면 어김없이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 사이에서는 “프랑크푸르트 한인본당은 한국 천주교회의 논산훈련소 노릇을 하고 있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한다.

 

본당 공동체 구성원의 면면을 보면 60-70대의 간호사와 광산 근로자 출신이 여전히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주재원으로 파견되었다가 이곳에서 정착한 일명 ‘주재민’(주재원 출신 교민)들이 본당 사목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성공적으로 세대교체를 이루고 있다. 이외에 한국에서 파견된 젊은 주재원 그룹이 있고, 교민 자녀와 유학생 그룹 등 전 연령대가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특히 첫영성체를 받고 나면 교회와 담을 쌓는 유럽의 일반적인 풍토와 달리 자녀들이 부모와 함께 미사에 참석하며, 삼대가 나란히 미사에 참석하는 모습은 아름다운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지금까지 주인을 자처하던 1세 교민 그룹은 ‘반석회’와 ‘안나회’를 만들어 서로의 신앙을 돌보고 있다. 올해는 본당 설립 4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 성지순례를 기획하였는데, 50여 명의 연로한 신자들이 출발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꿈꾸어 왔던 우리들의 성전을 마련하고서

 

한편, 2008년도에는 설립 당시부터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우리들의 성전을 드디어 마련하게 되었다. 대부분 외국인 공동체는 독일 성당을 빌려서 겨우 주일미사나 봉헌하는 실정이기에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미사를 봉헌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러던 우리에게 황금 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신자 수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재정난에 허덕이는 독일 교회가 이를 해결하고자 교회 기구와 규모를 축소하고, 프랑크푸르트 시내 본당들마저 미사참례 신자 수에 따라 통폐합하는 가운데, 림부르크의 주교가 성당 하나를 헐고 아파트를 지어 분양하려던 계획을 수정하여 그 성당을 우리 본당에 할애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물론 그에 따른 전제조건이 있었다. 그 조건이란 “교회 건물의 유지 보수와 향후 운영비 전액(연간 한화 약 7천만 원)을 자체 부담하고, 해체 위기에 있는 독일 본당 신자들과 또 하나의 외국인 공동체인 크로아티아 공동체가 계속해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 본당은 염원이던 우리 성전을 갖게 되었으며, 공소로 격하될 위기에 있던 독일 본당(성 알베르토 본당)을 살려냈을 뿐 아니라, 이곳저곳 방황할 위기에 있던 크로아티아 공동체에게 미사 봉헌 장소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40여 년 방황하던 세월을 끝내고 어엿하게 600여 명을 수용하는 우리의 성전을 갖게 되었다. 더불어 지난 20년 동안 정성스럽게 모은 일백만 유로의 기금으로 교육회관 증축공사를 한창 진행하고 있다.

 

성전을 위한 모금을 하면서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세 교민이 아무리 열심히 기금을 모아 성전이 생긴다고 해도 2세들이 이어받지 못하면 독일 교구청의 재산이 될 텐데, 그들에게만 좋은 일을 뭐하러 하느냐.”는 거센 반발이 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1세 교민이 자녀들을 교육하기에 달렸다.”고 하며 과감히 밀고 나갔다. 이제는 80여 명의 청년들이 청년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는 상황이니 일부 반대 여론은 그저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기에 기쁘지 않을 수 없다.

 

 

약속의 땅으로 이끄신 하느님

 

우리 본당신부님의 관할 대상은 독일 서남부 여섯 개 교구의 대한민국에 뿌리를 둔 신자들이다. 그러하기에 그 여섯 개 교구장으로부터 사목권을 위임받아 다달이 순회하며 미사를 봉헌하신다. 그러니 주교님들은 우리 신부님의 파워가 대주교를 능가한다며 우리 본당신부님에게 ‘Archprister(대신부)’라고 사전에도 없는 칭호를 붙여주며 노고를 치하하기도 한다.

 

해마다 50여 명의 교우들이 세례를 받고, 독일 주교님을 초빙하여 견진성사를 거행할 때는 헌혈차량을 불러놓고 수십 명씩 줄을 지어 헌혈을 하는 광경이 연출되기도 한다. 어디 그뿐인가. 각 교구에서 주관하는 외국인 합동미사에는 전통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떼를 지어 미사에 참례하니 물질 만능주의에 찌든 현지인들에게 신선한 신앙인의 자세를 보여주었다고 자부하고 싶다.

 

이렇기에 독일의 각 교구가 재정난에 허덕이면서도 우리의 교육회관 증축공사에 수십만 유로의 기금을 마다않고 지원해주며, 250여 년 전 포교의 대상이었던 대한민국의 선교사들이 유럽 각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데 지원군을 파견해 주어야 한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이 빈말로만 들리지 않는다.

 

작년 12월 12일에 전주교구 이병호 주교님의 주례로 본당 설립 40주년 미사를 봉헌하면서, 유럽 땅의 첫 번째 한국 성인 성상으로,  본당주보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동상 축복식을 가졌다. 독일 한복판에 단아한 한복 두루마기 차림에 갓을 쓰신 성인의 모습을 보고, 독일 가톨릭 신자들은 보편교회의 풍요로움을 체험하게 될 것이고, 우리 신자들은 이곳을 마음의 고향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이토록 지난 40년 동안 공동체를 건설하면서 꿈꾸어 왔던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활력 넘치는 공동체로 성장하고 있는 것은 우리 신자들이 열심히 노력한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마인츠와 림부르크 교구청의 전폭적인 지지와 전주교구의 후원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우리 공동체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인정하며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낯선 땅을 떠돌던 저희 공동체를 약속의 땅으로 이끄신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 박순평 베드로 - 1971년 광부로 파독되었으며, 이후 통역일과 무역업에 종사하였다. 프랑크푸르트 한인본당 사목회 총무와 부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 본당 재무평의회 상임이사를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1년 2월호, 박순평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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