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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10: 말레이시아 반도를 지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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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02 ㅣ No.810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10) 말레이시아 반도를 지나다


스님처럼 특권 누리지만 하루 종일 서 있었네

 

 

- 말레이시아 반도의 원주민들은 대부분 비신자이거나 무슬림이었다. 사진은 19세기 당시 페낭의 중국인들로, 변발을 한 모습이 이채롭다. 출처=페낭박물관.

 

 

브뤼기에르 신부는 1826년 12월 11일 선교 소임지인 샴(태국)대목구로 가기 위해 마카오를 떠났다. 그는 배를 타고 말라카 해협을 다시 거슬러 말레이시아 페낭으로 갔다. 말라카 해협은 오늘날에도 ‘해상 실크로드’로 불릴 만큼 동서 문화의 교역로였다. 15세기 초반 중국 명나라 정화(鄭和) 선단이 처음으로 개척한 이 해상로는 1510년 포르투갈이 인도 고아를 점령하면서부터 ‘그리스도교 선교 루트’가 됐다.

 

브뤼기에르 신부가 페낭으로 간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페낭에서 육로로 말레이시아 반도를 통과해 방콕으로 갈 예정이었다. 당시 이 경로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마카오에서 방콕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둘째, 페낭 신학교에 있는 샴대목구 소속 중국인 신학생을 데려가기 위해서다. 샴대목구장 플로랑 주교가 그를 사제로 서품시켜 샴왕국에 사는 중국인들에게 파견할 계획이었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이 신학생이 방콕까지 가는 여행길에 중국인을 만나면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가 용감하고 열심일 뿐 아니라 중국인들 사이에 성행하는 미신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브뤼기에르 신부는 말레이시아 반도 내륙에 사는 원주민들의 생활상을 탐구할 생각이었다. 그는 1827년 1월 중순부터 1829년 4월 중순까지 2년 3개월여간의 샴대목구 선교사 시절에 관한 사목 여행기를 남겼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1827년 1월 12일 페낭에 도착했다. 그는 페낭에서 마카오처럼 ‘현실’이라는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나 계획을 수정해야만 했다. 바루델(Baroudel) 신부를 비롯해 그가 만난 파리외방전교회 모든 선교사들이 “중국인들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너무도 간곡히 말렸기 때문이다. “타밸(Tavael)과 미얀마 남부 지역에 있는 메르기(Mergui)를 거쳐 샴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프랑스인 한 선장의 제안도 있었다. 페낭의 선교사들은 이 제안을 환영했고 브뤼기에르 신부도 동의했다.

 

- 유럽 선교사들이 이용했던 해도.

 

 

브뤼기에르 신부는 페낭에 머무는 동안 부쇼(Boucho)와 바르브(Barbe) 신부가 사목하는 토종(Taujong)과 풀로티쿠(Poulo-Ticoux)성당을 방문했다. 풀로티쿠는 쥐들이 득실거리고 주민들이 몹시 가난해 ‘쥐들의 섬’으로 불리는 곳이었다. 이곳을 사목하는 바르브 신부는 교우들을 돌보는 본당 신부, 외교인을 개종시키는 선교사, 예비 신자들을 가르치는 교리교사, 신학교 교수, 가톨릭 학교를 감독하는 책임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브뤼기에르 신부에게 “자신도 방콕에서 이방인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고 싶다”는 열망을 내비쳤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예수 부활 대축일 이전에 방콕에 도착해 플로랑 주교와 함께 부활 성야 미사를 봉헌할 수 있기를 고대했다. 배로 메르기(Mergui)에 가면 거기서 방콕까지 약 400여 ㎞ 남짓한 거리였다. 프랑스에서 역마차로 달리면 이틀 길이었지만 그는 이 여정을 보름 정도로 예상했다.

 

하지만 기대는 물거품이 됐다. 1827년 예수 부활 대축일 다음 날이 되어서야 페낭을 떠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행 행선지도 출발 전날 모두 뒤틀어졌다. 그를 태워 주기로 한 배의 주인이 수마트라 섬 아셈(Achem)으로 행선지를 갑자기 바꿔 버렸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하는 수 없이 고인이 된 페코(Pecot) 신부가 방콕으로 갔던 행로를 이용해야만 했다. 페코 신부가 갑자기 선종하는 바람에 브뤼기에르 신부의 임지가 코친차이나에서 샴으로 바뀌게 됐다. 뜻하지 않게 페코 신부의 방콕 입경 루트를 따라 여행길에 오르게 됐으니 브뤼기에르와 페코 두 신부 사이에 질긴 인연이 있는 듯하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중국인 신학생 한 명과 갓 세례를 받은 중국인 한 명을 데리고 출발했다. 이튿날 페낭 북부 지역 케다에 도착한 그는 뱅골 총독부 주재 샴왕국 대사를 만났다. 가톨릭 신자인 대사에게 방콕으로 가는 데 필요한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대사의 안내로 지역 관장인 리고르 왕자를 만났다. 왕자는 리고르까지 브뤼기에르 신부 일행을 태우고 갈 코끼리와 경호원을 마련해 주기로 약속했다. 여행 준비가 마무리되는 동안 그는 이곳에서 스님과 같은 특권을 누렸다. 하지만 그는 이 민족의 풍습과 관습에 따라 앉지도 누워있지도 못하고 산책도 할 수 없었다. 온종일 눈을 내리깔고 부동자세로 서 있기만 해야 했다. 이것이 스님의 품위에 맞는 가장 합당한 자세라며 대사가 꼭 지킬 것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편지와 여행기에 케다 지방의 풍속을 자세히 기술했다. “신분이 낮은 사람이 자기보다 높은 사람에게 말할 때는 발뒤꿈치를 엉덩이에 대고 꿇어앉습니다. 상대방의 신분이 아주 높으면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엎드립니다. 꿇어 엎드리기 거북한 장애물이 있으면 아무리 급박한 질문을 받아도 대답하지 않고, 먼저 장애물을 치운 다음 무릎을 꿇고 엎드린 자세로 대답하는데 그때 두 손을 모아서 얼굴에 대고 말을 합니다. … 오직 스님들만이 고관에게 표하는 예법을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저 역시 유럽 사제로서 스님과 같은 특권을 누립니다.”(1827년 6월 20일 파리외방전교회 총장 랑글루아 신부에게 보낸 편지)

 

브뤼기에르 신부는 이곳에서 가톨릭 신자 2명을 만났다. 그는 그들에게 아기들이 죽을 때 유아 세례를 베풀 수 있도록 세례 예식을 가르쳤다. 그리고 일행과 함께 “저희가 이 지역을 지나가면서 심은 복음의 씨앗이 자라길” 주님께 기도했다.

 

브뤼기에르 신부는 케다에서 일주일가량 머물다 리고르로 출발했다. 관장은 코끼리 다섯 마리와 호송자 14명, 코끼리 몰이꾼 5명을 내주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4월 2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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