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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세계]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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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03 ㅣ No.812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1)

 

 

고대 교회사의 연재를 마치고 이제 새로운 천 년의 시대를 서술하고자 합니다. 그 여정은 우리가 이미 개략적으로 알고 있듯이 찬란한 그리스도교의 시대를 일컫고, 그것은 또한 긴 그림자를 드리운 시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시대의 이 곳 저 곳, 이 사건 저 사건들을 살피다 보면 그 시대의 진면목이 눈앞에 드러날 것입니다. 장광설을 피하고 바로 그 시대의 시작점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리스도교의 동화와 변형

 

유럽의 중세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민족들에 의해서 유지되고 형성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는 극서부의 켈트족들과 동방의 슬라브족들 뿐 아니라 다양한 게르만 민족들이 중요한 기초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런 거대한 움직임의 과정은, 역사적으로 거의 명확하게 설명하기 불가능하므로, 간략하게 말해 ‘민족들의 이동’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1세기 말의 그리스-로마의 일치를 향한 방향과 비슷했습니다. 개별 그룹들은 후기 제국의 원심력적 경향들과 제국의 약화를 틈타서, 마치 동맹군들처럼 제국안으로 받아 들여졌고, 왕국들을 건설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황제들로부터 인정을 획득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게르만 왕국들 중에 오직 프랑크의 왕국이 영속적으로 그 존재를 지켜갔는데, 그 왕국은 승리자 임금, 클로도베오(Clodoveo, 481-511)에 의해서 건설되었습니다. 그의 후계자들은 아퀴타니아(Aquitania)로부터 비시코티인(visigoti)들을 격퇴시켰고, 알레만인(Alemanni)들과 투린지인(Turingi)들에게 승리하고, 프랑크 연합에 브루군디(burgundi) 왕국을 병합하였습니다. 카롤링거(Carolingi) 왕조는 이런 확장과 투린지와 색슨(Sassoni), 그리고 롱고바르도(Longobardi)들을 왕국에 병합시켜 나가기를 계속하였습니다. 카를로 대제(Carlo Magno) 시대, 왕국의 마지막엔 모든 독일 민족, 슬라브족들과 앵글로 색슨, 스칸디나비아의 게르만족들이 프랑크 왕국 안에 하나로 통합되기에 이릅니다.

 

이런 정치적 영역에서 공고화의 국면은 그리스도교를, 특히 서방 그리스도교를 내부에서부터 어떤 변형을 향하여 나가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서방의 그리스도교는 이 시점에서 그리스화(ellenizzazione) 과정의 성숙 국면을 살아가던 동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로부터 조금씩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는 다양한 동기들이 제시될 수 있습니다. 언어의 상이성은 처음부터 아주 두드러진 중요성을 가졌는데, 동방 제국의 그리스어와 서방 제국의 라틴어는 이미 395년의 분리에서 결정적인 것이었습니다.

 

후기 고대 로마의 지역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영토에 자리 잡은 새로운 민족들에게서 첫 순간부터 전달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질에 따라 오랜 조화의 과정과 교회의 전통적 구조를 자신들 공동체의 요구와 사회화의 형식 안에서 최적화하며, 전해진 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습니다. 이 과정에서의 정신적 원칙들과 형식적 구조들은 전 중세를 걸쳐 결정적으로 자국을 남기게 됩니다. 처음부터 그들은 어떤 확실한 연속성을 갖고, 왕을 우두머리로 하듯 교회를 귀족화하고, 고중세의 ‘교황 교회’(chiesa papale)의 절정을 이룬 ‘그레고리오 개혁’(riforma gregoriana)을 통한 게르만적 변형에 대한 교회의 대응을 어떤 특징적인 방식에서 결정짓도록 공헌합니다. 이런 것들은 신심의 형식에 있어서도 매우 유사하게 진행됩니다.

 

 

게르만, 켈트, 슬라브 족들의 그리스도교화

 

그리스도교화는 약 천 년 동안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이런 시간의 아치(arco)의 광대함에서, 초기 시대의 개별적인 개종에서부터 로마 제국의 다양한 제도, 조직들의 그리스도교화의 파고에 따른 집단적인 개종을 거쳐 고 중세와 후기 중세의 초입의 무력에 의한, 즉 검에 의해서 이뤄진 선교에 이르기까지 선교의 양상은 엄청난 차이를 가져오게 합니다. [2017년 4월 2일 사순 제5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2)

 

 

독일 민족들의 거대한 이동은 후기 고대 그리스도교 시대까지 그리스도교화가 진행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발칸에 자리잡은 동고트인들은 4세기에 그리스도교로 넘어오게 되었습니다. 신앙 고백의 아리오주의적(Arianesimo) 변형은 당시 궁중에서 성행했고 그들에게는 어떤 규정처럼, 그리고 제국 교회가 아리오주의에서 멀어질 때에도 그렇게 남아있게 했습니다. 아리오주의자들은 비시고트인들과 반달족들, 브루군디와 롱고바르디인들이었습니다. 이 아리오주의는 정치적인 연루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족속들은 아리오주의에 의해서, 그 민족들이 점령한 지역 민족들, 즉 자신의 고유한 신앙 고백을 갖고 있고,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는 그 곳 민족들과 구분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종교에서의 분리적 정치는 로마화된 교회 조직 안에서 생기 넘치는 후기 고대의 문화수용의 거부와 연결되었고, 이런 방법으로 이 게르만 왕국들은 역사에서 어떤 지속적인 역할을 하기에 부족함을 드러내게 됩니다.

 

레카레도 왕(il re Recaredo, 586-601)의 통치 아래서 스페인의 비지고트인들(visigoti)은 589년에 그들 신민들의 그리스도교화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아랍인들의 스페인 정복은(711)은 스페인 교회가 자신의 고대 조직과 막 탄생하던 서방의 형성에 대한 전통적이고 효과적인 영향력과 그 확장을 방해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화의 임무는 클로도베오(Clodoveo) 아래 모인 프랑크족들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리오주의를 거치지 않고 가톨릭 교회를 향하는 길을 발견하였습니다. 알레만인들(Alemani)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클로도베오는 아마도 498년경에 레임스의 주교 레미지오(Remigio di Reims)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왕과 함께 수많은 프랑크의 귀족들이 같은 걸음을 하였습니다. 지역 주교좌는 프랑크 이교도들이 갈리아 로마 교회로의 회개를 마치 두 번째의 코스탄티노 전환처럼 즐겼습니다.

 

 

고중세 시기의 프랑크 왕국에서의 선교 활동

 

5세기에 들어서면서 갈리아의 고대 로마의 지방 지역 주민들은 이미 모두 그리스도교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경계를 벗어난 곳, 예를 들면 라인강 지역과 스위스, 알프스 인근 지역들에서는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서로 다른 독일 민족들에 의해서 점령된 곳들에 위치한 나머지 지역에서는 아직 그리스도교가 공고하지 못한 채 오직 생존하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안정되면서 프랑크 족의 상위 계층들의 그리스도교 귀의가 진행되고 또 왕국의 확장과 함께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점점 굳건한 토대를 마련하게 됩니다.

 

첫 순간에 이런 선교 활동을 일깨우고 가능하게 만든 대표적인 이들은 바로 주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차츰 차츰 수도자들과 은수자들이 주류를 이루는 성직자들이 주목을 받았고, 그들은 주교들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었고, 이들은 기적과 금욕이란 측면에서의 덕행과 순회하는 설교자들로서 선교 활동을 해나갔던 것입니다. 이런 이들이 바로 고아(Goar), 웬델린(Wendelin), 디시보드(Disibod), 프리돌린(Fridolin) 같은 이들이었습니다. 왕과 귀족과 주교들의 편에서 여러 지역에서의 자유로운 교회의 창설은 금욕적인 순회 설교가들의 활동을 지지하는 것으로 변해갔습니다.

 

정착한 독일 민족들의 영토 안에서 그리스도교의 보급을 살펴볼 때, 그 전파가 서방에서 동방으로 향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수도원들과 주교좌들의 교회들은 프랑크 지역의 내부에 동방을 향하여 더 먼 곳에 위치한 공동체의 재건에 도움을 주었고, 이들이 라인 강 너머에 원조의 기지를 건설할 수 있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강화되었습니다. 이태리 북쪽에서 시작되어 그리스도교회는 바비에라(Baviera) 지역까지 확장되었고, 8세기에 이르면 이 지역도 프랑크 선교지 안에 포함되게 됩니다. [2017년 4월 9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3)

 

 

게르만의 그리스도교화

 

프랑크 왕국의 선교를 종합적으로 볼 때 어떤 원칙, 즉 특별한 성향이 발견됩니다. 그리스도교화는 항상 프랑크 왕국과 관련지어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선교적 활동과 교회의 건설 그리고 수도원의 설립 등은 프랑크 왕들의 보호아래 이뤄졌으며, 이것은 프랑크 왕국의 확장에도 유용하였습니다. 이런 정치 선교의 반대편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수용을 거스르는 정치적으로 영향받은 저항이 있었습니다. 이런 저항은 그러나 무력에 의해서 파괴되었습니다.

 

7-8세기를 지나면서 선교의 주인공들은 이제 수도자들이 그 첫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사도적 선교의 투신과 수도자적 금욕의 융합은 유럽 내부에서 그리스도교화의 중요한 지지기반인 수도원주의(monarchismo)를 탄생시킵니다. 이 현상에는 서로 상관된 두 개의 이유들이 결정적인 방식으로 공헌을 했습니다. 그 이유들이란 한편에서는 독립적 교회들 편에서 주교에 속한 교회들의 점진적인 붕괴이고 다른 편에서는 지역 귀족들이 자기 자신들의 수도원들에 대해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유지 강화하려고 하였던 점입니다. 수도자 선교의 주요한 특징을 보면, 초기에는 스코틀랜드와 갈리아 수도자들이 주를 이루었고, 이후에는 앵글로색슨과 프랑크인들이 주인공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인들과 갈리아 프랑크인들의 선교

 

스코틀랜드 선교사들은 대부분 수도자들로, 브리튼 섬에서 대륙에 도달 한 이들입니다. 그들은 특별히 아일랜드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아일랜드는 아주 단기간에 눈부신 셀틱 교회가 건설된 지역입니다. 셀틱인들의 그리스도교화의 시초는 신화처럼 남아있습니다. 전통에 따르면 ‘성 파트리시오’라는 신비스런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브리튼 그리스도인인 그는 해적에 의해 아일랜드로 끌려왔고 수도자가 되었으며, 이후 대륙으로 향하였던 것입니다. 파트리시오는 아일랜드에 주교가 되어 되돌아오게 됩니다. 430-460년 사이에 그는 다양한 부족들의 우두머리들을 그리스도교로 이끄는데 성공합니다. 이처럼 아일랜드 교회의 설립은 수도자적 흔적, 다시 말하면 부족과 수도원 사이의 병합이라는 흔적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설립된 교회들은 주교 통치 하의 교회 휘하로 들어가게 되고 거기에서 사목적 임무들을 수여받게 됩니다. 이를 특별하게 ‘셀틱 수도자 교회’ 라고 일컫게 됩니다. 사목적 임무들을 따라서 아일랜드 수도원주의는 그들이 도달한 지역에서 교육과 라틴 문화의 유산을 보호하는 길을 열게 됩니다.

 

일찍이 브리튼 섬의 중심부로 확장되었고, 유럽 대륙으로도 향했던 이런 선교적 투신은 금욕적 수도회에 뿌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대한 금욕적 거부를 완성하기 위해 수도자들은 보속에 대한 영적 원의를 갖고 자신들의 조국을 떠났으며, 낯선 나라들에서 수도원과 은수적 작은 집단을 창건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수도자적 이상은 활발했습니다. 낯선 곳을 순회하며 선교 활동을 벌였던 그들은 순회 설교사가 되기도 합니다.

 

또한 각 지역의 군주들과 메로빙거 왕들은 이방 수도자들의 수도원들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 스코틀랜들인들의 가장 유명한 수도원의 하나가 바로 젊은 성 콜롬바노(Colombano)에 의해서 창설된 루쎄이(Luxeuil) 수도원입니다. 콜롬바노는 계속해서 이태리 북부로 내려갔고, 거기서 615년에 자기가 창설한 보비오(Bobbio)에서 죽게 됩니다. 이처럼 메로빙거 왕조하에서 수도원은 선교에 봉사하였고, 한편으론 왕국의 정치적 선도 역할도 하였습니다. [2017년 4월 16일 예수 부활 대축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4)

 

 

앵글로색슨인들의 선교

8세기 중반부터 앵글로색슨인들의 활동이 시작됩니다. 스코틀랜드인들과 가까이서, 그리고 프랑크인들 주변에 또한 앵글로색슨 선교사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 사이에는 자주 경쟁과 긴장이 있었는데, 그것은 대륙의 수도원주의에 어떤 새로운 족적을 남기기 위한 목적과 교회의 조직에 대한 새로운 길을 열고 싶은 염원에서 기인하였습니다.

앵글로색슨 수도자들은 영국으로부터 온 이들이었습니다. ‘브리타니아-로마’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아마도 로마인들이 떠난 이후 홀로 남겨진 이들이 백성들에게 큰 영향력을 가진 아일랜드의 선교사들과의 친교 안에서 서로 신앙을 실천하면서 살아남았을 것입니다. 이런 선교는 앵글로색슨인들의 업적에 의해서 중단되고 멈춰졌습니다. 앵글로색슨인들에 대한 그리스도교화의 결정적인 지원은 로마로부터 오게 됩니다. 596년 대 그레고리오(Gregorio Magno) 교황은 영국에 성 안드레아와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장상을 일군의 수도자들과 함께 파견합니다. 이런 선도는 지속적인 성공의 길로 방향 지어졌습니다. 이 나라에는 셀틱-아일랜드적 교회 형식과의 긴장관계 안에서 로마의 모델을 따르는 선교적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로마 관습에 대한 노선은 교회의 건설에서 무엇보다 두드러졌는데, 다시 말하면 주교의 인도와 대도시들과의 협력 안에서 개별 주교좌들의 통합이었습니다. 로마에서 도착한 타르소의 테오도시오(Teodosio di Tarso)는 캔터베리의 대주교(669-690)가 되었고, 그는 앵글로색슨 교회의 조직가였습니다. 로마 교회적 체질은 받아들여졌지만 사도적 선교들의 영적, 문화적 생활의 중심들은 여전히 셀틱과 수도원들의 곁에 남아있었습니다. 수도회적 필수 요소가 주교좌들 가까운 곳에 수도원들의 설립을 통해 보여집니다. 민스터 교회는 이런 고대 로마의 주교적 교회와 셀틱-앵글로색슨의 수도회적 교회 통합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주교는 그러므로 수도원장이고, 수도원장은 주교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동화와 그리스도교화는 좋은 결과들은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실세 8세기의 초에 앵글로색슨 교회의 황금기가 시작되었고 그 시대는 주목할 만하게 문화적 만개에 이릅니다. 이 교회는 ‘문화-학문’에 전념한 아일랜드의 유형보다 더 강렬한 수도원주의에 의해 지지되었습니다. 그 시초에 가장 유명한 이는 공경하올 베다(Beda il Venerabile +735)였습니다. 앵글로색슨 수도원주의 또한 베네딕도의 규칙을 일찍이 받아들였고, 그것은 로마 모델의 연속성의 표징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순례’라는 수도자적 이상은 사도적 선교 봉사에 대해 앵글로색슨 수도자들로부터 더욱 자각되었습니다. 그들의 선교지는 유럽 대륙에서도 색슨인들과 투린지인들에 의해서 점령된, 그래서 아직 교회가 적게 받아들여지고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들이었습니다. 또한 이 선교는 프랑크인들의 봉사에 의해서 이루어졌거나, 혹은 라인 강 오른편 지역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카롤링거 왕조에 의해서 완성되었습니다. 유럽 대륙에 대한 앵글로색슨의 가장 대표적이고 알려진 인물은 바로 독일인들의 사도 윈프리드 보니파시오(Winfrid Bonifacio)입니다. 그는 671/673년경에 태어났고, 앵글로색슨 수도원주의의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다시 말하면 금욕적 · 선교적 문화와 활동이 자리한 영역에서 자랐던 것입니다. 프리소인들의 성공적이지 못한 첫 선교 활동 후에 718년 보니파시오는 새롭게 선교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그의 첫째 목적은 로마의 교황으로부터 선교 직무를 얻어내고자 함이었습니다. [2017년 4월 23일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5)

 

 

지난 호부터 보니파시오의 선교에 대해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왕의 보호는 물론 로마로부터 선교적 직무를 직접 수여받고 싶어 했습니다. 결과 그레고리오 2세(Gregorio II) 교황은 719년 5월 15일 그에게 ‘독일의 야만족들’ 사이에 선교를 위해 내려가라는 명을 내리게 됩니다. 로마와 긴밀하게 연결된 이런 표현은 다른 앵글로색슨 선교사들의 예를 따라서 로마의 순교자 보니파시오의 이름을 계승할 기회를 획득하였습니다. 그 때부터 보니파시오는 모든 것에서 로마 모델과 연결되었고, 서신을 통해 로마의 지시를 받고 그의 전 생애 동안 로마와 함께 하게 됩니다. 722년 그는 로마에서 주교로 축성되었고, 교황에게 충성의 선서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로마 주교와 자신의 대주교좌와의 특별한 의존 관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런 관계의 표현으로 732년 그는 팔리움을 하사받습니다. 마침내 738년 그레고리오 2세 교황은 그를 어떤 지역 교회를 건설할 직무로, ‘성베드로부터 독일을 위해 보내진 이’(Missus sancti Petri per Germaniam)라는 호칭으로 부릅니다.

이런 계획을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보니파시오는 로마 교회의 모델을 따라서 프랑크 교회의 재조직과 개혁을 연결시키고자 했지만, 정치적 상황은 그렇게 호의적이지 못하였습니다. 카를로 마르텔로(Carlo Martello, 714-741)는 당시 프랑크 왕국의 실질적 군주였는데, 그는 이런 상황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고 모든 것이 자신의 주교직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앵글로색슨인들의 열렬한 선교 계획 안에는 이미 수많은 다툼들이 예견되었습니다. 이런 다툼을 통해서 그의 선교 활동에는 그늘이 드리워졌고, 실패를 향하게 되었습니다.

때때로 보니파시오는 이런 다툼들로부터 거리를 두었고, 선교적 활동과 수도원의 창설에서 만족을 찾았습니다. 아주 짧은 기간 동안 그는 바비에라의 공작에게서 지원을 받았고, 738년과 739년 사이에 적어도 교회적 서열의 대략을 수행해 낼 수 있었습니다. 이 외에도 틀림없이 수도원 주교좌들과 나라 안의 순회 주교들 사이에 어떤 연결이 있었고, 그렇게 그것은 그 자신의 앵글로색슨 조국에서 관습이 되어갔습니다. 이런 민스터와 같은 주교좌들은 짤쯔부르크(Salisburgo), 라티스보나(Ratisbona)와 파사우(Passau) 등에서 건설되었습니다.

741년 카를로 마르텔로가 죽은 후 보니파시오는 프랑크 왕국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후계자들인 카를로만노(Carlomanno)와 피피노(Pipino) 등에서 보니파시오는 가끔 그의 협조자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왕국의 연속된 시도들은 자립 교회들의 남용들을 제거하고, 그들 군주들의 간섭을 제한하는 법률을 공포하기에 이릅니다. 이것은 라인강 동편의 지역에서 교회의 조직의 주제들을 다루는 것이었습니다. 보니파시오는 대도시 쾰른에 새로운 교회의 주교좌를 건설하기에 이릅니다.

교회 정치에서의 새로운 긴장은 그의 이런 계획의 구체화를 방해하게 됩니다. 이런 시도는 보니파시오를 수렁에 빠지게 하였고, 보니파시오는 단지 마곤자(Magonza, 747)의 주교좌 만을 선정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 정치에서 그는 늘 거리를 두고자 했습니다. 그의 생애의 마지막에이 노인은 마치 우트레히트(Utrecht)의 임시 주교처럼 프리소니인들(Frisoni) 사이에 새로이 선교활동을 시작합니다. 그는 754년 6월 5일 견진성사를 위해 이동하던 중 도쿰(Dokum) 근처에서 이방인의 습격으로 숨지게 됩니다. 그의 무덤은 현재 풀다(Fulda) 주교좌에 안치되었습니다. [2017년 4월 30일 부활 제3주일(이민의 날)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6)

 

 

대 카롤링거 왕국의 선교 활동

카를로 대왕(Carlo Magno, 768-814)과 ‘열심한’ 루도비꼬(Ludovico il Pio, 814-840) 통치하에 정치적 확장과 그리스도교화의 지역적 중심들은 제국의 경계 지역에 이릅니다. 남동쪽으로는 저지대 오스트리아(Bassa Austria), 즉 동방 마르카에 이르고, 북동쪽으로는 색슨(Sassonia) 지역에 이르게 됩니다.

색슨인들의 그리스도교화는 커다란 어려움을 안고 있었습니다. 강력한 저항이 있었는데, 그들이 계속해서 열성적으로 다시 취하는 저항의 첫번째 영역은 순수 정치 영역이었습니다. 대표자인 비두킨도(Viduchindo)는 그리스도교와 연결된 프랑크화(Franchizzazione)를 대항하여 저항을 조직하였고, 카를로 대왕은 아주 강력한 방법으로, 즉 색슨인들과의 수많은 전쟁을 통해서 그것을 무력화하려 했으며, 782년에는 베르덴(Verden)의 유혈이 낭자한 전쟁을 통해 그 원의를 이루게 됩니다. 785년 비두킨도의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으로 공동체의 그리스도교화에 대한 저항의 원의는 소멸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지역적인 저항들은 9세기가 넘어서까지 끌고 가게 되기도 합니다.

프랑크화와 연결된 그리스도교화는 주교 교회들과 프랑크 왕국 교회의 수도원들을 지원하였습니다. 앵글로색슨적 규율의 영향은 새로운 프랑크인 성직자들과 수도자들 세대를 성장시키게 하였는데, 메츠의 크로데간고(Crodegango di Metz)와 성 디오니시오의 풀라도(Fulrado di s. Dionigi)와 같은 이들이었습니다. 앵글로색슨의 영향으로 강화된 제도들은 개인적으로, 그리고 물질적 방법들을 통해 공동 협력의 형식을 마련하였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교회 창설들의 공고화는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이 외의 수도원들에서는 코비(Corvey)와 베르덴(Verden)의 예에서 보듯, 이들은 처음부터 앵글로색슨의 모델을 따라 주교 교회에로 들어갔고, 민스터(minster)의 형태를 띠었습니다. 이런 교회들이 뮌스터(Munster)와 오스나부르크(Osnaburck), 파더본(Paderbon), 함부르크(Amburgo), 할버스타트(Halberstadt) 등에 교회가 창설되었습니다.

교회의 조직화와 선교 활동의 중심과 같은 주교좌는 이제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카롤링거식의 개혁들은 독립 교회들의 남용들을 제거하고자 했고, 교회의 지역적 쇠락에 제동을 걸고자 하였습니다. 아주 명확한 권한으로 제한된 사법권은 이제 주교들의 공적인 임무들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카를로 대왕의 통치 하에서 프랑크 왕국 교회의 조직화는 완성에 이르게 됩니다. 그의 영토 내에 포함된 교구들은 대도시들의 연합 안에서 결합되게 됩니다. 훗날 게르만 왕국의 영역에서 780년과 782년 사이에 마곤자(Magonza)가, 그리고 795년에 쾰른(Colonia), 798년에 짤즈부르크(Salisburgo)가 대교구로 승격하게 됩니다.

7-9세기에 이르는 동안 우리는 게르만인들과 그 주변, 또한 이미 슬라브인들에게서 급속한 교회 건설의 공고화를 통해서 눈에 띠는 그리스도교화에 주목하게 됩니다. 이런 결과들은 틀림없이 고중세 그리스도교의 내적인 힘을 생각하게 합니다. 또한 이런 성공에는 정치적 압박과 프랑크 왕국의 보호가 있었음을 잊고 지나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선교 영역의 나머지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순회 금욕자들의 근심어린 충동이 선교적 힘을 동방과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했지만, 그곳들을 향한 길은 아랍인들에 의해서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또한 아랍인들의 북 아프리카와 스페인으로의 진출은 당시의 유럽인들을 유럽 내부로 집중하게 했습니다. [2017년 5월 7일 부활 제4주일(생명 주일 · 성소 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7)

 

 

게르만 왕국 교회의 지역에서의 선교 활동

이제 프랑크 왕국의 선교에 이어서 게르만 지역에서의 선교 활동을 살펴보겠습니다. 9세기의 첫 순간을 보면 선교적 확장은 이제 침체가 확인됩니다. 그것은 프랑크 왕국 내부의 쇠퇴와 그 시대에 많이 발생했던 재난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당시는 노르만인들의 (바이킹족) 공격이 북쪽과 서쪽에서 있었고, 남동쪽에서는 헝가리인들의 침공도 있었습니다. 또, 남서부에서는 사라센인들의 침입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서방에서는, 다시 말하면 프랑스의 중부 지역은 봉건제도가 확장되고 진행됨에 따라서 지역 귀족들의 손에 들어가게 됩니다. 10세기가 되어서야 제국 동쪽의 상황이 안정화에 이릅니다. 다양한 부족들은 ‘게르만 왕국’에 융합되게 됩니다. 내부의 강화를 통해서 또한 확장의 충동도 강화됩니다. 방향성에 대한 의심 없이, 동쪽을 향한 확장은 그러므로 슬라브인들의 게르만화와 그리스도교화를 의미했습니다. 이런 활동은 아무런 문제없이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홀스타인(Holstein)과 메클렘부르크(Mecklemburgo) 슬라브인들의 게르만화와 엘바 동편의 지역의 게르만화는 칼을 이용한 폭압적인 선교를 통해 해결됩니다. 엘바 지역의 슬라브인들의 그리스도교화를 위한 가장 중요한 요새는 막데부르크(Magdeburgo, 986년 오토 대제에 의해서 설립된 교구)였습니다. 이 교구의 설립으로 황제는 위대한 계획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막데부르크는 폴란드(Polonia) 그리스도교화의 거점이 되어야 했고, 뒤이어 제국과 합병하게 됩니다. 로마 그리스도교 제국의 초국가적 이상은 그러나 마지막에 와서 ‘국가적’인 것으로 귀결됩니다. 폴란드는 서방 그리스도의 영역에서 독립적인 왕국이 되어가고, 같은 상황이 헝가리에서도 반복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또한 이런 나라들의 경우는 시초에서부터 제국 교회에 끼워 넣을 계획들이 있었습니다. 브레마의 아달베들토 대주교처럼 성 안스카리오의 업적을 지원하면서, 덴마크와 스웨덴 노르웨이의 그리스도교화에 커다란 자극을 주었습니다. 브레마는 스칸디나비아 전 지역을 포함하는 지방 교회의 대주교좌가 됩니다. 같은 프로젝트가 파사우의 펠레그리노(Pellegrino di Passau, +991)에 의해 다뉴브의 남동쪽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체코인들의 그리스도교화는 너무나 빨리 이뤄지는데, 여기서는 무엇보다도 국가적 관점이 두드러집니다. 이런 선교는 9세기까지 서방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프라하의 주교좌는 973년에 설립되었고, 이후 1344년까지 마곤자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프러시아인들의 그리스도교화는 성전기사회 테우토니치(Ordine Teutonico)들의 업적으로 13세기에 이뤄지는데, 지역 주민들에 대한 대량살상과 게르만인들에 의한 식민화를 통해 이뤄집니다. 중세기에 마지막으로 개종한 유럽인은 리투아니아인들입니다. 그들의 왕 Jagellone의 세례로 개종이 완성되는데, 그는 세례 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왕이 되어 블라디슬라오 2세(Vladislao II)라 칭하게 됩니다.

위에서 살펴본 선교의 활동과 그리스도교화의 뿌리 내림의 활동들에서 우리는 12세기의 개혁된 수도자들의 중요한 역할을 보게 되는데, 그들 중에는 시토회 회원들, 아오스딩회 회원들이 있었습니다. 초기에는 몇몇의 주교들의 영향도 보입니다. 이어서 13세기와 14세기에는 새로운 탁발 수도회들이 선교 활동에 있어서 두드러진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세속 성직자들, 주교좌의 참사회원들과 주교들은 선교와 사목에 관한 임무들을 수도자들에 다시 한 번 양도하게 됩니다. [2017년 5월 14일 부활 제5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8)

 

 

개종의 동기와 선교의 방법들

 

고중세 시기 동안 게르만인들의 그리스도교로 개종은 결정적으로 ‘이름 없는’ 과정으로 알려졌습니다. 그것은 몇 세대 동안을 거쳐 지속되었습니다. 주교들의 교회들과 수도원들, 그리고 다양한 교회 조직들은 그들이 도달한 지역에서 교회의 공고화를 위한 후원의 거점들을 형성하였습니다. 개종의 동기들이 혼란스러운 가운데, 개종이 결정되었습니다. 이런 개종들은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오직 외적인 관점에서만 그것을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정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회적 구성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고중세의 사회는 오직 귀족만이 정치적 자유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모든 개종의 시도들은 그러므로 이런 계급에서 전개된 것들이었습니다. 특히 많은 경우에 왕들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만약 왕들이 개종하게 되면 결정은 취해진 것입니다. 하위의 귀족들의 개종도 오직 시간의 문제였고, 그들에게 속해 있는 낮은 계층들은 단순하게 자신들 군주들의 종교의 변화를 따르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귀족들에게는 개종의 이유들이 필요했습니다. 그 이유들이란 매우 다양했습니다. 혈연관계와 그리스도인 가문의 공주들과의 혼인은 중요한 것들의 하나였으며, 그 중에서도 그 지역 그리스도교 백성과의 관계는 가장 두드러진 역할을 하였습니다. 프랑크인들의 경우는 참으로 그러했는데, 그들은 갈리아(Gallia)의 고대 로마 지역에 자리 잡았습니다.

 

각 국가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정치-사회, 그리고 문화적인 삶에서 큰 영향력을 획득하였습니다. 신앙과 교리, 그리고 삶에서의 일치와 다양한 방면에서 권리와 법률에 의한 규정들은 이방 게르만인들보다 우위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지각할 만한 조직적이고 영성적이며, 그리고 도덕적이고 문화적인 우위성은 아주 고려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자기 왕국의 통치를 위해서 클로도베오(Clodoveo)는 갈리아 교회 주교들의 지원에 의존하였습니다.

 

이런 전환과 진행은 이방 게르만인들에게 많은 것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은 그들이 자신들의 종교성으로부터 어떤 변절을 용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고대 후기에는 그리스도교 신앙도, 이방 종교들도, 정치적-종교성의 영역 안에 서로 동의되어 갔습니다.

 

게르만과 셀틱, 그리고 노예들로 이뤄진 장원 사회에서의 고대 초기 종교심은 개별적, 그리고 공동체적인 지상과 천상에서의 복락으로 방향지어졌습니다. 신들의 축복은 의무들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즉, 주요한 계명들에 대한 준수, 다시 말하면 고대로부터 전해진 관습과 풍습들을 준수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배와 의식들은 압도적인 중요성을 갖게 됩니다.

 

고대 후기 그리스도교는 국가와 대중적인 종교라는 관점에서 문화적 주목을 받는 종교로 자리매김 되었습니다. 그 안에서 온전히 신적 계명의 준수와 예배의 신중한 적용이란 의미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전적으로 객관적인 하느님께 대한 예배(cultus Dei)였습니다. 그러므로 고대 후기에서 중세 초기로의 이행은 종교의 문화적 종교적 개념보다 종교적 실천에 있어서 이방 종교에서 그리스도교에로 결합되어 가는 교량 역할을 하였습니다. 고대 후기 교회의 종교심은 교회의 거룩한 행위들의 다양화를 통해서 행실의 규정들의 풍부한 목록을 만들 수 있었고, 그런 규정은 삶과 관습들을 안정화하고 하나 되게 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고대 후기 그리스도교는 이방 종교성을 더욱 제공하였던 것입니다. [2017년 5월 21일 부활 제6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9)

 

 

관습과 풍습들을 가로지르는 공동체적 삶의 성취들에 대한 법적인 보호와 단일화는 그러므로 셀틱과 게르만, 그리고 슬라브 민족들의 농촌 공동체에 아주 근본적인 것들이 됩니다.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은 예절을 준수하던 하나의 종교로부터 그들을 분리시켜버리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더욱 풍요롭고 심오하게 하였습니다. 이런 수용의 첫 번째 국면에서 그리스도교는 넓은 영역에서 고대의 관습들이 계속되기보다는 새로움으로 향하는 전조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풍요로워진 내용은 그들에게 동일한 가치로 남아 있게 됩니다. 말하자면, 바뀐 것은 오직 상표뿐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강력한 하느님은 지금껏 그들이 불러왔던 신들의 자리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죠.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은 어떤 ‘숭배 대상의 교체’(cambio divinita)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부족 신에서 다른 신으로의 변화는 게르만인들에게서 먼저 이뤄졌습니다. 갈리아 지역의 점령은 그러므로 그곳에서 섬겨졌고, 가장 강력하게 그 분을 드러내게 했던 ‘하느님’을 받아들임에로 그들을 향하게 했습니다.

이런 개념은 개종의 증거들 안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투르의 그레고리오(Gregorio di Tours)가 언급하기를, 첫 번째 개종에서 클로도베오(Clodoveo)는 군주들에게 조언을 청하였고,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유한한 신들을 버립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의 불멸의 하느님께로 돌아서겠습니다.”고 그에게 응답하였습니다. 이런 상상의 담화에서 우리는 상황의 본질에 대하여 물어봐야 합니다. ‘불멸의 하느님’을 통하여 게르만인들은 개별적이고 공동체적으로도 동의되는 완전한 구원의 보증을 생각했고, 그것은 복되고 평화로운 한 해를 이루는 구원을 의미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하느님의 능력은 전쟁에서의 행운 속에서도 또한 그것을 드러내었습니다. 알레만인들을 상대로 한 첫 번째 전투에서 투르의 그리고리오는 클로도베오에게 이렇게 기도하도록 했습니다. “지금 적들에 대한 저의 승리를 허락하여 주소서. 저는 당신을 믿기를, 그리고 세례 받기를 원하니, 당신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소서!”

다른 기적들과 그리스도인들의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시는 업적들이 그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마치 더욱 두드러진 증거의 하나로 보니파시오의 업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믿는, 가이스마르(Geismar)의 부족 신전인 도나레이케(Donareiche)의 파괴를 그들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개종으로 이끌었던 동기들의 혼란스러움과 출발의 상황은 그리스도교화 선교 방법에 있어서 수많은 불필요한 상황을 빚어내었습니다. 낮은 계층의 사람들은 그들 군주들의 종교의 교체에 단순하게 참여할 뿐이었습니다. 그들 후견인들의 교회는 그리스도교의 예배와 새로운 예절들을 배우게 되는 확실한 장소였습니다. 이런 그리스도교의 외적인 수용의 모습은 ‘부족들의 세례’ 형태로 아주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내밀한 수용은 반대로 아주 완만하고 어려운 보를 이뤄갔습니다. 이런 상황은 신앙의 실천에서 하나의 그리스도교적 형식과 이방의 개념이 혼합된 형태를 결정짓게 됩니다. 사목적 교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의무들의 항목들을 구성하는 고해성사와 그리스도교 교리들의 학습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이제는 고 · 중세의 종교성의 특성들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게르만, 셀틱, 그리고 슬라브인들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고, 이것은 어떤 자국을 남기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그 역의 과정도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그리스도교 개종자들은 자신들의 개념들과 필요에 따라 전통을 변형시키게 됩니다. 이런 느린 동화의 결과가 그 반향들의 긴 역사와 함께 고중세(alto medioevo)의 종교성을 이룹니다.

이제 그 특성들에 대해서 하나씩 살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2017년 6월 4일 성령 강림 대축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10)



고중세 종교성의 특징들 : 교회에 공동체적 그리스도교의 부재

모든 중세를 통하여 매우 중요한, 교회 공동체에 기초한 ‘그리스도교의 부재’라는 사실은 주교적인 공동체에 기초한 교회들을 변형과 해체로 이끄는 일종의 ‘자치적인 교회들의 전파’로 고려되어야 합니다. 이런 변화와 변형의 과정의 끝에 가서야 중세적 ‘본당’(parrocchia)에 도달하게 되고, 이렇게 도달한 본당은 본질적으로 백성들의 삶에 있어서 통치와 관리의 중심이 되어 갑니다.

본당은, 즉 중세적 본당은 고중세의 그 시작에서부터 어떤 특별한 ‘공동체 형태’를 목표로 삼지는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교로의 걸음에서 실제로 게르만인들의 사회적 삶의 형태들이 이런 상황에 적합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례와 함께 마침내 한 집단이 하늘의 시민이 되고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자동적으로 가시적 사회 조직(본당, parrocchia)으로의 이행과 연결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삶의 상황, 문화적 현실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가족과 부족 등으로 구성된 한 무리의 전체가 삶에서, 특히 그리스도교적 실천을 통해서 어떤 유사함을 간직하며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그러므로 각 개인 삶에 있어서 우리가 생각하는 ‘교회적 공동체’를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예배들과 성사들의 성취들은 다만 그들이 삶을 지속하는 가운데, 또 전통의 삶과 문화를 계속하는 가운데 그들이 살고 있고 유지해온 기존의 사회적 구조를 거룩하게 하고, 그것의 안정성을 보증하는 것으로 작용 했던 것입니다.

이런 변형과 변화는 필연적으로 또한 말씀과 성사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자기 현실화라는 기능에서 가치 서열의 변동을 가져오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면 성사들을 통해서 어떤 공동체 창설이란 외양은 두 번째 영역으로, 즉 그들 삶의 의미의 변화, 가치의 변화라는 단계로 옮겨지게 됩니다. 존재하는 집단성의 성화는 틀림없이 이런 방식으로 순서 지어졌습니다.

이처럼 이교도 사회 문화와 그리스도교의 결합을 통하여 고중세 사회는 더 이상 고대 그리스도교처럼 개별적이고 독립적이지 않고, 무엇보다도 존재론적 의미에서 정치적이고 교회적인 의미의 ‘두 세상의 시민’(cittadino di due mondi)이 되게 합니다. 세상은 이제 전통적 종교성에 따라 이뤄진 거룩한 관계를 의미하게 되고, 또 그 세상은 이제 교회적 공동체를 흡수한 현실의 정치적 공동체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정치적 종교성의 사회적 일원론, 즉 자신들이 갖고 있던 종교성과 세상이 그리스도교라는 형태로 하나가 되는 체험은 ‘사제적 왕국’(sacrum imperium)처럼 고중세 시대 자치적 교회들 현상의 ‘형이상학적’ 이유로 간주되었습니다.

은총의 중재

고대와 중세 초기 종교성으로 인해 그 시대 사람들은 현실에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은총의 관계를 힘들게 이해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하느님의 은총과 연결된 어떤 것들은, 다시 말하면 현실에서 마귀에게 점령되지 않은 거룩한 물건들과 같은, 감각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중재들의 요소가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거룩한 예식의 중재자들에 의해서 마귀적 점령은 구마예식으로 해방 되었고, 반면에 축복은 하늘의 복된 힘을 부르는 방법을 통해 이뤄졌습니다. 거룩한 예절들 안에서 거룩한 말씀과 행해진 구마와 축복은 ‘은총의 중재자’들을 거룩한 것,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였습니다. [2017년 6월 11일 삼위일체 대축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11)

 

 

미사 - 사제 - 영성체

은총에 대한 개념은 특별한 방법으로 미사에 대한 이해를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공동체적 배경으로부터 떨어져나갔기 때문에, 그것은 상이한 해석을 피할 수 없는 새로운 실천들과 강조점들에 있어서 근본적인 변화들이었습니다. 특별히 두드러지게 적용된 것은, 미사가 전례적인 선포를 의미하는 공동체의 건설에 봉사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제 은총의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경신례적 사건으로 변화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미사 안에서의 관심은 이제 그리스도의 현존에 집중되었고, 종종 실재적 육체의 구체성에 관심을 집중시켰습니다. 그러므로 빵과 포도주의 ‘실체 변화’(transustanziazione)가 중요해졌고, 그 나머지는 부수적 요소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미사에서 ‘실체 변화’를 통한 거룩한 은총의 현존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사는 이제 가능한 한 자주 거행되었습니다. 미사는 먼저 백성들을 위해 거행되었습니다. 그러나 백성과 함께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전례적 언어의 특이성이 나타나는데, 라틴어가 그것이었고 그것이 문제를 드러내지도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미사에 대한 이해가 아니고, 사제의 편에서 예배의 틀림없는 정확한 완수였던 것입니다.

사제는 마치 은총의 중재자처럼 소개되었고 이해되었습니다. 이런 개념은 사제에 대한 강력한 재평가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것은 또한 사제들을 평신도들로부터 분명히 분리하게 됩니다. 이런 외견에 또한 사제에 대한 저평가도 함께 이뤄지기도 했습니다. 중세 초기에 사제의 ‘신비로운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능력’이 자주 말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을 통해 공동체의 사회적 구성원들이 합의를 이루어 갔습니다. 이를 통해 고대 교회에서 성직자는 교회 공동체의 인도와 지휘에 대한 적절한 임무들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고중세가 되면 교회는 정치적 공동체로 변화되었고, 인도와 지휘의 임무들은 지역의 귀족들에게 맡겨지거나 아니면 더 넓은 의미에서 왕의 권위로 고려되었습니다.

당시는 전례적 올바른 성취와 성사의 초월적 개념의 영역에 만족합니다. 그러나 사제에게 마치 금욕주의자처럼, 예배적인 해석을 유지하기 위한 순수성이 요청되었습니다. 가끔 엄격한 금욕주의가 성행하였고, 도나티스트(donatist)의 경우처럼 품위에 합당하지 못한 자들의 성사 거행과 효과를 연결짓기도 했습니다. 금욕적 엄격주의는 틀림없이 사제 수도자의 확산에서 문제가 될 것이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든 사제는 평신도보다 더 합당한 자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실제로 사제만이 미사에서 일치하였습니다. 백성은 아직 ‘거룩한 시간’ 안에서만 통교하였습니다. 영성체 앞에서 ‘중세기 사람들의 두려움’은 여러 이유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현상은 엄격한 금욕주의가 큰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엄격한 심판자 그리스도의 이미지에 대한 변화가 없었습니다. 또한 유해에 대한 신심, 즉 일치가 아니라 공경을 의미하는 유해에 대한 신심 또한 일정부분 영향을 주었음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생애에 기초한 종교심은 13세기까지 성체 신심의 유포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공경의 형식들은 유해의 공경으로부터 유래했고, 그 형식에 따라 결정되었던 것입니다. 본질적인 요소는 ‘거룩한 두려움’과 ‘실재적 현존’이었습니다.

이제는 중세의 통회와 고백, 그리고 그것에 대한 용서를 살펴보겠습니다. [2017년 6월 18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12)

 

 

고중세 종교성의 특징들 : 통회 - 고백 - 용서

이 주제는 은총과 공동체의 결핍에 대한 형이상학적 개념들의 깊은 곳을 묵상하게 합니다. 고대 교회의 속죄의 제도는 공동체 기능의 중요한 하나의 요소를 이루었습니다. 고중세 시대의 속죄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계명, 위반과 속죄를 표현하는 용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통회는 속죄와 연결되었습니다. 속죄는 죄의 대가를 기워갚음을 통해서 자신에게 의로움과 평화가 재건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거룩하게 하고 충만하게 하기 위해 값을 치르는 행위는 아주 정밀하게 규정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속죄를 위한 조력의 객관성이 본질적인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보충적인 방법으로 혹은 그것을 대체하는 어떤 행위들로 충족될 수 있었습니다.

항상 반복 가능하며, 개인적인 고해를 통한 죄의 성사적 용서라고 이해된 중세적 고해 성사는 오랜 변형의 결과물 입니다. 그 속죄 과정의 변화를 보면 주교 앞에서의 공적인 속죄가 이제 개별화 되었고, 기원에서 평신도적 이었던 ‘영혼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속죄적 대담’은 성직자화 되었습니다. 이런 연결과 변형의 첫 번째 걸음은 이미 고대 후기 교회에서부터 사목적 필요들을 통해서 시작됩니다. 공동체적 특성이 강하지 않던 아일랜드-영국적 영감의 흔적은 그리스도교에 금욕적이고 수도자적인 사적 고백의 자국을 남겼습니다. 이 사적 고백은 죄의 고백과 속죄의 부과와 재일치와 용서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죄사함의 허용은 죄에 대한 ‘갚음’과 깊게 연결되었습니다. 죄의 고백을 통한 죄사함의 발전과 전파는 개인적인 속죄를 통한 사적인 고백의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11-12세기 서방에서는 이런 과정이 모든 지역에서 그 완성에 이르게 됩니다. 이후 스콜라 철학은 이런 결과들을 결의론적 관점보다 신학적 관점에서 숙고하였습니다.

속죄와 속죄를 위한 행동을 바라보는 중세 신심의 구별되는 특징이 될 중세 ‘용서 예식의 발전 과정’에서는 고중세의 속죄에 대한 개념을 첫 번째로 고려해야 하고, 공적 속죄의 해체가 그 다음으로 고려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 개혁된 속죄의 형식에 따르면, 몇몇의 규정된 죄들은 공동체와의 재일치가 주교에게만 맡겨져 있었습니다. 11세기 중반부터 성행한 용서의 예식은 죄사함과 함께 분명하게 속죄적 용서를 위한 회개가 ‘선한 행위’으로 나타나야 했습니다. 첫 번째로, 그리고 그 다음으로도 죄인들의 편에서는 그들의 속죄를 통한 용서를 공적인 그들의 행동을 통해서 완성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는 급속도로 속죄가 스스로 원해서, 자발적으로 하는 것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속죄적인 실천은 완화되어갔고 신심과 관련하여 속죄적 영성의 증대를 가져 왔습니다. 죄의 용서를 위해서는 용서 받기에 합당한 선한 행위들이 제안되기에 이릅니다. -예를 들면 십자군에의 참가, 연구의 의무, 그리고 몇몇의 정해진 사목적 의무들, 교회의 건설을 지원하거나 애덕 실천 단체를 지원하거나 하는 등이었습니다. 이것은 금전을 기부하거나 혹은 직접적인 노동을 통해서 이뤄졌습니다. 말하자면 개별적인 속죄의 기능은 시대의 사회적 요청에 호응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죄인들의 용서에 대한 형식에서 선한 행위의 가치는 신실하게 남아있었습니다. 하지만 스콜라적 시선은 허물의 결과와 죄에 대한 벌 사이의 구분에 집중하게 되었고, 죄와 벌에 대한 외적인 결과들은 신적인 심판의 자비 아래 놓이게 되고 그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의 힘으로 용서되게 됩니다. 그리고 고해는 죄인의 참회와 성사적 용서가 만나는 은총의 자리가 됩니다. 그러나 중세의 사람들은 오직 죄들의 용서만을 바라는 이들로 자신들을 한계 짓고 벌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9세기부터는 저 세상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벌에 대한 두려움들의 흔적이 보고되기도 합니다. [2017년 7월 2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 이동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13)



고중세 종교성의 특징들 : 봉건제도와 영주들의 교회 건설로의 변형

후기 로마제국은 4세기부터 제국 고대의 교회 설립을 형성했던 주교적 공동체의 강고한 결합을 해체하는 과정에 진입하게 됩니다. 이 과정은 ‘새로운 영주들’의 편에서는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기 쉽게 했고, 또한 영주들은 자신의 교회를 통해 그 전파를 손쉽게 했습니다.

영주 : 교회와 영주라는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역사를 약간 되돌려 살펴봐야 합니다. 특히 고대 후기도시의 쇠퇴를 고려해야 합니다. 로마 제국 안에서 4-5세기의 아주 과격한 세금정책과 경제적 변혁 이후 로마 제국은 ‘재-고대화’의 사조가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시민들의 삶과 명확하지 않았던 ‘국가성’이라 부를 만한 사고의 해체를 이끄는 과정이었습니다. 고대 도시들은 생활의 모든 기능들이 통합되었고, 도시는 행정과 경제, 그리고 종교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이 중심부로부터 주변의 지역들이 다스려지는 구조였습니다. 이런 ‘재-고대화’ 과정의 결과로 5-6세기에는 자산가 계층의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시골 대토지를 떠나게 됩니다. 이런 소유들을 경제적 의미에서 확실한 소유로 변형시키고, 자신들의 시골 소유물들의 경제적, 종교적 행정적 부분들을 가지고 오면서 ‘봉건 지주제’를 완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국가의 현실에서 재-고대화의 형식과 경제와 행정에서의 농촌 형식으로의 후퇴는 백성들의 관습에 덧씌워지게 되는데, 실상은 국가 행정적 체계와 국가적 삶을 알지 못하던 백성들이 로마 제국으로 유입되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가적 그리고 도시적 현실의 해체는 가속화 됩니다. 초기 중세는 봉건 영주의 관습에 따라 도시의 희생을 통한 삶으로 변화되기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그 시대의 봉건 영주는 사적, 공적 영역의 권리들을 소유하는, 그리고 개인적인 인도를 통해서 어떤 국가적 현실처럼 묘사되는 존재 입니다. 이 권한들은 물리력의 합법적인 사용 권한과 행정적, 법적인 권한, 그리고 백성들에 대한 물리적인 강제와 재물에 대한 의무를 부과할 수 있는 권한과 경찰적 권한들이었습니다.

봉건 지주제는 고-중세 중엽까지 꽃을 피웠고, 봉건 영주는 삶의 모든 부분을 포괄하는 고위층으로 정의됩니다. 최고위층과는 약간의 거리를 두는 이들 영주들은 집과 궁정을 소유하며 ‘장원제도적 권한’에 따라 살았습니다. 이런 봉건 영주제는 사람과 재물에 대한 통치권이 핵심이었습니다.

사람에 대한 통제권에 대해서는 친족들과 그 재산들을 포함한 그에 속하는 모든 것들은 자유가 없었고 종속된 여러 형태로 살았습니다. 이런 후견제도는 자유인과 법률적 권한이 충분하지 못한 이들 사이의 법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이고, ‘후견제’란 용어는 이런 상황, 즉 보호의 필요와 동시에 종속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보호권의 소유자는 보호와 후견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후견이 불필요한 이들은 자유의 상태이고, 이들은 대물림되는 사유 재산을 소유한 이들이었습니다. 재산은 이런 소유자들에게 고귀한 품위를 주었고, 그들은 자신들을 돌볼 위치에 있는 능력자들의 일원이 되게 하였습니다. 재산 없이 자유는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섬기는 존재로 ‘보호’라는 특별한 후견을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런 고위층과 관련하여 교회는 두 개의 두드러진 점이 발견되는데, 첫째는 교회의 모든 것이 이런 후견제도와 관련된다는 점이고, 둘째로 이런 재물에 대한 통치권은 오직 보호만을 의미하지 않고, 재산의 판매와 교환의 권한을 군주가 모두 가짐을 의미합니다. [2017년 7월 9일 연중 제14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14)

 

 

개인 교회의 통치권의 본질

봉건제의 특성은 교회 영주와도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영주는 ‘무엇보다 교회를 통해서, 단순히 세습적인 행적 권한 뿐 아니라, 영적 인도라는 권력을 갖는 방식으로, 교회 영주 밑에 놓여진 어떤 주님의 가문’처럼 정의되게 되는 것입니다.

세습적 권한에 대한 완전한 소유는 재물에 대한 지배권과 관계가 있습니다. 초기 고대 사회 안에서 모든 봉건 영주는 자신의 공동체를 거룩한 공동체로 이해했기에, 신적 예배를 완성하기 위한 하느님의 집이 필요 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영주는 자신의 영토 안에 적합한 건물과 하나의 제단을 건설하고 필요한 부속물들을 기부할 필요가 생겼던 것입니다.

중세 장원적 개념에 따르면, 영주는 근본에서 그 자신의 영토에 건설된 모든 것들을 사용할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집도 그렇게 영주 자신이 건립한 자신의 교회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 집은 자연스럽게 ‘거룩하다’고 여겨졌고, 축성되어야 했습니다. 이제 거룩하게 축성된 물건은 그 모든 부속물들과 함께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 양도됩니다. 오랜 교회적 개념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거룩하게 축성한 물건들은 교회의 재산이 되었고, 하느님의 신뢰받는 주교의 관리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장원제도의 정서에서 이제 그것에 대한 관리는 주교들에게 실제로 옮겨짐을 의미 했습니다. 하지만 소유권은 온전하게 영주에게 남아 있었습니다. 주교나 시노드는 영주에게 보호와 유지의 의무를 위탁하였습니다.

그 시대의 경제적 상황에서, 만약 교회 건립이 땅과 임차지의 기부의 경우라면 이와 같은 임무에서 자유로워집니다. 그러므로 개량적인 법률들은, 특히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 재산의 일부를 마치 교회의 재산으로 분리시키는 것을 재촉하였습니다. 이런 재산에 관한 법률적인 주체는 건설된 교회가 아니고 또한 헌정된 성인들도 아니고, 제단에 보호된 유해도 아니며, 영주가 재산들에 대한 지배권의 소유자라는 자격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설립된 교회는 마치 하나의 ‘회사와 같은 권한’을 손에 넣게 됩니다. 영주가 자신의 이름으로 재산의 일부를 투자하였고, 재산들의 순환에 참여하면서 수익을 얻게 하였습니다. 다른 재산들의 경우에 있어서, 영주는 팔고, 교환하고, 자신의 교회와 그 부속물들을 저당 잡힐 수 있었고, 선물하거나 혹은 그것을 결혼 선물로 하거나 혹은 과부의 유산이나 이런 류의 다른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세속적인 어떤 것으로 변형시키는 것만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재산들의 순환에 교회를 포함하였어도 관리와 유지의 의무를 허물 수는 없었습니다.

개인 교회의 설립과 세습 가능한 변형은 어쨌든 여러 장점들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첫째는 좋은 ‘관리’를 통해서 수익이 증가할 수 있었습니다. 이 외에도 교회 재산처럼 분리된, 투자된 이 재산이 잘 보호되는 결과를 내었습니다. 타인에 의한 손실들은 특별한 처벌이 부과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상속적 분할들에 대항하여 재산은 잘 보호되었고, 그런 보호를 통해, 창립 가문의 영주를 안정화하는 데도 공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은, 다시 말해서 이런 봉건 영주에 의한 교회들의 건설은 중세의 일반적인 신심적인 건립이라는 범주 안에 포함되게 됩니다. 이것은 건설자에게 적지 않은 비용이 드는 것이지만, 그들에게 재물적인 이득을 가져다주기도 하였습니다.

자연스럽게 종교적 외양도 또한 눈에 띄는 중요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의 교회의 건설은 아주 신심 깊은 일이었고, 그것은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이며, 이 외에도 성인들의 중재와 보호를 담보하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초기 교회들은 건립자 가족 무덤 위에 설립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개인 교회의 경우 하느님의 집은 가족의 무덤과 같은 것이고, 성인은 마치 궁정과 가문의 천상적 보호자였던 것입니다. [2017년 7월 16일 연중 제15주일(농민 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15)

 

 

영적 인도에 대한 온전한 통치권은 먼저 사람들에 대한 우위성에서 흘러옵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사제들과 관련되었고, 이는 사제 고유의 권한으로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개인 교회의 경우 ‘거룩한 예배’를 위해서는 주교로부터 축성된 사제가 필요했습니다. 고대의 교회 개념에 따르면 축성은 주교와 법적인 관계를 결정짓는 것이었습니다. 봉건시대 정서에서 이것은 실천적으로 사람들에 대한 주교의 우위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개인 교회에서 수도자들의 활동들은 주교의 후견 아래 놓이지는 않았고 그 영주의 개인적인 권위 아래 남아있었습니다. 이것은 종종 억압적인 의존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완화하기 위해 8-10세기의 카롤링거 왕조의 개혁 법령은 사제들의 개인적인 자유와 미사를 통한 소득의 일정 부분을 양도하여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할 것을 재촉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개인 교회에 양도된 재산의 일부분이 이곳에 활동하는 사제들의 생계를 위해 맡겨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영주로부터 개인적인 종속과 영적 인도의 절대 권한을 타협하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실제로 수도자를 채용하고, 그의 봉사 의무 조항들을 결정하였으며, 자신이 창립자라는 생각에서 자격을 취소할 수도 있었습니다. 영주는 임명권을 이유로 거기서 세금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죽은 이 명의의 유산 또한 세금을 징수할 수 있었고, 자리가 비어있는 곳의 수익들도 잠정적으로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과 재산에 관련된 법률적인 개념들은 영주 개인 교회에서 사제가 행한 모든 종교 활동들에 대한 세금 징수를 의무로 만들어 갔습니다.

이런 경우에 고유 교회 수장의 영적인 권한은 마치 법적인 권력처럼 구체화되었습니다. 영주는 자신의 신민들에게 자신의 교회에서 종교-교회적 임무들을 다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이러한 ‘종교적 강요’는 논리적으로는 하나의 봉토는 거룩한 공동체라는 생각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이후에도 자주 발생하였고, 한 지역에서 서로 다른 영주들이 각각의 사회적 그룹을 위해 개인적인 교회들을 건설하였습니다.

법적, 강요적인 통치권은 본당에 대한 중세적 요청의 근원으로 고려되었습니다. 총체적 관점에서 볼 때, 중세 본당의 형성은 복잡하고 다중적인 과정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지역적 상황의 다양함 또한 고려해야 합니다. 시골 지역에서 영적인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은 주교의 임무 중의 하나였습니다. 고대 후기에는 사목적 필요 때문에 ‘영적 돌봄’에 있어서 시골의 중심지들은 점차적으로 독립적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나 조만간 그들은 개별 영주 자신들과 개별 교회의 필요에 의해서 흡수되었고, 이러한 방향으로 변형되어 갔습니다. 십일조에 관한 법률의 도입은 규칙적으로 자립을 향한 과정을 가속화했습니다. 실제로 카롤링거 왕조의 법률들은 본당에 사목적 협조라는 차원에서 도움이 되는 규정을 만들었는데, 이 과세는 모든 농촌 지역에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개별 교회의 통치자들이 자신들의 교회들이 본당의 권리들, 즉 십일조를 부과할 수 있는 권한을 획득하려 했던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같은 동기에서 그 결과들은 반대가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 상당한 소득이 되는 세금의 소유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시골에서 본당 조직의 발전은 저해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개인 교회들은 오직 영토를 소유한 귀족들에 의해서만 설립될 수 있었습니다. 규칙처럼 개인 교회의 우두머리들은 대략적으로 왕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봉건 영주들과 주교적 교회들과 수도원들도 여기에 편입되게 되었습니다. 이 교회들이 왕이나 주교, 혹은 귀족의 수도원들이 아닌 경우, 그 수도원들은 개인 교회의 영주처럼 자신에 대한 권한을 가진 모습을 보일 수 있었습니다. [2017년 7월 23일 연중 제16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16)

 

 

봉건제 하에서 주교직무의 변형

‘주교 교회’(domus episcopalis)라는 용어는 주교 권한의 총체적인 내용을 가지는, 마치 법적인 개념을 의미합니다. 주교는 교회의 유산들에 대해 소유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직자들은 법적으로 그에게 속해 있었고, 주교는 그들에게 일반적으로 급료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도시 주변 영지의 시민은 ‘주교 교회’로부터 사목적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대 평원 지역으로 퍼져나감으로써 영혼의 돌봄에 있어서 분산화는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흩어진 마을들에서 영적인 도움을 위한 중심지에는 주교와 같은 권한들이 허용되었습니다. 즉, 이런 중심지들은 전례와 사목적 관점에서도 자율권을 가지게 되었고, 이들은 ‘본당’(parrocchie)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시골 지역의 교회들에서도 마치 이전에 도시의 주교 교회에 이뤄졌던 것처럼 직접적인 증여를 통해 ‘본당’처럼, 주교 교회로부터 분리된 유산의 형성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교 교회의 시골 성직자는 주교 관할권으로부터 분리되었습니다. 그는 사목적 봉사를 위해서 법적으로 주교로부터 임명받았고, 그에게 의존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곳의 성직자와 시골 지역의 교회들은 지금 묘사한 형태의 사목적 임무들에서 초기의 개별교회들과 그들의 사제들과 구별됩니다.

도시 성직자의 분리는 초기 중세기 동안에 일어났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성직자는 도시 해체의 결과로 중세 봉건의 전형적인 정서를 주입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고려해야 할 것은 성직자가 많은 교회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주교 주재 도시의 영역에서도 경당들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교회들을 통해 대략적으로 ‘주교좌’(cattedrale)가 형성되었고, 반면에 교회들에서의 활동을 통해 주교의 성직자들이 임명됩니다. 특별한 교회들과 성직자의 협조는 천천히 사라져갔습니다. ‘주교 교회’가 아닌 수도원과 참사회에서 발전된 개별 교회들은 주교로부터 분리된 유산의 형식을 통해서 경제적인 면에서 자립을, 그리고 법적인 면에서의 자립도 함께 진행해 나갔습니다.

11세기에 ‘주교 교회’는 완전하게 해체되었습니다. 주교 교회의 성직자들은 9세기부터 일찍이 다른 성직자들과 구별되는데 마치 주된 교회처럼 참사의 자격으로 모이고, 주교좌 참사의 자격으로 주교와 경제적 법적인 부분에서 협의체를 이루었습니다. 사목적 임무들을 중재하기 위해서 주교의 점진적 경향은 다른 권위들도 함께 수반하게 되었고, 고-중세의 시초에 새로운 임무들을 수렴함으로써 세속적 영역에서도 폭넓게 확장되어 갔습니다. 주교의 권한은 점점 더 고위층을 향해 나아갔고, 그것은 게르만 왕국에서 ‘왕국의 주교’(vescovo del regno) 모습을 가져오게 됩니다. 이런 발전은 도시의 주교 영주와 개별 교회의 영주를 거슬러 마침내 왕의 우위성을 소유한 주교의 모습으로 이끌었습니다.

도시에서 주교 영주의 시초는 점진적 장원제도와 고대후기의 국가 정부의 쇠퇴와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국가편에서의 후원이 부족한 가운데, 시민들은 스스로 난관을 헤쳐 나가기를 원하였습니다. 그 상황에서 행정적이고 애덕적이며 보호적인 직무들을 통해 이렇게 남겨진 공동체의 관리가 주교의 몫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 주교들의 전기를 보면 대단하였습니다. 그들 시대 주인공같은 활동을 통해 갈리아(프랑스 지역)에서 메로빙거 왕들은 주교들의 통치를 인정하게 되었고, 거기서 주교의 권한들과 도시 영주들의 의무들이 강화되었습니다. 5세기부터 이런 행정적 교회적 직무들은 주교들을 그들이 정착한 곳의 갈로-로마(gallo romano) 지역 소유자들의 계급 구성원이 되게 하였습니다. 로마 귀족과 이주한 프랑크 귀족간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귀족 지도층이 천천히 주교직에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교의 직무, 성무는 귀족적 특권에 결합되었고 중세 전체를 통해 그렇게 귀족으로 남게 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2017년 7월 30일 연중 제17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17)

 

 

개별 교회 주교의 영주화

개별 교회들에서 ‘주교 영주’로의 전환을 고려할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주교 교회’의 해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때까지 남아있던 재산과 사람들에 대한 주교들의 권한들은 이제 다양한 지층을 통하여, 특히 중세 초기 동안 줄곧 개별 교회와 영주와의 관계와 점점 비슷해져 갔습니다. 주교는 개별 교회의 영주가 되어갔고, 주교는 평신도들과 수도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영주가 되었던 것입니다. 고대 후기에 가면 이제 주교 교회는 공적이고 법적인 측면에서 봉건제도 모양을 갖춘 독자적인 개별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런 변형은 봉건 제도적 지배 정서 안에서 볼 때 자연스런 결과였던 것입니다. 이런 식의 발전과 변화는 증여와 수용을 통해서 촉진되었습니다.

평신도들의 호의에 힘입은 ‘주교 교회’ 재산의 대략적인 수용은 카알 마르텔(Carlo Martello)에 의해서 현실화되기에 이릅니다. 무엇보다도 직접적인 지배의 강화를 위해서 카알 마르텔은 일종의 ‘강제적 대여’로 주교들을 압박하면서 주교들이 봉토 안에 들어오는 것을 의무화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카롤링거 왕조는 주교의 재산들을 마치 개별 교회에 속한 것으로 여겼고, 그것들을 재산들의 유통과 거래 안에 포함시켰습니다.

이런 형태의 수용 이외에도 사적 재산의 증여 또한 존재하였는데, 이것은 교회의 평신도 영주들이 자신의 재산들을 주교와 수도원들의 교회에로 이전할 때 실현되었습니다. 카롤링거 왕가는 이것을 주로 사용하였고, 이를 통해 카롤링거 가문은 왕가의 품위에 오르게 됩니다. 예를 들면 피핀(Pipino)은 741년 24개의 왕의 교회들을 막 설립된 뷔르쯔부르크의 주교 교회에 양도하였습니다. 이런 증여를 통하여 귀족들과 왕들의 교회들은 ‘주교 교회’들이 되어 갔습니다. 하지만 수용과 증여는 여러 권한들과 법률의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주교는 자신의 권위에 아래 놓인 교회들과 자신들에게 의존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현실적 영주처럼 처신하게 되었습니다.

왕적 권위를 주교가 소유함으로써 주교가 귀족화되어 왕국의 일원이 되는 것이 이제 완성에 이릅니다. 이런 변화들을 통해 주교는 개별 교회의 영주처럼 고려되고, 그렇게 직무도 발전하게 됩니다. 주교가 왕가 귀족 권한의 담지자로 불리게 된 것은 카롤링거 왕조의 경계 안에서 두드러졌고, 이는 점차 확대되어 게르만 왕국에도 이르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볼 때 우리는 봉건제도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봉건제도는 점점 확대되고, 이 봉건제도가 귀족의 구조적 기초들을 결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카알 마르텔의 업적으로 교회 재산들의 수용을 통해 교회는 봉건화 되었고, 그것은 무엇보다도 카롤링거와 오토(Ottone)에 의한 효과적 증여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카롤링거 왕조의 광범위한 개혁 프로젝트를 통해 카를 대제는 주교 교회와 수도원의 장상들에게 외적 행정과 내적 구조에 대한 막대한 권한을 주었고, 그것은 왕국의 방어와도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임무를 완수하기 위한 교회의 물적 자원들이 충분하지 못하였습니다.

세속의 힘 있는 자들에게 영지를 주는 대신 카알은 왕의 재산들, 혹은 왕국의 재산들을 주교와 아빠스들에게 증여하고, 그에 상응하는 임무들을 그들에게 맡겼습니다. 증여와 공적 재산의 양도와 귀족 권한들의 양도는 주교 교회와 수도원 교회의 국가화에 유용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왕국의 유산들의 일부들은 교회의 유산이 되었고, 반대로 교회의 재산들 또한 왕국으로 흘러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이런 재혼합은 교회 재산에 대한 비과세와 재산 증여를 통해 완성됩니다. [2017년 8월 6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18)

 

 

지난 호에서 개별 교회의 주교들이 카롤링거 왕조의 봉건 제도 아래서 어떻게 영주화되어 갔는지를 개략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그 영주화에 큰 도움을 주었던 법적, 제도적 장치들을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왕가는 자신들의 국가 통치를 위해 교회의 도움이 필요함을 알았고, 교회를 국가 통치에 적극적으로 개입시키고자 했습니다. 이것을 완성하기 위해 제안된 방법은 바로 비과세(Immunita)입니다. 이런 세금의 면제는 왕실의 특권을 의미하였습니다. 그것을 통해 주교와 수도원 소유의 영토들은 왕국 관리의 일상적 행정에서 제외되었고, 직접적으로 왕 아래 놓이게 되었으며, 주교들은 적당하게 이름 붙여진 국가 공무원에 해당하는 귀족 행위들을 성취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종류의 양도들은 피핀(Pipino)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오토(Ottone) 대제에 의해서 개략적 완성에 이릅니다.

이런 이유들은 왕조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는데, 교회의 국유화는 분명히 왕국의 정치·경제적 자원들의 효과적인 수확인 동시에, 군주 정치체에 봉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봉건제도의 소용돌이에서 영지를 소유한 주요 인사들이 왕국 안에 그들의 직무들을 마치 재산처럼 다루게 됩니다. 그로 인해 영토와 직무를 조직화하고, 이것은 통치의 영역에서 발전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영지는 재산이 되었고, 이런 비슷한 과정을 통해 국가의 대부분이 왕의 직·간접적 통치 아래 놓이게 됩니다.

왕에게 ‘봉건제도’라는 열차는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것이었고, 현실적으로 다른 출구가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수도원들과 주교들의 재산들은 이제 왕국과 결합되었고, 처음부터 면세의 특권으로, 그리고 후에 주교와 대 수도원장들에게 왕의 권한을 수여하면서 온전히 결합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통치권의 손실을 염려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수도원들과 주교좌의 참사들을 통해서 왕과 제국에 충성스런 성직자를 형성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은 오토 대제에 의해서 이뤄진 주교좌 참사들의 놀라운 성장에서 두드러지게 보입니다. 경제 · 법적인 관점에서의 협력이 참사들의 규정에 의무화되었고, 그들에겐 공동의 삶과 독신의 의무가 부과되었습니다. 이렇게 임명되고 훈련된 사람들의 그룹 안에서 왕은 주교를 임명하였고, 성직 임명에서부터 교회 - 왕국적 임무에로 그들을 이끌었던 것입니다.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은 성직 임명권을 통해 왕국 교회의 재산 안에 자리를 갖게 되고, 이것은 그들의 역할 영역과 연결된 것이었습니다. 이런 재산들의 축적은 귀족 사유지와 비교될 정도였고, 또한 비과세의 수여를 통해 왕국의 재산에 비견될 정도였습니다. 또한 그들 사이에 이름과 목적에서 혼란이 야기되기도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교회의 재산은 왕국의 재산이 되었고, 왕국으로부터 교회에 허락된 통치적 권한은 교회적인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왕과 왕국 교회 재산의 관계는 개별 교회의 영주와의 관계와 비슷한 것입니다. 실제 ‘재물’에 대한 권한의 영역에서 왕은 지고의 지배자이지만, 소득은 주교에게 양도 되었고, 또한 성직임명을 통해 대 수도원장에게도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 직무자들은 오직 문화 영성적, 교회 전례적인 임무만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임무에는 세속적 행정 업무와 왕국의 보호라는 임무들이 동시에 부과되었던 것입니다.

왕국 교회 재산의 소유자들은 왕과 동등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자연히 이것은 왕의 비과세를 의미하였고, 동시에 사제적 면제는 왕실 임무와 결합되는 것이었습니다. 주교들은 영적인 임무의 담지자로 왕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왕은 왕국 행정의 고위 통치자로 주교를 임명하며, 동시에 영적, 법적 권한을 함께 부여하였습니다. 왕은 이 두 가지 영역에 모두 개입할 수 있는 존재이지만, 주교는 이제 세속적 직무와 영적 직무를 통해 ‘사제적 왕국’을 건설하고, 그리스도인의 공적 인도자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게 된 것입니다. [2017년 8월 13일 연중 제19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19)

 

 

봉건제도 안에서 수도 생활의 변형

초기 중세 교회의 조직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개별 수도원의 설립은 적합하고 용이하였습니다. 반면에 대수도원장의 수도원의 경우, 왕국의 교회 안에 흡수되는 현실이었습니다. 각 개별 수도원의 경우에는 그들에게 봉건 영주의 특권이 주어졌고, 동시에 봉건화의 과정에 휘말리는 결과를 내었습니다. 수도원의 책임자는 주교와 같은 방식으로 수도원의 상급자가 되었고, 귀족의 품위를 지니게 됩니다.

서방 수도원 발전의 초기에는 수도 생활에 자극을 주었던 금욕적 개념에 따라 주교적 본당 교회가 속해 있는 세상과 공적 삶을 포함하는 그 ‘세상’으로부터의 ‘분리’, 또는 떠남이 중요했습니다. 고대 수도자들의 생활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바로 이 세상으로부터의 ‘떠남’이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향한 적의를 의미하기도 하였고, 가끔은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해 ‘세상의 것들’ 안에 있는 유혹을 버려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기도 합니다. 금욕-수도자 이상은 사회 전체와 그 시대의 귀족적 교회에 비해 ‘대조적 모델’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후기 고대와 초 중세의 사회 안에서 수도원의 종교 사회적 기능을 소홀히 다룰 수도 있습니다.

수도원 사회 안에서 여러 기능과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 첫째는 중재의 대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사회와 수도원 사이의 첫 번째 연결 고리였습니다. 즉, 백성들의 구원에 대한 근심과 재화에 대한 염려가 고대 후기와 중세 초 영주들로 하여금 수도원의 창설자들이 되게 했던 것입니다. 거기서 수도자들은 기도와 보속의 활동을 통해서 백성들의 근심들을 중재하게 됩니다. 수도원은 이런 중재의 기능을 수여받게 됩니다. 사목 활동의 종교적 동기는 영주의 동기들과 혼합되기도 합니다. 수도원과 교회 안에서 수도자적 봉사는 집과 가정에서 그들의 역할을 통해서 영주의 합법화와 안정화의 효과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므로 개별 수도원으로의 재산의 증여와 이전은 단순한 교회들에 비해 큰 영향을 가져왔습니다. 이런 ‘금욕-수도원’의 건설은 그 곳을 문화의 중심지로 변형시켰고, 성장하는 귀족과 수도원주의의 공생을 만들어 냅니다.

수도자들의 삶의 변화가 처음에는 감지될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들을 세상으로부터 돌아서게 하는 ‘회개’의 노력들은 아주 작은 실천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첫 번째 중요한 영향을 가진 것은 수도원 규칙이었습니다. 400-700년 중에 서방 수도 생활을 위한 규칙들이 대략 30개 정도가 나옵니다. 초 중세기의 이런 법규화와 규율화의 경향은 규칙의 단일화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수도자들은 서로 다른 규칙에서 살았지만, 종국에는 성 베네딕도의 규칙을 모든 지역에서 규범처럼 받아들이게 됩니다. 규칙화는 불안한 금욕으로부터 수도 생활에 규율과 안정을 가져왔습니다.

한 장소와 연결된 강력한 안정화를 통해서 수도원은 문화의 중심지를 향한 첫 번째 발걸음을 떼었습니다. 땅의 경작과 건설, 그리고 후에 문화와 예배들의 기능을 통해 수도자들은 점진적으로 성직화된 수도-사제의 모습으로 귀결되었습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읽고 쓰기를 알아야 했습니다. 그것을 통해 세상을 떠나고 고향을 떠나 사람들의 교육과 영혼을 돌보는 것이 그들의 첫째 임무가 되게 됩니다. 수도원은 이런 방식으로 귀족들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창설자들과 수도자들은 귀족에 포함되었고 삶은 귀족적 스타일을 취하며, 금욕적 수도원은 겉모습만을 지니게 되기에 이릅니다.

초 중세기에 문화의 중심지 수도원은 사회의 봉사를 위한 다른 임무들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것은 학교를 통해서 문화의 영역으로 확장되었습니다. 또, 선교를 통해 사목의 영역에로, 식민지화를 통해 영지의 안정화를 이루어 정치 경제적 영역으로도 확장되게 됩니다. [2017년 8월 21일 연중 제21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20)

 

 

고중세 시대 왕국 교회

고중세의 시작에, 특히 절대 교황권의 시기에 새로운 교회적 일치가 탄생하고 있었던 서방 지역은 ‘도시 교회’(ecclesia urbis) 즉, 로마 교회가 ‘세상 교회’(ecclesia orbis)를 위한 표준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변화는 복잡하였고 여러 힘들에 의해서 촉진되었으며, 또한 그런 힘들은 교회 발전과 변화에 장애물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실제로 교회를 설립함에 있어서 황제와 로마 제국의 도움을 받았던 교회는 고대 로마 제국이 멸망함으로써 정치적 통일과 함께 교회적 일치도 잃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서방 지역에서 보존되고 있던 교회적 일치가 주교 공동체의 연대에 대한 자각이 아니었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초기부터 아주 강하였던 교회의 ‘시노드적’(sinodo) 교회 운영은 왕에 의한 왕국 공의회를 통해서 새로운 시대에 봉사하게 됩니다.

고트족들과 앵글로색슨족의 가톨릭 왕국들, 특별히 프랑크 왕국들은 이런 부분에서 중요합니다. 교회의 관점에서 역사적 발전 과정을 보면, 왕의 통치 아래 지역적 교회들이 형성됩니다. 이런 교회 건설에서 왕과의 연결은 지역적 범위를 넘어서는 일반적 현상으로 발전합니다. 결과적으로는 왕권의 강화를 통해 정치적 일치가 지역 교회와 지방교회들의 새로운 의미에서의 단일화를 향한 걸음을 이끌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통합의 힘은 카롤링거 가문이 대 왕국을 건설하고 황제의 자리에 앉게 되면서 본격화됩니다. 이런 통합의 힘은 ‘정치-종교 원리’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정치적 일치성이 기초가 되어 교회적 일치의 원천이 되었고, 왕국의 교회 제도 안에서 이런 일치의 표현들을 찾아볼 수 있게 됩니다.

이런 변화의 심층에는 로마와의 연결이 아주 중요한 잣대가 됩니다. 이것은 두 가지의 생각이 교차하는 지점입니다. 하나는 교회-종교적 특성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정치적 특성인데, 마지막에 가서는 ‘도시 교회’와 ‘세계 교회’의 정체성으로 귀결됩니다.

종교-교회적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 교회의 자기 이해에서 출발해야만 합니다. ‘교회의 신앙’이란 전통과 연결을 의미하였고, 이 충실함은 초기 교회 공동체와의 일치처럼 그것이 교회 생활의 규범으로 해석되었던 것입니다.

서유럽은 그리스도교화 되어 가면서 라틴-로마 전통의 그리스도교의 자국을 남기게 됩니다. 그들 사이에 서로 다른 많은 점에도 불구하고 언어, 예배, 성경, 그리고 규율과 교리에서의 공통적 요소들이 존재하였습니다. 북 아프리카와 스페인이 이슬람 세력에 의해서 라틴 교회로부터 격리되는데, 이것은 서방 교회의 형성이라는 차원에서 그들 지역을 멀어지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와의 재 일치의 연결점은 다시 ‘로마 교회’ 즉, ‘베드로 사도 기원’이라는 사도적 전통을 받아들임으로 재일치를 이루었으며, 이것은 이제 세상 모든 교회가 성 베드로 교회와 일치 안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로마-베드로 전통은 초중세기의 특별한 상황이 기초가 된 규범적 요구였습니다. 이미 아일랜드인들은 콜롬바노 성인을 ‘유럽의 가장 숭고한 꽃’으로 축제를 거행하였으며, 앵글로색슨 지역은 자신들 교회의 조직과 규율, 그리고 설립의 롤모델을 로마 교회로 하였습니다. 이 교회들을 우리는 로마와 연결된 지역 교회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성 보니파시오(Bonifacio)는 이런 연결의 대표자라 할 것입니다. 그와 그의 앵글로색슨 협력자들은 프랑크 왕국 교회에 유산을 남겨놓는데, 바로 로마와 연결된 왕국의 교회였습니다.

이러한 ‘로마와의 연결’이란 표현은 베드로 사도에 대한 강한 공경으로 지지되었고, 이 연결은 법률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배에서, 규율에서, 그리고 교리에서 가톨릭 교회와의 일치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와 연결된 프랑크 왕국의 교회는 왕으로부터 지휘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교회는 왕국의 교회와 왕의 교회라는 관점에서 ‘교회 정치 원리’ 아래에 놓이게 됩니다. 이는 로마 제국의 재건이었고, 서방에 ‘정치-교회적’ 새로운 일치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2017년 9월 10일 연중 제23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21)

 

 

프랑크 왕국과 교황의 동맹

클로도베오(Clodoveo)에 의해서 창건된 프랑크 왕국은 중세 초입에 방대한 지역에서 여러 군주들의 첫 번째 연합을 건설하였습니다. 사실 6세기가 되면 메로빙거 왕국은 이제 여러 지역들에서 지배권을 잃어버렸고, 한 사람의 손에 권력이 집중되는 왕조는 카롤링거에 의해서 다시 건설되게 되었습니다. 이 카롤링거 왕조는 680년경부터 지배자로서 군림했습니다. 그들은 모사와 라인 지역에서부터 개인적인 지배를 건설할 줄 알았고, 마침내는 왕국에서 결정적 권력이 되어갔습니다. 732년 포이티에(Poitiers)에서 이슬람에 대한 카알 마르텔의 승리는 그 지위를 강화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얼마 후 이 왕조는 범접할 수 없는 권력이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 카알 피핀(Carlo Pipino, 741-768)은 마지막 메로빙거 왕조의 힐데리코 3세를 해임시켰습니다. 그리고 그해 말, 그는 자신을 왕으로 선포하였고, 프랑크 주교에 의해서 수아송(Soisson)에서 대관을 받았습니다.

이런 찬탈에 로마는 피핀의 입장을 지지합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잘, 혹은 그렇지 못할 수도 있지만, 로마의 교황 자카리야 1세(Zaccaria I) 프랑크 왕국에 왕권이 있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으리라 여겨지는데, 그것은 그래야 자연적인 위계가 혼란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의 후계자 스테파노 2(Stefano II, 752-757) 교황은 새롭게 피핀과 그의 자녀들을 만났고, 그에게 기름을 발라 주었습니다. 이런 거룩한 축복의 행위는 프랑크와 교황 간의 동맹의 인장을 찍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754년 퀴에르지(Quierzy)와 폰티온(Ponthion)에서의 합의로 결론을 맺는데, 그 조항들에 따르면 프랑크인들은 롱고바르디를 대항하여 교황과 성 베드로의 유산을 보호해야 했고, 롱고바르디 점령 지역들의 양도를 압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상황은 이탈리아 롱고바르드 지역에서 성 베드로의 유산과 교황의 자율적인 위치를 보호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런 지고의 정치적 동맹은 그것들의 효과에서도 매우 중요했고, 명료화의 필요가 있었습니다.

568년 경 이탈리아로 롱고바르디들이 남하하여 그들이 지배자가 됨으로써 이탈리아 중부는 에사르카토(Esarcato)와 로마 인근의 공작령(Ducato)만이 황제에게 남겨졌습니다. 롱고바르디들의 가톨릭으로의 개종 이후, 이탈리아는 그들의 통치 아래 하나가 되었었습니다. 751년 아스톨포(Astolfo) 왕이 에사르카토(Esarcato)를 점령하였고, 공작령 지배를 준비하였습니다. 이것은 로마 주교의 개입을 불러 올 위협이 있던 사안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롱고바드드의 지배는 모든 교회에 대한 교황의 법적 권한의 요구를 제한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군사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약해져있던 비잔틴 제국은 더 이상 로마 교회에 보호를 제공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외에도 ‘교회-종교’, 그리고 ‘교회-정치’라는 대조적인 동기들이 로마와 비잔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하였고, 이런 상황에서 보호를 대신하기 위해 프랑크인들이 내려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교황의 이런 시도들에 카알 마르텔(Carlo Martello)은 반대 입장을 취했는데, 그의 후계자 피핀은 이 제안에 적극적이었던 것입니다.

비잔틴 제국의 관용으로 754년 피핀에게 ‘로마인들의 수호자’(Patricius Romanorum)라는 칭호를 제공하여, 그는 로마의 방어와 교황의 관심사에 매진하게 됩니다. 퀴에르지(Quierzy)의 합의에 대한 공고화 안에서 그는 에사르카토와 두카토에 대한 양도를 위해 롱고바르디인들을 압박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쟁취한 후에는 이 지역들을 비잔틴 제국에 되돌리지 않고, 그것을 성 베드로의 유산으로 로마 교회에 넘기게 됩니다. 두카토와 에사르카토는 이렇게 교황의 통치권 아래 독립적인 하나의 실체가 되었고, 프랑크 왕국은 그것들의 지속을 위한 보호를 보증하였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교황 교회 국가가 세상에 그 얼굴을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그의 형성과 관련된 뒷면을 우리는 좀 더 분명히 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2017년 9월 17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22)

 

 

이제 프랑크 왕국의 교회-정치적 결정을 통해 ‘교황 국가’라는 실체가 세상을 얼굴을 드러내었고, 이것을 체계화 현실화하는 작업이 뒤따르게 됩니다. 계속되는 롱고바르디의 위협 아래, 교황국가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베드로-사도적 교리가 오랜 전통과 그리스도교화된 로마의 이상과 결합되어 교회 국가라는 실체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프랑크 왕국의 보호라는 새로운 현실에서 교회는 로마 제국의 통치와 비슷한 후원을 받았고, 이 기회를 통하여 교회 행정적 독립을 다시 확장하고자 하는 경향을 교회 안에 불러왔습니다. 하지만 이 동맹으로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법적으로 자유를 누렸던 것은 아니고, 실제에서 그것은 800년 프랑크 왕이 제국 황제로 대관될 때까지 잠정 중단된 채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사도적’ 의미안에 집중된 ‘이상적 로마’는 개별적이고 의미깊은 ‘코스탄티노의 증여’(donazone di Costantino)라는 역사적 사건 안에서 시작됩니다. 이 증여는 실제에 있어서 오랜 논쟁과 여러 사건들이 합쳐진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상적 로마’의 기원은 8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많은 부분에서 이 지지를 받습니다. 증언의 많은 부분을 - 일부는 그것을 속임수로 해설하기도 한다 - 정치적 목적에 의한 위조라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의 시작은 라테란 교회의 큰 영예에 대한 지역 전설이었습니다.

피핀의 보호와 담판에 의해서 초기에 퍼져 있던 ‘코스탄티노의 증여’의 의미는 변화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제 ‘교회 국가’가 하나의 ‘세련된 위조’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스런 변화와 발전의 결과물입니다. 먼저 로마 도시에 대한 제국 영토 내에서의 자율성이 고려되었고, 그것은 구체적으로 로마에 대한 교황의 통치적 기능과 공적 임무들을 통해 성 베드로의 유산의 경제적 자원들의 이용을 보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코스탄티노의 증여’는 빠르게 영토 내에서 교회의 요구를 받아들인 역사적 주체가 되었습니다.

프랑크 왕국의 교황에 대한 도움에는 ‘로마와의 연결’이라는 중요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 교회에 대한 수호자적 역할 뿐 아니라 이탈리아에서 영향력을 획득하기 위한 정치적 계산도 깔려 있었고, 프랑크 왕국이 롱고바르디를 합병하고자 하는 군사적 요청도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카알 대제(Carlo Magno)는 774년 롱고바드디의 왕(rex langobardorum)으로 대관됩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은 이탈리아 중부에서의 영향력을 되찾으려던 비잔틴의 거센 도전에 직면하게 됩니다.

카알 대제의 통치 (768-814) 기간에는 국가의 영토에 대한 외적인 확장과 왕국 내부의 공고화가 눈에 띱니다. 800년경에 이르면 그의 통치권은 유럽의 내부의 독일로 확장됩니다. 그의 통치권에 대한 상징적 사건은 교황 레오 3세(Leone III)에 의해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 거행된 800년 12월 25일의 대관식으로 정점에 이릅니다. 이것은 첫 번째 서방에서의 황제 대관이었고, 황제의 새로운 출현은 로마 제국의 재건에 봉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고대 로마의 이상을 재현하는 이러한 황제 대관은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로마의 정치적 해방을 의미하였습니다. 서방은 이제 프랑크와 롱고바드드 왕국 안에서 단일화되었고, 이 서유럽에 대한 통치권은 카알 대제에게 허락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교황은 그를 대관하였고, 신적인 은총에 의해 통치권이 허락되었음을 만방에 드러내주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로마의 백성 편에서 그를 황제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2017년 9월 24일 연중 제25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23)

 

 

카알 대제는 고대 로마라는 개념과 결합된 전통에 봉사하기를 원하였습니다. 이런 그의 행위는 그의 왕국에 ‘제국’의 품위를 가져다주었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로마 제국의 회복은 아니었고, 그들은 프랑크인들로 남아있었습니다. 처음 카롤링거의 영토는 모사(Mosa)와 라인(Reno)의 중부가 핵심인 중부 지역을 왕국의 중심으로 여겼습니다. 카알도 로마 제국을 생각하였지만 자신의 제국은 로마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로마에 대한 자율권을 허락하게 됩니다.

810-815년 사이에 체결된 조약들을 통해 비잔틴은 카알을 서방 제국의 황제로 승인하게 됩니다. 이런 일련의 조약들을 통해 비잔틴은 로마인들의 황제라는 제국적 칭호에도 불구하고 이제 로마와 그의 통치권의 연결이라는 이상에서 해제되고, 서방에서 떠나게 됩니다.

813년 9월 11일 비잔틴과의 합의 이후 카알 대제는 아퀴스그라나(Aquisgrana)에서 아들 루도비코(Ludovico)를 황제로 대관합니다. 이 대관식은 로마-교황 이상의 모델을 따르지 않았고 비잔틴의 모델을 따릅니다. 대관식은 816년 렘즈(Reims)에서 스테파노 5세(Stefano V) 교황에 의해 다시 거행되는데, 이것은 법적인 의미가 아닌 형식적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교황은 이 대관식으로 로마 황제의 개념과 황제라는 이름의 임무를 기억토록 초대한 것이었습니다.

프랑크식 개념으로 왕국의 단일성 보호라는 기능이 더해지게 됩니다. 프랑크의 관습에 따르면 승계권은 ‘공통’으로 여겨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왕국의 단일화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자녀들이 통치권의 실현에 있어서 후계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관습은 반대로 제국이 여러 왕국으로 분열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제국의 시작과 함께 왕국의 단일성은 사적 통치권 안에서 드러났고, 왕국의 모든 것을 지킬 수 있는 특별 권한을 지키는데 몰두하게 됩니다. 제국적 품위를 지키기 위해 로마 교회에 대한 보호와 봉사, 그리고 교회 조직의 후원이라는 특별한 영역에 더욱 매진하게 됩니다.

로마 제국의 재건이라는 이상은 카알 대제의 궁정 신학자들에 의해 발전되었고, 그가 이미 황제로 대관되기 이전에 성경적 모델에 의해 지지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제국의 재건을 통해 생동감있게 퍼져나갔습니다. 이것은 그의 통치권의 거룩한 품위를 드러내었고, 행정과 문화, 그리고 종교에서 제국의 재건을 의미하였습니다.

이런 황제의 임무는 제국 공의회들과 법령들에서 드러납니다. 학자들은 카롤링거 왕조를 통한 재생을 말합니다. 이로써 서방 문화라는 단일성의 기초들이 놓여지고, 이것은 다시 ‘로마’와 연결되게 됩니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지금껏 사용해오던 지역 글자체가 ‘카롤링거 소문자’로 단일화 되었고, 라틴어는 중세 문화 언어로 성장합니다. 전례 사목적 방향에서도 로마 전례와 프랑크 지역 전례의 활발한 교류로 서방라틴의 ‘전례 단일화’가 이뤄집니다. 또한 성 베네딕도의 규칙은 다양했던 수도생활을 하나로 통일하였습니다. 이런 단일화와 규율화는 성직자들을 위한 규범에서도 분명히 드러났고, 성직자들은 교회 안에서 공동체에 봉사를 실행하는 이들로 규정됩니다.

이 모든 것은 로마에 의해서 지켜졌던 전통적 고대 교회(ecclesia antiqua)의 모델을 생각하게 합니다. 정치적인 로마의 재생은 교회적, 종교-문화적인 것들의 교류적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게 되고, 그것은 ‘베드로-사도적’ 원칙을 인정하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2017년 10월 1일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선교의 수호자) 대축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24)

 

 

위기 속에서의 제국의 재건

카알의 왕국은 아직 불완전한 체제였습니다. 경건왕 루도비꼬(Ludovico il Pio 810-840)는 선대로부터 시작된 재건을 계속하고 완성해야 할 어려운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과업들은 첫 발을 떼어놓는데 실패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후계자의 지위에 있는 자녀들의 봉기가 그 이유였고, 이런 반란으로(833) 시작된 쇠퇴와 왕국의 파괴는 멈출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이런 사실의 감춰진 근원은 왕국이 사회 정치적으로 서로 다른 이질감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이 오랜 기간을 견디지 못한 원인이었습니다. 이런 쇠퇴와 분열의 또 다른 이유를 찾는다면, 행정적 기술적 측면에서 그 시대의 농업 경제 체제가 이러한 이질적인 구조들 간의 단일성을 유지하는데 충분히 준비되지 못한 것이 다른 이유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위 계승이라는 측면을 볼 때, 제국의 질서 안에서 발견되는 법적인 명령들을 통한 모든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제국과 왕국들 간의 관계에 있어서 왕국들의 지역화와 자립화를 제어하지 못하였습니다. 형제적 화합이라는 모든 맹세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후계자들은 서로 대결의 점에 이르게 됩니다. 카롤링거 왕조를 둘러싼 그들 간의 경쟁은 통치 지역과 지지자들의 동맹으로 뭉치게 합니다. 9세기경이면 모든 지역에서 다양한 동맹과 통치 강역 안에 산재된 권력들이 집중화되기에 이릅니다. 이런 관계들의 엄청난 불안정성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질서의 새로운 모델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제한된 지역과 역사적 전통의 자취가 있는 지역에서는 통치권이 안정화 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였고, 이런 아직 완숙되지 않은 국가적 안정성을 갖춘 작은 지역들에서 카롤링거 왕조를 재생시킬 힘들이 솟아나게 됩니다.

9세기 카롤링거 제국의 해체는 특별한 방법으로 로마에 충격을 줍니다. 실상 이탈리아는 마치 서방 프랑크처럼 통치권의 지역화의 욕구가 큰 지역의 하나였습니다. 이런 욕구는 로마를 경쟁의 교차점이 되게 하였습니다.

강력한 정부 통치 아래서 로타리오 1세(Lotario I)와 루도비코 2세(Ludovico II)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이탈리아를 부분적으로 통치한 군주들이었습니다(817-855, 855-875). 이 시기 교황들은 교회 국가를 지키고자 애썼고, 군주들은 ‘교회 국가’(Stato della Chiesa)의 통치권을 존중하였습니다. 이 통치권은 817년의 루도비코의 조약(Pactum Ludovicianum)보다 로마 규정(Constitutio Romana, 824)으로 더 강하게 드러났습니다.

제국적 특권으로 경건왕 루도비꼬는 교회 국가의 자립, 자치를 교황에게 양도하였고, 간단한 서약을 지시하는 것으로 교황 선출에서의 자유를 허락하였습니다. 이러한 상대적인 자율권은 북방과 서부 이탈리아와 로마의 귀족들 간의 경쟁 속으로 교황을 끌려가게 하였고, 비잔틴 제국은 은밀하게 이탈리아에 다시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위험이 다가오는 시기에 로마 칙령은 왕국의 통치권을 교황에게 주는 대신 황제가 교황 선거에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을 요구하였고 로마인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요청하였습니다. 하지만 루도비꼬 2세가 베네벤토 공작(Duca di Benevento)과의 대결에서 패배함으로써(871) 이탈리아에서 카롤링거 왕조의 위치는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이는 이탈리아 중부를 통치권을 다투는 전장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런 유혈 전투에 교황이 휩쓸려들고, 교황이 살해되고, 눈멀게 되고 장애인이 되는 ‘암흑의 세기’(saeculum obscurm)로 역사는 흘러가게 됩니다. 896년에 한 지역 공의회에서는 죽은 교황 포르모소(Formoso)에 대한 재판과 시신을 훼손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2017년 10월 8일 연중 제27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25)

 

 

프랑크 왕국의 분열이라는 혼란 속에서 로마는 이제 전쟁터로 변하였고, 암흑의 세기로 접어들었습니다. 이런 잔인한 사건들은 이제 교황직 안에서도 똑같이 빠르게 퍼져나는데, 이것은 로마를 짓누르고 있던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황은 로마와 이태리 귀족들 간의 싸움에서 서로가 갈망하는 먹잇감이 되어버립니다. 정치 무리들에 따라 교황들은 해임되기도 하고 임명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로마에 대한 관심과 계략들이 교차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두 개의 경향, 혹은 세력이 있었는데 한편은 외래파,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토착 애국파로 불렸습니다. 외래파(Partito straniero)들은 제국과의 연결을 카롤링거 제국의 전통 안에서 찾았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정치는 895년 포르모소(Formoso, 891-896) 교황이 프랑크 동부 지역의 왕 카린지아의 아르놀포(Arnolfo di Carinzia)를 황제로 대관하였는데 그는 대관되기 전 지역 귀족들을 패퇴시켰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아르놀포의 예기치 않은 퇴위 후에 경쟁 당파는 포르모소 교황과 그의 후임에 대하여 유혈적 복수를 하였습니다.

899년 아르놀포의 죽음은 이탈리아에서 카롤링거 왕조가 얼굴을 드러낸 마지막이었습니다. 이제 외래파는 빠르게 계승의 상황을 좌지우지하는 이탈리아의 왕들과 연결되었습니다. 반면 지역 당파에서는 투스콜로(Tuscolo)의 전통 공작 가문이 존재를 드러냈습니다. 901년부터 그들이 로마와 교회국가를 통치하였고 도전하는 모든 시도들을 제어하였습니다. 알베리코 2세(Alberico II)는 모든 의미에서 독립 왕처럼 928-954년까지 교회국가를 강력하게 다스렸습니다. 그의 왕권 동안 교황은 모두 그에 의해서 임명되었고, 교황의 권한은 오직 교회적 활동으로 제한되었습니다.

로마와 교회국가에 대한 제한은 교회 생활에 있어서 오히려 긍정적 영향을 끼쳤습니다. 알베리코 2세 치하에 로마의 수도원들도 클뤼니 개혁 수도원과의 접촉을 시작하였고, 이런 안정성과 질서는 한편에서 국가 통치로의 길을 준비하게 하였습니다.

투스콜로 가문의 정치적 약점은 ‘베드로-사도적’ 원칙을 소홀히 한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의 통치를 증진하기 위해 가문 통치자들은 베드로-사도적 이상에 의지하지 않고 고대 로마의 영광을 재현함으로 이루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제국의 쇄신은 도시에 제한되었고, 이미 로마는 그리스도교의 표식이 새겨져 있었으므로 고대 로마와의 연결로 제국을 재생시키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인들의 성 베드로와 그 후계들에 대한 신심 깊은 공경은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로마의 종교적 이상과 정치적 이상들 간의 연결은 ‘게르만 왕국’을 거쳐야 도달하게 됩니다. 지역 통치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제국의 해체는 동방 프랑크 지역조차도 보존되지 못하였습니다. 카롤링거 후계자들 간의 다툼 중에 귀족 가문에서 유래한 ‘위임 통치자’들은 봉건제도를 거치며 독립적 권력이 되어갔습니다. 특히 공작들은 유서 깊은 지역에서 재통합에 이르렀고, 그들은 확실한 민족적 동질성 위에 공작령을 세우게 됩니다.

하지만 카롤링거 전통의 영향 아래 그들은 전적인 자립이 아니라 왕국 안에서의 연방적 연합을 결정합니다. 카린지아의 아르놀포가 죽은 후 그들은 카롤링거 왕조로부터 떨어져 나갔고, 어린 왕 루도비꼬(Ludovico il Fanciullo, 900-911)와 코라도 1세(Corrado I, 911-918) 거쳐 사쏘니아의 엔리코 1세(Enrico I, 919-936) 공작을 왕으로 선출하며 단일화의 이상이 실현됩니다.

드디어 엔리코의 아들 오토(Ottone, 936-973) 통치 아래 왕국의 구조는 공고화되고, 통치권이 증진되게 됩니다. [2017년 10월 15일 연중 제28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26)

 

 

오토 대제(Ottone il grande)라 불리게 될 인물을 통해 제국의 재건이 시작됩니다. 오토는 왕국 교회의 시스템을 건설하였고, 아우구스타(Augusta, 아욱스부르크) 부근의 레크펠트(Lechfeld)에서 헝가리인들을 대항하여 결정적 승리를 거둡니다. 이로써 오토는 롬바르디아의 재점령과 동쪽 지역에 대한 정치를 통해서 왕국의 ‘황제’(Imperator)로서 인정을 받게 됩니다.

오토는 이탈리아에서 왕 베렌가리오(Berengario)와의 전투를 위해 950년 이태리로 되돌아오게 되고, 950년 12월 15일 파비아(Pavia)에서 왕으로 대관됩니다. 당시 로마로 황제 대관을 위한 사절을 보낼 계획을 갖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알베리코 2세(Alberico II)가 다시 한 번 ‘로마 황제’(imperator Romanorum) 대관을 통해 제국 재건을 향해 나서는 오토를 가로막고 나섭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알베리코의 아들 오타비아노(Ottaviano)가 요한 12세 교황(Papa Giovanni XII)이 되면서 영적, 세속적 권한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게 되어 통치 기간 중 정치적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오토 대제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이어서 962년 2월 2일 오토를 황제로 대관하게 됩니다.

이태리 왕국의 긴 독립적 역사를 뒤로한 채 로마와 제국 재건은 그들 서로를 다시 연결되게 합니다. 로마의 독립성은 무력화되었고, 이런 새로운 일치의 기운을 제공한 것은 독일 왕국의 무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로마는 오토의 제국 재건에 휘말리고, 제국의 구조 안에서도 주도적인 자리를 차지합니다.

962년 2월 2일의 대관식은 카알 대제의 제국 재건의 모델과 다시 연결됩니다. 그러나 조금 후에 대관의 법적인 지위는 변동됩니다. 후계에 있어서, ‘공통적인’ 카롤링거 지배 안에서 주권과 지배적 위치를 위한 후계자들 간의 다툼 때문에 ‘교황에 의한 로마에서의 대관’이라는 형식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의 축복에 준하는 어떤 부가적인 요식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경건왕 루도비꼬와 로타리오 1세도 교황에 의해 선친 황제들에게 전해진 황제의 칭호를 얻게 됩니다.

이런 변화는 따라서 중요성에 있어서도 변화를 가져옵니다. 황제의 임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제 로마와 교회 국가의 보호였습니다. 대관식 전례 거행의 준비 등에서 이런 생각들의 폭넓은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시대에는 이런 생각들이 좀 더 분명하게 표현 되었을 뿐이었습니다. 교황의 임무를 위해서 로마와 세계의 교회 보호가 중요했습니다. 이제 황제 후보자는 교황에 의해서 선발되거나, 혹은 임명된 황제는 교황의 여러 직무 안에서 검증되기에 이릅니다.

오토 대제 가문과 10, 11세기의 살리(Sali) 가문의 대관이 모든 면에서 이처럼 진행되지는 않았습니다. ‘황제의 선택’에 있어서 독일 왕들 외에 다른 후보자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후보자의 임무 적합성이 시험되지는 않았고, 오히려 반대로 교황들이 그들에게 검증받아야 하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실제로 제국의 새로운 재건에서 교황과 교회국가는 제국 안에 새롭게 얽매이게 됩니다. 오토 대제의 제국적 특권 안에, 소위 말해 ‘오토 특권’(ottonianum)에는 요한 12세의 해임 후에 교회 국가의 보호와 자립을 보장한다고 특정했지만 교황의 선출에 있어서는 황제의 개입의 가능성을 요구하였고, 황제에 대한 교황의 충성을 첨가하였습니다.

제국의 백성들은 이제 로마인들이 아니고 독일인들이었습니다. 왕국과 제국 사이의 연결을 특징짓는 것은 굉장히 어렵고 불가능합니다. 왕국의 강력한 군주들과의 비교에서 황제의 ‘거룩한 지위’의 강화가 고려되어야 했고, 이 외에 제국 교회의 구조가 좀 더 법제화됩니다. 제국의 재건은 카알 대제의 시대와는 다른 양상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재건된 제국은 고대 로마 제국의 계속 이어야 했고, 그러므로 그 제국은 동방의 옆에 있는 부분적 제국이 아니라, 로마인들이 프랑크인들을 통하여 독일인들에게 건네준 제국이었습니다. [2017년 10월 22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 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27)

 

 

서유럽에서 로마 제국을 재건하려는 노력은 오토 3세(Ottone III, 996-1002)의 통치 시기가 되어서야 이상으로만 존재하던 제국을 현실화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제국의 수도였던 로마를 포함한 그리스도교화된 옛 제국을 열망합니다. 996년 오토는 자신의 가문사람인 브루노(Bruno di Carinzia)를 교황 그레고리오 5세(Gregorio V)로 추대하였고 이에 로마인들은 경악하게 됩니다. 그레고리오 교황의 서거 후에는 자신의 교사인 게르베르토(Gerberto di Aurillac)를 교황으로 선출하고, 실베스트로 2세(Silvestro II, 993-1003) 교황이 됩니다. 교황의 이름은 앞으로의 계획과 똑같은 의미였습니다. 즉 새로운 코스탄티노의 재생이라는 이상에 부합하는 것이었습니다. (*Costantino 황제는 실베스트로 1세 교황에게 대관 받음)

황제로서 그는 선대왕들처럼 로마 교회를 위한 ‘안전 통행권’을 갱신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중재자로서 성 베드로에게 허락되었던 권리, 즉 실베스트로에게 영토와 통치권을 양도하였던 것입니다. 교회 국가가 봉헌이라는 원의의 힘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오토 3세는 교회의 군주로 간주되었으며, 동시에 겸손하고 충실한 수호자였습니다. 교회에 대한 영예와 영적인 탁월함을 드러냈고, 그는 그러한 교회에 대한 봉사를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22살에 이 천재적인 황제는 유토피아적 이상을 계속하였지만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후 독일 군주들은 마곤자에서 바비에라 공작(duca di Baviera)을 후임으로 선출하는 데에 동의하였고, 그가 엔리코 2세(Enrico II, 1002-1004)가 됩니다. 그는 즉시 오토 대제의 현실적 정치에로 되돌아왔고, 독일 왕국 안에서 자신의 지위 위에 제국 재생의 토대를 놓게 됩니다. 그는 왕국 교회 조직의 일관된 개혁을 매개로 제국을 강화하고자 노력합니다. 군주정치에 대한 거룩한 개념과 신성로마 제국 안에서 자신의 임무를 클뤼니 개혁 수도회와 다른 개혁 중심지들의 종교적-영성적 요청들 안에서 이루고자 합니다. 시대적 영성 안에서 개혁을 통한 제국의 재생이라는 이상은 엔리코 3세에 이르러 충만하게 됩니다. 그는 신정정치를 통해 의도되는 제국 재생의 대표자가 되고, 교황으로 대표되는 로마의 중요성을 최고로 합니다. 이런 생각은 자신의 호칭 안에서 보이며, 자신의 제국적 인장 안에 이런 글귀를 첨가합니다. “로마는 세상의 머리이고, 세상이란 수레 바퀴의 제동장치이다.”(Roma caput mundi, tenet frena orbis rotundi.)

엔리코 3세의 생각에는 이제 독일인들이 제국의 백성이기에 제국의 왕관은 자신의 것이고, 자기는 더 이상 독일인들의 왕이 아니라 로마인들의 왕이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신성 로마 제국의 영적 중심지인 로마에 대한 책임이 증대됨을 의미했고, 엔리코 3세는 당시의 개혁적 영성을 기초로 로마 교회를 재생시키고자 하였습니다.

로마가 새로운 교회 국가요 제국의 중심이 되는 데에 지역 애국주의자들은 봉기로 저항했습니다. 얼마간 평화의 시대가 있은 후, 황제에게 충성스러웠던 투스콜라노의 몇몇 교황들의 통치 하에 로마는 또 다시 혼돈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후 교황들의 임명에 엔리코 3세는 깊숙이 개입하게 됩니다. 베네딕도 9세와 그레고리오 6세 간의 다툼에 개입하는데, 1046년 12월 20-23일 수트리(Sutri) 시노드에서 그는 교황들을 심판하였고, 모두를 해임합니다. 그리고 제국 주교단의 일원이었던 수이트베르토(Suitberto di Bamberga) 주교를 새로운 교황으로 임명하였고, 클레멘스 2세(Clemente II, 1046-47)라고 부르게 됩니다. 엔리코는 그 교황으로부터 1046년 12월 25일 황제로 대관됩니다. 이후로도 다마소 교황과 레오 9세 교황, 비토레 2세 교황들의 임명에 엔리코 황제가 개입하게 됩니다. 이로써 교황은 황제의 밑에 놓이는 결과를 만들었고, 황제 죽음 후 제국 재건이란 슬로건 아래 이뤄진 황제의 능동적 인도는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제 ‘교회의 자유’라는 새로운 개념이 화두로 떠오르게 됩니다. [2017년 10월 29일 연중 제30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28)

 

 

초기와 고중세 시대 세속권력과 영적 권력의 관계

우리가 살피고자 하는 시대에서 왕권은 법적인 영역보다는 구조 안에서의 ‘우월’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여러 단일체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다양한 통치자들, 왕과 황제들이 제국 혹은 왕국의 교회와 다양한 교회 조직들과 서로 깊은 관계를 맺게 되는 구조였습니다. 이런 연관으로부터 자연스레 통치자들에게도 거룩한 품위가 보장되었고, 그것은 정치와 종교가 서로 혼합되는 교회-왕국의 개념으로의 진화가 이뤄집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정치 종교’라는 의미로 요약될 것입니다. 세속적이거나 종교적인 모든 일들이 이제 모두 종교적이며 또한 공적인 것이고, 또 이 모든 것은 공적이며 종교적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공적인 일과 종교적인 것은 깊게 닮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의 단일성이 강조됩니다. 그러므로 두 개의 서로 다른 근본적인 영역이지만 그것들의 분리는 절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라는 측면을 고려하여 살펴 볼 때 모든 통치 그룹은 거룩한 의미로 자신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군주는 사람 혹은 일의 관점에서 볼 때 거룩한 일의 법적 책임자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작게는 봉건 영주, 넓게는 왕국 통치자 즉, 왕들이었습니다.

왕국 개념에서 볼 때 교회의 전형적인 특성과 정치 종교성은 서로 경쟁합니다. 초기 중세 군주정치는 다양한 독일 민족 지역과 정복 지역에서 고대 로마 군주들의 영토에 대한 개념을 통하여 형성되어 나갔습니다. 역사-법적인 관점에서 볼 때 군주제의 형식은 독일적 개념과 고대 로마 통치 개념의 융합적 결과물입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제도는 약했고, 경쟁에 드러나 있었습니다. 왕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전쟁의 승리를 통한 왕국의 번영과 미래를 의미하는 성공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군주제는 귀족들이 요구하는 권리 앞에 끊임없이 비교될 운명, 즉 갈등할 운명이었습니다. 이전의 혈통의 거룩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이론적인 찬양, 다시 말하면 영웅적인 선조나 신들로부터 오는 왕족의 후예에 대한 권리와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혈통의 신화는 그리스도교화 되지 못하였고, 사제직은 이런 혈통 신화를 대체할 교환을 제공합니다. 바로 도유와 교회에서의 축성, 즉 구약 형식을 따른 왕의 축성이 그것이었습니다. 752년 프랑스에서 있었던 피핀의 도유와 축성은 첫 본보기가 되었고, 8세기에는 왕의 축성의 전례가 널리 전파 되었습니다. 이 축성을 통해 그들의 거룩한 품위가 강조되었습니다. 후계자들 사이의 정치적 라이벌 관계를 극복할 안정적 통치권에 대한 권리와 요청은 이런 거룩한 축성을 통해 결정되었던 것입니다. 주교들이 이런 축성을 결정하게 되면서 정치적 결정의 중요 요소가 되었고, 강력한 군주제에 대하여 영향과 관심을 갖게 됩니다. 왕으로의 축성은 왕국의 통치자로 선택된 왕족 혹은 귀족에게 어떤 중재적 축복뿐만이 아닌 더 큰 의미를 가졌습니다. 이 행위는 거룩한 행위였고, 그 의미를 현실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축성은 통치권의 실행을 위한 중요한 구성물을 획득하는 것이었고, 축성된 자는 거룩한 사제적 반열에로 올려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카알 대제는 축성을 통해 그리스도의 피로써 이룩된 하느님의 도시를 통치하고 인도해야 했고, 그의 통치권으로 또한 보편 교회는 보호되어야 했습니다. 794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있었던 제국 공의회에서 주교들은 왕의 찬가를 불렀습니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뛰어난 인도자요, 사제이며 왕이고, 아버지요 군주’였습니다. 이런 왕으로의 대관은 본질에 있어서 축성되고 대관된 자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선택하는 행위였습니다. 통치자는 이제 “하느님에게서 선택받았고, 하느님에게서 대관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통치의 합법성을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2017년 11월 5일 연중 제31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29)

 

 

황제는 이제 성대하게 대관되어 서방 교회의 보호자가 되었고, 교회의 영역과 공적인 영역의 구분이 점차 흐릿해져 갔습니다. 이런 시대에 황제들은 과연 교회 안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했고 교회와 어떤 관계에 놓이게 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일원론적 관점에서 볼 때 사제권은 왕권에 분명하게 종속되어 있었습니다. 이 말은 공적 그리스도교 업무의 관리자는 왕에게 귀속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소위말해 ‘요크의 무명씨’(Anonimo di York)에 의해 이러한 권력의 일원화에 대한 서술이 나오게 됩니다. 1100년경에 일련의 작품들이 이 이름으로 쓰였고, 저자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론으로부터 출발하여 왕권과 사제권간의 관계에 대해서 숙고를 시작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보편적 요소란 바로 세상에 대한 그분의 통치였습니다. 그 통치권은 그분의 사제직보다 앞서 오는 것입니다. 이런 ‘앞서 있음’(Prius)은 세속적 의미만이 아니고 본질적 의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치권은 영원한 신성에 기초하는 것이고, 오직 이것이 세상의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신성에 인간성이 얹혀지는 것입니다. 영원한 왕으로의 존재는 그리스도의 본질을 통한 사제직에 앞서는 것입니다. 세상은, 다시 말해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세상을 구성하고, 이것은 교회를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리스도는 그 머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구세주라는 한에서 머리가 아니고 이미 왕으로써 우두머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 왕에 결합된 여왕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저자는 그리스도 왕에 대한 그의 이론으로부터 분명한 정치적 결과들을 이끌어 냅니다. 그에 따르면 지상의 왕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이자 모상입니다. 그에게 이 땅의 가시적이며 지상적인 교회가 맡겨졌습니다. 왕은 그의 땅에서 그리스도를 대표하고, 그 곳에서 대리자인 것입니다. 사제가 이 대리자의 역할을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제는 그리스도처럼 어떤 통치권도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제적 기능을 계속하는 사제직 안에는 통치권의 어떤 모습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제직은 오직 성화와 구원으로 불린 것이고, 교회의 인도는 왕의 손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세상은 천상 도시의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익명의 저자는 사제권과 왕권의 기능들을 구분하였고, 이후에 발전된 전문용어들을 통해서 우리들에 의해서 반복되고 명료해 졌습니다. 사제권에는 예외적이면서도 구별되는 방법으로 실제적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권한이 포함되어 있고, 통치자에게는 신비스런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권한이 속하게 되었습니다. 신비스런 몸이란 그리스도교의 가시적, 사회적 구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적 다스림과 통치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었고, 이것들이 바로 왕의 임무라는 것입니다.

실제적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권한은 좁은 의미에서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넓게 볼 때 이 표현은 구원을 위한 다양한 사제적 중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권한은 오직 사제직에만 유보된 것이었습니다. 익명의 저자는 엄청난 에너지로 나머지를 명료화하는데, 특히 사제의 구별되는 요소를 명확히 하면서 교회의 다스림에 교황의 모든 요구들을 거부합니다. 자연스럽게 익명의 저자는 시대적 모습으로부터 분리된 순수한 ‘성령의 교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그에게는 사제직은 왕권의 일부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교회의 조직들은 왕국의 것들이고, 주교들은 단지 통치권에서 다스림의 빼어난 특권을 받은 자들이라 여겼습니다. 그는 자기 시대의 사제적 왕국을 눈 앞에 바라보고 있었고, 실천적인 면을 볼 때 거기에서는 신정정치 이원론의 이론과 어떤 구별도 없던 시대를 살고 있었습니다. [2017년 11월 12일 연중 제32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30)

 

 

지난 호에서는 ‘요크의 무명씨’에 의해 써진 신정정치의 일원론적 관점을 소개하면서, 사제권과 왕권과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이원론적 관점에서 두 권력의 관계를 살펴볼까 합니다. 우리가 이런 이론을 소개하고 살펴보는 것은 오늘날에도 매우 유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주제는 과연 ‘교회의 권력이란 무엇이고 그것은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원론적 관점의 이론을 명확하게 하는 데에는 1076년의 엔리코 4세(Enrico IV)가 자신의 경쟁자였던 그레고리오 7세(Gregorio VII) 교황의 해임에 대항하고 극복하려는 의도를 알리려고 쓴 글이 아주 대표적이라 할 것입니다. 이 글에서 그는 교황이 원칙적으로 신적 질서를 경멸했음을 비난하는데, 그것은 교황이 세속 통치권과 영적인 권한을 부당하게 갈취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 그는 하느님께서 오직 하나의 권한만이 아니라, 근본에서 두 개의 통치권을 세우고자 하신 신적인 올바른 질서를 경시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대 권력과 영적 권력 그리고 이것에 대해서 구세주 스스로 수난 받으실 때 이미 알려주셨습니다. 그 분은 그 순간에, 두 개의 상징인 두 개의 검으로 충분하다고 명확하게 하셨습니다. “주님 여기 두 개의 검이 있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주님이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숫자가 충분한 것처럼 가르치시며, 교회 안에 영적인 검과 세속적 검이 사용 되어야 한다는 의도를 명확히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도구들을 통해 모든 해로운 것들이 잘려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은 실제로 모든 사람은 영적인 검의 중재를 통해서 하느님의 장소에서 다스리는 왕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반대로 왕의 지상의 검을 통해서는, 그리스도의 적들을 쫓아내기 위해 외부로 가야하고, 안으로는 영적인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상 통치권이 영적 권력에 대해 부족함 없이, 영적 통치권이 세속권력에 대해 모자람 없이 한편에서 다른 편을 향한 사랑으로 추동되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이 개념에 따라 교회는 그 구조에서 로마 제국과 교회 자체를 온전히 동일시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통치권에 대한 이런 구체적 이미지 안에서 권리와 질서, 평화는 왕의 통치권과 교황의 권위로 보장되었던 것입니다. 이 두 개의 권력은 원인과 목적의 측면에서 모두가 하나이지만, 서로 다른 기능의 관점에서는 분리되어 있는 것입니다. 견고한 두개의 권력들의 올바른 관계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 세상은 조화를 이룹니다. 이 계획 안에서 군주체제에는 신앙의 선포와 방어가 의무지어지고, 사제직에는 화해와 성화가 의무지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왕국 교회를 볼 때, 사제권의 제도와 조직들은 왕국에 통합되어 있고 군주체제는 또한 사제권의 관심사들과 외적 상황을 통제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종교-영성적 임무를 위한 물질적 요소, 즉 교회 관리들의 임명과 서임 등입니다.

기능적 이원론을 보면, 질서의 이 모델은 교황 권위의 특별한 권한을 강조하고 그 정당성을 찾습니다. 그러나 통치권의 외적인 도구들이 허용된 군주정치에 대한 신정 정치적 찬양을 통해서 신정정치적 이원론은 일원론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신정정치적 이원론과 관련된 저술들은 특히 카롤링거 왕조 시대부터 많아집니다. 개념과 이미지는 다양하지만, 근본에서는 한결 같았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정리하면 ‘사제권에는 하늘 나라의 열쇠가 맡겨졌고, 군주에게는 악인들을 처벌하기 위한 검이 맡겨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에서 사제권은 왕국 아래에 놓이고, 또한 세속권력은 사제권 아래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어렵지만 이런 개념에서 왕의 통치권에는 거룩함이, 사제권에는 왕국 통치권에 참여의 길이 열리게 되고, 주교들과 대수도원장들이 궁정의 관리요 외교관이며 지휘관이란 것이 영적 직무와 모순으로 여겨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2017년 11월 19일 연중 제33주일(평신도 주일, 세계 가난한 이의 날)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31)

 

 

신정정치의 이원론적 관점에 대해 지난 호에서 간략히 살펴보았습니다. 이렇듯 세상에 두 개의 검이 필요하고 이를 통해 성화와 안정이 이루어지는 구조를 향해 이론이 정립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대적 상황은 이 두 개의 검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과 대립을 통해 변주를 이루어 갑니다. 오늘은 왕국 교회가 문화적 영역에서는 어떤 기능을 하게 되는지 개략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화 이래로 주교 공동체들의 종교적 삶과 전례는 공적 영역에서의 봉사와 국가의 활동이기도 하였습니다. 중세 초와 고중세의 시초에 이 임무가 좀 더 확실하게 규정되었습니다. 다양한 교회 조직 영역 밖에서는 어떤 문화의 대표자들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제국과 그 시대 왕국들은 이런 사태들에 정당성을 주었고, 교회의 문화적 사업을 위한 물질적 수단들을 언제나 도울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통치자들의 이런 후원자적 경향은 그 자신에게 이득이 되었습니다.

 

주교좌, 수도원 그리고 왕국 궁정의 경당들은 이제 지성적 활동과 문화적 삶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카롤링거 쇄신의 시초들은 이런 상황을 풍요롭게 선도해 나갔습니다. 연구들에 따르면 이렇게 오토왕조의 재생은 교양(septem artes liberales)*의 영역에서 형식 문화가 미적 수준에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특히 이 문화는 성경 주석과 지리, 전례서들, 역사이론과 관련되었습니다. 철학 신학적 영역에서는 근원적 사색 능력은 아직 그 힘이 부쳤습니다. 오히려 삽화 미술과 건축, 성미술에서 빼어난 공헌이 있었습니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보면, 로마적 문화와 예술은 귀족적 특징을 가졌습니다. 그 문화의 대표들과 지원자들이 모두 귀족이었고, 결국 ‘귀족-왕족’ 세상의 이상을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예술의 크고 작은 주제들 이외에도 문학에서의 찬란함, 호사스러움과 고귀함은 마치 권력이 그리스도의 권능에 참여한다는 개념과 그 반영이라 합의된 ‘권력의 찬란함’(splendor potestatis)이라는 개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 문화는 세상을 위한 그리고 세상에 대한 주목이라는 과업을 함유하고 있었습니다. 정의와 평화의 보호라는 정치적 덕성들이 귀족 성인들, 교회와 수도원의 창설자와 왕국의 수호자, 혹은 국가의 창시자들에 대한 전기적 찬양처럼 군주들의 모델을 결정지었습니다.

 

왕국, 귀족적 교회의 문명에서는 왕권과 사제권이, 나아가 능력자와 가난한 자들이 조화를, 다시 말해 사회적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계층의 다름은 문제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신적 질서의 표현처럼 해석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능력자들에게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무가 차근차근 가르쳐졌습니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돌봄은 그 시대 군주들의 임무들을 다룸에 있어서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살기, 가난한 이처럼 살기가 세속 귀족과 주교들, 수도원장과 성직자 심지어 수도자들에게도 종교적 이상을 구성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가난한 자들’(pauperes Christi)로 정의된 고대로부터도 이미 이들은 가난한 자들의 보호자들이어야 했습니다. 수도원에게는 사회적 애덕 실천의 임무들이 맡겨졌습니다. 그것은 제도를 거슬러 항의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오히려 수도승들이 가난한 이들의 영혼 구원을 호소하고, 그 가련한 이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을 통치자들의 양심에 호소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문학에서도 무능한 이들과 능력자들, 가난한 이들과 부자들 간의 공존을 위한 조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11세기부터 이런 조화에 대한 일반적 동의를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게 됩니다. 이제 수도원 삶에 위기의 시대가 다가오는 것이고 ‘세상으로부터의 떠남’(fuga dal mondo)이라는 금욕적 뿌리에 대한 새로운 숙고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 중세의 교양과목으로 문법, 논리학, 수사학, 산수, 기하, 음악, 천문의 일곱 가지를 일컫는다. [2017년 12월 3일 대림 제1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32)

 

 

고중세 시대의 교황 교회

 

이제 역사적 상황은 변화에 직면하게 됩니다. 지금껏 종교-정치적 개념에 기반한 ‘제국 교회’가 서방 교회를 이끌어 오는 원동력이었고, 그 교회는 ‘전투적이었고 선교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교회는 변화된 상황 아래서 자신에 대한 인식을 깊게 하고, 새로운 모델을 찾아야 하는 역사적 변곡점에 섭니다. 그 상황에서의 노력들은 개혁이라고 이름 붙여지기도 하고, 또 다른 극단을 향해가는 위험을 수반하기도 합니다. 이제는 그 과정을 조심스럽게 살펴보겠습니다.

 

12세기를 거치며 귀족 교회 조직들과 수도원들, 그리고 주교들이 그리스도교의 성장에 있어서 어떤 협력을 통하여 교황의 인도 아래 하나가 됩니다. 종교-정치적 흔적의 일치 원리는 이제 대치되거나 베드로-사도적 원리 밑에 놓이게 됩니다. 이 과정과 관련해서 마치 이전 시기에 대해 ‘왕, 또는 제국 교회’라 말했던 것처럼 그것을 ‘교황 교회’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황제권과 비교에서 사제권의 우위성과 탁월성, 그리고 성직자들의 자유에 대한 확신이 거룩한 제국으로부터 ‘거리두기’로 교회를 이끌었습니다.

 

그레고리오 개혁은 그 첫 순간부터 널리 퍼져있던 종교적 금욕주의 안에 잘 받아들여졌습니다. 반향을 일으키는 개혁에 대한 원리들을 발전시켰고, 그것을 알리기 위한 구호들을 형식화 하였습니다. 11세기 말부터 학자들은 지성적 자각을 통해 개혁적 경향의 ‘교회의 자유’를 학문의 중심 주제로 가져옵니다. 이것은 특별한 방법으로 교회법 학자들에게 의미가 있었는데, 즉 최고위부터 맨 아래까지의 교회에 새로운 구조를 주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이런 임무로 자극 받은 이들의 학문적 노력과 이성적 정신으로 방향 지어진 교회법은 12세기 서방 엘리트들에게 매혹적이고 매우 특징적인 요소가 되었습니다. 교회법 학자들은 교황 교회조직과 특별하게 연결된 그룹을 형성합니다. 교회법 학자들은 그들의 앎을 통해 보다 넓은 동의를 얻는 권한을 획득합니다.

 

이런 노력을 통해 베드로-사도적 원리로부터 추론된 교회의 자유는 자연스럽게 교회 내부에서의 교황의 인도에 대한 요구 뿐 아니라 세속 영역을 향해서도 같은 권한을 요구하였습니다. 이것은 거룩한 군주 정치가 문화와 종교, 교회의 전파와 보호를 위해 행하였던 것들을 이제부터는 교황의 임무로 정의하고, 교황의 실행을 통해 점점 그 대리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교황의 활동은 세속 영역에 광범위하게 침투했고, 서방 정치 상황의 바꿀 수 없는 배경처럼 비쳐집니다. 12-13세기가 되면 서 유럽에 큰 차원에서의 거룩한 제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레고리오 개혁(Riforma gregoriana) 이후 정치-사회적 관점과 마찬가지로 교회-영성적 관점에서 거룩한 제국의 찬란함은 퇴색합니다. 12세기 중후반 스베비인들(Svevi)의 노력을 통해 이룬 거룩한 제국의 재건은 그 시대의 사회, 문화, 정치적 새로운 경향들에 맞서 더 이상 승리하지 못합니다. 이태리 북부 도시들과 유럽의 여러 왕국들은 스베비 시대로 유럽을 되돌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러 왕국들에서 서방 그리스도교의 정치적 분절은 교황에게 호의적 상황이었고, 그 기회를 틈타 교황에게 유리한 점들을 이끌어 내었습니다. 이 분절은 세속 권력들의 다극화를 두드러지게 했고 영적 권력의 단일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서로 다른 세속 군주들은 아직 왕국 형태 수준에 미치지 못했고, 후기의 중세적 국가 성숙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황은 최고의 영적 통치를 인정받게 됩니다. 12-13세기의 교황 교회라는 영적 왕국은 마치 베드로-사도적 로마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일반적인 서방 문명의 표현처럼 개별 왕국들 안에서 발전한 국가 개념의 결과였습니다. 서방은 민족과 정치의 분별이라는 느린 과정의 시작에 있었고, 아직 정치적 일치가 더 이상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서방은 교황에 의해서 지지되는 종교적, 문화적 법률적 일치를 향해 움직여가고 있었으며, 그것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발전의 길에 있는 국가 주권의 상황 안에서, 종교-정치적 원리에서 기원한 거룩한 제국의 통치자들이 아니라, 베드로-사도적 원리로부터 발전된 사제권과 왕권의 협동 모델이 좀 더 논리적인 이론과 유용한 실천에서 명백히 드러나게 됩니다. [2017년 12월 10일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사회 교리 주간)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33)

 

 

고중세 시대의 교황 교회 – 교회의 자유를 향하여

 

그레고리오 개혁이라는 용어는 11세기의 말과 12세기 초 사이의 교회적 · 정치적 다툼 안을 관통하여 종교 교회적 새로운 이상에 의해 지배되던 시대를 가리킵니다. 이런 시대의 경우 종교-교회적 관심의 개혁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변형되어야만 하는 왕의 교회와 교회 자체를 – 당시까지 왕성한 조직적 시스템을 갖춘 그것을 - 교회의 자유라는 비전 안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이 시대에 이러한 경향은 정점을 향해 갔습니다. 이런 교회에 대한 새로운 자각적 움직임은 교회의 특성과 직무의 영성을 분명하게 하였고, 교회와 세상, 영성과 권력, 가난과 부유함의 관계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였습니다. 또한 사제권과 왕권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이끌어내는 힘들의 연속성을 통해 가능했습니다. 고중세의 교황 교회는 서방 그리스도교와 교회의 이런 새로운 개념 없이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레고리오 개혁’(Riforma gregoriana)이라 부르는 전환은 가장 대표적 원칙으로 고려된 것으로, 그레고리오 7세(Gregorio VII, 1073-1085) 교황의 교황 재위기간에 현실화됩니다. 레오 9세 교황 때부터 새로운 개혁적 방향을 향한 움직임을 시작한, 미래의 교황인 그는 수도자 힐데브란도(Illdebrando)였습니다. 그는 교황 성청(Curia romana)을 중심으로 모인 개혁가들의 그룹 안에서 리더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대단한 인물들 안에서 이탈리아 은수 운동의 피에르 다미아니(Pier Damiani)와 클뤼니 수도회의 로타링가 출신 움베르토 다 실바 칸디다(Umberto da Silva Candida)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엔리코 3세(Enrico III) 황제의 죽음 이후 개혁은 시작부터 로마를 공고하게 하려는 의도만이 아니라 그의 추동자에게 교황좌를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런 개혁은 내용적 관점에서 볼 때, 수도 금욕적 영성에 의해서 촉발된 도덕적 재생을 다루고, 그리스도교 안에서 로마교회에 대한 신학적 법적인 지위에 대한 명료화가 결합되었습니다. 조직 비평적 전환은 움베르토의 논쟁적 글쓰기를 통해서 주장되었고, 왕의 교회와 교회 자체 시스템의 원리들에 대한 거부가 부과되었습니다.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은 이런 관점을 공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자유는 교황 편에서의 선도와 결합되었고, 그것은 개혁의 임무처럼 천명되었던 것입니다.

 

교회의 자유에 대한 호소는 그레고리오 개혁의 구호 안에 있는 목적성을 종합적으로 보여줍니다. 자유에 대한 계획은 교회에 대한 신학적 개념, 즉 교회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지상에 창설된 하느님의 업적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하여 발전된 것입니다. 그 분은 교회를 왕들에게 맡기지 않고 사제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주교들 안에서 신부인 교회와 신랑인 그리스도의 결합이 연장됩니다. 그 결합은 교회의 위임을 통해 실현되고, 반지로써 그 혼인이 상징되었으며, 목장은 목자의 영적인 사명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적 직무의 영적 특성이 명료화되었고, 그 위임은 교회적 행위로 천명되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교회의 조직은 황제의 교회와 제국의 교회를 원칙에서 단죄하고 교황 교회의 지배에 따르게 합니다. 왕실 권력에 의한 교회의 인도는 그의 구원적 사명을 방해하거나 장애를 주는 자유의 부족과 노예화로 교회를 밀어부치는 것으로, 이는 신적 질서에 대한 전복이고 오만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구원의 기능에서 교회의 노예화를 끝내야 하고, 또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교회에게 자유를 되돌려 줘야 합니다. 교회의 노예화의 직접적인 표현들은 니콜라이즘(Nicolaismo)*과 매관매직(simonia)처럼 여겨졌습니다.

 

니콜라이즘과의 싸움은 사도행전 2장 6절의 언급을 통해서 성직자에 대한 독신의 요구로 간주되었고, 그것은 마치 교회란 이미지의 결과처럼 해석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각 개별 사제는 신랑과 신부의 통상적 상징 안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의 가치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사제에게 신부는 그에게 맡겨진 공동체였고, 그는 신부에게 충만한 헌신으로 봉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 총체적으로 성직자들의 타락이라는 의미로 보면 좋은 것 같다. [2017년 12월 17일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34)

 

 

교회의 자유를 향한 여정에서 우리는 그레고리오 개혁에 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개혁의 시급함 안에서도 특히 성직자의 도덕적 타락과 성직에 대한 매관매직은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였습니다. 그레고리오로 대표되는 이 개혁 세력은 교회에 관한 새로운 인식과 자각을 통해 이 문제들을 해결해 나아가고자 합니다. 지난 호의 마지막에 니콜라이즘과의 긴 싸움에서 성직자들의 타락을 쇄신하기 위해 개혁세력들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자각을 해야 하고, 사제는 그리스도교 백성과 혼인한 존재로 그들에게 헌신해야 한다’는 인식을 강조했습니다. 계속해서 살펴볼 것은 ‘성직매매’(Simonia)의 문제 해결에 대한 것입니다.

 

개혁가들은 성직의 매관매직은 당대의 가장 근본적인 악이며 하느님에 의해 세워진 교회의 질서를 파괴하는 가장 위험한 뿌리라고 보고 있었습니다. ‘성직매매’(simonia)라는 이름과 그 의미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영적 직무에 대한 판매를 언급하는 사도행전 8장 18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에서 성직매매라는 이 근본적인 악이 이제 이 시대에 들어서면, 교육받지 않고 성품을 받지 않은 평신도가 교회의 직무 가운데 성직을 차지하는 데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종합해서 볼 때 아무런 준비 없이 금전과 지위, 정치적 고려를 이용한 평신도적 성직임명을 ‘성직매매’(simonia)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평신도에 의한 성직 수행이 그것이 돈에 의한 것이든, 혹 거저 주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결코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는 요구가> 개혁가들의 시노드 안에서 계속적으로 옹호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레고리오 개혁 과정 안에서 고대 교회의 모델과 관련된 공의회적인 삶에 대한 눈에 띠는 새로운 활기가 생겨납니다. 즉 잦은 시노드의 개최입니다.

 

시노드라 함은 일반적으로는 교회적 모임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종종 특별한 시노드들에 교황의 사절들이 파견되었고, 그들이 그 시노드들을 주재하였습니다. 그 시대의 많은 시노드들 중 좀 더 중요한 것들이 라떼란 시노드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전통에 따라 사순절의 시작에 로마 교구에서 열리는 로마 성직자들의 모임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시노드들은 순수하게 지역적 의미를 가지지만, 당시 라떼란 시노드들은 모든 교회와 관련하여 말하고자 원했고, 종종 여기에 타국 주교들도 초청하여 참여하게 됩니다.

 

라테란에서 열린 시노드들은 주로 교황의 주재로 열렸고, 이런 전통은 중세의 교황 공의회들을 향한 중대한 걸음을 떼어 놓는 것이었습니다. 즉 교황에 의한 시노드의 소집과 주재, 혹은 시노드의 결정들에 대한 수용에 있어서 시노드적 ‘일치’의 특성이 고정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황들의 공의회가 열렸고, 시노드들은 1차 라테란 공의회(1123), 2차 라테란 공의회(1139), 3차 라테란 공의회(1179), 4차 라테란 공의회(1215), 그리고 1차 리옹 공의회(1245), 2차 리옹 공의회(1274), 그리고 비엔나 공의회(1314)처럼 계속해서 ‘일치 공의회’(concili ecumenici)의 지위로 올려지게 됩니다.

 

11세기 중반의 로마 라테란 시노드들은 교황의 교령들을 받아들였고, 개혁의 개념들을 시노드 규정들 안에 포함시켰습니다. 교령들은 무엇보다도 니콜라이즘과 성직매매, 그리고 평신도 성직을 공격하였습니다. 주교 선출의 자유와 교회적 주교 임명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을 실행하면서 윈칙적 요구에 있어서는 만족스런 결과를 냈지만, 세부 사항에는 소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자유로운 선출’에 있어서 특별한 점들과 직무들의 승인에 이르는 법률 조항들의 세세한 과정은 확정되지 못하였습니다.

 

12세기의 교회법이 마침내 주교 선출 과정의 정확한 규정과 순서를 만들게 됩니다. 그레고리오 개혁의 초기부터 평신도의 성직 임명과 평신도 편에서 교회 관리들이 임명되기를 원치 않았던 점 등은 빠른 속도로 동의에 이릅니다. ‘주교의 자유로운 선출’은 1059년 4월 13일 라테란 시노드의 교황 선출에 대한 교령 선포에서 그것이 잘 드러납니다. [2017년 12월 31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가정 성화 주간)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35)

 

 

그레고리오 개혁으로 촉발된 성직 임명에 있어서의 자유와 평신도들에 대한 무분별한 성직 임명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교회의 노력은 라테란 시노드들을 통하여 그 결실을 맺게 됩니다. 이제 시노드들에서 선포된 교황의 선출에 대한 교령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이는 성직 임명의 문제에 있어서 교회의 자유로운 선출을 위한 제도적 준비였습니다.

 

첫 번째로 강조된 것은 추기경들이 자신들의 직무에 대한 자각과 관련된 것으로, 그 자신들의 교황 선출에서의 직무들의 동기에 주목하고, 내용과 의미들을 고려하는 흥미로운 문서가 이 시노드에서 준비되게 됩니다.

 

교령은 관행을 거스르는 1058년의 12월의 니콜로 2세(Niccolo II)의 대립 교황 선출의 문제를 해결하는데서 시작합니다. 스테파노 9세(Stefano IX)가 돌아가신 후(1058. 3. 29) 로마 교회의 이런 개혁적 경향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던 로마 귀족들은 투스콜로(Tuscolo)의 공작을 교황으로 뽑아 세웁니다. 그가 바로 베네딕도 10세(Benedetto X)입니다. 개혁을 간절히 원하던 이들은 이런 교황의 임명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추기경들은 시에나(Siena)로 철수하였습니다. 이어서 피렌체의 대주교 제라르도(l’arcivescovo fiorentino Gerardo)를 교황으로 선출하였습니다.

 

그리고 교령은 시에나에서의 교황 선출을 합법으로 인정하면서 다음의 것들을 규정하였습니다.

 

1. 교황의 선출은 추기경들에게 전적으로 유보되어 있다. 즉, 주교 추기경들에게 교황 후보자의 임명에 대한 주도권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제와 사제급 추기경들은 제안된 후보자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성직자와 백성은 환호로 선출에 동의합니다.

 

2. 로마는 교황 선출을 위한 법적 권한이 있는 장소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로마 밖에서의 중요한 물리적 이유로 완결된 선출 또한 백성과 성직자의 일정 부분이 동의하면 유효하게 받아들인다’고 규정합니다.

 

3. 선출과 환호가 있은 후에 선출된 이가 교황이 됩니다. 로마의 여러 다른 교회에서 착좌식의 법적 · 전례적 행위들은 그러므로 교황좌 착좌의 구성적 요소를 대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전례적 예절의 부분을 구성하고, 예외적인 경우에는 무시할 수 있는 것입니다.

 

4. 교황직은 오직 로마의 교회가 아니라 마치 보편 교회를 위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런 이유로 교황은 보편성을 띠고 교회의 대표라는 자격으로 추기경들에 의해서 선출됩니다.

 

5. 이런 개념의 영향 아래 평신도들은 선출의 과정에서 제외됩니다. 선출자들의 범위를 한계 짓는 이런 교령은 직접적으로, 그리고 즉시 로마 귀족의 저항에 부딪치게 됩니다.

 

또한 이 교령은 간접적으로 황제를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고대 계약들에서 보호된 교황의 선출에 개입할 수 있는 게르만 왕의 권한을 침묵 아래 그렇게 지나치고 있었습니다.

 

이후 이 교령의 규정이 글자 그대로 지켜지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연유로, 예를 들어 투표의 경우, 과정의 특별한 점들이 너무 일반적으로 규정 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령은 미래를 위한 규범으로 남게 될 운명이었습니다. 교황의 자유로운 선출에서 평신도들이 직접적 참여가 불가능해 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추기경들이야말로 참되고 고유한, 그리고 합법적 선출자들로 확정됩니다. 시에나에서 개혁의 추종자들은 그 효과(교황 선출)를 달성함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는 선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귀족들과 독일 황제도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2018년 1월 7일 주님 공현 대축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36)

 

 

교황 선출에 있어서 일정 제도가 마련되면서 이제 교황은 교회의 실질적 지도자로서의 권리를 요청하기에 이릅니다. ‘교회의 자유’라는 것이 베드로-사도적 원리와 연결되어 있는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떤한 순간에 이상화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어떤 예외적 발전을 이룬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레고리오 교황 개혁의 추종자들은 오랜 전통을 거쳐 작업된 이론을 반복하며, 적용할 적절한 기회를 잡게 됩니다.

 

역사 안에서 4세기에 시작된 ‘베드로-사도적 원리’는 고대 후기의 교황권의 기초적 이상으로 중요한 구실을 했습니다. 이 이상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베드로 사도의 특별한 권위와 연결되어 있고, 그 베드로 사도가 로마 교회를 설립했다는 점과 ‘로마 제국’ 안에서 ‘로마’라는 도시가 갖는 특별함에 대한 저술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 ‘베드로-사도적’ 원리의 형식은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두 도시간의 라이벌적 배경이 먼저 고려되었고, 신정정치 시대에서 제국 통치자와 비교하여 교회 자립의 요구는 물론, 여러 가치들이 복잡하게 수렴된 것이었습니다.

 

이런 여러 요청들은 젤라시오 1세(Gelasio I) 교황이 사용한 ‘교황의 거룩한 권위와 왕의 통치’라는 이중적 표현에서 보이듯, 고대 후기에 두 개의 권력에 대한 숙고에로 이끌었습니다. 중세 초기를 지날 때까지 이런 생각은 지속적인 효과를 내는 전통이 되어 갔습니다. 초 중세기에 로마와 교회 안정성의 관계에서 로마 교회 조직의 정치적 자립을 고려할 필요가 대두됩니다. 그러므로 로마의 교회는 중세부터 귀족 교회와 수도원 교회들의 곁에서 소위 말하는 ‘주교적 교회’의 핵심을 건설해 나가면서, 고대 교회의 주교적 조직을 간직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중세 초기가 되면 이런 주교적 교회 조직은 왕의 교회 안으로 흡수됩니다. 그것이 주교적 교회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로마 이외의 교회들에서도 교회의 자기 충만성과 영적 교회의 자율권에 대한 자각이 없지 않았습니다. 이런 현실적 인식에 대한 뚜렷한 증거가 위이시도로의 교령들(Decretali pseudoisidoriane)을 통해 드러납니다.

 

이 용어는 ‘모음집’이란 의미에서 서방 프랑크 왕국 안에서 2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공의회의 교령들과 교황 교서들의 모음입니다. 그 모음은 1세기 말부터 8세기 중반까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수집의 대표자는 이시도로 메르카토레(Isidoro Mercatore)라고 불렸고, 중세에는 시빌리아의 이시도로(Isidoro di Siviglia +636)로 여겼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시조가 되는 위이시도로(Pseudo Isidoro)는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서 3개의 모음집을 내었습니다. 에스파니아-갈리아(Hispaniogallica) 모음, 안질람니 논문집(Capitula Angilamni), 베네딕도 레비타(Benedetto Levita)의 교회법 모음집이 그것입니다. 19세기부터 이 모든 것들과 4개의 모음집들은 ‘위이시도로 교령’(Decretali pseudoisidoriane)이라는 제목 하에 합쳐지게 됩니다.

 

위의 저자들은 같은 방법론을 쫓습니다. 그들은 교령들과 명령들, 서신들을 모으고, 조직적 비평에 따라 재료들을 정리합니다. 텍스트들은 목적에 맞게 자유롭게 창작되고, 권위적 재료가 원텍스트로부터 잘려져 다른 곳에 삽입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의미의 변형이 이루어지고 의도적 위조가 기원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놓여 집니다. 즉 고대 교회의 모델에 따라 왕과 자치 군주들에게 굴복된 주교의 권위를 복권하는 데 사용됩니다. 주교적 교회에 대한 자유의 보증이 교황의 수위권으로 고려됩니다. 이런 목적을 위해서 로마 교회의 베드로-사도 권력에 주목하게 됩니다. 이런 위이시도로 법령집은 넓게 퍼져갔고, 새로운 모음들로 더욱 풍요롭게 됩니다. 교회는 11세기 중반에 가면 ‘로마 교황의 자유’라는 전망 안에서 이 모음집을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2018년 1월 14일 연중 제2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37)

 

 

우리는 지난 호에서 ‘위이시도로’(pseudo-Isidoro)로 대표되는 문서들의 존재와 그것들의 의도와 편집 과정 등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모든 노력들은 결국 ‘교회의 자유’라는 대 명제를 위한 시도였고, 이것들이 시대적 한계를 갖고 있지만 제국의 정치적 개입에서 자유로운 교회의 길을 위한 다리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이제는 이제 교황에 의해서 이뤄진 노력들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지금껏 교회의 자유를 위한 이론적 배경이 되는 이 ‘베드로-사도적’ 교회론의 근본 문서는 ‘교황 교령’(Dictatus Papae)입니다. 이것은 교황 그레고리오 7세(Gregorio VII)가 자신 교황직의 초기에 그 편집을 지시한 것으로, 스물 일곱 개의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교황 교령의 내용의 큰 특징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첫째, 보편 교회에서 로마 교회의 지위를 크게 도약하게 했습니다. 둘째로 교황의 교회에 대한 인도의 고유성과 보편적 자격에 대한 것을 이끌어 내었습니다. 셋째로는 왕국과 제국과 교회의 비교에서 사제권의 우위를, 즉 교황의 특권을 특정합니다.

 

이런 이상들은 교황과 로마 교회를 명확하게 부상시켰습니다.

 

<로마 교회는 예외적이고 유일하게 하느님으로부터 설립되었다>는 발의의 근본적인 언급을 하였습니다.

 

1. 이 선언은 마치 역사에서의 베드로-사도적인 해석의 결과처럼 고려되어야 했고, 동의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모든 다른 교회들의 어머니로서 로마 교회는 뛰어난 방법으로 보편 교회의 함축성을 귀속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 교회는 결코 헛된 길에 들어서지 않는 올바른 신앙의 보루라고 선언합니다.

 

22항 <로마 교회는 오류에 물든 적이 없고 거룩한 성경 말씀의 증언에 따라 오류에 물들지 않고 영원히 그러하리라>. 로마 교회의 보편적 직무 때문에 교황은 자신의 직무에서 특별한 거룩함과 종신성을 지닌다고 천명합니다. 23항에서는 <로마 교황은 의심없이 파비아의 성 엔노디오의 증언에 따라 법적인 절차로 선출되었고, 그는 많은 교회의 교부들이 확증하는 것처럼, 성 심마코(santo Simmaco)의 교령들에서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성베드로의 공로들을 통해 거룩하게 되었다> 그리고 19항은 <어느 누구도 그(교황)에 대해 심판할 권한을 소유하지 못한다>고 단언합니다. 조항들 안에서는 또한 모든 교회를 인도할 교황의 자격에 대해 논합니다. 그리고 교황의 보편적 인도의 능력과 법례화를 말하며, 교황의 완전한 행정적 권한들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전체 교회로 확장되는 법적인 명령을 다루는 것입니다. 26항은 법적 교의적 권한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로마 교회와 일치하지 않는 자는 신앙의 영역 안에서 정통으로 고려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편적 명제로서 ‘주교가 있는 그 곳에 교회가 있다’(ubi episcopus, ibi ecclesia)는 고대 교회의 사도적 원리가 ‘베드로-사도적’ 원리의 재해석이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의 확장이 또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는 고대 주교 교회론이 포함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론적 개념은 왕권과 비교하여 사제권의 자율성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이 기인하는, 교황에게 유보된 권한들이 이 ‘교황 교령’(Dictatus Papae)의 8, 9, 12, 27항 등에 나열되어 있습니다.

 

‘교황 교령’(Dictatus Papae)를 둘러싸고 사료와 기회 그리고 의도 등에 대해 긴 논쟁이 전개됩니다. 오랜 기간 동안 이 조항들은 사제권과 황제권 사이의 논쟁에서 두드러진 요소였고, 이 논제의 해석이 논쟁의 주를 이루며 더욱 중요했던 교회론적 관점은 뒷줄로 밀려나고 맙니다. ‘구 가톨릭’의 학자는 dictatus papae를 교회적 법률을 어긴 것처럼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조항들은 교회법적 모음집의 목차의 목소리를 대표하는 것 뿐, 개별 조항들의 문자적 의미는 상대적이었습니다. [2018년 1월 21일 연중 제3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38)

 

 

지난 호에서 마지막으로 그레고리오 7세의 ‘교황 교령’(dictatus papae)에 관한 논쟁을 살펴 보았습니다. 이 논쟁을 통하여 교황 교령 전체에 대한 의미는 고대와 현대의 법률적 모음들에 많은 부분이 보존되어 있는 그레고리오 7세의 편지들의 해설 등을 사용하면서 비유적 톤으로 드러난 조항들을 통해서 그 의미가 축소되었습니다. 비록 ‘교황 교령’ 목차의 가정이 해석에 있어서 충분한 요소를 드러내지는 못하였지만, 조항들은 의도된 주제들의 특징을 잘 보여주었고 특별한 문학적 장르로 남겨지고 다뤄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황 교령’의 참 의미는 교황의 실천과 ‘베드로-사도적’ 원리가 문자적 전통과의 폭넓은 만남과 비교를 통해서 점차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역사 안에서 교황과 황제라는 두 적대자들은 서로 동의에 이르게 되고, 그 결과는 지역적 관심을 넘어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따라 주교를 임명하고 교회를 다스리는 임무는 왕권이 아니라 사제권에 귀속되어야 한다고 점차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이것이 11세기 중반에 널리 퍼진 확신이자 희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로마 개혁가들만의 제한된 의견을 대표하지 않았습니다. 널리 퍼진 이 이상은 비아지오의 베르놀도(Bernoldo di s. Biagio +1100)의 주장이 널리 회자되었습니다. <저는 마치 심판자 그리스도의 왕좌처럼 로마 주교좌를 공경합니다. 마치 성령의 지성소처럼 자유로움을, 그들의 교령들을 천상 궁전의 법령들처럼 받아들입니다.>

 

주교 임명을 둘러싼 갈등

 

사제권과 왕권 사이의 원칙에 대한 논쟁은 ‘거룩한 조직’을 깊게 흔들어 놓았습니다. 이런 갈등은 주교를 임명함에서 종종 표출되었습니다. 엔리코 4세(하인리히 4세, 독일식)는 선친들과는 다르게 종교적, 영성적 질서의 관점들에 대해 정치적 통치권의 관심들을 통합하는 것에 소홀했습니다. 그러자 그레고리오 교황은 황제에 의해서 이뤄진 임명 들을 인정하기를 거부 하였고, 오히려 왕에게 경고하며, 파문으로 위협했습니다. 그러자 1076년 1월 24일 엔리코 4세는 보름스(Worms)의 시노드에서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무효성을 왕국 주교들로부터 서명 받았습니다. 이런 일이 보고되자 교황 그레고리오는 1076년 2월 22일 성 베드로에게 봉헌된 기도의 형식 아래 이뤄진 선고에서 엔리코 4세를 파문 하였고, 왕에 대한 충성의 서약으로 부터 모든 신민들을 면제시켰습니다. 주교들의 임명에 대한 분쟁이 주된 상황이 되었지만, 곧바로 이 분쟁은 정치적으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황제 측에서는 반대 여론을 형성했습니다. 즉 왕에게 매우 위험하게 된 이 원칙들에 대한 반대를 형식화하였습니다. 하지만 위기에 내몰린 왕은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교회 앞에서 보속을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왕은 1077년 1월 28일 북쪽 아펜니노의 카노싸 성(Castello di Canossa)에서 맨발로 보속의 행위를 하였습니다. 이에 그레고리오 교황은 왕을 사면하였고, 교회 공동체 안으로 다시 받아들입니다. 많은 잘못된 해석의 주제가 된 카노사의 유명한 에피소드는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한 통치자에게 굴욕적인 요구가 아니었습니다. 이는 황제가 자신을 실제 공적인 속죄로써 세상 앞에서 ‘정당한 왕’(rex justus)으로 드러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어떤 경우에든 엔리코는 속죄의 행위를 통해 정치적으로 교황에게 패배한 것처럼 보이지만, 교황을 사제의 자격 안으로 의무 지었고, 보속을 받아들이고 파문을 제거하도록 그를 의무지었던 것입니다. 교황은 오직 사제권의 우위성을 드러내는 것에 관심이 있었고, 왕과 동의에 이르는 것을 희망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파문의 해결은 왕의 발 아래 새로운 토양을 한층 견고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교황이 새롭게 엔리코를 파문하였을 때 그의 반격에서 잘 드러나게 됩니다. [2018년 1월 28일 연중 제4주일(해외 원조 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39)

 

 

황제와 교황 간의 성직 임명, 주교 서임을 둘러싼 갈등을 끝나지 않고 계속됩니다. 브레사노네의 시노드(sinodo di Bressanone, 1080)에서 황제는 그레고리오 교황을 새롭게 파면합니다. 그리고는 비베르토 다라벤나(Viberto da Ravenna) 대주교를 제국의 교황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는 이어서 1084년 3월 31일 클레멘스 3세(Clemente III)라고 명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로마에서 엔리코 4세를 황제로 대관합니다. 이에 앞서 그레고리오는 로마로부터 피신했고, 노르만인들의 보호 아래 있었습니다. 그리고 1085년 5월 25일 그는 살레르노(Salerno)에서 세상을 마감합니다.

 

황제는 모든 전선에서 마치 승리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거룩한 왕권과 왕의 편에서의 주교들의 임명은 그들의 권리들 안에 다시 통합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개혁 진영은 이런 진행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서서히 그들은 행동할 능력을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황제로부터 임명받은 교황은 이 개혁 진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1086년 5월 24일 개혁 추기경들은 오랜 협상 후에 몬테카시노의 수도원장 데시데리오(abate Desiderio di Montecassino)를 교황으로 뽑아 계승하는 데 합의하게 됩니다. 하지만 반대하는 이들이 있어 그것을 극복하는데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마침내 1087년 3월 21일이 데시데리오가 비토레 3세(Vittore III)라는 이름으로 착좌합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는 같은 해 9월 16일 사망하고 맙니다.

 

이후 아주 힘겨운 협상 끝에 1088년 3월 12일 추기경들은 새로운 교황으로 오스티아의 오토네(Ottoned’Ostia)를 선출하게 됩니다. 그가 우르바노 2세 교황(Urbano II, 1088-1099) 입니다. 그에 이르러 그레고리오 개혁은 서방 그리스도교에서 일반적으로 인정을 되찾은 그 인도자를 만나게 됩니다. 제국은 교황에 대해서 더 이상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교 임명을 둘러싼 이 상황, 정치적 사실로 변질된 이 싸움은 그의 아들에 이르러 또 한 번 수면위로 드러납니다. 아들 엔리코 5세(Enrico V) 황제는 교황의 사임을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다음 교황인 파스쿠알레 2세(Pasquale II, 1099-1118) 교황의 통치 아래서도 이 둘은 동의에 이르지 못하지만, 마침내 그와 엔리코 5세 간의 수트리 협약(Tratto di Sutri, 1111. 2. 9) 안에서 반대로 그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게 됩니다. 이 협약에서 황제는 왕실에서 영적인 영역의 주교를 임명하는 것을 단념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왕실에 동조하는 주교들과 귀족정치의 강력한 저항으로 이 근본적인 해결책은 실패합니다. 왜냐하면 황제는 이 협약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곧 바로 엔리코 5세는 성직 임명의 고대 권한들을 교황에게 강요하였고, 교황에 의해서 1111년 4월 13일 로마에서 자신을 황제로 대관하도록 합니다.

 

이런 물리적 행위는 개혁가들 사이에 곧바로 부정적 행동을 촉발시킵니다. 새로운 협상은 칼리스토 2세(Callisto II, 1119-1124) 교황에 와서야 협상에 이릅니다. 그는 이미 비엔나의 대주교였고, 개혁가들의 편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미 실천에서 적용성의 원칙과 원리의 견고성을 하나로 할 줄을 알았습니다. 그는 유능한 정치가요 외교가인 그에 이르러 협약이 체결됩니다. 이것이 바로 일명 보름스 협약입니다. 1122년 9월 23일 칼리스토 조약(pactum calixtinum)이 조인되고, 이어 밤베르카의 조약(dieta di Bamberga)에 의해서 확인되었습니다. 이는 제1차 라테란 공의회(I concilio Lateranense)에서 확증됩니다. [2018년 2월 4일 연중 제5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40)

 

 

지난 호에 살펴 본 것처럼 주교 서임을 둘러싼 긴 논쟁은 이제 마무리 단계에 들어섭니다. 독일 왕은 주교들의 자유로운 선출을 교황에게 허락하였고, 반지와 목장의 수여를 통한 영적인 통치에 있어서 황제에 의한 임명을 단념하게 됩니다. 이렇게 획득된 자유는 교회 국가 독립의 허용을 의미했고, 이것은 교회에 대한 교황 지배의 보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실제에서 결론은 소박했습니다. 실제로 보름스 협약에 따르면 영적인 직무는 황제의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웠지만 교회의 유산에 있어서는 그 적용을 미루었으며, 여전히 황실에 연결된 채 남아 있었습니다. 교회의 자유는 그 너머로 향해 갔지만 제국의 정치와 사회 구조 안에서 현실적으로 기능을 하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영국(1107)과 프랑스(1098)처럼 이웃한 다른 나라들의 상황은 더욱 복잡한 곳도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에 따라 이 나라들에서도 점진적으로 왕들은 주교의 지명과 임명을 양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레고리오 개혁의 원리들은 살아 있게 되었습니다. 어떤 교회적 임무도 평신도에 의해서 임명되거나 양도되지 않았으며, 그렇게 이런 직무들의 영적인 특성은 두드러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자유로운 선출’에 대한 인정과 주교 임명에 대한 허락으로 성사적-교회적 행위는 교회 자유의 오롯한 측면으로 확증·보호되었습니다. 이제 교회의 유산은 다양한 공적 책임들과 연결되었고, 교회의 존재와 역할은 왕실로부터 보호를 확인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유산은 시대 통치자로 보호되었는데 이는 성직 임명에 있어서 자유를 획득한 교회와 전제군주를 묶어 주는 다리가 되었습니다. 통치적 행위에서 왕은 주교와 수도원장들에게 영적 직무와 연결된 세속적 통치권을 허락하였습니다. 자유롭게 선출 임명된 주교와 수도원장이 세속적 통치권을 허락 받기 위해 왕에 대한 충실과 맹세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교회는 자유를 획득함과 동시에 왕실과 긴밀하게 결합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이런 교회의 자유에 따른 종교 사회적 정치적 결과들에 대해서 짧게 살펴보겠습니다. 우르바노 2세 개혁 교황에 의해서 ‘황제로 부터의 자유’는 서방 교회에서 자리를 찾게 되었고, 이런 생각들은 시대적 분위기에 따른 – 마치 희망처럼 - 교황의 인도아래 교회의 자유를 향한 어떤 과정으로 이해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항상 의도한 것처럼 동의하는 이들만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개혁가들의 ‘교회의 인도-이상’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데, 이런 생각들은 실제로 다른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연결되어 갔습니다.

 

이런 교회에 대한 개혁가들의 생각이 여러 다양한 관심들과 여러 종류의 동기들, 그리고 무수한 목적들과 하나의 뗄 수 없는 덩어리를 형성해 갔다는 것입니다. 개혁은 첫 순간부터 강력한 반발에 봉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국으로부터 교회의 자유’와 ‘거룩한 제국’의 견고한 시스템은 그것을 부수고자 하는 반동을 보게 됩니다. 이제 정치적 영역에서의 그 반동과 압박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2018년 2월 11일 연중 제6주일(세계 병자의 날)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41)

 

 

교회의 자유에 대한 정치, 종교 그리고 사회적 결과들

 

그레고리오 개혁은 어떤 ‘약간의 행운’ 아래 이뤄집니다. 어린 엔리코 4세 황제의 통치시대에 이르러 제국의 위치가 낮아졌고, 황실은 그 분위기를 쉽게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이 틈을 이용하여 각개의 권력들이 자신들의 자율권을 공고히 하고자 하는 원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던 것입니다. 특히 이탈리아 지역에서 지역 군주들이 독립성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개혁 교황들은 이런 지역의 군주들로부터 효과 있는 정치적 지원을 얻을 수 있었기에 로마시의 권력과 엔리코 4세 황제에도 대항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던 것입니다. 북이탈리아의 노르만 인들도 같은 상황을 맞이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유럽의 권력들이 황제와의 동맹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레고리오 개혁에 의해서 주창되었던 ‘교회의 자유’는 맨 먼저 로마제국을 치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게르만 왕은 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이제 서방 그리스도교 안에서 애매한 위치가 되었습니다, 왕국들에 대한 제국의 통치권이 느슨해지고 약해진 것입니다. 교회의 자유는 이런 상황을 악화시킵니다. 제국의 편에서 성직 임명이 없어지자, 제국 교회도 통치자의 지지 기반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주교들과 황제와의 동맹은 균열이 가고, 새로운 관계들이 형성되게 됩니다. 그 자리는 지역 귀족들과 주교들 간의 관계로 채워집니다. 나아가 제국 영토 내에서 이 성직 임명을 둘러싼 다툼 기간 동안 많은 ‘시민전쟁’으로 제국은 혼란스러웠고, 이 혼란은 이런 발전의 경향을 부추겼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와 영국에서의 주교 서임 문제의 결과들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국가들에서는 교회 직무의 영성적 특성이 강조됨에도 불구하고 게르만 왕국과는 다르게 ‘왕의 교회’의 공고화가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이제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은 교회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어떤 관리자로 비쳐 졌고, 반면에 이들 지역의 새로운 권력자들은 억압자들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반면에 독일 왕국에서는 10세기 경, 주교 교회와 수도원의 교회는 좀 더 결정적으로 지역 군주들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됩니다. 그레고리오 개혁이 교황과 지역 귀족과의 동맹을 통하여 제국 교회의 약화를 불러왔기 때문입니다. 이렇듯이 주교 서임을 위한 투쟁은 지역 권력들의 강화를 불러 왔습니다.

 

보름스의 협약 이후 교회와 왕국의 관계, 또한 주교들과 왕들의 관계들은 더욱 구체화 됩니다. 로마 교회의 우두머리인 교황에게 주교들은 교회의 직무자로서, 왕에게는 오직 왕국의 관리자로서 다뤄집니다. 왕들은 주교들에게 왕국의 봉신을 허락하였고, 이로써 교회는 봉건제도의 과정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게 됩니다. 이런 과정 안에서 왕의 통치권의 범위는 점차적으로 왕국의 영역으로 제한되었으며, 주교는 지역 안에서 영적인 군주가 되어 갔습니다.

 

이태리 왕국에서는 지역 도시의 봉신들이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였고, 이제 제국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성장의 길을 갑니다. 이런 군주들은 도시들과 왕국의 정부로부터 파견된 주교의 통치권에도 대항하기 시작합니다. 시민의 독립성이란 정치적 영감은 밀라노와 롬바르디아를 넘어 계속 확장되어 갔습니다. 이 새로운 권력들은 귀족들에 의해서 통치되고, 세속화된 교회에 대항하는 분위기를 확산시켰습니다. [2018년 2월 18일 사순 제1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42)

 

 

’교회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개혁이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세속 정치와의 관계 안에서 주로 교황청을 중심으로 이어지던 개혁의 경향이 좀 더 교회 내로 확대 되기에 이릅니다.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이 파타리(patari)라 불리는 이태리 북부 그룹이었습니다. 이것은 ‘종교적 자각’을 주장하는 운동으로 11세기 중반부터 급격히 퍼져나갔습니다. 이런 운동 출현의 동기는 사회 경제적 다양성 안에서 찾아집니다. 이런 움직임들은 그리스도교 전통을 넘어 서방 사회내의 하나의 큰 조류가 되었습니다. 이런 종교적 깨어남의 상황은 사회의 낮은 계층으로 저변을 확대해 나갔고, 권력자와 가난한 자, 교회와 귀족의 조화라는 가치를 칭송하기보다 이 귀족 교회 문화 자체를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모든 것이 화려함과 허영으로 변질되어 간다고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불안과 종교적 자각은 성서주의와 동방 마니주의의 영향을 받아 금욕적 엄격주의와 투박한 성서주의를 키워갔습니다. 이것은 또한 교부들과 수도원 문학 전통의 영향을 받은, 금욕적 수도자의 삶에 남아 있던 이원론적 개념이 자극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들에게 권력과 소유, 예술과 문화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성경에서도 이런 주제들은 부정적으로 읽혀졌습니다. 성경의 금욕적 재해석은 그러므로 귀족 교회와 문화에 대한 비판을 이끌어가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 지점에서 사회 종교적 운동과 그레고리안 개혁이 교차하고, 그 안에서 금욕주의는 어쨌든 최적의 조건을 발견하게 됩니다. 종교-사회적 대중 운동의 추종자들은 교회의 상급자들의 악행들을 고발하였고, 고위 성직자들의 교회를 모욕하였습니다. 그들을 ‘짐승들의 구유’(iumentorum praesepia)라고 모욕하였습니다. 또한 ‘성직 매매자들과 혼인 사제들의 성사에 참여하지 말라’고 선동하였습니다.

 

“평신도들로부터 사제들의 금욕에 대한 흉칙한 헌장이 유포되었다. 그들의 혼인과 교회적 직무 소유가 원인이 되어, 사제들은 비참한 방식으로 그들의 교회에서 쫓겨났다.”고 교회가 언급할 정도로, 그렇게 신도나티즘은 퍼져나갔습니다. 그들은 직무의 성스러움에 성사의 효과를 연결지었습니다.

 

11세기의 초 중반은 이 엄격한 금욕주의자들의 시대였습니다. 그들은 극도의 반성직주의와 반권위주의로 대중을 선동하였고, 이런 성직매매자와 혼인한 성직자들을 이단이라 칭하였습니다. 이들은 실제 교황청과 그레고리오 개혁주의자들로부터 일정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다른 의미에서 이 운동을 보자면, 이것은 ‘제국 귀족 교회’를 대항한 ‘이단적 저항’으로써 그레고리오 개혁과 동맹관계를 형성해 나갔던 것입니다.

 

보름스에서의 타협으로 ‘왕의 교회’를 교회 안에서 몰아낼 수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 강화된 주교의 세속적 권한은 교회 국가 안에서 교황의 독립적 통치권을 특별하게 보증하는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현상들 안에서 교회 개혁과 금욕적 엄격주의 사이의 느슨한 연결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12세기 중반부터 금욕적-종교적 운동 그룹들은 ‘순수 교회’ 라는 이상으로 급격하게 자세를 바꿔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옛날의 카타리파(catari, 순수주의자들의 교회 운동)와 하나가 되어갔고, 반성직주의를 거쳐 반 교회운동이 되어갑니다.

 

이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 아르날도(Arnaldo da Brescia, +1155년에 처형) 입니다. 그는 교회의 자유를 교회 국가의 자유로 대치시켰고, 교회의 자유를 위해서는 폭력을 사용하는 것조차 용인하게 됩니다. 깨끗한 이들의 흘려진 피 위에 하느님의 교회를 건설하고자 했습니다. 12세기 중반까지 이 파타리(patari)들은 교회의 자유라는 그레고리오 개혁의 옆에 둥지를 틀고 있었습니다. [2018년 3월 4일 사순 제3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43)

 

 

‘교회의 자유’라는 화두는 이제 수도자의 삶에도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수도생활과 그레고리오 개혁 사이에는 어떤 확고한 연결점이 존재하였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삶과 그 표현 방식에서 새로운 형식을 찾았던 클뤼니(Cluny)와 수도원 개혁자들을 인용해야 할 것입니다. 이론의 여지가 없이 11세기 동안 클뤼니 수도원의 영적인 영향력은 대단했으며, 그 외에도 수도원의 태도들, 즉 주교 임명다툼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그레고리오 개혁에 호의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클뤼니가 주도적으로 교회의 자유와 개혁에 영감을 주지도, 또한 그 유포자도 아니라는 사실은 특이한 점입니다. 이유는 실제 이 수도원 자체는 교회, 사회 문화적 차원에서 구제도의 영향 아래 성장하였고, 오토(Ottone)와 살리(Sali) 등의 권력자들과 우호적 관계를 맺는 가운데 성장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수도원은 비교적 자유로운 위치에 있었기에, 왕국 대수도원의 법적인 영향과 보호가 적은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클뤼니는 수도원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주교와 귀족들을 거슬러 대항하였고, 그들 수도 생활의 자유를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점이 수도생활의 역사에서 클뤼니의 공헌과 10-11세기의 특별함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 시작에 있어서는 수도원의 설립자인 공작 굴리엘모(il duca Guglielmo d’Aquitania)가 수도원에 대한 권한을 포기한 것이 클뤼니 수도원(910)의 기원입니다. 이렇게 수도회는 오랜 시간 대 수도원장의 품위로 다스려지고, 많은 지회들을 통해 거대한 클뤼니 수도원을 창설하기에 이릅니다.

 

클뤼니 수도원이 창설 때부터 폭넓은 자유를 누렸고, 교황의 직접적 보호를 확증받았다는 것입니다. 전임자와 자체적으로 임명된 수도원장의 선출은 수도원의 독립과 자유에 대한 법적인 특성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자유가 왕국 수도원들과의 대조 속에서 어떤 일련의 계획을 의미하지도, 개혁 운동에 있어서 교회의 자유로 직접적으로 비쳐지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은 클뤼니 수도원 모델의 지속을 통하여 왕과 제국으로부터 적대적 관계에 놓이게 되면서, 이 수도원의 새로움은 11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교황의 보호와 자유가 ‘교회의 자유’라는 이상과 연결되게 됩니다. 이런 연결점을 토대로 교황청의 보호와 교회의 자유가 더욱 요청되고 수많은 수도원들이 설립되었으며, 더 이상 왕의 지배 아래 있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수도원장과 지도자의 자유로운 선출은 구체적인 요구사항들이 되었고, 이런 요구가 수도원 설립자들인 지역의 영주들로부터 활발하게 지지되었습니다. 이 지역 영주들인 설립자들은 이제 수도원의 창설에 있어서 수도원장의 자유로운 선출과 다스림, 그리고 그에 따른 권한을 왕이 아니라 교황에게 넘기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열성적 설립이, 다른 길을 통해 자신들에게 유용함을 깨닫습니다.

 

그 어느 곳보다 북 독일 지역에서 ‘교회의 자유’라는 이상에 부합하는 개혁 베네딕도회 수도원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이것들은 ‘교회의 자유’라는 그레고리안 개혁에 수도원의 자유를 합치시켰습니다. 이런 수도원들은 강력한 지역 귀족들로부터 지지 되었고, 이 수도원들을 그레고리오 개혁에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습니다. [2018년 3월 18일 사순 제5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44)

 

 

지난 호에서는 그레고리안 개혁과 함께 퍼져나가던 클뤼니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수도원 개혁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들은 근본적인 자유를 원했고, 그것은 단순히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닌, 하느님을 위한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를 갈망했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목적은 세속의 여러 직무들을 피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소유를 거부하였고, 인적이 드문 곳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금욕적 운동은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그레고리오 개혁으로부터 지지와 보호를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그들의 도덕적인 힘을 강화하였습니다. 이런 금욕적 수도자 생활은 일반 평신도 단체들에게도 영향을 주었고, 마침내는 수도원들 안에 수도자가 아닌 평신도들도 받아들이는 형태로 나아갔습니다.

 

그레고리오 7세와 그의 추종자들이 생각했던 ‘교회의 자유’는 다양한 점을 통해서 하나의 유토피아적 전망을 심어 주었습니다. 이런 생각들은 ‘주교 임명’에 대한 다툼이 해결됨을 통해서 다양한 사회 정치적 관심들 안에 뒤섞여 나타났습니다. 또 현실에서 교회 자유의 한계들도 나타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적으로 교황권은 ‘주교 임명’의 다툼을 통해 강화되었습니다. ‘교회 내적 지휘’라는 위치와 권리는 명백하게 남아 있었고, ‘왕권’(imperium)과의 비교에서 ‘사제권’(sacerdotium)의 우위를 원론적인 의미에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12세기 초의 교황권은 그들이 고려해야 할 시대의 모든 정치적 권력들 앞에 강력한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것이 어떻게 제도적으로 공고화되고 인정되게 되는 지를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무엇보다도 교황권, 그 제도의 견고성이 두드러졌습니다. 이것은 교황의 지속적인 승계를 통해서 분명해집니다. 이런 교황 계승에 있어서 계속성은 13세기 중반에 이르러 두 개의 ‘분열’(scismi)에 의해서 충격을 받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도는 손쓸 수 없는 위기 속으로 들어갑니다. 교황좌가 오랜 기간 공석으로 남게 되었을 때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지만 교황제의 견고성은 교황청의 빠른 조직화와 눈에 띠게 관료적인 완전성처럼 비쳐 졌습니다. 그 곁에서 시대의 세속 왕국 들은 결코 교황권에 비견될 수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런 발전에서 특히 교황청 꾸리아(curia romana)가 특별히 관료제의 역사 안으로 들어섰다는 점이 특별하였습니다. 이것은 ‘로마 꾸리아’ 행정의 지도 계층들이 사회적 역사와 하나 됨을 의미합니다. 이런 현상은 어떤 특별 계층의 그룹이 제도와 자리에 관심을 보이게 되고, 또한 반대 입장에 서는 ‘대립하는 입장이 생길 수 있음’을 쉽게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긴 다툼과 불화의 씨앗이 될 것이기도 합니다.

 

꾸리아 권위의 정점과 꾸리아 결정 위원회는 추기경단으로 확증되게 됩니다. ‘추기경단’(collegio cardinalizio)은 ‘교황의 지체’(pars corporis Papae)로 정의되었고, 중요한 결정 과정들과 꾸리아의 토의에 단체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몇몇 교황들은 이런 주도적 그룹 안에서 실질적 지도자였습니다. 이런 교황은 추기경들의 과두 통치를 고려하는 교황 군주제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들에서 교황 통치의 무제한의 개념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자주 종교-교회적 그리고 교회-정치적인 것의 고려는 피할 수 없었습니다. 추기경단 안에 어떤 경향과 특별한 조류가 형성 되었기에, 그리고 이것은 가문과 지역 그리고 정치가들과 서로 연결되어 있어, 결정은 종교-영성적 개념과 교회-정치적인 고려 안의 선택이라는 것을 역사적으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교회의 자유는 11, 12세기 전환기를 점령하였고, 서로 다른 관심에서 출발한 다양한 압력 들이 이제 추기경단 안에서 교황의 선출의 기회 안에서 표출되게 됩니다. [2018년 3월 25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 (45)

 

 

교회의 자유라는 이념은 이제 추기경단을 기초로하는 교황의 무제한적 길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여정에서 교황의 선출을 둘러싼 갈등이 촉발됩니다. 그것은 칼리스토 2세(Callisto II, 1194-1124) 통치를 통해 더욱 깊어진 개혁의 계승을 둘러싼 불화가 이중적 교황선출을 가져옵니다. ‘구 그레고리오 개혁파’들은 금욕적 수도원주의의 경향을 이어가길 원했고, ‘신 그레고리오 개혁파’들은 통치와 주교들의 안정감을 지지하며 불목하였습니다. 이때, 아직 소수에 불과하던 신개혁 그룹에서 인노첸조 2세(Innocenzo II, 1130-1143)를 교황으로 선출합니다. 반면에 좀 더 보수적인 나머지 그룹은 아나클레토 2세(Anacleto II, 1130-1138)를 선출합니다. 오랜 기간 인노첸조 2세가 좀 더 우세하였습니다. 그것은 그가 개혁 수도회들과 프랑스 유명 학교들의 교수들과 서방 군주 대부분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1138년 1월 25일 아나클레토의 죽음으로 이런 분열은 종식됩니다.

 

이 1130-1138년까지의 분열은 개혁에 대한 내부적 대립을 불러 일으켰고, 1159년에서 1181년의 정치에 흔적을 남깁니다. 페데리코 바르바로사(Federico Barbarossa, 1152-1190)가 이태리 왕국과 사제권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관철하기 위한 노력을 정력적으로 지속합니다. 아드리아노 4세(Adriano IV, 1154-1159) 교황의 죽음 이후 비토레 4세(Vittore IV, 1159-1164) 교황이 선출 되었는데, 대부분의 반 페데리코적 그룹이 알렉산드로 3세(Alessandro III)를 또 다른 교황으로 선출합니다. 베네치아의 평화 협정(Pace di Venezia, 1177)을 통해 황제가 알렉산드로 3세를 교황으로 인정하자, 비토레를 이어 교황이 된 칼리스토 3세 교황(Callisto III, 1168-1178)이 통치를 포기합니다. 대중들의 견해 또한 서유럽의 수도원들과 신학교 교수들의 지지와 선전을 통해 알렉산드로 교황을 마치 가난한 교황으로 제국의 권력으로부터 박해 받는 자로 여겼습니다.

 

종합해보면 그레고리오 개혁의 신·구파 사이에서 뽑힌 교황들은 이상주의자들었고, 12세기 중반 이후에 뽑힌 이들은 현실적 정치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아직 금욕주의와 수도원적 신학의 영향을 받았고, 그것의 영적인 내용들은 베르나르도(Bernardo di Chiaravalle)로부터 에우제니오 3세(Eugenio III, 1145-1153) 교황에게 효과적으로 제안된 것이었습니다. 영원한 구원에 대한 묵상에서 정치적 행위는 그의 힘과 그 내용을 이끌어 내야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법의 교육을 받은 교황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언급된 통치의 충만함으로 움직여야 했고, 여기서 그들의 법률적 원칙들이 기원한다고 생각합니다.

 

‘법률가 교황들’ 중에 가장 큰 인물이 인노첸조 3세(Innocenzo III, 1198-1216)였습니다. 37세에 대학자요 신학자이며 교회법 학자인 로타리오 세그니(Lotario Segni)는 추기경단의 가장 준비된 인물로 교황으로 선출됩니다. 그는 교황좌의 크고 작은 대립들에서 유연한 중립을 지켜 냈습니다. 개혁된 꾸리아 안에서 인노첸조 교황은 여러 도구들을 통해 일할 줄 알았으며, ‘교회 국가’에서 교황의 통치를 강화하였습니다. ‘지고한 사제권’은 서방 그리스도교의 영적인 일치와 단일성을 대표하게 됩니다. 인노첸조 교항은 유럽 여러 국가들 사이의 힘의 균형과 이해 득실 들을 조정하고자 합니다. 이런 그의 노력과 태도를 통해 그는 ‘세상의 중재자’(Arbiter mundi)로 인정받게 됩니다. 그의 교황 통치 시기에는 교황에 대적할 수준의 어떤 통치자도 없었고, 그는 이런 ‘이상주의를 세상이 들을 수 있도록 조직해 낸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통치 이후 후임 교황들은 그의 이런 이상을 지켜내지 못하여 세속권력과 경쟁 관계 안에서만 자신을 바라보고, 정치화하게 됩니다. 긴 과정을 통해 교회는 더 이상 ‘영혼들의 돌봄’이 아니라 세속의 통치자로 자리매김 되어 나가고, 우리가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들어 알고 있는 ‘교회 타락’의 나락을 향해 달려가게 됩니다. 이런 질주는 교회 내에 많은 개혁의 소리를 만들어 냈고, 급기야는 루터의 종교개혁과 트렌토 공의회를 통해 그 길을 멈추어 서게 됩니다.

 

이 긴 과정은 또 다른 기회에 여러분과 함께 공부해볼까 합니다.

 

그 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신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저의 불성실을 고백하고, 넓은 자비를 청합니다.

 

※ 지금까지 교회사 에세이, 중세 그 찬란함과 쇠락의 여정을 집필해주신 김종강 신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18년 4월 8일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청주주보 4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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