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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냉전시대 캐롤 몬시뇰의 구호 활동과 그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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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05 ㅣ No.815

냉전시대 캐롤 몬시뇰의 구호 활동과 그 의의

 

 

1. 머리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 1940년대 중반부터 세계는 이른바 냉전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 이후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하기 전까지 미국과 소련을 주축으로 양측 동맹국은 극도의 긴장 상태를 이어가며 대립하였다. 냉전시대에 양측 진영은 비교적 평화를 유지하였지만, 긴장이 고조되어 국제적인 위기를 불러일으킨 충돌도 여러 차례 발생하였다. 그 대표적인 경우로 베를린 봉쇄(1948~1949), 한국전쟁(1950~1953), 쿠바 미사일 위기, 베트남 전쟁(1979~1989),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을 들 수 있다.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해방은 맞았지만, 38도선을 기준으로 미국과 소련이 각기 남과 북에 주둔하면서 냉전의 각축장이 되었다.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깊어지는 가운데 남한과 북한의 갈등도 심화되었다. 그러한 갈등의 연장선 속에 결국 1950년 6월 25일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이 전쟁으로 인해 한국은 또다시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전쟁 자체로 인한 피해뿐만 아니라 아직까지도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겪고 있는 민족의 고통은 치유되지 못하고 있다.

 

냉전과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던 시대에 캐롤 몬시뇰은 헐벗고 굶주린 한국인을 향한 구호 활동으로 큰 족적을 남겼다.1) 캐롤 몬시뇰에게는 흔히 ‘베테랑 선교사’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이는 사제로 서품된 직후 한국 선교사를 자원, 1931년 8월 한국에 입국하여 거의 한평생을 한국에서 선교사로서의 삶을 살았던 그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해 준다. 어려웠던 시기에 질병과 굶주림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선 캐롤 몬시뇰은 교회사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사에서도 매우 독보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사회에는 물론 교회에도 정작 그의 활동과 의미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못하다. 그렇게 된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가장 큰 이유는 관련 자료가 정리, 소개되지 않았다는 데 있을 것이다. 캐롤 몬시뇰에 관한 자료는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한국 관련 문서에뿐만 아니라 골롬반회의 문서,2) 그리고 기타 일반 신문, 잡지 등 다양한 한국 근현대사 자료에 산재되어 있다.

 

이에 이 글을 통해 메리놀회 문서 가운데 캐롤 몬시뇰에 관한 자료를 적극 활용하여 그의 활동과 의의에 대해 조망하고자 한다.3) 이를 위해 특히 냉전의 절정을 달했던 해방 전후, 한국전쟁 시기에 집중하여 그의 구호 활동과 그 의미에 관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

 

 

2. 캐롤 몬시뇰의 선교 방향

 

1931년 8월에 입국한 캐롤 몬시뇰은 1932년부터 1937년까지 평안도 마산 본당의 4대 주임으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인 한국 선교사로서의 삶을 시작하였다.4) 캐롤 몬시뇰(이하 몬시뇰)이 선교 활동을 전개하면서 가졌던 선교의 방향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 잘 드러난다. 이는 《The Field Afar》에 소개된 캐롤 몬시뇰에 관한 보도문의 일부이다.

 

아주 작은 친절이나 자비로운 행동도 여기에서는 참으로 큰 효과가 있다. … 어느 날, 심한 화상으로 고통 받는 3살 정도의 어린 꼬마가 우리 시약소에 실려 왔다. 어린아이가 사고를 당한 지는 4일이 지났고,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은 채 시간만 끌어, 자연히 상처의 심각성은 더해졌다. 나는 거의 3시간 동안 치료를 해 주었는데, 상처를 소독하고 죽은 피부를 잘라내었다. 이러한 치료는 대략 세 주 동안에 걸쳐 매일매일 반복되었다. 마침내 그 어린아이는 친구들과 함께 다시 뛰고 놀 수 있게 되었다. 모두가 다 이교도인 그의 마을 사람들은 온 마을에 치료와 더불어 교회까지 광고를 하였다. 이제 그들은 세례를 준비하고 있다. 우리는 사람들의 육체를 통하여 그들의 영혼을 만질 수 있다. 작은 친절한 행동이 ‘모든 선한 것을 주시는 분’한테 지금까지 닫혔던 마음을 여는 강력한 쐐기가 된다(1936년 1월 20일, 《교회와 역사》 404(2009. 1), 41~42쪽).

 

몬시뇰의 선교 활동을 관통하는 방향은 영혼 구원을 위해서는 그 몸을 적극적으로 돌보아 주는 실천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몸을 위해 베푸는 작은 친절이 그 영혼의 마음을 여는 강력한 수단이라는 생각이었다. 즉 그의 선교 방향은 궁극적 목표인 영혼 구원을 위한 몸에 대한 관심이었고, 그러한 관심은 이후 몸을 돌보는 적극적인 실천으로 나타났다. 캐롤 몬시뇰은 스스로는 물론 신자들에게도 이러한 실천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사소한 친절한 행동 때문에 사람들이 얼마나 감사해하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우리 각자 그리고 모두는 동양이나 유럽의 형제들과 자매들이 필요한 것을 생각하여 주님께서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40)라고 하신 말씀을 깨달아 이 불행한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옷이나 심지어 기부 등의 방법으로, 아주 작은 희생이라도 하기로 결심하자(1948년 9월 18일, 《교회와 역사》 407(2009. 4), 34~35쪽).

 

몬시뇰의 이와 같은 선교 방향은 필요한 것을 내어 주는 ‘친절한 행동’을 강조하였고, 여기에 감동받은 수많은 미국의 가톨릭 단체와 신자들이 구호물품을 기증하였다. 이러한 후원은 몬시뇰이 한국에서 구호 활동을 펼 수 있는 바탕이 되어 주었다. 메리놀회 본부의 편집장으로 있던 네빈스 신부는 몬시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메리놀회의 한국 선교지에서 거의 15년간 활동한 베테랑 캐롤 신부는 사람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깊이 이해하고 있다. … 최근 몇 해 캐롤 신부는 남한에서 구호 활동을 매우 활발하게 해오고 있다. 전쟁 구호 활동을 위한 구호물품의 공급뿐만 아니라 LARA5)의 대표로 헌신하고 있다(1950년 8월 31일, 《교회와 역사》 410(2009. 7), 30쪽).

 

몬시뇰의 활동은 구호 활동으로 대표될 정도였다. 그가 그렇게 구호 활동에 헌신한 까닭은 그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그 몸을 돌보아 주는 것에서 머무는 차원은 아니었다. 궁극적 목표인 영혼 구원을 위해 일차적으로 그 몸을 돌본다는 것이었다. 영혼 구원을 위해 몸을 인정하고 중시한다는 것은 현실의 실천을 중시한다는 의미이며, 이것이 곧장 선교사로서의 활동방향을 잡는 커다란 축이었다. 사실 교회의 사회 복지 사업은 일반적으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6)는 계명의 구체적인 실행인 것이며 그리스도의 왕직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실행은 그야말로 몸으로 뛰는 실천의 행동이다. 캐롤 몬시뇰의 선교 방향은 이와 같이 몸을 돌보는 실천을 통해 보다 많은 영혼을 구원에 이르도록 이끈다는 것이었다고 해석된다.

 

몬시뇰의 선교에 드러나는 또 다른 사목적 관심사는 한국의 순교자에 대한 공경이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당일 캐롤 몬시뇰은 미 당국의 명령으로 일본으로 피난을 갔었다. 하지만 캐롤 몬시뇰은 전쟁의 한복판에 있던 한국으로의 신속한 복귀를 요청하였다. 한국에서 선교 활동과 더불어 피난민에 대한 구호 활동이 이루어지고는 있지만, 자원이 바닥났을 뿐만 아니라 식량 · 쉴 곳 · 의복 · 의약품 등을 제공하는 구호소가 필요하므로 이를 위해 자신이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만주 국경선에 대규모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다는 불안한 소식이 있다는 내용도 전하며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한국은 전쟁과 종교적 박해의 길고도 무시무시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수천 명의 순교자가 그리스도교의 씨앗을 심기 위해 그 땅에 피를 뿌렸습니다. 만약 공산군이 장악한다면, 더욱 심한 피의 역사가 이 나라의 역사에 써지게 될 것입니다(1950년 8월 21일, 《교회와 역사》 409(2009. 6), 35쪽).

 

길고 무서운 박해기 동안 순교의 피가 뿌려진 한국이기에 더욱 이 땅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1961년 2월 12일에 《THE KOREA TIMES》에서는 캐롤 몬시뇰에 대한 전면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그 기사 마무리에 소개된 캐롤 몬시뇰의 말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인의 씨앗입니다”라는 강한 신념을 갖고 있는 몬시뇰 캐롤은 자신이 선종해야 할 땅이 한국이라고 알고 있다.“한국, 그러나 남한입니다. 저 역시 북으로부터 온 피난민입니다”라고 말하였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확신할 수는 없지만 평양으로 돌아갈 수 있는 합법적인 날이 오기를 갈망하고 있다. 그는, “머지않아 통일이 되리라고 희망합니다”라고 말했다(메리놀 문서 Fol. 9,2,381, 《THE KOREA TIMES》, 캐롤 몬시뇰은 한국은 순교자의 피가 뿌려진 곳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자신이 선종할 땅도 한국으로 지목하였다. 순교자는 그 聖性과 품위가 뛰어난 것으로 교회 안에서 처음부터 인식되어 왔고 그들을 본받고자 하는 열의와 공경하는 마음은 그리스도인에게서 보편적으로 표현되어 왔다. 따라서 순교자에 대한 여러 공경 행위들이 자연스럽게 생겨났고 발전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이야말로 그리스도에 대한 공적인 증언을 하고, 그것을 증거하기 위해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인 수많은 순교자를 낳은 땅이었다. 이와 같은 순교자 공경은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전개한 캐롤 몬시뇰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큰 축일 것이다.

 

 

3. 캐롤 몬시뇰의 구호 활동

 

1) 북한 피난민에 대한 구호 활동

 

한국전쟁이 발발한 당일인 1950년 6월 25일에서 27일까지의 상황에 대해 캐롤 몬시뇰은 메리놀회 총장에게 편지와 일기의 형식으로 보고하였다. 일요일인 25일에 북한군은 전면전으로 밀고 내려왔고,7) 갑작스럽게 들어닥친 북한군을 피해 몬시뇰은 미 당국자의 명령으로 급하게 서울에서 철수하여 비행기로 일본 규슈로 피난하였다.

 

번 주교님8)과 부드 신부9)는 서울에 남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번 주교님은 노기남 주교가 지금 로마에 있기 때문에, 한국인 성직자들에게 자신의 존재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여 교황사절로서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번 주교는 한국에 온 이래 계속해서 공산주의를 호되게 비판했기 때문에, 빨갱이들이 그를 매우 힘들게 할 것 같아 걱정입니다(1950년 6월말 또는 7월 초, 《교회와 역사》 409(2009.6), 30~31쪽).

 

위 기록에 드러나듯이 번 주교는 공산주의를 매우 비판해 왔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유엔이 대한민국을 승인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며 반공(反共)을 견지하였다. 특히 번 주교는 한국을 합법적인 독립국가로 인정한다는 교황청 문서를 발표하였고, UN총회에서도 이를 승인받도록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10)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은 캐롤 몬시뇰도 마찬가지였다.

 

공산주의자들은 교회와 성직자를 극도로 미워하는 사람들입니다. 프로테스탄트도 우리가 당한 것과 같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모든 종교인들은 한결같이 그들을 싫어합니다. 강계에서도 공산주의자들은 감실에서 성체를 꺼내 치켜 올려 들면서 이를 조롱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와서 보라! 여기에 ‘위격’(位格)이란 없다. 그것은 단지 사제들이 사람들을 속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성체를 가져다가 짓밟고 모독했습니다(1950년 10월 30일, 《교회와 역사》 410(2009. 7), 29쪽).

 

캐롤 몬시뇰은 공산주의자들이 보인 종교와 종교인에 대한 적대적 행위에 대해 몸서리를 쳤다. 이에 “공산주의자들은 사람이 아니라 악마입니다. 그들은 극악무도한 일을 자행하였습니다”11)라고까지 하였다. 이미 몬시뇰은 한국전쟁 이전부터 공산주의에 대한 우려를 표명해 왔다.

 

몬시뇰 캐롤은 오래전부터 남한에 공산당이 침략해 올 것을 예견하였다. 그는 1947년 메리놀회 총장에게 빨갱이가 침략해 올 경우의 지침을 묻는 편지를 쓴 일이 있다고 상기하였다. … 한국의 베테랑 선교사인 그는 북한에서 공산주의자는 단지 소수라고 믿지만, “그들은 결코 쉬지 않는다”고 덧붙였다(1952년 6월 30일, 《교회와 역사》 412(2009. 9), 32~33쪽).

 

캐롤 몬시뇰은 공산주의자들의 침략 가능성을 예견하며 이에 대한 대비책에 고심하고 있었다.12) 당연히 공산주의자들에게 몬시뇰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다.

 

국제연합이 최초로 북한 공산당의 침략을 물리쳐서 압록강 밖으로 빨갱이가 퇴각하도록 몰아낸 뒤, 몬시뇰은 평양 대목구장 서리가 되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이 그를 남쪽으로 가도록 만들기 전의 단지 한달 열흘 정도만 자신의 대목구에서 보낼 수 있었다. 그가 평양을 떠난 것은 매우 행운이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자들이 고위성직자들의 사진을 지니고 평양에서 그를 찾아다녔기 때문이다(1952년 6월 30일, 《교회와 역사》 412(2009. 9), 32쪽).

 

한국전쟁기에 공산주의자들은 많은 가톨릭 성직자들을 체포 · 살해하였고, 캐롤 몬시뇰도 그 표적이었다. 그런데 몬시뇰이 공산주의자의 표적이 될 정도로 공산주의자를 노골적으로 혐오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공산주의 정권을 이끄는 사람에 대한 분노였다. 몬시뇰에게 그 치하에서 군에 징집되었다가 포로가 된 사람이나 그곳을 탈출한 피난민은 돌보아야 할 사람들이었을 뿐이다.

 

그[캐롤 몬시뇰]가 보고하기를 북한 공산당 치하의 농부들은 상황이 가장 나쁘다고 한다. 빨갱이는 농부들에게 수확물과 음식의 일정한 몫만을 허락해 준 반면 농부들은 무거운 세금을 내느라고 이것마저 지불해야 한다. 몬시뇰은 만일 공산치하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 북한 포로를 북으로 보내는 것을 거부한 미국이 이제 와서 이를 취소한다면, 미국은 한국에서 크게 체면을 잃게 되리라고 생각한다(1952년 6월 30일, 《교회와 역사》 412(2009. 9), 33쪽).

 

한국전쟁이 길어지면서 1951년 7월 개성에서 휴전 회담이 시작되었고, 포로 송환은 그 자리에서 거론된 의제 가운데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다. 국제 규정인 제네바 협약에 따라 포로는 終戰과 함께 본국에 돌려보내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의 경우는 자의에 따른 입대가 아니라 강제로 징집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살던 지역을 통치하지도 않은 정부의 군인이 된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포로에 대한 회담에 있어 북한의 군사력 약화를 목표로 삼고 있었기에 당시 이미 1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포로를 북으로 돌려보내기 어려운 입장이었다. 결국 포로 송환을 둘러싼 협의는 지지부진 여러 달을 끌고 있던 실정이었다. 몬시뇰은 공산치하로 사람을 돌려보내는 일은 그 어떤 명목이든 용납하기 어려웠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였고, 이어 북진을 거듭하였다. 이때 몬시뇰은 미8군에 소속되어 유엔군과 함께 평양으로 갔고 평양 대목구의 대목구장 서리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어 국군과 유엔군은 평양에서 후퇴하게 되었다. 이때 몬시뇰은 평양에서 맨 마지막으로 후퇴하며 신자들이 남하하는 길을 주선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에 관해 당시 가톨릭구제회 소식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마침내 침략이 일어났을 때, 그는 자신의 선교지역 그리스도교인들을 위해 수천 장의 ‘안전 통행증’을 써 주었다. 서울로 떠나기 전날 밤, 그는 밤을 새우며 1시 30분까지 통행증을 썼다. 그는 이러한 통행권을 가진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은 국제연합의 경계선을 통과하도록 허락받았으며, 안전하게 남쪽으로 갔다고 말하였다(1952년 6월 30일, 《교회와 역사》 412(2009. 9), 32~33쪽).

 

철수한 것은 12월 3일이었는데, 그 전날인 2일에 몬시뇰은 밤을 새워 영어와 한국어로 쓰인 ‘안전통행증’ 2천 매를 마련하였다. 거기에는 이것을 휴대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으로 신원이 확실하니 남하하는 데 편의를 제공해 달라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다.13) 이미 유엔군은 평양 철수에 앞서 작전상의 이유로 일반 피난민이 대동강을 건너는 것을 금지하였다. 바로 이때 몬시뇰의 보증서는 남하하는 피난민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자신의 안전을 뒤로하고 한 사람이라도 더 공산치하로부터 탈출시키기 위한 헌신적인 노력이었다.

 

캐롤 신부는 남한에서 구호 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가톨릭구제회의 산하부서인 가톨릭전쟁구제회의 한국 지부장으로서 2만 달러가량의 음식, 의복, 그리고 50만 달러 상당의 의약품 등을 원조하였다. 한국 정부와의 협력 속에 이러한 원조 물품은 북한에서 온 전쟁 피난민, 어린이 기관(고아원), 1948년 극심한 홍수의 피해자, 1949년 제주도의 폭력배로 인해 집을 잃고 떠나온 사람들 등에게 공급되었다(1952년 9월 3일, 《교회와 역사》 412(2009. 9), 34쪽).

 

캐롤 몬시뇰의 구호 활동에 관한 이 보고서를 보면 북한에서 온 전쟁 피난민, 제주 4 · 3항쟁의 피해자 등이 그의 주된 구휼의 대상으로 지목되었다.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서는 악마라고 표현할 정도로 혐오했지만, 그로 말미암은 피해자인 북한 피난민에 대해서는 오히려 적극적인 도움의 손길을 펼쳤다. 단지 구호 활동만이 아니라 정착하여 생업을 찾는 일에까지도 관심을 쏟아 뒷날 캐롤 몬시뇰은 피난민의 해외 이민을 적극 주선하기도 하였다.

 

한국인 가족 150가구가 이민하여 저개발된 지역에서 농사를 시작하면 이번 가을에 브라질에 한국인 인구는 두 배가 될 것이다.‘한국 가톨릭 신자 이민 위원회’의 의장인 메리놀회의 존경하올 조지 캐롤 몬시뇰과 브라질 정부 당국자와 체결한 협정성명서가 최근에 도착하였다. 브라질로 오게 될 850명의 한국인은 대부분 남한에서 살고자 노력했던 북한의 피난민들이다. 전통적으로 농업 사회였던 남한 지역에 인구가 증가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농부들은 농사를 지을 토지나 기회를 얻기가 어려웠다(1965년 7월 16일, 《교회와 역사》 421(2010. 6), 20~21쪽).

 

캐롤 몬시뇰은 가톨릭 신자를 대상으로 이민을 주선하면서 생업에 어려움을 겪는 북한 피난민에게 그 기회를 대거 제공하였다. 이들은 일 년 넘게 브라질의 언어와 새로운 문화를 익히는 과정을 밟아온 사람들이었다. 이처럼 캐롤 몬시뇰은 공산주의 체제를 이끌어 간 사람들과 구분하여 북한 피난민에게는 적극적인 구호 활동을 전개하였다.

 

두 신부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 자신이 피난민이기 때문에 피난민의 비참한 상태를 깊이 이해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캐롤 신부는 북한을, 코피 신부는 만주를 담당했었다. 두 나라는 종전 이래 메리놀 선교회에게 문을 닫아 버렸다(1950년 8월 21일, 《교회와 역사》 409(2009. 6), 35쪽).

 

이는 한국전쟁 당시 메리놀회의 출판부장으로 재직 중이던 네빈스 신부14)가 몬시뇰에 대해 기록한 보고문의 일부이다. 그는 몬시뇰이 한국 가톨릭구제회 지부장으로 활동하던 중 한국을 방문해 만나기도 하는 등 그와 많은 소식을 주고 받으며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다. 이 글에서도 평소 몬시뇰이 자신을 피난민으로 여기고, 피난민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강했으리라는 점이 드러난다.

 

그 뒤로도 몬시뇰은 늘상 자신도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이라고 말하였다. 한국에 진출한 지 42년을 넘긴 1973년에 《경향잡지》와 인터뷰를 가진 자리에서 캐롤 몬시뇰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몸은 나왔지만 마음은 북한에 두고 왔습니다. 통일이 되면 물론 북한에 가서 지하에 숨은 교우들을 찾아내 침묵의 교회를 소생시켜야 되겠지요. 지금 남한에는 평양교구 출신 신부가 25명(주교 2명)이 있으니 이분들로 충분히 교구를 운영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평양교구 출신 신부들은 지금 서울, 수원 등 다 교구에 편입이 됐지만 통일이 되면 평양교구로 복귀하도록 소속 교구장님들과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하루 속히 남북이 통일되어 북한에까지 복음의 메아리가 울려 퍼지길 비는 마음 간절합니다(《경향잡지》, 1973년 8월호).

 

몬시뇰에게 북한은 제2의 고향이었던 셈이며, ‘북한 피난민’으로서의 마음은 북한을 떠나게 된 그날부터 갖고 있었다. 공산주의 이념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지만, 그 이념의 희생자이며 피해자인 피난민은 구호의 제일차적인 대상이었던 것이다.

 

2) ‘제주 4 · 3항쟁’에서의 구호 활동

 

‘제주 4 · 3항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건은 1948년 4월 3일 새벽에 시작되어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사실상 6년 6개월간 지속된 대참사며 엄청난 유혈사태였다. 특히 군대, 경찰, 그리고 우익 청년 단체가 이른바 ‘레드 헌트’로 명명하면서 나선 토벌 작전에는 민중을 ‘사냥’해야 할 인간 이하의 ‘빨갱이’, ‘짐승’으로 취급하였다. 이 작전에 따라 1948년 11월 중순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4개월 동안 160여 개 마을 가운데 130여 개 마을의 수만 명에 이르는 주민들이 학살되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1948년 12월 10일 서북청년회 총회에 참석하여 “제주도 4 · 3사태와 여수 · 순천 반란 사태로 전국이 초비상사태로 돌입했다. 이 국난을 수습하기 위하여 사상이 투철한 서북청년회를 전국 각지에 배치하겠다”라고 하며, 서북청년회의 제주 파견을 앞장서서 독려했다고 한다.15) 이와 같이 극도로 긴장된 상황 속에 몬시뇰은 제주도를 방문하였다.

 

제주도 방문과 관련하여 구호 활동의 책임자로, 또 잡지의 기고가16)로 다녀오게 되어 다행이었습니다. 저는 한반도 남쪽 끝에서 대략 50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공산주의자에 의해 황폐화된 섬에 두 주를 머물고 막 돌아왔습니다. 구호 활동의 책임자로, 또 잡지의 기고가로 제주도를 다녀오게 되어 다행이었습니다. … 해안가를 따라 아직 남은 마을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담에는 망루가 우뚝 솟아 있고, 감시인들이 24시간 망을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을들의 입구는 총은 아니지만 투창으로 무장한 남자와 소년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저는 섬 전체를 돌아볼 기회를 가져 스물네 곳의 마을에 들렀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할 기회가 주어져 그들에게 미국 가톨릭 신자들이 미국 가톨릭구제회(NCWC) 산하의 가톨릭전쟁구제회(CRS)를 통해 구호물품들을 그들에게 보내왔다고 말했습니다(1949년 4월 28일, 《교회와 역사》 408(2009. 5), 35쪽).

 

여기에 보이듯 긴장이 감도는 가운데 캐롤 몬시뇰은 수십 군데의 마을에 들러 사람들을 만나며 구호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캐롤 몬시뇰은 제주도에서 활동하고 있던 골롬반회의 스위니 신부에게 편지를 받고 구호물품을 건네기 위해 내려갔는데, 이 편지를 미국대사와 이승만에게도 보여 주었다.

 

사실은 제주도에서 최근에 발생한 어려운 문제 때문에 유래가 없이 바빴습니다. 지난해 그곳에서는 정규전이 계속해서 일어났고, 사망한 사람만도 만 명을 훌쩍 넘었습니다. 지난 15년간 제주도에서 사목 활동을 해 온 스위니 신부로부터 편지를 받았을 때 그 심각한 상황을 중단시킬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저였습니다. 저는 편지를 미국대사 무초17)와 한국에 나와 있는 미국 장교인 로버트 장군18)에게 보여 주었으며, 마침내 한국의 대통령 이승만 박사에게도 보여 주었습니다. 그 편지는 굶주림으로 고통 받고 입을 옷조차 부족한 불쌍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수많은 일의 시작을 의미했습니다(1949년 4월 28일, 《교회와 역사》 408(2009. 5), 37쪽).

 

스위니 신부에게서 온 편지를 계기로 캐롤 몬시뇰은 제주도에 대한 구호 활동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 편지가 이어지는 구호 활동의 시작의 의미를 갖는다고 보고하였다. 그런데 캐롤 몬시뇰은 이 편지를 이승만에게도 보여 주었다. 그가 중단시켜야 할 심각한 상황은 제주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유혈 사태와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처참한 상황에 빠지게 된 일이었다.

 

이미 이승만은 1949년 1월 21일 국무회의에서 “가혹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제주 4·3 사건을 완전히 진압해야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미국의 원조가 가능하다”라고 지시한 일이 있다.19) 이어 맥아더 장군에게도 긴급하게 서신을 보냈다.

 

우리는 제주도와 다른 피해 지역을 완벽하게 소탕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다했습니다. 그러나 이 소탕 작전은 대단히 성공적이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해안을 따라 더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끊임없이 잠입해 오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초계정, 비행기, 그리고 우리의 해안선을 방비하기 위한 좀 더 큰 배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장비들이 없는 한 공산주의자들을 몰아내고, 쌀과 다른 상품의 밀수입을 막는 일도 불가능합니다. … 기밀스럽게 이러한 상황에 있는 우리에게 조언과 도움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1949년 5월 22일,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에게 보낸 서신〉, 이승만서한철).

 

이승만은 직접 맥아더 장군에게 서신을 보내어 제주도에서 공산주의자의 소요를 진압하기 위한 무력적 지원을 요청하였던 것이다.20) 이와 같이 이승만이 가능한 방법을 동원하여 제주도에 대한 무력 진압에 나서고 있던 상황에 캐롤 몬시뇰은 제주도의 상황을 알리며 몸소 구호 활동에 들어갔다. 캐롤 몬시뇰은 제주도의 참혹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남원이라는 곳에 갔는데, 저는 피난민들이 살고 있는 가축우리와도 같은 헛간을 방문하였습니다.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그만 말문을 잇지 못하였습니다. 그 대신에 눈물이 나와 저는 마치 어린아이와도 같이 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오두막집을 보고 나니 저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방문 여섯째 날에 폭동자에 의해 파괴된 수천 채의 집을 보았습니다(1949년 4월 28일, 《교회와 역사》 408(2009. 5), 36쪽).

 

구호 활동을 위해 제주도를 방문하였을 때, 사람들이 마침 모여들어 구호 활동을 위해서 나왔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그들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는 그만 어린아이처럼 목 놓아 울어 버렸다는 고백이다. 병든 환자를 손수 씻기고 돌보며, 죽어가는 환자를 가톨릭구제회 트럭에 실어 병원을 오가기도 하였다. 한국말이 서툰 사제를 보면 유감의 뜻을 표명하기도 하였다.21) 이와 같은 행보를 보인 캐롤 몬시뇰과 이승만과는 이미 불편한 관계로 접어들었으리라고 판단된다.22)

 

3) 종교를 뛰어넘는 민간 구호 활동

 

캐롤 몬시뇰이 제주도에서 구호 활동을 펴면서 총장 신부에게 올린 보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이 물품들이 가톨릭에서 온 것이라고 제가 말할까봐 두려워하여 어떤 물건도 하역하기를 거부하던 프로테스탄트 신자에게 달려갔습니다. 마침내 그들이 이 물건들을 목사에게 보내어 그가 받으니 구호물품이 제주도에 수용될 수 있었습니다. 그 목사는 지방 관리에게 구호물품의 9/10를 인도하였으며, 지방 관리는 이를 창고에 두었다가 한 달도 안 되어 모두 나누어 주었고 기부자가 누군지는 별로 말하지 않았습니다(1949년 4월 28일, 《교회와 역사》 408(2009. 5), 38쪽).

 

비록 제가 사람들에게 미국 사람들이 이부자리 등등을 보낸 것이라고 말하였지만, 신부가 매번 짐 실은 트럭과 함께 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톨릭교회가 이런 물건을 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와 같은 생각이 교회에 해가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교회가 이 섬에서 어마어마한 기회를 갖게 된 것이고, 아일랜드 선교사들이 이 이익을 취하게 되리라고 확신합니다23)(1949년 4월 28일, 《교회와 역사》 408(2009. 5), 38쪽).

 

몬시뇰은 자신이 가톨릭 신부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가톨릭교회의 구호 활동으로 생각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그가 구호활동에 가톨릭을 내세운 것도, 구호물품을 가톨릭 신자들에게만 공급한 것도 아니었다. 가톨릭교회의 활동으로 보인다 해도, 그 공이나 효과는 메리놀회가 아니라 골롬반회에 갈 것이었다. 캐롤 몬시뇰에게 종교나 자신이 속한 선교회의 이름을 내세우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또한 프로테스탄트와도 꾸준히 협조해 나갔다.

 

한국에서 지금 미국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에 있는 수많은 피난민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뉴욕 시 출신의 가톨릭 신부와 덴버 출신의 감리교 선교사가 힘을 합하였다. 메리놀회의 존경하올 조지 캐롤 신부와 감리교 선교사인 빌링스 박사24)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여러 종류의 구호단체를 통해 모아진 배급물품을 다양한 피난민 수용소로 옮기고 있다. 피난민은 일본과 북한의 공산군 점령 지역에서 왔다. 정확한 인원은 알 수 없지만 부산시의 수용소에만도 대략 9만 4천 명이 있다. 주된 배급품은 식량, 옷, 그리고 의약품이다. NCWC의 가톨릭전쟁구제회는 2만 2천 달러어치의 의약품과 9만 달러어치의 의류를 제공했다(1947년 9월 8일, 《교회와 역사》 407(2009. 4), 33쪽).

 

종교를 뛰어넘어 연합하여 구호 활동을 편 이 일에 대해 여러 소식지는 크게 보도하였다. 메리놀회 소속 한국 선교사지만, 골롬반회의 선교 활동도 적극 도왔으며, 프로테스탄트와도 구호 활동을 위해서는 협력하였다. 그 구휼의 대상으로 가톨릭 신자만 가려내지도 않았다. 캐롤 몬시뇰만이 해낼 수 있었던 활동이었다. 이보다 조금 뒤인 1952년에는 캐롤 몬시뇰이 종교를 초월하여 감리교 측과 협력하여 ‘외국 민간 원조 기관 한국연합회’(KAVA : the Korean Association of Voluntary Agencies)25)를 탄생시키기도 하였다. 캐롤 몬시뇰은 구호 활동에 있어 다른 단체나 다른 종교와의 연합 활동도 꾸준히 전개해 나가는 것은 물론 그 혜택도 종교를 초월하여 나누어 주었다.26)

 

한편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의 국가적 차원의 대외 원조는 군사 원조 중심으로 옮아갔다.27) 당시 소련도 북한에 군사적 지원은 물론 식량 원조도 진행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본인은 조선 인민이 식량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시베리아에는 5만 톤의 완제품 밀가루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밀가루를 조선 인민에게 선물로 보낼 수 있습니다”28)라는 뜻을 전해왔다. 이에 김일성은 즉각 감사의 뜻을 전했다.29) 이와 같이 미국과 소련이 각기 정치 군사적 목적으로 일정한 지원을 하고 있었지만 민간 차원의 원조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캐롤 몬시뇰이 이념과 종교를 초월하여 발 벗고 나섰던 구호 활동은 이러한 시기에 한국 사회에서 갖는 의의가 실로 크다고 하겠다.

 

 

4. 캐롤 몬시뇰과 이승만 대통령의 갈등

 

한국전쟁의 와중에 몬시뇰은 분단된 이래 처음으로 미국인 선교사로서 유엔군과 함께 북한 지역으로 들어갔다. 메리놀회 총장에게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평양교구 소속 본당이 있는 영유, 숙천, 안주, 서포, 진남포 등의 지역을 돌며 많은 사람을 만나고 세례와 미사 등을 집전하며 시설을 돌아보고 실종된 선교사(번 주교, 부드 신부)에 대한 소식을 추적하는 등의 활동을 폈다. 그는 서울에서 3명의 한국인 신부까지 데리고 갔는데, 그가 보고하기를 거의 10년 동안 보지 못했던 그의 이전 신자들이 그를 ‘죽음에서 돌아온 사람’이라며 반겼다고 한다.30) 뒷날 캐롤 몬시뇰의 회고에 따르면 스스로도 일제 때 추방된 뒤 처음 가보는 평양이라 감회가 깊었으며, 사람들도 몬시뇰을 얼싸안으며 울음을 터뜨리고 소를 잡아 환영 잔치까지 베풀어 주었다고 한다.31)

 

그런데 유엔군을 따라 북한 지역에 들어간 것 자체는 차치하고 캐롤 몬시뇰은 평양교구를 순방하며 세례와 미사 등을 집전하고 옛 신자들을 만나고 다녔다. 이러한 활동이 첨예한 냉전의 분위기에서 이승만의 촉각을 곤두세우게 하는 문제였음은 틀림없었을 것이다. 이미 이승만은 한민당을 비롯한 지지세력과 연합하여 국가보안법을 1948년 11월 20일 국회를 통과해 12월 1일 공포하였다. 이 뒤로 1949년 4월까지 국가보안법으로만 체포된 사람이 89,700여 명이었고, 1949년 한 해에만도 체포된 사람이 11만 명 이상에 달했다. 국가보안법을 가장 원한 사람은 이승만이었고, “빨갱이는 무조건 포살해야 돼”라고 이른바 ‘빨갱이 잡는 검사’로 이름을 날린 선우종원 검사를 격려하곤 하였다.32)

 

이러한 와중에 전쟁까지 일어난 시기에 북한을 방문하여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에 대한 선교 활동을 편 몬시뇰은 분명 이승만에게는 골칫덩어리였을 것이다. 앞에서 서술했듯이 몬시뇰의 구호 활동에 관한 보도에서 그 대상으로 북한에서 온 전쟁 피난민, 제주도민, 어린이, 그리고 홍수 피해자의 네 부류를 지목할 정도로 몬시뇰은 북한에서 온 피난민, 포로 등에게 적극적인 구휼 활동을 폈다. 냉전의 시대에도 이념의 대립이 가장 고조된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북한의 전쟁 포로나 피난민은 좌시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몬시뇰은 그 이념을 추종하여 정권을 장악한 공산주의자들과 그 치하의 사람들을 구분하였다. 몬시뇰에게 공산치하의 인민들과 피난민들은 긍휼의 대상이었다. 어쩌면 몬시뇰의 활동 깊은 곳에는 앞서 지적한 것처럼 자신도 북한에서 온 피난민이라는 의식이 강하게 남아 있었는지 모르겠다. 1953년에는 다가오는 겨울을 대비하여 북한에서 온 피난민을 위해 적극적인 구호 활동을 폈다. 몬시뇰은 급히 미국으로 가서 추수감사절을 맞아 북한에서 온 피난민의 절박한 사정을 호소하며 일주일간 대대적인 의류 모집 캠페인을 전개하였다.33) 이에 천만 파운드를 넘긴다는 목표 아래 수집된 의류를 한국으로 들여와 피난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승만과 어긋나기는 상이군인에 대한 활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쟁의 와중에 1951년 5월 대한상이용사회, 1951년 11월 대한유족군인회가 결성되는 등 상이군인은 나름대로 자구책을 찾으려 노력하였지만 아직 아무런 힘도 없는 실정이었다. 이승만의 반응은 냉정했고, 상이군인들은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1952년에는 경찰과 상이군인이 충돌을 빚는 상황까지 발생하고, 정부에 대한 불만은 커져갔다.34) 몬시뇰은 상이군인들과 전사한 병사의 가족들을 위해 미국 주교회의에서 보내온 기금과 구호물품을 보급하였다. 노기남 주교, 한국 정부의 관료들, 미군 고위 장교들이 모두 부둣가에 나와 이 구호물품이 전달되는 예식에 참석하였다고 한다. 몬시뇰은 “이러한 도움은 그 피난민들이 어떤 단체로부터건 처음으로 받는 도움이었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35)

 

한국전쟁의 와중에 일어난 또 다른 커다란 파동은 이른바 부산 정치파동이었다. 부산 정치파동에 대한 미국무부 정보조사국(OIR)의 한국관련보고서(1950. 6. 27)에 따르면 이승만 대통령이 1950년 5월 25일 사실상 부산 지역과 대한민국의 다른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의원들을 체포하고, 국회의 손에서 대통령 선출권을 빼앗아 오는 헌법 개정을 요구했으며 법적인 제약에 대한 아무런 고려 없이 국회를 해산하겠다고 협박했다고 상황을 정리하였다. 이에 따르면 이승만은 아마도 부분적으로 또는 전적으로 그의 정권에 합법적인 토대라는 외형을 갖추기 위해서 국회의 재구성을 선호할 것이며, 이런 방식으로 향후의 국제적 비난을 피하려 할 것이라 분석하였다. 그런데 이승만은 국제적 비난에 극도로 민감하다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승만은 국제적 여론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미국인 사제들 및 그들과 연결된 정치인의 움직임에 매우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1949년 당시 메리놀회의 부총장 월시(T.S. Walsh) 신부가 몬시뇰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장 요한(장면)이 파리에서 돌아가는 길에 여기 메리놀회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당신의 활동과 메리놀회의 당신의 동료들에 대해 아주 격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36) 부산 정치파동으로 정국이 어수선하던 부산 피난 시절에도 그러한 관계는 지속되었다. 몬시뇰의 부산에서의 일기에 따르면 이 무렵에도 몬시뇰은 노기남 주교를 방문하여 장면 총리, 크레이그 신부, 코너스 신부 등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였으며, 이 자리에는 무초 대사도 함께했었다. 즉 몬시뇰은 일찍부터 장면 박사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37)

 

이승만 대통령은 장면을 중심으로 하는 가톨릭 세력을 매우 우려하였으며, 그 가운데서도 몬시뇰에 대해서는 극도의 적개심을 표명하였다. 이승만은 가톨릭계 인물이라도 번 주교, 스펠만 주교에 대해서는 매우 호의적이었다. 이승만의 심중은 그가 한표욱에게 보낸 서신에 잘 나타난다. 이 서신에서 이승만은, “번 주교는 교황사절이며, 매우 좋은 저의 친구입니다. 그는 외교적 능력이 뛰어난 사람입니다”라고 소개하였다. 그러나 캐롤 몬시뇰에 대해서는 관해서는 매우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었다. 캐롤 몬시뇰에 대해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는 당신이나 벤(임병직)이 유핀 대주교나 팬 박사를 스펠만 추기경을 대하는 우리의 대변인이 되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그 정보를 줄 수 있지만, 제가 당신을 위해 스펠만 추기경이 볼 수 있도록 편지를 쓸 것이며, 이러한 상황을 설명할 것입니다. 우리는 캐롤 신부가 가톨릭교회와 우리 정부 사이의 선한 일을 창출할 만한 사람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해야만 합니다. 그가 저에게 보낸 편지의 사본을 추기경에게 보여 드림으로써, 그가 이 일에 관해 더 이상의 다른 많은 의견을 들을 필요 없이 추기경 스스로가 판단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1952년 4월 3일, 〈이승만 대통령이 한표욱에게 보낸 서한〉, 이승만서한철, 국사편찬위원회 D/B).

 

스펠만 추기경에게 캐롤 몬시뇰이 한국 정부에는 물론 가톨릭교회에도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을 전한다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임병직 유엔 대사에게 보낸 서한을 보면 캐롤 몬시뇰에 대한 적의는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캐롤 신부는 여기에서 가장 악의적인 가톨릭인의 한 명이며 우리의 적을 도와주는 일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그는 정말로 아주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며, 그가 한국에 돌아오는 것을 가능한 막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몇 달 전 저는 워싱톤에 그에 관한 다소의 정보를 보냈습니다(그가 저에게 보낸 서한과 올리버 박사의 답신을 포함한 우리의 답변서 사본). 가톨릭 인사들이 유도하는 소문은 그는 이곳의 가톨릭 신자들의 입장을 도와주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해롭게 만들며, 이에 그를 미국에 머무르게 하라고 조언합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노 주교는 평양(평안남도 출생, 평양 교구장 서리) 사람이고, 자연적으로 한국 가톨릭의 교계는 그의 영향력 아래에 있습니다. 그들과 흥사단은 하나의 같은 그룹입니다”(1952년 7월 11일. 〈이승만 대통령이 유엔대사 임병직에게 보낸 서한〉, 이승만서한철, 국사편찬위원회 D/B).

 

이 편지를 보내기 직전인 1952년 5월 18일에 메리놀 사제들이 모여 송별파티를 가졌고, 20일에 캐롤 몬시뇰은 가톨릭구제회의 활동을 위해 미국으로 갔었다. 이 기회를 틈타 몬시뇰을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게 막아 달라는 것이다. 이토록 몬시뇰을 경계한 까닭은 일차적으로 그가 장면과 가까운 인물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수 있다. 이 무렵 프란체스카 여사는 당시 유엔의 대사이던 임병직에게 보낸 서한에서 장면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 신자들이 단결할 것이며 머지않아 LA의 동지회도 그들이 장악하게 될 것이라는 점 등에 대한 우려의 뜻을 전했다. 그리하여 그들이 동지회를 벗어나 반정부 움직임을 그만두지 않는 한 이승만 대통령은 어떠한 자금 지원도 해주지 않을 것임을 이야기하였다.38)

 

하지만 장면과 가까운 관계였던 사람은 몬시뇰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몬시뇰보다 더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데 이승만이 이처럼 몬시뇰을 경계하고 아예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도록 막으려고 한 까닭은 몬시뇰의 활동이 갖는 비중과 특징 때문일 것이다.

 

위에 보인 편지에서도 이승만의 캐롤 몬시뇰이 ‘우리의 적’을 도와주는 일을 아주 많이 했다는 비난은 북한을 도와주는 일을 아주 많이 했다는 뜻이다. 캐롤 몬시뇰이 북한 내지 공산주의자를 도와주는 일을 많이 했다는 의미는 앞에서 검토한 것과 같이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냉전 체제 속에서 북한에서 내려온 피난민, 북한의 전쟁 포로, 그리고 제주도 4 · 3사건의 피해자 등을 대상으로 적극적이고 헌신적인 구호 활동을 펼쳐온 것을 지적한 것이다. 이승만 정부가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취한 정책을 비추어 보면, 이승만에게 캐롤 몬시뇰은 눈엣가시와도 같았으리라 짐작된다. 결과적으로 북측을 도와주는 격이라는 이승만의 불만은 노기남 주교 역시 평양 사람이라고 지적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이러한 여론은 골롬반회 측에서도 지적되었다. 춘천 교구장이던 퀸란 주교는 골롬반회 총장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메리놀회의 몬시뇰 캐롤은 전쟁 구호 활동을 위해 여기에 있는 가톨릭구제회의 대표입니다. 그리고 평양대목구를 위해서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여기에서 훌륭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큰 몫을 메리놀회와 평양의 피난민에게 주었다고 느끼고 말하고 있습니다(골롬반 문서 Vol. 2 f.23, 1955년 7월 5일. 〈퀸란 주교가 팀 코넬리 총장 신부에게 보낸 서신〉).

 

이 편지에 대해 코넬리 신부가 보낸 답장은 다음과 같다.

 

당신은 몬시뇰 캐롤에 대해 언급하였습니다. 그는 정말 큰 일을 하고는 있지만, 부정적인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메리놀회는 여러 선교 현장에서 다소 강압적인 일처리로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몬시뇰 캐롤은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에서 도망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골롬반 문서Vol. 5 ff.24~25, 1955년 7월 13일, 〈팀 코넬리 총장 신부가 퀸란 주교에게 보낸 서신〉).39)

 

몬시뇰의 구호 활동은 단지 사회 복지 내지 종교 활동으로서만이 아니라 미국과 한국 사이의 외교적인 관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 때문에 이승만은 몬시뇰을 드러내놓고 배격하기는 어려운 입장이었다. 1955년 7월 5일 임병직 대사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몬시뇰의 위치와 그 활동의 의미가 잘 나타나 있다. 이 서신에 따르면 스펠만 추기경이 임병직 대사에게 알리기를 서울에서 활동 중인 가톨릭구제회의 몬시뇰의 요청으로 비타민, 아스피린 등의 배급품이 한국의 가톨릭 병원과 구호 단체에 전해질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보고하면서 임병직 대사는 의약품의 선적과 수입품에 대한 면세조치를 위한 서신을 이승만에게 보냈다.

 

캐롤 몬시뇰이 말하기를 이러한 선적물은 미국 가톨릭 단체가 무료로 기증한 것이라고 합니다. 스펠만 추기경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에 따르면, 캐롤 몬시뇰은 또한 그러한 수입품에 대해 보건사회부에서 제한 조처가 있지 않는가 하는 우려를 표명하였습니다. … 스펠만 추기경은 제가 이 문제를 통지받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움을 제공해 주기를 기대하며 제게 서신을 보냈습니다.

 

존경하는 대통령 각하, 우리에게 미국의 가톨릭계의 의견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그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는 말씀드릴 필요도 없습니다. … 지금 상황에서 가톨릭교회의 선한 활동과 그 조직은 이 나라의 우리에게 아주 대단히 중요합니다(1955년 7월 5일, 〈임병직 유엔대사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이승만서한철, 국사편찬위원회 D/B).

 

몬시뇰은 의료와 사회 복지 분야에 있어서 여전히 중요한 활동을 펴고 있었다. 이에 임병직 대사는 한국에 필요한 의약품을 무료로 배급받을 수 있도록 보건부나 기타 다른 부서에 조처를 취해 주기를 이승만에게 요청하고 있다.40)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승만은 임병직 등 자신이 신뢰하는 측근에게 비밀편지를 통해 은밀히 몬시뇰의 입국을 막는 방법을 취하려 했던 것 같다.41)

 

몬시뇰은 이승만 대통령의 관계의 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안 주교는 여담으로 태평양 전장 때 미국에서 고(故) 이승만 전 대통령과 만났던 일을 말해 준다. 두 사람은 친분이 두터워 안 주교는 곧잘 “망명 애국지사 이승만”을 방문했고, 이승만의 독립 운동을 지원해 주었다고 한다. 이승만이 후에 대통령이 된 후에도 가끔 만났는데 이승만은 안 신부가 주교가 된 후에도 “캐롤 신부”로 불렀다고. 이유인즉 주교는 너무 “높아”서 다정한 맛이 없기 때문에 옛날처럼 “캐롤 신부”로 호칭하였다고 한다.“미국에서 독립 운동하던 시절의 이승만 씨는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엔 노 굿[No good]이었지요”(《경향잡지》, 1973년 8월호).

 

이는 몬시뇰이 한국에 온 지 42년이 되는 해인 1973년에 가진 《경향잡지》의 인터뷰 기사이다. 태평양전쟁으로 추방되었던 시기에 몬시뇰은 이승만과 인연을 맺어왔지만, 냉전 시기에 그것을 초월한 몬시뇰의 활동과 철저하게 냉전의 논리를 고수하던 이승만과는 서로 더 이상 같은 길을 걸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42)

 

 

5. 맺음말

 

이 연구는 1931년 8월 한국에 입국하여 거의 한평생을 한국에서 선교사로서의 삶을 살았던 캐롤 몬시뇰의 활동을 분석한 연구이다. 특히 냉전의 절정을 달했던 해방 전후, 한국전쟁 시기에 집중하여 그의 구호 활동과 그 의미에 관해 검토하였다. 이를 위해 특히 메리놀회의 문서와 잡지를 적극 활용하였다.

 

캐롤 몬시뇰의 한국에서의 활동을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 그의 선교 방향을 정리하면 크게 다음 두 가지이다. 첫째, 영혼 구원을 위해서는 그 몸을 적극적으로 돌보아 주는 실천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몸을 위해 베푸는 작은 친절이 그 영혼의 마음을 여는 강력한 수단이라는 생각이었다. 몬시뇰의 이와 같은 선교 방향은 필요한 것을 내어주는 ‘친절한 행동’을 강조하였고, 그것은 곧 적극적인 구호 활동으로 이어졌다. 둘째, 한국의 순교자에 대한 공경이었다. 캐롤 몬시뇰은 한국은 순교자의 피가 뿌려진 곳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자신이 선종할 땅도 한국으로 지목하며 한국을 위해 헌신하였다.

 

캐롤 몬시뇰은 북한에서 온 전쟁 피난민, 제주 4 · 3항쟁의 피해자 등이 그의 주된 구휼의 대상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공산주의자들을 악마라고 표현할 정도로 혐오했지만, 그로 말미암은 피해자인 북한 피난민에 대해서는 오히려 적극적인 도움의 손길을 펼쳤다. 냉전의 시기에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상황은 매우 심각하였다. 냉전의 극한 절정 속에 한국은 또다시 고통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캐롤 몬시뇰은 공산주의를 매우 비판해 왔었다. 한국전쟁의 와중에 공산주의자들은 많은 가톨릭 성직자들을 체포 · 살해하였고, 캐롤 몬시뇰도 그 표적이었다. 그런데 몬시뇰이 공산주의자의 표적이 될 정도로 공산주의자를 노골적으로 혐오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공산주의 정권을 이끄는 사람에 대한 분노였다. 그 치하에서 군에 징집되었다가 포로가 된 사람이나 그곳을 탈출한 피난민에게 캐롤 몬시뇰은 적극적인 구호의 손길을 뻗었던 것이다. 공산주의 이념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지만, 그 이념의 희생자이며 피해자인 피난민은 구호의 제일차적인 대상이었던 것이다.

 

‘제주 4 · 3항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건은 1948년 4월부터 시작되어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사실상 6년 6개월간 지속된 대참사며 엄청난 유혈 사태였다. 이 와중에 1948년 11월 중순부터 1949년 3월까지만 해도 약 4개월 동안에 160여 개 마을 가운데 130여 개 마을의 수만 명에 이르는 주민들이 학살될 정도였다. 이승만이 가능한 방법을 동원하여 제주도에 대한 무력 진압에 나서고 있던 극도로 긴장된 상황 속에 몬시뇰은 제주도를 방문하여 수십 군데의 마을에 들러 사람들을 만나며 구호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캐롤 몬시뇰은 제주도의 상황을 호소하는 스위니 신부의 편지를 미국대사와 이승만에게도 보여 주었으며, 제주도에서의 활동을 사진과 보고서를 통해 메리놀회에 알리기도 하였다. 캐롤 몬시뇰과 이승만과는 이미 불편한 관계로 접어들었으리라고 판단된다.

 

이승만과 캐롤 몬시뇰과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다. 냉전의 극한 대립이 있던 상황에서 북한 피난민에 대한 구호 활동이나 4 · 3항쟁의 소용돌이에 있던 제주도를 방문해 구호 활동을 펴면서 사진과 보고서 등을 통해 그 실상을 알리고 나선 것은 물론, 부산 정치파동이나 거제포로수용소에 수용된 전쟁 포로의 송환 문제, 상이군인에 대한 정책 등에서 캐롤 몬시뇰의 활동은 이승만의 정책과는 계속 엇나가는 방향이었다. 또한 캐롤 몬시뇰은 이승만에게 정적과도 같았던 장면 총리와도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결국 이승만이 캐롤 몬시뇰이 ‘우리의 적’을 도와주는 일을 아주 많이 했다고 표현할 정도로 두 사람의 행보는 서로 다른 방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구호 활동을 전개하면서 캐롤 몬시뇰은 정치적 색채를 강하게 드러내거나 그 대상으로 가톨릭을 내세우지도, 가톨릭 신자들에게만 공급하지도 않았다. 캐롤 몬시뇰에게 종교나 자신이 속한 선교회의 이름을 내세우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의 국가적 차원의 대외 원조는 군사 원조 중심으로 옮아갔고, 민간 차원의 원조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캐롤 몬시뇰이 이념과 종교를 초월하여 발 벗고 나섰던 구호 활동은 이러한 시기에 한국 사회에서 갖는 의의가 실로 크다고 하겠다. 이처럼 캐롤 몬시뇰은 일제 시대 말기부터 해방,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어려운 시기에 영혼 구원을 위해서는 그 몸을 돌보아야 한다는 실천을 강조하며 이념과 종교를 초월하여 적극적인 구호 활동을 전개한 선교사였으며 사회 활동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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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캐롤, 조지 마이클(Carroll, George Michael, 1906~1981). 세례명은 제오르지오. 한국 성은 안(安). 몬시뇰.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1931년 2월 1일 사제로 서품된 즉시 한국의 선교사로 자원, 같은 해 8월 한국에 입국하여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관할하던 평안도 지방의 마산 · 안주 · 운향시 · 서포 등지에서 사목 활동을 하였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에 의해 체포 · 구금되어 이듬해 6월 미국으로 추방되었다가 1945년 한국이 해방되자 미국 주교회의 원조 기구인 가톨릭구제회 한국 지부장으로 입국하여 사회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잠시 일본으로 피신하였다가 미8군 사령부 소속 군종 신부가 되어 다시 한국에 입국하였다. 1950년 11월 20일 평양 대목구장 서리 및 몬시뇰로 임명되어 유엔군과 함께 평양 대목구를 순회하며 미사를 집전하고 성사를 베푸는 등 교회와 신자들의 신앙생활 정상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중공군의 개입에 따른 유엔군의 후퇴로 남하하여 한국 가톨릭구제회 지부장직을 계속 수행하면서 사회복지 사업에 헌신하였다. 한평생을 한국에서 선교사로서의 삶을 살다가 1975년 노령과 건강 문제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 뒤 1981년 9월 16일 메리놀회 본부 은퇴신부 휴양소에서 향년 75세로 선종하여 메리놀회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한국가톨릭대사전》 11, 8454~8455쪽). 이 글에서는 그 칭호를 ‘캐롤 몬시뇰’로 통일하였다.

 

2) 한국에서 활동한 서양 선교사들이 남긴 문서는 크게 보아 파리 외방전교회, 메리놀 외방전교회 및 수녀회,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독일 상트 오틸리엔 성 베네딕도회 등의 소속 선교사들이 남긴 각종 문서 및 《The Far East》, 《The Field Afar》 등에 수록된 한국 관련 기사들이다. 그 밖에 교황청 산하 전교회에서 펴낸 《전교회 연보》, 《가톨릭 전교지》와 인류 복음화성(옛 포교성성)의 한국 관련 문서들이 있다. 이 가운데 비교적 최근에 수집된 문서가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와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문서이다. 문서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는 최선혜, 〈한국 근 · 현대와 외방 선교회의 활동 외방선교회 한국관련 문서에 대한 개괄〉, 《교회와 역사》, 350(2004. 7) 참조.

 

3) 평양교구사편찬위원회 편, 《천주교평양교구사》, 1981, 364~369쪽 ; 《한국가톨릭대사전》 4, 2445~2446쪽.

 

4) 이 글에서는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된 메리놀 외방전교회, 골롬반 외방선교회 등의 문서를 활용하였다. 이미 《교회와 역사》를 통해 지상에 소개된 문서는 해당 호(년 월)를 표시하였는데, 이 원고의 작성과 관련해 문맥상 기존 번역을 다소 다듬은 곳이 있다. 아직 소개되지 않은 ‘면장철 No.- Reel No.- Folder No.- 문서 자체 번호’로 문서번호를 소개하였다. 면장철에 정리 보관되어 있는 일련 번호가 가장 앞에 오며, 그 뒤는 Reel 번호, 그 안의 Folder 번호, 그리고 문서 자체에 찍힌 번호의 순서이다.

 

5) LARA(Licensed Agencies for Relief in Asia). 아시아 구제연맹. 1946년 3월에 미국 뉴욕 시에서 ‘외국인을 위한 미국인의 자원봉사단체 위원회’에 의해 종교 · 교육 · 사회사업 단체를 중심으로 조직된 아시아 구제 기관이다. 미국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은 13개 구호 단체의 연맹체로서 일본 · 한국 · 오키나와 등 아시아에 주로 식량 · 의복 등 생활 필수품을 기증하는 구호 활동을 폈다.

 

6) 한국의 천주교회는 박해 끝에 선교 자유를 얻게 되자 곧바로 조직적인 근대적 시설 사회 복지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한국 사회 복지 역사에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역사에서 봉사, 재산의 사회 환원 등에서 매우 의미 깊은 역할을 수행해 왔다. 이에 관한 개괄적 지식은 최근 간행된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30년사》, 2006 참조.

 

7) 1951년 12월 3일 소련군 총참모부 작전총국이 작성한 1950년 6월 25일 당시 북한과 남한의 국군 전력 현황에 관한 보고를 보면, 25일 당일 새벽 준비포 사격 뒤 인민군 부대가 밀고 내려왔고, 강릉과 울진 등에서는 유격대원들이 상륙하였다. 새벽 5시에 상륙하여 주변 마을을 점령해 갔는데 그 모든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 하였다. 북한이 공격하자 남한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으며, 공격이 시작된 지 12시간이 넘어서야 이에 대한 저항이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기술되어 있다(《한국전쟁, 문서와 자료, 1950~53년》, 국사편찬위원회, 2006, 61~65쪽).

 

8) 번, 제임스 파트릭(Byrne, James Patrick, 1888~1950). 주교. 초대 평양 지목구장. 초대 주한 교황사절.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한국 이름은 방일은(方溢恩). 1915년 사제서품을 받고 활동 중 1922년 11월 메리놀회가 교황청 포교성성으로부터 평안도 지역의 포교권을 위임받자 그해 11월 27일 한국 지부장으로 선출되었다. 1923년 5월 평양지목구 설정 준비 책임자로 한국에 입국하였고, 1927년 3월 17일 초대 평양 지목구장이 되었으며, 1947년 8월 12일 초대 주한 교황사절로 임명되었다. 1949년 4월 17일 주교로 임명되어 6월 14일 명동 성당에서 주교 성성식을 가졌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교황 사절관을 지키다가 7월 11일 보좌 부드 신부와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인민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 뒤 평양으로 이송되어 평양 감옥에 수감되었고, 이어 이른바 ‘죽음의 행진’의 고초를 겪는 와중에 1950년 11월 25일 62세의 나이로 수용소에서 순교하여 하창리 마을 밖에 묻혔다.

 

9) 부드, 윌리엄(Booth, William, 1898~1973). 제3대 평양 지목구장.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세례명은 굴리엘모. 한국명은 부문화(夫文化). 1898년 미국에서 태어나 메리놀회에 입회, 1925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바로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같은 해 10월에 입국, 사목 활동을 펴 나갔다. 1941년 12월에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제 당국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강제 추방되었다가, 1947년 1월 캐롤 신부 등과 함께 한국에 다시 부임하였다. 1950년 7월 11일 공산군에 의해 체포되어 얼마 뒤 열린 인민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 뒤 북한으로 끌려가 7월 19일 평양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이른바 ‘죽음의 행진’을 겪었다. 극심한 고초를 겪고 풀려나와 1960년에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1973년 노환으로 선종하였다(황해도천주교회사 간행사업회,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황해도천주교회사》, 1984 ; 《한국가톨릭대사전》 6, 3590~3591쪽).

 

10) 앞의 주 8)과 다음 연구 참조.

강인철, <해방 정국 한국 천주교회>, 《한국 천주교회사의 성찰과 전망 2 -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을 중심으로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1.

노길명, <광복이후 정치권력과 천주교회 간의 관계 - 해방 공간부터 제2공화국까지를 중심으로 ->, 《민족사와 천주교회》, 한국교회사연구소, 2005.

 

11) 《교회와 역사》 410(2009. 7), 1950년 10월 30일.

 

12) 캐롤 몬시뇰을 비롯하여 해방 이후 격동의 시기에 한국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은 한국에 필연적으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정확히 예견하였다.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전쟁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진단한 까닭은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공산주의자들이 분단이라는 정황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 불안정하고 한시적인 미군정 체제는 필연적으로 전쟁을 부르게 되어 있다. 셋째, 소련의 등장에 이어 중국마저 공산화되는 상황에서, 그 여파는 한반도에도 미칠 것이다. 넷째, 남한 정부와 우익 세력은 국제적인 안목이 결핍되어 있다는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전쟁을 예견한 문제에 관해서는 최선혜, <서양 선교사의 한국전쟁 예견>, 《교회사연구》 23, 한국교회사연구소, 2004.

 

13) 캐롤 몬시뇰의 회고에 따르면 “이 사람은 가톨릭 신자이므로 신분을 믿을 수 있다”는 캐롤 몬시뇰의 사인이 적힌 증명서를 2천 명 이상에게 써 주었다고 한다(《경향잡지》, 1973년 8월호).

 

14) 알버트 네빈스(Albert J. Nevins, 1915~1997) 신부는 줄곧 메리놀회에서 출판 관련 일을 하였으며 《The Field Afar》, 《Marynoll》 등의 잡지 편집자로 활동했다. 뒤에 ‘북미 가톨릭언론협회’의 회장을 역임하고 한 그는 저널리스트일 뿐만 아니라, 메리놀회 관련 도서와 《The Adventure of Wu Han of Korea》와 같은 청소년 도서 등 20여 권의 저서를 쓴 작가이기도 하다.

 

15) 제주 4 · 3항쟁과 관련해 이 글에서의 서술은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1940년대편》, 인물과 사상사, 2004, 106~116, 195~217쪽을 참고하였다.

 

16) 이 문서에 기초한 캐롤 신부의 보고문은 《The Field Afar》(1949. 10)에 <한국의 전선에서 - 선교사가 내전을 밝혀내다>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17) 무초, 존(Muccio, John. J). 1949년부터 1952년까지 주한미국대사 역임.

 

18) 로버트, 윌리엄(Roberts, William). 당시 주한미군사고문단(KMAG) 사령관.

 

19) 강준만, 위의 책, 207쪽 주 275)에 소개된 제주 4 · 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 4 · 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 2003, 289쪽.

 

20) 위의 기록에 보이듯이 이승만이 미국에 병력을 요청한 명분은 제주도의 공산주의자를 소탕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이승만에게 남한에서 좌익 조직을 진압하고 빨치산 활동을 진압하기 위한 조처를 취할 경우에 군사적으로 협조하겠다고 했었다. 당시 북한 주재 소련대사가 소련 내각회의 의장에게 보낸 ‘남북 조선의 정치경제 상황 개요’라는 제목의 보고에 따르면 제주도에는 경찰, 선발된 정규군 병력까지 동원되었고, 국방부, 내무부 장관, 총리, 이승만의 방문까지 이루어졌으며, 유격대 진압전은 사실상 미군 장교들의 지휘 아래 이루어졌다고 지적하였다(<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주재 소련대사가 소련 내각회의 의장에게 보낸 보고, 남북 조선의 정치 경제 상황 개요, 1949년 9월 15일>, 《한국전쟁, 문서와 자료, 1950~53년》, 국사편찬위원회, 2006, 34~35쪽).

 

21) “섬(제주도)의 다른 두 사제들은 아직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하는데, 이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교회와 역사》 408(2009. 5).

 

22) 이승만 정권과 천주교는 1950년 보도연맹사건, 1951년 국민방위군사건, 1952년 거창 양민학살사건 등을 거치면서 대립 갈등의 관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천주교는 이 정권의 도덕성을 비판하고 나섰으며, 이 정권은 천주교에 대한 테러와 압력을 가해왔던 것이다(노길명, <광복 이후 한국 종교와 정치 간의 관계>, 《한국의 종교운동》,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5, 244쪽). 그런데 이러한 관계의 악화는 이미 캐롤 몬시뇰이 적극 개입하던 4 · 3사건 무렵부터 시작되었으리라고 짐작된다.

 

23) 메리놀회와 골롬반회의 협조와 때로의 갈등에 대해서는 다른 글을 통해 다루고자 한다.

 

24) 빌링스 브리스(Billings, Bliss W, 1881. 1. 7~1969. 3. 8). 미국 감리교회 소속 선교사. 유니온 신학교 대학원과 콜롬비아 대학원을 졸업한 뒤 해외 선교를 자원, 1908년 한국에 왔다. 평양 숭실대학교 교수, 광성학교 교장, 연희전문학교 교수, 감리교 신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0년 감리교 신학교가 친미 경향과 민주 사상이 짙다는 이유로 무기한 휴교당하고 그도 추방되어 필리핀 마닐라로 가서 선교 활동을 폈다. 필리핀이 점령된 뒤 1942년 체포되어 3년 동안 옥고를 치른 뒤 1945년 일본 패전으로 풀려났다. 다시 한국으로 와 기독교 세계봉사회의 한국 관리자로 임명되어 구호 사업에 헌신하였다. 캐롤 신부와 손잡은 것은 이 무렵이었다. 1948년에 미국으로 돌아가 1953년 정년으로 은퇴한 뒤 1969년 별세하였다(윤춘병, 《한국감리교회 외국인선교사》, 감리교본부 교육국, 1989 ; 장광영, 《한국감리교 인물사전》, 기독교 대한감리회, 2002).

 

25)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한편으로는 미국, 캐나다, 영국 등의 원조 기관이 1950년부터 부산에 도착하여 긴급구호 활동에 나섰다. 그러던 중 1952년에 7개 기관이 모여 ‘외국 민간 원조 기관 한국연합회’(KAVA)가 발족되었으며, 2년 뒤인 1954년에 한미재단으로부터 2만 5천 달러의 기증금을 받아 재정적인 안정을 얻었고, 1955년에는 사무국을 두어 비로소 연합회로서의 성격을 갖추게 되었다. 그 뒤 1964년에 이르러 카바의 회원단체는 70여 기관으로 늘어났다. 여기에는 선교 활동과 더불어 교육 구호 사회 복지 등의 분야에 활동을 전개하거나, 교육 보건 사회 복지 구호, 그리고 지역 사회 개발 사업 등에 직접적인 관련을 맺은 단체 등이 소속되어 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캐롤 몬시뇰이 책임을 맡고 있던 가톨릭구제회(CRS : Catholic Relief Services)도 여기에 참여하여 활동을 전개하였다. 캐롤 몬시뇰과 KAVA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메리놀문서 No.9-R2 F6 2 390 참조.

 

26)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30년사》, 2006, 43쪽 참조.

 

27) 정진아,  《미국소재 한국사자료 조사보고 IV》, 국사편찬위원회, 특히 489~490쪽 참조.

 

28) 이는 1952년 4월 14일 스탈린이 당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주재 소련대사를 통해 전달한 문서의 일부이다(《한국전쟁, 문서와 자료, 1950~53년》, 국사편찬위원회, 2006, 267~268쪽). 소련은 전투 장비와 무기의 공급, 북한과 중국 동북 지역의 주요 행정, 경제, 산업 시설들에 대한 대공 방어, 북한군과 중공군 각 부대에서 군사 고문관 및 전문가 활동 등을 지원하였다(위의 책, 806쪽).

 

29) 위의 책, 268~269쪽.

 

30) 1950년 11월 1일에 올린 보고서, 《교회와 역사》 411(2009. 8), 34~36쪽.

 

31) 《경향잡지》, 1973년 8월호.

 

32)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1940년대편》, 인물과 사상사, 2004, 191쪽과 거기에 소개된 연구들 참조.

 

33) 메리놀 문서 No.9-R2 F6 2 411.

 

34) 1952년 가을 부산의 상이군인들이 일제히 일어나 열차를 탈취한 뒤 왜관으로 몰려가려고 부산역에 집결했었다. 이들은 경부선 철도의 운행을 막으며 열차를 내달라고 격렬한 항의 시위를 벌였다. 개괄적 설명과 관련 참고문헌은 강준만, 위의 책, 296~297쪽 참조.

 

35) 메리놀 문서 No.9-R2 F6 2 411.

 

36) 메리놀 문서 No. 47 9 0603.

 

37) 메리놀 문서 가운데 이 무렵 부산에서의 일기에 따르면 1951년 7~8월에 장면 총리가 집을 방문, 캐롤 몬시뇰과 함께 점심을 나누는 등의 기록이 있다. 부산에서 장면 총리와 노기남 주교, 캐롤 몬시뇰, 그리고 무초 주한미대사, 그 밖에 여러 신부들은 긴밀한 교류를 맺고 있었다. 이러한 내용에 관해서는 앞으로 보다 상세히 다룰 예정이다. 뒷날 4 19 혁명 직후에 이승만은, “이 모든 사태는 장 부통령과 노 주교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고 천주교 세력을 선동해 일어난 것”이라는 불만을 터트릴 정도로 이승만의 가톨릭계 인사에 대한 불만은 높았다(이용원, 《제2공화국과 장면》, 범우사, 1999, 115~116쪽 ; 노길명, <광복이후 한국 종교와 정치 간의 관계>, 《한국의 종교운동》,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5, 244쪽 등 참고).

 

38) 1952년 8월 1일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유엔대사 임병직에게 보낸 서한(이승만관계서한자료집, 국사편찬위원회 D/B).

 

39) 코넬리 신부는 메리놀회와 달리 골롬반회는 이러한 문제로 거론되지 않고 있다고 하였다.

 

40) 국사편찬위원회의 이승만서한철 D/B에 1955년 9월 19일자 이승만 대통령이 임병직 대사에게 보낸 서신을 보면 이 예정대로 의약품이 들어와 메리놀 수녀회 병원을 비롯한 가톨릭 구호조직으로 전달될 예정인데, 시간이 조금 지체되고 있다.

 

41) 임 대사의 편지에 따르면 “이 조직체가 암시장이나 다른 비인가 상인의 손에 이러한 구호물품이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자체적으로 안전 요원을 갖고 있는 점을 이해한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로 미루어 구호물품의 관리와 보급과 관련해 캐롤 몬시뇰은 가톨릭구제회 책임자로서 현실적인 세력도 보유하고 있었다고 짐작된다.

 

42) 몬시뇰과 이승만과는 더욱 관계가 악화되었다. 그런데 몬시뇰만이 아니라 당시 가톨릭교회와 이승만과의 괴리에 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교회의 반독재 투쟁이 이승만의 독재 정치에 대한 분노와 정의감 때문은 아니었다거나, 장면에게 영향력을 미쳐 가톨릭적 이상 국가를 실현해 보려 했던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등의 해석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노길명이 지적한 것처럼 교회는 이승만 정권의 도덕성 자체를 문제삼기 시작한 것이며, 이승만의 독재 체제가 더욱 강화되자 적극적으로 반독재 투쟁에 나섰던 것이다(노길명, 2005, 앞의 책, 특히 165~166쪽 참조). 캐롤 몬시뇰의 문서를 비롯한 당시 메리놀회의 문서를 검토해 보아도 ‘한국에 과연 민주주의가 있는가?’라는 등 이승만의 독재에 대해 매우 강력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 문제는 앞으로 보다 깊이 검토해 볼 예정이다.

 

[교회사 연구 제34집, 2010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최선혜(서강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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