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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식민지시대 말기 조선 천주교회와 총독부의 종교 통제: 노기남 주교의 대응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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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06 ㅣ No.817

식민지시대 말기 조선 천주교회와 총독부의 종교 통제 - 노기남 주교의 대응을 중심으로

 

 

1. 머리말

 

최초의 한국인 주교였던 盧基南은 한국 가톨릭 자립화와 토착화의 기틀을 다진 한국 가톨릭의 代父1) 또는 가장 변화가 많았던 고난의 시기에 한국 천주교회를 이끌어 나간 한국 천주교회의 代父2)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는 한국사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태어나 천주교회의 사제로서, 지도자로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그가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간에 최초의 한국인 교구장3)이자 주교가 되면서부터, 그는 단순히 ‘많은 사제들 가운데 한 명의 사제’가 아니라 식민지 조선의 천주교회를 상징하고, 더 나아가 식민지 조선인들의 지도자들 가운데 한 명으로 자리매김 되면서, 고난과 오욕이 자욱한 역사의 행로 한가운데에 우뚝 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하였기 때문에 이 시기의 그에 대한 평가가 마냥 긍정적일 수는 없었다. 식민지시대 말기의 천주교회를 다룬 이제까지의 연구들은 대체로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조선 천주교회’ 또는 ‘노기남’이라는 창을 통하여 식민지시대의 민족 문제를 살피고 있다.4) 더 나아가 當爲論 또는 是非論의 입장에서 천주교회와 노기남 주교의 활동을 “비교역사적”으로 다루기도 하였다.5) 심지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노기남 대주교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하기조차 하였다.6)

 

이러한 평가들은 - 비록 그러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는지는 몰라도 - 하나같이 ‘民族’을 절대시하여 “도덕적 심판의 준거이자 역사적 판단의 잣대”7)로 삼았던 결과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런데 하나의 ‘민족’ 안에도 각각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여러 인간 집단들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 또는 ‘민족적 가치’가 그 민족을 이루고 있는 모든 인간 집단의 생각과 행위를 재단하는 절대적인 잣대가 될 수는 없다. 다만 동일한 정치 · 문화 · 역사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공통분모를 규정하고 가늠하는 잣대로서는 유용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식민지시대 말기의 노기남 주교와 천주교회에 관한 많지 않은 이제까지의 연구에서는 노기남 주교와 조선 천주교회의 입장이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루어진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에 이 글에서는 식민지시대 말기의 전시통제체제 아래에서 노기남 주교와 그의 활동을 당시 천주교회가 처한 입장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민족주의적 관점 - 특히 ‘運動論’으로서의 민족주의 입장 - 에 얽매이지 않고, 노기남 주교를 통하여 천주교회가 조선 총독부의 전시통제정책에 어떻게 대응하였는지에 대한 한 단면을 밝혀볼 생각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시의 ‘한국 민족’ -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식민지 조선인’ -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던 천주교인들과 그들의 교회가 흔히 ‘일제’라 불리는 외부의 강압적 간섭과 통제에 어떻게 대응했으며, 어떤 방식으로 ‘자기 정체성’을 지켜나가고자 했는지에 대한 이해의 편린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한다.8)

 

 

2. 노기남 주교와 조선 총독부의 신학교 폐쇄 시도

 

노기남 주교9)의 서울 교구장 착좌 및 주교 수품이 가지는 의의는 1942년 12월 20일 주교 서품식이 끝난 뒤 준비위원장이었던 張勉 동성상업학교장이 감격에 겨워 준비위원들과 지방 대표자들에게 “우리도 이제는 우리 주교를 가졌습니다”10)라고 한 발언에 잘 드러나 있다. 명실상부한 ‘조선인들의 천주교회’가 출범한 것, 즉 조선 천주교회의 진정한 자립화 · 토착화를 향한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인식하였다.

 

그렇지만 노기남 주교는 자신이 얼마나 힘든 상황 가운데에서 교구장이 되었는지를,11) 그리고 그것이 조선 총독부의 의도와 완전히 달랐음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또한 새 교구장이 된 자신이 교구 행정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황국신민화 운동에 어떻게 부응하는지에 대해 감시하고 있다는 것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12) 말하자면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따라 조선 천주교회의 운명이 좌우될 수 있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하였기 때문에 그는 아래의 교구장 서품식 답사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을 의식하여 신자들에게 조선 총독부의 시책에 아무런 말 없이 협력할 것을 요구하였다.

 

 

조선 총독부의 전시동원정책을 수행하기 힘들고 어렵다고 하여 “공연한 비판이나 한탄”을 드러내 놓고 함으로써 그들에게 빌미가 잡혀 교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장애가 되지 말라고 당부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공개적인 발언에서 노기남 주교는 조선 총독부의 황국신민화정책에 협조하는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조선인들의 교회’를 유지 · 발전시키기 위하여 ‘충량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열심한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 ‘열심한 가톨릭 신자로서의 충량한 황국신민’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만큼 천주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먼저 내세웠던 것이다.14)

 

이처럼 표면상으로 일본 정부와 조선 총독부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따를 것을 천명하였고, 교구장으로 착좌한 직후에는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과 경기도지사, 헌병 사령관을 차례로 찾아가 굴욕적인 대접을 받으면서도 취임 인사를 하였다.15) 그들이 천주교회에 위해를 가할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서 그와 같은 굴욕을 감내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기남 주교가 서울 교구장으로 착좌한 뒤 평양 · 춘천  교구장 취임식과 양 교구의 인사 배치를 끝내고 세 교구의 관리 실무를 다루게 되자 여러 가지 난관은 꼬리를 물고 그를 괴롭혔다.

 

그 가운데 첫 번째로 당한 가장 커다란 어려움은 신학교 문제였다. 극비리에 추진된 노기남 신부의 서울 교구장 임명 사실이 1942년 1월 12일 전격적으로 발표되자, 조선 천주교를 대표하는 서울교구에 프랑스인 교구장 대신에 일본인 교구장을 앉힐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일본 정부와 조선 총독부는 충격을 받고는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렇지만 종교 자유에 대한 침해라는 명분 때문에 일단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당시 대다수의 조선인 성직자들은 조선 총독부의 방침에 따라 創氏改名을 하였는데, 교황청에서 임명한 조선인 교구장을 일본인으로 바꾼다는 것은 자신들이 내세운 內鮮一體의 명분에도 어긋나는 일이었다.16) 대신에 총독부는 천주교회를 압박하고 통제하기 위해 미인가 상태로 있던 용산 신학교를 폐쇄시키고자 하였다.

 

천주교회가 그동안 신학교를 인가받지 않은 상태로 두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일제의 간섭을 배제하면서 신학교의 특성에 맞게 자유로이 교육을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현실적으로 신학교의 운영에서 ‘順便하고 유리’함을 취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교회가 신학교의 설치ㆍ운영을 위해 총독부로부터 인가를 받지 않은 것은 신학교로서의 자유로운 교육을 지향하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조선 총독부는 이러한 사정을 빌미삼아 신학교의 폐교 조치를 통보함으로써 자신들의 의도와 어긋나게 조선인 신부가 교구장이 된 천주교회를 한층 강하게 압박하여 통제하고자 했던 것이다.17) 게다가 신학 교육에 일반 대학의 교육과정을 전혀 병행시키지 않았던 점도 문제가 되었다.18)

 

그리하여 조선 총독부 학무국은 1942년 2월 16일 조선의 모든 무허가 학교는 폐쇄하며, 따라서 용산에 있는 예수성심신학교는 아무런 허가도 없는 학교이므로 즉각 폐교시킨다는 내용이 담긴 통고문을 노기남 주교에게 보냈다.19) 조선 총독부가 이러한 조치를 취한 배경에 대해서는 다음의 기록이 참고된다.

 

(노기남 주교가 서울 교구장에 임명되자 : 필자 주) 총독부에서는 청천벽력이다. 일본 정부에 무엇이라고 변명을 할지 몰라 야단이 났었다. 교수회의20)를 하고 연구해 낸 것이 신학교 폐쇄다. 주교에는 실패했지만 교회의 제일 타격을 줄 수 있는 것은 신부를 길러내는 신학교이다. 신학교가 없으면 신부가 없고, 목자가 없으면 교우들은 흩어지기 마련인데, 요행히도 신학교는 인가 없는 학교이니 폐쇄시키고 이유가 충분하다는 계산이 선 것이다. 노 주교님이 성성식을 가지신 지 한 달도 못되어서 일어난 사건이니 보복을 위한 처사임이 분명하였다(장금구 신부, <제1차 개혁>, 《사목 반세기》, 74쪽).21)

 

이에 노기남 주교는 즉각 교구 평의회를 소집하여 대책을 논의한 결과, 우선 대신학교를 혜화동의 소신학교(동성상업학교 乙組)와 통합하기로 하고 학무국에 보고하였다. 그러나 학무국에서는 대신학교 학생들은 동성상업학교 학생들이 아니므로 해산시키라고 압박하였다. 다시 총독부 학무국장 엄창섭을 통해 알아본 결과 총독부는 대신학교 학생들을 해산시키고, 대신학교 건물을 군대용으로 징발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서울교구를 책임지고 있는 노기남 주교의 입장에서는 대신학교 학생들을 해산시킬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대신학교 건물을 일본 군대에 징발당할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교구 평의회의 토의 과정을 거쳐 대신학교 학생들은 덕원 신학교로 전학시키고, 대신학교 건물에는 성모병원의 분원을 개원하기로 결정하고는 총독부 학무국에 이 내용을 통지하였다.

 

당시 덕원 신학교는 총독부의 허가를 받은 전문학교였으므로 폐쇄 대상이 아니었다. 거기에다가 당시 일본ㆍ이탈리아와 함께 추축국이었던 독일의 성 베네딕도 오틸리엔 연합회가 운영하는 학교였다. 이런 사정 때문에 노기남 주교가 베네딕도회의 양해를 구한 다음 대신학교 학생들을 덕원 신학교로 전학시키고, 대신학교 건물의 2층은 라리보 주교와 지방에서의 전교활동을 금지당한 프랑스인 신부들의 숙소로 이용하며, 1층에는 성모병원 분원을 개설하겠다는 결정에 대해 학무국으로서도 막을 수 없었다.22) 이처럼 노기남 주교는 조선 총독부의 정책에 마냥 순응하였던 것이 아니라 당시의 강압적인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천주교회의 존속을 위해 최선을 다하여 묘책을 짜내고, 차선책이라도 찾아서 어떻게 하든지 간에 조선 천주교회의 정체성을 유지해 나가고자 하였다.

 

용산의 대신학교가 폐쇄된 뒤에도 소신학교 졸업생들은 계속 배출되었지만, 덕원의 대신학교도 이미 정원을 훨씬 초과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이곳으로 진학시킬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소신학교 교장 신인식 신부는 졸업생들을 소신학교 기숙사에 그대로 머무르게 하면서 비밀리에 철학반을 운영하였지만, 배급 식량의 부족 등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노기남 주교와 신인식 신부는 대신학교 인가를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선 총독부는 천주교회의 이러한 요청에 비협조로 일관하였다. 당시 그리스도교는 ‘적성종교’로 몰려 교회 활동과 신자들의 신앙생활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므로 이러한 시도는 사실 성공하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학무국장 엄창섭의 협조로 우여곡절 끝에 1945년 2월 23일 專門學校令에 의한 雜種學校로 대신학교 설립 인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이때 인가된 학교의 명칭은 ‘京城天主公敎神學校’였으며, 중등 교육과정과 고등 교육과정으로 이루어진 12년제 학교였다. 노기남 주교는 莊金龜 신부를 초대 교장으로 임명한 뒤, 1945년 5월 1일 개교식을 거행하였다.23)

 

 

3. 노기남 주교와 신사 참배

 

조선 천주교회는 1926년 11월 15일 《천주교요리》를 공식 문답으로 반포하여 신사 참배 불가를 공식적으로 규정하였다. 서울뿐만 아니라 대구 · 원산 교구에서도 조선 총독부의 신사 참배 요구를 거부하였다.24) 그렇지만 1931년 이른바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본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식민지 조선도 전쟁의 소용돌이로 휘말려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國體明徵’을 내세워 식민지 조선에서도 신사 참배를 본격적으로 강요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주교회가 신사 참배를 계속 반대하면 교회의 존립에 심대한 위협을 초래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였다.

 

마침내 주일 교황 사절이 참석한 가운데 1935년 9월 4일부터 6일까지 평양에서 연례 교구장회의가 개최되었으며, 거기에서 신사 참배를 허용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는 1936년 4월 《경향잡지》를 통해 천주교 신자들의 신사 참배를 공식적으로 허용하였다. 그리고 5월 26일에는 신사 참배는 종교 행사가 아니라 애국적 행사이므로 허용한다는 포교성의 훈령이 발표되었으며, 6월 12일 대구에서 개최된 교구장 회합에서 1932년판 《한국 교회 공동 지도서》의 신사 참배 부분을 수정하여 애국심의 표현인 경우에는 神社에서의 예식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이후 어떤 성직자나 신자들도 - 물론 예외적인 경우가 없지는 않았지만 - 공식적인 신사 참배에 대한 논쟁이 허용되지 않았다.25)

 

더욱이 조선 총독부는 1938년부터 국민정신 총동원운동을 추진하면서 식민지 조선의 모든 구성원들과 단체들을 강압적인 방법으로 전시동원체제에 편입시켜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천주교회 역시 거기에 어떠한 정면 대응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빠졌으며, 따라서 신사 참배는 ‘황국신민으로서의 당연한 의무’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다. 신사 참배를 거부한다는 것은 당시 일본의 ‘國體’를 부정하는 행위26)였기 때문에 식민지 조선인으로서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파괴를 각오하지 않는 한 그렇게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실제로 그 무렵의 조선 천주교회는 일본의 신사 참배 강요를 거부할 힘이나 명분이 있었을 것 같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만일 신사 참배를 거부한다면, 교회의 존립은 순식간에 풍전등화의 위기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애국’을 내세운 국가 의례일 뿐이라는 일본 정부의 명분을 받아들여 현실적인 차원에서 타협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여겨진다.27)

 

노기남 주교가 교구장으로 취임한 뒤 “두 번째로 당한 난관”이 바로 이러한 神社參拜 문제였다.28) 당시의 총독부 정책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신사 참배를 국민의 의무로 강요하였다. 특히 각 단체의 책임자는 각자 소속 단원에게 신사참배를 독려하는 동시에 단체장 자신이 매월 첫날에 소속 단원을 인솔하여 남산에 있는 朝鮮 神宮에 참배하되, 먼저 신궁 현관에서 참배자 명부에 서명하고, 또 참배자의 수를 기록해야만 하였다.

 

조선 천주교회가 이미 신사 참배를 허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주교관에는 “신사 참배는 우상 숭배가 아니냐?”는 지방 신자들의 문의 편지가 적지 않게 배달되는 형편이었다.29) 노기남 주교로서도 이러한 사정을 마냥 그대로 둘 수만은 없었다. 그리하여 교황청의 지시를 받고자 동경 주재 교황 사절을 통해 로마로 상신을 했으나, 즉시 회답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일본 동경 주재 교황사절에게 보다 확실한 지시를 받고, 아울러 일본의 천주교회 당국자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가 알아보기 위해 1942년 3월 29일부터 4월 10일 사이에 직접 일본을 방문하여 교황 사절에 이 문제에 대한 지시를 요청했을 뿐만 아니라 동경의 도이(土井) 대주교에게도 문의하였다.

 

그런데 이미 교황청이 천주교 신자들의 종교 자유를 존중하여 신사 참배를 강요하지 말 것을 엄숙히 요망한다는 내용의 항의문을 일본 정부에 보냈고, 이에 일본 정부는 문교부 장관 명의로 신사 참배는 종교 의식이 아니라 천황에 대한 국민적 예의이자 충성심의 표시이므로 신앙의 자유에 저촉 없이 행하는 국민 의례라고 통보하였다. 그리하여 교황청은 종교 의식이 아닌 국민 의례이므로 신사 참배를 해도 무방하다고 일본 주재 교황 사절에게 지시했고, 교황 사절은 일본과 한국의 모든 주교들에게 교황청 지시를 전달하였다. 따라서 노기남 주교도 “필요한 때에 신앙의 아무 가책 없이 참배했으며, 신자들에게도 이를 허락하였다.”30)

 

이와 같이 일본의 신사 참배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노기남 주교는 여러 차례에 걸쳐 일본 경찰에게 참기 어려운 모욕을 받아야만 하였다. 특히 지방을 순시할 때 더욱 그러하였다. 노기남 주교가 지방 순시를 떠날 때에는 적어도 한 달 전에 총독부 치안국에 지방 순시 일정을 보고해야만 하였고, 치안국은 그 사실을 해당 지방 경찰서에 연락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그가 어느 곳에 가든지 이미 2~3명의 고등계 형사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그곳을 떠나는 날까지 잠시도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경찰과의 충돌을 피하고 순시를 무난히 하기 위해 어느 지방에 가든지 먼저 신사에 가서 참배하고, 경찰서장 · 군수 등을 예방한 다음에 성당을 찾아가야 했다. 그리고 성당에 가서도 신자들을 국기 게양대 앞에 도열시켜 국기 게양과 국민의례를 하고, 신자들에게 황국신민화 운동에 대한 훈화를 해야만 했다. 이러한 “귀찮고 까다로운, 또 마음에 없는 형식적 절차”를 거친 다음에 비로소 성당에 들어가 기도하고 신자들에게 강론과 강복을 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절차가 틀리든지, 신자들이 ‘황국신민의 서사’나 ‘기미가요’를 잘 부르지 못하면, 경찰관은 노기남 주교나 그곳 주임 신부를 문책하였다.

 

그런데 노기남 주교는 일본어가 유창하지 못하여 ‘황국신민의 서사’를 선창할 때나 ‘기미가요’를 노래할 때 그렇게 좋은 일본어 실력이 아니었고, 신자들에게 훈화를 할 때도 조선말로 했다. 이 때문에 감시하던 형사가 일본어를 모를 리 없는데 ‘國語’(일본어)를 쓰지 않고 ‘기미가요’ 봉창이나 ‘황국신민의 서사’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트집을 잡으면서, 황국신민화 운동에 성의가 없다고 주임 신부를 통해 주의를 주는 경우도 많았다.31)

 

실제로 그가 1930년 무렵 종현 본당 보좌 신부로 계성보통학교의 운영을 맡았을 때 당시 학교 안에서도 일본어 사용이 이미 관례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어가 서툰 그는 조회 시간에 취임 인사를 ‘조선말’로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도 신학교 시절 일본어를 배우기는 했다. 그러나 일본어 회화를 습득하지 못해 일본어를 말하는 데 부자연스러웠기 때문이었지만, 그 자신이 스스로 밝혔듯이 “일본말을 공공연히 쓰기 싫은 생리” 때문이기도 하였다.32) 이렇듯 일본어 소통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총독부의 관리들과는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지방의 관리들과도 긴밀하거나 원만한 관계를 맺기 어려웠을 것이다.

 

급기야는 1942년 10월 28일 오전 6시 공주 본당에서 견진성사와 미사를 집전할 때, 그때까지 오겠다는 고등계 형사가 10분이 지나도록 도착하지 않아서 노기남 주교는 신자들과 ‘기미가요’ 봉창과 ‘황국신민의 서사’와 간단한 훈시로 국민 의례를 마치고 성당으로 들어가 미사를 드렸다. 그런 다음 견진성사를 베풀고 있을 때 형사가 나타나 행사의 중지를 명령했으나, 노기남 주교는 이를 무시하고 모든 예절을 끝냈다. 그러자 형사는 자신을 무시했다고 노기남 주교를 경찰서로 연행하였고, 거기에서도 경찰서장 등으로부터 충남 순시를 중지하고 서울로 돌아가라고 갖은 욕설과 협박을 받았다.33)

 

심지어 1943년 10월 25일부터 11월 10일까지 황해도 일대를 순시 도중 10월 30일 송화 본당의 회장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다가 불빛이 새어나가 순사로부터 봉변을 당했으며, 다음 날 미사 도중 방공 연습 사이렌이 울렸으나, 밖으로 나가지 않고 제의실에 있다가 순사로부터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34) 물론 천주교회만 그러하지는 않았겠지만,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당시 조선 총독부의 전시통제체제 아래에서 천주교회와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처한 상황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비록 조선 총독부의 강압적인 강요로 그들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표면상으로는 충실히 부응할 수밖에 없었지만, 진정한 협력은 아니었다. 이와 관련하여 노기남 주교가 梁德煥35) · 林忠信 신부와 황해도 사리원 본당을 방문했을 때의 한 장면이 주목된다.

 

사리원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즉시 사리원 신사에 가서 참배하였는데, 나와 박 신부36)는 앞줄에 서고, 임 신부와 양 신부가 뒷줄에 섰다. 나와 박 신부가 최고 경례로 배례하면 뒷줄의 두 신부는 같이 배례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내가 먼저 90도 경례를 하기 위해 자세를 바로 할 무렵 옆에 차렷 자세로 서 있던 박 신부가 신사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손뼉을 딱딱딱 세 번 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일본인들이 정식으로 신사참배 할 때 하는 식이었다. 손뼉을 안치고 그저 경례만 해도 되는 법이었고, 한국 사람들은 보통 손뼉을 치지 않고 경례만 하였다. … 두 신부는 웃음을 참지 못해 킥킥거리며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나도 속으로 웃음을 억지로 참고 있으면서도 두 신부의 웃음이 민망스러웠다. 왜냐하면 신사 현관에서는 신사 제관들이 우리의 태도를 주시하고 있는데, 만일 그들이 신부들의 웃음소리를 들었다면 우리들을 불경죄로 견책하고 당국에 보고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문제는 중대화되고, 내가 최후 책임을 져야 될 것이니 마음이 매우 불안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어 그저 박 신부의 하는 대로 같이 경례를 하고, 현관 앞으로 와서 참배자 명부에 서명하고 신사를 떠나 왔다. 그런데 현관에 있던 제관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37)

 

성당에서의 미사 집전에 앞서 신사 참배를 비롯한 국민의례를 먼저 엄숙하게 거행해야만 하는 상황에서도 이들은 이처럼 풍자성이 짙은 방식으로 대응하였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방식을 비웃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을 안심시켜 성당에서의 종교 활동을 원활하게 수행하고자 했던 것이다. 신사 밖으로 나온 뒤 양덕환 · 임충신 신부가 박우철 신부의 “능청스런 장난”을 탓하면서 다시는 그러한 “허식의 정성”을 그만두라고 하자, 박우철 신부가 “누구는 좋아서 그렇게 했나. 그래야만 저자들의 의혹을 안사고 우리 일에 지장이 없을 것을 생각해서 그리 한 거야”38)라고 대답한 데에서 이러한 의도를 잘 엿볼 수 있다.

 

일본 경찰은 심지어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간주되는 ‘고해성사’까지 입회하여 감시하고자 했다. 노기남 주교의 요청으로 독일 출신의 사우어 주교까지 달려왔으나 막지 못하였고, 총독부는 오히려 ‘교회 폐쇄’를 위협하며 강요하였다. 결국 그들의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대신 신자들에게 형사가 엿듣는다는 점을 귀띔해서 구체적인 사실을 고해하지 않도록 조치함으로써39) 천주교회의 정체성을 근근이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4. 노기남 주교와 조선 총독부의 전시 동원

 

일본은 1937년 7월 중일 전쟁을 일으키면서 전면적인 전시체제로 전환하였다. 이듬해 공포된 ‘국가총동원법’을 식민지 조선에도 적용시켜 인적 · 물적 자원을 본격적으로 수탈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내선일체 · 황국신민화를 내세워 식민지 조선인들을 전쟁에 동원하였으며, 한반도를 그들의 대륙병참기지로 삼았다. 그리고 1938년에는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을 설립하여 식민지 조선인들을 그들의 전쟁 수행을 위한 도구로 조직화하기 시작하였다.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에 소속된 59개의 단체 가운데 25개가 조선인 단체였으며, 그 가운데 10개가 천주교 · 천도교 · 유교 · 개신교 등의 종교단체였다. 천주교회가 여기에 참여하게 된 것은 조선 총독부의 거듭된 요구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에 앞서 교회는 이미 ‘나라’(일본)에 충성을 요구하는 교서를 발표하였다.40) 교회를 식민지 통치정책에 협조하는 단체로 통제하려는 조선 총독부의 강압에 의한 결과였을 것으로 보인다.

 

서울교구는 1939년 5월 14일 종교단체로서는 가장 먼저 ‘국민정신 총동원 천주교경성교구연맹’을 개별 총동원연맹으로 조직하였다. 이때 이사로 선임된 노기남 신부는 이사장 라리보 주교를 대신하여 총동원운동 관련 각종 회의에 참석하였고, 서울교구의 40여 본당을 순회하며 조선 총독부가 요구하는 내용을 강연하였다.41) 물론 천주교회만 그러했던 것이 아니라 식민지 조선의 모든 종교단체가 총독부의 강압적인 총동원정책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천도교는 1939년 6월 11일, 유교는 10월 16일에 각각 총동원연맹을 조직하였다. 장로회는 1939년 9월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결성하고 일제의 국책 수행에 협력할 것을 다짐하였으며, 이러한 협력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이듬해에는 ‘총회중앙상치위원회’를 조직하였다.42)

 

식민지 조선에서의 총동원운동은 일본과는 달리 처음부터 행정조직과 일원화되어 있었다. 민간단체인 총동원연맹이 주도하는 형식을 취하기는 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총독부가 조종하는 관제운동이었다. 그런데 일본이 기대했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여러 가지 문제점이 노출되자, 1940년 10월에 ‘국민총력 조선연맹’을 조직하여 ‘국민총력운동’으로 전환시켰다. 그리고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 때와는 달리 조선 총독과 정무총감이 총재와 부총재에 취임함으로써 민간운동으로서의 형식적 성격조차도 배제되고 말았다.43)

 

이에 따라 국민정신 총동원 천주교경성교구연맹도 1940년 11월 10일 노기남 신부를 이사장으로 하는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으로 개편하였고,44) 23일 회의를 개최하여 각 지방 교회의 연맹 조직, 성탄 때 시국에 관한 강연회나 영화회 주최, 매월 첫 번째 일요일을 ‘교회 애국일’로 정하여 애국일 예식 거행, 신사 참배 실시, ‘국민서사’의 보급 등을 결의하였다.45) 이에 따라 서울교구의 각 교회는 모두 총력연맹을 결성하였고, 각 교회연맹에는 애국반이 조직되어 모든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동원체제가 갖추어졌다.46) 노기남 신부가 1942년 1월 12일 서울 교구장으로 임명되고 춘천교구와 평양교구의 교구장도 겸임하게 되면서 6월에 南相哲이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의 새 이사장으로 선임되었다. 이로써 노기남 주교는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의 회장으로 대내적인 사무를 총괄하고, 대외적인 사무는 남상철이 맡기로 역할을 분담하였다.47)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으로 개편한 후 천주교회의 ‘전시동원 협력’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경향잡지》에는 1941년 2월부터 ‘일본에 대한 충성’과 ‘황국신민으로서의 의무’를 강조하기 위한’ <국민총력>란을 마련하여 매달 정기적으로 총력연맹의 실천 사항을 수록함으로써 조선 총독부의 전시동원정책에 협력하였다.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은 1941년 2월부터 “특별히 국가를 위해 기구하고 국가에 봉사하려는 신념을 새롭게” 하고자 ‘교회 애국일’을 정하여 ‘애국식’을 거행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군기를 헌납하기로 하고 매월 한 사람이 1전씩 납부하도록 하였다.48)

 

이러한 전시동원에 대한 협력 요구는 천주교회와 천주교 신자들에게만 요구된 것이 아니라 식민지 조선의 모든 단체와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된 것이었다. 그리고 대다수의 식민지 조선인이나 천주교회 등과 같은 각급 단체가 ‘자발적이고도 적극적인 협력’을 한 것이 아니라 조선 총독부의 식민지 조선에 대한 인적 · 물적 자원의 수탈 요구가 더욱 심해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응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하지 않을까 한다. 말하자면 ‘자발적이고도 적극적인 협력’이 아니라 조선 총독부의 강압적인 강요에 의한 ‘타율적인 협력’이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을 때 천주교회가 충성을 맹세한 것도 마찬가지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941년 12월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천주교회는 충성을 맹세하였다.49) 이어 서울교구 주최로 ‘천주교우 결전대회’를 개최하여 전승 기원 성체강복식과 대동아 전쟁에 관한 강연회를 한 후 조선 신궁에 참배하였다.50) 또한 노기남 주교는 전선 장병들의 무운과 銃後를 지키는 이들의 一死報國의 결심과 용기를 크게 일으켜 대동아의 영원한 평화를 확립하게 하고, 세계가 평화로운 가운데 하느님의 성명을 찬미하게 해달라는 ‘대동아 전쟁 기구문’을 작성하여 각 본당에 배포하였다.51) 그렇지만 이 기도문은 사람들에게 전쟁 혐오사상을 심어줄 수 있다고 판단한 총독부 경무국에 의해 바로 회수당하고 말았다.52)

 

또한 1942년 5월 5일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 총회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에게 “일본정신의 앙양”과 “완전 황민화를 촉진”시키기 위하여 일본어의 완전한 습득과 지원병 모집 등에 노력하자고 결의하였다.53) 이에 따라 각 본당은 교구의 권고에 맞추어 ‘국어 강습회’를 개최하기 시작하였다.54) 1943년 2월부터 조선 청년들에게도 징병제가 실시되자, 남상철 이사장과 신인식 신부는 징병의 취지를 알리는 강연회에서 강사로 참여하기도 했다.55) 1943년 11월에는 학도병 독려를 위해 종교단체가 연합하여 ‘조선종교전시보국회’를 조직하였는데, 11명의 대표위원 가운데 천주교회에서는 노기남 주교와 김한수가 참여하였다.56)

 

이처럼 식민지시대 말기의 급박한 전시체제 아래에서 조선 천주교회가 조선 총독부의 정책을 어쩔 수 없이 동의하고 이행하였던 것은 천주교회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협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협조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성직자 · 신자들은 교회 활동과 신앙생활을 공개적으로 계속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사정을 감안한다면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전쟁을 옹호하고 후원함으로써 교회와 신자들의 신앙을 변질시키고 교세를 침체 · 퇴보시킨 것57)이 아니라, 교회는 그처럼 갖은 고초를 겪어내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해 나가고자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폭압적인 지배 아래에서 시달리면서 노골적으로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던 ‘식민지 조선인’이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의 강압적인 간섭과 통제에 어떻게 ‘굴욕적인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한 단면을 보여 주는 것이라 여겨진다.58)

 

 

5. 맺는말

 

이제까지 식민지시대 말기의 전시통제체제 아래에서 노기남 주교와 그의 활동을 통하여 천주교회가 조선 총독부의 전시통제정책에 어떻게 대응하였는지에 대한 한 단면을 살펴보았다. 특히 ‘현재적 입장’이나 ‘당위론적 입장’이 강하게 반영된 민족주의적 관점에 얽매이지 않고, 당시의 천주교회가 당면한 현실에서 조선 총독부의 강압적인 전시통제정책에 어떻게 대응하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식민지 조선인’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던 천주교인들과 그들의 교회가 흔히 ‘일제’라 불리는 외부의 강압적 간섭과 통제에 어떻게 대응했으며, 어떤 방식으로 ‘자기 정체성’을 지켜나가고자 했는지에 대한 이해의 편린을 구하고자 하였다.

 

노기남 주교의 서울 교구장 착좌는 ‘조선인들의 천주교회’가 출범한 것, 즉 조선 천주교회의 진정한 자립화 · 토착화를 향한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는 했지만, 그 자신은 얼마나 힘든 상황 가운데에서 교구장이 되었는지, 그리고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에 따라 조선 천주교회의 운명이 좌우될 수 있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그러하였기 때문에 신자들에게 조선 총독부의 시책에 아무런 말없이 협력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그는 ‘충량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열심한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 ‘열심한 가톨릭 신자로서의 충량한 황국신민’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등 천주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먼저 내세웠다.

 

표면상으로 일본 정부와 조선 총독부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따를 것을 천명하였고, 그들의 굴욕적인 대우도 감내하면서 협조적인 자세를 보였지만, 여러 가지 난관은 꼬리를 물고 그를 괴롭혔다. 그 가운데 첫 번째로 당한 가장 커다란 어려움은 용산의 대신학교 폐쇄 문제였다. 총독부는 미인가 상태로 있던 용산의 대신학교의 폐교 조치를 통보함으로써 자신들의 의도와 어긋나게 조선인 신부가 교구장이 된 천주교회를 한층 강하게 압박하여 통제하는 한편, 대신학교 건물을 군대용으로 징발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노기남 주교는 대신학교 학생들은 덕원 신학교로 전학시키고, 대신학교 건물에는 성모병원의 분원을 개원하였다. 이처럼 그는 조선 총독부의 정책에 마냥 순응하였던 것이 아니라 당시의 강압적인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천주교회의 존속을 위해 최선을 다하여 묘책을 짜내고, 차선책이라도 찾아서 어떻게 하든지 간에 조선 천주교회의 정체성을 유지해 나가고자 하였던 것이다.

 

1931년 이른바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본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國體明徵’을 내세워 식민지 조선에서도 신사 참배를 본격적으로 강요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주교회가 신사 참배를 계속 반대하면 교회의 존립에 심대한 위협을 초래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였다. 따라서 조선 천주교회도 1936년부터 신자들의 신사 참배를 공식적으로 허용하였다. 특히 조선 총독부가 1938년부터 국민정신 총동원운동을 추진하면서 신사 참배는 ‘황국신민으로서의 당연한 의무’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다. 신사 참배를 거부한다는 것은 당시 일본의 ‘國體’를 부정하는 행위였기 때문에 식민지 조선인으로서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파괴를 각오하지 않는 한 그렇게 하기 어려웠다. 그런 까닭에 ‘애국’을 내세운 국가 의례일 뿐이라는 일본 정부의 명분을 받아들여 현실적인 차원에서 타협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여겨진다.

 

이처럼 일본의 신사 참배 요구를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노기남 주교는 여러 차례에 걸쳐 일본 경찰에게 참기 어려운 모욕을 받아야만 하였다. 특히 지방을 순시할 때 더욱 그러하였다. 그렇지만 노기남 주교는 일본어가 유창하지 못하여 총독부의 관리들과는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지방의 관리들과도 긴밀하거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비록 조선 총독부의 강압적인 강요로 그들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표면상으로는 충실히 부응할 수밖에 없었지만, 진정한 협력은 아니었다.

 

일본은 1937년 7월 중일 전쟁을 일으키면서 전면적인 전시체제로 전환한 다음, 내선일체 · 황국신민화를 내세워 식민지 조선인들을 전쟁에 동원하였으며, 한반도를 그들의 대륙병참기지로 삼았다. 그리고 1938년에는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을 설립하여 식민지 조선인들을 그들의 전쟁 수행을 위한 도구로 조직화하기 시작하였다. 서울교구는 1939년 5월 14일 종교단체로서는 가장 먼저 ‘국민정신 총동원 천주교경성교구연맹’을 개별 총동원연맹으로 조직하였다가 1940년 11월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으로 개편하였다. 물론 천주교회만 그러했던 것이 아니라 식민지 조선의 모든 종교단체가 총독부의 강압적인 총동원정책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전시동원에 대한 협력은 천주교회와 천주교 신자들에게만 요구된 것이 아니라 식민지 조선의 모든 단체와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된 것이었다. 그리고 대다수의 식민지 조선인이나 천주교회 등과 같은 각급 단체가 ‘자발적이고도 적극적인 협력’을 한 것이 아니라 조선 총독부의 식민지 조선에 대한 인적 · 물적 자원의 수탈 요구가 더욱 심해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응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 총독부의 강압적인 강요에 따라 ‘타율적인 협력’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식민지시대 말기의 급박한 전시체제 아래에서 조선 천주교회가 조선 총독부의 정책을 어쩔 수 없이 동의하고 이행하였던 것은 천주교회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협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폭압적인 지배 아래에서 시달리면서 노골적으로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던 ‘식민지 조선인’이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의 강압적인 간섭과 통제에 어떻게 ‘굴욕적인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한 단면을 보여 주는 것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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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향신문》 1984년 6월 25일자.

2) 최석우, <간행사>, 《노기남 대주교》,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9쪽.

 

3)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시기에는 ‘교구’가 아니라 ‘대목구’였다. 그렇지만 당시의 《경향잡지》 등에서는 관용적으로 ‘교구’ · ‘교구장’이라 표기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이 글에서도 서술의 편의상 ‘대목구’ · ‘대목구장’ 대신 ‘교구’ · ‘교구장’으로 서술하겠다.

 

4) 이에 대한 대표적인 연구서로는 다음의 것들을 들 수 있다.

· 윤선자, 《일제의 종교정책과 천주교회》, 경인문화사, 2002.

· - - -,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제의 인적 지배와 그리스도교계의 대응》, 집문당, 2005.

 

5) 강인철, <식민지 후기 교회에 대한 몇 가지 반성적 고찰>, 《한국 천주교의 역사사회학》, 한신대학교 출판부, 2006.

 

6) <친일반민족행위 조사결과 통지서>(문서번호 2009-1369, 2009년 7월 3일) 및 <이의신청 결정통지서>(문서번호 운영총괄팀-2009-2119, 2009년 10월 14일).

 

7) 임지현,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소나무, 1999, 6쪽.

 

8) 노기남 주교의 활동에 관한 내용은 대부분 아래의 책들을 참고하였다.

· 노기남, 《나의 회상록》, 가톨릭출판사, 1969.

· 노기남, 《당신의 뜻대로》, 휘문출판사, 1978.

· 노기남, 《명동성당》, 중앙일보사, 1984.

· 박도원, 《노기남 대주교》,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물론 《경향잡지》나 《매일신보》 · 《경성일보》 등에 실려 있는 관련 자료들도 참고하였다. 그렇지만 이 자료들은 조선 총독부의 철저한 검열을 거쳐 작성되고 게재된 것들이다. 말하자면 조선 총독부가 요구한 ‘공식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그들의 의도에 맞추어 작성된 기사들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기록들을 있는 그대로 이용한다면, 당시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우리라 판단된다.

이런 사정을 고려한다면 당시 공식적으로 간행된 잡지나 신문 등의 자료들은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은 ‘비공식적 자료’들과 대비시켜 이용해야 그러한 기록들의 이면에 감추어져 있는 당시의 실상을 균형 잡힌 시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9) 노기남 신부가 서울 교구장에 착좌한 때는 1942년 1월 18일이었지만, 주교 서품을 받은 때는 1942년 12월 20일이었다. 그렇지만 이 글에서는 서술의 편의상 ‘노기남 주교’로 통일하여 서술하겠다. 다만 서울 교구장 착좌 이전이나 대주교 서임 이후의 시점에서 언급된 내용들을 서술할 때에는 각각 ‘신부’ · ‘대주교’로 표기할 것이다.

 

10) 노기남, 앞의 책, 1969, 284쪽 ; 노기남, 앞의 책, 1978, 156쪽.

 

11) 노기남 주교가 서울 교구장에 착좌한 직후 교회 외적으로는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내부적으로도 많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특히 재정의 문제가 그러하였다. 파리 외방전교회 · 메리놀 외방전교회 · 골롬반 외방선교회가 손을 떼면서 자체적으로 재정을 꾸려나가야 했지만, 현실적인 사정은 그러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경향잡지》의 <사설>과 <회보> 등을 통하여 교무금의 필요성과 납부를 강조하는 한편, 각 본당의 재정 자립을 위한 노력을 촉구하고 장려하였다(<교우 대중은 분연히 이러나라>, 《경향잡지》 사설, 1942년 1월 15일 ; <평양교구 교우들의 각성>, 《경향잡지》 회보, 1942년 1월 15일 ; <경성교구 공문을 보고서>, 《경향잡지》 사설, 1942년 3월 15일 ; <평양교구의 소식> · <양양지방 교우들의 모범>, 《경향잡지》 회보, 1942년 3월 15일 ; <교무금에 대하야>, 《경향잡지》사설, 1942년 4월 15일; <진실한 열심과 교무금>, 《경향잡지》 사설, 1942년 5월 15일 · 6월 15일 ; <양심과 교무금>, 《경향잡지》 사설, 1942년 7월 15일 ; <천주 사랑과 교무금>, 《경향잡지》 사설, 1942년 8월 15일 ; <손 마리아 부인의 조흔 표양>, 《경향잡지》 회보, 1942년 9월 15일 ; <천안 지방 교우들의 맹성>, 《경향잡지》 회보, 1943년 2월 15일 참조). 이러한 재정 문제는 노기남 주교가 서울 대교구장에서 물러날 때까지 그를 괴롭혔다.

 

12) 노기남, 앞의 책, 1969, 246, 284쪽 ; 노기남, 앞의 책, 1978, 121, 157쪽.

 

13) 신사 참배에 관한 교황청의 훈령에 따라 마렐라 주일 교황 사절이 조선 천주교회에 신사 참배를 권유하면서 보낸 <국체명징에 관한 주일교황사절의 감상> 가운데 보이는 “진정한 가톨릭 신자의 이름에 합당한 자는 당연 충량한 국민”(<별보>, 《경향잡지》 1937년 2월 25일)이라는 표현에 영향을 받아 이렇게 발언했는지 모르겠다.

 

14) 노기남 주교는 “마음에도 없는 대동아(태평양) 전쟁 필승을 강조하고 황당무계한 황국 신민화 운동을 역설해야 하는, 실로 연극적인 답사”였다고 회고하였다(노기남, 앞의 책, 1969, 285쪽). 그런데 이 답사는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하였기 때문에 “역사에서 지워질 수 없고 비판적인 평가를 면하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윤선자, <한국 천주교회의 통치권 이동>,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제의 인적 지배와 그리스도교계의 대응》, 집문당, 2005, 108쪽).

 

15) 노기남, 앞의 책, 1969, 248~249쪽 ; 노기남, 앞의 책, 1978, 123~124쪽 ; 박도원, 앞의 책, 1985, 209~210쪽.

16) 윤선자, 앞의 논문, 2005, 106쪽.

 

17) 노용필, <예수성심신학교의 사제 양성 교육>, 《인간연구》 5, 가톨릭대학교 인간학연구소, 2003; - - -, 《한국 근 · 현대 사회와 가톨릭》, 한국사학, 2008, 66~68쪽 참조.

 

18) 최석우, <한국 교회와 한국인 사제 양성>, 《논문집》 11, 가톨릭대학교 신학부, 1985, 192쪽. 차기진도 “조선 총독부의 인가를 받지 않아 신학교가 폐쇄당한 것은 제도 교육 차원에서의 교육 정책이 미흡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차기진, <천주교>, 《한국사》 51, 국사편찬위원회, 2001, 266쪽).

 

19) 1942년 2월 23일자 《조선총독부 관보》에 따르면, 1월 14일자로 경성 대목구[天主公敎 京城敎區]의 포교 관리자가 라리보(ア, ラリボ) 주교에서 노기남[岡本鐵治] 주교로 바뀌었다. 그리고 1942년 3월 9일자 《조선총독부 관보》에 따르면, 3월 4일자로 춘천교구 포교 관리자도 토마스 퀸란(トウ マ) 신부에서 노기남 주교로 바뀌었다.

 

20) 장금구 신부는 “교수회의”라고 하였으나, 앞뒤 문맥상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노용필은 “구수회의”로 적어 놓았다.

 

21) 이와 관련하여서는 장금구 신부, <한국 신학교육의 회고 - 일제시대~해방 후 - 〉, 《교회와 역사》 156, 1988. 5, 5~6쪽의 내용도 참고된다.

 

22) 노기남, 앞의 책, 1969, 261~263쪽 ; 노기남, 앞의 책, 1978, 135~137쪽 ; 박도원, 앞의 책, 1985, 221~223쪽 참조.

 

23) 京城天主公敎神學校의 설립 과정에 관해서는 장금구, <제1차 개혁>, 《사목 반세기》, 75~76쪽 및 앞의 글, 1988. 5, 6쪽 ; 이원순, 《소신학교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7, 116~118쪽 ;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150년사 : 1855~2005》,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2007, 185~187쪽 참조.

 

24) 윤선자, <1930년대 일제의 종교통제정책 강화와 천주교회의 황국신민화 과정>, 《일제의 종교정책과 천주교회》, 경인문화사, 2001, 254~255쪽 참조.

 

25) 윤선자, 위의 논문, 2001, 266~277쪽 참조.

 

26) 신사 참배 거부가 “민족운동 내지는 민족수호를 위한 항일운동의 차원에서 해석될 수 있다”(이만열, 《한국 기독교와 역사의식》, 지식산업사, 1981, 349~353쪽 및 김승태, <일본신도의 침투와 1910 · 1920년대의 신사문제>, 서울대 석사학위논문, 1986, 5쪽)고 하면서, 신사 참배는 일제 통치의 핵심적인 지배이념이었고 사회통합 이념이었으므로 신사 참배의 거부는 곧 신성모독이고, 국가체제에 대한 항거라고 간주하는 견해도 있다(윤선자, 위의 논문, 2001, 278~279쪽 참조). 혹시 신사 참배의 ‘종교성’을 강조하고자 ‘신성모독’이라고 표현하였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 일본은 제도상으로 이미 1882년에 “神社神道는 국가의 제사이며, 종교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제사와 종교를 분리시켰고, 敎派神道와 불교 · 그리스도교 등과 같은 종교들 위에 군림하는 초종교적 지위를 신사신도에 부여하였다(김승태, 위의 논문, 1986, 10쪽). 물론 신사 참배를 강요하는 일본 정부와 이를 반대하는 식민지 조선의 그리스도교 성직자ㆍ신자들 사이에 ‘宗敎’에 대한 개념과 이해가 서로 달랐겠지만, 어쨌든 일본은 형식적으로는 반대론자들이 지적하는 ‘신사 참배의 종교성’을 배제하였거나 감추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神性’에 대한 이해도 같은 차원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27) 윤선자는 신사 참배를 계기로 일본의 군국주의 침략정책에 대한 협조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신사 참배는 일제에 대한 투항, 친일을 약속하는 상징적 행위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하면서, 조선 총독부의 국민정신 총동원운동에 천주교회가 참여한 것은 신사 참배 허용에서 말미암는다고 보았다. 그리고 ‘神社政策’을 수용하면서 천주교회는 그 정체성을 상실해 갔다고 단언하였다(윤선자, 위의 논문, 2001, 280쪽 참조).

그런데 과연 신사 참배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천주교회의 정체성이 상실되어 갔을까? 그보다는 차라리 ‘조선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위협받았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신사 참배가 과연 그 당시 식민지 조선인들의 ‘민족 정체성’을 구체적으로 얼마나 위협했는지는 보다 신중한 검토를 거친 다음에 언급해야 할 것이다. 한편 신사 참배의 허용 문제가 그러했다면, 그 무렵 이전까지의 금지정책에서 벗어나 사실상 허용된 ‘조상 제사’의 문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28) 노기남, 앞의 책, 1969, 263쪽 ; 노기남, 앞의 책, 1978, 137쪽.

29) 박도원, 앞의 책, 1985, 224쪽

 

30) 노기남, 앞의 책, 1969, 263~266쪽 ; 노기남, 앞의 책, 1978, 137~139쪽.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이미 1936년에 신사 참배는 종교 행사가 아니라 애국적 행사이므로 허용한다는 포교성성의 훈령을 토대로 교구장 회의에서 애국심의 표현인 경우에는 神社에서의 예식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노기남 주교가 이러한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다시 이 문제를 교황 사절에게 문의하였을까? 혹시 노기남 대주교가 착각하여 사실 관계를 잘못 기억하였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 그는 회고록에 기록된 대로 분명히 1942년 3월 29일 서울을 출발하여 교황 사절과 동경 대주교를 만나 “교회사업과 여러 방면의 제도 등을 시찰”한 뒤 4월 10일에 서울로 돌아왔다(<오까모도 교구장 동경에>, 《경향잡지》 회보, 1942년 4월 15일). 그렇다면 그의 회고를 사실로 볼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아마도 교구장으로서 신사 참배에 대한 교회의 조치를 여전히 받아들이기를 망설이는 신자들에게 다시 한 번 교황청의 권위를 빌어 교회의 방침을 확실하게 알리기 위해서 그러하지 않았을까. 또한 이를 통하여 일본 정부와 조선 총독부의 정책에 자신이 충실하게 협조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 줌으로써 자신을 옥죄고 있던 감시의 눈초리를 완화시키고자 그러했던 것은 아닐까.

 

31) 이상은 노기남, 앞의 책, 1969, 266~267쪽 ; 노기남, 앞의 책, 1978, 139~140쪽 ; 박도원, 앞의 책, 1985, 226쪽 참조.

32) 노기남, 위의 책, 1969, 213~214쪽 ; 노기남, 위의 책, 1978, 89~97쪽 참조.

 

33) 노기남, 위의 책, 1969, 266~267쪽 ; 노기남, 위의 책, 1978, 140~144쪽 ; <경성교구에 교구장 순시 일자>, 《경향잡지》 회보, 1942년 10월 15일 참조.

 

34) 노기남, 위의 책, 1969, 270~273쪽 ; 노기남, 위의 책, 1978, 144~146쪽 ; <경성교구에 주교 순시>, 《경향잡지》 회보, 1943년 10월 15일.

 

35) 노기남 대주교는 양덕환 신부를 재령 본당 주임으로 기억하였으나, 양덕환 신부는 1936년 5월부터 안악 본당 주임으로 있다가, 1946년 5월에 재령 본당 주임으로 전임되었다(서상효, <한국교회의 증언자(43) - 양덕환 신부>, 《교회와 역사》 105, 1984년 3월 ; 《황해도 천주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264쪽, 465쪽 ; 김성희, <안악 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8, 한국교회사연구소, 2001, 5821쪽).

 

36) 노기남 대주교는 사리원 본당 주임을 박규철 신부로 기억하였는데, 이 무렵을 전후해서 사리원 본당 주임으로 박규철 신부는 찾아볼 수 없고, 대신 朴貞烈 신부(1933. 6~1936. 5)와 朴遇哲 신부(1942. 1~1950. 11)만 보인다(《황해도 천주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367쪽 ; 김성희, <사리원 본당>, 《한국가톨릭대사전》 6, 한국교회사연구소, 2001, 3905쪽). 그렇다면 박규철 신부가 아니라 박우철 신부였을 것이다.

 

37) 노기남, 앞의 책, 1969, 273~274쪽 ; 노기남, 앞의 책, 1978, 147쪽.

38) 노기남, 위의 책, 1969, 274~275쪽 ; 노기남, 위의 책, 1978, 147~148쪽.

39) 박도원, 앞의 책, 1985, 237~240쪽 참조.

40) 윤선자, <1940년대 일제의 전시종교정책과 천주교회의 예속>, 《일제의 종교정책과 천주교회》, 경인문화사, 2002, 286~289쪽 참조.

41) 노기남, 《명동성당》, 중앙일보사, 1984, 111~112쪽 ; 윤선자, 위의 논문, 2002, 291~293쪽 참조.

42) 윤선자, 위의 논문, 2002, 293쪽 참조.

43) 윤선자, 위의 논문, 2002, 315~316쪽 참조.

 

44) 총력운동은 일본의 침략전쟁에 식민지 조선의 인적 · 물적 자원을 수탈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명목상으로라도 외국인 선교사를 총력운동의 책임자로 앉게 한다는 것은 총력운동의 목적 달성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하여 조선인 성직자가 책임자로 적합하였고, 조선인 성직자들 가운데 경력이 짧았던 노기남 신부가 이사장으로 선임된 것은 종현 성당의 보좌로 라리보 교구장의 곁에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윤선자, 위의 논문, 2002, 316~317쪽).

 

45) <국민총력천주교경성구연맹 새 역원과 제1회 역원회>, 《경향잡지》 회보, 1940년 12월 15일.

46) <국민총력>, 《경향잡지》, 1941년 3월 15일.

 

47) 윤선자는 서울을 비롯하여 3개 교구를 맡게 되면서 업무가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하는 노기남 대주교의 회고만으로는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고 하면서, 그보다는 국가 업무에 신자들을 동원하는 일과 교회 활동을 구분하여 교회 내적인 업무는 성직자가, 국가시책에 협력하는 교회 외적인 업무는 신자가 책임을 맡도록 편성하였다”고 했다(윤선자, 앞의 논문, 2002, 319~320쪽).

 

48) <국민총력>, 《경향잡지》 1941년 2월 15일.

윤선자는 교회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의 태도로 군기헌납운동을 전개”하여 “직접 전쟁 무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는 것은 침략전쟁에 함께 하였다는 의미”로, “정교분리를 주장하며 한국인들의 민족운동을 단죄하였던 천주교회의 태도가 전시체제기에 이르러 이렇게 큰 변화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고 하였다(윤선자, 위의 논문, 2002, 322쪽).

 

49) <국민총력 - 연맹원이여 분기하라 ->, 《경향잡지》 1941년 12월 15일.

50) <경성에 천주교 결전대회>, 《경향잡지》 회보, 1942년 1월 15일.

51) <국민총력 - 대동아전쟁기구 ->, 《경향잡지》 1942년 3월 15일.

52) 임충신 신부, 《일제와 공산치하의 사목생활》, 32~33쪽.

53)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 총회 선언>, 《경향잡지》 1942년 5월 15일.

54) <안성 지방에 국어 강습>, 《경향잡지》 회보, 1942년 6월 15일 ; <각처 교회에 국어 강습>, 《경향잡지》 회보, 1942년 8월 15일.

55) <각처에 강연회>, 《경향잡지》 회보, 1943년 12월 15일.

 

56) 임종국, <일제말 친일군상의 실태>, 《해방전후사의 인식》, 한길사, 1989, 273쪽.

윤선자는 “일제가 군국주의적 야욕으로 일으킨 전쟁을 천주교회는 聖戰으로 규정하였다”고 주장했다(윤선자, 앞의 논문, 2002, 324쪽). 그렇지만 ‘聖戰’이라고 규정한 주체는 일본이었지, 조선 천주교회가 아니었다. 천주교회는 조선 총독부의 강압적 지침에 따라 그것을 그대로 옮겨 사용하였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57) 윤선자, 위의 논문, 2002, 324~327쪽 참조. 교회가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였기 때문에 신자들의 신앙이 변질되었다는 윤선자의 주장은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 한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또한 당시의 교세 통계를 보면 현상 유지 상태에 있었다고 할 수는 있으나, 침체되고 퇴보했던 것은 아니었다.

 

58) 노기남 주교와 조선 천주교회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강론과 《경향잡지》를 통해 노골적으로 전쟁 찬양을 하면서, 천주교의 지배적인 흐름, 즉 밀턴 잉거(J. Milton Yinger)가 제시한 ‘정의로운 전쟁’(just war)의 교리에서 이탈하여 적극적으로 ’聖戰‘으로 미화하였고, 심지어 그것을 즐기는 태도마저 내비쳤다고 하면서, 이러한 당시 교회의 전쟁 지지는 ’반가톨릭적인‘ 행위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강인철, 앞의 논문, 2006, 97~99쪽).

그렇지만 밀턴 잉거의 그리스도교의 전쟁에 대한 분류 방식을 당시 식민지 조선인들의 태평양 전쟁에 대한 인식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 밀턴 잉거가 말한 ‘십자군(crusade) 혹은 성전(holy war)’ · ‘정의로운 전쟁’과 노기남 주교가 조선 총독부의 요구에 따라 사용한 ‘聖戰’이 동일한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양자가 가진 서로 다른 역사적 배경의 동질성 여부부터 검토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은 단순 비교는 대단히 위험한 작업이 될 우려가 있다. 게다가 밀턴 잉거가 말한 전쟁은 ‘그리스도교의 전쟁’인 반면에 노기남 주교가 말한 전쟁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전쟁’이었다. 그런 점에서 강인철의 이러한 평가는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여겨진다. 아마도 강인철은 ‘當爲論’ 또는 ‘是非論’의 입장에서 식민지시대 말기의 천주교회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교회사 연구 제35집, 2010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이장우(한국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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