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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동 성당 건축과 치명자산 성지 조성한 보두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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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1-09 ㅣ No.620

[한국 교회의 인물상] 전동 성당 건축과 치명자산 성지 조성한 보두네 신부

 

 

머리말

필자가 근무하고 있는 한국교회사연구소에는 ‘한국교회사연구동인회’라는 산하 단체가 있다. 이 단체는 교회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여 한국 교회의 뿌리를 찾고 순교 선열들의 삶을 본받아 더욱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하여 공부하고 연구하는 모임이다. 이 단체의 활동 가운데 하나는 순교의 자치가 서려 있는 성지 및 사적지 순례로, 1년에 세 차례의 순례를 통해 교회사 공부와 함께 그곳에 담겨 있는 높고 깊은 뜻을 탐구하고 있다. 올해 1차 사적지 순례는 4월 21일에 실시되었는데, 전주교구 지역에 위치한 성지와 교회 사적지를 순례하였다. 초남이, 숲정이, 전동 성당, 치명자산 성지를 둘러보면서 특히 ‘호남의 사도’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과 그의 일가의 순교를 통해 박해 시기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자리가 되었다.

그런데 성지를 돌아보면서 성지와 관련된 순교자들뿐 아니라 과거 성지를 조성하는 데 노력했던 인물에 대해서도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 살펴볼 인물은 보두네(Baudounet, 尹沙勿, 1859-1915) 신부로, 그는 전주 지역 교회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전동 성당의 초석을 놓았던 신부이자, 유항검 일가의 무덤이 현재의 치명자산 성지에 안치되는데 크게 노력했던 신부였다.
 

조선으로의 입국과 초기 활동

보두네는 1859년 9월 23일 프랑스 아베롱(Aveyron) 지방 로데(Rodez) 교구 내 모스튀에줄(Mostuejouls)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벨몽(Belmont) 소신학교와 로데 대신학교에서 공부한 뒤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1884년 9월 20일 사제 서품을 받고 곧바로 한국 선교사로 임명된 보두네 신부는 같은 해 11월 19일 동료 2명과 함께 파리에서 출발하였다. 이들 세 신부는 도중에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하였다. 이즈음 조선에서 박해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으므로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Blanc, 白圭三) 주교는 이들 가운데 우선 2명만 조선에 입국하고 1명은 남아서 기다리라고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제비를 뽑은 결과 보두네 신부는 일본 나가사키에 머무르게 되었다.

당시 일본 나가사키에서는 코스트(Coste, 高宜善) 신부가 ‘성서 활판소’라는 이름으로 인쇄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일단 나가사키에 머물게 된 보두네 신부는 코스트 신부를 도와 인쇄소의 일을 도와주었다. 그러던 중 코스트 신부가 인쇄소를 서울로 이전하기 위해 조선에 입국하자 보두네 신부 역시 그를 따라 1885년 10월 26일, 조선에 입국하였다.

입국 후 임시로 서울의 주교관에 머무르던 보두네 신부는 며칠 후 충청도의 숭선(崇善, 현 충남 중원군 신니면 문숭리) 교우촌에 파견되어 이곳에서 한국의 언어와 풍습을 익혔다. 그러던 중 1886년 1월 28일 전라도 안대동 본당(현 함열 본당)에서 사목하던 조스(Josse, 趙) 신부가 장티푸스로 사망하자, 같은 해 5월 경상도 여진이(현 경북 선산군 해평면 낙산동)의 옹기점 교우촌으로 부임하여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와 함께 전라도 일부 지역을 맡게 되었다. 이후 그는 감시를 피해 전교 활동을 전개하면서 틈틈이 한국어 공부에 몰두함으로써 얼마 후에는 신자들이 감탄할 만큼 뛰어난 한국어 실력을 갖추었다. 이에 그는 로베르 신부, 리우빌(Liouville, 柳達榮) 신부 등과 함께 샤를르 달레(Ch. Dallet) 신부가 쓴 “한국천주교회사”(Histoire de l’Eglise en Coree)를 번역하기도 하였다. 이 내용은 후에 ‘보감’(寶鑑)과 “경향잡지”(京鄕雜誌)에 ‘조선성교사기’(朝鮮聖敎史記)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다.
 

전주로의 부임과 전동 성당 건축

보두네 신부는 전라도 고산에서 사목하던 라푸르카드(Lafourcade, 羅亨默) 신부가 사망하면서 그 후임으로 베르모렐(Vermorel, 張若瑟) 신부가 이 지역을 담당하게 되자 그를 돕기 위해 1889년 봄 전주에 부임하였다. 하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는 신부의 거처를 전주 읍내에 마련하는 것이 어려웠으므로, 보두네 신부는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성동(大成洞, 일명 대승리)에 정착하여 전주를 비롯한 전라도 북쪽 지역의 사목을 담당하였다.

이후 본당 발전을 위해 본당을 전주 읍내로 이전할 것을 계획한 보두네 신부는 전주에 부임한 2년 후인 1891년 6월 23일, 전주 남문 밖에 있는 구례(求禮) 영저리(營邸吏)의 집을 매입하여 성당과 사제관으로 개조하였다. 하지만 이 성당은 말 그대로 임시 성당으로, 시간이 갈수록 늘어나는 신자들을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더구나 1890년대 중반 전주 지역에 프로테스탄트 건물들이 증가하였는데, 이 또한 보두네 신부가 성당 신축을 서둘러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성당 신축 기금 모금에 앞서 보두네 신부와 본당 신자들은 가시적인 성과를 얻기 위해 높은 지대에 위치한 오목대(梧木臺)에 성당을 신축하고자 하였다. 보두네 신부는 1896년 12월 3일, 사목 방문 차 전주에 온 뮈텔 주교와 함께 오목대에 올라갔다. 그리고 주교에게 이곳에 성당을 지으면 어떻겠냐고 의향을 물었다. 그러자 뮈텔 주교는 현재의 터, 즉 임시 성당이 자리한 곳에 성당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1890년대 중반부터 성당 신축 기금을 모으기 시작한 보두네 신부는 서울로 올라가 명동 성당의 신축 공사를 맡고 있던 프와넬(Poisnel, 朴道行) 신부를 찾아갔다. 보두네 신부는 프와넬 신부에게 누가 보아도 아름답고 큰 규모의 성당 설계를 부탁하였다. 이후 설계도가 완성되자, 보두네 신부는 1908년에 성당 건축을 시작하였다. 공사는 보두네 신부를 비롯한 본당 신자들이 일심동체가 되어 참여하였는데, 진안 · 장수, 심지어 장성 사거리 지역 공소 신자들까지 공사에 참여하였다.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당시, 일제 통감부는 1907년부터 도로 개수 사업을 실시하여 신작로를 신설하고 있었다. 신작로 신설로 인해 전주부는 전주성 4대문 중 풍남문만 남겨두고 헐 것을 계획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보두네 신부는 성당 신축에 사용하고자 성벽 일부를 사들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절차를 알 수 없었던 보두네 신부는 뮈텔 주교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이후 뮈텔 주교와 프랑스 공사의 노력으로, 1909년 7월 전주부는 보두네 신부에게 성벽을 헐어 나온 돌과 흙을 성당 짓는 데 사용해도 좋다고 허락하였다. 바로 1791년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 · 권상연의 장렬한 순교 현장을 목격했던 풍남문과 성곽, 그 10년 후인 1801년 호남의 사도 유항검과 동료들의 참수를 지켜보았고 유항검의 목을 매달아 효수했던 ‘풍남문’을 둘러싸고 있던 돌과 흙이었다. 그리하여 신자들이 총동원되어 성벽의 흙과 돌을 운반하여 성당의 기초 공사에 사용하였다.

보두네 신부는 신축 공사를 하는 도중 두 차례나 비용을 도난당해 어쩔 수 없이 공사를 중단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먼저 성당 벽과 지붕 공사가 거의 끝나가던 1911년 6월 22일 밤에 도둑이 들었고 보두네 신부의 침실과 벽장에 보관되어 있던 공사 비용을 도난당하여 공사가 중단되었다. 중단된 지 2년 만에 다시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공사가 거의 마무리되어가던 무렵인 1914년에는 대구교구장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가 공사비로 보낸 돈을 또다시 도난당하였다.

한편 드망즈 주교는 1911년 9월 23-24일 전주를 방문하였는데, 전동 성당의 공사가 중단된 사실을 보고 나서 다음과 같이 안타까워하였다.

“아! 이 교회는 몇 년 전에 착수되었는데 아직도 그대로가 아닌가! 나의 존경하는 보두네 신부는 이 탑을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에게 바치기 위해 일생 동안 일해 왔다. 프랑스로부터 한 푼의 원조도 받지 않고, 그와 그의 신도들이 궁핍 속에서도 이 성당을 위해 한 푼 두 푼 모으지 않았는가. 당신을 위해 아름다운 성전을 짓기를 원하시는 하느님, 이 본당의 주보성인이 열심한 신도들의 마음을 움직이시어 부족한 공사비를 협조함으로써 20년간의 노고와 정성이 하루 속히 결실을 맺도록 도와주소서!”1)

이처럼 두 차례의 도난 사건으로 인해 공사가 중단되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보두네 신부의 헌신적인 노력에 힘입어 전동 성당은 공사 시작 7년 만인 1914년에 완공되었다.2)
 

치명자산 성지 조성

보두네 신부는 성당 건립에 앞서 1914년 4월 19일에 완주 재남리(김제군 이서면과 용지면의 경계)에 있던 순교자 유항검의 가족묘를 전주 치명자산으로 이장하였다. 보두네 신부가 유항검 가족묘를 이장한 과정은 다음과 같다.

1801년 9월 17일(양력 10월 24일)부터 12월 28일(양력 1802년 1월 31일)까지 유항검 가족들이 순교하자 이들을 존경하고 따르던 집안의 남은 노복과 친지들은 유항검 가족들이 처형될 때마다 하나씩 시체를 수습하여, 초남리에서 건너다보이는 재남리 바우배기에 가매장하였다. 비록 임시로 매장하였지만, 이들의 가족묘는 이후에도 계속 신자들 사이에서 구전되며 확인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09년 보두네 신부의 서한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유항검의 가문은 1801년 전라도 박해 때 많은 순교자를 내었다. 이들 중에는 우리 한국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인 이 루갈다도 있었다. 구전에 의하면 그들의 묘소가 재남리 부근에 있다고 하였다. 재남리는 주민의 절반가량이 교우들인 마을로, 나는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이 공소를 방문하고 있다. 나 역시 재남리 공소를 가면서 내 눈으로 이 무덤을 여러 번 보았다.3)

그러던 가운데 1914년 봄, 가족묘가 위치한 땅 주인인 일본인 기바[木場]가 이 땅을 과수원으로 만들겠다면서 가족묘의 연고자를 찾으며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요구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보두네 신부는 신자들과 함께 가족묘의 이장 작업을 실시하였다. 이들은 이장된 시신을 물약 몇 사발 들어갈 크기의 옹기단지에 넣어 성당으로 옮겨와서 성당 대청에 모셨다. 그리고 1914년 4월 19일, 현재의 치명자산 자리에 안장하였다. 이 치명자산은 보두네 신부가 일찍이 전동 성당을 신축할 때 재목으로 쓸 나무를 벌목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이 죽은 후에 묻힐 장소로 준비하였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유항검 가족의 유해는 치명자산 정상에 모셔지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들아 치명자산 정상에 모셔지게 된 이유는 아래와 같은 네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 이분들의 거룩한 정신은 높이 받들어져야 한다.
둘째, 이분들의 정신은 순교자들의 발아래 사는 모든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해야 한다.
셋째, 이분들의 거룩한 정신이 이 고장의 수호신이 되어 호남 땅을 지켜주시기를 바란다.
넷째, 우리는 피 흘리는 순교는 못하더라도 산을 오르내릴 때 겪는 고통으로나마 순교자의 고통에 동참하자. 즉 땀 흘리며 순교적 체험을 하자.4)
 

맺음말

보두네 신부는 26년을 전동 본당 주임으로 재임하면서 이 글에서 다른 전동 성당 건축과 치명자산 성지 조성 외에도 전라도 일대의 전교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던 사제였다. 전주 일대의 교회 터전을 확고하게 마련했던 보두네 신부는 1915년 5월 27일 심장 질환으로 선종하여 자신의 소원대로 치명자산에 안장되었다.

현재 그가 조성한 전동 성당과 치명자산 성지는 호남 지역 천주교 순례1번지로, 수많은 신자가 방문하고 있다. 또한 이 두 곳은 국가로부터 사적 제288호, 전북 지방 기념물 제68호로 각각 지정되어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오늘날 신자들은 전동 성당과 치명자산 성지를 비롯한 여러 성지의 순례를 통해 순교자들의 삶과 표양을 본받음으로써 자신의 신앙생활을 더욱더 성숙시키는 기회로 삼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그칠 것이 아니라, 전동 성당과 치명자산 성지를 순례하는 경우에는 이 두 곳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던 보두네 신부의 삶에 대해서도 묵상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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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2년 연말 보고서’, “교구연보”, 부산교구, 1984, 24쪽.
2) 1914년의 완공은 외형상 완공된 것으로, 부대시설 등 모든 시설은 완비하고 축성식을 가진 것은 1931년 6월 18일이다. 그러므로 전동 성당의 건축은 23년에 걸친 대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3) 뮈텔 문서 1909-20, 1909년 1월 29일자 보두네 신부 서한.
4) 김진소, “전주교구사” I, 천주교 전주교구, 1998, 952쪽.

[교회와 역사, 2013년 10월호, 백병근 미카엘(한국교회사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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