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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병인순교 150주년 기념1-6: 성 금요일의 순교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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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6-12 ㅣ No.752

병인순교 150주년 기념 (1) 병인박해 150주년을 맞으며

 

 

《가톨릭 성가》 289번 ‘병인 순교자 노래’ 2절을 보면, “병인년 그 옛날에 ‘구름재’ 서릿발에 팔도는 ‘오가작통’ 피바다 이뤘을 제”라는 가사가 나온다. ‘병인년’은 1866년을 말하고, ‘구름재’는 그 해에 박해령을 내린 흥선대원군이 살던 운현궁(雲峴宮)을 지칭한다. 서릿발 같은 명령으로 시작된 병인박해는 1873년 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날 때까지 7년 넘게 계속되어 8천여 명의 신자들이 순교한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전의 박해들은 길어야 1년이면 마무리되었는데 왜 이 박해는 그리도 길어졌을까?

 

병인박해 이전 우리 교회는 15년 정도 무난한 시기를 보냈다. 천주교 금령은 여전하였지만 적극적 박해가 없었으므로 신자는 두 배로 증가하여 23,000명에 이르렀고, 프랑스 선교사들은 최대 12명까지 들어와 활동하였다. 이때 조선 밖에서는 큰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중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1860년 프랑스와 영국 연합군이 중국 북경을 점령한 일이었다. 이로 인해 북경조약이 체결되었고, 그 안에는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다는 항목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소식을 접한 조선 천주교회는 국내에서도 자유가 주어질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은 국내외 사정은 교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이전과는 다른 선택을 하는 배경이 되었다.

 

1864년 러시아인들이 북쪽 두만강 국경에 나타나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였다. 난데없는 러시아인들의 출현에 조선 사회가 공포에 휩싸였을 때 몇몇 지도급 신자들이 흥선대원군에게 한 가지 의견을 내었다. 오래전부터 조선에서 활동해 온 프랑스 선교사들을 통해 프랑스와 접촉하여 러시아를 견제하자는 제안이었다. 대원군의 수용적인 태도에 잠시 환호하던 우리 교회는 오히려 거센 역풍을 맞았다. 조정 대신들과 양반들의 적극적인 반대, 그리고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대원군의 정치적 판단이 맞물리면서 천주교는 큰 박해를 마주하게 되었다.

 

예전과 같은 상황이라면 이 박해 역시 1년 정도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교회는 이미 몸집이 커져 있었고, 중국 인근에 도움을 청할 만한 세력이 포진해 있었다. 결국 프랑스 함대가 조선에 들어오는 빌미가 제공되어 병인양요가 발생하였고, 이는 천주교 박해를 더 부추기고 장기화하는 원인이 되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마르 10,24)는 말씀처럼 가진 것이 많아진 교회는 예전처럼 순수하게 행동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교회 전체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신자들이 어느 때보다 많은 시기였기에, 그 중 몇 분이라도 작은 지면을 통해 나눠 보려 한다. [2016년 6월 5일 연중 제10주일 대전주보 3면, 김정환 신부(내포교회사연구소)]

 

 

병인순교 150주년 기념 (2) 성 금요일의 순교자들 ① 다블뤼 주교

 

 

“찬미 예수!” 조선 후기 박해시대에도 교우들이 사용하던 인사말이다. 예전에 편지를 쓸 때면 이 글귀를 첫머리에 쓰고 나서 본론으로 들어가곤 했다. 이런 전통은 어디서 왔을까? 그 연원은 알 수 없으나 조선으로 파견된 선교사들은 늘 이런 형식으로 편지를 썼다. 비록 선교사들마다 선호하는 글귀는 달랐지만. 그중에 단연 돋보이는 글귀는 다블뤼 주교님이 사용하던 “예수님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가진 자다!”이다. 그분은 신학생 때부터 이 글귀를 모든 편지의 첫머리에 썼다. 편지에 이런 말을 쓰는 것과 삶을 그렇게 사는 것은 어찌 보면 별개일 수도 있겠지만, 다블뤼 주교님은 정말로 그렇게 사셨고 그분의 삶에서는 예수님이 전부였다.

 

다블뤼 주교님은 1818년 프랑스 아미앵의 신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났다. 예수회 선교사가 되기를 꿈꾸었으나 건강이 나빠 받아들여지지 않아 처음에는 교구 신부로 살아갔다. 그런 가운데에도 선교에 대한 열망이 식지 않아 아시아 선교를 담당하는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그렇게 선교사가 되어 발령받은 곳이 ‘순교자의 나라’로 알려진 조선이었다.

 

건강이 좋지 않다는 우려와 달리 그분은 박해시대 선교사들 중 가장 오랜 기간인 21년 동안이나 활동하였다. 다른 선교사들은 모두 순교하거나 일찍 병으로 선종했기에 짧게는 3개월, 길어야 10년 정도가 활동의 전부였다. 다블뤼 주교님은 오랫동안 전국을 돌며 교우들을 상대로 활동하셨을 뿐만 아니라 특별한 업적도 남기셨다. 조선 순교자들의 전기와 조선 역사 초고를 작성하여 프랑스로 보내셨는데 우리 교회에 더없이 소중한 자료들이다. 이 자료들이 없었으면 박해시대 우리 교회 역사는 절반 이상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1866년 뜻하지 않게 큰 박해가 일어났다. 그때 다블뤼 주교님은 내포 신리(충남 당진시 합덕읍)에 있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서울로 이송되어 문초와 형벌, 그리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마침 고종 임금이 결혼식을 앞두고 있던 터라 서울 인근에서 피를 흘리면 좋지 않다 하여 멀리 갈매못(충남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으로 보내졌다. 예정대로라면 다블뤼 주교님은 3월 31일에 처형되어야 했다. 하지만 다블뤼 주교님이 강력히 항의하며 하루를 앞당겨 죽여 달라하니 포졸들이 “곧 죽을 놈이 죽여달라.”고 한다며 비웃었다. 그래도 이 청이 받아들여져 3월 30일 성 금요일에 형이 집행되었다. 그날 다블뤼 주교님은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음식을 “잡수시며 매우 즐거운 마음이요, 웃으시며 즐거워하니, 보는 사람들이 별일이라”할 정도로 기쁘게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셨다.

 

선물을 주어도 받는 사람이 싫으면 선물이 아니다. 다블뤼 주교님은 예수님이 주신 선물을 기꺼이 받으셨다. 그래서 그분은 그 글귀 그대로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되셨다. [2016년 6월 12일 연중 제11주일 대전주보 3면, 김정환 신부(내포교회사연구소)]

 

 

병인순교 150주년 기념 (3) 성 금요일의 순교자들 ② 황석두 루카 복사

 

 

황석두 루카 복사는 지난주에 소개한 다블뤼 주교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분이다. 이 분은 복사(服事, servant)라는 직무에 충실하여 자신이 돕던 선교사들과 생의 끝까지 몸과 마음을 함께하였다. 학문적 소양이 뛰어났던 황석두는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전까지 다블뤼 주교 곁에서 한글 교리서들을 편찬하는 일을 도우며 신리(충남 당진시 합덕읍)에 살고 있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신리에 온 포졸들은 프랑스 선교사 3명만을 체포하고는 다른 신자들은 내버려 두었다. 그때 황석두가 자진하여 나서며 함께 체포되기를 청하였는데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병인년 2월에 다블뤼 주교와 두 신부가 잡히자, 루카가 함께 또 따라갔다. 서울 포교의 말이 ‘우리는 주교와 신부만 잡으니, 다른 사람은 오지 말라.’ 하였다. 루카가 말하기를 ‘내가 우리 스승과 열두 해를 동거하였는데 어찌 버리고 가리오? 죽더라도 함께 가리라.’ 하니 포교의 말이 ‘정말 그러하면 가자.’ 하였다.”

짧지만 상황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기록이다. 황석두는 자신이 말한 대로 스승인 다블뤼 주교와 죽기까지 함께하여 보령 갈매못에서 같은 날 순교하였다. 이렇게 평범하지 않게 삶을 마무리한 황석두는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처음 순간에도 그러하였다.

그는 본래 관직에 나가기 위해 과거를 공부하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양반이었다. 그러다가 스승님의 인도로 천주교를 알게 된 그는 과거를 보러 서울로 올라가던 중 돌연 집으로 돌아왔다. 자신은 이미 ‘천당가는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이 세상의 과거는 필요치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과거 급제를 간절히 바라던 아버지는 대단히 분노하여 작두를 가지고 와서는 천주교를 버리지 않으려거든 거기에 목을 대라고 하였다. 그때부터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그래도 황석두는 뜻을 굽히지 않고 1년이 넘게 벙어리 행세를 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살았다. 결국 온 집안이 항복하여 부인과 어머니, 나중에는 아버지까지 세례를 받았다.

황석두의 삶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갈라지게 될 것이다.”(루카 12,51-53)라는 말씀의 뒷이야기를 보는 듯하다. 한 사람이 세상에 나기 위해서는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수정란의 세포들이 거듭거듭 분열해야 한다. 그 분열들이 혼란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하나가 되는 이유는 생명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황석두 성인은 영원한 생명을 향해 분열하고 분열하여 가족들과 더불어 마침내 그곳에 이르셨다. [2016년 6월 19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남북통일 기원 미사) 대전주보 3면, 김정환 신부(내포교회사연구소)]

 

 

병인순교 150주년 기념 (4) 성 금요일의 순교자들 ③ 오메트르 신부

 

 

어떤 물건을 떠올리면 특정한 사람이 생각나는 경우가 있다. 오늘 소개하는 오메트르 신부는 ‘나막신’을 떠올리면 저절로 생각나는 인물이다.

 

우리나라에서 짚신이 가난의 상징이었듯이 프랑스에서는 나막신이 그랬다. 오메트르는 1837년 프랑스 에젝에서 5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아주 가난하였고, 아버지는 조그마한 땅에 농사를 지으며 나막신을 만드는 일로 생계를 꾸렸다. 오메트르는 가난으로 인해 공부가 부족하여 당시 신학교에서 기본으로 요구하는 라틴어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그래도 인내력이 뛰어난 그였던지라 나막신과 더불어 어려움을 극복했다.

 

집 근처에는 그에게 라틴어를 가르쳐줄 사람이 없어서 8km 떨어진 마을로 가서 배워야 했다. 그는 아버지가 만들어준 나막신을 신고 매일 걸어 다녔다. 새벽 4시에 일어나 걸어가서 라틴어를 배우고 집으로 돌아와 밤 10시가 넘어서 숙제를 하는 생활이 몇 달간 계속되었다. 이런 열심에 감동한 본당 신부가 그를 특별히 추천하여 마침내 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일찍부터 선교사가 되기를 꿈꾸었던 오메트르는 묵묵히 준비에 들어갔다. 선교사는 많이 걸어 다녀야 하는 존재였기에 그는 방학 때와 개학 때 일부러 걸어 다녔다. 72km나 되는 거리를 나막신을 신고 이틀에 걸쳐 걸어서 왕복했다. 그의 삶이 이러하니 동료 신학생들도 ‘오메트르’ 하면 ‘나막신’을 떠올렸다. 오메트르는 부제품을 받을 때까지 나막신을 신고 다녔기에, 그가 부제가 되어 새 신발을 마련하자 장난스런 친구들이 오메트르의 나막신을 신학교 나무 아래 묻어주는 장례식을 치러주었다.

 

오메트르는 26살에 신부가 되어 1863년 조선에 입국하였다. 그러나 3년이 채 안 되어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나막신으로 단련된 그의 ‘걷기’는 빛을 보지 못했다. 그래도 말은 어느 정도 익힌 상태에서 체포되었으므로 포도청에서 한 최후 진술이 남아 있다.

 

“저는 독자적으로 조선에 입국했습니다. 비록 매를 맞다가 죽을지라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가르침을 받아 천주교 신앙이 골수에 새겨졌습니다.... 형벌을 받으면 좋고 좋습니다. 이번에 모질고 잔인한 형벌을 달게 받으면 당연히 뒤 세상에서 덕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어도 다시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오메트르 신부는 성모신심이 깊어서 성모승천대축일에 죽기를 희망했었다. 비록 그 소원대로는 아니지만 성 금요일인 1866년 3월 30일 갈매못에서 순교하여 더 큰 영광을 받았다.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11)는 말씀이 저절로 생각난다. [2016년 6월 26일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대전주보 3면, 김정환 신부(내포교회사연구소)]

 

 

인순교 150주년 기념 (5) 성 금요일의 순교자들 ④ 위앵 신부

 

 

조선에 들어와 활동하다가 순교한 프랑스 선교사들 중 가장 짧은 기간을 사신 분이 위앵 신부다. 1865년 29살에 조선에 들어와 9개월을 활동하다가 30살에 순교한 젊은이였다.

 

위앵은 1836년 프랑스 기용벨에서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본당 신부의 권유로 신학교에 들어갔고, 어려서부터 보던 ‘선교 잡지’에 매료되어 선교사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그 길에 장애도 많았다. 위앵이 교구 신부가 되면 식복사를 하려고 독신으로 사는 누나가 기다리고 있었고, 화재로 집이 다 타버리자 아버지는 아들이 교구 신부로서 가까이 있어 주기를 원했다. 위앵은 고민 속에 갈등하다가 처음의 결심대로 선교사의 길에 들어섰다.

 

1864년 6월 그는 조선으로 발령받았다. 당시 조선은 입국하면 살아나올 수 없는 ‘순교자의 나라’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 발령에 위앵 신부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이렇게 썼다.

 

“이제 되었습니다. 제 미래가 결정되었습니다! 조선이에요. 조선 만세! 저의 전 생애를 바치고 일을 하라고 제가 곧 보내질 곳이 바로 거기예요. 그리고 만일 좋으신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거룩한 복음의 증인으로서 제 피를 쏟을 수도 있을 곳이 바로 거기예요.”

 

당시 선교사들은 ‘죽음’을 기뻐한 것이 아니라, 단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로 기뻐하였다. 위앵 신부 역시 그 기쁨을 안고 조선에 입국했는데 실제로 단 한 번의 교우촌 방문을 마치고 순교했다.

 

그는 1865년 5월 충청도 내포지방으로 입국했고, 언어를 배우기 위해 황무실(충남 당진시 합덕읍 석우리) 교우촌으로 보내졌다. 거기서 교우들과 함께 지내며 7개월 정도 말을 배운 후 1866년 2월 말 처음으로 주변 교우촌들을 방문했다. 방문이 다 끝나기도 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 3월 11일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는 3월 30일 성 금요일에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하였다. 조선에 들어온 지 9개월이 채 안 된 상태였다.

 

이날 갈매못에서 다섯 분이 순교하셨는데 그 모습이 대조적이었다. 다블뤼 주교와 황석두 루카 복사는 사형수들에게 주는 마지막 음식을 웃으며 드셨다. 오메트르 신부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장주기 요셉 회장은 자세한 묘사가 없다. 반면 위앵 신부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에 대해 위앵 신부의 전기 작가는, “이러한 것들이 우리에겐 더 매력적일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들과 더 가깝기 때문이다.”라며 친근감 있게 받아들였다. 해석은 누구나 자유롭게 할 수 있겠으나 그 눈물의 진짜 이유는 본인과 하느님만이 아신다. 그럼에도 변함없는 사실은, 위앵 신부는 전 생애를 바치기 위해 조선에 왔고, 그 기간이 길든 짧든 소원대로 되었다는 점이다. 참 부러운 삶이다. [2016년 7월 3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 이동 대전주보 3면, 김정환 신부(내포교회사연구소)]

 

 

병인순교 150주년 기념 (6) 성 금요일의 순교자들 ⑤ 장주기 요셉 회장

 

 

성인전을 읽다보면 큰 병에 걸렸을 때에 하느님을 체험하고 새 삶을 시작하는 분들을 종종 본다. 장주기 요셉 회장의 경우도 그러하였다. 본래 신자가 아니었던 그는 26살에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중 대세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 물론 그 이전부터 한 친척에게 교리를 배워 천주교를 알고는 있었지만 ‘요셉’이라는 이름으로 사는 삶은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그는 병중에 세례를 받았을지라도 자기 이마에 흘러내린 물을 헛되게 하지 않았다. 가족들을 모두 신앙으로 이끌었고, 신심과 열성이 뛰어나 회장으로 임명되어 순교할 때까지 그 직무를 계속하였다. 그의 가족은 박해를 피해 여러 곳을 떠돌며 생활하다가 마지막에 정착한 곳이 산골 깊숙이 자리한 충청도 배론(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이었다.

1855년 잠시나마 박해가 잠잠하던 때에 조선 교회는 배론에 신학교를 정착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때 장주기 회장은 자기 집을 신학교로 쓰도록 내주었고, 집주인으로서 또한 배론 교우촌의 회장으로서 신학교 운영을 뒷바라지 하였다. 그렇게 10여 년 넘게 헌신하고 있을 때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났다. 당시 장주기 회장은 64세의 노인이었다.

박해가 일어났을 때 배론에는 프랑스 선교사 2명이 살고 있었다. 그들이 포졸들에게 체포되자 장주기 회장은 함께 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푸르티에 신부가 장주기 회장을 풀어달라고 부탁하였으므로 그날 체포되지는 않았다. 며칠 후 다시 포졸들이 인근 마을에 들이닥쳤을 때 그곳에 있던 장주기 회장도 체포되어 제천을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다음과 같이 신앙을 고백하였다.

“저는.... 제천으로 옮겨와 살면서 배우고 익힌 것이 곧 대군대부(大君大父)의 성교(聖敎, 거룩한 교회)입니다. 비록 만 번 형벌 아래 죽더라도 만 번 하느님을 배척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모든 처분을 달게 받으며 늦었지만 모든 죄를 인정합니다. 잘 헤아려 처리해 주십시오.”

그가 배론에 있던 선교사들보다 늦게 체포된 것이 오히려 다블뤼 주교 일행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장주기 회장은 자신이 다블뤼 주교 일행과 함께 충청도 갈매못으로 보내져 처형된다는 사실을 알고 기쁜 마음으로 동행했다. 그래서 마치 키레네 사람 시몬이 우연히 예루살렘에 왔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동행했던 것처럼 장주기 회장도 성 금요일에 동료 순교자들을 따라 그 길을 함께 갔다. 그는 순교 직전에 좌우를 돌아보며 “우리가 이렇게 죽는 것이 성교(聖敎)에 영광이라.”고 말하며 기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 [2016년 7월 10일 연중 제15주일 대전주보 3면, 김정환 신부(내포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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