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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고등학교 한국사 관련 교과서에 나타난 천주교회사 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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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8-19 ㅣ No.1265

고등학교 한국사 관련 교과서에 나타난 천주교회사 서술

 

 

1. 머리말

 

이 글은 고등학교의 한국사와 관련한 교과서에 나타난 천주교회사에 관한 서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데 목적이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18세기 후반에 창설되었다. 교세가 커지자 정부는 천주교가 유교적 질서를 부정하는 것으로 보고 탄압하였다. 여러 차례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신자는 점차 늘었다. 개항 이후 선교와 신앙의 자유를 얻으면서 교회는 근대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현대 한국사회에서 천주교는 사회사업과 민주화운동에 공헌하였다. 이러한 천주교회사에 관한 연구는 교회의 성장과 함께 계속되어서 그 성과가 적지 않았다. 그러면 천주교회의 성장과 교회사 연구의 성과가 학교 교육에는 어떻게 반영되고 있을까. 이 점은 한국사 관련 교과서의 천주교에 관한 서술을 분석함으로써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역사 교과서는 학생과 시민이 역사적 지식을 습득하고 역사의식을 형성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학생과 시민의 천주교회사에 관한 이해와 인식에 교과서의 서술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한국사와 관련한 교과서에 나타난 천주교회사에 대한 분석은 매우 의미 있고 중요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한국사 관련 교과서의 천주교회사에 관한 서술을 검토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방 이후 국사 교과서에 보이는 조선후기 천주교에 관한 서술의 변화를 살핀 논문이 있었을 따름이다.1) 이 학위 논문에서는 조선후기 천주교 전래와 박해에 관한 연구를 개관하고 몇몇 교과서를 선정하여 그 서술의 변화를 살폈다.2) 이 논문은 여러 교과서에 보이는 천주교 전래와 박해에 관한 서술을 검토하여서 이 방면 연구의 시작을 알렸다. 하지만 대상 시기를 조선후기에 한정하여 천주교와 관련한 내용을 살피는 데 그쳤다.3)

 

따라서 한국사 관련 교과서에서 조선후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천주교회사를 어떠한 시각에서 어떠한 내용으로 서술하였는지에 관한 포괄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이 글에서 구체적으로 분석하고자 하는 교과서는 지금 고등학교에서 사용하는 《(고등학교) 국사》(1종), 《(고등학교) 한국 근 ‧ 현대사》(6종의 검정교과서)와 《(고등학교) 한국사》(6종의 검정교과서) 교과서이다.4) 고등학교의 한국사 관련 교과목은 2010년까지 7차 교육과정에 따라서 편성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생을 위한 공통과목으로 ‘국사’가 있었고, 고등학교 2 ‧ 3학년생의 심화 선택과목으로 ‘한국 근 ‧ 현대사’ 등이 있었다. 뒤이은 2007 개정 교육과정은 시행되지 못하였고, 2009 개정 교육과정에 의하여 ‘한국사’를 선택과목으로 정하여 2011년부터 교육 ‧ 학습이 이루어지고 있다.5) 2011년 현재 고등학교 1학년생부터는 선택과목인 ‘한국사’를 배운다. 2학년생은 지난해 ‘국사’를 학습하였고, 2 ‧ 3학년생 가운데 ‘한국 근 ‧ 현대사’ 과목을 선택한 학생들은 ‘한국 근 ‧ 현대사’를 배우고 있다. 이들 세 과목의 교과서 13종을 이 글에서는 검토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본문에서 살필 내용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첫째, 교과서의 구성 체계를 분석하여 천주교회사 서술의 방향과 비중을 파악하고자 한다. 교과서는 교육 ‧ 학습에 필요한 역사적 사실을 선별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그 단원의 구성과 소주제의 설정을 통하여 천주교와 관련한 서술 가운데 어느 시기, 어떤 주제를 교과서에 실었는지를 살필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교과서의 서술 내용을 분석하여 천주교회사 서술의 문제점을 알아보고자 한다. 여기에서는 올바른 역사적 사실의 전달이 이루어졌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나아가 교과서에 나타난 천주교회사를 서술하는 관점과 역사적 공과에 대한 평가와 해석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이러한 검토를 통하여 교과서에 나타난 천주교회사 서술의 특징과 한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토대로 천주교회사 서술의 개선 방향을 찾는데 도움을 얻고자 한다.

 

 

2. 교과서의 구성 체계와 천주교회사

 

이 글에서 검토하고자 하는 여러 교과서는 서로 다른 서술 범위와 단원 구성 및 내용 체계를 가지고 있다. 제목에 보이듯이 《국사》와 《한국사》는 선사시대부터 대한민국까지 전 시대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근 ‧ 현대사》는 대체로 조선후기 근대사회의 태동부터 현대까지의 역사를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근대사와 현대사를 중심으로 서술함으로써 앞의 《국사》, 《한국사》에 비하여 근 ‧ 현대의 사회와 문화를 좀 더 자세히 다루었다. 또한 단원과 주제의 구성을 볼 때 여러 교과서를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분류사 중심의 체계로 구성한 경우이다. 《국사》는 정치사, 경제사, 사회사, 문화사로 나누어서 대단원을 구성하였다.6) 대단원 아래의 중단원은 다섯 시기로 나누어 고대, 중세, 근세, 근대 태동기, 근 ‧ 현대의 5개로 구성하였다. 둘째, 시대사 중심의 체제로 구성한 것이 있다. 《한국사》는 정치사 중심의 통사로 이루어졌다. 시대별 체계로 대단원을 구성하였다.7) 중단원은 한 시대의 정치적 변화를 중심으로 2~4개로 구성하였다. 《근 ‧ 현대사》도 역시 시대별로 나누어 근대사회, 민족독립운동기, 현대사회를 중심으로 대단원을 구성하였다.8) 그 아래 중단원은 같은 시대의 정치, 경제와 사회, 문화로 나누어 구성하였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면서 교과서의 천주교회사 관련 구성 체계를 살펴보자.

 

 

 

7차 교육과정에 따른 국사 교과서는 4개의 소주제에서 천주교에 관하여 서술하였다. 천주교 관련 서술이 처음 나오는 것은 대단원 V. 사회구조와 사회생활, 중단원 4. 근대 태동기의 사회, 소단원 3) 사회 변혁의 움직임 가운데 ‘천주교의 전파’에서였다. 이 소주제에서는 천주교의 수용과 신유박해를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두 번째로는 대단원 VI. 민족 문화의 발달, 중단원 4. 근대 태동기의 문화, 소단원 3) 과학 기술의 발달 가운데 ‘서양 문물의 수용’에서 천주교의 수용에 관하여 간략히 쓴 부분이 있었다. 세 번째 서술은 같은 대단원, 중단원 5. 근 ‧ 현대의 문화, 소단원 1) 근대 문물의 수용과 발전 중 ‘문예와 종교의 새 경향’에 있었다. 천주교의 선교 자유와 개신교의 동향을 묶어서 1문장에 담았다. 네 번째로는 같은 대단원과 중단원 가운데 소단원 2) 일제의 식민지 문화 정책과 국학운동의 전개에서 ‘종교 활동’이라는 소주제 아래 천주교의 활동에 관한 내용 1문장을 실었다.

 

〈표 1〉에 있듯이 《국사》에서는 대체로 조선후기, 개화기, 일제강점기의 사회사와 문화사 분야에서 천주교에 관한 내용을 실었다. ‘천주교의 전파’라는 소주제는 세도정치하 사회 불안의 심화, 예언 사상의 대두, 동학의 발생, 농민의 항거와 함께 소단원을 구성하였다. 19세기 세도정치기 사회를 서술한 소단원에서 천주교의 수용을 서술하였다. 이에 따라 18세기 후반 정조 때 서학과 천주교의 수용이 이루어진 일을 그 뒤인 19세기의 일로 잘못 이해할 여지가 있다. 더욱이 천주교의 전파에 이어서 ‘동학의 발생’을 서술함으로써 천주교의 수용을 1860년에 창시한 동학의 성립과 비슷한 시기의 일로 볼 수 있다.

 

근대 이후의 종교 관련 서술은 문화사에서 서술하였다. 국사 교과서의 문화사 단원을 보면 사상과 종교, 학문, 과학 기술, 예술, 문화 전파 등을 소주제로 설정하였다. 근대 이전 시기의 구성을 보면 불교, 유교를 소단원이나 소주제로 설정한 것이 많았다.9) 근대 이후의 시기에는 소단원의 소주제로 여러 종교에 관한 내용을 묶어서 서술하였다. 각 종교에 관하여는 대략 비슷한 분량으로 나누어 썼다. 이 가운데 천주교에 관한 내용은 약 1문장의 분량으로 매우 적었다. 그리고 현대 문화사에서는 종교계 일반에 관하여만 서술하여 천주교를 비롯한 개별 종교에 관한 서술을 거의 찾을 수 없었다.

 

 

 

한국 근 ‧ 현대사 교과서는 총 6종인데 각 교과서의 단원, 소주제의 구성이 대체로 비슷하였다. 이 가운데 천주교 관련 서술을 독립된 소주제로 설정한 경우는 없었다. 〈표 2〉에 있듯이 대체로 6개 소주제의 본문 일부에서 천주교회사를 서술하였다. 첫째, I. 한국 근 ‧ 현대사의 이해, 1. 근대 사회의 태동 단원에서 ‘서민 문화의 발달과 민중 의식의 성장’을 살피면서 천주교의 전래와 확산에 관하여 간략히 서술하였다. 둘째, II. 근대사회의 전개 단원 가운데 ‘병인양요’에서 흥선대원군 집권기 병인박해에 관하여 서술하였다. 셋째, 같은 대단원의 ‘서양 열강과의 수교’에서는 프랑스 선교사의 선교의 자유에 관하여 언급하였다. 넷째, 역시 같은 대단원의 ‘종교’에서 천주교의 활동을 썼다. 다섯째, III. 민족 독립 운동의 전개 단원의 ‘종교 활동’에서 일제강점기 천주교의 동향을 서술하였다. 마지막으로 몇몇 한국 근 ․ 현대사 교과서에서 IV. 현대 사회의 발전 단원 가운데 ‘종교의 성장’이라는 소주제 아래 천주교의 주요 동향에 관하여 적었다.

 

한국 근 ‧ 현대사 교과서의 구성 체계를 볼 때 근대 개화기, 일제강점기, 현대의 정치사 ‧ 문화사 분야에서 천주교회사를 서술하였다. 6종의 교과서를 비교할 때 모든 《근 ‧ 현대사》에서 병인박해, 개화기의 개화운동과 사회사업, 일제강점기 사회사업과 의민단에 관한 내용을 실었다. 천주교회사 서술은 시대에 따라서 골고루 있었지만 각 소주제에서 천주교 관련 서술의 분량은 대개 1~2문단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천주교에 관한 소주제의 설정이 없었고, 각 종교마다 1~2문단으로 나누어 서술하였기 때문이었다. 개별 교과서에 따른 차이는 현대사 관련 서술에서 가장 크게 나타났다. 《근 ‧ 현대사》(미래)와 (천재)에서는 천주교를 비롯한 현대 종교의 동향에 관한 서술을 거의 찾을 수 없었다. 두산과 중앙의 한국 근 ‧ 현대사 교과서에 현대 종교 및 천주교 관련 서술의 분량이 비교적 많았다.

 

2009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한국사 교과서의 천주교에 관한 서술은 《근 ‧ 현대사》의 서술에 비하여 크게 부족하였다. 이것은 교육과정의 편제에 따른 교과목의 범위와 연관이 깊었다. 근대사와 현대사를 중점으로 다루는 《근 ‧ 현대사》에 비하여 《한국사》는 근대 이전의 역사를 포괄하는 통사의 형식으로 구성하여, 상대적으로 근 ‧ 현대사에 관한 비중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6종의 한국사 교과서를 보면 대단원의 제목은 모두 같지만 중단원, 소단원, 소주제의 구성과 명칭은 서로 달랐다. 대체로 5개의 소주제에서 천주교에 관한 서술을 담았다.

 

 

 

〈표 3〉에 있듯이 대부분의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조선후기 천주교의 수용과 정부의 탄압, 흥선대원군 집권기 병인박해, 개화기 한불조약과 선교의 자유, 천주교의 계몽 활동과 사회사업, 일제강점기 천주교의 사회운동과 의민단 조직 등에 관하여 서술하였다. 현대사에서 천주교 관련 서술은 거의 없었다. 각 교과서를 비교하면, 《한국사》(삼화)는 조선후기 천주교 수용과 병인박해에 관하여만 서술하였다. 천주교 수용에 대하여는 1문장만을 제시하였고, 천주교의 확산과 병인박해에 관하여도 2문장으로 매우 간략히 썼다. 더욱이 이 교과서에서는 근대 이후 천주교회사에 관한 서술을 찾을 수 없었다. 개별 교과서에 따라서 천주교 관련 내용의 구성에 차이가 컸다.

 

한국사 교과서의 구성 체계를 앞선 국사 교과서의 것과 비교하면 이전보다 몇 개의 소주제에서 천주교에 관한 서술을 첨가하였다. 개항 전후에 일어난 병인박해와 천주교의 계몽운동과 사회사업에 관한 서술이 늘었다. 《국사》와 《한국사》의 구성에 나타난 공통점으로 두 가지가 두드러졌다. 하나는 개화기, 일제강점기 종교의 동향을 다룬 소주제에서 여러 종교에 관한 내용을 거의 비슷한 분량으로 나누어 쓴 점이다. 이것은 교육과학기술부에서 고시하는 〈교육과정〉이나 교과서 집필 기준안과 연관이 깊다. 교육과학기술부에서 제시한 〈2007년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2009. 8. 4)은 지금의 한국사 교과서를 집필하는 준거가 되었다.10) 이 집필 기준 가운데 대단원 VI. 자주적 근대 국가의 수립, 12. 근대 사회와 문화에서 “종교에 대해서는 특정 종교에 대해 편향이 없도록 하고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객관적으로 설명하도록 한다”라고 하였다. 개별 종교의 시대적 역할과 관계없이 특정 종교에 치우치지 않게 서술하도록 하였다. 이는 특정 종교에 대한 편향 시비를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국사》와 《한국사》 모두 대한민국시기 천주교에 관한 서술이 없다는 점이다. 이들 교과서는 현대의 정치적 변화에 관한 내용을 구성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에 따라서 천주교를 비롯한 종교계의 동향에 관한 내용을 거의 찾을 수 없었다. 이 점은 현대 사회와 문화에서 종교가 가지는 의미를 낮추어 보는 시각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선사 이후 전근대사까지의 구성 체계에서는 종교 ․ 신앙에 관한 부분이 많았던 데 비하여 근대 이후 특히 현대사에서는 종교 관련 내용이 크게 줄어서 나타났다. 이것은 종교가 전근대의 산물이며 현대인에게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11)

 

다음으로 교과서 내용의 구성 방식을 보면 크게 본문 서술과 학습 ‧ 탐구 자료의 제시로 이루어졌다. 본문의 서술을 통하여 주요한 역사적 사실과 해석을 드러냈다. 학습 자료는 사진, 그림, 사료, 도움글 등이 있어서 본문 서술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되거나 그 내용을 보충하는 것이었다.

 

〈표 4〉에 있듯이 《국사》에서는 《천주실의》의 표지 사진과 《상재상서》의 내용을 제시하였다. 《근 ‧ 현대사》에서는 사진 자료로 절두산 순교지, 명동 성당, 약현 성당을 실었다. 사료 및 읽기자료로는 일제의 ‘포교 규칙’, 모 주간지에 실린 천주교의 과거사 반성 문건이 있었다. 《근 ‧ 현대사》(천재)는 천주교의 확산을 보여 주는 지도를 실었다. 《한국사》의 학습자료를 보면 사진, 사료, 도움글과 더불어 그림을 실었다. 초기의 천주교 미사, 서울 명례방 집회, 병인양요 기록화가 교과서에 등장하였다. 이전의 《국사》, 《근 ‧ 현대사》에서 1~2개의 천주교 관련 학습 자료를 실었던 것과 비교하면, 각 《한국사》에 실린 자료는 2~6개로 그 비중이 늘었다. 다만 천주교에 관한 주제 설정과 본문 서술이 적었던 《한국사》(삼화)에서는 천주교 관련 학습 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

 

 

 

각 교과서의 말미에는 연표와 찾아보기가 있었다. 《국사》의 부록 연표에서 천주교에 관한 내용으로는 1786년 서학을 금함, 1801년 신유박해 ‧ 황사영 백서 사건, 1831년 천주교 조선교구 설치,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 1892년 명동 성당 착공 등이 있었다.12) 천주교의 주요 사건을 《국사》의 연표에 기록하였다. 《근 ‧ 현대사》와 《한국사》의 연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또한 찾아보기를 보면 《국사》에서는 ‘천주교’를 색인어로 4곳의 쪽수를 실었다. 《근 ‧ 현대사》와 《한국사》 가운데는 천주교를 색인어로 등재하지 않은 교과서도 있었다. 《근 ‧ 현대사》(금성) ‧ (미래) ‧ (중앙) 및 《한국사》(미래)에서는 찾아보기에 천주교 항목을 실지 않았다. 그리고 찾아보기에서 제시한 쪽수를 펼치면 천주교 관련 서술이 없는 교과서도 있었다.13) 교육 ‧ 학습에 도움이 되도록 찾아보기 관련 내용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요컨대 고등학교 한국사 관련 교과서에서 천주교회사에 관한 서술은 대체로 조선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사회사, 문화사 단원의 소주제에 실렸다. 《국사》 교과서에서는 조선후기 천주교 수용에 관한 내용을 독립적 소주제로 설정하였다. 《근 ‧ 현대사》와 《한국사》는 19세기 천주교의 확산과 병인박해를 소주제의 주요 내용으로 다루었다.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천주교의 사회사업과 독립운동에 관하여는 종교계의 동향을 소개하면서 간략히 서술하였다. 또한 한국사 관련 교과서의 내용 구성은 본문과 학습자료 등으로 이루어졌다. 천주교와 연관한 자료로는 《천주실의》, 절두산 순교지, 명동 성당 등의 사진과 《상재상서》와 같은 사료를 실었다. 이는 천주교회사에 관한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3. 교과서의 천주교회사 서술 내용


1) 조선후기 천주교의 수용과 박해에 관한 서술

 

조선후기 서학의 수용과 천주교회의 창설에 관하여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14) 1784년 2월 무렵 이승훈이 세례를 받음으로써 최초의 조선인 천주교 신자가 탄생하였다. 이승훈은 스스로 교리를 익혀서 신앙을 받아들인 이벽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출범시켰다. 조선인이 자발적으로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교세를 넓혔다. 조선 정부는 유교적 의식을 거부한 전례 문제로 천주교에 대한 금지령을 내렸다. 순조가 즉위한 뒤 신유박해가 일어났고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천주교를 심하게 탄압하였다. 박해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는 19세기 서민과 여성들 사이에 지속적으로 확산되었다.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교세가 커진 천주교는 병인박해로 다시 탄압받았다. 이 절에서는 이러한 조선후기 천주교의 수용과 박해, 그 확산에 관한 교과서의 서술을 검토하고자 한다.

 

(1) 서학과 천주교의 수용에 관한 서술

 

《국사》에서는 조선후기 ‘서양 문물의 수용’이라는 소주제에서 서양문물의 수용과 천주교에 관한 내용을 실었다. 여기에 보면 “이익의 제자 중에서 일부는 서양의 종교인 천주교까지 수용한 사람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학자는 서양의 과학 기술은 받아들이면서도 천주교는 배척하였다”라고 하였다.15) 이러한 서술로는 서양의 문물과 천주교가 어떠한 연관을 가지는지에 관하여 알기 어렵다. 교과서에서 제시한 서양의 문물로는 세계지도, 화포, 천리경, 자명종이 있었다. 여기에 천주교 서적〔서학서〕의 유입에 관한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교과서에서는 서학서의 도입에 관한 내용을 서술하여야 할 것이다. 천주교 서적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초기 천주교가 수용된 역사적 맥락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사 교과서의 본격적인 천주교 관련 서술은 소주제 ‘천주교의 전파’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 남인계 일부 실학자의 천주교 신앙과 이승훈의 영세에 관하여 서술하였다.16) 17세기에 중국을 왕래한 사신들에 의하여 서학이 소개되었고 18세기 후반에 천주교가 신앙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정치와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고심하던 남인계 일부 실학자들이 천주교 서적을 읽고 신앙생활을 하였던 것으로 적었다. 천주교를 수용한 시기〔18세기 후반〕와 초기 수용 집단〔남인 계열의 일부 실학자〕, 정치 사회적 배경〔정치와 사회의 모순〕, 천주교 서적을 통한 수용 등을 밝혔다. 이 부분이 천주교에 관한 첫 번째 서술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천주교의 신관, 인간관, 세계관 등에 관한 기본적 서술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이어서 같은 《국사》에서는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온 이후 신앙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음을 언급하였다.17) 구체적인 인물의 이름을 제시하여 초기 천주교회의 창설에 관한 이해를 도왔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조선의 천주교회는 다른 나라의 교회 설립과 다른 특수성을 가졌다. 선교사가 들어와 선교 활동을 펴지 않은 상황에서 일부 지식인들이 스스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서 자발적으로 신앙 공동체를 세웠다.18) 교과서에서는 능동적인 천주교 수용과 자발적인 천주교회 창설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에 관하여는 밝혀 쓰지 않았다.

 

이와 연관하여 소주제의 제목에 보이는 ‘천주교의 전파’는 천주교의 전파와 수용 또는 천주교의 수용으로 고치는 것이 좀 더 적절할 것이다. 조선후기 천주교 서적을 통하여 천주교가 전파되었다는 내용에서 ‘전파’는 사전적 의미를 따질 때 외부 사회의 문화 요소가 전해진 측면을 강조한 용어이다. 조선인들이 외래 문화인 천주교를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을 볼 때 ‘천주교의 수용’이라 표현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실제 본문의 내용에서 “이익의 제자 중에서 일부는 서양의 종교인 천주교까지 수용한 사람도 있었으나…”라고 서술한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19)

 

한국 근 ‧ 현대사 교과서의 초기 천주교 수용에 관한 서술은 《국사》의 서술보다 소략하였다. 이것은 한국 근 ․ 현대사 교과서가 대체로 흥선대원군 집권기부터 서술하였기 때문이다. 《근 ‧ 현대사》(중앙)에서는 “17세기에 전래된 천주교는 19세기에 들어와 신앙으로 뿌리내리기 시작하였으며…”라고 하였다.20)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천주교회를 창설한 18세기 후반에 관한 서술은 빠졌다. 대신에 17세기에 서적을 통한 천주교의 전래가 이루어진 뒤 19세기에 들어서야 천주교 신앙 공동체가 발전한 것처럼 서술한 것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18세기 후반의 천주교 수용과 신앙에 관한 서술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대부분 천주교의 수용에 관하여 앞서 본 국사 교과서보다 간략히 서술하였다. 《한국사》(법문) ‧ (천재)에서 18세기 후반에 남인 계열의 실학자들이 신앙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적었다.21) 다른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좀 더 막연히 ‘현실 개혁을 꿈꾸던 진보적 학자들’22)이나 ‘일부 사람들’23)이 천주교를 믿기 시작하였다고 하였다. 초기 수용집단에 관하여 애매하게 썼던 것이다. 초기 천주교를 수용한 인물과 집단에 관한 구체적인 서술을 통하여 초기 천주교회사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한국사》(미래)에서는 ‘서학, 문명의 전파인가, 침략의 도구인가’라는 소주제 아래 천주교의 수용에 관하여 서술하였다.24) 천주교를 제국주의 침략과 연결하여 보려는 시각을 드러내었다.25) 초기 천주교가 서양 선교사의 파견 없이 이루어졌던 점을 생각하면 소주제의 제목으로 적합하지 않은 표현으로 보인다.

 

앞선 국사, 한국 근 ‧ 현대사 교과서와 비교할 때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천주교 수용과 관련한 학습 자료를 좀 더 풍부하게 실었다. 《한국사》(지학)에서는 ‘천주교를 연구하던 천진암’이라는 제목의 사진을 실었다. 사진에 대한 설명을 보면 “천주교 역사상 선교사 없이 신앙으로 받아들인 경우는 우리나라밖에 없다”라고 하였다.26) 천진암을 천주교의 자발적 수용과 연관하여 썼다. 천진암의 강학이 천주교 수용 또는 천주교회의 창설로 이어진다는 주장은 아직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27) 따라서 이 부분의 사진과 사진 설명은 적합한 자료로 보기 어렵다.

 

(2) 천주교 박해와 확산에 관한 서술

 

《국사》에서는 조선 정부의 천주교 금지와 박해에 관하여 서술하였다. 이에 따르면 정부는 천주교가 유교의 제사 의식을 거부하자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 부정과 국왕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사교로 규정하였다”라고 하였다.28) 천주교를 금지한 까닭이 천주교가 유교적 정치 이념에 따른 사회 질서와 국왕의 권위를 해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유교적 질서와 천주교 신앙을 서로 대립하는 관계로 서술하였다.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의 정치적 배경에 관하여는 한국사 교과서의 서술이 주목된다. 《한국사》(법문)에서는 신유박해를 순조가 즉위한 직후에 노론 강경파인 벽파가 집권하면서 이루어진 대대적인 탄압으로 설명하였다.29) 도움글을 통하여 신유박해로 이승훈, 이가환 등이 처형되었고 정약용이 유배되었음을 밝혔다.30) 그 규모에 관하여는 《한국사》(천재)에서 제시하였다. 정부는 이승훈을 비롯한 300여 명의 천주교인을 처형하였고 곧이어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천주교를 더욱 심하게 탄압하였음을 서술하였다.31)

 

신유박해에 뒤이은 1839년의 기해박해에 관한 내용은 《한국사》(법문)에서 찾을 수 있다.32) 이에 따르면 천주교 조선교구를 ‘프랑스 외방 선교회’가 맡으면서 3명의 프랑스 신부가 파견되었다. 여기에서 프랑스 외방 선교회는 정확한 명칭이 아니었다. 파리 외방전교회로 고쳐야 할 것이다. 선교사의 활동으로 조선의 천주교 신도가 9,000여 명으로 증가하였으며, 조선 정부는 프랑스인 신부 3명을 포함한 많은 천주교도를 처형하였는데 이것이 기해박해였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기에 탄압이 완화되면서 천주교가 크게 확산되었다. 천주교의 교세 확장에 관하여는 한국 근 ․ 현대사 교과서의 서술을 살펴보자. 《근 ‧ 현대사》(천재)에서는 “철종 때 베르누 주교와 리델 신부 등 12인의 프랑스 선교사가 들어와 전도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면서 점차 활기를 되찾았다”라고 하였다.33) 19세기 중엽 이후 프랑스 선교사들이 국내에 들어와 선교 활동을 전개하여 천주교 신자들이 늘어났다. 그 결과 고종 초년에는 천주교 신도가 약 2만 명에 이르렀다는 내용도 있다.34) 같은 천재 교과서에서는 천주교의 지역적 확산을 보여 주는 지도를 제시하였다. 조선 전도에 ‘초기 천주교 전파 지역’과 ‘1850년대 초 천주교 포교 지역’을 표시하였다. 이것은 13종의 역사 교과서 가운데 천주교 관련 지도로 유일하다. 천주교의 지역적 분포와 확산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이러한 서술은 한국사 교과서에서도 찾을 수 있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국내에 들어와 활동하면서 교세가 확장되었던 것으로 서술하였다.35) 한국 근 ‧ 현대사와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대체로 프랑스 신부의 활동을 교세 확장의 주요 요인으로 제시하였다. 조선인 신부의 역할이나 신도들의 노력에 관한 서술은 찾을 수 없었다. 천주교의 확산에서 프랑스인 선교사와 더불어 조선인 신부와 신자의 역할에 관한 균형 잡힌 서술이 필요해 보인다.

 

천주교가 널리 수용된 정치사회적 ‧ 종교사상적 요인에 관한 서술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국사》에서는 두 가지 방향으로 확산 요인을 설명하였다.36) 첫째, 세도정치로 말미암은 사회 불안과 어려운 현실에 대한 불만이 배경이었고, 둘째, 신 앞에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논리와 내세 신앙 등의 교리가 일부 백성에게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세도 정치기의 정치 사회적 배경과 천주교 신앙 ‧ 교리를 종교사상적 배경으로 보았다.

 

이와 같은 내용은 한국 근 ‧ 현대사 교과서와 한국사 교과서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근 ‧ 현대사》(중앙)를 보면 19세기에 천주교가 신앙으로 뿌리내린 까닭은 천주 앞에서의 인간 평등과 내세에서의 영생을 약속하였기 때문으로 설명하였다.37) 여러 한국사 교과서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실었다.38) 특히 여러 교과서에서 공통적으로 제시한 것은 인간 평등에 대한 사상이, 천주교가 동학과 더불어 널리 확산된 요인이라는 점이었다. 평등 사상은 근대 의식의 형성과 관련하여 중요하였다. 모든 인간이 천주의 자녀라는 종교적 평등 개념을 조선의 신도들은 신분평등, 남녀평등과 같은 사회적 평등의 개념으로 수용하였던 것이다. 이를 볼 때 천주교가 조선후기 새로운 인간관 ․ 세계관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던 점을 좀 더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3) 병인박해에 관한 서술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박해가 이루어졌다. 한국 근 ‧ 현대사 교과서에서는 병인박해가 일어난 정치적 ‧ 외교적 배경과 그 규모에 관하여 썼다.39) 이에 따르면 대원군은 집권 초기 러시아 세력을 막기 위하여 프랑스 선교사를 통하여 프랑스의 힘을 빌고자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이 무렵 청에서 천주교를 탄압한다는 소식이 조선에 전해졌다. 게다가 국내에서는 천주교를 금지해야 한다는 유생들의 요구가 높아졌다. 이러한 대외 정책의 기조와 유교 질서의 붕괴를 경계하는 여론에 따라서 흥선대원군이 천주교를 탄압하였다.

 

병인박해의 좀 더 구체적인 실태는 《근 ‧ 현대사》(미래)와 (천재)의 서술에서 찾을 수 있다.40) 특히 《근 ‧ 현대사》(천재)에서는 ‘병인박해’에 관한 도움글을 실었다. 정부가 12명의 프랑스 선교사 가운데 베르누 주교 등 신부 9명과 천주교 신자 약 8,000명을 체포하여 처형한 점을 자세히 적었다. 이러한 병인박해는 양요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서술을 통하여 볼 때 병인박해가 1866년 한 해 동안에 일어났으며 병인양요 이전에 끝났던 일처럼 잘못 파악할 여지가 있다. 이는 역사적 사실과 달랐다. 사실 프랑스 군대가 물러가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더욱 심해졌다.41) 《근 ‧ 현대사》(금성)에서는 오페르트 사건 이후에도 천주교를 탄압하였음을 서술하였다.42)

 

이러한 병인양요의 원인과 구체적 실태에 관하여는 한국사 교과서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게 서술하였다.43) 대체로 1866년에 프랑스 선교사 9명과 신도 8천 명을 처형한 일을 병인박해라 하였다. 《한국사》(지학)에서는 좀 더 정확히 “흥선대원군은 유생들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1866년부터 6년 동안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였다”라고 썼다.44)

 

병인박해에 대한 이해를 돕는 시각 자료로는 절두산 순교지 사진과 병인박해 기록화가 등장하였다.45) 《한국사》(비상)에서는 천주교 순교지로 해미읍성 사진을 실었다. 사진에 대한 설명을 보면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해미읍성에서 1,000여 명의 신자를 처형하였고 김대건 신부도 이곳에서 순교하였던 것으로 썼다.46) 해미에서 내포 지역의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이곳이 병인박해가 일어난 대표적인 순교지라고 하기 어렵다. 정부는 프랑스 선교사를 대체로 서울 새남터에서 처형하였고, 프랑스 함대가 올라온 한강변 양화진, 즉 절두산에서 많은 천주교 신도를 처형하였다. 설명에 보이는 김대건 신부가 처형된 곳도 해미가 아니라 새남터였다.47) 병인박해를 이해하는 데 사진의 선택이나 그 설명이 적합하지 못하였다.

 

병인박해는 천주교가 외세와 결탁한 세력이라는 인식과 연관이 깊었다. 《근 ‧ 현대사》(천재)에서는 “당시 조선인들은 천주교가 조선에 압박을 가하고 있던 서양 열강과 연결되어 있어 조선에 해를 가하게 될 잠재적인 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라고 하였다.48) 천주교가 체제를 위협하는 종교로 여겨져 경계와 감시의 대상이었던 점을 서술하였다. 사실 프랑스 선교사는 선교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프랑스의 군사력을 기대하였다. 병인양요 때 리델 신부와 몇몇 천주교 신자들은 프랑스 군함에 타고 있었다. 오페르트는 페롱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 신자의 안내를 받아서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 하였다.49) 《근 ‧ 현대사》(중앙)에서는 천주교가 탄압을 받은 것은 그 교리가 유교 질서에 위배되었기 때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당시 천주교도들이 서양 열강의 힘을 빌려 선교의 자유를 얻으려 한 데에도 원인이 있었다”라고 썼다.50) 이처럼 서양 세력과 연계하여 신앙의 자유를 누리려 한 천주교 신자의 행위에 관하여는 그 문제점에 대한 비판적 서술이 있어야 할 것이다.


2) 개화기 천주교 선교의 자유와 사회운동에 관한 서술

 

개항 이후 1880년대 신앙의 자유가 묵인되었다. 1886년에는 한불조약의 체결로 천주교 선교사의 활동이 보장되었다. 1895년에 고종과 뮈텔 주교의 만남으로 천주교회는 박해에서 벗어났으며 1899년에 교민조약을 통하여 신앙의 자유가 공인되었다. 개화기 천주교회는 교육 ‧ 언론 ‧ 출판 활동을 벌이고 사회사업에 앞장섰다.51) 천주교회는 1882년에 인현 서당〔韓漢學校〕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초등 ․ 여성 ‧ 신학 교육기관을 설립 ‧ 운영하였다. 천주교 계통의 학교는 1910년 교구 통계에 따르면 124개에 이르렀다. 언론활동으로 1906년에 《경향신문》을 간행하여 새로 제정한 법령을 소개함으로써 법률 계몽에 나섰다. 또한 한국 최초의 고아원인 천주교 보육원을 운영하는 등 사회사업에 힘썼다. 천주교 신도의 대표적인 활약으로는 서상돈이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일과 안중근이 이토오 히로부미를 살해한 일을 들 수 있다.

 

(1) 천주교 선교의 자유에 관한 서술

 

《국사》에서는 개항 이후 종교계에 나타난 가장 큰 변화로 서양 종교의 포교가 자유로워진 점을 들었다. 프랑스와의 수교 이후 천주교는 선교의 자유를 얻었다고 하였다.52) 한국 근 ․ 현대사, 한국사 교과서에서도 한불조약을 체결한 이후 천주교가 선교의 자유를 누렸던 것을 서술하였다.53)

 

다만 《한국사》(법문)에서는 “1886년에 체결된 조 ‧ 프 수호 통상 조약으로 프랑스는 다른 나라와는 달리 조선에 선교를 목적으로 학교를 세울 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되었다”라고 하였다.54) 조약 체결로 프랑스가 조선에 선교 목적의 학교를 세울 수 있는 특권을 얻었던 것처럼 서술하였다. 이것은 한불조약의 제9관 2항에 보이는 “조선에서 학문을 연구하기 위하여 혹은 어문, 과학, 법학 혹은 예술을 敎誨하기 위하여 조선으로 가게 되는 불란서인들은 締約國이 切願하는 친선의 증거로서 언제든지 원조와 지원을 받아야 한다”라는 부분의 의미를 밝히는 일과 연관이 있었다. 천주교 측에서는 이를 신앙 및 선교의 자유를 보장 받은 것으로 이해하였지만 실제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였다.55) 프랑스 선교사가 조선에서 선교 목적의 학교를 세울 특권을 누렸다는 서술은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2) 근대 천주교회의 사회운동에 관한 서술

 

한국 근 ‧ 현대사 교과서는 근대 사회에서 종교의 새로운 동향을 설명하면서 천주교의 사회사업과 교육 ․ 언론 활동 등에 관하여 썼다. 첫째, 6종의 한국 근 ‧ 현대사 교과서에서 모두 천주교회가 고아원(보육원)과 양로원을 운영하여 사회사업에 앞장섰음을 서술하였다.56) 사회 소외 계층을 돌보는 일에 적극 참여하였던 것으로 평가하였다.57) 이를 통하여 근대 천주교회가 사회사업을 전개하여 민중 생활에 기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근 ‧ 현대사》(법문)에서는 사회사업과 더불어 빈민들에게 약을 나누어 주는 의료사업을 벌였음을 덧붙였다.58)

 

둘째로, 천주교가 교육과 언론을 통한 개화운동과 계몽운동에 기여하였던 것으로 썼다.59) 학교의 설립을 통한 교육활동에 관하여는 《근 ‧ 현대사》(미래) ‧ (중앙) ‧ (천재)에서 언급하였다.60) 이 가운데 천재 교과서는 1910년 통계에 따른 기독교계 학교의 숫자를 제시하였다. 807개의 기독교계 학교 가운데 천주교는 124개 학교를 경영하였다고 하였다.61) 학교의 설립은 장로교, 감리교의 주요 사업이었다. 천주교도 역시 교육활동에 이바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인 천주교계 학교에 관하여는 《근 ‧ 현대사》(중앙)에서 ‘약현 학교’(1907)를 제시한 것이 유일하다.62) 천주교와 개신교의 선교계 학교는 “유능한 교역자를 양성하고, 서양의 문물과 사상을 전달 소개하여 개화시키며, 남녀 평등과 민주주의를 가르치기 위하여 설립된 것이었다”라고 의미를 부여하였다.63)

 

신문의 발행을 통한 언론활동은 《근 ‧ 현대사》(법문) ‧ (중앙) ‧ (천재)의 본문에서 서술하였다.64) 《근 ‧ 현대사》(금성) ‧ (천재)에서는 표로 대한제국기 신문 발행 현황을 제시하였는데 여기에서 《경향신문》을 소개하였다.65) 《경향신문》은 1906년부터 1910년까지 천주교회에서 간행한 주간신문이었다. 법문 교과서에서는 애국계몽기 《경향신문》을 발행하여 언론을 통한 주권 회복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으로 평가하였다.66) 당시 대부분의 신문은 민중 계몽에 기여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더불어 천주교의 성당 건축을 서양 문물을 수용한 사례로 사진과 함께 소개하였다.67)

 

이러한 내용은 2009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한국사 교과서에서도 찾을 수 있다.68) 근대 천주교의 사회사업 전개, 학교 설립, 신문 발행, 성당 건축 등에 관하여 서술하였다.

 

또한 천주교 신도가 주권회복운동을 전개한 일을 서술한 한국 근 ‧ 현대사 교과서도 있었다. 《근 ‧ 현대사》(법문)에서는 천주교가 “일제 침략에 맞서 기도회를 개최하고,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라고 하였다.69) 《근 ‧ 현대사》(천재)에서도 천주교가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던 점을 서술하였다.70) 1907년 2월에 대구에서 처음 시작한 국채보상운동은 천주교 신자였던 서상돈이 주도하였다. 평양에서는 안중근이 국채보상운동에 앞장섰다.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경향신문》을 통하여 모금활동에 나섰다. 국사, 한국 근 ‧ 현대사,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대부분 소주제로 ‘국채보상운동’을 설정하였다. 하지만 이 소주제에서 서상돈 등이 천주교 신자였던 점, 이 운동과 《경향신문》 및 천주교의 연관성 등에 관하여는 서술하지 않았다. 또한 안중근에 관하여도 그를 천주교 신자로 서술하거나, 그의 활동을 천주교의 민족운동으로 쓴 교과서는 없었다. 교회와 신자, 천주교회사의 범주와 천주교 신도의 활동에 관한 이해와 서술에 관하여는 학계에서 좀 더 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볼 때 한국 근 ‧ 현대사와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천주교가 개화, 근대화에 기여한 면을 서술하고 그 의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교과서의 서술은 대개 근대 문화의 발달에 공헌한 내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크게 볼 때 역사 교과서에서는 천주교와 개신교를 ‘서양 종교’라 표현하였고 이들 종교가 서양의 문물과 문화를 소개하는데 공헌하였던 것으로 평가하였다. 《한국사》(미래)에서는 천주교를 서술한 소주제의 제목을 ‘서양 문화를 소개하는 데 공헌한 천주교와 개신교’로 삼았다.71) 그 내용에서는 이들 종교가 “근대 교육 발전과 서양 의술 보급, 양성 평등 의식 전파 등에 기여하였다”라고 하여서 천주교의 사회적 ‧ 역사적 역할에 관하여 언급하였다.

 

이에 비하여 종교계의 문제점이나 부정적 측면에 관한 서술은 매우 드물었다. 《근 ‧ 현대사》(금성)에서는 개화기 천주교와 개신교의 사회사업 등을 소개한 뒤 이들 종교의 문제점을 서술하였다. “서양 종교의 이념은 전통적 가치관과 충돌하여 민중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특히, 일부 선교사들은 지나치게 복음주의를 강조하여 민족운동을 약화시키기도 하였다.”72) 기독교 이념이 전통적 가치관과 충돌하여 민중의 반발을 초래하였던 점과 선교사들이 복음주의를 강조함으로써 민족운동을 약화시킨 점을 비판하였다. 두 가지 모두 구체적 사례를 들지 않아서 비판의 대상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더욱이 ‘복음주의’라는 용어에는 개념 정의가 덧붙여져야 할 것이다. 내용상 선교사들이 정교분리의 선교 원칙에 따라 민족운동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었던 것으로 서술하여야 하지 않을까 한다.73)

 

3) 일제강점기 종교 탄압과 천주교의 독립운동에 관한 서술

 

일제강점기 종교계는 식민지 문화정책의 영향으로 탄압의 위기에 처하였다. 선교사들은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세우며, 정치권력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한국인 천주교 신도들은 일제에 맞서서 독립운동에 나아갔다. 일제하 독립운동과 천주교회의 관계에 관하여는 3 ‧ 1 운동에 대한 교회의 태도, 간도 지역의 독립운동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74) 학계의 3 ‧ 1 운동에 관한 연구는 대체로 천도교 ‧ 개신교의 움직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천주교회의 공식 방침은 신도의 참여를 금지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 ‧ 1 운동에 참여한 천주교 신자가 적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또한 간도의 천주교 신도들로 이루어진 대한의민단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일제강점기 종교 탄압과 천주교회의 민족독립운동에 관한 교과서의 서술을 살펴보자.

 

(1) 일제의 기독교 탄압에 관한 서술

 

한국 근 ‧ 현대사 교과서에서는 총독부가 각종 입법을 통하여 종교계를 탄압하였던 점을 서술하였다. 천주교에 대한 총독부의 규칙으로는 ‘사립학교 규칙’과 ‘포교 규칙’이 있었다. 총독부는 기독교 계통의 사립학교를 통제하기 위하여 ‘사립학교 규칙’을 개정하였다.75) 《근 ‧ 현대사》(법문)에서는 ‘포교 규칙’에 관한 자료를 실었다.76) 제1조에 있듯이 그 대상은 神道, 불교, 기독교였는데, 이 규칙에서 말하는 기독교는 천주교와 개신교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제4조는 총독이 주교를 폐위할 권한을 부여한 조항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제9조에는 교회의 설립에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교과서에서는 자료만을 제시하였고 해설을 덧붙이지 않았다. 따라서 이것이 천주교회에 대한 탄압과 연관되었다는 해석은 교육 ‧ 학습 현장에서 이루어질 일로 남았다.

 

또한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하였던 기독교계 독립운동가를 탄압한 사실을 서술하였다. 여러 한국 근 ․ 현대사 교과서에서 구체적인 사례로 기독교계 인사를 검거한 안악 사건과 105인 사건을 제시하였다.77) 안악 사건과 연관된 천주교 신도에는 안명근이 있었고, 105인 사건에는 이기당이 있었다. 교과서에서는 기독교라는 용어를 대체로 개신교에 한정하여 썼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계 독립운동가를 개신교 신도로만 이해할 가능성이 높다. 독립운동에 참여한 천주교계 인물이 있었던 것을 알기 힘들 수 있다.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종교계의 수난’이라는 주제에서 기독교에 대한 통제와 회유에 관해 서술하였다. 《한국사》(천재)에서 “기독교계는 1910년대 기독교인들이 대거 포함된 105인 사건과 사립학교 규칙을 반포하여 성경 교육을 금지한 것을 계기로 총독부와 대립하였다”라고 하였다.78) 3 ‧ 1 운동 이후 총독부는 기독교계와 외국인 선교사의 회유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이에 관하여는 “교회당의 설립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꾸었으며, 기독교계 사립학교에서의 성경 교육을 허용하였다”라고 적었다.79) 이러한 내용을 담은 《한국사》(천재)에서는 불교, 기독교, 천도교, 대종교의 수난을 차례로 서술하였다. 천주교에 관하여는 따로 서술하지 않아서, 천주교와 개신교에 대한 종교 정책을 기독교의 수난으로 아울러 언급하였다.

 

(2) 일제강점기 천주교의 사회운동과 독립운동에 관한 서술

 

7차 교육과정에 따른 《국사》는 일제강점기 천주교의 활동을 매우 간략하게 썼다. 천주교가 민중계몽운동에 주력하였고, 일부 신자가 만주에서 의민단을 조직하였던 것으로 기술하였다.80) 이 내용만으로는 민중 계몽의 실제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를 짐작하기 어렵다.

 

좀 더 자세한 일제강점기 천주교의 동향은 《근 ‧ 현대사》에 실렸다. 대체로 세 가지 방향에서 천주교와 신도들의 활동을 서술하였다. 첫째, 천주교는 고아원과 양로원을 운영하였던 것으로 썼다.81) 둘째, 천주교는 《경향잡지》 등의 잡지를 발행하여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고 하였다.82) 개화기에 시작한 사회사업과 언론활동을 계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셋째, 만주 지역에서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의민단을 조직하여 청산리 대첩에 참전하는 등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다고 서술하였다. 의민단의 조직에 관하여는 6종의 한국 근 ‧ 현대사 교과서에서 모두 기술하였다. 이러한 서술을 통하여 천주교가 항일운동에 기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의민단을 조직한 주체에 관하여는 천주교 세력 일부,83) 천주교 신자들,84) 천주교 신자들 중심,85) 일부 천주교도들86) 등으로 표현하였다. 《근 ‧ 현대사》(중앙)에서는 “천주교는 교단 중심으로는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나, 일부 천주교도들은 만주에서 항일운동 단체인 의민단을 조직하여 무장 항일투쟁에 나서기도 하였다”라고 하였다.87) 천주교의 항일독립운동이 일부 신자의 활동에 그쳤던 것으로 서술하였다. 천주교가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일제강점기 천주교 선교사들은 정교분리의 방침을 내세우며 신도들이 독립운동에 뛰어들지 않기를 바랐다. 일제의 탄압에서 교회를 보호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 대한 학습 자료를 제시하면 천주교와 독립운동에 관한 이해를 도울 것이다.

 

2009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한국사 교과서에서도 천주교의 사회사업과 계몽운동, 항일운동 등에 관하여 서술하였다. 고아원을 세우는 등의 사회사업을 전개한 일은 《한국사》(미래) ‧ (비상) ‧ (지학)에서 간략히 서술하였다.88) 언론활동으로 《경향잡지》를 통한 민중 계몽에 기여하였던 점은 《한국사》(지학)에서 언급하였다.89) 천주교 신자들이 중심이 되어 만주에서 조직한 의민단에 관하여는 《한국사》(미래) ‧ (법문) ‧ (비상)에서 소개하였다.90) 《한국사》(천재)에서는 기독교계의 3 ‧ 1 운동, 교육활동, 신사참배 거부에 관하여 서술하였다.91) 이러한 활동은 대체로 개신교의 것이며 일제강점기 천주교의 동향에 관한 독립된 서술은 찾을 수 없었다.

 

교과서에 보이는 근 ‧ 현대 종교에 관련한 서술은 각 종교에서 전개한 사회운동과 독립운동을 소개하면서 긍정적 역할과 기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일제는 종교계의 친일화를 꾀하는 정책을 펼쳤다. 일부 종교인 가운데 친일 활동에 앞장선 경우도 있었다. 교과서에서는 종교계의 친일 문제에 관한 서술에 소극적이었다. 《국사》에서는 관련 내용을 찾을 수 없다. 한국 근 ‧ 현대사 교과서 가운데는 《근 ‧ 현대사》(금성)에서 “일제 말기에 이르러 많은 종교 단체와 종교 지도자들이 친일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전시 동원 체제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일제 식민지 정책을 홍보하는 일은 물론이고, 신사 참배에 앞장서고, 일본군을 위문하거나 위문금 모금 행사를 벌이기도 하였다”라고 하였다.92) 특정 종교를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이는 천주교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한국사 교과서를 보면 《한국사》(미래)에서 일부 종교 지도자의 친일에 관하여 간략히 서술하였다. “일부 종교 지도자들 중에는 일제의 전시 동원 체제에 협력하거나 신사 참배에 호응하는 등 친일 활동에 적극 앞장 선 경우도 있었다”라고 하였다.93) 개별 종교나 구체적 인물을 언급한 것은 아니었다. 역사적 공과를 밝혀서 이를 평가하는 서술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제강점기 천주교를 비롯한 종교에 관한 서술은 사회운동과 독립운동을 통한 긍정적 기여뿐만 아니라 친일 문제와 같은 부정적 활동에 관하여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4) 현대 천주교의 주요 동향에 관한 서술

 

현대 사회에서 천주교회는 사회개발운동과 사회정의운동에 기여하였다.94) 먼저 천주교회는 사회개발을 실천하기 위하여 힘썼다. 경제개발 사업으로 농어촌 지역에서 축산, 농장 사업을 벌였고 그 밖의 지역에서 지역사회 종합개발, 주택 사업 및 신용협동조합운동을 펼쳤다. 사회복지 기관과 교육 기관의 운영 등을 통하여 사회개발운동에도 나섰다. 또한 천주교회는 사회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농민 ․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였다. 예컨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서는 박종철 군 사건 진상 은폐 경위를 밝히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현대 천주교회사에 관한 역사학 분야의 연구는 그다지 이루어지지 않았다.95)

 

현대사에서 천주교에 관한 서술은 《근 ‧ 현대사》(두산) ‧ (법문) ‧ (중앙)에서 찾을 수 있다. 관련 서술 내용은 교과서에 따라서 차이가 컸다. 《근 ‧ 현대사》(두산)에서는 천주교와 관련한 주요 사건과 활동을 시기 순으로 정리하였다.96) 첫째, 광복 직후의 동향으로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 기념 행사의 개최와 천주교 언론인 《경향신문》, 《경향잡지》의 복간을 언급하였다. 둘째, 1950년대의 전재민 구호 활동과 전후 복구사업 참여에 관하여 썼다. 셋째, 1970년대 이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민주화운동에 기여하였던 점을 밝혔다. 넷째, 1984년의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과 교황 방한 및 103위 순교자의 시성 등을 서술하였다. 여러 교과서 가운데 천주교 관련 활동을 가장 다양하게 소개하였다. 그런데 김대건 순교와 103위 순교자의 시성 등에 관하여는 학습 자료를 통한 보충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교과서에 김대건 신부에 관한 다른 설명이 없으며, 시성의 개념도 일반 학생들에게 낯설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근 ‧ 현대사》(법문)에서는 천주교와 개신교가 6 ‧ 25 전쟁 이후 사회복지사업에 앞장섰음을 서술하였다. 이어서 천주교계의 1960 ‧ 1970년대 동향에 관하여 썼다.97) 첫째로 1965년의 13교구 설정에 관하여 적었고, 둘째로 신앙의 현대화와 토착화 및 성서 번역의 현대화에 관하여 썼다. 셋째, 1969년 김수환 추기경 임명, 넷째, 1971년 성서 공동 번역 사업 완료, 다섯째, 1974년부터 평신도의 신앙생활 확대 노력 등을 언급하였다. 앞선 《근 ‧ 현대사》(두산)의 내용과는 다른 내용을 담았다.

 

이러한 서술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먼저 13교구를 설정하기 이전과 이후의 설명이 없어서 마치 이때 처음 교계제도를 정비하였고 이것이 지금까지 내려오는 것처럼 잘못 이해할 수 있다. 신앙의 현대화, 토착화, 평신도의 신앙생활 확대 등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애매하다. 성서 번역에 관하여는 천주교와 개신교의 ‘성서 공동 번역 사업’이었던 점을 서술하여야 하지 않을까 한다. 교과서에서는 1971년에 성서 번역 사업이 마무리되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정확하지 않은 서술이다. 성서 공동 번역 사업의 성과로 1971년에 공동번역 신약성서가 출간되었고 1977년에 신약과 구약 합본 공동번역 성서가 출간되었다. 신앙의 현대화와 토착화, 성서의 공동번역 등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의 결과에 따른 것이었다. 바티칸 공의회의 결과 전례에서 자국어 사용, 교회의 쇄신(현대화), 천주교회와 개신교회의 일치운동 등이 나타났다. 이를 서술한 뒤 현대 천주교회사에 관한 설명이 덧붙여져야 할 것이다.

 

《근 ‧ 현대사》(중앙)에서는 유신반대운동에 관한 부분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결성과 명동 성당에서 이루어진 3 ‧ 1 민주구국선언을 서술하였다.98) 또한 ‘종교의 성장’을 언급한 소주제에서는 현대 천주교의 특징과 위상에 관하여 썼다.99) 광복 후 천주교는 평신도에 의한 자발적 교회 창설이라는 전통이 사라지고, 서구식 교회로 바뀌어 갔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서구식 교회는 전후의 표현으로 미루어 볼 때 성직자 중심 및 전례 중심으로 운용되는 교회를 뜻한다. 이것은 현대 천주교회에 대한 적절한 서술로 보기 어렵다. 마치 해방 이전까지 천주교의 성직자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으며, 전례를 중시하지 않았던 것처럼 읽힐 수 있다. 이러한 서술은 현대 천주교회의 성장과 발전이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밝히지 못한 것이었다.

 

이어서 같은 교과서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최와 그 영향, 김수환 추기경의 임명, 지학순 주교 등의 인권 ‧ 민주화운동 참여에 관하여 적었다. 뒤이어 천주교가 대규모 행사를 개최하여 그 위상을 전 세계에 드높였다고 하였다. 아마도 1984년에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맞아서 이루어진 교황의 방한과 103위 시성 등 대규모 행사의 개최와 그 의미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이는 현대 천주교회의 위상을 밝히는 부분인데 구체적인 내용의 서술이 부족하였다.

 

앞 장에서 보았듯이 국사와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대한민국시기의 천주교와 관련한 서술을 거의 찾을 수 없었다. 《국사》는 문화사 분야에서 광복 이후 종교계 일반의 발달에 관하여 서술하였다.100) 한국사 교과서를 보면 《한국사》(비상) ‧ (지학)에서 가톨릭농민회를 소개하였을 따름이다.101) 산업화 이후 농민운동을 다루면서 1972년에 가톨릭농민회가 결성되었던 사실을 제시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농민운동이 활성화하였던 점에 의미를 부여하였다. 앞선 한국 근 ‧ 현대사 교과서에서 서술하였던 천주교회의 주요 사건과 사회 활동,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내용을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이처럼 교과서에 따라서 현대 천주교의 동향에 관한 서술이 거의 없거나, 크게 다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관련 서술이 부족한 까닭은 앞장에서 보았듯이 현대 사회와 문화에서 종교가 가지는 비중을 그다지 높게 여기지 않는 시각 때문으로 보인다. 현대 천주교회사에 관한 학계의 연구 성과가 많지 않은 것도 교과서의 서술이 거의 없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 근 ․ 현대사의 현대 천주교의 주요 활동에 관한 서술이 교과서마다 크게 달랐던 이유는 기왕의 연구를 정리 ‧ 종합한 현대 천주교회사 관련 전문서와 통사가 부족하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교과서의 서술이 좀 더 정확하고 올바르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학계의 관련 연구가 좀 더 축적되고 그 성과를 정리하는 일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4. 맺음말 : 천주교회사 서술의 개선 방향

 

지금까지 고등학교 국사, 한국 근 ‧ 현대사, 한국사 교과서에 나타난 천주교회사 관련 서술에 관하여 검토하였다. 주요한 내용을 정리하고 앞으로 한국사 교과서의 천주교 관련 서술에 관한 개선 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먼저 한국사 관련 교과서의 단원 구성과 주제 설정을 통하여 천주교회사의 구성 체계에 관하여 알아보았다. 《국사》에서는 조선후기 ‘천주교의 전파’를 소주제로 설정하였고, 《근 ‧ 현대사》와 《한국사》에서는 천주교 수용과 병인박해를 소주제의 중심 내용으로 삼았다. 대부분의 교과서에서는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여러 종교의 활동을 서술하면서 천주교의 계몽운동, 사회사업, 항일투쟁 등에 관하여 간략히 썼다. 현대사에서 천주교의 동향에 관한 서술은 몇몇 한국 근 ‧ 현대사 교과서에서만 찾을 수 있었다. 교과서의 구성 체계를 볼 때 천주교에 관한 주제와 서술 분량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조선후기 천주교의 수용과 박해 및 그 확산에 관한 서술 분량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개화기, 일제강점기 천주교계의 활동과 동향에 관한 서술은 1문장에서 많아야 1문단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사 관련 교과서에서는 근대 이후 천주교, 개신교, 천도교, 대종교, 불교, 유교 등 개별 종교에 관한 내용을 비슷한 분량으로 서술하여 양적 균형을 추구하였다. 각 종교의 시대적 역할에 따라서 비중을 달리하여 서술하는 것이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천주교는 조선후기 유교적 사회 질서와 가치를 비판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였다. 조선후기 천주교의 평등의식과 여성사, 한글 교리서의 유통과 한글문화 등에 관한 내용을 교과서의 구성 체계에 반영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시기 천주교의 사회개발과 민주화운동에 관한 서술도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교과서의 내용 구성을 보면 본문, 학습 자료, 부록의 연표, 찾아보기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진, 그림 등 학습 자료와 연표는 본문의 내용을 보충하고 그 서술에 참고가 될 수 있다. 교과서에서는 천주교회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대표적인 자료를 선별하여 실어야 할 것이다. 자료에 대한 설명이 정확해야 함은 더 이를 나위가 없다. 기존의 교과서 가운데는 찾아보기에서 천주교 항목이 없는 경우가 있었다. 천주교에 대한 이해와 학습 활동을 돕도록 관련 항목을 첨가하여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시기별 천주교 관련 서술에 나타난 몇 가지 특징과 문제에 관하여 알아보았다. 18세기 후반 천주교의 수용에 관하여는 국사 교과서의 ‘천주교의 전파’에 보이는 서술이 대표적이었다. 남인 계열의 일부 실학자가 중국에서 들어온 천주교 서적을 통하여 천주교를 수용하였다. 선교사의 파견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일부 지식인들이 스스로 천주교를 신앙하고 교회를 세웠다. 이 점에서 천주교의 전파는 ‘천주교의 수용’으로 표현하는 것이 좀 더 적절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초기 천주교 서적의 유입, 천주교의 기본 교리와 신관 ‧ 인간관 ‧ 세계관, 자발적 교회 창설의 의의 등에 관한 내용을 좀 더 덧붙여 서술하여야 할 것이다.

 

천주교의 박해와 확산 요인에 관하여는 종교 ‧ 사상적 측면과 정치 ‧ 사회적 배경을 종합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여러 교과서에서는 19세기 천주교가 교세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프랑스 선교사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교세 확장의 주체로 선교사와 더불어 조선인 신부와 신도의 역할도 균형 있게 서술하여야 할 것이다. 아울러 당시 유교 중심 사회질서와 세도정치의 문제점, 천주교에서 내세운 평등 ‧ 내세사상 등도 천주교 확산의 배경으로 함께 기술하여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하여 지속적인 탄압 속에서도 천주교 신도가 늘어난 역사적 배경을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개항과 프랑스와의 조약 체결 이후 천주교는 선교의 자유를 누리고 사회운동에 앞장섰다. 개화기 천주교에 관한 교과서의 서술은 고아원 ‧ 양로원의 운영, 학교의 설립, 신문의 발행과 같이 천주교가 개화, 근대화에 기여한 활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일제강점기 천주교에 관한 서술도 사회운동과 독립운동에 참여한 일을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특히 천주교 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의민단을 조직한 일을 중요하게 여겼다. 천주교를 비롯한 종교계의 부정적인 면에 관한 교과서의 서술은 거의 찾을 수 없었다. 종교인 가운데는 일제의 전시 동원 체제에 협력하는 등 친일 활동에 나선 인물이 적지 않았다. 역사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를 위하여 근대 이후 천주교가 가지는 문제점과 친일 등 부정적 활동에 관한 서술과 평가도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현대 천주교의 주요 동향에 관하여는 관련 서술이 부족하였고, 교과서마다 서술 내용에 차이가 컸다. 관련 서술이 부족한 까닭은 현대 사회에서 종교가 가지는 비중을 높게 여기지 않는 관점을 반영한 것이었다. 또한 현대 천주교회사에 대한 학계의 연구 성과가 많지 않으며 기존 연구를 종합한 현대 천주교회사 관련 전문서 등이 부족한 것이 한 원인이었다. 교과서의 서술이 정확하고 올바르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학계의 관련 연구가 좀 더 축적되고 그 성과를 정리하는 일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현대 사회에서 천주교회의 활동과 그 의미를 교과서에 서술할 수 있어야 하겠다.

 

그리고 한국사 관련 교과서의 천주교회사 서술에서는 인물과 집단을 구체적으로 밝힌 경우가 많지 않았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로는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황사영, 베르누, 리델, 김대건, 김수환, 지학순 등이 있었다. 천주교 관련 단체로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가톨릭농민회가 교과서에 실렸다. 역사를 만드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하여 인물과 집단을 중심으로 한 교과서의 서술이 좀 더 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마지막으로, 교과서에서는 개신교, 기독교, 크리스트교라는 용어를 구분하지 않고 섞어 쓰는 경우가 있었다. 대체로 개신교의 동향을 서술하면서 개신교 또는 기독교, 크리스트교로 표현하였다. 때로는 기독교를 천주교와 개신교를 합친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문맥상 기독교라는 용어가 천주교와 개신교를 합친 것인지, 개신교만을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사전적 의미를 좇아서 천주교와 개신교 등을 포함하여 서술할 때에 기독교라고 표현하여야 할 것이다.

 

교육과학기술부는 2012년부터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 ‘한국사’ 과목을 필수과목으로 지정하기로 하였다. 2010년까지 시행한 7차 교육과정에서는 ‘국사’가 필수과목이었다. 그런데 2011년에 2009 개정 교육과정을 시행하면서 ‘한국사’를 선택과목으로 정하였다. 이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2012년부터 ‘한국사’를 필수과목으로 바꿀 예정이다. 이러한 변화에 대비하여 국사편찬위원회는 2013년부터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배포할 새로운 한국사 교과서의 집필 기준을 마련하고 있다. 앞으로 교과서의 개정이 이루어질 때 천주교에 관한 서술이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개선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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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진겸, 〈해방 이후 한국사 교과서의 기독교 관련 서술 분석〉, 단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 16~35쪽.

 

2) 주 1에 제시한 김진겸의 논문에서 조선후기 천주교 관련 서술을 분석하면서 그 대상으로 삼았던 교과서는 다음과 같다. 진단학회 편, 《국사교본》, 군정청 문교부, 1946 ; 최남선 편, 《중등국사》, 동명사, 1947 ; 김상기 편, 《고등국사》, 장왕사, 1957 ; 역사교육연구회 편, 《중등국사》, 정음사, 1960 ; 신석호 편, 《고등국사》, 광명출판사, 1968 ; 이원순 편, 《(고등)국사》, 교학사, 1968 ; 문교부, 《(고등)국사》, 1979 ; 교육부, 《(고등)국사》 하, 1990 ; 교육인적자원부, 《(고등)국사》, 2002. 이러한 교과서를 선택한 기준이 무엇이었는지에 관하여는 설명하지 않았다. 이를 분석한 결과, 천주교 전래에 관한 교과서 서술은 학계의 연구 성과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고 사상사 측면의 서술이 빈약하다고 평가하였다. 박해에 관하여는 당쟁의 결과로 본 정치사 중심의 서술이 주류를 이루며 교과서의 서술에 변화가 거의 없었던 점을 제시하였다.

 

3) 주 1의 제목에 보이듯이 이 글은 천주교와 개신교를 아울러 ‘기독교’ 관련 서술을 검토하였다. 천주교와 관련해서는 조선후기의 서술만을 분석하였다. 교과서에 나타난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의 서술은 개신교 관련 내용을 분석하는 데 그쳤다.

 

한편 최근에는 역사 교과서의 개신교 관련 서술에 대한 검토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대체로 개신교에 관한 교과서의 서술이 지나치게 소략하다는 점을 비판하고, 교과서 서술의 개정 ‧ 보완이 필요하다는 점을 제시하였다. 박명수, 〈한국 근 ‧ 현대사 교과서의 기독교관련 서술에 나타난 문제점〉, 《성결교회와 신학》 19, 서울신학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2008 ; ---, 〈한국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나타난 개신교 서술의 문제점〉, 《성결교회와 신학》 21, 서울신학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2009 ; 이은선, 〈한국 근현대사 검인정 교과서의 기독교 관련 서술 분석과 대책〉, 《한국교회사학회지》 24, 한국교회사학회, 2009 ; ---, 〈한국 중학교 국사 교과서에 나타난 개신교 서술 분석과 개선방향〉, 《역사신학논총》 18,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2009 ; 유요한, 〈중고등학교 한국사교과서에 나타나는 종교서술의 문제점 - 비교종교학의 관점에서〉, 《성결교회와 신학》 21, 서울신학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2009(《종교와 문화》 16, 서울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2009에 재수록). 이상의 연구는 최근 한국교회역사바로알리기 운동본부 전문위원회 편, 《역사 교과서와 기독교, 공정하게 서술되었는가?》, 쿰란출판사, 2010에 다시 실렸다.

 

4) 이 글에서 검토하고자 하는 13종의 한국사 관련 교과서는 다음의 표와 같다.

 

 

먼저 국사 교과서를 보면 국사편찬위원회와 국정도서편찬위원회는 《(고등학교) 국사》를 2002년 초판으로 발행하였다가, 근 ‧ 현대사 부분의 구성과 서술을 고쳐서 2006년 제2판으로 수정, 발행하였다. 이 글에서는 2006년 제2판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편의상 이후의 서술에서는 이 책을 《국사》라고 하겠다. 한국 근 ‧ 현대사 교과서는 2003년에 검정 교과서가 출판되었다. 6종의 한국 근 ‧ 현대사 교과서는 금성출판사, 두산동아, 미래엔컬처그룹(구 대한교과서), 법문사, 중앙교육진흥연구소, 천재교육에서 발행하였다. 각 교과서에 따라서 부분적으로 내용을 수정하여 발행판이 달랐다. 이 글에서는 2010년에 인쇄한 최신판을 대상으로 분석할 것이다. 표에 보이듯이 편의상 《근 ‧ 현대사》라고 하고, 각각 출판사 이름의 앞 두 글자를 따서 금성, 두산, 미래, 법문, 중앙, 천재로 책 이름 뒤에 약칭하고자 한다. 또한 한국사 교과서는 2011년에 6종의 검정교과서가 출판되었다. 6종의 한국사 교과서는 미래엔컬처그룹, 법문사, 비상교육, 삼화출판사, 지학사, 천재교육에서 발행하였다. 본문에서는 필요할 경우 편의상 《한국사》라고 하고, 교과서를 펴낸 출판사 이름의 두 글자를 따서 미래, 법문, 비상, 삼화, 지학, 천재로 책 이름 뒤에 줄여서 쓰고자 한다.

 

5) 2007 개정 교육과정에 의하여 2011년부터 고등학교 교과과정에 ‘역사’와 ‘한국문화사’ 과목이 편성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를 시행하기에 앞서서 교육과학기술부는 2009년에 다시 2009 개정 교육과정을 고시하였다. 두 과목을 통합하여 ‘한국사’ 과목을 신설하고 이를 선택과목으로 정하였다. 최근 교육과정의 변화와 한국사 관련 교과목의 편성에 관하여는, 이신철, 〈시론 : 거꾸로 가는 역사교육 강화, 파행의 한국사교육〉, 《역사와 현실》 77, 2010 참조. 교육과학기술부에서 고시한 7차 교육과정과 2007 개정 교육과정 및 2009 개정 교육과정의 구체적인 내용은 ‘국가교육과정정보센터(http://ncic.kice.re.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6) 《국사》는 I. 한국사의 바른 이해, II. 선사 시대의 문화와 국가의 형성에 이어서 III.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IV. 경제 구조와 경제생활, V. 사회 구조와 사회생활, VI. 민족 문화의 발달의 대단원으로 구성하였다.

 

7) 《한국사》는 우리 역사의 형성부터 대한민국의 발전까지 시대 순으로 9개의 대단원을 구성하였다. I.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 II. 고려와 조선의 성립과 발전, III. 조선 사회의 변화와 서양 열강의 침략적 접근, IV. 동아시아의 변화와 조선의 근대 개혁 운동, V. 근대 국가 수립 운동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VI.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민족 운동의 전개, VII. 전체주의의 대두와 민족운동의 발전, VIII. 냉전 체제와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IX. 대한민국의 발전과 국제 정세의 변화.

 

8) 《근 ‧ 현대사》는 4개의 대단원으로 구성되었다. 이 가운데 I. 한국 근 ‧ 현대사의 이해 단원은 근대 사회의 태동과 근대 사회 및 현대 사회의 역사 전체를 개관하였다. 그 뒤의 3개 단원은 시대 순으로 나누어 구성하였다. II. 근대 사회의 전개, III. 민족 독립 운동의 전개, IV. 현대 사회의 발전.

 

9) 6차 교과과정에 따른 《국사》 교과서의 불교사 관련 서술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불교 관련 서술은 46개 소주제에서 언급하였다고 한다(안지원, 〈한국 불교사 교육의 문제점과 그 개선 방향 - 중 ‧ 고교 국사교과서의 불교관계 서술을 중심으로 -〉, 《역사교육》 83, 2002).

 

10) 2009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한국사’ 과목은 2007 개정 교육과정에서 설정한 ‘역사’ 과목을 근간으로 하였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역사 교과서 집필의 준거가 되는 〈2007년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2009. 8. 4)을 제시하였다. 이에 따라서 역사 교과서가 집필되었고, 6종의 역사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하였다. 그런데 2009 개정 교육과정이 마련됨에 따라 교육과학기술부는 2010년 5월에 역사 교과서를 현행 한국사 교과서로 수정, 보완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6종의 검정 역사 교과서가 한국사 교과서로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한국사 교과서 집필 과정에 관하여는 주 5의 이신철, 앞의 논문(2010), 참조.

 

11) 전근대와 근대 이후 종교 서술의 균형 문제에 관하여는 주 3에 제시한 유요한, 앞의 논문, 2009, : 한국교회역사바로알리기 운동본부전문위원회 편, 앞의 책, 2010, 236~239쪽 참조.

 

12) 《국사》, 383~385쪽의 부록 연표.

13) 《한국사》(천재), 427쪽의 찾아보기, 천주교.

 

14) 조선후기 천주교회사 연구를 정리한 논고로는 차기진, 〈창설기 천주교회사 연구〉, 《최석우 신부 수품 50주년 기념 논총 제2집 : 한국 천주교회사의 성찰》,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과 같은 책에 실린 조광, 〈조선 후기 천주교사 연구의 과제〉가 대표적이다. 또한 지금까지의 연구를 종합한 개설서로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펴낸 《한국천주교회사》 1 ‧ 2 ‧ 3, 한국교회사연구소, 2009~2010이 있어서 조선후기 천주교회의 설립과 박해, 그 확산에 관한 내용을 살필 수 있다.

 

15) 《국사》, 306쪽.

16) 《국사》, 228쪽.

17) 같은 책, 228쪽.

 

18) 《한국천주교회사》 1(한국교회사연구소, 2009)의 제2부 조선후기 서학의 수용과 천주교회의 설립, 제2장 조선 천주교회의 설립 가운데 이장우가 쓴 ‘신앙 공동체 설립의 의의’, 247~251쪽 참조.

 

19) 《국사》, 306쪽.

20) 《근 ‧ 현대사》(중앙), 38쪽.

21) 《한국사》(법문), 119쪽과 《한국사》(지학), 82쪽.

22) 《한국사》(미래), 100쪽.

23) 《한국사》(삼화), 108쪽.

24) 《한국사》(미래), 100쪽.

 

25) 한국 천주교와 서양세력 ․ 제국주의의 연관성에 관하여는 한국사목연구소 편, 《국사 : 가톨릭교과 교육자료집》,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1, 제10장 제국주의와 그리스도교의 유착 논쟁, 117~121쪽 참조.

 

26) 《한국사》(지학), 82쪽의 사진과 사진 설명.

27) 차기진, 앞의 논문, 27쪽과 한국사목연구소 편, 앞의 책, 1991의 제2장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 문제(2), 22~45쪽 참조.

28) 《국사》, 228쪽.

29) 《한국사》(법문), 119쪽.

30) 《한국사》(법문), 119쪽의 도움글 ‘신유박해(1801)’.

31) 《한국사》(천재), 86쪽.

32) 《한국사》(법문), 126쪽.

33) 《근 ‧ 현대사》(천재), 63쪽.

34) 《근 ‧ 현대사》(중앙), 39쪽과 《근 ‧ 현대사》(천재), 63쪽.

 

35) 《한국사》(미래), 100쪽 ; 《한국사》(법문), 119쪽 ; 《한국사》(비상), 117쪽 ; 《한국사》(지학), 95쪽과 100쪽 ; 《한국사》(천재), 92쪽.

 

36) 《국사》, 228쪽.

37) 《근 ‧ 현대사》(중앙), 38쪽.

 

38) 《한국사》(미래), 100쪽 ; 《한국사》(법문), 119쪽 ; 《한국사》(비상), 111쪽 ; 《한국사》(삼화), 108쪽 ; 《한국사》(지학), 82쪽.

 

39) 《근 ‧ 현대사》(금성), 46쪽 ; 《근 ‧ 현대사》(두산), 36쪽 ; 《근 ‧ 현대사》(미래), 34쪽 ; 《근 ‧ 현대사》(법문), 38쪽 ; 《근 ‧ 현대사》(중앙), 43쪽 ; 《근 ‧ 현대사》(천재), 63쪽.

 

40) 《근 ‧ 현대사》(미래), 43쪽과 《근 ‧ 현대사》(천재), 63쪽의 도움글.

 

41) 병인양요와 박해의 확대 및 희생자에 관하여는 《한국천주교회사》 3(한국교회사연구소, 2010), 제3부 시련 속의 교회, 제7장 병인박해 가운데 방상근이 쓴 제3절 병인박해와 박해의 확대, 제4절 덕산사건과 신미양요, 제5절 병인박해 희생자와 순교성인, 266~282쪽 참조.

 

42) 《근 ‧ 현대사》(금성), 47쪽.

 

43) 《한국사》(미래), 105쪽 ; 《한국사》(법문), 126쪽 ; 《한국사》(비상), 117쪽 ; 《한국사》(삼화), 120쪽 ; 《한국사》(지학), 100쪽 ; 《한국사》(천재), 92쪽.

 

44) 《한국사》(지학), 100쪽.

 

45) 절두산 순교지 사진은 《한국사》(삼화), 120쪽과 《한국사》(지학), 100쪽 및 《한국사》(천재), 86쪽에 실렸다. 《한국사》(삼화)의 같은 120쪽에서는 병인박해 기록화를 볼 수 있다.

 

46) 《한국사》(비상), 117쪽의 사진 설명.

47) 널리 알려져 있듯이 김대건 신부는 1846년에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48) 《근 ‧ 현대사》(천재), 63쪽.

 

49) 한국사목연구소 편, 《국사 : 가톨릭교과교육자료집》,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1의 제10장 제국주의와 그리스도교의 유착 논쟁, 118쪽 참조.

 

50) 《근 ‧ 현대사》(중앙), 43쪽.

 

51) 개화기 천주교회의 개화, 근대화에 관한 연구 동향은 윤선자, 〈개화기 ‧ 일제하 천주교회사 연구〉, 《최석우신부 수품50주년 기념논총 제2집 : 한국 천주교회사의 성찰》,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103~107쪽 참조.

 

52) 《국사》, 321쪽.

 

53) 《근 ‧ 현대사》(두산), 42쪽의 도움글 ; 《근 ‧ 현대사》(미래), 39쪽 ; 《근 ‧ 현대사》(법문), 129쪽 ; 《근 ‧ 현대사》(중앙), 50쪽과 144쪽 ; 《근 ‧ 현대사》(천재), 148쪽. 《한국사》(미래), 202쪽 ; 《한국사》(비상), 207쪽 ; 《한국사》(지학), 115~116쪽 ; 《한국사》(천재), 179쪽.

 

54) 《한국사》(법문), 144쪽.

 

55) 노용필, 〈천주교의 신앙 자유 획득과 선교 자유 확립〉, 《교회사연구》 30, 2008, 155~166쪽. 이 논문에서는 프랑스 공사와 외부대신 조병식이 가진 천주교에 관한 대담 내용을 인용하였다. 조병식이 보낸 공문에서 조선은 프랑스와 맺은 조약에 어떤 종류의 학교나 기독교에 관한 언급이 없었다는 점을 말하였다. 조병식은 공문에서 정부가 명령을 받았거나 조약에 언급한 것 외에 어떤 새로운 종교나 어떤 교육기관이든 중지시킬 것이며 이런 종류의 기관이 세워지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를 볼 때 한불조약의 체결로 박해의 시대는 끝났지만 선교 목적의 학교를 세울 특권을 누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56) 《근 ‧ 현대사》(금성), 134쪽 ; 《근 ‧ 현대사》(두산), 126쪽 ; 《근 ‧ 현대사》(미래), 122쪽 ; 《근 ‧ 현대사》(법문), 129~130쪽 ; 《근 ‧ 현대사》(중앙), 144쪽 ; 《근 ‧ 현대사》(천재), 148쪽.

 

57) 《근 ‧ 현대사》(미래), 122쪽.

58) 《근 ‧ 현대사》(법문), 129~130쪽.

59) 《근 ‧ 현대사》(미래), 122쪽.

60) 《근 ‧ 현대사》(미래), 122쪽의 자료 1, 도움글 ; 《근 ‧ 현대사》(중앙), 144쪽 ; 《근 ‧ 현대사》(천재), 148쪽.

61) 《근 ‧ 현대사》(천재), 142쪽.

62) 《근 ‧ 현대사》(중앙), 144쪽.

63) 《근 ‧ 현대사》(천재), 142쪽.

64) 《근 ‧ 현대사》(법문), 130쪽 ; 《근 ‧ 현대사》(중앙), 144쪽 ; 《근 ‧ 현대사》(천재), 148쪽.

65) 《근 ‧ 현대사》(금성), 127쪽의 자료 5와 《근 ‧ 현대사》(천재), 138쪽의 표.

66) 《근 ‧ 현대사》(법문), 130쪽.

 

67) 《근 ․ 현대사》(두산), 111쪽 ; 《근 ‧ 현대사》(법문), 108쪽의 사진 ; 《근 ‧ 현대사》(중앙), 145쪽 ; 《근 ‧ 현대사》(천재), 135쪽의 사진과 149쪽 사진.

 

68) 《한국사》(미래), 202쪽과 205쪽 ; 《한국사》(법문), 202쪽의 표와 205쪽 ; 《한국사》(비상), 206~208쪽 ; 《한국사》(지학), 171, 175쪽 ; 《한국사》(천재), 179쪽과 같은 쪽의 사진.

 

69) 《근 ‧ 현대사》(법문), 130쪽.

70) 《근 ‧ 현대사》(천재), 148쪽.

71) 《한국사》(미래), 202쪽.

72) 《근 ‧ 현대사》(금성), 134쪽.

 

73) 한규무, 〈한국 근대사 서술과 개신교 - 교과서 ‧ 개설서를 중심으로 -〉(한국사상사학회 2010년 10월 학술발표회 발표문), 4쪽 참조.

 

74) 일제하 독립운동과 천주교회사 연구 동향에 관하여는 윤선자, 〈개화기 ‧ 일제하 천주교회사 연구〉, 《최석우 신부 수품 50주년 기념논총 제2집: 한국 천주교회사의 성찰》,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117~121쪽 참조.

 

75) 《근 ‧ 현대사》(두산), 229쪽.

76) 《근 ‧ 현대사》(법문), 219쪽의 자료읽기 자료 2.

 

77) 《근 ‧ 현대사》(미래), 221쪽 ; 《근 ‧ 현대사》(법문), 219쪽 ; 《근 ‧ 현대사》(중앙), 248쪽 ; 《근 ‧ 현대사》(천재), 245~246쪽.

 

78) 《한국사》(천재), 287쪽.

79) 같은 책, 287쪽.

80) 《국사》, 326쪽.

81) 《근 ‧ 현대사》(미래), 225쪽 ; 《근 ‧ 현대사》(법문), 226쪽 ; 《근 ‧ 현대사》(천재), 250~251쪽.

82) 《근 ‧ 현대사》(법문), 226쪽 ; 《근 ‧ 현대사》(천재), 250~251쪽.

83) 《근 ‧ 현대사》(금성), 237쪽.

84) 《근 ‧ 현대사》(두산), 235쪽.

85) 《근 ‧ 현대사》(미래), 225쪽.

86) 《근 ‧ 현대사》(법문), 226쪽과 《근 ‧ 현대사》(중앙), 253쪽.

87) 《근 ‧ 현대사》(중앙), 253쪽.

88) 《한국사》(미래), 294쪽 ; 《한국사》(비상), 288쪽), 《한국사》(지학), 238쪽.

89) 《한국사》(지학), 238쪽.

90) 《한국사》(미래), 294쪽 ; 《한국사》(법문), 278쪽 ; 《한국사》(비상), 288쪽.

91) 《한국사》(천재), 287쪽.

92) 《근 ‧ 현대사》(금성), 237쪽.

93) 《한국사》(미래), 295쪽.

 

94) 한국사목연구소 편, 《국사 : 가톨릭교과교육자료집》,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1의 제14장 한국 천주교회와 현대 사회, 145~151쪽 참조.

 

95) 강인철, 〈현대 천주교회사의 연구〉, 《최석우 신부 수품 50주년 기념논총 제2집 : 한국 천주교회사의 성찰》,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이 글의 연구사 정리에 따르면 현대 천주교회의 활동에 관하여는 가톨릭 문학 ‧ 교육 ‧ 사회복지 분야의 학위논문이 비교적 많으며, 지역공동체 ‧ 교회조직과 리더십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역사학 분야의 논의는 크게 부족한 실정임을 알 수 있다.

 

96) 《근 ‧ 현대사》(두산), 353쪽.

97) 《근 ‧ 현대사》(법문), 324쪽.

98) 《근 ‧ 현대사》(중앙), 306쪽.

99) 같은 책, 370~371쪽.

100) 《국사》, 331~332쪽.

101) 《한국사》(비상), 369쪽 ; 《한국사》(지학), 317쪽.

 

[교회사 연구 제36집, 2011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김아네스(순천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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