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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영성의 길 수도의 길: 글라렛 선교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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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10-17 ㅣ No.302

[영성의 길 수도의 길] (24) 글라렛 선교 수도회


말씀에 봉사하는 사도적 선교사들

 

 

- 글라렛 선교 수도회 상징문양 : 상징 문양 가운데에는 티 없으신 성모성심의 마리아의 아들들(Immaculati Cordis Mariae Filiie)을 뜻하는 라틴어 약자 'CMF'가 써 있고 그 사이에 십자가를 그렸다. 십자가 아래 설립년도인 1849년 곁엔 말씀의 봉사자를 상징하는 성경을 그려넣었고, 왼쪽 부분엔 하느님 사랑과 열정을 체험케 하는 성령의 불꽃을 그려 넣었다. 성령의 불 왼쪽에는 무지개를 그려 넣었다.

 

 

서울 성북동에 가면, 김광섭(1905~77) 시인의 시 '성북동 비둘기'가 떠오른다. "가슴에 금이 간"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고 쫓기는 새가 돼" 성북동 골짜기에서 안식을 찾을 곳이 없다.

 

그런데 비둘기가 사라진 서울 성북동과 인근 동소문동, 삼선동, 미아동 등지에 수도회들이 하나둘씩 시나브로 둥지를 틀었다. 오는 22일로 한국 진출 25주년을 맞는 글라렛 선교 수도회 한국독립대리관구 본원도 성북동에 뿌리를 내렸다. 국보 제70호 「훈민정음 해례본」 등 국보만 1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는 간송미술관 들머리다.

 

글라렛 선교 수도원은 지하 1층 지상 4층의 다가구주택 같은 평범한 건물이다. 그 앞 대로변에 같은 규모 글라렛 미션센터(담당 김인환 신부)가 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센터 입구엔 미니 북카페가 있다. 카페에 들어서면 왼쪽에 각종 선교자료와 도서ㆍ미디어 등이 가지런히 꽂힌 서가와 낮은 책상이 놓여 있고, 오른쪽엔 커피를 따라 마실 수 있도록 해놓았다. 예쁜 성물도 눈에 띈다. 신자 뿐 아니라 미신자도 들러 책도 보고 커피도 즐기는 지역 사회 이웃의 사랑방으로 사랑을 받는 공간이다.

 

- 글라렛 선교 수도회 한국독립대리관구 서울본원 회원들이 본원 성당에서 모여 성무일도서를 읽으며 묵상에 잠겨 있다.

 

 

2002년 개원 때만해도 센터는 선교 영성 프로그램 연구와 계발을 위한 못자리가 되고자 했다. 특히 선교적 정체성의 비전을 찾고자 하는데 주력했다. 당연히 선교 연구와 선교자료 제작 및 제공, 선교교육관 운영 등을 통해 평신도 선교사 양성에 힘을 쏟았다.

 

그로 인해 평신도 30여 명으로 이뤄진 '글라렛 사도회'(회장 손진권)가 태어났다. 처음엔 평신도 선교사를 강원도 원통에 파견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생활 속 선교'를 지향하며 신자 재복음화를 위한 영성강좌로 '다시보기' 코스를 진행하고 있다. 1년을 4개 학기로 나눠 신자 재교육에 힘을 쏟고 있다.

 

매달 둘째 주 토요일 오후 3시에는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1층 강의실을 빌려 성가묵상기도모임 '쉼'을 진행하며 찬양과 말씀 묵상, 밀도 있는 고해성사를 보도록 이끌고 파견미사를 봉헌하고 안수예절로 마무리한다. 이 모임엔 예비신자들도 나온다. 이들을 나중에 글라렛 미션센터로 초대하기도 하고, 다시보기 코스로 연결하기도 한다.

 

이처럼 수도회는 사도들 삶의 방식을 따르고 예언자적으로 말씀에 봉사하는 사도적 선교사로서 시대 흐름에 맞게 고유한 영성을 쇄신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수도회가 국내에 파견될 당시 선교 및 사도직 활동을 잊은 것은 아니다. 인천교구에 진출할 당시와 마찬가지로 국내외 공소 선교와 평신도와 수도자ㆍ성직자 대상 피정 및 영적 지도와 신앙교육에도 노력하고 있다.

 

- 글라렛 미션센터를 담당하는 김인환 신부가 센터 내 북카페에 들른 장슬기 모니카, 사지원씨를 만나 대화를 나누다가 환하게 웃고 있다. 북카페는 평신도 선교사들은 물론 지역 사회 이웃의 사랑방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1987년 인천교구 서곶(현 검암동)본당을 맡아 10년간 사목했고, 오류동본당도 5년간 사목한 뒤 교구로 이관했다. 3년간 연평도본당도 사목했다.

 

1994년엔 광주대교구에도 진출, 수도회 광주 분원(분원장 김성웅 신부) 및 남평 글라렛 영성의 집(피정의 집, 관장 김희준 신부)을 중심으로 공소순회선교를 하면서 피정의 집을 통해 선교의식을 심고 있으며, 본격적으로 신학생 양성도 하고 있다.

 

주로 방학 때 선교사제와 신학생이 팀을 이뤄 진행하는 공소순회선교는 교구 공소사목부서와 협력해 공소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 화순본당 능주공소를 중심으로 공소사목을 하기도 했는데,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면 수도회는 공소로 떠났고 지금도 그같은 선교여정은 계속되고 있다.

 

수도회는 2001년부터 강원도 인제군 북면 월학리에서 폐교된 원통초등학교 효자분교를 중심으로 공소 선교와 피정, 재가복지를 결합한 특별한 사도직을 시도해 호평을 받고 있다.

 

원통공동체(원장 김병진 신부)는 원통본당 천도리공소와 해안공소를 맡아 공소 선교를 하다가 지금은 해안공소를 양구본당으로 넘겼고, 재가복지사업(글라렛재가복지센터)과 피정사도직(겟세마니 영성의 집)을 진행 중이다.

 

특히 지역 차상위계층 어르신 110여 명을 대상으로 이뤄지는 재가복지활동은 어르신들 말벗도 해드리고 밑반찬 지원사업과 함께 목욕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평생 농촌에서 잔뼈가 굵은 어르신들 삶의 질을 높여주고 있다.

 

공소선교와 재가복지활동의 결합은 반응이 좋지만 천도리공소는 이제 어느 정도 안정이 됐기에 원통본당으로 이관하고, 2011년 봄쯤 영동 지역인 거진, 고성 쪽으로 옮겨 활동할 계획이다.

 

이뿐 아니라 2002년에는 수도회 소속 본토인 사제가 처음으로 베트남 호치민시에 파견되는 기쁨을 안았고, 현재 베트남 신학생 양성과 선교 공동체를 만드는 데 애를 쓰고 있다. 베트남에 본토인 사제를 파견한 것은 선교활동의 꽃인 외방 선교에 투신함으로써 선교수도회 공동체로서 수도회가 입지를 굳히는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관구장 이회진(빈첸시오) 신부는 "글라렛 선교 수도회 영성은 예언자적 영감으로 사도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자신과 일치시킴에 둔다"며 "앞으로도 수도자들을 위한 영적 지도 및 평신도 선교사 양성 등을 통해 말씀 봉사직에 매진하는 동시에 수도회 카리스마와 시대 요청에 부응하는 새로운 선교활동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글라렛 선교 수도회 영성과 역사 - 고유 영성 쇄신하며 발전

 

 

- 글라렛 선교 수도회 설립자 성 안토니오 마리아 글라렛 대주교. 19세기의 위대한 선교사 중 한 사람으로, '쉬지 않고 일하는 사도'로 일컬어져 왔다. 특히 스페인과 중미 쿠바에서 설교자이자 교육자, 작가, 남녀 수도회와 평신도사도직회 설립자로서 소명을 끊임없이 수행했다.

 

 

글라렛 선교 수도회의 영성적 특징은 하느님 말씀의 경청자이자 봉사자로서의 영성, 그리스도 중심의 영성, 성체신심의 영성, 하느님께로 온전히 의탁하는 영성, 성모성심의 충실한 자녀로서의 영성으로 요약된다.

 

이는 수도회가 사도들 생활양식을 따르고 예언자적으로 말씀에 봉사하는 사도적 선교사를 카라스마적 정체성으로 삼으면서 시대 흐름 변화에 맞게 고유 영성과 삶의 방식을 쇄신해온 결실이다. 즉 모든 사도직과 선교 활동 추진을 말씀 직무와 예언자적 선교사명이라는 카리스마적 보편성 안에서 구현한 데 따른 것이다.

 

수도회 출발은 역시 소박했다. 1849년 스페인 빅(Vic)신학교의 한 교실에서 안토니오 마리아 글라렛(1807~1870, 사진) 신부가 동료 사제 5명과 함께 '티 없으신 성모성심의 아들들의 선교 수도회(Claretian Missionaries :C.M.F.)' 설립을 결의하면서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선교수도회로서 역사는 그다지 순탄하지 못했다. 수도회 설립 직후 20일도 채 못돼 설립자가 쿠바 산티아고대교구 교구장 대주교에 임명돼 현지로 부임했다. 그 뒤 글라렛 대주교는 '쿠바의 영적 아버지'로 존경을 받았지만 1868년 세스페데스가 이끄는 제1차 쿠바 혁명으로 파리로 망명했다.

 

수도회는 설립 당시 동료 사제였던 호세 시프레 신부가 1858년부터 1899년까지 총장직을 수행하며 질적, 양적 발전을 이뤘다.

 

시련도 잇따랐다. 1936년 스페인 내전으로 수도회 형제들 271명이 공산주의에 맞서 신앙을 증거하다가 순교하는 비극을 맞이했다. 하지만 1950년 5월 7일 글라렛 대주교가 시성되면서 새롭게 도약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전 세계 70여 개국에서 회원 3500여 명이 사도적 선교사로서 다양한 소명을 실천하고 있다.

 

국내에는 1982년 9월 진출, 1985년 한국 공동체로 출발했으며 지난 6월 한국독립대리관구로 승격돼 초대 관구장에 이회진 신부를 선출하는 등 집행부를 구성했다. 현재 서울 본원을 중심으로 광주 남평, 원통, 부천공동체에서 회원 22명이 활동하고 있다.

 

오는 22일 오전 11시 30분 인천교구 검암동성당에서 인천교구장 최기산 주교 주례로 한국 진출 25주년 기념 감사미사를 봉헌한다.

 

※ 성소모임

 

매달 넷째 주 주일 오후 2시 서울 본원(서울 성북구 성북2동 99의2)

문의 : 02-743-6031(최지훈 신부)

 

[평화신문, 2010년 10월 17일, 오세택기자, 사진=전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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