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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노기남 대주교와 한국 천주교회 심포지엄 종합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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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06 ㅣ No.820

[2010년도 심포지엄] 노기남 대주교와 한국 천주교회 종합토론

 

 

사회자 : 김수태 교수 · 충남대학교

 

토론자

한윤식 신부 · 부산가톨릭대학교

노용필 소장 · 한국사학연구소

이현진 교수 · 국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허동현 교수 · 경희대학교

 

 

김수태 : 종합토론 사회를 맡은 김수태라고 합니다. 오늘 발표의 의의에 대해서는 먼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2003년에 노기남 대주교 화보집을 내고, 절두산 박물관 개관을 하면서 노기남 대주교님에 대한 작은 전시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노기남 대주교에 대한 학술회의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교회 내외부에서 민감한 이슈가 되고 있는 주제에 대해서 연구소가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대처해서 학술회의를 하는 것이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기회를 빌려서 아부를 한다면, 역시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수준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토론에 임하기 이전에 토론자부터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제 옆에 앉아 계시는 분이 부산가톨릭대학교에 계시는 한윤식 신부님입니다. 그 옆에 계신 분은 한국사학연구소 소장이신 노용필 선생님입니다. 세 번째 토론해 주실 분은 국민대학교 일본학연구소에 계시는 이현진 선생님입니다. 마지막 토론은 경희대학교에 계시는 허동현 선생님께서 해주시겠습니다. 바로 토론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첫 번째 발표에 대해서 부산에 계시는 한윤식 신부님께서 토론해 주시겠습니다.

 

 

한윤식 : 반갑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초대해 주시고 논평의 기회를 주신 한국교회사연구소에 감사드립니다. 양인성 선생님께도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 드립니다.

 

1924년 5월 중국 첫 전국 공의회(Concilium Plenarium)가 개최된 후 2년이 조금 지난 1926년 10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는 비오 11세 교황의 주례로 6명의 중국인 사제를 주교품에 올리는 주교 성성식이 거행되었습니다. 그리고 1924년 10월 일본 첫 지역 공의회(Concilium Provinciale)가 개최된 후 3년이 조금 지난 1927년 10월,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는 교황 비오 11세의 주례로 최초의 일본인 주교 성성식이 거행되었습니다. 한국의 경우를 살펴보면, 1931년 9월 서울에서 한국 첫 지역 공의회(Concilium Provinciale)가 개최된 후 10년이 지난 1942년 12월, 명동 성당에서 노기남 신부의 한국인 첫 주교 성성식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중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에서의 현지인 주교 탄생은 개별(지역)교회 설립에 있어 초석이 되는 중요한 교회사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1942년 노기남 신부의 주교 임명과 경성 대목구장 착좌는 한국 천주교회사의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노기남 신부의 경성 대목구장 착좌에 대한 연구>는 그 자체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논문은 해방 전후의 격동기에 한국인 최초의 주교로서 한국 천주교회를 이끌어간 노기남 대주교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의 서막을 알리는 작업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황청 문서고의 열람 시기가 교황 비오 11세의 재위 시기(1939년 2월)까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노기남 신부의 경성 대목구장 임명과 관련된 포교성성 문서고의 주요 기록들을 살필 수 없는 가운데 이 논문이 작성되었다는 점에서, 제 개인적으로, 다소 아쉬움이 남습니다. 하지만 경성 대목구장으로 임명되기 전 노기남 신부가 종현 본당(현 명동 주교좌 성당) 보좌 신부로서 어떤 활동을 하고 있었는지 먼저 구체적으로 살피고, 이를 바탕으로 그가 경성 대목구장에 임명된 배경을 서술함으로써 노기남 신부의 주교 임명과 경성 대목구장 착좌에 관한 기존의 단편적인 견해를 극복하고 보다 설득력 있게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 논문이라 생각합니다.

 

발표문을 읽으며 노기남 신부의 주교 임명과 경성 대목구장 착좌의 배경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기에 이 자리를 빌어 다시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토론을 맡은 사람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발표자께 몇 가지 질문과 더불어 저의 소견을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1. 발표자께서는, 발표문 18~19쪽에 걸쳐,“1928년 1월 21일 경성 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장차 한국인 주교를 탄생시켜 자치교구로 승격시키려는 목적으로 황해도 감목 대리구를 설정하고, 초대 감목 대리에 장연 본당 주임 김명제 신부를 임명하였다. 뮈텔 주교는 중국과 일본에서 본국인 교구장이 등장하였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하고 황해도 감목 대리구를 설정한 것으로 여겨진다”라고 서술하셨습니다. 과연 그러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포교성성 문서고의 자료를 보면, 서울 대목구를 분할하여 평양 지목구를 설립하고자 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던 포교성성 장관 판 롯숨(Van Rossum) 추기경은, 1926년 후반, 한국인 주교가 이끄는 현지인 선교지(Missio indigena)의 설립을 목적으로 서울 대목구를 분리하는 또 다른 계획을 수립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판 롯숨 추기경은 일본 동경 주재 교황 사절(Delegatus Apostolicus) 마리오 자르디니(Mario Giardini) 대주교에게 서한을 보냅니다. 그리고 자르디니 대주교가 한국에 “현지인 선교지들이 설립되기를 바라는 포교성성의 입장을 염두에 두고, 아울러 한국과 같은 넓은 지역을 위해 필요한 선교사들을 유럽이나 미국에서 수적으로 충분히 찾기 어려운 점을 예상하여” 또 다른 서울 대목구 분리 계획을 포교성성에 제시하도록 요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자르디니 대주교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뮈텔 주교는 포교성성의 이러한 계획에 대해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서울 대목구의 또 다른 분할이 한국에서 복음 전파 사업을 촉진시키는 데 있어 어떤 긍정적인 결과도 초래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뮈텔 주교는 포교성성의 계획에 반대하는 일련의 이유들을 제시하였는데, 그중 하나는 적합한 장상을 찾기 어렵다는 점, 그리고 한국인 사제들에게 겸손하게 그들 중 한 명의 한국인의 지시에 따르도록 설득하기 어렵다는 점이었습니다. 또 다른 한 이유는, 자르디니 대주교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가 지닌 일종의 편견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즉, “주교이든 아니든, 만약 한국인을 교회의 장상으로 임명할 경우, 이를 보고 많은 이들, 특히 지역 당국자들(모든 일본인들)이 해당 교회의 직무를 경시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자르디니 대주교는 포교성성에 보내는 자신의 서한에서 뮈텔 주교의 이러한 입장을 “의심의 여지 없이 순전한 편견에 관한 것”으로 일축하며, “오히려 교회 자체로부터 그러한 발의가 나오기를 바랄 만하다”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함으로써 새로운 현지인 선교지 설립을 위해 서울 대목구를 분할하고자 하는 포교성성의 계획에 찬성하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일본인 정복자들 앞에서 한국인이 열등한 사회적 지위 아래 예속되어 있고, 한국 전체를 아울러 일반 시민의 위계상 영향력 있고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한 한국인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새로이 설립할 현지인 선교지를 이끌 인물로 뛰어난 수준의 한국인을 후보자로 정할 필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동경 주재 교황 사절은 현지인 선교지 설립에 관하여 뮈텔 주교가 제시한 반대의 이유들을 사실상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포교성성의 직접적인 개입을 요구하였습니다. 포교성성이 서울 대목구의 뮈텔 주교에게 “빠른 시일 안에 한국인 사제에게 맡겨 사목하도록 할 지역으로 충청도, 즉 대구 대목구와 접한 서울 대목구의 남쪽 부분을 지정하도록” 건의하며 관련 지역의 정보를 포교성성에 보낸 것입니다.

 

충청도를 한국인 사제에게 맡겨 사목하게 함으로써 현지인 선교지의 설립을 추진하고자 하는 자르디니 대주교의 계획은 즉시 포교성성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포교성성은 이러한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자르디니 교황 사절에게 뮈텔 주교를 만나고, 또 미래의 선교지를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하도록 독려하였고 그를 설득하여 충청도를 감목 대리구(Vicariatusforaneus)로 세우고, 현지인인 한국인 사제를 감목 대리(Vicarius foraneus)로 임명하여 그에게 충분한 권한을 부여하고, 성무를 집행하는 현지인 사제가 수적으로 충분하지 않을 경우 서울 대목구의 다른 지역으로부터 한국인 사제들을 이전시키도록 하였습니다.

 

포교성성이 제시한 지침에 대한 응답으로 뮈텔 주교는 1928년 1월 서울 대목구 내에 감목 대리구를 설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감목 대리구로 설정된 곳은 충청도가 아니라 평양 지목구와 접하고 있는 황해도 지방이었습니다. 제가 이런 일들을 소개하는 이유는 발표자께서 18~19쪽에 걸쳐 말씀하신 견해가 어떻게 보면 객관적인 사실과 조금 다르다는 측면을 제시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울러서 노기남 신부님의 경성 대목구장 착좌, 여기에 라리보 주교님의 적극적인 역할 뒷면에 이전부터 있어 왔던 한국 지역의 현지인 선교지, 한국인 주교가 이끄는 가톨릭 선교지 설립을 촉진했던 교황청의 역할도 분명히 찾아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 언급했습니다.

 

2. 발표문의 논지를 따라가다 보면, 라리보 주교 개인의 주도적인 역할로 노기남 신부가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주교로 임명되고 서울 대목구장이 된 것으로 파악됩니다. 특히 제3장 ‘경성 대목구장 착좌 배경’ 부분에서 제시한 내용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다가옵니다. 하지만 앞서 제가 언급한 내용을 염두에 둔다면, 노기남 신부의 주교 임명과 서울 대목구장 착좌는 현지인 주교가 이끄는 가톨릭 선교지 설립을 통해 장차 지역교회 설립의 초석을 놓고자 한 교황청의 선교정책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 또한 간과할 수 없다고 봅니다. 이에 대해 발표자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사실 서울 대목구장의 임명은 전적으로 교황청의 권한에 속한 사안이므로, 라리보 주교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결정 때문만이 아니라 당시 교황청이 실현하고자 애쓴 선교정책 속에서, 포교성성과 일본 동경 주재 교황 사절 사이의 공조 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할 수도 있습니다. 지면상의 이유로 더 자세히 언급할 수는 없지만, 사실 1931년 한국 첫 지역 공의회가 개최된 이후, 라리보 서울 대목구장 재위 시기에, 현지인 주교가 이끄는 가톨릭 선교지의 설립을 위해 교황청이 적극적으로 개입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역사》 제62호(1980년 10월) 3쪽에 보면, ‘대한민국 건국과 천주교회’라는 제목으로 노기남 대주교님이 남기신 교회사 간담회 요지문이 실려 있습니다. 서두에 보면 노 주교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1942년 대동아 전쟁 직전에 최초의 한국인 주교로 임명된 것은 천주의 섭리와 교황청의 원대한 정책이 작용하고 있었다.” 여기서 ‘교황청의 원대한 정책’이란 말에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3. 교회 직무에 관한 용어 사용에서 약간의 정리가 필요한 듯합니다.

 

① 발표자께서는, 머리말(3쪽) 첫째 단락에서,“교황청의 명에 따라 노기남 신부는 그해 1월 18일 종현 대성당에서 경성 대목구장에 착좌하였다”라고 서술하셨습니다. 그리고 발표문 18쪽에서도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42년 1월 18일 (…) 노기남 경성 대목구장 착좌식이 거행되었다”라고 서술하셨습니다.

 

그런데 경성 대목구장에 착좌한 것이 아니라 경성 대목구장 서리(Administrator) 취임식을 거행한 것으로 보아야 할 듯합니다. 교황청이 노기남 신부를 경성 대목구장 서리에 임명하는 순간, 기존 경성 대목구장의 재치권은 정지되고, 노기남 신부가 대목구의 통할을 담당하게 되므로, 사실상 노기남 신부는 경성 대목구장의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1917년 교회법전 제316조 참조). 하지만 정식 주교 임명은 없었습니다.

 

사실 발표자께서도 발표문 23쪽에서, 노기남 신부는 1942년 11월 14일자로 콜바사(Calbasa)의 명의 주교이자 경성 대목구장에 임명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그 이전인 1942년 1월 18일 노기남 신부가 ‘경성 대목구장에 착좌하였다’는 서술은 정확하지 않다고 봅니다. 아울러 발표문 23쪽에서 사용된 표현, 즉 “경성 대목구 교황 대리 주교”도 ‘경성 대목구장’으로 바꾸는 것이 더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발표문 19쪽의 “관후리 성당에서 평양 대목구장 취임식 겸 인사를 하였다”도 부정확한 표현이라고 봅니다. 평양 대목구장 서리 취임식이 더 정확한 표현 같습니다.

 

② 발표자께서 사용하신 ‘부주교’라는 용어의 사용과 관련하여 정확성을 기했으면 합니다. 예를 들어 발표문 6쪽 상단에서 비에모(禹一模) 신부를 경성 대목구 ‘부주교’로 언급하십니다. 제가 아는 바에 따르면, 1917년 교회법전을 사용하고 있던 당시, ‘Vicarius generalis’를 ‘부주교’로 번역하여 사용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1962년 한국에 정식으로 교계제도가 설립되기 전이었으므로, 비에모 신부가 1926년부터 수행한 직무의 공식 명칭은 Pro-Vicarius였습니다. ‘교구’의 ‘Vicarius generalis’와 ‘대목구’의 ‘Pro-Vicarius’는 사실상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기에, 비에모 신부를 경성 대목구 ‘부주교’로 언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서울교구’가 아니라 ‘서울 대목구’였기에 따라서 ‘대목구장 대리 혹은 서리’라는 표현이 더 정확한 듯합니다.

 

사실 발표문에서 사용한 ‘부주교’라는 표현은 자칫 혼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오늘날 ‘부주교’(Episcopus coadiutor)라는 용어는 교구장 승계권을 가진 주교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발표문 15쪽의 “부주교 이기준 신부에게”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노기남 신부는 주교 임명과 더불어 서울 대목구장이 된 후 1917년 교회법전의 규정(제309조)에 따라 ‘대목구장 대리 혹은 서리’(ProVicarius)로 이기준 신부를 임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4. 발표자께서는, 발표문 23쪽에서, 노기남 신부의 주교 임명 일자를 1942년 11월 14일로 서술하셨습니다. 제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주교 임명 일자는 1942년 11월 10일입니다. 오타인 것 같은데, 확인을 부탁드립니다.

 

 

김수태 : 신부님께서 여러 가지를 함축하면서 양 선생님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양 선생님, 답변해 주십시오.

 

 

양인성 : 신부님 질문에 감사드립니다. 첫 번째 질문부터 답변하겠습니다. 신부님께서는 황해도 감목 대리구의 설정과 관련해서 질의하셨습니다. 1928년 1월 21일 황해도 감목 대리구가 설정되었는데, 저는 뮈텔 주교가 중국과 일본에서 본국인 교구장이 등장하였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하고 감목 대리구를 설정하였다고 보았습니다. 그 근거로 설정 당시 교서의 내용에서 “어찌 공연히 이르되 다른 이웃나라에는 다 제 국적의 주교가 있으되 어찌하여 우리는 동족인 주교를 얻지 못하느냐 하리오”를 주목하였습니다. 그런데 신부님께서는 교황청이 주일 교황 사절 자르디니 대주교의 계획을 지지하고 한국인 사제를 감목 대리로 임명하고 감목 대리구를 설정하도록 함에 따라 뮈텔 주교가 황해도 감목 대리구를 설정했다고 보셨습니다. 물론 교황청은 충청도에 감목 대리구를 세우고자 했지만, 실제로 설정된 지역은 황해도였지요.

 

신부님께서 지적하신 바와 같이 교황청의 방침이 황해도 감목 대리구가 설정되는 데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도 봅니다. 그러나 저는 뮈텔 주교가 이웃국가인 중국과 일본에서도 본방인 주교가 탄생하고, 자치 교구가 설정되는 상황에서 더 이상 한국에서 감목 대리구의 설정을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한 것도 황해도 감목 대리구가 설정되는 또 하나의 계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한국 교회에서 감목 대리구의 설정은 1926년 후반에 처음 논의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적어도 1925년에도 자치교구를 설정하려는 움직임이 한국 천주교회 내에서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동아일보》 1925년 7월 2일자에는 흥미로운 기사가 있습니다. 제목은 <천주교 조선인측 자치 실시 확정>입니다. 궁금해하실 것 같아서 기사 전문을 읽겠습니다. 내용이 길지 않으니 양해바랍니다.

 

불국(프랑스) 천주교에서는 조선 안에 있는 교회를 자치 교회 제도로 변경하고자 일전에 명치정 천주교회(명동 본당) 안에서 회장 뮈텔 씨 이하 선교사 십오 명이 회합하여 협의한 결과 조선인 자치 독립 교회제를 채용키로 결의되어 처음으로 황해도교구를 조선인 신부 관할로 하기로 하고 황해도 안악군 용문면 구화리(‘매화리’의 잘못)에 있는 천주교회당 불국 신부 ‘레온’(매화동 본당 퀴를리에 신부) 씨를 경성으로 부르고 그 후임으로 조선인 신부를 두기로 하기로 되었다는데, 이것이 동기로 되어 방금 자치운동이 맹렬한 미 감리파 교회에 적지않은 영향이 있으리라고 관측된다더라.

 

1925년 7월 이전에 뮈텔 주교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명동 본당에 모여 조선인 자치 독립 교회제, 즉 자치교구 설정 문제를 논의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황해도에 자치교구를 설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왜 1925년에 황해도 자치교구 설정 문제를 논의하였는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미 1925년에도 황해도 자치교구 설정이 논의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잘 아시다시피, 황해도 자치교구 설정 문제는 논의만 되었을 뿐, 실행되지는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저는 가장 큰 이유가 선교사들의 부정적인 인식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아직 한국인 자치교구가 설정될 때가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 그것은 신부님의 토론문을 보면 여실히 드러납니다.

 

신부님의 토론문을 보면, 1926년 현지인 선교지 설립 문제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때 뮈텔 주교는 포교성성과 주일 교황 사절 자르디니 대주교의 의견과는 달리 서울 대목구를 분할하여 한국인 자치교구를 설정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그는 그 이유로 적합한 장상을 찾기가 어렵다는 점, 한국인 사제들에게 겸손하게 그들 중 한 명의 한국인의 지시에 따르도록 설득하기가 어렵다는 점 등을 들었습니다.

 

이를 정리하면 1925년, 1926년에 연이어 한국 천주교회 안팎에서 한국인 자치교구 설정 문제가 논의되었습니다. 그러나 실행되지 못하였습니다. 뮈텔 주교를 비롯한 선교사들의 부정적인 인식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한 인식은 비단 이때만이 아니라 노기남 주교의 경성 대목구장 착좌 이후에도 계속 보입니다. 그러한 인식을 가지고 있던 뮈텔 주교는 교황청의 지시도 있었거니와 중국인, 일본인 교구장이 탄생함에 따라 한국 천주교회에서도 더 이상 자치교구 설정을 미룰 수 없다고 본 것도 1928년 1월 황해도 감목 대리구가 설정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이 글이 노기남 주교의 경성 대목구장 착좌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 황해도 감목 대리구에 대한 설명이 상대적으로 소략합니다. 검토할 것이 많으나 너무 자세하게 하다 보면 옆길로 샐 것 같아서 간단히 정리했습니다. 하지만 차후 원고를 수정할 때에 신부님께서 지적해 주신 내용을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 답변하겠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노기남 신부의 주교 임명과 경성 대목구장 착좌는 라리보 주교 개인의 주도적인 역할도 있었지만, 현지인 주교가 이끄는 가톨릭 선교지 설립을 통해 장차 지역교회 설립의 초석을 놓고자 한 교황청의 선교정책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 또한 간과할 수 없다고 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1919년 교황 베네딕도 15세가 교서 <막시뭄 일룻>에서 현지인 사제단 양성 문제를 강조한 이후, 교황청은 지역교회의 탄생에 노력하였습니다. 일본인 주교가 탄생하고, 노기남 신부가 경성 대목구장에 착좌한 것도 바로 이러한 교황청의 선교정책이 있어 가능했다고 봅니다. 노기남 주교가 말한 ‘교황청의 원대한 계획’이란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신부님께서는 경성 대목구장의 임명이 라리보 주교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결정 때문만이 아니라, 당시 교황청이 실현하고자 애쓴 선교정책 속에서, 포교성성과 마렐라 대주교 사이의 공조 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이에 대해 동의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바도 아닙니다. 그런데 발표문에서는 이러한 내용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정도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라리보 주교의 결정이 노 신부의 경성 대목구장 착좌에 결정적인 이유였다는 점입니다. 라리보 주교는 1941년 12월 20일자 마렐라 대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 자신의 사임을 알리는 한편, 후임에 노 신부를 추천하였습니다. 그리고 마렐라 대주교는 이를 받아들여 교황청에 알렸고, 교황청에서는 1942년 1월 3일 이를 윤허한다는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이를 보면 라리보 주교의 결정이 노 신부의 경성 대목구장 착좌에 중요한 이유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마렐라 대주교가 라리보 주교의 의사를 교황청에 전한 후, 포교성성과 이 문제에 대해 논의를 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양자간에 공조가 어떻게 이루어졌던 간에, 결국 교황청에서는 라리보 주교의 의사를 수용하여 그의 사임을 윤허함과 동시에 후임으로 추천된 노기남 신부를 경성 대목구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둘째는 포교성성과 마렐라 대주교 사이의 공조가 이루어졌다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알 수 있는 문서 자료를 찾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노기남 신부가 경성 대목구장에 임명되는 데에 교황청 포교성성과 마렐라 대주교 사이의 공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정확히 확인되지 않습니다. 교황 비오 12세의 문서가 열람된다면, 이와 관련된 자료를 찾아 규명할 수 있기를 고대해 봅니다.

 

세 번째, 교회 직무에 관한 용어 정리를 지적하셨는데요, 동의합니다. 저의 불찰입니다. 원고를 수정할 때 반영하겠습니다.

 

네 번째, 노기남 신부의 주교 임명 일자를 1942년 11월 14일로 했는데요, 당시 《경향잡지》를 참고로 했습니다. 다시 확인해 보니, 11월 14일이더군요. 그런데 주교 임명 교황 칙서를 보니, 11월 10일이었습니다. 신부님께서 지적해 주신 것이 맞습니다.

 

 

김수태 : 양 선생님이 강력하게 반박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는데요, 본인이 인정했듯이 글에 그런 부분이 나타났으면 여러 사람들이 그런 오해를 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한 신부님께도 다시 한 번 손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드려야겠죠.

 

 

한윤식 :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한국에서 오랫동안 활동하셨던 장상으로서 대표적인 두 분을 꼽는다면, 뮈텔 주교님과 대구에 있던 드망즈 주교님입니다. 현지인 선교지 설립, 한국인 사제, 주교가 이끄는 선교지 설립을 위해 가장 먼저 애썼던 분은 사실 뮈텔 주교님이 아니고 드망즈 주교님입니다. 그분의 기록들을 보면 실제로 이미 1910년대 후반 말부터 구체적으로는 1919년부터, 그때부터 한국인 주교가 이끄는 가톨릭 선교지 - 대목구든 지목구든 - 를 위한 계획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저는 오늘 1925년의 내용은 다시 한 번 확인해 봐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1925년 뮈텔 주교님이 5개년 연간 보고서를 교황청에 제시하고, 포교성성이 그 보고서를 보면서 서울 대목구를 또다시 - 이미 평양 지목구 분리 계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 분리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워보자고 결정을 내리거든요. 그런데 이런 결정을 내린 계기가 대구 드망즈 주교님이 적극적으로 제시한 현지인 선교지 설립을 위한 계획이었습니다. 포교성성에서 그 보고서를 보면서 그렇다면 서울 같은 경우에 더 적극적으로 할 수 있지 않느냐, 그런 측면에서 제시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알고 있는 상황에서 이미 1925년 《동아일보》에 그런 기사가 실렸다는 것은 저에게 새로운 정보로 다가옵니다. 저도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면서 어떻게 된 것인지, 논리적으로 이해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 당시 현지인 선교지 설립에 있어서 애초에 뮈텔 주교님이 가지고 있던 생각에 대해서 당신이 주도권을 직접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을 본다면, 발제자께서 본문에 말씀하신 내용은 당시 역사적 사실과 안 맞지 않는가 하는 측면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었고, 사실상 더 중요한 것은 이런 단편적인 글이지만 그것을 통해서 두 번째 질문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던 겁니다. 교황청의 선교지 정책, 중국 · 일본 · 한국을 통한, 아시아 지역에 20세기 전반에 들어서 교황청이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던 정책을 실천하고자 했던 교황 사절, 그 관계 속에서 노기남 신부님의 주교 임명 그리고 경성 교구장 착좌… 이런 측면들을 잘 부각한다면 발표자의 글이 더 다양한 시각에서 착좌 배경을 살피는 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측면에서 드린 말씀이었고, 잠깐 언급은 했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노기남 주교님의 주교 임명, 대목구장 착좌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1920년대 후반부터 있어 왔던 일반 한국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서 현지인 주교에 대한 갈망들이 나타난 잡지들, 이런 것들도 함께 부각이 된다면 라리보 주교님의 개인적인 역할도 간과할 수 없지만 좀더 풍부한 측면에서 착좌 배경을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수태 : (양인성에게) 드망즈 주교님에 대해서만 간단하게 말씀 부탁드립니다. 하실 말씀이 없다면 토론자의 의견을 수용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신부님께서 사적으로 얘기했는데, 개인적으로 모질지 못하다고 하시면서 집요하게 질문하셨습니다. 제가 나쁜 버릇이 나오는데요. 다른 토론자들께서 질문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노용필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노용필 : 굳이 실명까지 거론하며 기회를 주시니 말하지 않을 수 없네요. 한 신부님께서 부산교구이시고 그런 관점에서 드망즈 주교의 기록들을 면밀히 보시면서 토론을 준비하신 것 같은데, 드망즈 주교의 일기를 보면 그런 부분들이 강하게 풍기죠. 대구가 중심이 돼서 교우촌 등이 강했기 때문에 (현지인 선교지에 대한) 열망이 강하게 우러나오고 있거든요. 그 부분도 양 선생님이 충분히 반영하셔서 들여다보게 되면 훨씬 입체적인 분석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상입니다.

 

 

김수태 : 첫 번째 발표에 대한 토론은 이 정도로 마치고, 두 번째 발표에 대한 토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두 번째 발표에 대한 토론은 지금 마이크를 잡으신 노용필 선생님께서 해주시겠습니다.

 

 

노용필 : 노용필입니다. 제가 준비한 토론문을 읽기에 앞서서 한두 가지만 양념 삼아 말씀 드려야 되는 것이, 발표하신 논문을 읽고 들으면서 느낀 것 중 하나가 방점과 행간이라는 키워드를 감히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성당에서도 강론 시간에 듣다 보면 청중의 입장에서는 어느 부분에 방점이 있고 신부님이 엑센트를 주시느냐를 좀 생각할 필요가 있겠죠. 가령 대주교님이 교서를 발표하거나 강론, 말씀을 하실 때, 청중들은 분명 그 시점에서 어디에 방점을 두고 엑센트를 주셨는지 생생하게 기억할 것입니다. 그런데 후대 사람들은 그냥 활자화된 것을 지금의 시점에서 보고 읽으려 할 뿐이겠지요. 결국, 그런 것을 읽을 때도 행간을 정확히 읽어서 독자로서, 독자답게 글 쓴 분, 또는 게재한 분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해야 하는데 그게 아니지 않느냐 하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생기면, 이건 고려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몇십 년 전의 글을 지금 읽는다고 해서, 그것을 그냥 글로만 볼 것이 아니라 어디에 핵심을 두고, 방점을 찍고, 엑센트를 주어 말씀하셨는지 헤아려 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기록을 역사학에서는 사료라고 하고, 기록의 분석이나 해석을 사관에 입각해서 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사실, 기록이 물질이고 대상이라고 한다면, 사관이라고 하는 것은 관념이겠지요. 분석하는 사람의 안목이 굉장히 중요할 텐데, 안목이라는 것이 과연 보편타당성을 갖느냐 아니면 전체적인 것을 고려했느냐 등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특히, 서구의 역사학자들이 언급하긴 합니다만, 현대사 - ‘당대사’라고 번역을 하기도 합니다만 ?를 파악할 때 더욱 조심스러워야 하는데, 그것이 균형을 가진 안목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냐, 그런 안목으로 작성된 논문이냐 하는 것이 지금은 넘어갈지 몰라도, 또 그것 자체가 후대에 평가대상이 되지 않겠나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순간과 영원”이라는 표현을 감히 드리고 싶습니다. 순간이라고 하는 것은 이 순간이겠지요. 전체적인 시간으로 볼 때는 부분에 불과할 텐데, 영원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거시라는 표현을 쓴다면 조금 달리 생각할 부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대주교님의 글을 보면 그 당시 처해진 상황, 처지, 입장 속에서 이런저런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이 과연 영원한 삶을 지향하는 신자로서, 신부로서, 주교로서, 어떤 속내를 갖고 하신 말씀일까를 잘 헤아려 봐야 하고, 살펴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상당히 중요하지 않겠냐는 것이 현대 교회사에 대한 글을 읽고 공부하고 작성하면서 갖게 되는 소회입니다. 제가 주제 넘는 표현들을 드린 것 같지만 그런 전반적인 것들이, 크게 얘기하면 종교사, 좁게 얘기하면 천주교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로서 제 자신도 다짐을 다지는 대목입니다.

 

토론문을 그냥 읽겠습니다. 왜냐하면 뒷부분에 가면 제가 노기남 대주교님이 쓰신 글도 인용했는데, 귀한 시간 내서 오신 청중들께도 도움을 드려야 하지 않나 생각을 합니다. 이장우 박사님의 글에 대한 논평입니다.

 

이 논문은 발표자가 일본제국이 우리나라를 지배하던 시대 말기의 이른바 전시통제체제 아래에서 조선 천주교회가 처해 있었던 상황을 당시 천주교회의 수장이었던 노기남 대주교의 활동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 것으로, 기왕의 연구 성과들을 충분히 검토한 토대 위에서 그것들이 지니는 문제점들을 뛰어넘으면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이 부분의 교회사 연구의 수준을 한층 드높였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완성도를 지극히 고양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게끔 논평자로서 인용과 관련된 사소한 지적을 먼저 하고, 그 다음으로 한두 가지 언급을 하고자 합니다.

 

1) 1942년 6월의 총력 경성교구연맹의 이사장 교체와 관련한 부분에서, 천주교회에서는 노기남 주교와 김한수가 참여하였다고 하면서, 임종국, <일제말 친일군상의 실태>, 《해방전후사의 인식》, 한길사, 1989, 273쪽을 인용하여 표기하였는데, 이는 ‘1979, 238쪽’이 옳으며, 임종국의 글 원문에는 ‘천주교:岡本鐵治(?) 金光翰洙(?)’로 되어 있는데 이 ‘岡本鐵治’이 바로 노기남 주교의 창씨개명이었으므로 틀린 게 아니지만 이러한 사실 관계를 풀어서 적어 주어야지 나중에 혼란이 없을 듯합니다.

 

2) 각주 16)에 최석우, <한국 교회와 한국인 사제 양성>, 《논문집》 11, 1985, 가톨릭대학 신학부, 192쪽으로만 되어 있는데 이에는 《한국 교회사의 탐구》 II,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의 것이 첨부되어야 할 것입니다.

 

3) 참고문헌으로, 동성학교와 관련해서는 《동성 팔십년사》, 동성중 · 고등학교, 1987과 《동성 구십년사》, 동성중ㆍ고등학교, 1997을, 소신학교와 관련하여서는 이원순, 《(사제성소의 작은 못자리) 소신학교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7이 활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발표문 각주 7번에서 자료 활용과 관련하여서 “《경향잡지》나 《매일신보》 · 《경성일보》 등의 신문들에 실려 있는 노기남 주교 관련 자료들도 참고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 자료들은 조선 총독부의 철저한 검열을 거쳐 작성되고 게재된 것들입니다. 말하자면 조선 총독부가 요구한 ‘공식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그들의 의도에 맞추어 작성된 기사들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기록들을 있는 그대로 이용한다면, 당시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우리라 판단된다”고 토로하고, 아울러 “이런 사정을 고려한다면 당시 공식적으로 간행된 잡지나 신문 등의 자료들은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은 ‘비공식적 자료’들과 대비시켜 이용해야 그러한 기록들의 이면에 감추어져 있는 당시의 실상을 균형 잡힌 시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이 시기의 교회사를 연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감하는 문제입니다. 다만 글로 되어 있는 이런 자료들을 눈으로 보더라도, 현장에서 발언이 어찌 느껴졌을까를 염두에 두는 게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단적인 예로 <대조봉대(大詔奉戴)와 교구장 취임에 제하야>(《경향잡지》 1942년 2월 15일)의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대목인 “이제 우리 손으로 우리 교회를 유지하고 유지할 뿐 아니라 발전시켜야만 한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무엇보다도 열심한 가톨릭 신자가 되고 충량한 황국신민이 되어야 한다. …비록 약간 어렵고 불편할지라도 공연한 비판이나 한탄을 말고 일치협력하야 무언복종하라”에서도 “이제 우리 손으로 우리 교회를 유지하고 유지할 뿐 아니라 발전시켜야만 한다”는 게 무엇보다도 핵심이므로 현장에서는 당연히 주교님께서는 이를 강하게 말씀하고 교우들도 그것을 가장 또렷이 들었을 것이며, 다음으로는 “우리는 무엇보다도 열심한 가톨릭 신자가 되고…” “비록 약간 어렵고 불편할지라도… 일치협력하야 무언복종하라”에서 톤이 높아졌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노 주교가 회고록에서 “마음에도 없는 대동아(태평양) 전쟁 필승을 강조하고 황당무계한 황국 신민화 운동을 역설해야 하는, 실로 연극적인 답사”(《나의 회상록》, 285쪽)였다고 회고한 마음을 느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서서 조망하자면, 이 답사를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하였기 때문에 “역사에서 지워질 수 없고 비판적인 평가를 면하기 어렵다”는 주장(윤선자, <한국천주교회의 통치권 이동>,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제의 인적 지배와 그리스도교계의 대응》, 집문당, 2005, 108쪽)이나, “노기남 주교와 조선 천주교회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강론과 《경향잡지》를 통해 노골적으로 전쟁 찬양을 하면서, 천주교의 지배적인 흐름, 즉 밀턴 잉거(J. MiltonYinger)가 제시한 ‘정의로운 전쟁’(just war)의 교리에서 이탈하여 적극적으로 ‘聖戰’으로 미화하였고, 심지어 그것을 즐기는 태도마저 내비쳤다. 이러한 당시 교회의 전쟁 지지는 ‘반가톨릭적인’ 행위였다”는 지적(강인철, <식민지 후기 교회에 대한 몇가지 반성적 고찰>, 《한국 천주교의역사사회학》, 한신대 출판부, 2006, 97~101쪽) 등은 숨이 살아 쉬는 목소리를 제대로 느끼며 속뜻을 들으려는 게 전혀 아니라 시간을 뛰어넘어 현재의 기분만으로 활자화된 책의 문맥만 나름대로 읽어내기에 불과할 수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장과 지적 등에 대해 조목조목 간결하면서도 힘 있게 반박한 발표자의 견해는 참으로 많은 것을 반추하고 느끼게 해준다고 하겠습니다.

 

노기남 주교의 특히 일제시대의 활동과 이에 대한 총독부의 통제와 관련해서 그의 성무 수행에 대한 협조자로서 기꺼이 살았던 이들에 대해서도 이제는 눈길을 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발표자의 발표문에서 찾아지는 이들만해도 다음과 같이 셋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발표문에 등장하는 순서를 기준으로 잡으면, 첫째는 1945년 2월 23일 專門學校令에 의한 雜種學校로 대신학교 설립 인가를 받을 수 있게 도와준 학무국장 엄창섭의 협조, 둘째는 노 주교님께서 논산에서 수모를 당한 지경에 있을 때 이를 해결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1942년 6월 총력 경성교구연맹의 이사장이 되어 대외적인 업무를 맡아주었던 南相喆의 역할 분담, 그리고 셋째는 사리원에서의 신사 참배를 감시 없이 넘어가게 해주었으며 이후로도 교구와 노기남 주교의 입장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아끼지 않았던 사리원 본당 주임 박규철 신부의 사랑 실천 등입니다. 이런 이들의 협조와 희생으로 노 주교님께서는 주교로서 성무를 잘 수행할 수 있었으므로, 이들의 노고 역시 충분히 평가를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이들 외에 일제시대 노 주교의 활동이나 삶의 살핌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빼놓아서는 안 되는 이가 또 하나 더 있으니, 바로 張勉 박사입니다. 그와 노 주교와의 일화 및 관계에 대한, 노 주교가 남긴 다음의 기록은 당시의 실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잘 새겨봄이 좋다고 믿습니다.

 

일제 말엽에 동성 학교에서 하루 한 시간씩 교리시간을 맡았던 나는 이런 요지의 강의를 학생들에게 한 적이 있었다. “…일본 천황은 절대의 신이 아니다. 절대의 신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일인 교사가 학무국에 이 사실을 보고하여 크게 문제가 되었다. 나는 반일 사상의 혐의를 받고 경찰에 붙들려 갔다. 장 요한의 힘이 아니었던들 큰 고초를 겪었을 게다.

 

장 박사로 말하면 영어는 물론 일어도 유창하게 구사하여 일인들도 그의 인격과 학식을 받들지 않을 수 없었던 터이지만, 그들에게 욕을 먹어가며 나의 구제 운동에 적극 힘을 기울였었다. 덕분에 나는 별 고생 없이 무사히 출감할 수 있었다.

 

1942년 주교가 된 나로서 일어를 전혀 배우지 않아 순 우리나라 말을 사용했다. 그래서 총독부 당국자도 주교인 나를 항상 사상 불순자로 주목해왔다. 그러자 장 박사는 내게 일어를 열심히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주교가 되어 총독부 출입이 잦아지자 내 신변을 염려하여 스스로 나의 비서 노릇까지 해주는 형편이니 모든 일을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장 박사는 일찍이 내 스승이었으면서도 나의 일이라면 자신의 일 이상으로 철저하게 협조해 주었다. 학교 일에 분망하면서도 총독부와의 접촉을 꾀하여, 우리 천주교가 박해를 받지 않도록 늘 손을 썼다. 우리는 가끔 밤늦도록 여러 가지 문제를 의논하기도 했다. 일제하에 4년간 주교 노릇을 하면서 나는 장 박사가 없으면 아무데도 나갈 수가 없었다. 한국 가톨릭 육성을 위해 그는 성의를 다했다. 어떤 이는 그를 일컬어 장 주교라고까지 말했다. 결코 과분한 호칭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이상으로 불려도 조금도 어색한 사람이 아니니 말이다. 장 박사는 우리나라 천주교 전교에 큰 공적을 쌓았기 때문이다(노기남, <거룩한 평신도 장 요한>, 張勉 博士 回顧錄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增補版), 가톨릭출판사, 초판, 1967 ; 재판, 1999, 336~337쪽).

 

이 글은 주목해야 하고 되새겨봐야 할 글이라고 생각해서, 발표자가 아님에도 감히 인용했습니다. 제가 끝무렵에 장면 선생에 대해서까지 언급한 까닭은 노 대주교님의 경우를 보면 장면 선생이 세상을 뜨신 1966년 이후 굉장히 외롭지 않으셨나, 말하자면 어려운 일을 장면 박사님처럼 나서서 스크린도 해주고 심리적으로 위로도 해준 분이 없지 않았나, 그래서 직접적으로 여러 가지에 노출되었고, 그런 부분에서 비판적인 이야기들도 듣게 된 것이 아닌가, 그런 것이 안타까워서입니다. 이상입니다.

 

 

이장우 :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처음 말씀해 주신 내용들 세 가지, 예를 들어서 인용 페이지 문제, 그건 아마 판본이 달랐던 것 같은데 어쨌든, 그것은 그대로 반영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참고문헌 인용의 부실을 지적해 주셨는데, 급하게 쓰다 보니 빠뜨렸습니다. 특히 후반부 신학교 폐쇄 문제와 천주공교신학교의 설립 과정 문제는 사실은 이원순 선생님의 《소신학교사》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150년사》 등을 참고해서 썼는데, 인용하는 걸 빠뜨렸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그건 나중에 보충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다음 아주 중요한 지적을 해주셨는데요. 당대의 기록을 읽을 때 그 시대에 들어가서 가능하면 실감나게 입체성을 더해서 이해를 하고 그 정도를 따져 보는 것, 그게 사실은 역사를 공부하고 연구하는 사람한테는 필수적인 필요조건입니다만, 보통은 잘 안 됩니다. 저부터도 자질이 미흡해서 하려고 애는 쓰는데 과연 얼마만큼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항상 그런 문제의식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말씀하신 노기남 주교와 관련된 인물들에 대해서, 좀더 노기남 주교의 외연을 확대시키면 노기남 주교와 당시 천주교회의 실체와 실상을 보다 폭넓고도 균형 있게 이해할 수 있지 않느냐는 지적이신 것 같습니다. 그 점도 백 번 공감합니다. 다만 능력이 미비해서 한 발표에 다 싣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서 제 개인적으로 이 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사실은, 이 시기를 잘 모르면서 무모하게, 하룻강아지가 호랑이한테 덤벼들 듯이 덤벼들어 가지고 많이 혼났습니다. 제 스스로 기록에 보이는 노기남 주교님한테 혼나기도 하고, 다른 분들한테 혼나기도 했는데, 첫 번째는 자료 문제입니다. 머리말의 각주에서도 언급했지만, 저희랑 가까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자료상의 제약이 굉장히 많습니다. 우선 교회 쪽 자료만 하더라도 당시가 워낙 압박받던 시기이다 보니까, 심지어 일본 경찰이 그야말로 교회에서 가장 은밀한 고해소까지 들여다보는 판국이니까, 주교나 주임 신부의 복사들은 아마 시도 때도 없이 고문을 당하고 심문을 당했을 겁니다. 물론 물리적 고문이 아니라 형사들이 첩보 수집한다고 닦달하고 사방팔방을 뒤지고 다녔을 겁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교회와 관련된 예민한 문제를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을 거의 생각해 보기 어렵습니다. 자칫 잘못해서 기록이 저쪽 손에 넘어가면 교회는 아주 낭패를 보기 때문에 아마 구두로 주고받았을 것입니다. 성직자든, 신자든 개인의 경우에는 더할 나위가 없었을 겁니다. 저희가 가까운 시기에 겪었지만 유신이나 5공 치하에서 그 체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그와 관련된 내용을 문서로 남긴다는 것은 거의 생각해 보기가 어렵습니다. 설사 남긴다고 해도 읽고 그 자리에서 없애거나 불태워 버려야 하죠. 일제시대 독립군들도 그러했듯이. 아마 그런 점에서 교회 쪽의 자료를 찾는다는 게 굉장히 어렵고, 설사 찾는다 해도 지극히 제한된 정보만 얻을 수 있는 게 한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한편 교회 쪽 자료와 카운터파트인 조선 총독부 쪽의 자료들도 좀 더 시간을 들여서 열심히 찾아보았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총독부 학무국이나 치안국의 자료들이 저로서는 현재 얼마나 있는지조차 파악을 못했습니다. 지금 현재 국내에서 대강 파악할 수 있는 <관보>같이 규격화되고 공식화된 자료에서는 지극히 단편적인 행정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기 때문에 실상을 알기 힘듭니다. 예를 들어 그 당시 경찰 첩보 보고서라든지 동향 보고서들이 남아 있어서 찾아볼 수만 있다면 이 내용을 훨씬 더 풍부하게 재구성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두 번째, 혹시나 싶어서 관점의 문제를 말씀드리는데 저는 머리말에서 민족주의적 관점에 얽매이지 않고 천주교회의 입장에서 천주교회가 일본의 전시통제정책에, 총동원 정책에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내용상 결과적으로 보다 보면 혹시나 오해가 생길까 싶어서 말씀 드리는데, 제가 접근한 것은 친일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아닙니다. 노기남 주교의 행적이 친일 행적이었냐 아니냐에 대해서 저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와는 전혀 차원을 달리해서 접근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호교론적인 입장이냐, 그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럼 민족주의 관점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했지만 민족주의 관점 자체를 배격한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그 당시 식민지 조선 사회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즉 부분집합을 이루고 있는 천주교회의 일본 전시통제정책에 대한 대응 방식을 교회의 입장에서 살펴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달리 말씀드리면, 어떤 한 인간 집단이 자신들의 공동체에 위협을 가해 오는 외부의 도전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했는지, 응전했는지 한 케이스를 살펴보고자 했을 뿐입니다. 그 점에서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김수태 : 플로어에서 이장우 선생님에게 질문을 하나 했습니다. 읽어드리겠지만, 이장우 선생님이 지금 말씀하셨는데, 대답을 안 하실 것 같아요. 무슨 질문이냐 하면, “노기남 주교님의 친일 행적과 관련해서 당시 타 종교 지도자들과, 예를 들어 불교 · 개신교 지도자들과 비교하면, 친일행위라고 볼 수 있는지, 사회적 배경에 의하여 어쩔 수 없는 친일행적인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지금 발표자는 친일인지 아닌지 관심이 없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

 

 

이장우 :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친일’이라는 단어는 학문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이것은 정치적 선택을 위한 용어이고 개념입니다. 운동의 차원에서 논의되는 개념이지, 엄밀한 학문적인 개념이 규정되어 사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사석에 나가서는 누가 친일했다 안했다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학문적 접근을 할 때는 대단히 절제하고 조심해야 할 용어입니다. 그래서 답변을 못 드리겠습니다. 이상입니다.

 

 

박태균 : 저도 한마디 하겠습니다. ‘친일’은 사실 민감한 문제고요. 천주교 측에서 친일 문제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 적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실이 있은 다음에 이게 정말 친일이냐 아니냐, 당시에 사정이 있었느냐 이런 논란이 같이 있는데, 저는 이전에 유감을 한 번 표시했으면 그것으로 일단락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종교와의 비교를 질문하셨는데 그 방향으로 가면 더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 개신교나 불교 같은 경우에는 친일을 한 쪽이 있고 안 한 쪽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서로 비교하면서 이야기가 되는데, 천주교는 중앙집권적이기 때문에 위에서 결정이 되면 전체가 그것에 따라가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것이 다른 종교와 비교될 수 있는 부분이고요. 다른 한편으로 본다면, 한 번 유감을 표명했기 때문에 친일이냐 아니냐를 더 논의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 같고요, 이제는 그 당시에 있었던 여러 가지 활동의 사실들을 객관적으로 규명하는 것이 중요하지, 친일을 다시 논의하는 것은 불필요한 논쟁에 휩싸일 수 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저는 이장우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당시 사실에 대한 복원과 객관적인 연구가 더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김수태 : 대신 대답을 해 주셨으니까. 김수자 선생님의 논문에 ‘노기남 대주교의 친일’이라고 명쾌하게 규정하셨는데, 한 말씀을 하셔서 이장우 선생님을 곤란하게 해주시기 부탁드리겠습니다. (좌중 웃음)

 

 

김수자 : 저 개인적으로는 일제시기 노기남 대주교를 연구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친일과 관련했을 때 대단히 큰 이슈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장우 선생님이 맡아주셔서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고, 개인적으로 해방 이후를 전공하면서 그리고 이번에 노기남 대주교 관련한 자료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느냐면 일제시기에 분명히 고민을 하셨을 것 같아요. 그 고민들이 해방 이후에 어떤 활동들로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초반에 조금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것, 그리고 미군이 들어왔을 때 미군하고 아주 적극적으로 친교 관계를 맺고 그리고 정치에 깊숙하게 관여하려고 하는 것들도 일제시기에 본인이 고민에 빠져서 했던 행동들과 연관이 되는 것 같아요.

 

 

김수태 : 하지만 논문에는 노기남 주교의 친일이라고 규정을 하셨잖아요. 왜 그렇게 쓰셨는지 한 번만 설명을 해주시면… 없으시다면, 이장우 선생님께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이장우 : 죄송합니다. 친일 문제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개념 자체가 분명하지 않은 용어이기 때문에 토론에서 이렇게 자꾸 주고받는 것 자체가 모호성을 확대 재생산하는 결과를 초래할까 걱정스럽습니다.

 

 

김수태 : 이런 말은 사회자에 대한 경고입니다. 경고를 받았으니 이야기를 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자료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일제시대 천주교 신부들도 그런 기록을 남길 수 있는 형편이었겠느냐 하는데, 제가 《윤치호의 협력일기》라는 것을 봤는데, 윤치호는 어떻게 일기에 일본에 대한 비판도 썼는데 그것을 어떻게 안 뺏기고 보존할 수 있었을까 싶은 생각을 개인적으로 하거든요. 노기남 대주교의 일기는 행방도 논란이 되는데 그런 사항, 원리만 가지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고,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윤치호의 행적을 보더라도 할 것 다 하고 할 말 다 했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노기남 대주교님에 대해서도 할 것 다 하지 않았느냐 하거든요.

 

박태균 선생님의 입장에 따라 친일이고 아니고를 넘어서 노기남 대주교가 일본을 어떻게 봤는가, 제국으로 봤는가는 우리가 알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장면과 긴밀한 관계였기 때문에 장면의 일본관은 어땠는가 알아야 하기 때문에 드린 질문이었고요. 어쨌든 이정도로 그치고 세 번째 발표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세 번째 발표의 토론은 국민대학교 일본학연구소에 계시는 이현진 선생님께서 해주시겠습니다.

 

 

이현진 : 토론자 이현진이라고 합니다. 저는 일단 여기 전공은 아니고요, 원래 전공은 1950년대 대한경제원조를 바탕으로 한 한국경제사 전공입니다. 김수자 선생님과는 잘 알고, 후배이기도 하고 이런 새로운 주제에 대해서 연구하신다고 하셔서 공부하는 자세로 토론을 준비했습니다. 여기 나와 계신 다른 선생님들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지만, 제가 논문을 보면서 궁금했던 것들을 중심으로 토론하고자 합니다. 일단 김수자 선생님께서는 발표하실 때에 말씀하셨듯이 반공주의에 대해 연구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노기남 대주교의 반공도 같은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주목해 보시고 자료를 보시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노기남 대주교의 반공활동에 대한 분석, 그의 반공주의의 성격과 한국 현대사 속에서 그것이 갖는 의미를 검토해 보고자 한 것인데, 아까 발표 서두에서 말씀하셨듯이 노기남 대주교의 종교적인 측면이 아닌 사회적인 측면에서 평가해 보시겠다고 했지만, 노기남 대주교의 반공주의를 논할 때 그가 종교인이라는 사실, 천주교 내에서의 노기남 대주교의 역할이라는 측면을 간과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이에 대해 노 주교의 활동 평가에 대한 관점의 문제와 더불어 궁금한 점 몇 가지를 질문하고자 합니다.

 

첫째, 노기남 대주교의 반공주의와 그 활동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입니다. 본 논문에서는 노기남의 현실참여론과 반공주의에 입각한 종교 활동은 냉전체제가 강화되고 있는 세계 정세 속에서도 이념을 극복하여 통일국가를 건설해야 하는 한민족의 시대적 과제 해결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으며, 한국사에서 천주교가 이념 전파자의 첨병 역할을 담당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평가는 1970년대 한국 천주교회가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 역할한 측면을 고려한다면 좀 과도한 평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노기남 주교의 반공주의가 천주교회사에서는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점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교황 비오 12세는 1946년 공산주의자들과 협력하는 것을 단호히 반대했으며. 1947년 8월 트루먼 대통령과 인류의 신앙을 재건하고 영원한 세계 평화를 수립하는 데 협력하자는 서한을 교환하였고, 1949년 7월 공산주의자들의 유물론적이고 반그리스도교적인 사상을 공언하는 신자들은 파문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천주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 지도자들은 신자들의반공적 행동을 촉구하였고, 노기남 대주교의 반공주의도 이러한 점에 기인하는 측면이 있다고 보입니다. 또한 노기남 주교의 미국과의 우호관계나, 정치 참여에 대한 주장 등도 당시 자유민주주의와 그리스도교의 친화성을 강조하며 자유진영의 맹주인 미국과 교황청의 동맹 관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입장에서의 가톨릭 운동과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이러한 세계적인 흐름 속에서 교회 지도자들의 반공투쟁은 그리스도교의 사명처럼 인식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인의 반공사상은 신앙적인 차원에서 보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노기남 주교의 반공주의의 성격과 특징은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가톨릭 운동이 천주교회의 입장과 타 종교와의 관계 속에서 어떠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노기남 대주교가 그 가운데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하는 점에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개신교의 경우 월남 기독교인들의 반공투쟁은 북한 사회 내에서의 체험을 통해 현실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으며, 한국 전쟁을 계기로 교권세력의 지위에 올라섰고 또 그들의 반공주의가 일련의 교파 분열 과정에서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모두에게 공유되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권위와 폭력에 대한 저항을 외치며 반독재투쟁을 전개하면서 반공주의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또 다른 흐름의 개신교의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 따라 필자에게 궁금한 점은 이러한 개신교의 경우와 비교했을 때, 천주교 내에서는 반공주의 표출방식이나 가톨릭 운동의 과정에서 다른 흐름은 없었는지 하는 점이며, 있었다면 무엇이고, 이것은 어떻게 귀결되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노기남 주교의 역할은 어떠했는지 설명해 주었으면 합니다. 또한 천주교회의 가르침과 노기남 주교의 반공주의와의 연관성과 차이점은 무엇인지도 함께 설명해 주었으면 합니다. 이는 세계 보편적인 흐름과 한국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천주교의 역할과 반공활동의 의미를 조명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둘째, 시기 구분의 문제입니다. 노기남 대주교의 반공주의와 관련한 활동을 1953년까지 한정해서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점을 질문하고 싶습니다. 이는 이후 반공주의의 성격이 이 시기와 구분된다는 전제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후 시기는 반공주의와는 다른 스펙트럼 속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기구분을 한 것인지, 필자가 1953년까지 노기남 주교의 활동을 분석한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또한 한국 전쟁 이후 기독교인의 반공운동은 휴전반대운동, 이승만의 북진통일 지지 등 다양한 형태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전쟁까지 불사해야 한다는 강한 반공주의를 표방한 노기남 주교의 경우는 이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 설명해 주었으면 합니다.

 

셋째, 미국의 원조와 천주교회에 대해서입니다. 미국의 천주교회 연합기관에서 한국에 보내온 구호물자가 원조 총액의 7할을 차지할 정도로 높은 비중이었고 이는 천주교의 위상을 높이고 친미적 태도를 갖는 데 일조했다고 평가하고 있는데, 이러한 미국의 경제적인 지원과 구호활동이 천주교의 교세확장이나 발전에 어떠한 전환점이 되는 것이었는지 궁금합니다.

 

 

김수자 : 지적 감사합니다. 첫 번째 말씀하신 것은 제가 많이 해결해야 하는 부분인 것 같아요. 제 세계사적 신념에서 가톨릭이 가지고 있는 반공주의, 그리고 한국사적 측면, 그 특수한 상황에서 가톨릭이 갖고 있는 반공주의는 어떻게 같이 연관시키고 어떤 부분에 있어서 독립적으로 해석해야 하는가는 끊임없이 제가 가져야 하는 문제인 것 같아요. 이게 왜 중요한가 하면, 가톨릭 같은 경우는 교황청하고 밀접하게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교황청의 교리라든가 회칙이 그대로 영향을 받는 단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앙집권적 성격이 강합니다. 교황이 어떤 회칙을 내리면 한국의 교구에 영향을 미치고, 또 교구 주교의 말은 신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에서는 교파가 분열되는 모습을 보여 주지만 가톨릭은 그렇지 않은 것이 바로 이런 천주교의 종교적 특성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에서의 반공주의를 이야기할 때도 교황청, 그리고 당시 교황 비오 12세가 갖고 있던 반공주의적 이념, 그리고 교황청에서 전쟁 후 전 세계적으로 느끼고 있던 반공에 대한 생각들, 공산주의가 특히 동유럽에서 가톨릭을 억압하고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 이런 상황들에서 반공을 강조한 것이 당연히 한국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기본이라는 생각으로 논문에 임했기 때문에 그것이 충분히 고려되고 제 논문에 반영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 하나 이현진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노기남 주교가 종교인이니까 살펴보아야 한다고 하시는데, 그것도 타당한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적인 측면의 연구들은 진행이 되었고, 그런 연구들은 제가 머리말에서 말한 것처럼 교회의 발전사 측면에 있어서는 높이 평가받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와서 노기남 대주교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인하여교세가 확장이 되고 사제 양성과 관련하여 학교들을 세우고, 신학대학을 세운 것이 노기남 대주교가 적극적으로 추진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를 체계화하고 학문적 측면으로까지 연결하기 때문에 종교사적으로는 기여한 바가 크다고, 박도원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한국 천주교회의 대부’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 시기에 와서 한국 가톨릭이 독립교구가 된 것도 특별한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일들 이외에 제가 반공주의와 관련지어 연구하다 보니까, 종교사적인 영향력이라든가 세계의 정세 변화 등이 영향을 미쳤음이 틀림없습니다.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는데, 반공주의를 한국 해방 직후 특수한 상황, 분단을 직면했을 때 종교의 지도자이고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으로서 그 분단의 상황을 조금 더 고착시키는, 강화시키는 활동을 한 것이 자료를 통해 나타났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저는 반공주의를 강화시켜서 종교를 그 시기 반공정권이었던 이승만 정권에 유착시키고 종교가 정치와 같이 가게 하는 측면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다시 한 번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특수한 상황을 더 고려하면서 서술한 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시기 구분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는데요, 시기 구분은 노기남 주교의 반공주의와 관련되어서 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시기가 한국 전쟁기, 휴전이 되는 시기까지라고 생각됩니다. 그 시기 이후의 노기남 주교의 반공활동이나 반공주의가 달랐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거의 비슷하게 연결이 되는데 그 이전에 이미 해방 직후 정부 수립 시, 그리고 전쟁 중에 확립된 생각이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1953년까지로 살펴보았고요. 이 시기와 관련하여 제가 서술함에 있어서 1952년에 정치파동을 이야기하고 이승만 정권과 장면의 균열이 노기남 주교에게 영향을 미쳐서 노기남 주교가 ‘야당주교’로 불리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것은 제가 반공주의와 관련하여서 야당적 반공주의라고 표현한 것은 아닙니다. 정치 참여, 현실참여적 측면에 있어서는 그 이전까지 친정부적이고 親이승만적이었는데 1952년 이후에 균열이 벌어지면서, 노기남 주교는 드러내놓고 反이승만적이거나 反행정부적인 활동을 하지는 않습니다. 대체로 그런 경향은 《경향신문》을 통해 표출이 되는데 그것을 유치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정치적으로 이미 이승만으로부터 배격을 받는 입장에 있어서 야당주교의 성격이고, 반공주의의 특징은 유지하는 것이지요. 제가 발표문에 야당적 반공주의라고 쓰거나 발표 중에 그렇게 표현한 것 같지 않은데요, 반공주의는 큰 변화를 갖지 않습니다.

 

세 번째로 미국 원조와 교회의 관계를 말씀하셨는데요. 이 원조가 교세 확장에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발표문에 언급한 것처럼 미국에서 들어오는 원조의 7할이 천주교와 관련된 단체에서 들어오는 것으로 보이는데, 성당 등에서 구호물자를 나눠주기도 하고, 상황이 열악했기 때문에 신자가 아니어도 원조를 받고 천주교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었고, 신자가 된 측면들이 있습니다. 어느 통계에 따르면 해방 직후에 남북 합쳐서 18만 명이었는데 휴전되고 원조 활동 이후에 22~26만 명까지 증가했다고 합니다. 노기남 주교의 노력과 원조가 천주교에 대한 긍정적인 인상에 미친 영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김수태 : 이현진 선생님께서 더 이야기할 것 있습니까?

 

 

이현진 : 한 가지만 여쭤보자면, 휴전반대운동이나 북진통일론 등에서 노기남 주교의 반공주의적인 입장을 볼 수 있는 것이 있나요? 그리고 당시 입장은 이전 시기의 반공주의와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것인가요?

 

 

김수자 : 예, 있습니다. 휴전반대운동에 있어서도 단체를 만들어서 휴전반대운동에 참여하게 하거나, 담화를 발표하는 내용이 있는데, 담화의 수준은 전쟁기 내용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수태 : 박태균 선생님 논문에는 남조선노동당 핵심인사 중 하나였던 양한모 등을 언급하셨는데요, 노기남 주교와 공산주의와 관련해서 생각하신 것이 있으시면 질문해 주시지요.

 

 

박태균 : 아니, 아니요. 그런 것은 아니고요. 아이러니라고 하지요. 제 각주에 보면 여운형 추모식에 참석하신 것으로 나옵니다. 강한 반공의식을 가지고 계셨으면서도 접촉하신 인사 중에 과거 공산당 관련자들이 있었고, 이런 부분들이 보이니까 하나의 생각을 가지고 한 사람을 보는 것은 힘들지 않나 합니다.

 

 

김수태 : 제가 김수자 선생님께 간단히 하나 질문하고 싶은데, 이승만하고 노기남 대주교를 비교하고 계신데 이승만의 반공주의와 노기남 주교의 반공주의의 차이점이라든지, 시간에 따른 변화 양상도 다뤄줘야 설득력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해방 정국에서 반공주의가 확산되는 양상에서 노기남 주교의 역할은 무엇이고 이승만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 부분에 대해서 한 말씀 간단하게 해주시지요.

 

 

김수자 : 두 분의 반공주의를 비교할 생각은 안 해봤습니다. 한 번 고민해 보겠습니다. 해방 직후 노기남 주교의 행동이나 이승만의 일민주의 분열은, 일민주의 표방은 1948년부터 나왔습니다. 그것을 더 체계화시켜서 단체도 만들고 확산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1949년의 행동이지만, 워낙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할 때부터도 반공주의를 표방한 대표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노기남 주교가 먼저 해방 후부터 반공을 표방했느냐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수태 : 반공주의라고 해서 너무 획일적으로 보는 것이 아닌가, 사람에 따라 다르고 시대 상황도 다른데, 다양하게 역사적으로 부각하면 좋은데, 결론에 나오듯이 강하게 메시지 전하듯이 정리해 버려서 두 사람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헷갈리는 것이거든요. 그런 의미로 말씀드렸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박태균 선생님 발표에 대해서 경희대학교에 계시는 허동현 선생님께서 질문해 주시겠습니다.

 

 

허동현: 박태균 선생님께서는 <잘못 끼운 첫 단추, 이승만 ? 아이젠하워 정부의 갈등>(《역사비평》 86, 2009), <서거 60주년에 다시 보는 백범 김구>(《역사비평》 87, 2009), <작전통제권 반환, 핵개발, 그리고 노무현>(《역사와 현실》 72, 2009), <박정희 정부 시기를 통해 본 발전국가 담론에 대한 비판적 시론>(《역사와 현실》 74, 2009), <남북관계의 탈근대적 인식 - 남북관계의 동학에 대한 새로운 제안>(《역사비평》 88, 2009), <한국현대사의 논쟁에 대한 재평가와 교과서 수록 방안>(《역사비평》 205, 2010), <한일협정 반대운동시기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정책>, 《한일회담과 국제사회 - 외교문서 공개와 한일회담의 재조명》 1(선인, 2010) 등 최근 2년간의 연구성과만 보더라도 한국 현대사의 주요문제에 대한 역사적 성찰을 게을리하지 않는 한국 현대사학계의 중진 학자이십니다. 박선생님께서 오늘 발표한 <한국 현대사 속의 노기남 대주교>는 ‘한국 천주교회의 대부’로 불릴 만큼 한국 천주교회의 기틀을 쌓은 노기남 대주교가 교회를 넘어 1950년 이후 한국 현대사의 전개에 미친 영향을 주로 신문자료에 의거해 밝혀 보려 한 시론적 성격의 글입니다.

 

박 선생님이 지적한 바와 같이 노기남 대주교의 그의 삶과 활동을 오롯이 복원하기에는 현재 발굴된 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조금이나마 논문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서 글을 읽으면서 떠오른 몇 가지 생각을 말하는 것으로써 토론자의 의무를 다하고자 합니다.

 

첫째, 대한민국 수립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노기남 대주교의 협력관계에 대해서는 제2차 대전 기간에 전개된 막후외교에서 중재자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국제 외교무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는 교황 비오(Pius) 12세로 대표되는 바티칸의 힘을 활용하려 한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적 복선이 작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냉전이 시작된 그 무렵 미국 · 바티칸 ·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주의에 있어 같은 입장이었기에, 당시 노기남 대주교의 활동이나 생각은 이 삼자와의 복합적 관련 속에서 조명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또한 박정희 정권과의 갈등을 부른 가족계획 문제 등에 관해서도 바티칸과의 관계 속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 가톨릭교회를 책임지고 있던 노 대주교의 활동과 생각은 바티칸의 입장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 전모를 제대로 밝히기 위해서는 바티칸 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는 관련 문서들을 발굴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둘째, 노기남 대주교와 이승만이 대립하게 된 이면에는 현실 정치에서 가톨릭 교단의 이해를 대변한 장면과 이승만의 길항관계가 작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1952년 미국이 반휴전 태도를 고수하는 이승만을 제거하려 한 ‘에버레디 작전’(Operation Everready)에서 그때 미국이 이승만을 대체할 지도자로 장면을 지목한 이후 노 대주교와 이승만이 불편한 관계가 되었으며, 1956년 장면이 고령의 이승만 유고시 정권을 승계할 부통령에 당선되면서 이승만과의 대립은 더욱 심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장면이 이끄는 민주당 신파의 정치 자금은 가톨릭 교단에서 나왔으며, 이를 매개한 이가 김철규 신부였던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된 분들의 증언 등 구술자료의 정리도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1960년 4월 이후 장면 총리의 막후 비서로 활동한 양한모의 회고록(《마르크스에서 그리스도로》, 일선출판사, 1992) 등도 활용하면 좋을 듯합니다. 1968년 장면의 권유로 천주교에 귀의한 그의 회고록은 《경향신문》 매각 과정에서 장면과 노 대주교의 입장 등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셋째, 5·16 군사쿠데타 이후 노 대주교가 박정희를 지지하는 입장을 취한 것은 아마도 그가 일제하에서부터 견지한 반공주의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고, 당시 그만이 아니라 장준하와 같은 지식인들도 군사정부에 지지를 표했던 것과도 연관해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상 박태균 선생님의 발표문을 읽으며 머리속에 떠오른 나름의 생각을 말씀드리는 것으로 논평을 마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박태균 : 교황 비오 12세 부분은 제가 맡은 시기와 좀 차이가 있어서 일단 본고에서 논의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김수자 선생님 부분에서 다루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좀 더 다루어보고 싶었던 것은 《경향신문》이 군사정부로 넘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관련 자료들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기존에 제기된 것 이상으로 밝히지는 못했습니다. 앞으로도 좀 더 깊이 있게 다루어보고 싶습니다. 문제는 자료인데, 자료 수집을 좀 더 체계적으로 광범위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수태 : 이장우 선생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있으시면 내용에 대해서 한 말씀 하시지요.

 

 

이장우 : 아무래도 제가 발표한 주제가 외부에서 보기에는 민감한, 저는 그저 연구 주제의 하나일 뿐이라고 확신을 하고 실제로 연구를 수행했지만, 외부에서는 민감하게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민족이라는 것과 교회를 대칭선상에 놓고 이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민족과 교회는 비대칭적인 관계이지요. 차원이 다르지요. 비교의 대상이 아닙니다. 민족과 교회가 합쳐질 수도 있고 달라질 수도 있지만 결국 대칭 관계는 아닙니다. 허동현 선생님께서는 지나가시는 말씀으로, 민족은 보편성을 이야기하고 교회의 입장에서는 특수성이라고 하는데, 아까 제가 말씀드렸지만, 천주교회와 교인의 입장에서 본다는 것은 그 당시 식민지 조선인의 한 부분집합인 천주교인과 천주교회가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보고자 했던 것이지요. 그것을 개신교 입장에서 볼 수도 있고, 아니면 적색 농민조합의 입장에서 볼 수도 있고, 혹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친일 부역자 집단이라고 불릴 수 있는, 아주 능동적이고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이른바 친일행위에 나섰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것은 특수와 보편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민족의 정의는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입니다. 그렇지만 19세기 프랑스의 유명한 종교사가였던 르낭(J.E. Renan, 1823~1892)은 민족이란 “매일매일 하는 국민적 결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같은 단일 공동체, 한 핏줄, 한 언어를 쓰고 같은 문화를 가진, 우리는 민족이라는 결의를 통해서 민족의식이 형성되고 강화되는 것이지, 그런 기준에서 보자면 과연 식민지시대 말기에 식민지 조선인들의 민족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는 현재 없습니다.

 

막연하게 정치 구호로서, 조금 거슬러 올라간 예이지만, 황사영은 민족주의 관점에서 보자면 외세의존적인 민족반역자지요. 또 유교를 신봉하는 조선사회 주류 지배층 입장에서 보자면 불충불효한 만고의 역적이지요. 그 관점에서 본 해석이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맞지요. 그러나 또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19세기 말 영국의 자유주의 언론인 스콧(C.P. Scott, 1846~1932)이 “사실은 신성하며 의견은 제멋대로다”라고 했지만, 주장하는 사람이 자기 관점에서 본 것은 진실의 지극히 한 부분이라는 한계를 인정한다면, 이런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논쟁은 절대 일어날 수가 없죠. 불확실한 것은 모른다고 해야 확실한 것인데, 확신을 가지고 자꾸 떠드니까 모호성이 확대 재생산되어 나중에는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지엽말단적인 것인지 자체도 헛갈리게 됩니다. 물론 제 전달 능력이 부족해서이지만, 제 발표도 그런 오해의 소지가 있다면 나중에 글을 쓸 때 더 분명하게 하겠습니다.

 

 

김수태 : 아무도 우려하지 않는 일을 걱정하고 계시는군요. (좌중 웃음) 두 가지만 여쭤볼까 싶은데요. 노기남 대주교와 장면이 끝까지 우호적이었는지, 그리고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천주교 신자로서 장면에 비견될 정도의 인물로 이효상이 등장하지 않습니까? 이효상과 노기남 대주교는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는지 대답을 들은 후에 노길명 교수님 말씀을 듣겠습니다.

 

 

박태균 : 둘 다 제가 대답하기 곤란한 부분입니다. 현재로서는 좀 더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노기남 대주교에 대한 부분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한국 천주교회와 한국 정부의 관계에 대한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민주당 시기에도 장면 총리와 노기남 주교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 번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당시 장면과 가장 가까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분은 김철규 신부였기 때문입니다.

 

 

김수태 : 예. 알겠습니다. 그럼, 노길명 교수님, 말씀해 주십시오.

 

 

노길명 :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발표자와 토론자들을 듣고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이 심포지움이 발표자와 토론자들만의 토론으로 끝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청중 중에서 제가 나왔습니다. 간단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김수자 선생님 논문 제일 마지막에 보면, 그 당시에 노 주교님께서 공산주의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당시 분단을 극복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 해결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고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특히 다른 분들도 논문에서 그런 식으로 결론을 내린 분들이 종종 눈에 띄고요. 아까 이야기가 나왔습니다만, 천주교는 세계적인 교계 체계를 갖고 있는 종교입니다. 당시 교황인 비오 12세는 ‘반공 교황’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철저하게 반공을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헝가리에서는 추기경이 공산정권에 의해 탄압을 받았고, 우리나라에서는 북한 교회가 월남하는 상황이었고, 많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이 투옥되고 행방불명되고 순교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6·25전쟁기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톨릭교회가 반공주의를 채택한 것은 그 자체가 필수였지결코 선택은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다음에 박태균 선생님께서 잘 마무리를 하셨기 때문에 말씀을 드릴까 말까 많이 망설였습니다. 그런데 노 주교님이 전두환 정권에 대하여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고 하시면서 《경향신문》 기사를 인용하셨는데, 사실 그 당시 시대 상황도 고려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는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던 제5 공화국이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 갖은 수단을 동원하던 시기였고 언론에 대해서 강력한 보도 통제를 하던 시기였습니다. 이 기사가 보도되고 났을 때, 제가 노기남 주교님을 찾아갔었습니다. 가서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주교님과 식사까지 같이 하면서 진솔하게, 겸손하게, 그런데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어떻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지금 추기경께서 교회를 이끌어 나가고 계시고 추기경께서 인권운동, 정의구현운동으로 어렵게 정권하고 투쟁을 하고 계시는데, 이렇게 말씀하시면 추기경께서 어떻게 일을 하시라는 말씀입니까”라고 말입니다. 주교님 말씀이 “난 그렇게 얘기한 적 없다. 기자가 찾아와서 오랜 시간 동안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길래, ‘어떤 이야기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정도로만 말을 했었는데, 그 사람이 나중에 그런 식으로 보도를 했더구나”라고 하셨습니다. 신문이나 그 밖의 보도 매체를 통해 기록된 내용들을 역사적 사실처럼 받아들여 그것을 바탕으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보도 내용에는 그것을 작성한 사람의 또 다른 의도가 깔려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도 말씀하시는 분이 없어서 발표자와 토론자만의 토론장으로 끝나지 않도록 제가 나왔습니다.

 

 

김수태 : 종합토론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사회 잘 못 보는 사람이라서, 발표자나 토론자에게 잘못한 점이 있으면 이해해 주시기 바라고요. 여러분이 아까 말씀하셨지만, 오늘 이 발표가 노기남 대주교님에 대한 앞으로 본격적 연구의 시작이 되고 무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요. 그러려면 이장우 선생님이 말씀하셨지만 인물을 보는 관점에서 자유로워져야 될 것이고, 노용필 선생님도 말씀하셨다시피 한 인물만 보는 것이 아니고 접점에 있는 인물들에도 관심을 가져야지 개인 연구가 되지 않을 것이고, 박태균 선생님, 양인성 선생님, 한윤식 신부님도 말씀하셨지만 자료 문제가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이 자료 문제에 대하여 한국교회사연구소 측이라든지 관련 연구자들이 보다 깊은 관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장시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교회사 연구 제35집, 2010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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