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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일제시기 한국교회의 소년단체 설립과 소년운동: 1920~1930년대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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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8-18 ㅣ No.1264

일제시기 한국교회의 소년단체 설립과 소년운동 - 1920~1930년대를 중심으로

 

 

1. 머리말

 

1784년 한국 천주교회 창설 이후 신자들은 교회 확산에 상당 기간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특히 周文謨(야고보) 신부가 조직한 신자 단체인 明道會는 많은 사람의 호응을 받아 커다란 성과를 내었다. 그런데 1831년 9월 조선교구가 설정되어 점차 조선에 성직자들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신자들의 역할은 점차로 줄어들었다. 교회의 성격상 신자보다 성직자의 위치와 영향력이 막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은 구한말을 거쳐 일제시기로 들어서면서까지 지속되었다.

 

그런데 일제시기에 들어오면서 주목되는 것은 이전과는 다르게 본당 내에 각종 신자 단체들이 조직되어 활동하기 시작하는 점이다.1) 이들 단체들은 점차 전국의 본당으로 확산되어 결국에는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교구별로 단체들의 연합회가 조직되는 데까지 나아갔다.2)

 

이러한 일제시기에 활동한 신자 단체에 대한 연구는 청년운동이란 측면3)과 여성운동 및 여성 신자 활동이란 측면4)에서 접근한 연구들이 있으며, 1922년 6월에 조직된 ‘경성교구 천주교청년회연합회’에 대한 연구5)가 있다. 그리고 서울 지역에서 활동을 전개한 남녀청년회와 학우회에 대한 연구6)가 있다. 즉, 기존의 연구들은 연령별로 볼 때 주로 청년이나 학생들이 회원인 신자 단체에 대해 서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일제시기 한국교회의 신자 단체 가운데 주목되는 점은 소년소녀들을 대상으로 한 단체가 설립되어 활동하고 있는 모습과 이것이 후에 소년운동으로까지 발전하는 모습이다. 현재 일제시기에 활동한 소년단체에 대한 논의는 매우 부족하다. 다만 최기영이 1930년대 《가톨릭소년》의 발간과 운영을 살펴보는 가운데 연길교구의 소년운동에 대한 논의를 했을 뿐이다.7)

 

이에 이 글에서는 일제시기 한국교회의 소년단체에 대한 논의를 진전시키기 위해 이 시기 소년단체와 소년운동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후술하겠지만 한국 교회 내에서 소년에 대한 관심은 1920년대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1920년대를 시작으로 소년운동으로 발전하는 1930년대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글의 전개는 먼저 1920년대 한국교회의 소년에 대한 관심과 함께 본당에 소년단체들이 설립되는 모습 및 활동을 정리하고자 하며, 다음으로 1930년대 가톨릭운동을 전개하는 교회가 이에 발맞추어 소년단체들을 기반으로 소년운동을 전개하는 모습을 살펴볼 것이다. 이로써 일제시기 한국교회가 소년단체를 설립하고 소년운동을 전개하는 의미를 조금이나마 파악해 보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일차적 목적이다.

 

 

2. 1920년대 교회 내 소년단체 설립과 활동

 

조선에서 ‘소년’은 대한제국 성립 이후, 특히 1900년대 중반부터 근대문명과 국가와 민족의 ‘독립’이 요구되던 계몽운동기에 급부상한 말이다. 한편 ‘어린이’라는 말은 어린이날 기념행사가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소년소녀잡지 《어린이》가 발행되면서 1920년대 중반부터는 ‘소년’과 함께 일반화되었다.8) 즉, ‘소년’은 1900년대 중반 계몽운동기에 부상하기 시작하여 1920년대 중반부터는 ‘어린이’라는 말과 함께 두루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한국교회 내에서 소년에 대한 관심이 시작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먼저 일제시기에 들어와 신자 단체들이 전국 본당에 설립되는 것은 교회에서 추진한 교육사업과 관련이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1900년대 초부터 문맹 퇴치가 시급함을 인식하여 학교 설립을 활발하게 추진함에 따라 현대적인 학문을 배운 청년들이 양성되는 동시에 이들이 선교에도 일익을 담당하였다. 이어서 청년 신자들의 증가와 함께 본당에는 청년들의 모임이 생겨나게 되었다.9) 즉 계몽운동기 교회 내에서는 소년에 대한 관심보다는 실질적으로 활동을 펼칠 수 있었던 청년들의 움직임이 먼저 나타났다.

 

이러한 청년들의 움직임은 일제시기에 들어오면서 청년단체들의 조직과 활동으로 나타난다. 즉, 1910년 4월 대구 본당(현 계산동 본당)에서 주임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의 지도로 명도회가 조직되었으며, 이어 1912년에는 대구 본당의 20세 내외의 청년 신자 30여 명으로 해성체육단이 조직되었는데, 이 단체는 일제시기 교회 내 청년들로만 조직된 첫 단체이다.10) 그리고 서울에서는 서울과 서울로 유학 온 지방 학생을 위하여 설립했었던 학생 친목회11)의 활동이 침체되자 1913년 5월에 천주교우 친목회로 이름을 바꾸어 규칙과 임원을 새로 조직하였다. 단체 설립목적이 친목 도모와 매주일 성경 공부, 냉담자 회두와 외교인 귀화12)였던 천주교우 친목회는 교회 내에서 친목회를 모범으로 권면해야 한다13)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매우 반응이 좋았다. 그리고 천주교우 친목회는 본당행사 주최와 거행을 맡아 진행하였다.14) 한편 황해도 지방에서는 냉담자와 외교인을 권면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직된 권면회와 같은 신자 단체도 조직되었다.15)

 

이렇게 1910년대에는 본당 내에 신자 단체들이 조직되어 활동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지만, 이 시기 소년단체에 대한 언급은 교회 언론에서 찾을 수 없다. 교회 언론이 소년단체에 대해 서술하기 시작하는 시기는 1920년대 중반 무렵부터이다. 이는 당시 국내에서 소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던 상황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동아일보〉에는 과거 우리나라에서 소년들은 “압박에 짓눌려 말 한마디, 소리 한번 자유로이 못하던” 처지에 있었고, “모든 일은 어른들 위주로 하는 동시에, 가정에서도 자녀들은 절대의 구속을 받아 왔고”, 나아가 “어른은 아이를 압박하지 아니하면 어른의 도리가 아니라”고 기술하였다.16) 그런데 점차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장래의 주인이 될 어린이를 위해 소년회와 같은 소년단체가 조직되었고, 소년 문제를 세상에 알리고 성심으로 연구하여 보자는 논의가 확산되기 시작하였다.17) 특히 3 ‧ 1 운동 직후 국내 곳곳에서 청년단체가 조직되는 가운데, 일부 지역에서는 소년단체도 조직되었다. 소년단체는 1920년대 중반에 급속히 증가하여 1924년 5월에는 123개, 1925년에는 220개로 증가하였다.18)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교회 내에서도 소년단체가 설립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먼저 1924년 2월 11일에 안성 본당은 천주교 소년회(이하 안성 천주교 소년회)를 창립하였다. 안성 천주교 소년회의 취지서는 아래와 같다.

 

안성 천주교회 소관 교우 총수는 불과 2,000에 소년이 3분의 1은 되나이다. 우리 교회를 진취케 하고 교중 사업을 발전함에 대하여 우리 소년은 연로하신 장상 제공을 차차 계승하여 교회 사무를 전습 대리할 자올시다. 제공의 자질들을 어떻게 양성하시려 하나잇가? 문견도 없이 그저 버려두실 리는 만무하오니 어디까지든지 교인된 의무를 실행케하여 날마다 미사 참례에 보내어 주시고, 공부 시간에도 항상 일찍 등교케 하여 주시고, 문답 시간과 무슨 회에든지 흠석치 말게 하여 주소서. 현 시대 무슨 회이니 무슨 회이니 하는 것이 많으나, 단합이 되지 못하여 중도에 폐지되는 것이 다수합니다. 본 회는 약한 소년들이오니 여러 인사 제씨의 후원을 얻어야 장래에 완전한 인격을 현출할 줄로 희망하나이다. 교중 제위시여, 지식없는 우리를 도우시고 후원하시는 동시에 아무조록 전력하시와 애고하여 주시기를 절망하오며 귀하의 자질을 도입회케 하시기를 천만복축하나이다.

천주강생 1924년 1월 26일 안성 천주교 소년회19)

 

위의 취지서를 통해 교회 내에서도 소년이 장차 교회사업 발전과 사무를 담당할 대상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고, 이것이 바로 소년회의 주요 취지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시 대부분의 단체들이 중도에 폐지되는 현실 속에서 새롭게 창립한 소년회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기를 요구하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안성 천주교 소년회의 조직 및 구성에 대해서는 자료 부족으로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음악부가 있어 소년회원들에게 악기교육을 실시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안성 천주교 소년회는 아직 나이가 어린 회원들이 그릇된 방향으로 나가지 않고 악기를 취미로 하여 교회 내에서 활동하도록 하기 위해 악기교육을 실시한 것이었다. 아무튼 이러한 취지가 통해서인지 소년회원의 부모들이 이를 위해 서양으로 악기를 주문하기도 하는 모습20)을 볼 수 있으며, 그 밖에 신자들이 악기를 기증하는 모습21)도 볼 수 있다.

 

1924년에 창립된 안성 천주교 소년회를 시작으로 교회 내 소년단체들의 활동이 계속해서 교회 언론에 나타나고 있는데, 1927년에는 괴산본당 소년회22)와 약현 본당 소년회23)가, 1928년에는 경남 진주 문산 소년단24)과 안동 본당 소년소년회25)가, 1929년에는 영천 본당 소년성체조배단26)과 간도 팔도구 가톨릭소년동맹27)이 각각 창립되었다.

 

이 가운데 1927년 8월 16일에 창립한 괴산 본당 소년회(이하 괴산 소년회)는 이듬해 1월 30일부터 소식보를 발행하기 시작하였으며,28) 6월에 본당 관할 공소 소년들과 일치 단결을 위해 각 공소에 소년회 지회를 설치하기로 결의하였다.29) 이에 8월 14일에는 18개 공소 소년회 대표자회의를 열었으며, 매년 1회 도리강습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30) 그리고 다음 날인 15일에는 40여 명의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2차 정기총회를 열었다.31) 관할 공소에 지회까지 설치하여 활동한 괴산 소년회 지회 가운데 영구리 공소 지회의 경우 활동의 결과 공소가 날로 융성해지고 외교인들의 입교가 눈에 띠게 늘어나 1929년 봄에는 12명이 세례를 받았고, 10명이 예비 신자라고 하면서 전 조선 소년회의 모범이라고 평가32)될 만큼 많은 성과를 내었다. 이러한 성과를 내기 위해 소년회원들은 매일 저녁마다 강당에 모여 외교인 귀화하기를 구하는 기도를 바쳤고, 교리 토론 ‧ 성서 학습을 실시하였다. 다른 소년회의 경우 그 조직과 구성 등을 알 수 없으나, 다행히 괴산 소년회의 경우 대표회의에서 다룬 결의사항과 규약을 알 수 있다. 괴산 소년회는 1929년 8월 14일에 제2회 대표회의를 개최하였는데, 당시 결의된 사항과 규약33)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결의사항

一. 교양에 관한 건

一. 전교 방침에 관한 건

一. 재정에 관한 건

一. 유지계지지(維持契支持)의 건

一. 제2회 교리강습회 개최 건

 

규약

一. 본 회의 명칭은 천주교 괴산 지방 소년대표회라 칭함.

二. 본 회의 목적은 천주교 괴산 지방 소년회를 총괄함.

三. 본 회의 위치는 본당에 置함.

四. 본 회는 각 공소 소년회에서 피선된 대표로 조직함.

五. 본 회는 서무재정부 ․ 전교부 ․ 교양부를 置하여 사무를 분장함.

六. 본 회는 임원 고문 一인, 회장 一인, 부장 三인, 부원 약간 인을 置함.

七. 본 회의 집회는 총회 연 一차, 임원회 연 二차와 예수 성탄 전일.

八. 본 회의 경비는 각 공소 소년회가 부담함.

九. 본 규약의 미비는 세칙에 보충함.

 

위의 결의사항과 규약을 통해 소년회의 일단을 살펴보면 비록 결의사항에 세부적인 내용이 나와 있지는 않지만, 모범이 될 만한 교양이나 행실에 대한 사항과 교회의 주요 목적이라 할 수 있는 전교 방침에 대한 사안, 그리고 괴산 소년회의 경우 주요 사업 가운데 하나였던 교리강습회에 대한 사안에 대해 결의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소년회를 유지하는 데 각 공소 소년회가 나누어 부담하였던 것도 알 수 있다. 결의 사항 가운데 하나였던 교리강습회의 경우 제1회 강습회가 1928년 12월 26일부터 3일 간 공소 대표 1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고, 제2회 강습회는 참석자가 100여 명으로 증가하여 1929년 12월 26일부터 3일간 열림으로써 ‘소년 운동 교육상 투사를 기르는 신진 모임’이라는 평을 얻었다.34) 그런데 후술하겠지만 한국교회 내 소년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시기는 1930년대에 가톨릭운동이 도입되면서부터로 보이는데, 괴산 소년회의 교리강습회는 이미 그 이전부터 교회 내 가톨릭 소년운동의 시초가 된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이 밖에 1928년에 창립한 경남 진주 문산 공교 소년단은 같은 해 8월 19일에 죽은 아이를 위해 상을 치러주는 책임을 맡는 활동을 하였으며,35) 같은 해 10월에 창립한 안동 본당 소년소년회는 가극회를 열었고,36) 1929년에 창립한 영천 본당 소년성체조배단은 단체명 그대로 매일 오후에 성당에 모여 성체조배를 하였다.37) 같은 해 창립한 북간도 팔도구 가톨릭소년동맹은 10월 13일 창립총회에서 자체교양에 관한 건, 지방 세포단체 조직에 관한 건, 사업진행에 관한 건, 경비문제에 관한 건, 회원모집에 관한 건, 회관문제에 관한 건 등을 토의하였다.38)

 

 

3. 1930년대 가톨릭 소년운동으로의 발전

 

1930년대 들어와서도 교회 내 소년단체의 설립은 계속되었다. 1930년에 대구 청년회 산하로 소년부39)가, 평양 관후리 본당에서 평양천주공교 소년회40)가, 함경남도 문천 공소에서 소년소년회41)가 창립되었다. 특히 대구 청년회 소년부는 창립 이후 전 조선 가톨릭 소년소녀작품전시회(총 3회), 성탄축하회, 도리강습회, 하기강좌, 백주년 축하성극 등을 개최하면서 이 시기 소년단체 가운데 가장 활동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42) 그 밖에 기존 단체인 문산 본당 소년회 역시 1930년 성탄 때 예수탄생극을 연출하여 5백 명이 관람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43)

 

이렇듯 1930년에서 1932년 초까지만 해도 대구 청년회 소년부의 전 조선 가톨릭 소년소녀작품전시회 개최 활동을 제외하면 1920년대 소년단체의 모습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활동을 보여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932년부터 한국교회는 새롭게 운동 방향을 정해서 소년단체들을 조직 ‧ 활동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당시 한국교회에서 큰 이슈가 되었던 것은 ‘가톨릭운동’44)을 한국교회에 적용시키는 문제였다. 한국교회는 한국에서의 가톨릭운동이 당면한 문제를 계몽운동이라고 보았고, 운동을 전개하기 전에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점으로 1) 운동선상에 서 있는 분자의 의식이 명백할 것, 2) 의식의 명백함이 대중적이어야 한다고 하였다.45) 이는 가톨릭운동을 전개하는 데 교회 내 신자와 신자 단체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함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당시 가톨릭운동을 전개하는데 중요한 위치를 담당해야 할 신자 단체는 청년회였지만, 실상은 몇몇 본당의 청년회들을 제외하고는 말 그대로 이름만 내건 단체로, 그 활동이 매우 미미하였다.46) 교회 입장에서는 가톨릭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어떤 계층보다도 활동적인 청년들이 움직여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계속해서 청년단체들의 활동을 모색하였다.47)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청년단체와 더불어 소년단체에 대한 관심 역시 교회 내에서 고조된 것으로 보인다.

 

그 시작은 일찍이 가톨릭운동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고 있던 모리스(Morris, 睦怡世) 몬시뇰48)이 1930년 4월 제2대 평양 교구장이 되면서 평양교구에서부터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1932년 모리스 몬시뇰과 관후리 본당 보좌인 梁基涉(베드로) 신부의 주선으로 평양 가톨릭 소년군이 창립되었는데,49) 이 소년군은 평양 관후리 본당에서 1930년에 조직한 평양 천주공교 소년회를 확대 발전시킨 것으로 보인다. 현재 보이스카우트라는 명칭으로 친숙한 소년군은 처음에 영국에서 베이든 파웰 육군중장에 의해 조직된 것으로, 그는 전쟁을 치르는 가운데 인격의 함양은 병사로서 병영에 들기 전 소년시대부터 훈련을 시작하여야 할 필요성을 깨닫고, 소년들에게 합당한 훈련법을 고안하였다. 이후 1901년에 남아경찰대를 조직하여 훈련한 것이 소년군운동의 시작이었다.50) 이러한 소년군운동은 불과 수년 만에 영국은 물론 세계 각지에 퍼져 일본은 1910년대에 이미 실시하고 있었으며, 조선에도 1920년대에 시작51)되어 있었으나, 아직 교회 내에서는 실시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를 유감으로 생각한 모리스 몬시뇰은 자신이 관심을 보이고 있던 가톨릭운동 차원에서 소년군운동을 추진하게 되었던 것이다.

 

《천주교회보》에 실린 가톨릭 소년군 창립에 대한 기사52)를 보면,

 

그러면 소년군(보이스카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고 물을 분이 있을 줄 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학업이라든지 사업의 여가를 이용하여 가장 유쾌한 방법으로 심신을 단련하며 사회봉사의 필요를 깨닫게 하며 위국자(爲國者)가 되며 장차 상당한 일시민(一市民)이 되게 하는 것이다. 훈련방법에 가서는 그 창시자가 군인이요, 군대에서 맨 처음 시련(試鍊)한 관계상 그 제도가 군대식을 모방한 점이 많다. 그러나 사실상으로는 그렇지 않다. 외관으로는 엄격한 군대식 같지마는 내면으로 들어가 보면 학교 교육 이상의 인정미와 자유가 있는 것이다. 학교 교육은 교원과 생도 사이에 사제의 관계이지마는 소년군 교육은 지도자와 아동과는 사제가 아니요, 형제요, 친우라는 정신으로 대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까지 훈련시킨 뒤에는 지도는 방관적 태도를 취하고 자치자영(自治自營)을 하게 하여 어릴 때부터 자기네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제각기 자기의 손으로 한다는 책임감을 넣어주는 것이다.

 

라고 한국교회 내 최초로 창립된 소년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가톨릭 소년군은 심신단련과 사회봉사를 통해 소년들을 나라에서 필요한 인재로 양성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으며, 비록 훈련 방법이 군대식이지만 실제로는 지도자와 소년 사이의 관계가 형제나 친구처럼 친근한 가운데 진행되고, 훈련을 통해 소년들에게 주체적인 책임감을 갖게 하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 한편 평양 천주교 소년단 창립식이 양기섭 신부의 창립사를 시작으로 군기게양식, 군가 합창 등으로 진행되었다는 데서도 소년단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기도 하다.53)

 

이어서 《천주교회보》는 소년군의 강령과 준율54)에 대해 아래와 같이 알려주고 있다.

 

소년군의 강령

一. 천주와 그 교회와 국가에 대하여 충성을 다하라.

二. 남을 도와주라.

三. 스카웃 준율을 엄수하라.

 

준율

一. 신용을 얻음에 자기 명예를 두라.

二. 국가와 부모와 장상과 부하에게 충실하라.

三. 남에게 봉사하고 남을 구원하고 특별히 불쌍한 이를 도와주라.

四. 모든 이에게 친우가 되고 세계소년군을 형제로 알아라.

五. 용감하고 의협하라.

六. 자연계 안에 천주의 사업을 보고 초목금수를 사랑하라.

七. 두말없이 복종하고 무엇이든지 반만 하지 마라.

八. 곤난 중에 웃고 노래하라.

九. 근검하여 남에게 이익을 도모하라.

十. 사, 언, 행에 정결하고 비밀을 지키라.

十一. 하루도 신공을 궐치 말고 주일에는 반드시 미사에 열심히 참례하라.

十二. 신체와 의복을 깨끗이 하라. 

 

이렇게 창립된 가톨릭 소년군은 가톨릭 청년운동 선상에서도 그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1933년 3월 1일자와 4월 1일자 《천주교회보》에서는 〈가톨릭 청년운동의 사회 진출은 어떻게 할까〉라는 주제로 기고문을 연재하였는데, 그 방법으로

 

다음은 제2세 청년인 소년지도이다. 특히 소년지도는 소년군운동으로 하고 싶다. 이 소년군운동은 곧 가톨릭을 사회에 소개하는 한 무기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가톨릭 청년운동의 사회진출의 척후가 되는 까닭이다.

 

각부 관할 하에 별개 단체(자립적 정신을 넣어주기 위함) 소년회를 조직하여 가톨릭 소년운동의 대장려

 

라고 말하고 있다. 즉, 평양교구의 소년군운동이 가톨릭을 사회에 소개하는 무기가 되어 당시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던 가톨릭 청년운동이 사회에 진출하는 데 선두에서 활약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또한 다른 방법으로 각부 관할 하에 소년회를 조직함으로써 가톨릭 소년운동을 크게 장려시킬 것도 말하고 있다.

 

한편 1934년 덕원 신학교 신학생이던 金成煥(빅토리오)은 가톨릭운동을 전개하는 대내적 방법으로 문맹퇴치운동, 강습소 설치, 인재양성 등과 함께 가톨릭 소년운동을 들고 있다.

 

가톨릭 소년운동

어린이는 한 민족과 한 사회의 장래를 약속하는 원동력이요, 한 민족 발전 계단상의 중요한 지위를 점하느니만치 소년운동의 필요에 중언을 불요한다. 특히 가톨릭 소년운동은 중대한 것이다. 그들의 전적 가톨릭적 교양은 영구한 가톨릭에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다.55)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민족과 사회 내에서 어린이(소년)가 차지하는 위상을 매우 부각시키고 있으며, 나아가 교회 발전 역시 이들을 어떻게 교육시키느냐에 따라 달려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 1920년대 소년단체 가운데 하나인 안성 천주교 소년회 창립 취지서에 소년에 대한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기는 하지만 이는 본당 내 소년단체에 대한 창립 취지서라는 면에서 교회 전체 의견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1930년대 들어서면서 가톨릭운동 선상에서 소년운동을 전개하는 데 있어 중요한 점은 바로 어린이(소년)에 대한 교회 전체적인 인식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이 시기 《경향잡지》에서도 확인된다. 1933년 11월 《경향잡지》는 사설에서 〈세상의 멸망을 부르는 소년 시대의 불품행〉이라는 제목으로 소년시기의 중요성을 서술하였다. 이를 부분 인용해 보면 아래와 같다.

 

소년들아, 만일 너희가 용기 있고 덕망이 있다면 온 인류사회는 과거의 모든 파손을 복구할 것이요, 날로 더욱 유물화하는 문명의 퇴굴을 방지하고 그 대신 천주님을 봉사하고 덕을 숭상하는 새로운 가정을 설립하여 장차 천국 신민을 증가시키게 될 것이다. …소년 청년아, 너희는 악으로 기울어지면 크게 악해질 것이나 선을 따르면 장차 큰 사업을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사회와 천주님께서는 너희를 목말라하신다. 너희에게는 자유가 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을 위하고 너희 가정을 위하고 너희 생명의 시초에 성세의 총은을 내리고 너희 영혼 구령의 진리와 도덕의 원리를 주입하여 주신 너희 목자를 위하고 자모이신 성교회를 위하여 소년다운 소년, 청년다운 청년이 되어라. 이것은 너희가 천주님께 대한 의무요, 전 인류에게 대한 의무요, 너희 자신에게 대한 의무이다.

 

이 사설에서는 당시 교회가 소년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그리고 소년다운 소년이 되는 것이 바로 천주와 인류와 자신에게 대한 의무임을 말하고 있다. 비록 내용상에 소년운동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내용은 없지만 이처럼 교회의 기관지인 《경향잡지》에서 소년에 대해 주목하고 있는 것은 당시 가톨릭운동 내에서 평양 가톨릭 소년군을 위시한 가톨릭 소년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가톨릭 소년군 창립을 시작으로 1930년대 가톨릭 소년운동의 시작을 알린 평양교구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소년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는 교구 기관지56)를 통해 계속적으로 소년운동의 관심과 기대를 표명했다는 점이다.

 

먼저 《가톨릭연구》 1934년 6월호에서는 〈어린이의 고소장〉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어린이가 어른들의 가정, 학교, 사회, 교회의 머지않은 주인공이며, 앞으로 조선에서도 다른 나라처럼 어린이들을 위한 기관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57) 뿐만 아니라 《가톨릭연구》는 매호마다 ‘지방운동상’이란 코너에서 평양교구 내 소년운동을 비롯한 가톨릭 운동의 실상을 간단하게나마 알려주고 있으며, 1935년 1월호부터는 ‘소년소녀란’이라는 코너를 마련하여 연재함으로써 소년소녀들에 대한 관심을 계속해서 보여 주고 있다. 이어 《가톨릭연구》 1935년 7월호와 8월호에서는 ‘가톨릭아동란’을 통해 소년운동의 필요와 금후방침 등을 연재하고 있다. 이 글에서 “어린이들은 우리들의 앞날의 주인들이요, 우리 사업(운동)의 후계자”라고 하면서 먼저 방정환의 수필을 인용, 아동예찬을 하였고, 평양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아동(소년)운동이 더 활기 있게 전개되기를 바라고 있다.58) 그리고 현재 각 지방별로 본당이나 공소에 소년회 등이 있으나 대부분 본당 성심회에서 지도를 함으로써 지방에 따라 운동의 성과가 차이가 난다고 하면서 중앙집권제의 단체 조직이 필요하다고 하였다.59)

 

그리고 평양교구는 소년운동의 이론적 토대 구축과 가톨릭운동의 연장선에서 소년들을 위한 서적을 발간하여 보급하기도 하였다. 1935년에 1월 10일부터 12일까지 열린 평양교구 가톨릭 운동 연맹의 제1회 중앙위원회에서 그해에 실시할 사항으로 순회 교리 강습과 묵상회, 교회 출판물 보급 운동, 문맹퇴치운동 등이 토의되었다. 평양교구는 교회 출판물 보급 운동의 대상을 성인만이 아닌 유년, 소년으로 확대시켜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5년 3월에 평양교구는 교회 출판물 보급 운동 차원에서, 그리고 그해가 가톨릭이 조선에 들어온 지 150주년이 되는 해임을 기념하여 유년과 소년을 대상으로 《가톨릭유년독본》과 《어린이의 미사》, 《어린이의 칠성사》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가톨릭유년독본》은 성호경, 삼종, 천주경, 성모경을 비롯하여 교리와 신구약 성경을 동화체로 풀어 장마다 그림으로 설명한 책이었으며, 《어린이의 미사》는 미사의 뜻과 참례하는 법을 역시 그림으로 설명하였고, 《어린이의 칠성사》는 칠성사에 대해 역시 동화체로 풀어 그림으로 설명해 놓은 책이었다. 평양교구는 이 책들의 편찬을 “우리는 오늘까지 너무나 어린이들을 엄수히 하였고 홀대하였다”고 하면서 “二世 가톨릭 국민은 우리의 귀한 소년 ․ 소녀”로 “희망과 영예를 가진 수십만의 우리 어린 가톨릭을 이제부터는 존중히 여기고 거룩하게 씩씩하게 기르”고자 “획기적 소년운동의 보감으로 우선 이 세 책으로 제공한다”60)고 설명하였다.

 

이렇듯 평양교구가 가톨릭운동의 연장선상에서 교구 내 소년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가운데 연길교구 역시 소년운동을 전개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연길교구의 소년운동의 중심은 1931년에 조직된 연길 탈시시오 연합소년회였다.

 

현재 용정 본당에 주임 신부 겸 전 연길 탈시시오연합소년회에 총재로 있는 배광피(아펠만) 신부는 1931년 정초에 소년들의 덕성 함양과 함께 그들을 장차 성직의 길로 인도하려는 목적으로 재래 용정에 있던 보미사회를 개조하여 탈시시오회를 조직하였다. 이 회는 의외에 또는 단시일에 장족의 세로 발전하여 감을 본 백(브레허) 주교 각하께서 가톨릭 소년운동을 규모적으로 할 목적으로 각 지방교회대 안 탈시시오회의 창립을 명령하였다.61)

 

위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연길 탈시시오 연합 소년회(이하 탈시시오회)는 아펠만(Appelmann, 裵光彼) 신부의 노력으로 창립되었다. 1930년 가을 용정 본당에 부임한 아펠만 신부는 1931년 정초에 보미사회를 개조하여 복사의 수호성인의 이름을 따 탈시시오회를 창립하였다.62) 그런데 연길 탈시시오회는 앞서 서술했던 평양 가톨릭 소년군과는 달리 창립 초기부터 가톨릭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소년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조직된 것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연길 탈시시오회를 조직하게 된 목적은 교구 내 소년들의 덕성을 함양시키고 그들을 성직자로 양성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연길 지방에 유포되고 있던 볼셰비즘(Bolshevism)에 대한 사상적 대항력을 키우고, 성체에 대한 존경심을 함양시키며, 그레고리오 성가를 장려하려는 의도도 지니고 있었다.63) 즉 가톨릭운동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점차 그 세력이 교구 전체로 확장되어 감64)에 따라 연길 교구장 브레허 주교는 탈시시오회를 통해 가톨릭 소년운동을 전개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연길교구의 탈시시오회는 평양교구의 가톨릭 소년군과는 그 목적과 활동에 있어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선 탈시시오회의 강령을 통해 그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탈시시오회의 강령65)

1. 성체의 수선순교자 탈시시오 성인을 주보로 봉재하고 그를 효법함.

2. 총재부, 지도부, 예전부, 덕 ‧ 지 ‧ 체육부, 도서부 등을 치함.

3. 회원들은 각 중요한 축일 모든 예절에 규율있게 전체로 참석하여 정한 경문과 예전신도경과 성가를 화창할 일.

4. 미사성제의 환의를 묵상하면서 위원들은 정신을 극도하여 미사에 참여하며 자주 영성체할 일.

5. 개인으로나 전체로나 자주 성체대 앞에 나가 조배함으로써 예수의 상하신 마음을 위로해 드릴 일.

6. 회에서 정한 날에 열심히 교리를 배워 교회지식을 넓힐 일.

7. 신체의 보건을 위하여 쾌활하게 운동하며 때를 따라 여행과 원족을 갈 일.

 

탈시시오회의 강령에 해당하는 평양 가톨릭 소년군의 준율에서는 총12항 가운데 직접적으로 교회 활동과 관련되는 항목은 11번째 항목뿐으로, 그 내용은 ‘하루도 신공을 궐치 말고 주일에는 반드시 미사에 열심히 참례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탈시시오회의 강령은 총7개 항목 중 2번, 7번 항목을 제외하고는 모두 미사나 교리 교육과 관련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차이는 각 교구를 담당하고 있는 전교회의 차이 혹은 교구장의 성향에 따른 차이로 보인다. 특히 독일 성 베네딕도 수도회가 관할하고 있던 연길교구의 경우 모국인 독일 가톨릭교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연길교구는 1931년 8월 3일부터 6일까지 4일간 제1회 연길 탈시시오 연합 소년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대회의 일차 목적은 미사성제의 본의를 깨닫고 그 의식에 참석하는 규식을 배우는 데’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대회 목적은 일찍이 1890년에서 1900년 사이에 독일 가톨릭교회에서 열띠게 논의되던 전례운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66) 이에 제1회 소년대회를 통해 탈시시오회원 일동은 ‘용감히 리투르기아(전례)운동에 제일보를 힘있게 내디딘 것’이라 평가받았으며, 1934년 8월 6일부터 10일까지 개최된 제2회 소년대회 역시 ‘결국은 제1회 대회의 연장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탈시시오회의 활동이 전례 부분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교리 학습에 열중하며 동화회, 토론회, 가극, 성극 등을 수시로 개최하였고 여행, 원족 같은 소년에게 가장 취미 있는 견학과 육상경기도 가끔 개최하기도 하였다.67)

 

뿐만 아니라 연길교구에서는 소녀들의 단체인 데레사소녀회가 교구 내 각 지방에 조직되었는데, 이 단체 역시 탈시시오회와 마찬가지로 전례 운동에 진력하는 데 주요 활동을 전개하였다. 연길교구에서 조직된 탈시시오회와 데레사소녀회는 ‘연길교구 전도와 장래가 낙관’된다는 평68)을 얻을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평양교구에서 출판물 보급 운동과 소년들을 위한 서적들을 편찬한 모습을 보인 것처럼 연길교구 역시 《가톨릭소년》이라는 잡지를 간행하여 보급함으로써 소년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가톨릭소년》의 전신은 탈시시오 소년회 연합회의 기관지인 《탈시시오회보》로, 1931년 말에 창간되었다. 이후 1934년 전 조선 주교회의에서 연길교구에서의 아동 잡지 간행이 결정되어 연길교구는 1936년 전후 교구 내 소년회 기관지였던 《탈시시오회보》를 ‘전 조선의 소년 소녀들을 위한 잡지’인 《가톨릭소년》으로 개편하였다. 가톨릭 전교와 일반 아동 잡지의 성격을 동시에 추구한 《가톨릭소년》은 1936년 10월에는 만여 명의 독자를 획득한 권위 있는 잡지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교회가 추진하던 소년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69)

 

 

4. 맺음말

 

이상으로 1920~1930년대 한국교회 내 소년단체와 소년운동에 대해 살펴보았다. 자료 관계상 1920년대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소년단체 가운데 주로 안성 천주교 소년회와 괴산 소년회를, 1930년대 교회 내에서 나타나기 시작하는 소년운동에 있어서는 주로 평양교구와 연길교구의 움직임만을 살펴보는 데 그쳤다.

 

조선에서 ‘소년’이란 말이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 중반 계몽운동기로, 이후 1920년 중반부터는 ‘어린이’라는 말과 함께 두루 사용되었다. 그리고 조선에서 소년단체는 3 ․ 1 운동 직후부터 증가하기 시작하여 1920년대 중반에는 220여 개가 조직될 정도로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한편 한국교회의 경우 1910년 4월 대구 본당의 명도회를 시작으로 1910년대에 본당 내 신자 단체들이 조직되지만 대부분 청년이나 학생 단체들이었으며, 소년단체에 대한 언급은 교회 언론에 있어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후 1920년대 중반 점차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장래의 주인이 될 어린이를 위한 소년단체가 교회 밖에서 급속히 증가하였고, 소년 문제를 세상에 알리고 성심으로 연구하여 보자는 논의가 확산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교회 내에서도 소년단체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교회 언론에서 찾아볼 수 있는 교회 내 최초의 소년단체는 1924년 2월 11일에 창립한 안성 본당의 안성 천주교 소년회였다. 안성 천주교 소년회는 소년들이 앞으로 교회 사업 발전과 사무를 담당할 대상이라는 인식 하에 조직되었다. 소년회의 일단은 1927년 8월 16일에 창립된 괴산 본당 소년회를 통해 조금이나마 파악된다. 괴산 소년회는 본당 관할 공소에 지회를 둘 정도로 크게 성장하였으며, 소년회 결의사항과 규약을 통해 모범이 될 만한 교양이나 행실에 대한 사항과 교회의 주요 목적이라 할 수 있는 전교 방침에 대한 사안, 교리강습회에 대한 사안 등을 주요 사업으로 추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교리강습회는 ‘소년운동 교육상 투사를 기르는 신진 모임’이라는 평을 얻을 정도로 큰 성과를 내게 되는데, 이는 1930년대 한국교회 내에서 가톨릭운동을 도입하면서 본격적으로 소년운동을 전개하기 이전에 이미 가톨릭 소년운동의 시초가 되는 활동이었던 것으로 말할 수 있다.

 

한편 한국교회는 1932년부터 가톨릭운동을 교회에 적용시키고 전개하는 과정에서 어떤 계층보다도 활동적인 청년들이 움직여야 할 필요성을 가지고 계속해서 청년단체들의 활동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년단체에 대한 관심 역시 고조되었다. 그리고 당시 교회 언론에서는 민족과 사회 내에서 어린이(소년)가 차지하는 위상을 매우 부각시키고 있다. 나아가 교회 발전 역시 이들을 어떻게 교육시키느냐에 따라 달려 있는 것으로 보았고, 소년 시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즉, 이전 시기와는 다르게 교회 전체 차원에서 ‘소년’(아동, 어린이)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하였고, 이는 소년운동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 교회 내 소년운동의 시작은 평양교구에서부터 나타났다. 1932년 평소 가톨릭운동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던 모리스 몬시뇰에 의해 평양 가톨릭 소년군이 창립되었다. 소년군은 ‘가톨릭을 사회에 소개하는 한 무기’로서 가톨릭운동의 선두에서 활동하기를 바라는 기대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평양교구는 《가톨릭연구》에서 매호마다 평양교구 내 소년운동에 대한 실상을 알려주었고, 소년소녀들을 위한 코너를 따로 마련해 연재하였으며, 소년운동에 관한 기사를 연재함으로써 소년운동에 대한 깊은 관심과 기대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평양교구는 교회 출판물 보급 운동의 대상을 성인만이 아닌 유년, 소년으로 확대시켜 《가톨릭유년독본》과 《어린이의 미사》, 《어린이의 칠성사》라는 책을 출판하여 보급함으로써 소년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 노력하였다.

 

한편 연길교구 역시 1931년 조직된 연길 탈시시오회를 중심으로 소년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창립 당시는 가톨릭운동 차원에서 활동하기 위한 단체는 아니었으나, 점차 소년회가 연길교구 전체로 확장되어 감에 따라 탈시시오회를 통해 가톨릭 소년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탈시시오회는 전교회의 영향으로 독일 가톨릭교회에서 논의되어 온 전례운동을 중심으로 소년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러한 점은 평양 가톨릭 소년군이 소년운동과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연길교구는 평양교구에서 출판물 보급 운동과 소년들을 위한 서적들을 편찬한 모습을 보인 것처럼 《가톨릭소년》이라는 잡지를 간행하여 보급함으로써 소년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처럼 1930년대 한국교회의 소년운동은 가톨릭운동 차원에서 평양교구와 연길교구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1937년 4월 평양 가톨릭 소년군을 소개하는 《가톨릭연구》의 기사를 마지막으로 교회 언론에서 소년운동이나 소년단체에 대한 기사를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보아 이후 소년단체의 활동은 미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교회 내 소년단체는 교회 밖의 소년단체들과는 달리 일제에 대항하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으나,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제가 국내의 모든 단체들의 활동을 금지함70)에 따라 교회 내 소년단체들 역시 활동을 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더구나 소년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던 《가톨릭소년》과 《가톨릭조선》(《가톨릭연구》가 1937년 1월호부터 제호 변경)이 각각 1938년 8월호와 12월호를 끝으로 폐간됨에 따라 일제시기 한국 교회의 소년운동은 더욱 미약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0년대 중반 소년단체 설립을 시작으로 1930년대 초반부터 중일전쟁 이전까지 약 5년 동안 전개된 가톨릭 소년운동은 비록 그 운동 기간은 짧았지만 교회 내에서 처음으로 소년에 대한 관심을 보였으며, 나아가 가톨릭운동 선상에서 소년운동을 전개하고자 다방면으로 노력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

 

1) 일제시기 이전 한국교회에는 명도회를 비롯하여 신심 단체(매괴회, 성의회, 성모 성심회, 예수 성심회), 사회사업 단체(연령회, 영해회) 및 기타 단체(전교회) 들이 있었다(방상근, 《19세기 중반 한국 천주교사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153~183쪽).

 

2) 서울교구는 1922년 6월에 ‘경성교구 천주교청년회연합회’를, 대구교구는 1924년 7월에 ‘대구교구 남방천주교청년회’를 조직하였다.

 

3) 최석우, 〈가톨릭청년운동〉, 《경향잡지》 1444(1988. 7) ; 안홍균, 〈한국 가톨릭 청년운동의 약사〉, 《연합회보》 12(1984. 가을), 명동 천주교회 연합회.

 

4) 여성운동은 강영옥, 〈일제 시대 가톨릭 여성 운동〉, 《한국 근 ‧ 현대 100년 속의 가톨릭 교회》(중), 가톨릭출판사, 2005. 여성 신자 활동은 신영숙, 〈일제 시기 천주교회의 여성 인식과 여성 교육〉, 《교회사연구》 19,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12 ; 〈일제시기 가톨릭 여성의 신앙 생활과 사회적 역할〉, 《이화사학연구》 30, 이화사학연구소, 2003. 12.

 

5) 양인성, 〈경성교구 천주교청년회연합회 연구〉, 《교회사연구》 28, 한국교회사연구소, 2007. 6.

6) 백병근, 〈일제시기 서울지역 천주교 신자 단체 연구〉, 《교회사연구》 32, 2009. 6.

7) 최기영, 〈1930년대 《가톨릭소년》의 발간과 운영〉, 《교회사연구》 33, 2009. 12. 

 

8) 박철하,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30 - 청년운동》,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189~192쪽.

 

9) 1906년 평양 본당 청년들이 교육 사업을 목적으로 청년회를 조직하였고, 같은 무렵 황해도 신천 지역에서도 가톨릭 청년들이 ‘일신회’(日新會)라는 명칭의 청년회를 조직하였다(최석우, 앞의 글, 1444(1988. 7), 92~93쪽).

 

10) 〈조선가톨릭단체사〉, 《가톨릭연구》 1935. 9 ․ 10, 138~139쪽.

11) 정확한 설립 연도를 알 수 없다.

12) 〈종현 성당에 친목회〉, 《경향잡지》 281(1913. 7).

13) 〈천주교우 친목회 기서〉, 《경향잡지》 287(1913. 10).

14) 〈추미가 진진한 예수 성탄 경축〉, 《경향잡지》 293(1914. 1).

 

15) 〈권면회의 효험〉, 《경향잡지》 300(1914. 4) ; 〈권면회 규칙(속)과 권면회원명〉, 《경향잡지》 301(1914. 5) ; 〈권면회원명(속) 공소별로〉, 《경향잡지》 302(1914. 5) ; 〈권면회의 효험〉, 《경향잡지》 303(1914. 6).

 

16) 〈소년운동의 신기치〉, 《동아일보》(1923. 4. 20).

17) 박철하, 같은 글, 216쪽.

18) 박철하, 같은 글, 229쪽.

19) 〈안성에 천주교 소년회 창립〉, 《경향잡지》 536(1924. 2).

20) 〈안성 천주교 소년회와 황씨의 애고지심〉, 《경향잡지》 539(1924. 4).

21) 〈안성 소년회에 기부하신 이에게〉, 《경향잡지》 544(1924. 6).

 

22) 괴산 본당 소년회는 《천주교회보》 1928년 10월 1일자 기사에 창립 1주년 원유회를 개최하였다는 내용으로 보아 1927년에 창립된 것으로 보인다.

 

23) 〈각지통신〉, 《별》(1927. 11. 10).

 

24) 진주 문산 공교 소년단은 《천주교회보》 1929년 2월 1일자 기사에 제2회 정기총회를 개최하였다는 내용으로 보아 1928년에 창립된 것으로 보인다.

 

25) 〈소년소녀회 조직〉, 《천주교회보》(1928. 12. 1).

26) 〈영천 본당 소식〉, 《천주교회보》(1929. 2. 1).

27) 〈간도 팔도구에 가톨릭 소년동맹 창립〉, 《천주교회보》(1929. 12. 1).

28) 〈소년회보 발간〉, 《별》(1929. 2. 10).

29) 〈괴산 소년회 각 공소에 지회 설치〉, 《천주교회보》(1928. 6. 1).

30) 〈소년대표 회의〉, 《천주교회보》(1928. 10. 1).

31) 〈괴산 소년회〉, 《천주교회보》(1928. 10. 1).

32) 〈정말 회다운 회〉, 《별》(1929. 3. 10) ; 〈전선의 모범될 영구리 소년회〉, 《천주교회보》(1929. 4. 1).

33) 〈제2회 소년대표회의〉, 《별》(1929. 9. 10) ; 〈괴산 지방 소년회 제2회 대표회의〉, 《천주교회보》(1929. 10. 1).

34) 〈제2회 가톨릭 교리강습회 개최에 대하여〉, 《별》(1929. 11. 10).

35) 〈소년단 활동〉, 《천주교회보》(1928. 10. 1).

36) 〈소년소녀회 조직〉, 《천주교회보》(1928. 12. 1).

37) 〈영천 본당 소식〉, 《천주교회보》(1929. 2. 1).

38) 〈간도 팔도구 가톨릭 소년동맹 창립〉, 《천주교회보》(1929. 12. 1).

39) 〈본회 소년부 창립〉, 《천주교회보》(1930. 9. 1).

40) 〈평양 천주공교 소년회 창립〉, 《천주교회보》(1930. 11. 1).

41) 〈함남 문천 공소 소년소년회 창립〉, 《천주교회보》(1931. 5. 1).

 

42) 〈대성황을 예상케하는 본회 소년부 주최의 소년소녀 작품전시회〉, 《천주교회보》(1930. 11. 1) ; 〈본회 소년부 성탄축하회〉(1931. 2. 1) ; 〈본회 소년부 주최 도리강습회〉(1931. 4. 1) ; 〈청년회 소년부 주최 하기강좌 성황〉(1931. 9. 1) ; 〈백주년 축하 성극 성황〉(1931. 10. 1) ; 〈백주년 축하 제등행렬 성황〉(1931. 11. 1) ; 〈제2회 전선 가톨릭 소년소녀 작품전 성황리에 종료〉(1931. 12. 1) ; 〈소년부 주최인 성탄 축하연예회 성황〉(1932. 2. 1).

 

43) 〈문산의 축하회〉, 《천주교회보》(1931. 2. 1).

 

44) 교황 비오 11세는 1922년 2월 23일 교서 〈우비 아르카노〉(Ubi Arcano)를 발표하여 가톨릭활동 또는 교계제도가 가지는 사도직 임무에 평신도들의 참여를 강조함으로써 가톨릭운동을 명확하게 평신도 조직에 적용시켰다. 우리나라에서는 1931년 전국 공의회에서 처음 가톨릭운동을 ‘가톨릭 진행회’라는 이름으로 채택하고, 《한국 교회 공동 지도서》(1932)의 ‘전 조선 성교회 법규’ 제63조에서 가톨릭운동을 장려할 것을 권하였다(김수태, 〈1930년대 평양교구의 가톨릭 운동〉, 《교회사연구》 19, 2002, 209~211쪽).

 

45) 〈조선 가톨릭운동의 당면 문제〉, 《천주교회보》(1932. 2. 1).

46) 앞의 글.

 

47) 〈가톨릭 청년 운동의 사회 진출은 여하히할까〉(1, 2), 《천주교회보》(1933. 3. 1) ; 〈가톨릭운동이란 무엇이냐. 그 정의와 특징을 알아 그리고 13여만 대중은 진리의 전선으로 맹진하라〉, 《경향잡지》 787(1934. 8).

 

48) 김수태, 같은 글, 209~210쪽.

49) 〈평양본당 가톨릭 소년군 조직〉, 《천주교회보》(1932. 10. 1).

50) 〈가톨릭 소년군 창립〉, 《천주교회보》(1932. 10. 1).

 

51) 한국에서는 1922년 10월 조철호(趙喆鎬)가 8명으로 구성된 조선소년군을 창립하고 비슷한 시기에 정성채(鄭聖采)가 조선소년척후단을 발족시킨 것으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52) 〈가톨릭 소년군 창립〉, 《천주교회보》(1932. 10. 1).

53) 〈내외소식〉, 《별》(1932. 10. 10).

54) 〈가톨릭 소년군 창립〉, 《천주교회보》(1932. 10. 1)

55) 김성환, 〈가톨릭운동의 사회진출은 여하히할가〉, 《신우》 1934년(제2호), 72쪽.

 

56) 평양 교구장인 모리스 몬시뇰은 가톨릭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문서 전교가 우선적으로 필요함을 인식하여 1934년 1월 《가톨릭연구강좌》를 창간하였다. 《가톨릭연구강좌》는 1934년 7월호부터 《가톨릭연구》로 개제(改題)되었고, 8월에는 평양교구 가톨릭운동 연맹이 조직되면서 기관지로 결정되었다.

 

57) 〈어린이의 고소장〉, 《가톨릭연구》(1934. 6).

58) 〈가톨릭 아동란 - 아동운동에 관한 나의 편감과 제언이삼〉, 《가톨릭연구》(1935. 7).

59) 〈가톨릭 아동란 - 아동운동에 관한 나의 편감과 제언이삼(속)〉, 《가톨릭연구》(1935. 8)

60) 〈본사편집출판물예고〉, 《가톨릭연구》(1935. 3).

61) 김성환, 〈연길 탈시시오 연합 소년회〉, 《가톨릭청년》(1934. 10).

62) 《분도통사》, 분도출판사, 2009, 876~877쪽.

63) 선지훈, 〈연길교구〉, 《한국가톨릭대사전》 9,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6141쪽.

64) 《분도통사》, 분도출판사, 2009, 877쪽.

65) 황성준, 〈연길교구 소년운동 일별〉, 《가톨릭청년》(1936. 10).

66) 황성준, 같은 글.

67) 김성환, 같은 글.

68) 황성준, 같은 글. 

 

69) 필자는 《가톨릭소년》의 내용을 볼 수 없었던 관계로 이 글에서는 미처 그 내용에 대해 정리할 수 없었다. 《가톨릭소년》의 구체적인 내용은 최기영의 〈1930년대 《가톨릭소년》의 발간과 운영〉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70) 경기도, 《치안정황》, 1938.

 

[교회사 연구 제36집, 2011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백병근(한국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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