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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과학과 신앙: 과학사 속의 가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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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21 ㅣ No.62

[과학과 신앙] 과학사 속의 가톨릭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는 과학 기술은 우리에게 펀리함을 주는 동시에 많은 문제점도 안겨주고 있다.

 

새 천년을 맞으며 오늘날 과학의 발전상과 간과할 수 없는 신앙의 문제를 짚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번 호에서는 그 첫 번째 이야기로 과학사 속에서 가톨릭의 발자취를 살펴보기로 한다.

 

 

중세의 과학 기술과 가톨릭

 

중세 기술이 발전하는 데에는 가톨릭의 역할이 컸다. 13세기 옥스포드 대학의 프란치스코회 수사인 베이컨은 기술로 자연에서 불가능한 일들을 일으킬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이런 태도는 징계와 감시의 대상이었지만 l7세기 실험 과학의 융성을 예고하는 징조였다.

 

중세 교회와 의학 연구 사이도 부정적인 관계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 해부학 연구가 신성에 대한 모독이라서 교회가 해부를 금지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의학과 외과학이 크게 발전했던 13-14세기, 해부학을 비롯한 의술 연구는 대학에서 교회와 성직자와 관련하여 진행되었고, 그보다 앞서 중세 초기 의술을 비롯한 학문의 서식처가 되었던 곳도 수도원이었다.

 

교회는 일찍부터 가난한 사람들의 질병 치료에 관심을 기울였고, 베네딕도회 수사들은 그러한 노력으로 의술을 연구했다. 중세 후반 도시가 성장함에 따라 전염병이 크게 번지자, 13세기 인노첸시오 3세는 성령병원을 세웠고, 이를 모델로 모든 그리스도교 국가에 병원이 늘어갔다. 이것은 국가 차원의 의료 시설이 매우 부족했던 시절에 가난하고 병든 이들의 복지를 위해 교회가 앞장섰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바빌론의 태음력, 이집트의 태양력이 나타나면서 그리스도교의 제전은 유다교를 따라 태음력 중심이었고, 일주일의 하루를 주일로 정했다. 그러나 태음력의 부정확성 때문에 초기 그리스도교는 부활절의 해석에 분쟁을 겪었고, 이는 종파의 분파로까지 이어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축적된 로마 율리오력의 부정확성을 바로잡고자 1582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10월 4일의 다음날을 10월 15일로 선포하고 그의 이름이 붙은 역법으로 개혁했다.

 

유럽 최초의 시계는 시간을 보는 것이 아니라 들려주도록 장치된 자명종이었다. 따라서 수도원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시계는 ‘깨우는 시계’로서 시계지기의 방에 설치되었다. 이 시계의 종이 울면 한 사제가 잠을 깨고, 그가 다른 사제들을 기도실로 모이게 했다. 그리고 그 사제는 수도원의 탑으로 올라가 그곳에 설치된 종을 쳐서 모두에게 시간을 알렸다. 그뒤 곧 이어 수도원의 탑에는 망치가 자동으로 종을 쳐서 성무일도를 알리는 탑시계가 걸리게 되었다.

 

문자판의 얼굴을 가진 시계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1344년의 일로 추정되며,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에 문자판 시계가 걸렸던 것으로 보인다.

 

1352년 독일의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의 시계탑은 움직이는 달력과 천체들의 운행을 가리키는 천문관측의와 점성술 관련 정보를 전할 뿐만 아니라, 그 위 작은 방에서는 차임 벨 가락에 맞춰 동방박사 세 사람이 성모상에 경배하며 행렬한 뒤, 수닭 한 마리가 날개를 퍼득이며 노래하는 등의 연기도 보여주었다. 1574년 개축할 때는 행성의 공전을 보여주는 코페르니쿠스의 플라네타리움 등의 천문학적 현상들과 성모 기념일의 표시를 비롯하여 인형극을 연출했으며, 매일 정오에는 열두 사도가 나와서 그리스도 앞을 지나며 축복을 받도록 장치되었다.

 

이 밖에도 가톨릭과 기술 발전의 관계는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인류의 발명 가운데 종이의 발명과 인쇄술 관련 기술의 발달도 가톨릭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인쇄술의 보급 이전에는 주로 수도원을 중심으로 수사들의 눈과 손으로 필사본이 만들어졌다. 인쇄 이전 시대에는 기억술이 학문과 일상생활을 지배했는데, 무엇보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한 기억술의 연구가 크게 기여했다.

 

구텐베르크의 현대식 인쇄법의 출현 또한 가톨릭과 깊게 관련된다. 그의 인쇄기로 제작된 최고의 업적이 성서이기 때문이다.

 


과학 혁명과 가톨릭

 

근대 과학이 나타난 것은 중세 이래 줄곧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그리스도교 세력 속에서 일어났다.

 

근대 과학의 출현은 고대부터 겨루어오던 그리스적 자연관과 성서적 자연관 사이에서 성서적 자연관이 승리를 거둔 결과였다. 성서적 자연관은 우주 창조에서부터 그리스적 합리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대립되고, 우주에 관한 지식을 얻는 방법에서도 다르다. 무로부터 신이 창조한 성서적 우주에서는 자연계의 질서와 조화는 신의 보살핌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자연은 신의 작품인 까닭에 탐구되어야 하는 터였다.

 

천재들의 세기였던 17세기의 과학 혁명의 주역이었던 자연 철학자들은 한결같이 자연 세계의 입법자로서 신의 존재를 믿었고, 그것에 기초하여 자연을 탐구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이 신의 모상으로서 이성으로 자연에서 어떤 질서를 발견할 수 있지만,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는 경우라 할지라도 실재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에 섰다.

 

17세기 과학 혁명기의 자연 철학자(과학자)들 가운데 가톨릭의 예를 들면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데카르트, 파스칼 등이 있다.

 

 

수도원장 멘델의 유전법칙

 

생명과학에서는 멘델(1822-1884년)의 논문이 재발견된 해인 1900년을 가리켜 현대 유전학이 시작된 해로 잡는다. 멘델의 이 유명한 유전법칙이 유전학의 문을 연 뒤, 1950년대 초의 와슨과 크릭의 DNA 구조 해명이라는 획기적인 사건을 거치면서 1970년대에는 DNA 재조합으로 인간이 생명 현상을 조작하는 이른바 유전공학 기술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태동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에는 ‘인간 게놈 계획’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국제 협력 연구로 진척시킴으로써 ‘인간이 무엇인가’를 유전자 차원에서 규명하려는 시도에 들어갔다. 인간의 본질을 물질적 차원에서 밝혀 유전인자의 결함으로 생긴 질병을 예방하거나 치유한다는 희망을 걸고 있지만, 한편으로 생명을 인위적으로 개조하거나 합성하는 일이 빚어낼 부작용이 어떤 것일지는 상상을 초월한다.

 

오늘날의 과학 기술 중에서도 최첨단을 달리고 있는 유전공학은 멘델로부터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는데 그가 수도원의 사제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는 빈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식물학과 생물학에 흥미를 가졌고 수도원 뜰 한 구석을 실험장으로 식물의 실험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 결과 ‘식물의 잡종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이 발표된다. 그는 완두콩을 실험 대상으로 우성 형질과 열성 형질이 3대 1의 비율로 나타난다는 유명한 수치를 얻었다.

 

그러나 현대 유전학의 기초에 해당하는 이런 획기적인 연구의 중요성은 그 당시에는 제대로 인식되지 못했다. 1884년 그가 사망하자 그의 논문은 수도원에서 소각되어 발표 뒤 35년 동안 묻혀있게 된다.

 

멘델의 법칙은 1900년에 네덜란드의 드프리스, 독일의 코렌스, 오스트리아의 체르마크 등이 재발견하고, 20세기 초 미국의 몰간이 유전학의 현대적 기초를 닦는다.

 

(1993년 대전세계박람회 교황청 참가 기념으로 펴낸 “과학과 신앙”에 실은 글을 필자의 허락을 얻어 간추린 것이다.)

 

[경향잡지, 2000년 1월호, 김명자 헬레나(환경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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