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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중세 기술과 가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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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60

중세 기술과 가톨릭

 

 

과학사에 나타나는 과학과 가톨릭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다. 이 글에서는 가톨릭과 과학의 관계를 몇 가지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 그 둘 사이의 유의미한 연관성을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첫째, 13세기에 수도원과 성당 학교를 전신으로 설립된 대학을 풍미했던 스콜라 학풍에서는 가톨릭 신학과 자연 철학의 상호 연관이 매우 컸다. 아울러 중세 기술의 발달에서의 가톨릭의 기여 또한 결정적이었으며, 구체적인 주제로서 예컨대 시계, 인쇄술, 건축기술 등을 들 수 있다.

 

둘째, 근대 과학의 출현 이후 과학은 종교를 대체하여 새로운 문명의 구심점으로 자리잡았고, 인간의 물질적 생활은 물론 사고 체계에까지 혁명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근대 과학의 중요성에 대한 버터필드(H. Butterfield)의 견해를 빌면, 르네상스는 중세적 정신의 표현, 종교 개혁은 그리스도교 전통 내부의 하나의 에피소드였던 것에 비해, 근대 과학을 출현시킨 16~17세기의 유럽의 과학 혁명은 그리스도교 발생 이래의 서양사 최대의 사건으로 규정되고 있다. 이 근대 과학의 출현은 당대의 자연 철학자들이 신의 작품인 자연 세계에 신의 섭리로서 숨겨진 자연의 법칙을 찾아내려는 열망에서 이룩된 결과였다. 따라서 근대 과학의 사상적 배경이자 과학 방법론의 틀로서의 성서적 세계관에 대해 살피는 것은 의미 있다고 생각된다.

 

셋째, 과학은 흔히 객관적, 경험적, 논리적, 가치 중립적 성격을 띠는 것으로 규정되나, 실제의 과학사의 자취를 살피는 경우 그것은 크게는 그 시대의 사조, 사회, 문화, 경제 등의 제반 여건이 총체적으로 작용하는 시대적 산물이자, 작게는 과학자 개인의 가치관, 인생관, 성격, 환경 등의 모든 요소가 작용하는 인간 활동의 하나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가톨릭이라는 신앙이 과학자의 과학 활동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를 몇몇 과학자의 예를 들어 살피는 것도 흥미있다고 생각된다.

 

넷째, 근대 과학 출현 이전까지는 서양에 결코 뒤지지 않았던, 또는 오히려 앞서고 있었던 동양 문화권은 19세기부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황급히 서양 문물을 수입하는 일에 부딪쳐 많은 시행 착오를 겪었고, 그 부작용이 만만치 않았다. 이러한 서양 문물의 도입 과정을 살피면, 그 초창기에서 가톨릭의 선교회와 사제들의 활동이 핵심적 역할을 했으므로, 동양의 근대화를 가톨릭 전래의 관점에서 다루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중세의 역사는 과학과 신학의 대립으로 얼룩져, 중세 교회가 과학의 발전을 크게 저해했다는 식의 인식이 보편화돼 왔다. 그러나 사실상 이 시대의 과학과 신학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더욱 구체적으로 신학은 자연 철학에 대한 지배적인 동반자격이었다. 한편 기술과의 사이에서는 그리스도교는 아무런 갈등을 빚지 않았을 뿐더러, 실제로 기술의 중요성은 중세 수도원에서의 수사들의 활동에서 드려나듯이, 그리스도교의 자연관에 의해 크게 증진되었다.

 

16~17세기의 과학 혁명은 서구 과학 2천 년 전통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의로부터 탈피하는 것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것을 준비했던 지적 변환의 과정은 종교적, 신학적 목적에서 이루어진 스콜라 학풍에 의해 주도된 것이었다. 스콜라 학풍은 비록 선험적 개념의 과다, 연역적 추론 및 논리적 토론의 맹신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나, 자연 철학의 세부적인 사고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대학의 주된 학풍이었다는 점에서 중세의 과학은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떠나서 고려될 수 없다.

 

기술의 발전은 그 시대의 자연관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중세의 자연관은 고대의 여러 전통이 공존하는 상태로서, 그 특정은 신학적 · 인간 중심적 · 물활론적이라고 요약될 수 있다. 따라서 중세의 기술은 고대의 범주와 거의 다를 바가 없어, 인간의 기술은 위대한 기술자인 자연의 작용을 모방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고, 자연의 기술에 비해 열등한 것이었다.

 

중세의 믿음에서 자연의 기술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마술 정도였다. 13세기 옥스포드 대학의 프란치스꼬회 수사언 베이컨(Roger Bacon)은 기술에 의해 자연에서 불가능한 일들을 일으킬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슬람의 저작에 의거하여 볼록 렌즈의 확대 효과 등의 광학 실험에 몰두했고, 요즈음 용어로 망원경, 잠수함, 비행기에 해당하는 기계들의 출현을 내다보고 있었다. 덧붙여 인공으로 자연의 천둥이나 번개보다 훨씬 강력한 천둥, 번개를 일으킬 수 있다고 장담한 그의 자연적 마술의 옹호는 일반인에게 결코 호응을 얻을 수 없었다. 그는 불경건한 마술사로 취급됐고, 그의 사고와 행위는 마땅히 징계와 감시의 대상이 됐다. 그러나 그의 자연적 마술은 17세기의 실험 과학의 융성을 예고하는 정조였던 것이다.

 

중세 대학의 주류는 연금술의 태도를 배격했다. 순전히 이론적 · 합리적 논의에 의존했던 학문 전통에서는 연금술의 신비적 요소에 적대적이었고, 손을 쓰는 비천한 성격이라는 데서 비판적이었다. 그런 경향은 1317년 교황 요한 22세에 의해 연금술이 교서로 금지된 것과도 상통한다. 연금술은 18세기 후반 근대 화학의 출현 이전까지는 화학의 전신이었다고 평가되므로, 교황 요한 22세의 연금술 금지령은 가톨릭에 의한 화학이라는 학문의 탄압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14세기의 가톨릭의 연금술 금지 조치는 과학 관련 학문에 대한 탄압이 아니라 비천한 금속으로부터 금과 은을 만든다고 대중을 현혹하고 있었던 행위에 대한 금지였던 것이었다.

 

중세의 기술은 특히 11세기에 동력과 농업 기술에서 혁신적인 발전을 기록한다. 예컨대 기계 시계가 제작되기 시작한 것도 14세기 들어서였고, 그 첫걸음은 천주께 그들의 의무를 규칙적으로 정확하게 수행하려는 그리스도교 사제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실제로 영어의 시계라는 ‘clock’의 어원은 수도원과 연결됨으로써, 중세 영어의 시계인 ‘clok’은 중세 네덜란드어의 ‘종’에서 유래된다. 즉 당초에는 종을 치지 않는 장치는 시계가 아니었다.

 

고대 농경 시대에는 농작물을 키우는 해의 시간만이 중요했고, 따라서 최초의 시계 형태인 썬다이알(sundial ; 해시계)은 라틴어의 ‘낮’에서 유래한 단어였다. 해시계는 흔히 반구형으로 제작되어 단지 12등분으로 나뉘어져 2시간이 한 단위였다. 햇빛과 상관없이 사용할 수 있었던 물시계는 예컨대 고대 아테네의 법정에서 6분 간 물이 흐르도록 제작돼 변론 시간을 제한하는데 쓰였다. 따라서 그들의 변론에서 ‘시간은 물’이었고, 시간을 넘는 경우 ‘물을 빼앗아라’를 외치게 됐던 것이다.

 

물이 얼 걱정 없이 사용할 수 있었던 모래 시계는 8세기 프랑스의 샤르트르의 사제가 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초기에는 말린 모래, 후에는 포도주에 9번 끓인 검고 고운 대리석 가루를 유리 용기에 밀봉하여 만들었다. 살마뉴 대제 때에는 12시간짜리 대형 모래 시계가 제작됐다. 1942년 콜럼버스는 그의 항해에 30분짜리 모래 시계를 가져 갔고, 그것을 뒤집어 놓는 일을 반복함으로써 하루 일곱 번의 기도를 정확하게 바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래가 한번 흐른 뒤 잊지 않고 모래 시계를 뒤집어 놓는다는 것은 상당히 번거로운 일이었기에, 다른 방법으로 시간을 재려는 장치들이 연달아 고안되었다. 그중 양초 시계의 출현은 9세기 색슨의 군주인 알프레드 대왕과 관련되는 신앙심의 산물이었다. 그는 피난 시절 그의 왕국이 복권만 되면 하루의 3분의 1을 기도하며 천주께 바치겠노라고 맹세한 적이 있었고, 영국에 돌아온 뒤 눈금과 가리개가 붙은 양초 시계를 제작토록 하여 정확히 6개를 태워 24시간을 쟀다. 그러므로 양초가 2개 탈 동안은 그가 종교 제전에 바쳐야 할 시간이었다.

 

중세 유럽 최초의 시계는 시간을 보는 것이 아니라 들려 주도록 장치된 자명종이었다. 그리하여 수도원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시계는 ‘깨우는 시계’(horologia excitatoria)로서 시계지기의 방에 설치됐다. 이 시계의 종이 울리면 한 사제가 잠을 깨고, 그가 다른 사제들을 기도실로 모이게 했다. 그리고 그 사제는 수도원의 탑으로 올라가 그곳에 설치된 종을 쳐서 모두에게 시간을 알렸다. 그 뒤 수도원의 탑에는 망치가 자동적으로 종을 쳐서 성무일도를 알리는 탑시계가 걸렸다.

 

이 밖에도 가톨릭과 기술 발전의 관계는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인류의 발명 가운데 종이의 발명과 인쇄술 관련 기술의 발달은 그로써 전지구적 지식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이러한 기록의 보존과 전달에서 가톨릭의 역할은 핵심적인 요소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각종 활자와 인쇄술의 보급 이전에는 주로 수도원을 중심으로 수사들의 눈과 손에 의해 필사본이 제작되었고, 열악한 여건에서 필사본의 제작에 열중한 결과 실명한 사례들도 눈에 띤다. 그리고 인쇄가 보편화되기 이전에는 기억술이 학문과 일상 생활을 지배하고 있었다. 유럽 최초의 서사시인 “일리어드”와 “오딧세이”도 구전으로 전승됐는데,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한 기억술의 연구가 크게 기여했다.

 

구텐베르크의 현대식 인쇄법(1436~1450년)의 출현 또한 가톨릭과 깊게 관련된다. 그의 인쇄기로 제작된 최고의 업적은 박물관의 보물로 남아 있는 성서이기 때문이다. 구텐베르크의 아이디어는 이전엔 전체 면을 한꺼번에 찍어냈던 것과는 달리 그 과정을 분해하여 낱글자를 인쇄하는 것의 집합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종교 개혁은 성서가 대량 인쇄되어 널리 보급됨으로써 일어날 수 있었던 사건이다. 이는 기술 혁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보여 주는 실례로서, 이후 인쇄술의 전파로 인한 지식 공동체의 형성은 실로 엄청난 변화를 불러왔다.

 

독일의 마인츠에서 태어난 구텐베르크는 대주교의 조폐국에서 일하던 아버지 덕분에 금속 세공 기술을 익히게 된다. 그는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는 그의 발명품을 팔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랜 세월을 끌면서 빚만 자꾸 쌓여 갔다. 1448년에는 다시 요한 푸스트의 지원을 얻어 활자 제작을 계속했으나, 결국은 그의 제소로 인해 모든 재산을 빼앗긴다. 그로써 그간 만들어 놓았던 성서의 인쇄본과 활자 등 모든 기물을 넘겨주지 않으면 안되게 됐다. 그런데 그것을 빼앗아 간 채권자들이 결국은 첫 작품으로 성서를 찍어내게 된다. 구텐베르크의 42행짜리 성서에는 무거운 고딕체 활자가 사용됐고, 그 밖에 다른 책의 인쇄에는 별도의 활자들이 사용됐다. 마인츠의 대주교 나사우의 아돌프 백작은 헐벗고 굶주리고 거의 실명 상태인 구텐베르크에게 해마다 옥수수와 포도와 신사복, 그리고 연금을 하사하여 그의 공로를 치하했다. 중세로부터 가장 많은 인쇄의 수요처는 수도원이었으므로 인쇄술의 발달로 가장 혜택을 받게 된 곳도 수도원이었다.

 

[경향잡지, 1993년 9월호, 김명자 헬레나(숙명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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