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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소작인들은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세계] 교회사에서 배운다: 초기 교회의 홀로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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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3-23 ㅣ No.502

[교회사에서 배운다] 초기 교회의 홀로서기


교구사제이지만 본당이 아닌 특 수사목(교구청, 신학교)을 하는 관계로 신자분들, 특히 초중등 학생들을 만날 기회가 그리 많지는 않다. 그나마 가끔씩 교구 청소년사목국 신부님의 부탁으로 기회가 주어지는데, 대체로 피정 마지막 날 고해성사 시간을 통해서이다.

만나면 우선 행복하다. 젊음 그 자체로 넘쳐흐르는 힘이 전달되어 오기 때문이다. 또한 피정 중 받은 은총에 힘입어 다시 하느님과 화해하려는 시간에, 아직 볼살이 통통함에도 진지하게 대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내 보기에도 예쁘고 대견스러운데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는 얼마나 좋으실까(창세 1장) 생각해 보기도 한다.

청소년기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것이 바로 사춘기다. 특징이라고 한다면 가정과 학교에서의 반항심, 남과 나의 구별, 때로는 조금이라도 튀고 싶어 하는 소(小) 영웅심이 아닐까 싶다.

정도가 적으면 별일이야 없겠지만, 어느 정도의 범위를 넘어섰을 때에는 주위의 부모님, 선생님, 친구들 모두가 힘들어지는 게 그들에게도 힘듦이자 어려움이다.

무조건 “참아라! 순종해라!” 할 수도 없는 일이고 하여, 나름 그들을 격려해 주고자 “걱정 마! 크는 증거야! 어른이 되어가는 거야!”라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부모의 슬하에서 ‘누구 집자식’ 정도로만 여겨지다가 이제부터는 자기만의 정체성을 가진 하나의 독립적 인간이 되어가면서 부딪히고 대립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유다교로부터의 독립

개인적으로 교회사, 특히 초기 교회사를 공부하면서 이 시기를 ‘어른이 되어가는 일련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박해시기를 거치며 그리스도교 초기[幼兒] 공동체가 유다교의 한 분파 가운데 하나에서 이제 본격적으로 그 이름 “그리스도” 때문에 자립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63년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지만, 외래종교에 다소 관용적 정책을 폈던 로마제국이었기에 유다교는 큰 어려움 없이 존속할 수 있었다. 예수 사후 베드로와 바오로로 대표되는 사도단도 아직은 유다교적 테두리 안팎에서(회당에서의 전교활동) 교회의 지평을 넓혀나가고 있었고, 급기야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멸망에 따른 유다인 이주정책으로 이스라엘 땅에서만이 아니라 ‘땅끝’(사도 13,47)까지 퍼질 기회를 맞게 된다.

물론 율법준수와 관련하여 예수 생시에도 사후에도 유다인들은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을 못마땅해하였지만, 자신들도 로마제국의 억압 아래 있었기에 신생 그리스도교에 그다지 많은 신경을 쓸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거니와 아직까지는 신생 그리스도교가 세력이 큰 공동체가 아니었기에 묵인하고 넘어가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달랐다. 죽음과 부활을 통해 자신을 직접 계시해주신 분에 대한 체험과 그 체험을 더욱 생생하게 하는 성령에 대한 체험 때문이었다. 똑같은 뿌리이지만 이제부터는 자신들이 유다인들과 다르고, 달라야 함을 차츰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구원자, 메시아)이시라는 믿음 때문에!

차츰 교회의 주요 구성원들도 유다인에서 이방인으로 바뀌어가고, 주요 무대도 예루살렘에서 알렉산드리아나 안티오키아 같은 도시들로 옮겨가면서, 기원후 50년경에는 자신들도 그리고 주변 사람들도 그들이 유다교의 한 이름 없는 분파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사도 11,26) 임을 인식하게 된다.

기원후 100년경 유다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공식적으로 파문하게 되고, 132년경 발발한 2차 유다 독립 전쟁 때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극에 달하면서 그리스도교는 독립적인 하나의 정체(正體)를 갖게 된다.


로마제국과의 관계 - 박해의 시기

복음이 어떻게 수도 로마까지 전해졌는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일례로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주였기에 로마 군인들이 주둔했을 것이고, 그들 가운데 몇몇이 세례를 받고 복음을 믿었을 가능성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또한 성령강림 후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은 이들 가운데 로마인들이 있었다는 증언(사도 2,10)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미 초기부터 로마에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있었고, 이 로마 공동체가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패러다임 측면에서도 유다 - 그리스도교에서 로마 - 그리스도교로 옮겨왔으니, 이는 차후 교회의 모습을 운명 지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기나긴 박해(유일신에 대한 신앙을 지키면서 동시에 보편종교로서 폭을 넓혀가면서)를 거치면서 313년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관용령을 통해 자유를, 이후 392년 로마제국의 유일한 종교가 되면서 특권을 누리게 되는데, 그 거점이 당시 세계의 수도이자 오늘날에도 서방 가톨릭교회의 어머니라고 일컬어지는 로마였기 때문이다.

이 점은 교황 수위권, 로마교회와의 친교 등의 굵직한 신학적 주제로서 오늘날까지도 의미 있는 사실이다.

로마제국은 그리스의 문화적 전통을 대체로 수용했고,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그리스 신화를 수용한 것이었다. 제우스를 유피테르로, 헤라를 유노로, 아테나를 미네르바로, 하데스를 플루톤으로 그리고 다른 신들도 로마식으로 이름 붙여가며 받아들였던 로마인들의 종교는 기본적으로 다신교였고, 아직도 남아있는 판테온이 이에 대한 증거가 된다.

이러한 다신교적인 분위기에서 유일신을 주장한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인들이 보기에 참된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로 여겨졌다. 또한 신이라면 완전무결해야 한다는 생각과는 달리 그리스 신화에서 보여주는 제우스를 비롯한 신들의 기행(奇行)은 황제(인간)들도 신화(神化)될 수 있을 가능성을 제시하며, 황제숭배의 이론적 바탕을 마련한다.

이러한 반유일신적 정서와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퍼져있었기에 그리스도교는 기본적으로 갈등의 씨앗을 잉태한 셈이 되었고, 결국 로마인들 사이로 전해지기 시작한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는 총 10여 차례에 걸쳐 진행된다.

64년 7월 네로 황제시대에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한다. 당시 재개발을 위한 것으로 추정되는 방화인데, 총 14개의 지구 가운데 3개 지구가 전소, 7개 지구가 반파되어 민심이 들끓자, 황제는 뒤집어씌울 속죄양을 찾는다.

역사가인 타키투스는 네로가 “대중의 미움을 사고 있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서 속죄양을 찾아냈다.”고 기술하였다. 곧, 그리스도인이 직접적 방화범이 아님에도 그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는 이야기다.

이로써 그리스도인들은 ‘인류증오의 집단’으로 단죄되었고, 법치국가였던 로마제국에서 법적근거로서가 아닌 황제의 개인적 견해와 반그리스도교적 분위기 때문에 박해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첫 박해는 이른바 ‘네로의 관례’가 되어 이어지는 박해에서 하나의 근거로 작용하게 된다.

이후 황제숭배와 연관된 집권자의 의중이 크게 반영된, 그래서 법적 일관성이 없던 간헐적인 박해시기를 거쳐, 로마제국 시대 중 가장 평화로웠던 시기인 이른바 오현제(五賢帝, 96-179년)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본격적으로 박해를 받게 된다.

스토아학파의 위대한 철학자이자 「명상록」의 저자이기도 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176년 지방 집정관에게 내린 훈령에서 로마의 국교가 신흥종교 때문에 타격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며, 그리스도인들을 환상적 종교의 신앙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어리석은 무리로 여겼다. 데치우스 황제(250-251년) 그리고 디오클레시아누스 황제(284-305년) 시기에는 순교자가 8만 명에 이를 정도로 박해는 그 절정에 달하였다.

황제숭배, 시기와 질투, 성찬례에 대한 존경으로 비밀집회를 하고, 인육(人肉)을 먹는 제사를 바친다는 오해까지 감수해 가면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꿋꿋하게 자신들이 믿는 바를 실천하고, 죽음까지도 불사하였다.

이에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교의 씨앗”이라고 신자들을 독려했으며, 실제로 순교자이자 초기 교회의 신학자였던 유스티노도 순교의 모습에서 당당하고 의연했던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개종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목숨으로만 신앙을 증거한 것이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해 힘이 있는 말과 글로 증언한 교부들이다.

교부들은 박해 때 배교하였다가 다시 교회로 돌아오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이미 배교한 자들의 세례의 유효성 등에 관한 진지한 신학적 성찰을 하였고, 이러한 일련의 성찰들은 박해시기가 끝난 뒤 공의회들을 통해 교회가 진정으로 믿어야 할 바가 무엇인지 정식화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초기 교회의 삶이 녹아있는 미사와 신경

그 어려웠던 시기를 미사 때마다 우리는 기억한다. 바로 미사 그 자체와 특별히 신경을 통해서이다. 신경에는 우리가 믿어야 할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를 담고 있는 동시에, 하느님께 드려야 할 자리를 다른 존재에게 양보할 수 없다는 강한 믿음과, 죽음으로라도 그 믿음을 증거하겠다는 결의가 담겨있다.

신경을 바칠 때마다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했던 숭고한 떨림을 느껴보았으면 한다. “성자께서는 저희 인간을 위하여, 저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셨음을 믿나이다. 아멘!”(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서)

* 최용감 안젤로 - 광주대교구 신부.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고 있다.

[경향잡지, 2012년 3월호, 최용감 안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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