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1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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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김수환 추기경과 한국의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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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08 ㅣ No.828

김수환 추기경과 한국의 민주주의

 

 

1. 머리말

 

선교사가 직접 찾아와 전교하기도 전에 일단의 조선인들은 18세기 후반 무렵 자발적인 노력으로 천주교 신앙공동체를 창립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 가운데 일부는 초기의 補儒論的인 입장에서 벗어나 ‘그리스도교의 하늘’로 들어가고자 하였고, 따라서 ‘유교적 조선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했다. 유교의 인간관과 우주관 대신에 그리스도교의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들은 ‘無君無父’의 반역자로 간주되어 형언할 수 없는 박해를 당했지만, 이들이 당시 사회에 던진 강력한 충격파는 그렇지 않아도 흔들리고 있던 조선사회를 붕괴시키는 본격적인 단서를 제공했다. 그 결과 교조적 유교의 가치가 지배하던 전근대사회에서 그리스도교의 가치에 바탕을 둔 근대사회를 향하여 점차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그리스도교의 정신은 한국사회의 근대의식 성립에 밑거름이 되었으며, 역사의 물줄기는 王政에서 共和政으로 바뀌었다. 그런 점에서 박해시대의 천주교인들을 ‘近代的 人間’의 선구적인 典型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1)

 

이처럼 천주교는 근대사회로의 전환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았지만, 한말 · 식민지시대를 거치면서 제국주의 침략에 대해서 지나치게 소극적이었다는 평가를 넘어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까닭에 천주교회는 오늘날까지도 한국 ‘민족’에 대해 일종의 원죄의식 비슷한 것을 짊어지고 있다. 왜 이렇게 인식하고 있을까? 아마도 당시 천주교회가 선교 방침으로 내세운 ‘정교분리원칙’의 탓이 크리라 여겨진다. 이 원칙에 따라 성사 집전에만 전념하다시피 했던 한말 · 식민지시대의 교회 지도자들은 신자들의 국권회복운동이나 독립운동 등을 배격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단죄하기까지 했다. 그 때문에 신자들 가운데 일부는 신학문 교육을 회피하는 경향마저 있었다. 세속을 알면 그만큼 영혼 구제에 해로운 것으로 인식했던 것이다.2) 이러한 신앙 태도를 가진 선교사들에게 식민지 조선인의 민족의식에 대한 이해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金壽煥(스테파노, 1922~2009)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즉 한국 민족을 철저하게 부정하고자 했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통치와 탈세속적인 신앙생활을 강조하는 당시 교회의 전통 속에서 김수환은 성장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독실한 신앙 가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5남 3녀의 막내였던 데다가 아버지를 일찍 여윈 탓에 당시로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자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래에 보이는 그의 회고가 그러한 면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성품이 곧으셨던 어머니는 자식 교육에도 매우 엄격하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편애(偏愛)다 싶을 정도로 이 막내아들에게 사랑을 쏟으셨다. 막내아들에게 하나라도 더 먹이려고 애쓰시는 것이 싫어서 어느 해 여름에는 “과일 먹으면 자꾸 배탈이 난다”고 거짓말을 하고 과일을 입에 대지 않았다. …밤이 되면 어머니는 보통 1~2시간씩 기도를 바쳤는데, 난 옆에서 뜻도 모른 채 꾸벅꾸벅 졸면서 중얼중얼 댔다. 그때 기도하다가 엄마 등 뒤에서 잠드는 게 내 특기였다. 기도하기 싫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한번은 찰고(擦考)를 앞두고 교리문답을 외워놓지 않아 어머니에게 혼쭐이 난 적이 있다. 그때 효자전 이야기가 생각나 회초리를 만들어 어머니에게 갖다 드리고는 “이불효자를 때려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매를 드시는 대신 다시 한 번 조용히 타이르는 것으로 잘못을 용서해 주셨다.3)

 

뿐만 아니라 5학년 무렵 대구에 다니러 가신 어머니가 보고 싶어 무작정 대구의 누나 집으로 찾아간 일이나 성 유스티노 신학교 시절 학교 다니기가 싫어 일부러 교칙을 어긴 일화4)에서도 그러한 면이 잘 드러난다.

 

이러한 그의 성향은 그 뒤 동성상업학교와 상지대학, 그리고 학병 시절을 거치면서 더욱 뚜렷해졌다. 동성상업학교에 진학한 뒤 그는 당시 일본의 지배 속에서 신음하고 있던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로서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5학년 졸업반 修身 과목 시험 문제로 “조선 반도의 청소년 학도에게 보내는 일본 천황의 勅諭를 받은 황국신민으로서 그 소감을 쓰라”가 출제되자, “① 나는 황국신민이 아님, ② 따라서 소감이 없음”이라고 적어 낸 데5)에서 잘 살필 수 있다.

 

일본 유학 시절 그는 일본인들의 차별 대우를 직접 피부로 느끼면서 더욱 ‘민족’ 문제를 고민하는 청년으로 성장했으며, 학병 시절을 거치면서 민족의 현실 문제를 온몸으로 체험하였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불만과 분노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상처받은 젊은 영혼’을 치유해 준 이가 바로 예수회 수도자였던 게페르트(T. Geppert) 신부였다. 말하자면 그에게 게페르트 신부는 “영적 스승”이었다.6) 그렇지만 해방과 6.25 전쟁을 겪으면서 그의 관심은 점차 ‘민족’을 넘어 ‘하느님의 백성인 인간’으로 옮겨가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독일 유학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겪으면서 교회의 사회참여에 구체적으로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특히 사회적 약자나 소외된 사람들을 지극한 애정으로 품고자 하였다. 그 뒤 1966년 마산 교구장을 거쳐 2년 후에는 서울 대교구장으로 부임하였으며, 마침내 1969년에는 추기경에 서임되면서 그는 한국사회가 그리스도교적 가치에 기본적인 토대를 둔 민주주의 사회로 정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7)

 

이 글에서는 주로 1970년대를 중심으로 그의 활동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조선시대에서 식민지시대를 거치면서 오늘날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한국사회가 ‘유교적 가치 중심’에서 ‘그리스도교적 가치 중심’으로 변화하는 가운데 김수환 추기경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거칠게나마 살펴보고자 한다.8)

 

 

2. 김수환 추기경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일제 말기 上智大學 재학 도중 학병으로 끌려 나갔다가 일본이 패망한 다음 미군 포로를 거쳐 1946년 12월 무렵 귀국한 김수환은 1947년 9월 혜화동의 성신대학에 입학하여 사제 수련 과정을 밟았다. 그렇지만 6.25 전쟁의 발발로 우여곡절 끝에 1951년 9월 15일 대구 계산동 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을 수 있었다. 이후 안동 본당(현 목성동 본당) 주임 · 대구 대목구장 비서 · 대목구 재경부장 · 해성병원 원장, 그리고 김천 본당(현 김천 황금 본당) 주임 겸 성의중 · 상업고등학교 교장을 거쳐 1956년 10월 게페르트 신부의 권유에 따라 독일 뮌스터 대학으로 유학을 가서 ‘그리스도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한국 가족제도’를 주제로 학위 논문을 준비했다.9)

 

비록 공부를 포기하고 1964년 봄에 귀국했지만, 유학 시기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분위기와 내용을 가까운 곳에서 접함으로써 가톨릭교회에 불어오는 변화와 쇄신의 바람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가톨릭시보사 사장으로 재임할 때 공의회 소식을 앞장서서 보도하면서, 세상에 봉사하는 교회로 거듭날 것을 강조했다. 그는 《가톨릭시보》를 단지 신자들만을 위한 신문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는 신문으로 만들고자 가톨릭에 비판적인 외부 인사들의 글들도 꺼리지 않고 게재하였다.10) 이는 청소년기 이래 형성된 민족문제에 대한 의식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으로 종래의 ‘성사주의적’ 입장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현실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경험은 그가 교회의 지도자로서 교회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바깥 세상을 향해 문을 열고 변화와 쇄신을 도모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그런데 김수환 신부는 1966년 5월 31일에 주교로 서품되면서 신설된 마산교구의 초대 교구장에 착좌하였다. 그리고 1968년 4월 9일에는 서울대교구의 대주교로 승품되었으며, 5월 29일에 서울 대교구장에 착좌하였다. 이어 다음 해 4월 28일에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김수환 신부가 이토록 이른 나이에 ‘너무나 예상 밖’으로 주교 · 대주교 · 추기경에 서임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물론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신망과 능력이 고려되었겠지만, 그와 함께 당시 한국 천주교회가 처한 상황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 가톨릭교회가 세상과 대화하거나 삶을 나누는 일은 전무하다시피 하였다. 교회도 세상 한가운데 있음에도 세속의 일에는 무관심한 채 교회를 위한 교회에 머물러 있는 실정이었다. 이에 그는 마산 교구장으로 재직할 때부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세상 한가운데로 나가 봉사하는 하느님 백성으로 거듭 태어나자고 제의했으며, 이를 위해 신자들부터 먼저 쇄신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11)

 

한편, 그가 서울 대교구장에 착좌하면서 교회 안에서는 세대교체가 시작되었다. 그 과정에서 갈등이 없지는 않았지만, 교회는 이를 극복하고 새롭게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그 무렵 서울대교구는 빚에 쪼들리고, 사제들이 분열되는 등 복잡하게 얽힌 문제들이 적지 않았다. 폭력배를 낀 채권자들이 찾아와서 횡포를 부리는 일이 발생했을 정도였다.12) 게다가 당시 한국 천주교 신자는 전체 인구 가운데 2.5%로, 75만 내지 80만 명 정도에 불과하였다.13) 이러한 상황을 분명하게 인식한 그는 1968년 5월 29일의 서울 대교구장 취임 강론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강조하였다.

 

“이 짐이 얼마나 무거우며, 또 그것이 우리 교회를 위해 어떤 뜻이 있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제가 모든 이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때에 교회가 천주의 장막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희들이 모시고 있는 그리스도를 생활로써 증거해 달라’고 하는 사회 요구를 명심해야 합니다. 이제 교회는 모든 것을 바쳐서 사회에 봉사하는 ‘세상 속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14)

 

이전과는 달리 교회가 세속의 문제에 직접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교회의 기원이 세상에 있지 않다 하더라도 인류구원을 위해 존재하는 만큼 세상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충실하게 실천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1966년 5월 마산 교구장에 취임할 때부터 일관되게 강조한 것이기도 했다.15)

 

이러한 그의 개방적인 태도는 다른 종교와의 대화 · 공존의 관계를 모색한 데에서 잘 드러난다. 예를 들면, 1968년 6월 23일 ‘기독교 연합회’가 주최하는 각 교파 성직자 연합기도회에 참석하여 강론하였고, 이듬해 1월 5일에는 명동 주교좌 성당으로 강원룡 목사 등 각 종단 대표들을 초청하여 두 번째 ‘세계 평화의 날’을 위한 특별 미사를 봉헌하고는 ‘평화의 날’ 메시지에 대한 한국 종교인들의 감사 메시지에 7대 종교 대표가 공동서명하여 교황에게 보냈다. 또 그해 11월 20일에는 정동 대한 성공회 주교 공관에서 개최된 ‘성공회 · 천주교 일치위원회’에서 사도신경의 공동번역과 사용, 신학교 교수진의 교환, 성직자간의 친교 등을 논의하였다. 이듬해 12월 23일에는 외교구락부에서 李靑潭(1902~1971) 스님 · 韓景職(1902~2000) 목사 등과 종교 지도자 좌담회를 개최하였다. 1970년 12월 28일에는 교회일치위원회를 제도화하고 강화하기 위한 제도 연구 소위원회를 구성하였고, 1973년 3월 25일에는 성공회 서울 대성당에서 램지(A.M. Ramsey, 1904~1988)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 등과 ‘일치와 세계평화를 위한 기도회’를 열었다. 그리고 1984년 5월 6일에는 주한 교황 대사관에서 103위 시성식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78~2005)와 한국 종교 지도자들의 만남을 주선하였다.16) 이러한 그의 열린 태도는 일생 동안 변함없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교회는 원칙적으로 다른 종교와의 대화를 강조하고 있었다. 다만 다른 종교 안에 있는 모든 아름답고 올바르고 선한 윤리적 · 문화적 가치를 수용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서구적인 것이 아닌 동양적인 철학 · 종교 관념의 바탕 위에 신학의 자기 토착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한국 전통의 유교 · 불교 · 巫敎信仰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그것들이 지닌 고유의 가치, 불멸의 가치를 수용하여 연구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종교의 혼합주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것을 버릴 수 없는 어떤 생래적인 것”이라고까지 했다. 한국 가톨릭이 200년 동안 아무런 대화가 없다가 근래에 와서야 비로소 대화를 시작했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할 정도였다.17)

 

이처럼 김수환 추기경은 다원화를 토대로 하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 걸맞는 열린 자세로 다른 종교에 접근했다. 그러나 항상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다른 종교와의 공통분모를 찾아 더불어 살아가고자 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에 토대를 둔 현대 한국의 민주주의 가치를 정착시키는 데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 가운데 한 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00년 5월 23일 제13회 心山償 수상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종교 간의 화합과 협력을 강조하였던 데에서 그러한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오늘의 수상은 저 개인의 차원을 넘어 종교적, 민족적 차원에서 깊은 의미를 갖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리라 봅니다. …유교는 불교와 더불어 한국을 위시한 동북아시아 문화의 사상적, 정신적 바탕을 이루어 왔습니다. 저는 천주교의 성직자이지만 한국인이기에 제 몸 안에서도 어딘가 유교의 피가 흐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8세기 말엽 이벽, 권철신, 이승훈, 정약용 등… 소장 유학자들은 …유교 사상을 바탕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였으며, 유교 사상과 천주교를 조화시키려는 이른바 補儒論의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유교와도 대화와 조화의 장을 열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천주교회의 제사 금령은 두 종교 간의 관계를 생사를 건 투쟁으로 치닫게 하였습니다. …이 천주교의 엄청난 도전에 대해 유교에서는 無父의 邪學, 전통 유교의 파괴자로 단죄하고 이 邪敎를 뿌리 뽑아 버리려는 禁壓으로 응전하였습니다. …조상 제사는 미신이 아니라 부모 사후에도 계속 효를 실행하기 위한 報本追孝인 것입니다. 이를 인식한 천주교에서는 금지되었던 조상 제사를 1939년 허용했습니다. …유교를 ‘효의 종교’라고 일컫는다면, 그리스도교 역시 효의 종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교는 인본적, 자력적, 상향적, 현재적 성향이 강한 반면에, 그리스도교는 신본적, 타력적, 하향적, 미래적 성향이 강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특성은 인간의 양면적 성향으로서, 양자택일적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라 하겠습니다. …동족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한국에서 유교, 불교, 그리스도교가 함께 손을 잡고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변화시켜 갈 때 한국 민족은 환태평양 시대에 명실상부 ‘동방의 빛’으로 인류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게 될 것입니다.…”18)

 

특히 5월 24일 김창숙의 묘소에서 거행된 심산상 수상자 告由祭에 앞서 김수환 추기경은 유교 예법에 따라 再拜를 하였다. 이를 “화해와 인간 사랑을 위한 위대한 걸음”19) 또는 “가톨릭과 유교가 해묵은 역사의 질곡을 벗어버리고 화해했다”고 평가하였다.20) 전통적인 유교의 가치와 새로운 천주교의 가치가 갈등과 충돌의 과정을 거치면서 마침내 화해와 조화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3. 김수환 추기경과 민주화운동

 

김수환 추기경은 자유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절대적인 기본 조건이자 모든 인간이 차별 없이 향유해야 할 천부적 권리이기 때문에 그것이 제한되거나 억압당할 때에는 그것을 요구하는 투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면서, 그런 뜻에서 역사를 “인간의 자유와 해방의 과정”으로 이해했다. 또한 “크리스챤이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인간과 인간사회의 참된 자유와 해방을 위해 자신의 어깨에 십자가를 지고 역사의 심야를 그 어두움과 싸우며 빛을 향하여 전진하는 사람”으로 규정하였다.21)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교 인간관의 토대 위에서 박정희 정부가 가혹하게 인권을 탄압한다고 판단했으며, 따라서 탄압받는 사람들을 위해 직접 행동에 나섰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교회가 사람들의 기쁨과 희망 · 슬픔과 번뇌를 함께 나누고, 그중에서도 가난한 사람들과 희로애락을 같이할 때 비로소 구원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근거한 것이었다.22)

 

사실 박정희 정부는 국민들과의 계약으로 권력을 위임받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 쟁취했다고 여겼기 때문에 ‘인권’ 문제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상대적으로 결여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김수환 추기경은 1971년 성탄 자정 미사 강론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화 움직임을 경고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의 한가운데 서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김수환 추기경과 박정희 대통령을 대척점으로 하는 1970년대의 상황은 그리스도교적인 가치가 점차 대한민국 사회의 주류적 가치로 자리 잡아 가고 있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서 살아서 작용하는 민주주의가 정착될 수 있었던 것이다.

 

3선 개헌을 거쳐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박정희는 그해 연말 ‘국가 보위에 관한 비상 대권’을 노골적으로 요구하면서, 독재화의 길에 빠져들고 있었다. 이에 김수환 추기경은 KBS-TV로 전국에 생중계되는 그해 성탄 자정 미사 강론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정부와 여당에 묻겠습니다. 비상 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한 일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대통령한테 막강한 권력이 가 있는데, 이런 법을 또 만들면 오히려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그렇게 되면 국가 안보에 위협을 주고, 평화에 해를 줄 것입니다.…”23)

 

자칫 중대 사태로 확대될 뻔한 이 발언은 다음 날 발생한 대연각 호텔 화재 참사사건으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1972년 10월 17일 이른바 ‘10월 유신’이 선포되고 1974년 1월부터는 대통령이 긴급조치령 발동으로 공포 분위기가 온 사회를 뒤덮기 시작했다. 이때의 상황을 그는 “무릎을 꿇고 순응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꼿꼿이 서서 항거함으로써 퇴학, 퇴직, 또는 구속으로 옥살이 또는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하는 삶과 죽음 중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는 공포 분위기”라고 회고했다.24) 이런 가운데 수많은 인권유린 사건이 일어났고, 이에 저항하여 인권 수호와 사회정의를 외치는 소리가 대학 · 언론계 · 노동계와 재야 정치인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교회도 그냥 방관자로 있을 수만 없는 상황이었다. 전통을 존중하는 가톨릭교회는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현실정치 참여를 피하는 보수적인 성향임에도 불구하고 인권과 사회정의 구현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따라 “교회가 인간 존엄성을 짓밟는 악과 불의에 저항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인권과 사회정의를 위한 일이라면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25)고 강조했으며, 실제로 그렇게 했다. 박정희 정권의 이른바 ‘7.4 남북 공동성명’과 ‘8.3 긴급 조치’가 나오자마자, 8월 9일26) 주교회의 의장 자격으로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에서 <난국 수습을 위한 제안>을 발표하였는데,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우리는 7.4 남북 공동성명이 영구히 전쟁 수단을 포기하고 대화로써 조국 통일을 달성하는 디딤돌이 되기를 절실히 소망하면서, …우리는 끈질긴 인내와 동포애로써 북한 동포들에게 근원적으로 봉쇄된 자유와 민주에의 갈망을 심어 주고, 그들의 인간적 고통을 덜어 주는 데에 최선을 다하는 노력을 계속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실시된 8.3 긴급 재정명령으로 야기된 현실 앞에서, 정부의 보호와 특혜에도 불구하고 국가 경제를 이 지경으로 몰아붙인 책임 있는 기업인들에게 국민의 이름으로 엄중히 문책함과 동시에, 경제 제일주의를 표방한 정부가 국가를 파산지경으로 이르도록 무책임하게 영도해 온 데 대해 피를 바쳐 나라를 지키고 땀을 바쳐 봉사해 온 모든 애국 시민의 이름으로 엄중히 항의하고 맹성을 촉구한다. …앞으로의 남북 대결은 폭력이나 정치 조작이 아니고 인간관의 확립과 민주 역량의 배양으로 판가름날 것이다. …민주 사회의 힘은 자유 시민의 단합된 의지의 총화이다. 국민의 동의와 신뢰를 받는 정부가 있고, 헌신적으로 국가를 사랑하고 지키는 충성된 백성이 있을 때 그 국가는 막강하다. 국민이 개인으로나 단체로서 국가 생활과 국가 통치에 실질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끔, 언론 · 출판 · 집회 · 결사 · 신교(信敎)의 자유를 보장하고, 공명한 선거와 균등한 기회와 안정된 환경을 확보하는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길만이 남북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는 담보임을 우리는 굳게 믿는다. …사회의 안정과 질서를 흔드는 비상 조처를 남발하는 권력의 폭주를 엄계(嚴戒)하고, 소수의 극한 대립과 다수의 횡포로 일관하는 정치 풍토를 근본적으로 쇄신하기를 읍소하는 바이다.”27)

 

요컨대 그는 1인 장기 집권체제의 부당성과 위험성을, 그리고 자본주의 기본 원칙을 무시한 채 약자들의 희생만을 강요하는 재벌보호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던 것이다. 사실 김수환 추기경과 박정희 대통령은 다같이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렇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정권유지’라는 정치적 목적에서 그러하였다면, 김수환 추기경은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에 입각하여 공산 정권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던 북한 주민을 해방시키고자 반대하였다. 지향하는 바는 서로 같았지만, 동기나 목적은 전혀 달랐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남북 대화 자체를 비판했던 것이 아니라 7.4 남북 공동성명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비판하면서, 평화 통일을 위한 진정한 대화를 요구했던 것이다. 아울러 그러한 대화를 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우리 사회의 민주적 역량을 키울 것을 주장했다.

 

급기야는 교회와 정치권력이 정면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하고야 말았다.28) 유신정권이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시켜 지학순 주교를 구속했던 것이다. 김 추기경이 박 대통령을 면담한 뒤에야 지학순 주교가 풀려날 수 있었다.29) 김수환 추기경은 이때(1974년 7월) 박정희 대통령과의 면담을 “가장 뜻깊은 만남”30)이었다고 회고하였다. 그런데 이 면담에서 박 대통령은 “종교란 마음을 순화시키는 것이 목적이지 정치 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안다”고 하면서 ‘정교분리’ 원칙을 강조한 반면, 추기경은 “교회는 한 사회의 윤리와 도덕의 파수꾼도 되어야 하고 그것의 향상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국민생활의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정치와 경제가 윤리 도덕의 범주 밖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인권의 유린이나 불의에 대해 개입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31) 이러한 입장 차이는 단순히 정치문제에만 국한되었던 것이 아니라 언론 자유 · 노동문제 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가톨릭교회의 복음정신에 입각한 인간관 · 사회관 · 국가관 · 세계관에 따르면,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존엄한 존재이고, 이 존엄성은 국가의 권력도 침범할 수 없다는 것이 김수환 추기경의 주장이었던 것이다. 그는 더 나아가 정치는 이러한 인간이 개개인으로 또는 가정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공동체로서 인간답게 살 수 있고 인간으로서 충분히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정치의 원리라고 하면서 유신정권의 독재를 비판하였다. 이러한 김수환 추기경과 박정희 대통령 사이의 갈등과 대립은 ‘유교 중심의 가치관’과 ‘그리스도교 중심의 가치관’이 아직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유신체제가 내세운 이른바 ‘한국적 민주주의’와 김수환 추기경 등이 강조하였던 민주주의 사이의 간극은 여전하였던 것이다.

 

崔一南 동아일보 편집부국장이 1970년대 한국의 민주화에 큰 역할을 한 데 대해 가톨릭이 자부심을 갖고 있는지를 김수환 추기경에 묻자, 그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종교인의 양심에 근거한 어쩔 수 없는 “종교적인 動因”에서 그렇게 행동했다고 대답하였다. 말하자면 진보나 보수라는 단순 논리를 떠나 종교가 지닌 바탕으로서의 그리스도교적 인간애에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었다.32)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기를 고대할 수밖에 없는 억압 속에 묶인 암울한 때에 사제가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침묵을 지킬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33) 교회와 사회의 관계에 대한 그의 인식은 아래의 기록에서 보다 분명히 살필 수 있다.

 

“교회도 사회도 결국은 인간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 아닙니까. 교회는 신자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사람과 함께 동고동락함으로써 구원의 기능을 다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降生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자명해집니다. 하느님의 아들인 그리스도는, 인간의 탈만 쓰고 온 게 아니라, 바로 인간이 되어서 오신 겁니다. 천대받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당신 자신을 낮추시고, 인간생활의 저변으로 내려오신 겁니다. 그리고 그런 인간들을 구하려다 보니 자연히 정치 · 경제에도 관심을 갖게 되고, 그러다 보니 그 시대의 권력과 충돌하게 된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가 너무 사회문제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고 할지 모르나, 오늘의 가톨릭은, 어디까지나 성서의 가르침대로, 정의롭고 밝은 사회를 위해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려는 거지요.”34)

 

말하자면 교회는 인간 존엄성을 짓밟는 악과 불의에 저항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인권과 사회정의를 위한 일이라면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활동을 통하여 점차 그리스도교에 바탕을 둔 가치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으며, 그 결과 한국사회에 더욱 확고하게 민주주의가 뿌리 내릴 수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1980년대에 들어서서도 6.10 항쟁 때 명동 성당 공권력 투입의 위기를 단호하게 극복했던 것처럼 변함없이 정치를 비롯한 현실문제에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지만 6월 항쟁 이후 사회 민주화가 크게 진전되면서 명동 성당이 점차 이익집단들의 단골 농성장으로 변해 각종 부작용이 발생하자, 일정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1993년 이른바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1995년 현충일 경찰의 명동 성당 난입사건을 제외하고는, 더욱 정치적 입장이나 행동을 취할 필요성이 줄어들게 되었다. 대신 이익집단들에 의한 우리 사회의 진실성 결여 현상을 가슴 아파해야 하였다.35)

 

 

4. 김수환 추기경과 노동자 · 농민운동

 

김수환 추기경이 본격적으로 노동자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계기는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총재 주교로 겸임할 때였다. 그의 생각을 지배하는 가장 커다란 주제는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의 백성인 ‘인간’ 문제였다. 이러한 신념은 1970 · 1980년대를 온몸으로 겪는 동안에도 “절대적 판단기준”으로 작용했다.36) 가톨릭노동청년회 총재 주교 자격으로 1967년에 발생한 강화도의 심도직물사건에 개입한 것도 기업주가 노동자들을 독립된 인간이 아니라 단순한 ‘생산 도구’로만 간주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들의 인권을 옹호하기 위해서였다.

 

1967년 5월 강화도 심도직물에 섬유노조 심도분회가 결성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강화 본당 가톨릭노동청년회 회원들이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주임 전 미카엘(Michael J. Bransfield) 신부는 회합 장소를 빌려주는 등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이에 사장 김재기는 가톨릭 신자이자 조합원 16명을 해고하고, 사태를 천주교회의 탓으로 돌리면서 일방적으로 휴업 조치를 단행하였다. 더 나아가서는 강화도 소재의 21개 직물회사들은 가톨릭노동청년회 회원들을 고용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경찰이 나서서 전 미카엘 신부를 연행하여 사과를 강요하는 한편, 나길모(William John McNaughton, 羅吉模) 인천 교구장에게 전 미카엘 신부를 다른 곳으로 발령 내도록 강요하였으나, 나 주교는 이를 거부하고는 <특별 메시지>를 발표하여 사건의 진상과 교회의 입장을 밝혔다.37)

 

김수환 주교도 가톨릭노동청년회 총재 자격으로 교회와 노동자들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그들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38) 이어 그는 나길모 주교와 함께 1968년 2월 9일 임시 주교회의 개최를 주도하여 14명의 주교가 서명한 <강화도 사건에 대한 주교단 공동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인간 기본권은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수호되어야 한다면서, 미카엘 신부와 노동자들의 활동을 지지하였다. 성명서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교회는 그리스도교적 사회 정의를 가르칠 권리와 의무가 있으며, 특히 노동자의 권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목자로서의 신부는 이러한 정의와 권리를 가르칠 책임이 있습니다. …노동자들은 노조 조직을 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은 가족 부양에 알맞은 상당한 보수를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경영자들은 그들의 이익에서 상당한 몫을 노동자들에게 분배해야 할 것입니다. …노동자들에게 적은 임금을 줌으로써 국가가 부강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중대한 오류입니다. 또 적은 보수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긴 작업시간과 연소 노동자의 합당치 않은 노동 조건은 사회에 있어 좋지 못한 일입니다. 경영자와 노동자들이 함께 이러한 잘못을 근절할 본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가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호할 의무가 있으며, 이러한 보호가 없으면 비도덕적인 권력가가 자기들 개인적인 이익을 위하여 사회적인 혼란을 뒤따르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노동자의 기본적인 존엄성과 권리를 존중하고 이 존엄성과 권리를 강화하는 데 능동적으로 관여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뜻에 따라 국가가 발전할 것입니다.39)

 

이 성명서가 발표되고서야 정부가 사태 수습에 나섰고, 마침내 2월 16일 강화 직물업자협회가 사과문을 발표하고 해고자들의 전원 복직을 약속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40) 이 성명서는 한국 천주교회가 사회정의와 노동자의 인권 신장 · 권익 옹호를 위해 발표한 최초의 성명서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후에도 전태일 분신자살 · 동일방직 파업사태 등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생존권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절규가 끊이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이 성명이 “사회 정의와 노동자 인권 신장에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고 평가했지만,41) 한국 천주교회가 교회 바깥을 향하여 눈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천주교회사에 기록될 만한 문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후 김수환 추기경은 일방적으로 부당한 억압을 당하는 노동자 문제에 조금도 소홀하게 대하지 않았다. 1970년대 야만적이다시피 한 노동조합 탄압 사건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가운데 1978년 인천의 동일방직 노조탄압사건이 발생했다.42) 이는 1970년대 노동 현장의 암울한 현실과 자본가와 권력집단의 횡포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그가 이때 기업주와 정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명동 성당으로 찾아온 동일방직의 여성 노동자들을 편들었던 것은 “그들이 강도를 만나 쓰러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43)이었다.

 

노동자 문제에 대한 그의 인식은 1974년 7월 박정희 대통령과의 면담 때 발언한 내용에 잘 드러나 있다.

 

“우리나라는 아직 실업자가 많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제대로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혹사를 당하고 사용주 임의로 해고될 수도 있는 등 전혀 보장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물질이 공장에 들어가면 좋은 상품이 되어 나오는데 사람이 공장에 들어가면 폐품이 되어 나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노동 현장의 현실이어서 노사 간에는 잦은 갈등과 분규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대립 상황에서는 힘이 센 편이 결국 이기기 마련인데, 그것은 언제나 사용주입니다. 왜냐하면, 사용주는 본래 개개인 노동자에 비하면 엄청나게 큰 강자인데, 거기다 중앙정보부, 경찰, 심지어 노동자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만들어진 노동청까지 기업주 편입니다. 노동자 편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대통령은 …가난하게 자란 분이었기에 5.16 군사혁명을 일으켰을 때에는 이 땅에 가난을 없애겠다는 빈곤 퇴치의 결의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뜻을 지닌 대통령이 노사분규 현장에 나간다면 나는 반드시 노동자 편을 들고 그들의 고충을 들어주리라 생각합니다. 교회가 하는 것은 바로 대통령이 해야 할 그 일입니다.”44)

 

위의 기록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는 이처럼 ‘인간이 없는 경제개발계획’을 비판했다. 즉 공장의 규모 · 시설 · 생산과 수출 등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였지,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들에 발생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다는 점을 지적했던 것이다.45) 그는 박정희 대통령 이후 이른바 ‘군사정권시대’ 가 ‘한강의 기적’이라고 일컫는 경제발전을 이룩한 시대였지만,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의 기억 속에 아픔으로 남아 있을 만큼 압제가 격심했던 시대이기도 했다고 평가하였다.

 

절대 빈곤에서 탈출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했던 부득이한 희생이었다는 주장에 대해 그는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로 인한 희생이 아니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오히려 막강한 권력에 의한 통제된 분위기 속에 강요된 희생이었고, 많은 경우에 불필요할뿐 아니라 부당하고 불법적이기까지 한 인권유린이었다. 이 때문에 국민의 참여 의욕은 오히려 감소되었고, 특히 인권유린과 사회정의 부재는 너무나 많은 이의 삶을 고통 속에 좌절하게 했으며, 정경유착과 권력형 부정부패를 만연시켰던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外華內貧과 物神主義의 전도된 가치관이 확산되었다고 보았다.46) 이처럼 1970년대 김수환의 관심은 일관되게 “인간에 대한 가치”에 있었다.

 

이러한 그의 발언과 행동 때문에 심지어 가톨릭이 ‘좌익’이라는 비난까지도 감수해야만 하였다. 1979년 여름에 발발한 ‘오원춘 사건’도 예외는 아니었다. 불량 씨감자로 피해를 입은 안동교구 영양군 춘기면의 가톨릭농민회 지부장 오원춘이 당국을 상대로 피해 보상을 받아낸 사실이 알려지자, 경찰이 그를 불법으로 연행했던 사건이었다.47) 이에 안동교구 신부들이 반발하자, 오히려 정부는 근거 없는 사실을 왜곡 · 날조해 사회 불안을 야기한다고 매도했다. 유신 정권은 이를 계기로 가톨릭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하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 천주교 안동 교구장이었던 두봉 주교는 추방을 위협받고 있을 정도였다. 이에 김수환 추기경은 직접 안동 성당에서 열린 시국 기도회에 참석하고는, 강론을 통하여 정부의 농민운동 탄압을 강하게 비판했다. 사회의 민주화가 진전된 이후에도 변함없이 산업화 · 도시화 과정에서 구조적으로 소외당한 농민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거두지 않았다. 결국, 그는 그리스도교의 인간관과 세계관에 입각하여 건전한 자본주의를 정착시키고자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조건 없는 애정과 관심을 쏟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현실의 경제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게 된 배경에는 아래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인류의 共同善을 추구함으로써 분배의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그의 경제관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적으로 가진 사람들은 심지어 이데올로기마저 초월해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다국적기업이란 것이 반드시 서구에만 손을 뻗치는 게 아니라 동구에까지 뻗치고 있단 말입니다. 그 반면에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한 사회 안에서도 그렇고 국제적으로도 서로 연결이 안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가진 사람들과 가지지 않은 사람의 상태를 지속시키는 어떤 세계질서랄까, 이걸 쥐고 있는 사람이 결국 돈 가진 사람, 권력 가진 사람이고, 그게 참된 평화를 주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위협하고 있는 상태거든요. 그럼 이것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 …결국 이런 면에서도 교회가 참되게 손을 잡고 인간화, 즉 한 사회의 共同善을 추구해 가야 하리라 봅니다. …어떻든 그런 공동선을 추구하면서 현재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질서를 바꿀 힘은 역시 전체적으로는 종교계의 뜻을 가진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핵심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결국 기독교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48)

 

이러한 인식에 바탕을 두고 그는 한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 - 고용주이든 고용자이든 간에 - 모두가 인간에 관한 가치관을 건전하게 파악해 주기를 염원하였다.49) 즉, 부의 공정한 분배를 통한 사회정의를 추구했던 것이다. 그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경제활동의 바탕에 깔리게 된다면, 노사문제를 비롯한 모든 갈등 요소들이 해소될 수 있다50)고 보았던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노동자와 농민 문제에만 관심을 쏟았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장애인 · 빈민 · 고아 · 무의탁 노인 · 재소자 등 사회로부터 버림받았거나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예수님 사랑을 가장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51)이라고 했다. 그랬기 때문에 힘들고 바쁜 와중에도 틈나는 대로 이들을 찾아갔으며, 언제나 성탄 전야에는 이러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고자 했다. 그에게 사회적 약자들이란 단순히 경제적으로 궁핍하거나 정치적 · 사회적으로 핍박받는 사람들만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면, 빈부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달려갔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가 일관되게 지향했던 것은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에 입각한 인간의 구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인간 이상의 초월자이신 창조주가 ‘나’라는 생명을 당신의 영원한 의도와 계획 속에서 창조하여 주심으로써 내가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인간 안에 불가침의 존엄성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인간 안에 있는 神的인 것을 인정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이다.52) 더 나아가서 그는 양심을 “인간의 가장 내면 깊이에 있는 인간이 하느님과 만나는 거룩한 장소, 聖所”53)라고 규정하였다. 바로 이러한 점이 이 땅에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에 토대를 둔 현대 민주주의를 뿌리내리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했던 것이다.

 

 

5. 맺는말

 

김수환 추기경은 한국 근현대사를 넘어서 한국사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태어나 성장했으며, 그가 교회의 지도자로 활동하던 시기, 특히 1966년 마산 교구장을 거쳐 서울 대교구장에 착좌한 이후의 한국사회는 국가적으로 약동하는 경제 성장과 분출하는 민주화의 에너지가 거침없이 발산되고 있었으며, 교회 역시 이전에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가장 역동적인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그는 교회 안으로는 “평신도도 신부 · 수녀와 똑같은 하느님 백성”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한편, 교회 밖으로는 이제까지 세속의 일에 무관심한 채 교회를 위한 교회에 머무르고 있던 점을 반성하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세상 한가운데로 나가 봉사하는 하느님 백성으로 거듭 태어날 것을 제안했으며, 앞장서서 모범을 보였다. 김수환 추기경 등의 노력으로 가톨릭교회는 한국사회의 갈등을 조정하는 중재자 역할을 담당하면서 온전하게 전통적 가치와 조화를 이루면서, ‘한국의 종교’로 재탄생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교회 안을 포함한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약자의 보호자로서뿐만 아니라 사회적 갈등의 치유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던 인물로 볼 수 있다.

 

김수환 추기경 자신은 1998년 서울대교구 교구장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한 일에 대해 “겨우 낙제점을 면할 정도”54)였다고 했지만, 그는 한국 현대사의 고비 고비마다 사회적 약자 편에 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충실히 따르는 파수꾼 역할을 하였고, 더 나아가서는 예언자적 메시지를 통해 한국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하였다.55) 그의 사목 표어인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에서 드러나 있듯이 생애와 활동을 한국 천주교회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의 구성원 모두를 위해 바쳤으며, 그 결과 18세기 이래 유교의 가치관, 즉 인간관과 우주관에 끊임없이 도전했던 그리스도교의 가치관이 주류적 가치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되었다. 200여 년에 걸친 그리스도교와 유교의 갈등과 대립은 마침내 화해와 조화를 이루면서 한국사회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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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장우, <黃嗣永과 朝鮮後期의 社會變化>, 《敎會史硏究》 31, 2008, 99~101쪽 참조.

 

2) 이 문제에 대해서는 金眞召, <일제하 한국 천주교회의 선교 방침과 민족의식>, 《敎會史硏究》 11, 1996 및 金貞松, <일제하 민족 문제와 가톨릭교회의 위상>, 《敎會史硏究》 11, 1996 참조.

 

3) <가난한 옹기장수의 막내아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평화방송 · 평화신문, 2009, 54~55쪽.

4) <어머니 손에 이끌려 신학교로>,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평화방송 · 평화신문, 2009, 57~61쪽.

5) <신학교에서 나가겠습니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68~71쪽 참조.

6) 김수환과 게페르트 신부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적개심에 불타는 유학생>,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79~83 및 86~87쪽 참조.

 

7) 김수환 추기경에 관해서는 우선 아래의 평전이 참고된다.

· 김수태, <교회와, 민족과 함께 -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 한국교회사연구소, 《김수환》, 천주교 서울대교구, 2001, 360~371쪽.

그리고 2009년 9월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주최한 국제학술심포지엄에서 “아시아 교회의 리더십 - 故 김수환 추기경을 추모하며 -”라는 주제 아래 모두 10개 논고가 발표되었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강우일, <김수환 추기경의 삶과 비전>

· 이장우, <사진 자료들을 통해 본 김수환 추기경의 생애와 활동>

· Jeffrey Chang, “Cardinal Kim and the FABC Vision of Ordained Ministry”

· Geoffrey King, “Bishops and Governance : Vatican II and the Code of Canon law”

· Jose Mario C. Francisco, “Cardinals Kim and Sin in Context : A Hermeneutics of Pastoral Leadership”

· Edmund Ryden, “A Tale of Two Cardinals : Manning and Kim”

· Bernard Senecal, “Cardinal Kim and Interfaith Dialogue : The Potentialities of Buddhist - Christian Encounter in South Korea”

· 이정배, <개신교 신학자가 본 김수환 추기경의 에큐메니칼 신학>

· 김우선(Denis Kim), “For You and for All(Pro Vobis et Pro Multus) : Stephen Cardinal Kim, Church and Civil Society”

· 박병관, “Toward ‘aggressive fidelity’ to Vatican II : Stephen Cardinal Kim’s Spirituality, Contextualized and Interpreted”

 

8) 주로 아래의 자료들을 이용하여 이 글을 작성하였다.

· 《대화집 김수환 추기경》, 1981, 지식산업사.

·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 - 김수환 추기경의 명상록 -》, 사람과 사람, 1999.

· 《김수환 추기경 전집》 1~18, 가톨릭출판사, 2001.

·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평화방송 · 평화신문, 2009.

 

9)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 연보>, 한국교회사연구소, 《김수환》, 천주교 서울대교구, 2001, 372쪽 ;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평화방송 · 평화신문, 2008, 134~172쪽 참조.

 

10) <밀린 구독료 받으러 다니는 신문사 사장>,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175~178쪽 참조.

11) <나의 첫 사랑 마산교구>,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194~195쪽 참조.

12) <서울대교구장에 오르다> · <길고 험난했던 서울대교구장 30년>,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207, 216쪽 참조.

13) 《신동아》 1969년 7월호 ; <온유한 사람>, 《대화집 김수환 추기경》, 1981, 지식산업사, 40~41쪽.

14) <서울대교구장에 오르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평화방송 · 평화신문, 2008, 211쪽.

15) <사제 수품 15년 만에 주교로>,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평화방송 · 평화신문, 2008, 190~191쪽 참조.

16) <교회 일치와 비그리스도교와의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 《서울대교구사》, 천주교 서울대교구, 2011, 265~266쪽 참조.

17) <이 민족에게 희망을>, 《대화》 1976년 1월호 ; 《대화집 김수환 추기경》, 1981, 지식산업사, 95~96쪽 참조.

18) <유교와 천주교의 만남>, 《김수환 추기경 전집》 17 - 말씀의 이삭 -, 가톨릭출판사, 328~333쪽.

19) 《조선일보》 2000년 5월 31일자 7면.

20) <종교간 대화, 젊은이들에게>,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평화방송 · 평화신문, 2008, 445쪽 참조.

21) <자유를 위한 사색>,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 - 김수환 추기경의 명상록 -》, 사람과 사람, 1999, 204~207쪽 참조.

22) 《동아일보》 1979년 12월 24일자 ; <양심은 인간이 神과 만나는 장소>, 《대화집 김수환 추기경》, 1981, 지식산업사, 140쪽 참조.

23) <내가 만난 박정희 대통령>,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평화방송 · 평화신문, 2008, 219쪽.

24) <가장 힘들었던 순간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 - 김수환 추기경 명상록 -》, 사람과 사람, 1999, 18쪽 참조.

25) <내가 정치를 좋아한다고?>,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평화방송 · 평화신문, 2008, 244~245쪽 참조.

 

26) 《김수환 추기경 전집》에 따르면, 이 메시지는 1972년 8월 15일에 발표한 것으로 되어 있다(<현 시국에 부치는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 전집》 12 - 한국 교회와 민족의 복음화 -, 가톨릭출판사, 2001, 403쪽). 

 

27) 《김수환 추기경 전집》 12 - 한국 교회와 민족의 복음화 -, 가톨릭출판사, 2001, 404~406쪽.

김수환 추기경은 같은 날 이와는 별개로 발표한 <현 시국에 부치는 메시지>에서 “…지난 연말 비상사태 선포와 연이어 변칙 통과한 보위법(保衛法)을 비롯하여 최근 예측 불능의 상태에서 발표된 7.4 남북 공동성명과 다시 지난 8월 3일에 공포된 비상 재정 긴급령 등에 접하여 정부는 도대체 이 나라를 어디로 이끌고 가려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다. …7.4 성명의 진의는 무엇인가? …전쟁은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므로 전쟁 방지도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명제 아래 7.4 성명으로 말미암은 남북 대화를 근본적 마음의 변화 없이 평화 위장의 전쟁 준비 수단, 또는 권력 정치의 ‘은폐된 혁명’의 기만 전술로 역용하려는 유혹이 추호라도 있다면, 이를 마음 속에서 뿌리쳐야 할 것을 애국 시민과 더불어 엄숙히 경고한다. …그동안 개발도상국에서 생긴 자본주의적 물질 만능 풍조나 황금 숭배의 물신적 사조를 그대로 덮어둔 채 북한의 유물론자들과의 이념 대결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둘 수는 없다. …8.3 조치가 짐짓 무엇을 가져올지 구체적인 평가를 내리기는 아직 이르나 이것이 결과적으로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을 더욱 격화시키는 졸속한 경제 정책이 될 독소가 많다고 보며, 이런 독소는 과감히 제거해야 함을 우리는 거듭 강조한다. …우리 자유 대한의 힘의 원천은 국민이다. 국민의 동의와 신뢰를 받는 나라가 있고, 목숨 바쳐 지키고 사랑하는 가치와 충성된 국민이 있을 때, 우리의 힘 앞에는 누구도 대적할 수 없다. 국민이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 국가 생활과 국가 통치에 참여할 수 있게끔 그 기본 인권과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 언론의 자유, 선교의 자유를 비롯하여 공명하게 주권행사를 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될 때, 이것만이 우리 대한의 양보할 수 없는 원칙이며, 국민총화를 이룩하고, 남북 대결에서 항상 승리할 수 있는 담보임을 우리는 굳게 확신한다. 우리는 이 땅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이 같은 정신 바탕에서 죽어 가는 민주주의의 재생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을 간절히 호소한다”고 하였다(《김수환 추기경 전집》 12 - 한국 교회와 민족의 복음화 -, 가톨릭출판사, 2001, 397~403쪽).

 

28) 흔히 1970 · 1980년대의 이러한 교회와 정부 공권력의 대립 · 충돌을 ‘교회와 국가의 대립’이라는 관점으로 파악하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국가와 교회는 수평적인 대칭 관계에 있지 않다.

 

29) 그런데 추기경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지학순 주교는 다시 ‘양심선언문’을 발표하고는 다시 구속되었다가 1975년 2월 15일 석방되었다. 이 과정에서 젊은 사제들을 중심으로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결성되어 시국 선언과 거리 행진을 주도하자, 이에 대해 중견 · 원로 사제들을 중심으로 ‘구국사제단’을 결성하여 다른 목소리를 내면서 교회는 이념 논쟁에 휘말리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평신도 공화당원으로 이루어진 ‘대건회’가 결성되는 등 신자들도 분열의 조짐을 보였다. 이 때문에 추기경은 양쪽 사이에서 난처한 입장에 빠지기도 했다. 그 무렵 김수환 추기경이 정의구현사제단의 대부라는 소문도 나돌았지만, 자신은 분명히 아니라고 하였다. 오히려 시국 기도회를 열려는 신부들을 말리고, 그들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때에는 따끔하게 야단을 치기도 했다. 다만 그들의 거듭된 요청에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참석한 적이 있다고 회고하였다(<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과 투옥> · <유신 정권을 향해 포문을 열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평화방송 · 평화신문, 2008, 256~268 · 282~284쪽 참조).

 

30) <대통령과의 대화>,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 - 김수환 추기경 명상록 -》, 사람과 사람, 1999, 44쪽.

 

31) <대통령과의 대화>,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 사람과 사람, 1995, 46~47쪽 ;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과 투옥>,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평화방송 · 평화신문, 2008, 259~263쪽 참조.

 

32) 《동아일보》 1979년 12월 24일자 ; <양심은 인간이 神과 만나는 장소>, 《대화집 김수환 추기경》, 1981, 지식산업사, 140쪽 참조.

33) <가장 힘들었던 순간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 - 김수환 추기경 명상록 -》, 사람과 사람, 1999, 25~26쪽 참조.

34) 《동아일보》 1979년 12월 24일자 ; <양심은 인간이 神과 만나는 장소>, 《대화집 김수환 추기경》, 1981, 지식산업사, 141쪽.

 

35) <나를 밟고 지나가시오> · <공권력에 짓밟힌 한 뼘 성역>,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평화방송 · 평화신문, 2008, 367~376, 401~406쪽 참조.

 

36) <한국교회 최초의 시국 담화문 발표>,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평화방송 · 평화신문, 2008, 198쪽 참조.

37) 《가톨릭시보》 1968년 1월 28일자 ; 명동천주교회, 《한국가톨릭인권운동사》, 1984, 50~53쪽 참조.

38) 《가톨릭시보》 1968년 1월 28일자.

39) 明洞天主敎會, 《韓國가톨릭人權運動史》, 1984, 53~54쪽.

40) 《가톨릭시보》 1968년 2월 25일자 및 인천교구사 편찬위원회 · 한국교회사연구소, 《인천교구사》, 1991, 280쪽 참조.

 

41) <가장 힘들었던 순간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 - 김수환 추기경 명상록 -》, 사람과 사람, 1999, 18∼19쪽, <한국 교회 최초의 시국 담화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평화방송 · 평화신문, 2008, 198쪽 참조.

 

42) 이 사건에 관해서는 明洞天主敎會, 《韓國가톨릭人權運動史》, 1984, 474~492쪽 참조.

43) <동일방직 노조탄압 사건에 뛰어들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평화방송 · 평화신문, 2008, 295쪽 참조.

44) <대통령과의 대화>,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 - 김수환 추기경 명상록 -》, 사람과 사람, 1999, 49~50쪽.

45) 《대화》 1976년 1월호 ; <이 민족에게 희망을>, 《대화집 김수환 추기경》, 1981, 지식산업사, 108쪽 참조.

 

46) 이상은 <가장 힘들었던 순간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 - 김수환 추기경 명상록 -》, 사람과 사람, 1999, 17쪽 ; <내가 정치를 좋아한다고?>,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평화방송 · 평화신문, 2008, 245쪽 참조.

 

47) 이른바 ‘오원춘 사건’에 대해서는 明洞天主敎會, 《韓國가톨릭人權運動史》, 1984, 550~594쪽 참조. 

48) <이 민족에게 희망을>, 《대화집 김수환 추기경》, 1981, 지식산업사, 106쪽.

49) 《동아일보》 1979년 1월 1일자 ; <우리는 지금 길을 찾아야 한다>, 《대화집 김수환 추기경》, 132~133쪽 참조.

50) 《주부생활》 1981년 11월호 ; <여성과 정치>, 《대화집 김수환 추기경》, 199~200쪽 참조.

51) <사형수 최월갑과 희망원>,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평화방송 · 평화신문, 2008, 184쪽.

52) 《조선일보》 1978년 2월 21일자 ; <자신을 회복해야 한다>, 《대화집 김수환 추기경》, 1981, 지식산업사, 122쪽 참조.

53) 《조선일보》 1978년 2월 21일자 ; <자신을 회복해야 한다>, 127쪽.

 

54) <길고 험난했던 서울대교구장 30년>, <30년 무거운 짐을 내려놓다>,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평화방송 · 평화신문, 2008, 255, 411쪽 참조.

 

55) 김수태, <교회와, 민족과 함께 -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 한국교회사연구소, 《김수환》, 천주교 서울대교구, 2001, 361쪽 참조.

 

[교회사 연구 제36집, 2011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이장우(한국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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