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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중국 교회와 서양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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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58

중국 교회와 서양 과학

 

 

유라시아 대륙이라는 거대한 육지의 양 끝에 자리한 동양과 서양의 문화는 고대부터 접촉이 있어 왔지만 간헐적이었으며, 서양측이 영향을 받았다. 16세기 이후 동서 교류는 새로운 양상을 띠는데, 본격적이고 지속적인 교류가 시작되면서 동양이 서양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마테오 리치 - 중국 교회의 창설자

 

당(唐), 원(元), 명(明)말에 걸쳐 그리스도교가 전래되었는데, 당 · 원 시대의 그리스도교는 성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종교 사상사에 남긴 자취가 없으며, 명말과도 전혀 연결되는 바가 없다.

 

당조에 전래된 경교는 200여 년 간 성행하다 박해로 무너졌고, 두 번째 전교는 원시대에 이뤄졌는데, 경교가 재차 전래되고 가톨릭인 프란치스꼬회 선교사들도 입국하였다. 그러나 원의 멸망과 더불어 전교도 끝났고, 명말 마테오 리치가 입국할 당시 경교는 물론 프란치스꼬회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근세 그리스도교의 중국 전교는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재개되었다. 성 프란치스꼬 사베리오의 중국 입국 실패 후 마테오 리치가 그 뒤를 이었는데, 이것이 17세기 이후 수많은 교난을 극복하고 지금까지 존속하는 중국 교회의 시작이다.

 

마테오 리치(Matteo Ricei; 리마두; 1552~1610년) 신부는 1582년 마카오에 도착한 뒤, 1583년 루지에리와 함께 조경에 들어가 전교하였다. 당시 외국인이 입국 허가를 받으려면, 정식 조공 사절단이거나 또는 사신이 동반하고 온 상인, 혹은 중국의 문화 · 정치를 흠모하여 온다는 것 중 하나에 해당되어야 했는데, 리치 일행은 세 번째 조건으로 입국 허가를 받았다.

 

조경에서 전교하던 리치는 중국에서 전교하려면 반드시 중국인들의 존경을 먼저 획득하여야 하며, 그 최선의 방법이 중국에는 알려지지 않은 서양의 유용한 자연 과학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리치는 로마 대학에서 당대의 제일가는 수학자인 그라비우스에게서 평면 기하학, 천문 역산학 및 해시계, 자명종(시계), 지구의, 천체 관측기 등의 제작을 배웠던 실력으로 우선 지구 전도인 산해만국여지전도(山海萬國與地全圖)를 제작하였다. 당시 중국의 세계 전도는 가운데에 중국만이 크게 자리잡고, 동쪽에 9이(夷), 남쪽에 8만(蠻), 서쪽에 6융(戎), 북쪽에 5적(狄)으로 모두 미개인 아니면 오랑캐들로 표기되어 있었다. 리치의 세계 전도는 중국 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나 동시에 중국 이외에도 다른 넓은 세계가 있음을 인식시켰다.

 

리치는 1601년 북경에 들어가 명 선종에게 조공품과 표문(表文)을 바친 후 체류를 허가받았다. 여러 중국 학자들과 교유하며 그리스도교 교의와 서양 학술에 관하여 담론하고 아울러 종교, 과학 서적도 한문으로 저술하는 등 본격적으로 전교하다가 1610년 북경에서 사망하였다.

 

리치의 전교 방법은 ‘리치 스타일’로 불리는 바, 먼저 중국 문화에 깊이 적응하는 것이었다. 즉 중국의 언어와 생활 관습 사용, 고전 연구, 중국식 성명 사용 등을 통하여 철저히 중국화했다. 당시 타 선교회와는 다른 선견적인 이 방법은 예수회 선교사들만이 중국 선교에 성공하게 했다.

 

둘째로는 중국의 사상적 전통에 대해 대단히 적극적인 입장 표명을 했다는 점이다. 즉 그리스도교가 유교와 부합됨을 주장했는데, 교리와 큰 충돌이 없는 한 중국 고유의 사상과 의식을 허용하고 조상에 대한 제사도 종교 행위라기보다는 국민 의례적 습속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셋째로는 서양 과학을 전교의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것이며, 이것이 가장 큰 요인이 될 수 있다. 리치는 중국 문화의 기반과 사상 전통이 유구하고 또한 중화주의가 뿌리깊어서 선교가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활동 초기에 이미 깨달았다. 이에 서양 과학 기구의 제조와 과학 서적의 찬술, 그중에서도 천문과 역법에 이바지하여 중국에 필요 불가결한 존재가 되는 것이 필수적임을 인식하였다. 그래서 리치는 1601년 존 헐리우드의 천체론에 대한 그라비우스의 주석서를 한문으로 번역한 “경천해”(經天該) 필두로, 유클리드 기하학 상권 6책 등 다수의 역산서를 저술하였다. 또한 여러 과학 기기들도 제조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자명종, 프리즘, 해시계, 모래시계, 동과 철을 써서 만든 지구의 등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마테오 리치가 중국 제일의 시계 생산 도시인 상해 시계 제조업자들의 수호신으로서, ‘리마두 보살’로 섬김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서양 과학이 전교 목적을 달성시키는 데 부합될 것이라는 리치의 생각은 주효하였다. 중국 선교의 성공은 물론, 이후 서광계, 이지조 등 중국의 저명한 실학자로서 먼저 서양 과학에 관심을 갖다가 중국 가톨릭의 주석 (柱石)이 된 인물들을 탄생시켰다. 당시 가톨릭 신자수는 리치가 조경에 있던 1584년말에 겨우 3명, 1605년에 1000명, 1610년에는 2500명이었다고 하니, 당시의 전교 여건으로 보아 리치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하겠다.

 

 

아담 샬 - 서양 과학의 중국 전수자

 

아담 샬 신부의 시기가 중국 교회의 절정기였다는 증거로는 그와 청조 순치 황제와의 개인적 교분을 들 수 있다. 즉 군신 관계를 초월하여, 순치는 아담 샬을 만주어로 존경하는 할아버지라는 뜻을 가진 “마파”라고 불러 지대한 신뢰를 보였고, 관례를 깨고 샬의 집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의 이런 신뢰는 명이 망하고 청이 들어서고 샬이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의 자연 과학 지식과 외교 능력의 소산이었다. 그중에서도 천문, 역법 분야에 공헌함으로써 선교사로서의 활동도 보장받았다.

 

천문 역법 - 중국에서는 천체의 정상 현상이 지상의 통치자에 대한 만족을, 이상 현상은 하늘의 불만 내지 경고로 풀이되어 그에 상응하는 조치가 요구되었다. 따라서 천문의 정확한 관측과 해석은 국정의 매우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또한 국가 경제의 근간인 쌀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기후와 절기를 잘 헤아려야 했으므로 통치자는 해마다 하자 없는 달력을 반포해야 했다. 따라서 중국의 천문 역법은 고대로부터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지만, 더 이상 진전된 역법 개선이 이뤄지지 않아, 일식 월식 등 중요한 의미를 지닌 천문 관측은 실측으로 이뤄졌다.

 

아담 샬은 입국할 때부터 중국에서 역이 지니는 중요성과 유용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1623년 북경에 도착하자 곧 유럽에서 갖고 온 수학 서적과 과학 기구들의 목록을 작성하여 명 조정에 바쳤다. 이를 계기로 천문 역법에 관심을 갖고 있던 호부상서는 월식을 예측해 줄 것을 청하였고, 이 예측이 정확하자 이듬해의 월식 측정도 요청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최초의 한문 역학 논문 두 권을 저술하여 예부에 진정하였다.

 

1629년 5월 1일의 일식을 천문대인 흠천감에서 잘못 추정하자 예부좌시랑 서광계는 서양 역법 도입의 필요성을 상소하였고, 황제의 허락으로 역법 개정을 위한 역국이 신설되었다. 아담 샬은 1631년부터 동참, 중국력을 개수하고, 천문 기기를 제작했으며, 서양 역서를 번역하였다. 또한 해시계, 망원경, 컴퍼스, 성구(星球), 천제고각도 관측기 등을 제작하여 황실에 바쳤다.

 

1644년 5월에 이듬해의 달력을 만들고, 6월에는 손상된 천문 기기를 보수하겠다는 상소를 올리며, 7월에는 서양 신법에 의해 수정된 시천력을 공표하게 하고, 같은 달 각종 천문 기기의 사용법을 설명한 “제기용법”을 조정에 올린다. 이처럼 짧은 기간 동안 많은 능력을 발휘한 그는 혼란기 질서 구축이 시급했던 청조에 의해 천문대장으로 임명받았다.

 

대포 제작 - 명 순정은 만주족을 막기 위해 아담 샬에게 대포 주조를 명했다. 하지만 샬은 병기 제조가 자신의 직업이 아니며, 실제 경험도 없다고 거절하였으나, 전교에 유익하고 관 종사자라는 입장 때문에 할 수밖에 없었다. 40근의 포탄을 적재하여 발포할 수 있는 대포 20대를 주조하였는데, 회고록에는 흥미로운 사실이 서술되고 있다. 중국인들이 화신에게 고사를 지내는 풍습을 이용하여 각 포 주조 때마다 재단을 설치하고 예수상을 건 뒤 샬이 미사 예복을 입고, 기술자들에게는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올리도록 했으며, 황제는 이것을 방해하지 말라고 명령했다는 것이다.

 

이어 황제는 경포 500대 주조를 명했고, 성공하자 매우 기뻐하면서 금자편액(扁額 ; 액자) 두 개를 하사했는데, 하나는 아담 샬의 재덕을, 다른 하나에는 천주교 도리의 진정(眞正)함을 적은 것이었다. 샬은 후자를 마카오에 보냈는데, 그곳에 있던 서양 신부, 관리, 상인들이 모두 기뻐 북치고 노래하고 축포를 쏘며 성당에 걸었다고 한다.

 

기타 봉사 - 명말 1636년 만주족에 의해 북경 성벽이 훼손되었을 때 자문을 주었으며, 1641년 북경성 외곽 보루의 형태를 정하면서 황제로부터 자문을 요청받고 삼각형의 모형을 만들어 주었으나, 건축 고문과 환관의 방해로 채택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건축 고문의 사각형 보루는 샬이 예견했던 대로 만주군의 사흘 공격으로 대파되었다.

 

청대에는 순치의 요청으로 섭정 도르곤을 위한 비석 건조시 사용될 기중기를 제조하였다. 이 기중기는 7만 근의 귀부(비석 받침돌) 위에 4만 근의 비석을 세울 수 있게 하였다.

 

1656년 동인도회사 총독 파견 화란 사절단을 맞아 통역 업무를 맡은 샬을 두고, 당시 대표였던 얀 니호프는 그의 여행기에서, 아담 샬이 긴 수염에 만주식으로 머리를 밀어 깎았으며 만주 복식을 하였는데, 완벽한 표준 독일어를 사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 조정의 아담 샬에 대한 높은 평가와 우대 이유는 그가 학식과 과학 기술 분야의 전문가였다는 데 있다. 이처럼 서양 신학문의 전달자로서의 인식은 샬의 이후 모든 선교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샬의 이러한 활동은 그가 회고록에서 고백하듯이 넓은 의미의 전교였다. 그가 조정에 많은 시간과 수고를 들였던 것은 전교의 자유와 안전을 보장받고, 또한 그것을 한걸음씩 넓혀 가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왕조 교체와 관계없이 그의 활동은 계속될 수 있었다.

 

이들 두 선교사의 활동 의의는, 첫째, 이들이 전파한 가톨릭은 일개 종파가 아닌 서구 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사상적 지주로서 이해되었고, 특히 지배 계층에 의해 논의되고 수용되었다는 데 있다. 둘째, 유럽의 자연 과학과 기술이 체계적으로 소개되고 활용되었는데, 특히 서양 역법의 역할은 컸다. 셋째, 서양의 실용적 학문은 명말 청초의 경세 사상의 출현을 자극하였고, 청 학문의 대표격인 고증학의 발생과도 관련된다고 여겨진다. 넷째, 이들의 활동은 인접국 특히 조선에도 서적이나 개인적 접촉으로 전파되었는데, 초기 신도들과 실학자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경향잡지, 1993년 8월호, 장정란 베로니카(성신여자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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