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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성체성사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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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4-24 ㅣ No.511

[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성체성사의 기억


차마 ‘안녕’이라고 발음하지 못하고 돌아서는 이별이 있다. 울어버릴까봐 염려스러워서일 게다. 더욱이 떠나는 이는 아는데 남는 이는 아직 눈치 못 챈 이별이 있다. 그때 떠남을 준비하는 사람은 더욱 비장해진다. 예수께서 수난을 당하시기 전날, 예수님의 이별 준비를 제자들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 절절한 자리에서 떠나실 예수님은 떠나지 않음을 약속하셨다. “예수ㅣ 면병을 가지샤 샤례 신 후 뎌들의게 어 주시며 닐 사 이는 내 몸이오 너희를 위 야 주 는것이니 너희는 나를 긔억 기로 이 례를 라 시고 져녁을 잡수신 후에  또한 잔을 가지시고 닐 사 이 잔은 너희를 위 야 흘릴 바 내 피로써 세운 신약이니라.”

이는 우리나라 박해시대의 신자들이 듣던, 그분의 되풀이하시는 약속이었다. 천주교는 서로 다른 여러 문화권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약속을 기억해 왔다. 그리하여 이스라엘과 전혀 다른 문화에 사는 우리에게도 이 약속이 전달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에게 전해진 이 예수님의 약속은 빵과 포도주가 없던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행해졌을까?

빵과 포도주는 미사 중에 성변화(聖變化)를 거쳐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화한다. 그러나 제병의 형태는 시기에 따라 변해 왔다. 초기에는 신자들이 가정에서 음식으로 먹는 빵의 일부를 가져와 미사 때 예물로 바쳤으므로 성체 축성용 빵(제병)은 가정 음식용 빵과 형태가 같았다. 미사예물이 빵 이외의 것으로 바뀌자 제병은 적당한 크기와 두께의 원형을 취하게 되었다. 11세기 이래 발효시키지 않은 빵을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면서(교회법 926조) 오늘날 사용하는 제병 형태가 차차 완성되었다. 제병은 예수님의 몸으로 화하기 때문에 그 제조과정에서부터 만드는 재료와 방법, 그리고 이를 만드는 사람들을 특별히 규정하게 되었다. 교회는 이렇게 예수님의 약속을 실행하기 위해 준비해 왔다.

우리나라는 제병이 이미 현재의 형태로 고정된 후에 교회가 세워졌다. 우리나라의 첫 신자는 북경에서 성체배령에 참여할 수 있었다.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들어오기 이전에 이승훈, 윤유일, 지황 등은 북경의 교회에서 성체를 배령했다. 그리고 초기 교회의 가성직 제도 아래에서도 신자들에게 ‘성체’를 영해 주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이후 성체성사는 특별한 은총의 성사로서 재확인되었다. 또 30여 년의 공백을 깨뜨리고 들어온 프랑스 신부들은 말도 익히기 전에 성사 받기를 열망하는 신자들과 마주해야 했다. 신자들은 고해를 하고 성체를 영하기 전에 자기들이 죽거나 선교사가 세상을 떠날까봐 겁냈다. 떼를 지어 성사를 받으러 오는 신자들에게 선교사들은 20년, 30년, 40년 동안이나 묵은 기나긴 고해를 준비하는 방법부터 가르쳐 주어야 했다. 1853년 성체를 모신 사람은 6,000명 이상이었다. 즉 성체를 축성하고 나누는 일이 박해시대 이 땅에서도 신부가 있는 한 행해졌다.

그러나 생활방식이 다른 우리나라에서 제병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우리나라 신자들도 교회 초기부터 현재와 같은 제병을 축성해서 성체를 영했음은 분명하다. 가성직제 때에도 이승훈 등은 북경에서 미사 참례 때 본 제병을 흉내 내어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초기 북경을 오가는 신자들은 선교사를 영입하고자 했고, 북경교구에서는 선교사가 입국하여 활동할 때를 대비하여 성물과 여러 도구를 마련해 주고 포도주 제조법 등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므로 주문모 신부가 들어오기 이전에도 신자들은 미사를 준비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었다. 또 주문모 신부는 입국한 후 최인길에게 미사성제를 드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시켰다. 그러므로 조선에서 제병은 일찍부터 만들어졌다고 보인다.

제병은 밀가루를 반죽해서 적당히 달구어진 쇠판으로 된 제병틀에 붓고 그것을 눌러 마치 얇은 ‘또르띠야’와 같은 모양으로 만든다. 물론 이때 밀가루 반죽이 눌리면서 옆으로 흩어져 나온 조각들은 잘 오려낸다. 다음으로 그것에 다시 습기를 약간 쐬어 적셔, 눅눅해진 상태에서 제병칼을 가지고 원하는 크기대로 떠낸다. 그리고 이 작은 제병들을 말려 보관해 둔다. 이렇게 발효시키지 않는 빵인 제병을 제조하는 기구나 재료는 비교적 간단하다.

제병틀은 접시에 손잡이가 달린 것 같이 생긴 두 개로 연결된 쇠판이다. 이렇게 생긴 제병틀은 성화나 성물처럼 낯선 모양이 아니었으므로 중국에서 갖고 들어오다 들켜도 그리 큰 장애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교회에서는 제병을 만들 때 사용하는 밀은 “순수한 밀을 재료로 하여 부패의 위험이 없도록 가장 최근에 제조된 것이어야 한다.”(교회법 924조 2항)고 규정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밀을 재배했기 때문에 밀을 구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고 보인다. 한국전쟁 때 옥사덕에 수용되어 철저히 감시당하며 강제 노동을 하던 독일인 수도자들이 밭둑에 흘린 밀알들을 주워 모아 제병을 만들었던 일을 생각해 보면 제병을 만드는 작업이 어렵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대구대교구는 신앙의 자유가 온 이후에 설정되었다. 당시는 제병제조가 박해시대보다 훨씬 용이한 때였다. 관덕정 순교성지에는 드망즈 주교가 사용했던 제병틀이 보관되어 있다. 아마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가 진출하기 전에는 주교관에서 제병을 직접 만들었던 것 같다. 그 후에는 샬트르성바오로수녀원에서 제병을 제조했다. 그리고 해방 이후까지도 큰 본당에서는 필요한 제병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 이후 관상수도회에서 교회성물과 제병을 만들기로 함으로써 대구대교구의 제병은 대구가르멜수녀원에서 만들게 되었다. 대구가르멜수녀원은 1962년 오스트리아 마리아젤 가르멜에서 대구에 진출한 후 제병과 전례 초를 제작하며 관상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1996년 상주 가르멜수녀원을 설립하면서 그곳에서 제병을 만들었다. 그러나 1년 전인 2010년부터 대구가르멜수녀원에서는 다시 대구대교구에서 필요한 제병을 만들고 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제병틀도 변했다. 일제시대까지는 무쇠나 알루미늄으로 만든 제병틀을 불에 달구어 사용했다. 그러나 1962년 대구가르멜수녀원에서 사용하던 제병틀은 전기 콘센트와 연결되어 제병을 굽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가장자리로 삐져나온 반죽덩어리는 구리칼로 직접 잘랐다. 제병에 적당한 습기를 주기 위해서는 커다란 통에 제병을 담고, 제병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위에 물수건들을 얹어 두었다. 그 눅진 제병 판을 둥근 모양의 제병칼로 찍어 내었다. 이러한 일을 하다가 어깨를 상한 수녀들도 적지 않았다 한다. 전기로 제병판만 굽던 제병기는 아직 상주가르멜수녀원에서 볼 수 있단다.

2010년 대구가르멜수녀원에서는 다시 제병을 만들게 되면서 제병틀을 마련해야 했는데, 이때 자동기계들을 들여왔다. 제병 반죽의 가장자리를 자르는 일, 제병에 습기를 적당히 넣는 과정, 제병을 용도대로 자르는 일, 제병을 세어 포장하는 일들이 자동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축성된 제병은 바로 예수님의 몸이다. 그리하여 성체는 신자들에게 신앙생활의 힘을 주었다. 박해시대 이순이 누갈다는 주문모 신부로부터 성체를 배령한 이후 그가 마음을 쓴 것은 오직 성체의 효과를 보존하려는 것이었고, 그의 유일한 원은 자기 영혼을 모든 덕행으로 꾸미는 것이었다. 그는 한 번 받은 성체성사의 힘으로 동정 생활과 순교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는지 모른다.

30여 년의 박해를 뚫고 입국한 모방 신부는 일 년여의 과도한 성무집행으로 극히 쇠약해졌다. 그는 1837년 7월 사목방문을 하러 남쪽지방으로 갔다. 그러나 도착하자마자 심한 열병에 걸려 빈사 상태에 빠졌다. 그는 서울로 ‘운반되어’왔고, 사목방문을 나갔던 샤스땅 신부가 돌아왔다. 백약이 무효하고 상태는 절망적이었다. 신부가 단 두 명밖에 없던 조선에서 샤스땅 신부는 동료에게 종부성사를 주어야 했다. 그런데 모방 신부는 ‘주님의 성체가 임종하는 선교사의 방에 나타나셨을 때 마음속에 오래지 않아 나으리라.’는 확신을 느꼈다. 과연 이 순간부터 열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3개월쯤 지나 건강이 회복되어 다시 포교 길을 떠날 수가 있었다.

박해시대 성체를 영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그나마 행운을 잡은 이들이었다. 최양업 신부는 밀고를 당해 그 전날 고해를 하고 준비했던 모든 신자들이 성체를 모시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그 곳을 떠나야 했다. 성사를 받지 못한 신자들이 그 다음 날 험한 길을 걸어서 자기네 마을에서 백 리나 떨어진 공소까지 신부를 따라갔다. 그러나 마을에서 나올 수 없었던 사람들은 지극히 슬퍼할 뿐이었다. 물론 사람들은 성체를 보호하는 일을 자신들의 목숨을 지키는 일만큼 중하게 여겼다. 북한에 공산정권이 세워질 무렵, 함경남도 덕원의 베네딕도수도원은 하루하루가 불안한 날들이었다. 성당을 지키던 사제는 수녀와 신학생을 불러 자신이 갑자기 잘못되면 성체부터 보호하라고 신신당부했다. 불행히도 그 사제는 물을 것이 있다며 한밤중에 들이닥친 공산당에게 붙잡혀갔다. 이 상황을 창문으로 목격한 수녀는 그 길로 캄캄한 성당 안에 몰래 들어가 벌벌 떨면서 감실 안에 모셔진 성체를 다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는 물 한 모금 없이 그 많은 성체를 한번에 다 영할 수 있었던 일이 기적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원산베네딕도수녀원에 공산당이 한밤중에 들이닥쳤을 때도 수녀들은 옷을 갈아입는다고 시간을 끌면서 성체를 나누어 영하는 일부터 했다.

몇 년 전에 춘천에 있는 간성성당이 불에 탔다. 신부는 불길이 잡히자 감실 안에 있던 성합부터 찾았다. 뜨겁게 달구어진 성합을 내오기는 했으나 열어볼 용기가 없어서 그는 근처에 있는 다른 신부께 연락했다. 이웃 신부가 와서 성합을 열었는데, 흰 보로 덮어놓은 성체는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다. 이는 예수님이 스스로를 보존하시어 약한 우리에게 기적을 보이신 일일지 모른다. 이번 예수 부활 대축일에 성체를 모시는 모든 이들에게 이 땅에서 이루어진 성체성사의 그 긴 믿음이 특별히 화살처럼 꽂히기를 빈다.(도움 : 대구가르멜수녀원, 관덕정순교성지, 이예숙)

* 김정숙 교수는 영남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위원, 교구 100년사 편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월간빛, 2012년 4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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